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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의 역사
[ 내용]
[1] 고조선은 없다?
-한 고교생의 국립중앙박물관 고대사 관람 소감-
[2] 고조선의 역사 인식
* 앞에 < 고조선은 없다? > 에 대하여 이해를 돕기 위해 정리해 보았습니다.
이 재 익 (시인, 전직 역사교사) 정리
고조선의 영역도(노랑색 부분)
고조선 영역에서는 대개 비파형 동검이 출토된다.
[1] 고조선은 없다?
-한 고교생의 국립중앙박물관 고대사 관람 소감-
♠ 국사편찬위원회 묻고답하기에서 / ♠ 작성 ; 2002-11-18
오후 3시에 국립중앙 박물관에 갔더니 날도 추운데 방패 갈면서 고생하는 전경들 있고 [더 내셔널 뮤지엄 오브 코리아] 라는 단체가 고조선의 존재를 부정하더라. 우리나라 역사 반만년이 아니라 2000년이라고 해도 뭐 그다지 상처 안 받아!
<프리히스토리 앤드 프로토 쓰리 킹덤즈> (선사시대와 원삼국시대) -동아시아 3국의 역사를 비교해 놓은 표가 있는데 맨 아래 일본을 보면, 죠몽시대, 야요이시대 등등 시대구분이 아주 친절하였다. 예수님 태어난 뒤에야 땅파서 농사짓던 애들 역사야. 맨 위를 보면 우리 동방의 로마-유사이래 200년 빼고 내내 세계 최강대국의 위치를 고수해온 되놈 동무들. 하(夏), 상(商), 은(殷), 주(周), 춘추전국시대, 진(秦), 전한(前漢), 신(新)... 참 친절하지. 유물도 번쩍 번쩍해. 그리고 그 가운데 박혀 있는 자랑스런 우리 배달겨레의 역사.
구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청동기 시대/초기 철기 시대 ........
그리고 웬 유인원 아저씨 해골바가지 몇 개랑 토기랑 돌멩이 잔뜩 구경하고 나오면 청동기 시대 나오지
우리나라는 이상한 게, 청동기시대라면서 석기가 더 많아. 솔직히 터놓고 말해서, 같은 시대의 고대 그리스나 페르시아와 비교해서, 원시시대 분위기 팍팍 풍기지.
뭐, 그거야 우리가 원래 그렇게 살아온 거니 그렇다 쳐. 그리고 원삼국시대 들어가기 전에 친절하게 아기자기하게 작은 마네킹들로 청동기 시대를 재현한 게 있지. 다 가죽옷 입고 머리 산발하고 맨발에 뭐 신석기 시대 모형하고 거의 비슷하더라.
여기서 뭔가 이상하드라고. 고조선 성립이 기원전 2333년, 한반도에 청동기 들어온 게 기원전 10세기 경이야. 만주는 이보다 빠른 기원전 13세기 경이지. 그러니까 솔직히 이 연대 자체부터가 엉터리야. 고조선이 청동기 문명을 바탕으로 세워졌다면 그 성립 연대는 아무리 빨라봐야 기원전 13세기 경이며, 지금과 같이 기원전 2333년을 고수하고 싶다면 그보다 이른 시대의 청동기가 발견되어야 하지.
바로 옆 중국의 역사를 보건대, 바로 옆에 붙은 우리도 사실 기원전 2000년대에 성립했을 개연성 충분하지(그렇다고 제발 한단고기는 들먹이지 말자. 그건 한국의 일본서기다. 우리까지 역사에 콤플렉스 가질 필요는 없잖아?).
그렇지만 어쨌거나 현재까지의 연구결과를 받아들이자면 우리 역사는 잘 해봐야 3000년이야. 삼국유사 연대 자체가 뭐 원래 학계에서도 그다지 믿지 않지만 유일하게 고조선 연대만 목숨걸고 고집하드라고. 뭐, 반만년 아니라고 그것 거짓이었다고 너무 기죽지 말자.
역사 3000년이면 세계 랭킹이야. 그리고 뭐 역사 길다고 밥 먹여 주나?
그런데 어쨌거나, 기원전 1000년경이면 옆동네 중국에서 뭘 하고 있었느냐하면
천하를 평정하고자 볶고 싸우고 제자백가가 나왔다. 영웅호걸이냐 똑똑한 관리냐 시짓고 생난리 다치고 놀고 있었지.
