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어으허으 어어허야 어얼럴러 어으히야
심재모가 보성이 공격당한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자정 무렵이었다. 잠이 설핏 들어, 어디인지 모를 산중을 혼자 헤매는 궂은 꿈을 꾸다가 깨워 일으켜졌다. "대장님 , 대장님 , 보성이 공격 당했읍니다." 잠과 꿈의 찌꺼기가 그대로 남아 있는 그의 정수리를 친 숨가쁜 소리였다. "뭐,뭐라고!" 그는 왼쪽 손에 바지를,오른쪽 손에 시계를 집어들며 소리쳤다.
"보성이 공격을 당했읍니다." "이 바보 같은 자식아, 똑같은 말 두 번씩 할거야! 전체상황보골 하란 말야, 전체상황!" 그는 바지를 꿰입으며 몸서리치듯 소리질렀다. "전 그것밖엔 모릅니다." 심재모는 그때서야 문득 정신이 들듯 문 밖에 서 있는 것이 새까만 사병임을 깨달았다.
"알았다. 먼저 가라." 미안함을 표하기라도 하듯 그는 어조를 부드럽게 바꾸었다. 경찰서로 나온 심재모는 인명 손실, 무기 망실 등 .상상할 수없는 피해상황을 알게 되었다. "이새끼들이 도대체 지금이 어떤 상황이라고 술을 처마시고 자빠졌어. 쌔끼들, 뒈져서 싸다." 하얗게 변한얼굴의 부분부분이 푸들거릴 만큼 감정이 격해진 심재모는 책상을 걷어차며 외쳤다. 그런 그의 모습께서 한 인간의 괴로움과 절망스러움을 느끼며 권 서장은 그의 팔을 힘주어 잡았다. "사령관님, 엎 지러 진물입니다."심재모는 어금니를 맞물며 숨길을 다잡았다. 팔에 지그시 가해지는 권 서장의 힘에서 심재모는 여러 가지 말을 듣고 있었다. 이제흥분은 무용지물이었다. 타박도 무용지물이었다. 오로지 남은 건 사태의 수습 뿐었다. "그런데…초저녁에 당한 놈의 일을 한밤중에사 보고를 하다니,, 그놈들이 다 정신나간 놈들 아닌가 말이오." 심재모는 진한한숨을 토했다. "아마도 피해 수습을 하다 보니 그리 된 것 같습니다."권 서장이 심재모 앞으로 담뱃갑을 내밀었다. "보고라도 빨리 했어야 거길 갈 수 있었을 게 아뇨." "천상 첫 기차를 탈 수밖에 없읍니다. 그동안 수습책이나 강구하시지요." 권 서장은 심재모가 도보 행군을 강행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말했다. 아무리 속보행군을 한다 해도 도착시간은 기차를 타는 것이나 별로 차이가 나지 않을 거였다.
"도리 없지요." 심재모는 의자에 몸을 부렸다. 자애병원 전 원장을동행시킨 심재모는 분대병력을 이끌고 첫 기차를 탔다. 잔칫집이 초상집으로 변해버린 현장의 모습은 참혹하고도 비참했다. 핏자국을 덮느라고 마당에는 색깔도 선명한 황토가 두껍게 깔려 있었다. 그런데도 속을 뒤집는 피비린내가 역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가마니 때기를 뒤집어쓴 시체들은 담을 따라 즐비하니 누워 있었다. 시체는 보고 받은 것보다 두구가 더 많은 서른한 구였다. 왜 두 구가 더 많은지를 심재모는 묻지 않았다. 중상자가 사망자로 바뀌었을 것임은 묻지 않고도 알 수 있는 일 이었다. "추가된 두 구는 어느 쪽이요?" 심재모의 입에서 처음 튀어나간 말은 이랬다. "예에?" 심재모의 옆에서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던 경찰서장이 화들짝 놀라며 눈을 크게 떴고,"아, 네에, 군인이 아니고 경찰입니다."그의 목소리는 떨려나왔는데, 핼쑥한 얼굴에는 안도의 빛이 짧게 스치고 지나갔다. 군인 열넷, 경찰 열일곱의 사상자를 전 것이다.
열넷이면 보성 병력 반을 잃은 것이었다. 접전도 아니고 술을 퍼 마시다가… 심재모는 다시 끓어오르는 분노와 안타까운 허망감으로 거적쓴 시체를 바라 보았다. 선임하사가 죽었으니 망정이지 만약 살았더라면 그를 그대로 살려둘 것 같지 않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경찰의 피해에비한다면 죽은 선임하사에게 오히려 감사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경찰은 칠할의 인명 손실을 당한 형편이었다. 선임하사는 그나마 반은 야간 근무를 시킬 것이었다. 무기 망실까지 합치면 경찰조직은 완전히 파괴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정작 잔치를 벌인 장본인인 군수와 잔치 참석을 선도한 경찰서장은 죽음을 면하고 살아 있었다. 두 사람은 마당의 아랫사람들과 섞이지 않고 대청마루에서 술상을 마주하고 앉았다가 사태가 벌어지자 혼비백산 방으로 뛰어들어, 다시 다락으로 기어올랐던 것이다. 그러니까 마당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사람들은 하나도 빠짐 없이 몰살을 당하고 말았다. 심재모는 경찰과 구분되어 있는 부하들의 시체를 하나하나 거적을 들춰가며 확인했다. 사람의 죽은 모습은 언제 보아도 정떨어지게 마련이지만 특히 총을 맞고 죽은 모습은 그 도가 한층 심했다.
그리고, 똑같은 수의 사람이 잠들어 누워 있는 것과 죽어서 누워 있는 경우와는 이상하게도 죽은 쪽이 훨씬 많은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장례 준비는 어찌 되고 있읍니까." "예에, 지금 목수를 불러모아 관을 짜고 있구만요." "서두르시오, 시간이 없소. " 심재모는 부대 점호를 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통제선을 벗어난 골목에서부터는 사람들이 법석거리고 있었다. "잉,군인 대장인감마." "그러시. 속이 씨리씨리허겄네웨." "금메,좋기사 헐라등가." "멀라고 뒷북 치로 왔으까.""높은 사람잉께 뒷북 치제."이런 수군거림이 스치는가 하면, "음마, 저 사람대장인갑는디, 꿈 잘 꿨네. " 잉, 키도 질고 인중도 질어 명언 질겄넨네""몰르겄네, 워쩔란지." 이런 뒷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심재모는 그 숨죽인 짧은 말들에서 묻어나는 야릇한 비아냥거림을 느낄 수 있었다. 한 마디씩놓고 보면 트집이나 흥을 잡을 데가 없는 말들인데, 그 어조나 말하는 분위기에는 가시가 들어 있었고, 거부의 감정이 섞여 있었다. 내가 과연 할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인가. 심재모는 이 지역에 파견 근무를 나온 이후 이런 저런 생각 끝에 되씹고는 했던 생각을 다시 떠올렸다.
심재모가 보성에 머물러 있는 사이에 벌교는 염상진부대에게 공격을당하고 있었다. 염상진부대는 읍내 중심부를 향해 들몰과 칠동 양쪽방향에서 협공을 가해왔다. 상상할 수도 없었던 대낮의 기습인데 다가, 협공이었고, 지휘관도 없는 공백상태여서 읍내의 방어는 오래가지 못하고 밀리기 시작했다. 권 서장은 강 상사와 함께 병력을 집결시켜 적을저지하려고 했지만 수적으로도 열세였고 ,심리상황적으로도 열세였다.
양쪽에서 모두 밀리기 시작한 군인과 경찰은 결국 경찰서로 다시 집결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총소리만 요란할 뿐 읍내 중심부에는 사람의 그림자하나 얼씬거리지 않았다. "어쩔 랍니까!" 강 상사가 숨을 헐떡거렸다.
