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밭서점
제주문화포럼 사회교육 2팀장 이진희
1989년 처음으로 서울 인사동 고서점에 들렀었다. 찾던 책 딱 한 권 김기림 시집과 다른 몇 권의 책을 구입했다. 옛날 책보 그대로 보자기로 싸주던 돋보기 쓰신 주름 깊은 노인 인상과 쿡쿡 묵은 책들의 좋은 냄새가 지금도 생각하면 훅 다가오는 것 같다. 한량없이 방황하던 시절, 기형도의 의문의 죽음과 그를 추앙했던 나의 마음 들키지 않으려 그 시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고 기대했던 것과는 아주 다른 얼음장 같은 말을 들으며 풀죽어 돌아 나왔던 기억이 있다.
제주에 딱 하나인 헌책방. 광양로터리에서 중앙로 방향으로 내려가다 우회전 첫 골목 10m정도 안쪽에 있다. 전 주인이 1985년 2월 개업한 것을 1992년 7월 인계 받아 경영에 위태로움과 정신적 압박을 견디며 책임감과 자존심으로 운영을 이어가는 김창삼 선생님을 만났다. 언제 보아도 늘 단아한 모습은 산 속 깊은 작은 암자의 조용한 마당 같은 느낌이다. 제주 문화의 한 공간을 지키며 겪으신 그간의 내력과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말씀 들었다.
책을 좋아해서 어릴 때부터 꼭 해보고 싶은 것 두 가지가 있었는데 헌책방 운영과 목장 운영이었다. 목장 운영은 꾸준히 실천 단계로 축산 전공 후 근무해서 어느 정도 이뤘고, 그 후 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35세 때였는데 그 시기 놓치면 직장을 계속 다녀야 할 형편이었다. 1985년 2월 28일 전 주인이 남문 제주은행 앞에 5평의 책밭서점을 개업했다. 1985년 3월 1일 서귀포 친구가 결혼해서 이사하니 전날 이삿짐 옮기는 걸 부탁받았다. 그러나 가보니 이미 이사는 다 된 상태였고, 귀가 길 간판 없이 들어가 보니 현수막 붙인지 30분, 첫손님이었다. 제주에 헌책방이 없었던 그 시절, 이곳에 함석헌 선생님의 씨알의 소리 몇 권과 잡지 등, 무크지인 노동 잡지가 있었다. 목장 다니며 주인과 친해졌다. 해 보고 싶은 일이었다. 전 주인에게 사람 냄새 나는 곳, 구석구석 먼지 쌓인 만큼 애환이 서린 곳, 추억이 곁들여져 있는 곳이라 좋다고 말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은 생각인데 추억의 공간, 기억의 창고, 문화의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문 닫게 되면 1순위로 부탁드렸다.
1992년 6월 14일 전 주인이 육지 가야해서 해 볼 수 있나 물었고, 바로 욕먹으며 사표내서 6월말 인수인계 하여 7월부터 시작했다. 처음엔 참 좋았다. 한 달 새벽 3~4시까지 책을 보았다. 별 책이 다 있어 읽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광령이 집인데 아내가 서점으로 출근하면 식사하러 가곤 했다. 살면서 해보고 싶은 일 100% 달성은 못해도 맨 처음엔 헌책방 60세까지만 하고, 그 후 65세 까지는 전국 사찰 돌아다니며 농담하고, 5년은 혼자 살고, 70세에 다시 새로운 인생을 살고 싶었다. 그런데 요즘 경영이 잘 안 된다. 집세 못내 유지하려고 농사 본격적으로 6년 전부터 시작했다. 주위 반경 50~60m 이사 다녔다. 버스 정류소에서 여기 올 즈음엔 폐업하려다 나이 드신 분들과 선생님들, 공직에 계셨던 분들이 안 된다고 힘들어도 하라 해서 농사지으며 운영을 잇고 있다.
어려워지기 시작한 것은 인터넷 보급 이후였다. 예전은 지식을 얻을 수 있는 통로가 책과 백과사전이었다. 5~6년 전에 부탁하여 2~3십만 원 정도에 구입하여 창고에 15질이 있다. 요즘은 아이들 한 둘 낳다 보니 새 책 구입해 준다. 육지는 한두 군데 헌책방 된다고 헌책 마니아들이 찾고, 인구가 많은 지역은 중, 고등부 참고서가 나가는데 이곳은 전혀 안 된다. 줄이고 줄여 7차 교육 과정만 몇 권 있는 실정이다. 책들을 둘러보면 알지만 백화점이다. 작은 잡지와 관에서 출간한 비매품도 있는 책 백화점이다. 단골 위주로 운영하는데 이제는 단골도 한 두 권정도 구입해 간다. 어떤 날은 2천 원짜리 한 권 안 나가는 날도 있다. 앞으로 어떻게 운영할지 잘 모르겠다. 그러면 궁극적으로 무엇을 위해 운영하는가 묻는다면, 향토지를 체계적으로 갖출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제주도에 산재해 있는 여러 도서관이 향토자료를 체계적으로 구색 갖춘 곳이 없다. 앞으로 몇 년 향토자료실 갖추는 것이 꿈이다. 관련된 책 2천여 권 있다. 종별 2천종으로 향토 자료실을 제대로 마련하고 싶다. 판매도 판매지만 공부하고 공유하는 공간을 꿈꾼다. 서점 운영도 농사일도 잘 안 되어 살림집이 있는 광령 가서 70~80평 지어 무인 책방을 할까 생각 중이다. 오픈 시간 정해서 50~60 평정도 무인 책방 열어 권당 1천원도 좋고 2천원도 좋겠다. 과수원 바로 옆이라 마이크 설치해 부르면 뛰어올 수 있도록 하면 될 것이다. 2층에는 향토 자료실로 꾸며 도서관 형식의 행사도 가능하도록 하고 싶은 바람이다. 현재는 농사지으며 오후 3시에 문을 여는 이유로 책방도 운영이 어렵고 농사도 집중이 잘 안 되는 현실이다.