하여간, 요지는, 국사책을 받아들이자면 그놈의 청동기시대 모형은 고조선 성립 1000년 뒤의 모형이니 마땅히 고도로 발달한 문명사회를 묘사하고 있어야 하며,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그 모형들은 최소한 가죽옷은 입고 있지는 않았어야 했다는 거지.
그때는 이미 기본적인 의관체계가 갖추어진 이후의 일이니까. 어쨌거나 여기서도 고조선의 존재는 코빼기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수많은 미송리식 토기, 고조선식 동검, 고인돌에 대해서는 고조선과 연관된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원삼국시대로 넘어가. 여기서부터 좀 유물이 유물다워지기 시작하지. 그런데 화려하고 정교한 것은 확인해보면 다 낙랑 유물이야. 내가 보기에 그 유물들은 다 수입품이야. 그런데, 여기 관람하면서 주의할 점은, 출처 불명의 유물이 많으니 너무 감동하지 말고 주의하라는 거야. 우리 유물 사이사이에 아무 얘기도 없이 외국 유물사진이 막 끼어들어가서 친절하게도 우리에게 같은 시대의 외국 유물과 비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그런데 요 옆에 붙은 출처를 보면, (특히 중국의 경우) 국적은 표시되어 있지 않고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지명, 꼭 우리유물인 것처럼 착각하게 돼. 설명 꼼꼼하게 읽지 않으면 남의 것보고 너무 감동 받아 돌아가기 십상이야.
여기서는 친절하게도 삼한에 대한 내용을 기술하고 있지만 고조선은 쥐뿔도 없다. 더욱 기막힌 것은, 거기 붙은 삼한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 '삼한은 삼국의 모태가 되었으며 연대상으로 기원전후에서 기원후 300년대에 해당한다'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 기원전에 건국됐지. 그런데 300년간이나 삼한과 초기 삼국이 공존했나?
사실 그건 맞는 말이기도 해. 마한이 백제에 완전히 병합되는 건 4세기 근초고왕 때거든. 그런데 말야, 우리 국사 교과서엔 삼한은 엄연히 고조선과 동시대의 세력인 한반도 남부의 진의 일원으로 묘사되어 있지. 연대상으로 괴리가 느껴지지 않아?
잘 읽어보면, 한국인인 내가 봐도 '아, 우리 역사는 기원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는구나' 하는 느낌을 강하게 받게 돼. 하물며 외국인들이야! 게다가 일본사람들은 자기네보다 별로 길지도 않은 한국역사를 보면서 자랑스러워하고 고대 삼국이 아스카 문화에 영향을 주었다는 말을 엉터리로 간주하고 임나일본부설을 확신하게 되는 근거로 삼게 될 수도 있지.
그렇지만 그래도 역시 고조선은 최소한 기원전에 500년 이상 건재해 왔으며 아마 1000년은 될거야. 그게 맞다면 나라의 국립 '중앙' 박물관이 자국의 역사를 그런 식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데에 통탄해야 할 것이며, 그게 아니라면, 왜 그럼 학생들에게는 그런 식으로 국사를 가르쳐?! 민족의 자긍심을 기르기 위해 진실을 은폐하나?
폐관시간인 5시가 가까워오자 거의 10분에서 20분 전부터 막 방송을 해대는데 관람을 방해하더군. 난 배짱으로 5시 끝까지 채우고 나왔는데, 숫제 사람을 쫓아내는 식이라 기분이 별로 안 좋았어. 어쨌건 나는 국립중앙박물관이 고조선을 체계적으로 부정하고 - 일부러 그런 건 아니라도 어쨌거나 난 2시간의 관람하는 동안 고조선의 존재에 대한 어떠한 내용도 발견할 수 없었어 - 우리 역사를 기원후에서 시작하는 것처럼 묘사했다는데 너무 화가 나서 거기 사무실로 가서 따지려는 생각도 들었다. ●
[2] 고조선의 역사 인식
* 앞에 < 고조선은 없다? > 에 대하여 이해를 돕기 위해 정리해 보았습니다.
