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전 1: 3 믿음 사랑 소망 - 살전 1: 4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
살전 1: 3 믿음 사랑 소망 -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삶속에서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가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기뻐하고 있다.
본 절에 나오는 '믿음'과 '사랑'과 '소망'은 초대 교회 당시 널리 사용되던 어휘로서 자주 한 단위로 결합되어 언급된다(5: 8. Bruce, Hunter).
* 롬 5: 1-5 -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 고전 13: 13 -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 갈 5: 5-6 - 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 골 1: 4-5 - 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5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 히 6: 10-12 - 10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11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12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 히 10: 22-24 - 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 벧전 1: 21-22 - 21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이 세 가지는 서로 유기적 관계에 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성도들에게 부여하신 삶의 진수(眞髓)를 이루는 덕목들이다(Bornkamm). 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 덕목들은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의 영역을 지배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들이다.
1] 너희의 믿음의 역사(*, 투 에르구 테스피스테오스)와
이 말은 '믿음 가운데서 우러나온 너희의 역사'란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Morris).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행하신 구속 역사에 근거한다. 이러한 믿음은 필연적으로 삶 전체를 변화시키는 바,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룩하신 계획을 이루기 위해 적극적으로 봉사하는 삶을 살게 한다.
'믿음의 역사'를 직역하면 '믿음의 일'인데, 이 문구에 대하여 주석가들의 의견이 같지 않으나 가장 합당한 해석은 마이어(Meyer)의 것이다. 그는 '믿음의 일'이란 말은 진정한 믿음이 필연적으로 산출한 선한 행사(行事)를 의미한다. 이 해석에 의하면, 믿음은 덕행자의 열매로 나타나는 것이다.
2] 사랑의 수고(*, 투 코푸 테스 아가페스)와
사랑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 그의 백성간의 우호적인 관계를 나타내 주거니와 믿음과 마찬가지로 실천적 행위를 동반한다.
수고는 사랑의 특성이므로 여기서 '사랑의 수고'라고 하였다.
수고로운 봉사를 기피하는 자는 진정한 사랑의 소유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수고'는 사랑의 진정성을 나타내는 증표이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병자와 굶주린 자를 돕기 위해 자선을 행하였으며, 모진 박해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열성적 헌신을 다하였다(Hendriksen). 이것은 사도 바울이 다른 곳에서 표현한 바, 복음을 위한 수고들이다(3: 5).
* 고전 15: 10, 58 - 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 고후 10: 15 - 우리는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믿음이 자랄수록 우리의 규범을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풍성하여지기를 바라노라.
* 갈 4: 11 -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 빌 2: 16 -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궁극적인 승리의 날을 바라보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는 자들은 현실 속에서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온다 해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인내를 지니고 있다.
'인내'로 번역된 헬라어 '휘포모네스'(*)는 진취적이고 용기 있는 그리스도인의 특질로서 용감한 군인이 극한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버텨나가는 기상(氣像)을 의미한다(Findlay).
그리스도인들은 재림의 소망을 가지고 있으므로 막다른 골목처럼 보이는 어려움 가운데서도 결코 낙심치 아니하고 인내로써 전진해야 한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인내할 수 있다. '인내'는 소망의 필연적 산물이다.
4]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2절에 나오는 바울의 중보기도의 때를 말해준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에 대한 기억이 자주 떠올랐던 까닭에 '끊임없이'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특히 바울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그의 기도가 신실함을 나타내준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어떤 자들은 자신들을 대하는 바울의 동기(動機)에 대해 의심을 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바울은 본 서신의 서두에서부터 그러한 의혹을 일소하고자 한다(2: 5, 10. 3: 9, Thomas).
살전 1: 4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 -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
바울은 2절에서 항상 하나님께 감사함을, 3절에서는 감사의 구체적인 원인을 그리고 본 절에서는 그러한 감사의 긍극적인 동기를 말하고 있다.
1]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바울은 '형제들아'(*, 아델포이)란 호칭을 즐겨 사용하였다. 데살로니가 전, 후서에서만도 21회나 사용하고 있다.
'성도'란 말이 하나님과 관련된 표현이라면, '형제'란 말은 인간관계에 대한 표현으로서 예수를 중심으로 모든 성도들이 하나 되어 있음을 나타내준다.
* 마 12: 46-50 - 46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47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하니 48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49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 막 3: 31-35 - 31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32 무리가 예수를 둘러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33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34 둘러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 눅 8: 19-21 - 19 예수의 어머니와 그 동생들이 왔으나 무리로 인하여 가까이 하지 못하니 20 어떤 이가 알리되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을 보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
'형제들아'라는 호칭은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이란 말과 연결됨으로써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믿음 위에 굳게 서 있음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사랑하심을 받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가페메노이(*)는 현재 완료 분사로서,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이미 완성되었으며 현재에도 여전히 행사(行使)되고 있음을 나타내주기 때문이다.
이 문구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구원 받도록 선택된 사실을 포함한 말이다. 하나님의 선택에 포함된 자를 가리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자'라고 말한 것은 롬 9: 13(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에도 계시되어 있다.
2]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택하심'(*, 에클로겐)이란 신구약 전체에 면면이 흐르는 성경의 위대한 개념이다.
인류의 조상 아담이 창조되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의 성도들과 그 외의 모든 성도들을 그의 주권으로 택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 엡 1: 4 -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혹자는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을 택하신 것은 그들이 회심(回心)했을 때이거나 그 이후의 일이었다고 주장한다(Airhart).
그러나 바울은 데살로니가의 형제들이 택하심을 입은 것은 과거(창세전)의 일로서, 그 택하심은 결코 인간의 어떤 응답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에 의한 것임을 말하고 있다.
디벧리우스(Dibelius)는 이 말이 데살로니가 사람에 관한 하나님의 역사상 행동(歷史上 行動 = Geshichtlichen Akt) 곧, 그들이 회심(回心)하고 주님을 믿어 교회에 수용(受容)된 것을 반드시 하나님의 초역사적(超歷史的) 행동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온 것은 그들이 창세전에 구원 받기로 선택되었던 증거이지 선택 그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