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관승·언론사 CEO출신 저술가 입력 2019.09.27. 05:00 조선일보 어딘지 엄숙하고 무거운 분위기일 것 같은 그리스 정교와 달리 고대 그리스인들이 믿던 신들은 우리 인간처럼 불완전한 모습이다. 서로 질투하고 라이벌을 모함하거나 일정한 프레임 속에 가둬놓고 견제하려 든다. 아름다운 여신이나 멋진 여성을 만나면 거침없이 바람도 피운다. 거꾸로도 마찬가지다. 잘생기고 매력적인 남성을 만나면 유혹을 한다. 그리스의 신들은 신은 근엄한 존재여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여지없이 깨버린다. 머리에는 둥근 모자와 뱀이 말려있고 날개 달린 지팡이, 수염이 없는 청년 헤르메스. 전형적인 헤르메스의 모습이다.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 원작을 기원전 2세기 로마인들이 복제한 것으로 바티칸 박물관에 소장 중. 그 중에 압권은 헤르메스다. 올림포스 산에 거주한다던 그리스의 수많은 신들, 특히 최상위 12명의 신들 가운데 헤르메스는 매우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미니정보] 헤르메스와 12명의 그리스 으뜸신] 고대 그리스인들은 도시마다 직업마다 각기 다른 신들을 모셨는데, 그에게는 특이하게도 따로 신전이나 신앙 중심지가 없다. 시장 입구 또는 길이 교차되는 곳에 헤르메스의 상(像)이 세워져 있었을 뿐이다. 길을 찾는 여행자, 양을 몰고 다니는 목동, 장사꾼, 상인, 그리고 전령(傳令)의 신이며 심지어 도둑들에게까지 수호신이었다. 헤르메스는 비록 신전은 없지만 그리스 신들 가운데 서열이 높은 12명의 신들 가운데 한 명이다. 캐릭터가 다양하고 개성도 강한 고대 그리스의 신들 가운데 헤르메스는 알면 알수록 매력덩어리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헤르메스는 가장 정감 어린 신이었다. 그림이나 조각의 주제로 다뤄질 때는 대부분 청년의 모습으로 표현되며 ‘뱀이 말려있는 지팡이’가 트레이드 마크다. 이 마크는 상업고등학교 혹은 경영대학의 휘장으로 종종 이용된다. 날개 달린 마법의 샌들을 신고 있는 모습도 종종 보인다. 자신의 모습이 남들에게 보이지 않게 하는 하데스의 황금투구를 쓰고 다닌다.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있는데, 고대 그리스 여행자들이 쓰던 햇빛 가리는 둥근 모자와 같다. 행선지 자체가 중요한 정보라는 뜻 아닐까? 로마신화에서는 ‘메르쿠리우스’(영어로는 머큐리)와 동일시된다. 헤르메스의 기원이 되었다고 믿어지는 ‘헤르마’ 석상. 높이 1미터 정도로 마을 입구에 서있거나 농작물의 경계로 쓰였다. 고대 신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헤르메스의 기원은 그리스 지방 곳곳에 있던 ‘헤르마’라는 이름의 석상이라 한다. 높이 1미터 정도로 마을 입구, 갈림길, 혹은 농작물 밭의 경계로 세워져 있었다. 원래의 헤르마는 두리뭉실한 돌기둥 같은 곳으로 몸뚱이 가운데 남근을 상징하는 돌기가 붙어있을 뿐이다. 길가에 서있어 길을 찾는 나그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되어 여행자, 상인, 파발꾼, 통신일반, 상인, 상업의 신이 되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제우스의 아들이기는 하지만 헤르메스는 제우스의 부인 헤라가 어머니가 아닌 다른 여자와의 사이에 바람을 피워서 생긴 자식이다. 아기 때부터 장난을 좋아하고 아이디어가 뛰어나 거북이로 그리스 최초의 현악기를 만든다. 요즘 말로 하면 혁신적인 신제품의 창안자라는 뜻이다. 배다른 형 아폴론의 목장에서 소 50마리를 끌고가 흥정 끝에 현악기를 주고 소들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데 성공한다. 