"여길 사수합시다." 권 서장도 숨을 헐떡이며 대답했다. "미쳤습니까,사수하게. 죽어서 지켜져야 사수지, 지금 형편으론 죽고도 뺏기게 생겼어요." "그럼 어쩌잔 거요?" "후툅니다. " "후퇴? 심 사령관도없는데?" "정신차리시오! 현재의 지휘관은 서장님이오." "좀생각해봅시다." "아니, 적이 코앞에 닥쳤는데 뭘 생각해요. 좋소, 난 내부하들 데리고 후퇴하겠소. 후퇴도 작전이요!" 강 상사는 매정하게돌아섰다. 권 서장도 승산 없는 싸움을 할 생각은 없었다. "기다리시오,다 같이 후퇴할 테니까!" 그들은 철교를 목표로 삼아 방죽을 따라후퇴하며 총질을 했다. 협공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퇴로는 포구를 건너는 것이었고, 포구를 건너기에는 소화다리보다 철교가 더 가까왔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철교 쪽에서 갑자기 총소리가 요란하게 터져올랐다. 칠동 쪽에서 공격해온 적이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방죽양쪽에서 협공을 당하는 막다른 길이었다. "물로 뛰어들어 ! 물로!" 강상사가 방죽의 비탈을 뛰어내려가며 소리치고 있었다. "물을 건너라, 물!"권 서장도 소리치며 방죽을 굴러 내렸다. 군인이고 경찰이고 우르르방죽을 타고 내려 갈대순이 타박하게 돋아오른 뻘밭으로 뛰어들었다. 썰물때라서 민물만 흐르고 있는 포구는 깊지 않았다. 제일 깊은 곳이 불두덩께였다. 총알이 물 여기저기에 박히며 물방울을 튕겨올렸다. 비명을지르며 한 명이 물에 머리를 박았다. "붙들어라, 붙들어!" 권 서장은권총으로 물을 치며 외셨다. 물을 벗어나 뻘밭을 돌파하는데 또 저쪽에서한 명이 꼬꾸라졌다. "이새끼들아, 끌어, 끌고 가아!" 강 상사의 발악적인외침이었다. 그들이 방죽을 거의 타넘었을 즈음에 적들은 건너편 방죽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포구를 사이에 두고 방죽을 은폐 삼아 그들은 대치하게 되었다. "적을 더 추격할 필욘 없다. 이 상태에서 적을 경계하고, 이상이 발생하면 즉시 보고하도록." 염상진은 어림잡은 적의 수와 맞먹게 병력을 배치하고는 나머지 병력을 뒤로 빼냈다. 그 병력을 둘로 나누어, 한쪽은 심재모가 나타날 것에 대비해 역을 중심으로배치시켰고, 다른 한쪽은 소작권을 탈취한 지주들을 잡아오도록 풀었다.
벌교에 머무를 시간은 그다지 길지 못했다. 보성을 공격할 때 이미 염상진은 벌교 공격을 계획하고 있었다. 심재모를 보성으로 끌어낼 수있는 것은 보성 공격의 성공과 직결된 문제였다. 보성이 공격당했다는보고를 받으면 심재모는 지난번처럼 병력을 이끌고 보성으로 출동할 것은 확실한 일이었다. 그 기회를 이용해 벌교를 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보성 공격이 예상보다 큰 성과를 거두게 되자 염상진은 벌교 공격 실시에 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지난번에 당했던 것과 똑 같은 방법으로 허를찌르는 것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심재모는 과학화된 통신망을 이용해 기동성을 발휘한 것이고, 자신은 야산대의 생명인 주력의 기민함을 동원해 기동성을 발휘하는 것이었다. 그런 똑같은 방법으로 공략해서 타격을 입히지 않고서는 지난번에 입은 심신 양면의 상처가 아물지도, 잊혀지지도 않을 일이었다. 보성에서 퇴각한 염상진은 네 시간의 충분한 잠을 잔 다음 새벽 어둠살을 이용해 병력을 이동시켰다. 이지숙과 선을 대고 있는 칠동의 거점을 통해 역시 심재모가 보성으로 떠나고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염상진은 이번 공격에 또 하나의 의미를 새기고 있었다.
야산대는 밤에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낮에도 움직인다는 과감성을보이는 점이었다. 강동식은 네 명의 조원을 데리고 자신에게 맡겨진 세지주를 찾아내려고 횡계다리 옆동네를 뒤지고 있었다. 첫번개 집도, 두번째집도 발칵 뒤집었지만 찾고 있는 주인들은 없었다. 아침 일찍 나갔다고하는가 하면, 어디 갔는지를 모른다고 했다. 찾고 있는 사람이 없는 한아무 소용이 없는 말들이었다. 잡아가야 할 놈들을 잡아가지 못하는초조감으로 강동식은 세번째 집을 향해 발길을 서둘렀다. "예 말이요,외서댁 바같양반이 맞제라!" 느닷없이 들려온 여자 소리에 강동식은 우뚝걸음을 멈췄다. "그런디, 누구요?" 젊은 여자가 황급하게 다가섰다. "나 외서댁 동문디, 아까 지내갈 적에 설핏 본께 그런 것 겉애서 기둘리고있었소. 워찌, 외서댁 소식언 다 알고나 있으시요?" "워째, 무신 일 있소?"강동식의 얼굴이 긴장되며 의혹의 빛이 드러났다. "음마, 얼굴 본께 암것도 몰르는갑네. 갸가 염상구놈 애 배갖고 저수지에 빠졌다가 되살아난거 몰르요?" "머 , 머 , 머시여!" 말을 더듬는 강동식의 부릅뜬 눈에 불이켜졌다. "아이고 시상천지에, 공산당 허는 것도 ,좋제만 공산당 허다가 마누래 망쳐뿔고, 그 공산당 워디다 써묵을라요?" "워, 워찌 된 일인지 세세허게, 세세허게 말혀봇씨요." "세세허게 말허고 말 것도 움소. 아까말헌 것이 다요. 죽을라고 저수지에 빠진 것 보먼 둘이 서로 좋아 배가맞은 거이 아닌 것이야 틀림 웂고, 되살아나 갖고 친정에 쪼간 있다가 장흥으로 갔다요." "장흥 ?" "이모집이 있담서요." 강동식은, 언제 떠났느냐고 묻지 않았다. 필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리 더 이상 물을 기운이없었던 것이다. 아내가 테러를 당했을 것 같은 염려 때문에 명령을 어기곤 집을 찾아갔다가 안창민 동무가 총상을 입는 의외의 사건을 일으키게 된 다음부터 아내 생각에는 일체 문을 닫았었다. 조직의 규율도 규율이었고, 스스로가 생각해도 마누라에 연연하는 것이 사내답지 못한짓이라 여겨졌던 때문이다. 오로지 강하고 순결한 혁명전사 되기를 일념으로 삼고 생활하는 동안에 그런 기막힌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대장의 동생 염상구와 대장은 그 사실을 몰랐던것일까… 몰랐을 리가 없는 일이다. 대장은 모르는 것이 없는 사람이다. 더우기 군내나 읍내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더 말을 것이 없다.
대장은 다 알면서도 자신에게 감춰온 것이다. 안창민, 하대치도 모르고 있을까. 그들도 알면서도 함봉을 했을지 모른다. 대장의 명령이라면 그들은 능히 그랬을 것이다. 이 일을 어째야 좋은가. 염상구 놈을 어째야 하는가.
그놈은 당의 원수인 악질 반동만이 아니라 내 개인의 원수가 아닌가.