헌책방 운영하다 보면 재미있는 일도 생긴다. 고서 취미인 여행가들 중에는 방문해서 뒤적거린다. 샘플이 있고, 고서 3천권 있는데, 다 꺼내 놓으면 금방 낡아져 꼭 원하는 분에게만 볼 수 있도록 안내하곤 한다. 전에 신혼여행 온 부부가 있었는데 아침 9시에 서점에 잠깐 본다고 들어와 색시를 밖에 세워놓고 책만 보니 이혼한다는 말까지 나오는 걸 보았다. 또 한 번은 중학교 때 책 훔쳐갔는데 잘못했다고 편지 보내오기도 했다. 얼마 보내면 되겠냐고. 작가들 방문해도 자신을 밝히지 않아 일반 손님과 마찬가지라 누군지 알 수 없고 골목 안이라 눈에 띄지 않아 이제 거의 들어오지 않는다. 장정일 작가가 이곳을 다녀간 후 <독서일기>에 쓴 적이 있다.
폐업하면 문화 공간 한 축이 무너지는 것이고, 제주도에 헌책방 문화도 없게 된다. 앞서가는 것만이 문화가 아니라 고정된 것도 문화로써 유지되어야 한다. 새로운 것만 추구하는 것을 보니 안타깝다. 문화의 한 축을 받치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기에 문 못 닫는다. 도움 주는 것도 없지만 관 간섭 받는 것이 싫다. 가족들은 내가 하는 일에 대해 간섭하지 않는다. 커가며 헌책방 운영하는 것에 아이들에게 물으면 직장생활 몇 년, 단체 생활 해보다 하겠다는데 어떻게 할지는 모르겠다. 두세 명 젊은 친구들이 해 보겠다 해서 이것으로 먹고 살려 하면 안 되고, 이중 직업을 가질 여건이면 가능하다고 했다. 마음 비우고 책 좋아하면 몰라도 젊어 헌 책하고 노는 것은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건설적이며 진보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바람 불면 바람 부는 대로 살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먹고 살려하면 어렵기 때문이다.
책은 80~90% 육지에서 구입한다. 농사짓기 전부터 3~4개월 1회 분기별로 구입했었는데 요즘은 1년 1회 가나마나한다. 육지 시장 가격 흐름 근 몇 년 동안 모른다. 정보 교환 못한다. 육지에서 고서 나오면 취급인 7~8명에게 알려지고, 고가이니 5~6명이 합쳐 구입 한 후 나누곤 했는데 요즘 그런 연락 없다. 제주에 헌책방이 86~87년에는 시민회관 근처 두 군데, 동문로에 한 군데로 총 네 곳 있었는데 1년도 못 버티고 폐업했다.
얼마 전 서울 금호동에 있던 고구마 헌책방이 성남으로 이사했다. 논밭에 50만권 보유하여 개점했다. 이사만 하는데 6개월 걸렸다고 한다. 2층은 LP판만 놓고. 변두리 논밭에 성남시 변두리 새로운 문화가 창조되고 있다.
이처럼 규모는 작더라도 이와 유사한 문화 공간이 제주에도 어딘가 생겨나기를 바라시는 선생님의 마음, 직접 표현은 하지 않으셨지만 그 마음을 읽으며 인터뷰를 마쳤다.
최근 몇 년 전 서울 대학가 몇 곳 헌책방들이 서로 연대하여 문화를 꽃피우고 있다는 신문보도를 접하고 반가웠었다. 서울 갈 기회가 있으면 들르려 신문 스크랩을 하면서 제주에도 작은 헌책방 몇 군데가 있어서 이런 문화를 만들어 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선생님의 소망대로 집 곁 밭에 작은 헌책방과 2층에 작은도서관 형태의 공간을 마련하여 20여년 이상 헌책방 운영을 해 오신 철학이 그대로 전수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집세 때문에 걱정 않고 자연과 맞닿은 농부의 삶이 바로 책과 연결되고 그것으로 평화로운 헌책방 문화가 유지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모른다. 언젠가 몇 년 흐른 후 광령에 아담한 작은 헌책방, 작은도서관이 생겨 제주의 향토자료를 공부하기 위해, 농부 주인장의 철학을 만나기 위해, 작은도서관들의 연대가 이뤄지는 새로운 문화를 이루기 위해 길 나서는 일이 생길지도.
인터넷 대형 서점들이 생겨나며 할인 경쟁으로 동네 작은 서점들이 문을 닫는 형편에 헌책방을 유지하기 위한 자존심에 얼마나 많은 인내가 강요될지 충분히 이해된다. 새로운 것에 대한 집착과 소비가 마치 인격과 비례하는 양 현실은 헌것, 오래된 것에 대한 애정을 품을 겨를을 주지 않는다. 천박한 소비와 자본에 물든 현대인들에게 먼지 쌓인 책들에 돈과 시간을 배려하라고, 애정을 가지라고 말하는 것은 차라리 우이독경만 못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군가의 고집스런 외로운 삶의 문화와 철학이 새로운 기운으로 어떻게 뻗어나갈지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희망은 만들어 가는 것이며, 희망하는 자의 희망의 크기에 따라 그 결과 또한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책밭서점 T.752-5126)
2013년 3월 31일 (일) -제주문화포럼 4월호 소식지 게재 글
첫댓글 이런 공간이 있었군요. 다음에 꼭 한 번 들러봐야겠어요...!
오오...너무나 대단하신 책방주인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