이재익 정리
[ 차 례 ]
가. 고조선의 명칭
나. 고조선의 기록
다. 기자조선의 존재
라. 단군설화 이해
마. 단군설화와 일연
바. 고조선 영역
사. 국조 단군 숭배 의의
아. 재야 사학자들의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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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 고조선 명칭
● 실제로 고조선이란 나라 이름은 없고, 고조선이란 후세에 만들어진 명칭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원래는 위만조선과 구분하였고, 현재는 이성계의 조선과 구분하고 있다.]
▶ 고조선이 처음 역사서에 등장한 시기는 기원전 7세기초이다. 이 무렵에 저술된 《관자(管子)》에 '발조선(發朝鮮)'이 제(齊)나라와 교역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또 《산해경(山海經)》에는 조선이 보하이만[渤海灣] 북쪽에 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들 기록에 나타난 조선은 대체로 랴오허[遼河] 유역에서 한반도 서북지방에 걸쳐 성장한 여러 지역집단을 통칭한 것이다. 당시 이 일대에는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문화를 공동기반으로 하는 여러 지역집단이 성장하면서 큰 세력으로 통합되고 있었다. 단군신화는 고조선을 세운 중심집단의 시조설화(始祖說話) 형식으로 만들어졌다가, 뒤에 고조선 국가 전체의 건국설화로 확대된 것으로 여겨진다.
▶ 단군이 세운 나라는 '조선'이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옛'古'자를 붙여 '고조선'이라고 부른다. '고조선'이라는 명칭은 <삼국유사>(1281년경) 에서 처음으로 나온다. 그런데 삼국유사를 쓴 일연은 '고조선'이란 제목 아래에 '왕검조선'이라고 주기하여, 고조선이 곧 단군조선임을 분명히 해 두었다. 즉, 그는 단군신화에 나오는 조선을 '위만조선'과 구분하려는 의도에서 '고조선(옛조선)'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제왕운기>에서는 기자의 조선을 '후조선'이라고 하여 단군조선 및 위만조선과 구분하였다. 그리고 <세종실록> 지리지에서는 단군의 조선을 '전조선', 기자의 조선을 '후조선', 위만의 조선을 '위만조선'이라 부르고 있다.
원래 '고조선'이란 명칭은 이성계의 '조선'과 구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기자조선, 위만조선과 구분하기 위하여 사용하였다. 오늘날의 고조선 명칭은 이성계가 세운 '조선'과 구별하여 쓰고 있다.
◆ 나. 고조선의 기록
● 한국사에서 그렇게 중요한 고조선의 역사가 고려시대에 기록된 것이 현재에 남아 있는 최초의 사서라니 상식적으로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
[전란으로 없어지고, 일제가 모두 거두어 갔다는 설도 있다]
▶ 옛날에 역사를 기록했다고 하여 그것이 반드시 현재에까지 전해지는 것은 아니며, 마찬가지로 기록이 현재에 전해지지 않는다고 하여 과거에 역사기록이 없었다고 볼 수는 없다. 우리에게는 현재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고대의 문자기록이 거의 없다. 그러나 고구려의 <유기> 100권이 있었고, 그것을 줄여 만든 <신집>, 백제의 역사서 <서기>, 그리고 거칠부가 편찬했다고 하는 신라의 <국사> 등의 존재를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들 중 현재에 전해지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삼국유사>의 고조선 관련 기록에 '고기(古記)'가 자주 인용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어떤 형태로든 기록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여겨진다. 수많은 전란(戰亂)을 거치면서 대부분 소실되고 삼국유사 등 일부 서책에만 남았다. 이 점은 우리민족에게는 큰 아쉬움이다.
▶ 일제때 조선총독부가 한민족의 혼을 말살하기 위해 단군조선에 관한 책들을 몽땅 약탈해 태워버렸다는 설까지 있다. 해방후 출간된 '군국일본조선강점 36년사' 나 '제헌국회사' 등에 따르면, 조선총독부 초대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의 명령에 의해 1910년 11월부터 이듬해 12월말까지 1년2개월 동안 고사서 51종20여만 권을 약탈당했으며 '단군조선' 에 관한 서적 대부분이 이 때 소실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런 가운데 최근 "일본 궁내청 쇼료부(書陵部 : 일명 황실도서관)에 '단군조선' 과 관련된 책들이 쌓여있다" 는 새로운 주장이 나와 관심을 끈다. 처음 이 주장을 한 사람은 1962년에 사망한 박창화(朴昌和)씨. 1933년부터 12년간 쇼료부에서 우리 상고사관련 사서를 분류하는 일을 담당했던 朴씨는 해방후 이 사실을 최기철(崔基哲)서울대 명예교수(담수생물학연구소장)에게 털어놨으며, 최근 崔교수가 이 사실을 언론에 공개했다.