그놈을, 그놈을… "강 동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 상 싶은디라…" 넋을빼고 서 있는 강동식을 옆의 사내가 조심스럽게 일깨웠다. "아, 알겄소. 어여 움직기립시다." 강동식이 앞서 걸음을 떼어놓았다. 그러나 그 걸음걸이는 아까의 걸음걸이가 아니었다. 어느 조나 마찬가지로 지주들을하나도 잡아오지 못했다. "집구석이란 집구석은 다 이 잡디끼 흘랑까뒤집고,부치기 부치데끼 엎어뿔고 뒤집어뿔고 험시로 눈얼 뒤집고찾아도 요것덜이 땅으로 기들어 갔는지 하늘로 올라붙었뿌렀는지고랑댕이도 뵈덜 않트랑께요. 아매 요것덜이 작년 시월에 똥줄 타게 혼난뒤로 총소러만 났다 허먼 워디로 째는 연십얼 날마동 헌 모냥이요.그러덜 않고서야 절마당 검불 쓸데끼 요리 말끔허니 웂어질 리가 웂덜않겄는가요?" 하대치의 긴 설명에 입을 꾹 다문 염상진은 그저 고개만끄덕이고 있었다. 하대치의 말에 타당성이 있었던 것이다. 하대치의 판단은 정확했다. 작년 시월의 사건을 겪은 데다가 염상진이 율어에 진을 치고 있어서 무언가 켕기는 것이 있는 지주나 유지라는 사람들은 총소리만울렸다 하면 뻘밭의 꽃게처럼 순식간에 몸을 감출 수 있는 자기들 나름의 피신처를 다 갖추어놓고 있었다. 염상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사실을 알아내게 되었다. "자아, 우리 볼일은 다 끝났소. 그만 떠납시다." 적의 사살을 확인하지 못한 채 총 여섯 자루를 전리품으로 거둔 염상진은 부하들을 앞세워 퇴각을 시작했다. 그들이 읍내에 머문 시간은 두시간이었고, 읍내는 두 시간 동안 그들의 해방구였던 셈이다. 그들은 아무런 추격도 받지 않고 장터길을 지나고, 쇠머리를 돌아, 국도를 따라 율어로 유유히 사라져갔다. 그들이 지나는 길목에는 몇몇씩 모여선사람들이 묵묵히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도 그 사람들 앞에 묵묵히지나쳐갔다. 조성의 병력까지 모아 심재모가 역에 내려선 것은 그들이 떠나고 한 시간쯤 지난 뒤였다. "사망 셋에 부상이 여섯입니다." 이 말을 끝으로 권 서장은 상황보고를 마쳤다. 심재모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하루동안에 당한 일이 꼭 꿈속에서의 일만 같았다. 보성 경찰서장도 염상진의 얼굴을 보았다고 했고, 이곳의 형사부장도 염상진의 얼굴을 똑똑히보았다고 했다. 어떻게 보성을 치고 다시 벌교를 칠 수 있는 것인지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대장님, 조성 병력은 어떻게 할까요?" 강 상사가 다가서며 물었다. "빨리 돌려보내시오." 심재모가 앞만 바라본채 말했다. 그때 목을 늘여뺀 염상구가 가느다란 눈을 깜박거리며 어슬렁어슬렁 사무실로 들어섰다. 그제서야 권 서장은 그의 모습을 그동안에 볼 수 없었음을 상기했다. 그리고 그를 외면해버렸다! 김복동의 홀아버지 김 노인이 눈을 감았다. 육십을 채우지 못한 쉰 아홉의 나이였다.
열일고 여덟에 장가를 가고, 서른고개를 넘으면서 서넛 자식들을 거느리며 소작생활을 꾸려가고, 마흔 고개를 넘기면 서는 억지기운을 쓰고 살아온 이십 년 세월이 삭신 마디마디를 갉아내려 마흔 중간고개를 넘어가지못하고 불붙은 짚단 무너져 내리듯 허망하게 푹푹 쓰러져 가는 것에 비하면 쉰 아홉의 나이는 그래도 아쉬울 것 없는 인생살이였는지도모른다. 비록 환갑을 목전에 남기고 떠났을 망정. 환갑 진갑 차려먹고 세상떠나는 것을 천복 중에 천복을 누리는 것으로 여겨옴은 농사의 중노동과 소작의 가난에 시달리면 서는 도저히 그 나이까지 삶을 이어갈 수 없었기때문이다. 마흔이 넘으면서 손자를 보고, 마흔 다섯이 되면 중늙은이로 불리며 손자 오줌으로 옷섶을 적시고, 쉰 고개에서 늙은이가 되고 마는궁핍한 인생살이에서 환갑 진갑상을 받아본다는 것은 기름지게 먹고 사는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일 뿐 소작살이를 면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어둠 속에 멀리 있는 불빛처럼 까마득한 이야기였다. 김노인의 초상은 초라하고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봄 초상치고도 유별나게 냉기만 돌고 적막했다. 아들 김복동이라도 있었으면 그렇지는 않았겠지만,그가 갇힌 신세니 초상이 그리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집안 형편으로는 김 노인이 죽은 것보다 김복동이가 갇혀 있는것이 더 큰 문제였고, 김복동이가 갇히지 않았더라면 김 노인도 저승길을 그렇게 재촉하지는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아덜 아부지가 순천으로 넘어가뿔자 노친네가 나보담도 더 애타허고 상심허고 허드랑께요.
땅뙈기가 있으니 뒷수발얼 허겄냐, 폴 몸띵이가 있으니 재판 비용얼대겄냐, 혀쌈시로 맴얼 못 잡고 허둥기리고, 밤잠도 못 자고 그랬제라.
시상 뜰라니께 그리 맴얼 쓰신는지, 그 일로 상심이 심혀서 시상얼뜨신는지, 몰를 일이구만요." 곡성도 내지 않는 장흥댁이 드문드문 찾아든 사람들에게 한 말이었다. 그녀가 곡성을 내지 않아도 그 누구도 그녀를 탓하지 않았다. 그녀가 무던한 며느리였다는 것을 감안해서가 아니라 남편일로 그녀의 가슴에 들어앉은 근심의 덩어리를 다 헤아리고 있었던터였다. 전 한 가지도 제대로 부치지를 못했다. 고기나 생선은 아예 엄두를 내지 않더라도 돈 안 드는 호박전이나 고추전이나마 부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으랴. 호박이나 고추는 손바닥만한 터밭에 씨로박혀있는, 그 어디를 둘러보아도 찬거리나 전거리 하나 될 만한 푸성귀도없는 지랄 같은 계절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거적쌈하듯 하는 장례라 해도맹물로만 치러지는 것이 아니었다. 출상 전까지 끼니 따라 영전에 상을차려야 하고, 바라는 것 아무것도 없이 궂은일 추슬러주는 남자들이있었다. 최소한의 술과 그에 따른 안주가 장만되어야했다. 제일 만만한것이 술로는 막걸리요, 안주로는 콩나물과 꼬막이었다. 그것 말고도 장작관 하나는 장만해야 했고, 관 옮겨 묏자리 만들 인부를 사야 했다. 그런것이 다 돈이고, 빛이었다. 마삼수의 아내 목골댁과 강동기의 아내 남양댁은 초상이 났다는 말을 전해 듣자마자 장흥댁네로 와서 물일을 차고나섰다. 이웃간의 정리로도 의당 그리 할 일이 었는 데다가 그녀들 사이에는 같은 근심을 품고 있는 끈이 이어져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돈으로든 곡식으로든 조의를 표하고 싶음이 간절했지만 그녀들은 빈손으로 초상집 사립을 옆 걸음으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물일을 더 지성스럽게 말끔하게 해내려고 모두들 몸을 사리지 않았다. 그녀들은 서로 등지거나 마주보거나 해가며 일을 하다가 번갈이를 하듯 한숨을 내쉬고는 했다. 그리고는 흠칫 하며 상대방의 눈치를 훔쳤고, 상대방은 못들은 척 물소리를 더 크게 내거나 삭정이를 힘쓰며 부러뜨렸다. 서로가 가슴에 찬 근심을 드러내지 않으려 마음썼지만 근심이란 술 괴듯 하는것인지 한숨은 무심결에 흘러나와 버리고는 했다. 그녀들은 이렇듯 서로 마음쓰면서도 어느 결엔지 자신들의 신세 한탄에 입을 맞추고 있고는 했다.