예술가 기질이 강한 이복형 아폴론의 심리를 이용한 거래다. 이런 신화의 이야기들은 장사와 상업, 그리고 교역의 본질을 말하는 것으로 이렇게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아무리 값이 싼 물건이라도 사고자 하는 사람의 심리를 잘 이용하면 원래 가격보다 훨씬 비싸게 팔 수 있다. 즉 가격의 원리이며 부가가치의 힘이다." 고대 그리스 최고 조각가 프락시텔레스의 헤르메스. 기원전 330년 경의 작품으로 대리석 조각 가운데 최고의 걸작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갓난 아이인 디오니소스는 포도를 잡으려 하고 있으며 오른손에는 포도송이가 있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재미있는 것은 헤르메스가 도둑과 강도의 수호신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이는 아마도 장사와 사업이 갖는 여러 가지 속성을 상징하는 것 아닐까? 헤르메스는 머리가 좋고 재간 덩어리이며 말솜씨가 뛰어나기에 유혹의 선수이기도 하다. 그리스에서 여신들 가운데 최고의 미녀 여신 아프로디테에게 작업을 걸기로 했다. 더욱이 어엿이 남편도 있는 그녀에게 말이다. 나중에 로마 신화에서는 베누스가 되어 영어 이름 비너스가 되는 최고로 아름다운 여신이며 서양의 예술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미와 사랑의 상징이다. 불륜현장이 들켜 창피와 수모를 당하면 어떻겠느냐는 질문에 두 배 세 배의 수모를 받더라도 미녀 아프로디테와 사랑을 나누고 싶다고 천연덕스럽게 답한다. "저 여신의 아름다움 앞에서는 현명한 사람도 그 지혜를 도둑맞는 줄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헤르메스는 저 여신을 훔쳐내고야 말겠습니다." 밀로스의 아프로디테. 기원전 100년 경의 작품으로 루브르 박물관에 있다. 결국은 헤르메스가 해냈다. 그녀와의 사이에 낳은 아들 가운데 한 명이 유명한 에로스다. 혀와 말이 뛰어난 덕분에 협상의 명수였다. 헤르메스는 고대 그리스의 영웅이자 끝없는 여행자 오디세우스에게도 수호신 역할을 한다. 오디세우스를 오랫동안 억류하고 있던 요정 칼립소에게 찾아가 풀어주라는 제우스의 명령을 전달했을 뿐 아니라, 요정 키르케의 비장의 무기인 마법을 거는 악을 해독하는 비법도 전해주었으니까. 아름다운 여성을 쫓아가는 헤르메스. 기원전 470년 경 손잡이가 두 개인 암포라 도기 그릇에 새겨진 작품이다. 이처럼 다양한 얼굴과 이미지를 갖고 있으며 상이한 역할을 담당한 신이 바로 헤르메스다. 이승과 저승을 왕복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된 유일한 신이기도 하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벌써부터 상업과 소통의 중요성에 눈을 떴던 것이다. 모시는 신(神)을 보면 곧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선악의 개념이 분명해진 현대인들의 눈으로 보면 조금은 이상하게 느껴질 지 몰라도 그것이 고대 그리스인들의 사고체계였다. 반면에 엄격하지 않기에 예술적 영감과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무궁무진하게 제공해주는 원천이 되기도 한다. 과거 양을 몰고 다니는 목동이나 상인들 그리고 여행자를 지켜주는 수호신이었다면 헤르메스는 이제 디지털 노마드의 신이다. 전령(傳令)의 신 헤르메스처럼 누구보다 앞서 극비의 정보를 다루고 비즈니스를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내는 까닭이다. 만약 유럽 박물관에서 헤르메스를 만난다면 더욱 더 반갑게 인사를 해야 한다. 늘 이동하며 피곤한 삶을 살아야 하는 디지털 노마드에게 헤르메스는 언제나 든든한 우군일 테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