◆ 다. 기자조선의 존재
● 古朝鮮, 箕子朝鮮, 衛滿朝鮮은 별개인가 하나인가?
[ 기자조선은 부정하고, 고조선이란 단군조선과 위만조선을 묶어서 말한다]
▶ 고조선이나 위만조선은 그 실체에 의심이 없지만, 기자조선에 대해서는 그 실재 자체를 둘러싸고 논쟁이 있다. 고려와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은 기자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는 전설(기자동래설)을 그대로 믿었다. 그리고 기자를 우리나라에 예의범절을 가르친 성현으로 숭배하면서, 우리는 그 교화를 입은 문화국가임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이러한 인식은 우리 나라가 중국과 대등한 문명국이라는 '소중화(小中華)' 의식을 갖게 하였으며, 대외적으로는 중국에 대한 사대를 정당화해주는 기능을 하였다.
▶ 20세기에 접어들어 민족의식이 높아지면서 기자조선의 실재는 부정되고 있다. 기자 관련 기록들이 모두 기원전 3세기 이후에 씌어진 것들이며, 고고학적으로도 기자 집단의 원래 거주지인 황하 유역과 고조선 등 동북아시아 지역 사이의 청동기문화를 연계시켜 줄 만한 유물들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는 문제점들이 지적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기자동래설은 기원전 3-2세기 무렵 한나라 사람들이 자신들의 고조선 침략을 정당화하고 고조선인의 반발을 무마시키기 위해서 만들어낸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 1970년대 이후 한국 민족의 기원을 종족이동이라는 시각에서 바라보게 되면서 기자조선의 실재를 긍정적으로 보는 견해도 제기되었다. 즉, 기자집단은 초기에는 화북지방에 있다가 뒤에 점차 동으로 조선 방면까지 이동하여 기자조선을 형성하였다는 것이다. 이 때 기자는 주나라 계통과는 구별되는 동이족 가운데 하나인 기자족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 견해 역시 고고학적으로 증명되지 않는다는 결점을 가지고 있다.
▶ 이 밖에도 근현대의 한국학계에서는 기자조선의 실체를 둘러싼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기자조선을 한국과는 무관한 주나라의 일개 제후국으로 이해하는 견해, 기자조선을 중국과는 무관한 조선 토착의 일개 정권으로 이해하는 견해, 기자조선을 중화주의적 관념이 낳은 가공적 존재로 이해하는 견해, 혹은 기자조선을 중국 방면에서 조선 방면으로 이동한 유망민 집단으로 이해하는 견해 등이 그것이다.
▶ 기자에 관한 기록으로는
-사마천(145?-86 B. C)의 <사기 송세가> 에
' 기자는 은나라 폭군 주왕의 친척으로 간언을 하여도 듣지 않자 미친 체하고 숨어살았다. 주 무왕은 주왕을 몰아낸 다음 기자를 찾아 홍범에 기록되어있는 아홉까지 정치 도덕을 묻고 조선후에 봉했으나 기자는 신종하지 않았다. 기자는 5천명의 중국인을 거느리고 조선에 들어가 평양에 도읍 하였다. 중국의 예악 문물 제도를 보급시키고 8조법금을 두었다. 재위 40년 주 성왕 2년 무오에 93세로 돌아갔다.'
-복생의 <상서대전>에는 '무왕이 은을 멸하고 기자를 석방하자 기자는 조선으로 도망갔다. 이에 무왕이 기자를 조선후로 봉했다.'
-반고의 <한서지리지 연조> : '은이 쇠하자 기자가 조선에 가서 예악을 가르치며 8조법금을 행하였다. 라고 되어 있다.'
★ 남는 의문 : 기자조선은 부정하면서 기자가 가르쳤다는 팔조법은 교과서에서도 강조되고 있다는 점.
◆ 라. 단군설화 이해
● 단군을 우리의 시조라고 야사가 아닌 정사로 취급한다면, 우리 모두는 곰의 새끼란 말인가, 이게 말이나 되는가?