"참말로 이적지 암 소식도 웂으먼 워찌 된 일이까이, 지닌 돈 한푼웂이…" "긍께 나가 죽고 잡은 맴뿐이란 말시. 워디럴 워쩌크롬 쏘대고댕기는지 살았는지 죽었는지, 요 땁땁헌 가심이 재가 다 되야뿌렀네." 남양댁은 진하고 긴 한숨을 물었다. 굶주림으로 살이라고는 없이 깡말라버린 그녀의 얼굴은 검게 타들고 있었다. 예쁘다는 말을 듣게 했던 제대로 생긴 이목구비도 그런 얼굴의 바탕에 파묻혀 전혀 드러나 보이지를 않았다. "자네 맘 워찌 몰르겄는가. 내 속 짚어 넘 속이라고, 나가 요리각다분헌디 자네 속이야 더 말헐 것 웂제. 그려도 맘 약허게 묵지말드라고, 우리. 당허는 남정네들헌테 비허자먼 우리야 용궁에 앉었는 심이고, 새끼덜 땀세라도 맘 독허니 묵어야제 워쩌겄는가." 목골댁의 말은 꼭남양댁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스스로에게 하는다짐이기도 했다. 기미가 두껍게 앉은 목골댁의 얼굴은 냠양댁과는 반대로 살이 올라 보였다.
그러나 그건 살이 아니라 검누른 빛과 함께 돋아 오른 부황난 부기였다.
굶기는 거의 비슷하게 했으면서도 목골댁이 먼저 부황기를 드러내는 것은그만큼 체력이 약하다는 표시였다. 그러나 색이 검게 변하면서 살까죽이 말라붙는 것으로 보아 남양댁도 멀지 않아 부황기를 드러내게 될 조짐을보이고 있었다. 그녀들은 이제 나이 스물넷의 동갑나기였다. 그러나 그녀들의 얼굴에는 나이 스물 넷인 여자가 지녀야 하는 젊은 생기도 탄력도 없었다. "면회는 안직도 못 갔제?" 남양댁은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물었다. 다른 말을 끌어내기 위해서였다. "이, 돈도 웂는디다가, 또 여그 장흥댁이 시아부님헌테 매여 있니라고." "재판 뒷수발이야 못혀도 면회나 자주자주 댕기소. 갇힌 사람이 을매나 답답허고,집걱정 되고 그러겄는가." "맴이야 하로에 열 분도 가고 잡지만 거그가 읍내도 아니고 순천인디 돈이 을매나 깨지겄는가." "돈이 먼첨인가,사람이 먼첨이제, 나야 냄편이 갇혀 있기만 험사 걸어서라도 면회댕기겄네. 소식 몰르고 요리 깝깝허니 앉었응께 냄편이 하늘이란 말 인자알겄고,이리 맘이 씨리고 아픈디. 워디서 멀허는지…" 남양댁의 목이 잠겨들었다. 그녀는 손등으로 눈을 눌렀다. "그려어, 남정네 하나가 지집목심이여. 외상이먼 소도 잡아묵는 판인디 냄편 구허는 일에 빛돈 무서바허겄는가." 그녀들은 더 말이 없었다. 서로가 남편 생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어허어, 워째 뚱금웂이 이 영감이 저승행차시여어. 아덜 워찌 되는 지도 안 보고 말이시." 상가집을 찾는 예절로서는 있을수가 없는 커다란 목소리가 아무거침이 없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상가집에서 마신 술이 취해 가지고 노래를 불러대는 놈처럼 그 말투나 목소리에는 조문을 하자는 뜻이 전혀 없이 망나니 짓이나 하자고 덤비는놈 같았다. "아니, 워떤 넋나간 자석이여!" 남양댁의 얼굴이 싹 변하여 문쪽으로 돌아섰고, 목골댁도 행주든 채 그뒤를 따랐다. 그런데 문 밖으로고개를 내밀던 남양댁이 주춤하며 "문댕이!" 했고, 뒤따라 목을 내밀던 목골댁이 화답이라도 하듯 "오살허네!" 하고 중얼거렸다. 그녀의 눈에 띈것은 마름 허출세였다. "이, 두 댁네가 애쓰는구마. 하먼, 그래야제, 모다 한배 탄 몸들잉께로." 합죽한 얼굴의 허출세는 눈에 얄궂은 웃음을 피워내며 그녀들에게 아는체 했다. 남양댁과 목골댁은 마지 못해 눈인사를하고 뒷걸음질로 그를 피했다."저 문딩이 웃는 거 참말로 징상시러바 못보겄네." 남양댁이 어깨를 떨었다. "그 염생이 웃음이야 별호난 것아니드라고, 즈그 마누래 속불 질르니라고." 목골댁은 예사롭게 대꾸했다.
허출세가 여자들만보면 그 묘하게 피워내는 눈웃음은 여자들 사이에소문이 나있었다. "별호난 것이야 허나마나 헌 소리고, 나 말은, 오늘 웃는거이 더 징허고 징허다 그런 말이시. 자네는 안그리 생각킨가?" "금메,자네 말 듣고 봉께 그런 상싶으네, 쩌눔이 필경 남정네덜 웂응께 염생이웃음 더 진하게 웃는 것이시." "문딩이 잡것, 백여시맹키로." 남양댁이 혀를 찼다. "쩌것이 참말로 백여시는 백여시여, 우리넌 소작은 소작대로 띠이고 요꼴할라 됐는디도 쩌눔은 새 쥔 따라감서 그대로 마름자리 물고늘어져 있는 것 보면." "쩌눔이야 살얼름판도 안 빠지고 건넬눔아니등가.""금메, 그라고 보면 우리 남정네덜이 워디가 모지랜 것 아니까아?" 목골댁이 푸석푸석한 얼굴에 의문을 담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럴란지도 몰르제, 안직 젊은께." 남양댁이 한숨을 내쉬며 몸 무겁게일어났다. "아, 아, 세상 이치라는 것이 해가 뜨먼 달이 지고, 달이 뜨먼 해가 넘어가대끼 다 순서가 있고 상하가 있는 법이다 이거시오. 나라가 공산당이 나쁜께 허덜 마라 허먼 아래서야 그 말 그대로 따라야 나라가 채가 슬 것인디,요런 느자꾸웂는 것덜이 공산당이 즈그 할애비 위패도아니겄고, 죽자사자 고것 떠받듬서 저 지랄발광들잉께, 요것덜 씨럴 싹 다물레 뿔자먼 딱 한 가지 방법밖에는 웂다 그것이요. 고것이 머시냐, 각지빨갱이럴 붕어몰이 허대끼 싹 다 지리산으로 몰이럴 혀서, 거 히로시마에 떨어티린 원자폭탄얼 딱 한 방만 떨어티레뿌는 것이요. 그러먼 빨갱이는씨도 안 남을 것인디, 그 간딴헌 방법을 나라가 몰르고 있다 그것이요. "영전에 건성으로 절을 해치운 허출세는 한장수 노인을 상대로 입에 거품을물고 있었다. 한 노인은 무표정하게 앉아 있었다. 한 노인은 초상이 나자마자 김복동이가 없는 영전을 지키고 있었다. 사랑방에서 얽은 끈끈한 정이 시키는 일이었다. 밑천이 없어 아직 장가도 못 가고 있는 지삼봉이가 주인에게 사정을 해 새경쌀 한 말을 미리 받아 선뜻 내놓은 것도 그 정이 시킨 일이었다. 지삼봉의 그 마음씀이 너무 고맙고 눈물겨워, "니가사람이다, 니가 사람이다." 한 노인은 목이 메었던 것이다. "나 말이으쩌요? 사람이 말얼 혔으먼 쓰다 달다 무신 표식이 있어 야제라." 허출세가 한 노인을 치떠보았다. "존 생각 겉으요." "금메요, 속으로는벨로 안 존 것 겉은디라?" 한 노인의 무관심에 기분이 상한 허출세는 그렇게 오금을 지르고 나서 , 홱 돌아앉아 두 다리를 토방으로 내렸다.
