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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의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아가 8:6-7)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로마서 8:38-39)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린도전서 15:55)
1. 죽음, 사랑을 집어삼키는 절대적 절망의 심연
인간이 직면한 가장 폭력적이고도 절대적인 절망은 바로 ‘죽음’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는 죽음을 가리켜 인간을 근원적인 불안과 떨림으로 몰아넣는 '절망의 심연'이라고 통찰했습니다. 죽음이 이토록 두렵고 끔찍한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생물학적 호흡의 정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땅에서 맺어온 모든 ‘관계와 사랑의 완전한 단절’을 선고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렬히 서로를 사랑하고, 아무리 거대한 권력과 부를 축적하며 견고한 성을 쌓아 올린다 해도,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순간 그 모든 것은 무위로 돌아갑니다. 에로스(Eros)적 사랑은 죽음이라는 절대 권력 앞에서 무참히 짓밟히고 맙니다. 무덤의 차가운 비석 앞에서는 그 어떤 뜨거운 맹세도, 뼈를 깎는 헌신도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인간의 역사는 결국 죽음이라는 거대한 아가리를 향해 끝없이 행진하는 비극적 장송곡과 같습니다. "모든 것이 헛되다"는 전도자의 탄식은 바로 이 죽음의 필연성 앞에서 터져 나오는 인간 내면의 가장 정직하고 처절한 고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고 아리마대 요셉의 차가운 돌무덤에 갇히셨을 때, 제자들은 이 짙은 죽음의 허무 속으로 침몰했습니다. 그들이 3년 반 동안 따랐던 위대한 스승, 메시야라 믿었던 분조차 죽음의 권세 앞에서는 속수무책으로 패배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무덤을 가로막은 거대한 돌문은, 유한한 인간이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철학적이고도 실존적인 한계 그 자체였습니다. 로마의 권력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승리했다고 믿었습니다. 죽음이 마침내 사랑을 묻어버렸다고 확신했습니다.
2. 아자(Azzah) : 스올을 찢고 나오는 맹렬한 사랑의 불꽃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이성과 철학이 도달한 그 절망의 끝자리에서, 우주를 뒤흔드는 반전을 선포합니다. 아가서 8장 6절은 이 거대한 반전의 서막을 여는 위대한 예언적 찬가입니다.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아자, Azzah), 질투는 스올(음부)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여기서 '강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아자(Azzah)'**는 꺾이지 않는, 맹렬하고도 무시무시한 힘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이 따뜻하고 부드럽기만 한 것이 아니라, 죽음의 권세와 정면으로 맞붙어 싸우는 맹렬한 전사의 불꽃과 같다고 선언합니다. 스올, 즉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결코 내어주지 않는 죽음의 세계조차도 하나님의 이 '아자'의 사랑 앞에서는 그 기세를 잃고 맙니다. 많은 물과 거대한 홍수, 곧 인류를 덮치는 시대의 핍박과 환난, 심지어 지옥의 권세라 할지라도 이 여호와의 불꽃 같은 사랑을 결코 꺼뜨릴 수 없습니다.
부활은 단순히 한 인간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생물학적 소생(Resuscitation)의 기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창세 전부터 시작된 언약의 사랑(헤세드)과, 유한의 틈새를 뚫고 들어온 성육신의 사랑, 그리고 십자가에서 쏟아부어진 자기 비움의 사랑(아가페)이 마침내 죽음의 목을 짓밟고 일어선 우주적 승리의 확증이자 궁극적 증명입니다. 하나님은 죽음이라는 인류의 가장 강력한 원수를 십자가의 제단 위에서 사랑의 불길로 완전히 태워버리셨습니다. 부활의 아침, 텅 빈 무덤은 "내 사랑은 결코 죽음에 갇히지 않는다"는 창조주의 장엄한 선포입니다.
3. 영원한 단절을 부수는 압도적인 공급과 충만
이 부활의 생명이 우리에게 증명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의 웅장한 대결론에서 이 부활의 신앙이 가져다주는 절대적이고도 파괴적인 선언을 토해냅니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바울은 지금 로마 제국의 칼날과 사자 밥이 되어가는 순교의 위협, 그 극심한 실존적 공포 한가운데 서 있는 성도들을 향해 외치고 있습니다. 세상의 철학은 죽음이 모든 것을 끊어낸다고 위협하지만,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에게 죽음은 더 이상 '단절'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썩어질 육신의 장막을 벗고,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영광 안으로 온전히 편입되는 영광스러운 '관문'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우리가 믿는 복음의 본질은 무언가를 조금씩 나누어 받는 알량한 분배의 차원이 아닙니다. 무덤을 깨뜨리신 부활의 생명은,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헐떡이는 우리 영혼의 텅 빈 심연을 남김없이 채우고도 흘러넘치는 압도적인 **'공급과 충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것은, 그분의 생명이 참 포도나무의 진액처럼 오늘 우리 영혼의 핏줄을 타고 거침없이 흘러들어오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나의 어떠한 자격이나 공로가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맹렬한 생명이 내 안에 거하시기에 우리는 사망의 골짜기 한가운데서도 결코 멸망할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4. 사망을 향한 거룩한 조롱, 그리고 영원한 승전보
위대한 부흥사 D.L. 무디(Dwight L. Moody)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을 때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어느 날 언론에서 'D.L. 무디가 죽었다'는 기사를 읽거든, 그 말을 단 한 글자도 믿지 마십시오. 나는 지금보다 훨씬 더 생생하게 살아 있을 것입니다. 죽음은 결코 사랑을 묻을 수 없습니다. 부활의 아침은 사랑의 영원한 승리 선언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은 마침내 사망을 향해 거룩하고도 통쾌한 조롱을 퍼붓습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일찍이 인류 역사상 그 어떤 철학자도, 그 어떤 제국의 황제도 감히 죽음을 향해 이런 조롱을 퍼붓지 못했습니다. 오직 십자가의 처절한 죽음을 통과하여 부활의 영광으로 나아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만이 부를 수 있는 영원한 승전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치열한 영적 전투의 최전선에 서 계신 동역자 여러분. 오늘 우리의 삶을 짓누르는 허무와 절망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육신의 질병입니까? 사업의 실패입니까? 아니면 사랑하는 이와의 가슴 찢어지는 사별입니까? 세상은 그것들이 우리의 끝이라고, 이제 모든 희망의 문이 닫혔다고 속삭일 것입니다. 그러나 빈 무덤을 향해 눈을 드십시오. 죽음조차 찢어발긴 그 맹렬하고도 찬란한 부활의 사랑 앞에서는, 우리의 어떤 고난도, 심지어 숨이 멎는 죽음의 순간조차도 결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그 맹렬한 추적을 끊어낼 수 없습니다.
부활은 신학 교과서에 갇혀 있는 화석화된 교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늘 지금 이 순간, 좌절과 눈물 속에서 다시 일어설 힘을 잃어버린 우리 내면의 가장 깊은 곳을 뚫고 들어와, 창조주의 생명으로 호흡하게 만드는 압도적인 공급과 충만의 사건입니다. 썩어질 유한의 세계를 초월하여 다가오는 이 무한한 부활의 생명을 가슴 깊이 들이마시십시오. 어떤 절망의 무덤도 결코 우리를 가둘 수 없음을 굳게 믿고, 사방이 우겨쌈을 당한 것 같은 현실 속에서도 마침내 터져 나오는 부활의 찬양을 부르며 승리하는 참된 신앙의 길로 걸어가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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