[환웅은 천신숭배 부족, 웅녀는 곰토테미즘, 결혼은 부족연합, 단군왕검은 재정일치군장]
▶ 곰이 변신하여 웅녀가 되었다는 것은 누구라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다. 웅녀의 존재를 곰을 조상신으로 숭배하는 신석기 토테미즘 문화로 보는 견해, 지모신(地母神)․수신(水神)과 같은 풍요와 다산의 신으로 보는 견해, 산신 또는 산신의 사자로 보는 견해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곰이 인간이 되기 위해 지냈던 과정을 원시사회에서의 성년식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한 견해도 있다. 어느 쪽이든 '단군신화'에 보이는 웅녀의 존재는 시조 단군의 신성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생겨난 것이다.
▶ 이 신화를 청동기시대의 산물로 보는 견해도 있고, 단군신화 시대를 무문토기문화(無文土器文化)와 관련시키면서 환웅족(桓雄族)의 등장에서 그 의미를 찾으려는 견해도 있다.
곰 숭배사상이 한국뿐만 아니라 시베리아 등지에 널리 퍼져 있던 고(古)아시아족에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조상신이라는 점에서, 단군신화의 시대와 성격을 한국의 신석기시대 주민과 관련시키는 견해도 있다.
▶ 환웅이 천강하여 웅녀와 결혼하였다는 의미
이주하여온 천신을 숭배하는 청동기문화의 환웅부족(농경 기술족, 무문토기인) + 곰토테미즘의 토착 신석기 문화의 웅녀부족(곰토템의 시베리아 동북아시아의 고 아시아족 또는 빗살무늬토기인)이 부족연합으로 고조선을 건국한 것. 단군(제사장)+왕검(정치군자)으로 제정일치사회를 의미한다.
* 접촉 시작은 BC 15세기 (농경문화의 시작), 단군 건국은 청동기 문화의 상한선인 BC 10세기로 볼 수 있다. (지금부터 3500~3000년 전, 4300년은 무리일 듯하다)
◆ 마. 단군설화와 일연
● 일학자 今西龍은 현존하는 서책 중에 일연이 인용한 단군 관계 기사가 없어 단군 설화는 일연이 조작한 것이라고 하였는데...?
[일연은 150종이나 인용하였으며, 양심적인 일학자도 단군 존재 인정]
1)古記와 魏書 : 삼국유사에 10회나 고기라는 말이 보인다. 현존하지 않는 여러 종류가 있었다. 없어진 것 중 단군 관련 부분이었을 것이다.
2) 일연의 기술 태도 : 150종 이상의 자료 인용, 하필 단군 기록만 왜곡하였을까?
3) 단군 설화와 관련된 내용이 다른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가) 삼국사기에 동천왕이 위 관구검 침략을 받은 후 평양에 천도하려 하니 백성들이 본래 '선인 왕검의 집' 이라고 전설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단군에 관한 고구려 계통의 전승이 있었다는 것 의미)
나) 제왕운기와 세종실록 지리지가 같고, 삼국유사와 응제시주의 것이 비슷하므로 여말 선초에 서로 다른 유형의 설화가 존재하였던 것. 단군에 관한 광범위한 자료가 민족 사회에 존재하였다.
다) 중국 산동성 가상현에서 발견된 후한 건화 원년 (147)에 건설된 무씨사당(武氏祠堂) 의 화상석(畵床石)에 환웅의 천강(天降)설화와 비슷한 삼부인(三符印)을 가진 천제자가 풍백 우사 운사와 함께 곰 범이 나란히 보인다. 단군 이야기는 고대 한민족에 널리 분포되어 있었다.
▶ 일제시대 일본이 단군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자료와 함께 단군에 대해 종합적으로 연구한 문헌 3권이 발견됐다.(1999) 서지학자 이종학(李鍾學.독도박물관장)씨는 단군 존재를 인정한 이왕직(李王職)의 문서 일부(9쪽)와 단군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담은 조선총독부 중추원(中樞院)이 발행한 조선사료(朝鮮史料) 3권을 공개했다.