"나가 물려도 되게 잘못 물린 상싶은디, 워째, 재판은 워쳤게 돼갈눈칩디여?" 허출세는 고약스런 얼굴을 해가지고 토방에 서 있는 장흥댁에게 물었다. "안직 면회럴 못 갔구만이라." "워째라!" 허출세는 몸을 일으키며 버럭 소리질렀다. 장흥댁은 고개를 숙였다. 부엌에서는남양댁과 목골댁이 몸을 움츠러뜨리고 있었다. 그녀들은 그가 부리는역정이 무엇 때문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모두 소작이 떨어진 데다가,하나는 어디론지 도망을 가버렸고, 둘은 갇혀있는 신세니 빚을 못 받게될까봐 그는 몸이 달고 있었던 것이다. "싸게 면횐지 쥐콧구멍인지 댕게와서 재판이 워떤 꼴로 돼갈란지 나헌테 알리씨요." 허출새늘 이렇게 내지르고는 손바닥을 탁탁 털며 토방을 내려섰다.그는 사립으로걸어가면서 부엌 쪽을 옆눈질하고 있었다. "호로자석 겉으니라고…" 한노인은 여기까지 말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상가집에 빈손으로 오다니,하는 말을 삼키고 있었다. 정작 자신도 빈손이었던 것이다. 그는 그것이 그렇게 면목없고 죄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마음이 죄가 아니라 가난이 죄라서 어찌 하는 도리가 없었다. 상제도 없고, 특별한 조객도없고, 구색 맞출 것도 없는 장례라서 격식에도 없는 이일장을 하기로 했다.
지삼봉과 함께 밤샘을 한 한 노인도 침통한 얼굴인 채 이일장 치르는 것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삼봉이가 지게에 관을 짊어졌고, 한 노인이 그 앞을 시름없이 걸어가며 요령의 울림도 없는 길닦음소리를 하고 있었다.
어으허으 어어허야 어얼럴러 어으히야 가네가네 나는가네 인생육십한평생을 못채우고 나는가네 어으허으 어어허야 어 얼럴러 어으히야삼수갑산 넘을 적에 왜왔느냐 물음받고 내뭐라고 답변할꼬 어으허으어어허야 어얼럴러 어으히야 굶고굶어 왔다는말 서럽고도 남새시러득병했다 답할라네 어으허으 어어허야 어얼럴러 어으히야 한 노인의 사설을 잇고 받치는 소리에 언제부터인가 지삼봉의 컬컬하고도 어기찬목소리가 가락을 타고 있었다. 한 늙은이와 한 젊은이의 저 깊은속에서부터 솟아올라 터지는 것 같은 그 길게 늘어지면서 감기고 다시풀려 휘돌아 흐르는 소리는 서러운 울음인 듯 괴로운 통곡인 듯 사월의 허기진 푸름 속으로 물굽이를 이루며 퍼져나가고 있었다. 허출세가 남양댁의 지게문을 흔들어대다가 끝내는 문에 구멍을 뚫고, 문고리에 꽂힌 숟가락을 뽑아낸 것은 그날 밤이었다. "소리질를라요, 소리." "맘때로 혀 나야 남자고, 배맞춘 담이라고 소문내뿔 것잉께 ." 허출세가 방으로 들어서며 내뱉았다. "금메 , 워쩔라고 이러요, 워쩔라고. " 저고리섶을 틀어잡은 남양댁은 방구석으로 몰리며 숨이 잦아들고 있었다. "남녀가 밤에 만냈으먼 워쩌는지 몰라서 그러는겨? 몰르먼 인자부텀 갤차줘야 쓰겄구만. 강동기 잡겄다고 파수보든 눔덜도 지물에 기운빠져 다 가뿔고,인자 자네허고 나뿐잉께로 선선허게 허드라고. 강동기가 빚돈 갚기는 다틀려 묵었응께 자네가 몸으로라도 갚어야 헐 것아니겄어? 근디, 나도사람인디, 그리 인정머리웂이는 안허겄어. 나말 얌전허니만 잘 들으먼새끼덜허고 죽 낋일 곡식은 줄 챔이여 죽으먼 썪을 몸띵이고, 한 바가치물이먼 깨끔허게 표도 안 나는디, 처녀도 아닌 몸에 정절 지키겄다고 새끼덜허고 굶고 부황들어 뒤질 끼여? 나 말만 들으먼 서로서로 존일이고, 쥐도 새도 물르는 일이여. 워쩔끼여?" 허출세는 바득바득다가섰다. "무신 일이고 다 헐 팅게 지발…" "아, 시키는 일이나 지대로혀!" 허출세는 남양댁을 와락 끌어안았다. "안돼라, 죽어도 안돼라."그녀는 남자를 떠다밀었다. 그러나 남자가 떠밀린 것이 아니라 그녀가 이불 위로 뒹굴어졌다. 그녀는 내리 덮이는 남자의 어깨를 떠밀어내며 두다리를 버둥거렸다 "암컷이야 발광을 헐수록 맛난 법잉께. 항, 발광을혀야 잡아묵을 맘이 동헌다니께," 남양댁의 허벅지를 타고 앉은 허출세는이렇게 씨부렁이며 그녀의 두 팔목을 한 손에 몰아 잡았다. 고리고 다른손으로는 속곳을 끌어내렸다. 그녀는 다리를 비비꼬았지만 이미 남자의손이 불두덩 아래를 파고들었고, 굶주림에 지쳐 있는 그녀의 몸에는 더이상 버팅길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남자의 맨살이 닿는 감촉을 허벅지에 느낀 그녀는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그러나 때마침 떠밀려오는남자의 몸에 부딪쳐 그녀는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남자의 몸이 실리는압박과 함께 그녀는 하체를 뒤틀었다. "어엄니…" 허출세는 옷을 챙겨입으며, "여자 조갑지 진짜 맛이야 아럴 한둘 뽑은 담부텀이란 것이 영축웂는 말이고, 굶고 살아서 거그 살맛도 찔게진 것잉가, 짠득짠득허니 묵을 만허시" 하고는 짭짭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몸을 일으키며, "나가 곡식 들고 댕길 체면이 아닝께 요것으로 폴아다 묵소." 돈을 그녀 알에던졌다. "가지가씨요. 그라고 다시는 오지 마씨요." 남양댁의 목소리에는 울음이 섞여 있었다. "말 씹히지 말어. 굶고 살아지는 목심 웂는 법잉께.
허출세는 큼큼 헛기침을 하며 방을 나갔다. 그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그녀는 잠자리를 수습하려고 등잔에 불을 당겼다. 방바닥에는 구겨진 지전한 장이 놓여 있었다. 그건 쌀 한 홉 값에 불과한 십원짜리였다. 그녀는 그돈을 와락 모아 잡았다. 그러고는 무릎을 굻고 머리를 방바닥에 박은 채 흐느끼면서 그 돈을 갈가리 찢어대고 있었다. 이틀이 지난 밤 허출세는 목골댁의 지게문을 흔들었고, 문을 열어주지 않자 구멍을 뚫었으며, 문고리에 꽂힌 숟가락을 뽑았고, 같은 말을 되풀이했고, 같은 액수의 지전을 던지고 나왔다. 그러나 그는 장흥댁을 찾아가지는 않았다. 장흥댁은 두 여자보다 열 살 가까이 더 먹었던 것이다. 염상진네에게 읍내를 두시간 동안 장악 당한 사건은 이삼 일에 걸쳐 지주들 사이에서 불만스럽게 오가던 말이 뭉쳐져 마침내 문제 거리가 되었다. 공개적인 책임 추궁을하자는 데로 의견이 모아진 것이다. 그 위기를 모면하게 된 사람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만약 미리 피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를 곱씹게 되었고, 잡혔으면 죽었다는 너무나 분명한 결론 앞에서 새삼스럽게 끼쳐오는 공포를 느껴야했고, 먼저 염상진에게 치를 떨다가 그는 증오한다고 없어질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그놈이 어떻게 그럴수 있었는가에 눈을 돌리게 되었고, 그러자 눈앞의 대상으로 잡힌 것은 당연히 심재모였고, 도대체 그놈은 뭘 하고 자빠져 있는 놈이냐, 고 일시에 의견이 모아지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느낀 공포감과 두려움과 생명에 대한 애착과 염상진에 대한 증오심과…그런 것들이 뒤죽박죽된 감정풀이를 심재모에게 하려 들었다. 도저히 그런 놈 믿고 살 수 없으니 당장 갈아치우자는 것이 그들의 흥분된 의견이었다. 그 움직임을 파악한 유주상은 그것을 또 하나의 효과적인 힘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는 최익달을 앞세워 그런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유도했다.
물론 좌익척결위원회와는 전혀 상관없는 모임으로 했다. 중국집에 모여앉은 그들은, 말을 하다 보니 스스로의 말에 촉발되어 흥분하고, 타인의 말을 들으면서 군중심리에 말려 흥분하고 해서 중구난방이었다.
"염상진이 그눔이 지아무리 날고 긴다고 혀도 철통겉이 방비만 되얐으먼 워찌 시뻘건 대낮에 고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느냐 그것이요. 그눔모강댕이럴 당장에 쳐뿌러야 허요." "하먼이라, 당장에 쳐뿌러야 허고말고라. 다덜 생각혀봅씨다. 대체 여그 뫼여앉은 우리덜이 다뉘기요? 하늘겉은 지체가 아니냐 그것이요. 근디, 그 지체, 그 체면 다 똥 묻쳐감서 그개녀러 빨갱이 새끼덜 피해 도망해야 허고, 그 호로쌍녀러 것들이 감히 워디라고 우리덜 집얼 그 꼴로 난장판얼 맹글 수 있냐 그것이요. 고것이 대체 누구 책임 이겄소. 그눔얼 지금 당장 잡아다가 우리 앞에 물팍굻칩씨다!" "물팍만 끓쳐? 부자지럴 훑어뿌러야제. 고런 빙신 늘고자 겉은 놈." "여러 말 헐 것 웂이 문제는 말이여, 쥔어런 잘못 모시는 종눔은 삭신 녹아 내리게 매질당허고 내쫓기는 것이 법칙이다 그것이요.
지금 보자먼 대체 이 나라 쥔이 누구요? 바로 여그 앉은 우리 겉은사람덜일 것이요. 워째 그냐. 나라 쥔이 한민당잉께 한민당얼 떠받치고있는 우리덜이 쥔이고,더 세세허게 따지자먼 여그 읍내 쥔이 바로 우리덜이다 그것이요. 허먼, 심가눔이 헐 일언 무엇이냐. 쥔인 우리럴편안허게, 안전허게 받들어 뫼시는 것이요 .근디, 그 자석이 쥔이 위험허게 불편허게 잘못 뫼셨응께 잡아다가 매타작부텀 혀얄 것이요." 유주상은 제멋대로 쏟아놓고 있는 말들이 제각기 한 차례씩 돌아가기를 기다리며입을 다물고 있었다. 한바탕씩 자기 말들을 해야 속이 풀릴 것이고, 그래야 계획대로 일을 몰아가기가 수월해질 터였다. "되얐소. 다아 심가눔 때레잡자는 뜻으로 그 말이 그 말잉께, 워디 유 조합장 말얼 한분들어봅씨다." 유주상의 눈치에 따라 최익달이 사람들의 말을 막았다.
"예에, 명색이 청년단장을 맡고 있는 입장에서 이번에 발생한 불미스런 사건에 대하여 면목없고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께서도 아시다시피 청년단이란 보조역할일 뿐이지 작전권도 지휘권도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 자리에 나온 것은 청년단장으로서가 아니라, 제가 맡고있는 소직도 큰 애국하는 자리는 못될지라도 빨갱이한테 미움 사는 자린것은 틀림없고, 이 고장이 맘에 들어 제가 얼마 전에 논마지기를 장만하다보니 저도 여러분과 같은 입장이 되어 여기나온 겁니다. "유주상은 여유만만하게 꾸벅 인사를 했고, 사람들은 호의적인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분들이 하신 말씀을 경청했는데 하나도 틀린 데가 없는 당연하고도 지당한 말씀이었읍니다. 심재모, 그 사람은 마땅히 책임져야 하고, 우리는 또 책임을 추궁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방법이 문제 아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하신 말씀은 다 옳으나, 그러나 정말로 그 사람을 여기에 끌어다가 목을 비틀거나, 무릎을 꿇리거나,매질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우리의 솔직한 심정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읍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만나 우리끼리 한바탕 욕을 해대는 것으로 기분을 풀고 끝낼 겁니까? 그럴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감정을 누르고 냉정하게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방법을 강구해야 합니다. "숨을 돌릴 겸 뜸을 들이기 위해 유주상은 한 숨길 정도 말을 멈추었다. "에에, 그래서 제 생각으로는우리의 그런 뜻을 말로 할 것이 아니라 문서로 꾸미자는 겁니다. 말로하면 감정이 들어가기 쉽고, 또 날아가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문서로 꾸미면 감정이 안 들어가 점잖고 확실해지고, 날아가지 않고 언제까지나 남습니다. 제 생각이 어떻습니까?" 여기저기서, 좋소, 좋소, 하는 찬동이나왔다. "에에, 그 다음이 일을 처리하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렇게모여 앉기는 했지만 개인에 불과 합니다.이런 일은 개인들의 힘으로는효과가 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갑자기 무슨 단체를 만들 수도 없는일이고 한데, 마침 우리는 지난번에 결성한 좌익척결위원회라는 좋은단체를 가지고 있읍니다. 물론 여기 계신 분들 중에는 상당수가 회원이시기도 합니다. 그 단체의 이름으로 일을 처리하게 되면 효과가 아주 크리라 믿습니다. 그 단체에서 일을 처리하도록 일임하는 게 어떨까 싶은데, 여러분 생각은 어떠십니까?" 유주상은 여기서 말을 끝냈다.
"쪼옿네, 쪼오와." 최익달의 선창으로, "말 한분 씨어언허게 자알헌다."