이왕직이란 일제시대 조선왕족의 재산 등을 관리하던 기관. 이 기관에서 1938년 발행한 제목. 필자 미상의 문서중 종묘(宗廟)의 기원 부분에 "단군은 정사(正史)에 전하지 않아 설이 분분하지만 단군에 대한 기록을 사실로 본다" 며 "특히 사마천의 기록과 삼국유사. 동사고기 등 많은 역사서를 참고해 볼 때 단군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고 주장하고 있다.
◆ 바. 고조선 영역
● 고조선의 영역은 어떻게 알 수 있나?
[고인돌과 비파형 동검, 미송리식토기 등의 유적과 유물의 공통성 및 분포로]
요동 지역의 고고학적 성과와 북한 학계의 요동 중심설에 자극을 받아 우리 학계도 비파형 동검, 미송리식 토기 등 고고학적 유물의 분포와 문헌 사료의 전면적인 재검토를 통하여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는 요동에 있었으나 기원전 4~3세기경에 대동강 지역으로 이동했다는 이른바 이동설도 제시하였다.
1) 대동강 중심설 : 대표적 학자는 이병도. 삼국유사는 단군이 평양에 도읍 하여 조선을 건국하고, 평양은 서경이라는 주를 달고 있음. 정약용과 한치윤 등 실학자들도 패수를 압록강으로 보고 고조선의 중심을 한반도로 고증하였다.
2) 요동 중심설 : 권람은 응제시주에서 낙랑을 압록강 북쪽, 기자 조선을 요동과 요서 지방으로 비정하였다. 17.8세기의 남인 학자들이 계승한 이 설은 신채호 정인보 등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주장이고 윤내현이 가세하였다. 고조선은 북경 근처 난하유역과 갈석산 지역을 중국과의 경계로 하였다고 주장.
3) 이동설 : 고조선 초기 중심지는 요동이었으나 후기에 대동강 유역으로 옮겨왔다는 절충설도 나왔다. 종래에 부정하던 기자 조선을 동이족의 이동이라는 측면에서 재해석한 것이다.
김정학은 요서 요동의 비파형 동검문화에 주목하여 고고학적으로 조양지방에서 정치적 통합을 이루고 요동지방에 정착하여 고조선을 세웠다고 주장한다.
4) 남한학계의 정리된 견해 : 고조선은 초기에는 요하 동쪽 해평 개성현에 중심을 두었으나, 후에 와서 왕검성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문화를 이룩하면서 발전하였다. 기원전 3세기경에는 부왕 준왕과 같은 강력한 왕이 등장하여 왕위를 세습하였으며, 그 밑에 상 대부 장군 등의 관직도 두었다. 또 요하를 경계선으로 하여 중국의 연과 서로 대립할 만큼 강성하였다.
ㅇ 북한학계 : 최근 북한 학계는 단군릉 조성을 계기로 그간의 요동 중심설을 포기하고 대동강 중심설로 급선회하고 있다.
◆ 사. 국조 단군 숭배 의의
● 민족사적의미는 무엇이며 단군과 관련된 유적은 어디에 있나?
[ 뿌리 없는 나무는 없다. 족벌의식, 지방의식을 대승적으로 승화]
▶ 국조 단군을 존중하여야 하는 까닭은 다음과 같다.
1. 뿌리 없는 나무, 근원 없는 물이 있을 수 없듯이 우리의 뿌리를 찾는 것이 국민의 도리.
2. 조상과 윗사람을 존경하는 하나의 산 교육.
3. 단군 숭배는 수천 년간 우리 조상들이 자신의 정체를 확인하면서 키워온 민족 고유 신앙이다. 단군 유적과 사당은 백두산, 묘향산, 구월산, 평양, 강화도 마니산 등지에 널려있다.
4. 남북한이 하나가 되어야할 당위성, 민족이 어려울 때 민족의 구심점이 되어 민족 정기를 더 높여왔다. 멀리는 몽고 침입 당시 단군을 민족의 구심점으로 삼았고, 가까이는 1909년 나철이 대종교를 창립으로 일제와 맞서 우리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기여하였다.
5. 족벌의식, 지방의식을 대승적으로 승화시키는 요체가 된다.
▶ 평양 단군묘인 성제사(聖帝祠), 묘향산 단군굴, 황해도 구월산 어천대,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 강화도 전등사 3랑성 등, 조선 태종, 세종은 평양 성제사 단군 신위에게 제사를 드리게 하였고, 세조는 직접 평양에 가서 제사를 드렸다. 영조는 성제사를 숭령전이란 이름으로 고쳤는데, 1910년 일제가 제례를 폐지시키고 三聖祠의( 구월산, 언제 지었는지는 알 수없으나 성종때 환인 환웅, 단군을 모시게 함) 집을 재목으로 팔아버려 빈터만 남게 되었다.
단군은 '밝은 땅의 임금' 곧 '배달 임금' 이란 뜻이고, 왕검(王儉)은 정치적 군장, 한배검 이라고도 한다.
▶ 한국인의 전통적 조상숭배 사상을 정면 부인하는 일은, 단군 역사에 대한 무지나 일제 강점아래 교묘한 역사 왜곡의 결과이다. 우리 민족 국가의 건국을 고유의 전통적 명절로써 경축했던 제천의식은 먼 옛날부터 있어 왔다. 고구려의 동맹, 부여의 영고, 예맥의 무천 및 마니산의 제천단, 구월산의 삼성사, 평양의 숭령전 등에서 행하여진 행사는 좋은 사례들이다. 또한 신라와 고려의 팔관회, 연등회도 국가적 제천의식의 행사였으며, 화랑도와 신선도, 풍류도 또한 이것들과 무관하지 않은 행사였다.
그리고 특히 우리민족은 10월을 상달(上月)이라 불러 한해 농사를 수확하고 햇곡식으로 제상을 차려 감사하는 마음을 의식에 담고자 하였다.
◆ 아. 재야 사학자들의 주장
● 단군왕검을 부정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환단고기는 어떤 책인가?
[ 단군 부정은 역사의식의 부족, 환단고기는 계연수가 1911년에 ]
▶ 일제가 우리를 영구히 침략하기 위하여 단군을 신화적 존재로 부정하고 국사의 2140년을 잘라버리고 위만조선으로부터 우리 겨레의 역사가 시작한 것처럼 꾸몄다. 해방이후는 공산주의 광신자, 일제 교육에 중독된 사람, 특정 종교의 맹신자, 단군 역사의 문외한들이 단군왕검(한배검)을 부정하고 있다.
▶ 해방과 함께 가장 먼저 이뤄졌어야 할 일제 청산은 바로 역사왜곡의 시정이었지만 좌우 이념대립과 정파간 정권쟁탈 소용돌이 속에서 뒷전으로 밀리고 말았다. 이와 관련해 초대 서울대 법대학장을 지낸 최태영 (崔泰永) 옹은
"해방 직후 고시제도 골격을 만들 때 시험과목에 국사를 넣었다. 새로 서는 정부의 공직자들이 바른 역사관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해방후 사학계는 단재 신채호, 위당 정인보 등의 민족사학 계열이 중심을 이루고 있어 고시 과목에 국사가 들어가면 자연히 바른 역사가 널리 보급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불행히도 6.25가 나면서 이들 대부분이 납북되거나 사망하고 사학계의 주도권이 일제 식민사학 계열로 넘어가 고시의 국사과목이 식민사학을 확대, 전파하는 결과가 돼버렸다."
▶ 우리가 발해 대야발(大野渤)이 지은 <단기고사>(檀奇古事)와 북애(北崖)의 <규원사화>(揆園史話)와 <환단고기> 가타 서적을 참고하면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의 임금 이름과 연대가 적혀 있는데 47대 1048년이다. 단군왕검( 단군 한배검, 93년). 2대는 단군 부루(34). 3대 단군 가륵(51년)…제47대 고열가, 30년)
▶ 단군 관련 재야사서의 하나인 <환단고기>그 진위를 둘러싼 논쟁이 진행중이다. 환단고기는 계연수(桂延壽)가 일제초기에 편찬한 한국상고사 관련 역사서이다. 이 책의 범례에 따르면, 계연수는 평안북도 선천 출신의 인물로 1911년 <삼성기>․<단군세기>․<북부여기>․<태백일사> 등의 네 책을 하나로 묶어 필사하고, 그것을 <<환단고기>>로 간행해 내었다.
편저자인 계연수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20년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사망시 제자인 이유립에게 다음 경신년이 되는 해(1980년)에 그 책을 세상에 공개하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과연 환단고기는 1979년 수십 부가 영인된 것을 계기로 1980년대 이후 폭발적으로 간행되어 세간에 소개되었다. ●
소답자한 30호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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