윤삼걸이가 맞장구를 쳤고, "어허, 설익은 국회의원 빰따구 맞겄네. 그리헙시다." "금메 말이여, 인물맹키로 말도 청산유수시. 항, 그리허드라고." 모두 흔쾌하게 찬동을 했다. "에에, 저의 소견에 찬성을 해주시어 고맙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다시 모이는 것도 어렵고 하니 일을신속하게 처리하기 위해서, 일임한다는 것부터 문서로 꾸미기로 합시다." 의견을 묻던 유주상의 태도는 이미 바뀌어 일방적으로 일을 밀어 붙이고있었다. 그는 미리 준비했던 백지를 탁자 위에 내놓았다. "돌아가면서 이름을 적고 도장을 찍으십쇼. 도장이 없으면. 지장 도 좋습니다." 유주상은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물 컵을 들었다. "워째 종이가 두장이요?" 누군가가 물었고, "아, 예, 그 말을 깜박 잊었군요. 한 장은 보관해야 하니까 두 장에다 이름을 다 써야 합니다. 한 장에 한 번씩, 두번입니다. "유주상은 아차 싶어 말을 힘주어 다지며 손가락 두 개를 펴보이기까지 했다. 계획대로 일을 깨끗하게 마친 유주상은 중국집을 나온그길로 경찰서를 향해 바쁜 걸음을 옮겼다. 무거운 얼굴로 앉아 있던 심재모가 유주상을 맞았다. 요즈음 심재모의 심사는 말이 아니었다. 그 어이없는 병력손실을 연대본부에 보고해야 하는 참담함을 겪었고, 욕설이 태반인 연대장의 노발대발을 그대로 뒤집어썼고, 염상진에게 보복당한 패배감에서 벗어날 묘안이 없는 채 신경이 삭아들고 있는데, 지주와 유지라는 사람들이 자신의 무능력을 따져 책임추궁하기 위해 모임을 갖는다는 전화를 유주상한테서 받았던 것이다. 그 전화는 연대장의 폭언보다 몇 십 갑절 그의 자존심을 손상하고 모욕감을 느끼게 하는일이었다. "아이구 이거, 청년단장 노릇 해먹기 진땀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려, 제가 유도한 대로 일이 무난히 끝났읍니다." 유주상은 땀도 안난 이마를 훔쳤다. 심재모는 아무런 반응 없이 담배를 빼물었다. "그사람들 그거, 처음엔 굉장했읍니다. 서로 홍분들을 해가지고 사령관님을 욕해대고, 면전에서 말씀드리기 안됐읍니다만, 여기서 몰아 내야 한다고, 자기네들의 생명과 재산을 빨갱이들로부터 지킬려면 실력 있는 사람으로 바꾸는 수밖에 없다고 야단이 났었읍니다. 그래, 그 사람들이 실컷 떠들다가 제물에 지치기를 기다려 설득작전을 폈읍니다. 그 얘기야 제 낯내는 것 같으니까 생략하기로 하고, 어쨌든 좌익척결위원회에 일임한다아, 하는 쪽으로 귀결을 내렸읍니다. 그 결과가 바로 요겁니다."유주상은 양복 속주머니에서 기세 좋게 종이를 꺼내 심재모의 앞에 펼친다음 손바닥으로 다리미질하듯 종이를 쓸어 내렸다. 그것은 중국 집에서 받은 두 장의 위임장 중 한 장이었다. "이걸 찢으십쇼. 그럼 일은 없었던걸로 깨끗하게 끝납니다." "수고하셨소. 내 일에 관한 건데 내 손으로 찢고 싶지 않소. 유조합장께서 찢어버리십시오." 심재모는 담배를 끄며 씁쓰레하게 웃었다. "그게 좋겠읍니다." 유주상은 거침없이 종이를 박박찢어대며, 짜식이 오기는 창창해서, 비웃고 있었다. 유주상은 통쾌한 승리감에 차서 경찰서를 나왔다. 이곳에서 내쫓기는 심재모의 비참한 꼴이 눈앞에 훤하게 보이고 있었다. 어리벙벙한. 시원찮은 놈은 당연히 없애버려야 한다. 그리고, 우리편에서 적극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자가 와야한다. 볼세비키 혁명, 무슨 개뼉다귀 같은 소리냐. 엄연히 신분이 다르고, 능력이 다른데 어떻게 모두가 공평할 수가 있는가. 토지개혁, 어떤 날도둑놈들이 떠드는 개소리냐. 왜 남의 재산을 공짜로 나눠먹자는 거야.
공산주의는 단연코 쓸어 없애야하는 돼먹지 못한 정신의 문둥병이야.
유주상은 그 생각을 하면 언제나 그러는 것처럼 또 열이 치받치고 있었다.
지주들의 움직임을 알았을 때 유주상의 머리에는 그것을 심재모를 치는 또하나의 힘으로 이용하자는 생각이 번개같이 떠올랐다. 영향력이 절대적인 지주와 유지들이 그렇게 한 덩어리가 되어준 것은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없었다. 지난번에 띄운 고발장에 뒤따라 이번 일을 사건화해서 관계요로에 다시 보내게 되면 심재모야 말로 죽은 목숨이 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심재모가 그 사실을 알아서는 안될 일이었다. 그래서 위임장을 두 장 만들어 그의 앞에서 한 장을 찢는 연막을 쳤던 것이다. 지난번 고발장은 육군본부·헌병사령부로부터 시작해서 국회의원 최익승· 도지사 ·광주고법까지, 보낼 수 있는 데는 다 보냈다. 대통령 앞으로도 보낼까 말까를 놓고 말이 많았지만, 그 자리는 너무 높다는 데 의견이 모아져 결국 보류시켰다. 심재모는 아무리 감정을 자제하려고 해도 지주들이 벌이고있는 소행에 울화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다. 사람이 아닌 짓은 도맡아하면서 큰소리는 또 도맡아 치는 그 뻔뻔스러움이 너무 파렴치하고 역겨웠다 이번에 읍내를 장악 당한 것은 상황의 불가항력이 작용했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또한 구차스럽게 변명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염상진이가 또다시 지주들을 표적으로 삼은 것은 어디가지나 그들 자신이 자초한 일이었다. 소작을 그런 식으로 무자비하게 몰수하지 안았는데도 염상진이 그랬을 것인가. 현재의 상황으로 염상진은 군경과 대치하기에 여념이 없는 입장이었다. 그들은 자기네가 잘못을 저질러 당한 일가지 이쪽의 책임으로 떠넘기며 작당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말할 것이다. 너희들이 방어를 철저히 했다면 우리가 그런 꼴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 그렇게 되면 이쪽에서는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대꾸할 말이 없는 것이 아니라 말이 통하지를 않는 것이다. 그들의 논리대로 하자면, 자기네가 무슨 짓을 하거나, 어떤 잘못을 저지르거나 간에 군인이나 경찰은 무조건 자기네들의 생명과 재산을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심재모는 언제나 그 대목에서 혼란과 회의를 느꼈다. 군대는 무엇을 하는 조직인가, 나는 누구를 위한 군인인가. 군대는 돈과 힘을 가진 소수를 위해 존재하는가, 나는 그들의 생명과 재산을무조건 지켜주어야 하는 종인가. 이런 생각을 하면 으레 떠오르는 것이 손승호의 말이었다. "심 사령관이 기왕 이곳에 근무하게 된 입장이고, 이렇게 마주앉게 됐으니 하는 말입니다만, 이데올로기니 사상이니 하는것들이 뭐 별겁니까. 식자나 좀 들었다는 사람들은 고걸 자기네들만 아는무슨 거창한 이론이나 되는 깃처럼 어렵게 말하려 하고, 그런 것은 그런것대로 따로 있고, 생활은 생활대로 따로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들이 심한데, 결국 그런 것이 필요하게 된 건 사람의 목숨이 살아가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생활 그 자체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였읍니다. 그러니까 이데올로기나 사상이란 것이 유식한 사람들이나 입에 올릴 수 있는 전유물도 아니고, 책상 앞에서 따지는 연구물도 아니라는 겁니다. 배우지는 못했을망정 기본생활 조건의 모순 속에서 끝없는 고통을 겪으며 살아온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왜 그런 고통에 시달려야 하는지 그 이유를알고 있고, 그 잘못은 고쳐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고, 무슨 방법으로든그것은 바뀌어야 한다고 마음먹고 있는데, 그것은 이미 하나의 이데올로기고 사상입니다. 식자가 든 사람들은 거기에 논리와 이론이없으니 이데올로기나 사상이 될 수 없다고 합니다. 그 건 식자층의 상투적인 용업니다. 그건, 불교나 예수교는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경전을 가졌으니 종교고, 무속은 그런 것을 갖추지 못했으니 미신이다, 하는 식과 똑같은 발상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이 살아가는 절대적인 삶이 생활로 살아가는 것이지 어디 이론으로 살아가는 겁니까. 제가 왜 이런 말을 길게 늘어놓느냐 하면, 이 지방에 사는 절대다수의 가난한 농민들은 자기들이 왜 가난한지, 가난을 면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다 알고 있고, 더구나 해방이 되는 것을 계기로 그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길을 뚫어야 한다는생각을 품게 되었읍니다. 그들은 일정시대의 억압 속에서도 끊임없이 소작쟁의를 벌여 그 길을 뚫으려 했고, 해방이 되자 이제야 때가 왔다 생각한 그들은 다 같이 힘을 모아 거세게 일어났읍니다. 아시다시피 그게 바로 사십육년 시월에 전국 규모로 일어난 농민항쟁 아닙니까. 그 항쟁은 결국 폭력 앞에 피만 뿌리고 좌절되었읍니다만, 지금 그들은 침묵하고있을 뿐 그들의 욕구를 포기하거나 망각한 게 아닙니다. 그들은 행동하는 이데올로기의 덩어리고, 사상의 덩어리인 겁니다. 그런 그들은 자기네들이원하는 길을 뚫을 수 있는 그 무엇을 바라고 있읍니다. 그것이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그들은 그것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네들의 삶을 찾을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환영하고, 선택합니다. 그들의 그런 행위를 우익적 식자들은 또 부화뇌동이니 비이성적 감정주의니 하는 유식한 문자를 써가며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것으로 일축하려 할겁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는 삶의 절박함과 절실함 속에서 나오는 가장 이성적이고 현명하고 순수한 판단이고, 그들이 행사할 수 있는 절대적인 생존권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정치상황은 그들이 원하는 바와는 정반대로 치닫고 있읍니다. 심 사령관은 바로 그 틈바구니에 끼여있읍니다. 사람들이 군인이나 경찰을 경원하는 것 같다고 아까말씀하셨는데, 그 원인이 바로 거기에 있읍니다. 제가 지금까지 말한 현상이 이 지방만의 특성은 물론 아닙니다. 지역적으로 다소의 차이가 있을 뿐 그건 남한 전역에 걸친 문제점입니다. 전 정치는 잘 모릅니다만,옛날 봉건왕조 때에도 잘하는 정치는 백성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 했고, 다수의 백성이 원하는 바를 실천하는 임금을 현군이라고 했읍니다. 그런데 지금은 봉건시대가 아니라 명색이 민주주의를 내세운 시댑니다. 그러니 정치가 어때야 하는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어차피 군인이 되신거, 현명한 군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손승호의 말을 되새길 때마다 자신의 군인으로서의 출발이 너무 순진하고 단순했다는 사실을 심재모는 돌이키지 않을 수 없었다. 해방된 땅에서 무언가 바르게 한몫을 해보고자하는 마음을 정했을 때는 이렇듯 복잡 미묘한 사회구조가 제대로 보이지않았던 것이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권 서장이 눈치를 살피며들어섰다. "아, 예 , 금융조합장이 다녀갔읍니다. 일을 조용하게. 끝냈다고, 좌익척결위원회에 일임한 위임장을 가져와 손수 찢고 갔읍니다." "아아,네에에…" 고개를 끄덕이는 권 서장의 얼굴에는 미심쩍어하는 빛이 역연했다. "아니 , 왜 그러십니까?" 권 서장의 반응이 마음에 걸린 심재모가 물었다. 사실 자신의 마음에도 유주상의 협조적인 태도가 의문스럽게 남아있었던 것이다. "아, 아닙니다. 그 사람을 전혀 모릅니다만, 워낙 영리하게느껴져서요." "제 생각하고 같군요. 아주 똑똑한 사람 같기도 하고, 야심이 큰 사람 같기도 하고… 그런데, 그 사람을 보면 왠지 불안하고, 믿음이가지 않고, 그렇지요." "사람을 인상만 가지고 전부를 말할 수는없읍니다만, 인상이 꼭 틀리지만은 않거든요." "서장님이나 저나 그 사람을 전혀 모른다고 할 수도 없지요. 그 사람이 여기에 온 후로, 그 짧은기간 동안에 이것저것 분주하게 벌인 일들을 목격해왔으니까요." "글쎄요,일단 그 일이 조용하게 끝났다니까 다행,"서장은 문득 말을끊었다가, "성가시지 않아서 잘 됐읍니다"하고 말을 고쳤다. "그런 셈이죠." 피곤한 기색이 완연한 심재모는 느리게 담배를 뽑으며, "염상진 문제를 어떻게 했으면 좋을까요?" 고심하고 있는 문제로 화제를 바꾸었다. "예에,그게 머리에 이고 있는 화로 격인데…그걸 어째야 좋을지…" 권 서장은 힘준 손바닥으로 입술만 좌우로 문질러댔다. "그걸 말입니다, 병력을 총동원해서 한바탕 밀어붙이는 게 어떻겠읍니까." 심재모의 갑작스러운 말이었고, 권 서장은 놀라움과 의아함이 뒤섞인 얼굴로 그를 쳐다보기만했다. "역시 승산 없는 무모한 일이겠죠?" 심재모는 희미한 웃음을지었다. "뭔가 대책이 있긴 있어야겠지만, 그 방법은 현실적으로 어렵지않겠습니까. 다 아시다시피 그쪽 지형이 우리 쪽에 너무 불리합니다. 그건 지휘관의 능력이나, 부대의 전투력과는 별개 문제 아닙니까. 소극적인생각이라고 하실지 모르지만 현재 상황으로선 무리한 공격 보단 안전한 방어가 더 유리한 작전이 아닐까 합니다." "그건 사실이죠." 심재모는 한동안 천정을 올려다보고 있다가, "이번 사건에서 제기된 문제는, 우리속에 들어 있는 적의 세포활약과 상식을 초월하는 적의 기동성이었읍니다.
우선 이 두 가지에 대한 대책 없이는 우린 계속 당하게만 될 겁니다. 이문젤 급선무로 해결하도록 하십시다." "그렇게 하죠." "그리고, 이번에 집단음주를 한 건 상황이 지구전으로 계속되다 보니 마음들이 해이해진 탓일 겁니다. 계엄령이 다소 완화된 건 민간인들의 생업을 위한 생활상의 불편을 없애기 위한 것이지 작전상황의 호전 때문이 아닌데, 그 점을 착각한 결괍니다. 이 점도 강력 주지시켜야 합니다." 심재모는 머리에 무거운 통증을 느끼며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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