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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창세기 46장 28절-47장 12절
고센 땅에 살게 되리이다
지난 시간 야곱의 가족이 애굽에까지 이르게 된 내용을 살폈는데, 하나님께서는 애굽으로 가기를 두려워하는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애굽에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가나안에서만이 아니라 애굽으로 내려갈지라도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실 것이고,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도 번성하여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애굽으로 내려간 사람들의 명단을 기록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야곱을 비롯하여 그의 아들들과 딸, 그리고 손자들과 손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때 앞서 간 요셉과 그의 자녀들까지 포함하여 70명인데, 여기에는 야곱의 며느리들은 빠져 있습니다. 창세기 46장 26절을 보시면 “야곱과 함께 애굽에 들어간 자는 야곱의 며느리들 외에 육십육 명이니...” 그리고 이때 66명이라는 말은 야곱과 며느리를 제외한, 그리고 앞서 간 요셉과 그의 두 아들을 제외한 수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27절을 통해 70명이라고 말하는 것은 야곱과 요셉, 그리고 그의 두 아들을 포함한 수입니다. 당연히 며느리들은 제외가 된 수입니다.
그런데 이 수에 대하여 사도행전 7장에서는 스데반이 75명으로 언급하고 있다고 할 때(행7:14) 사본 상의 오류인가로 생각하기 쉽지만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구약 성경인 70인역에서는 그 수에 대하여 75명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점을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는 20절과 21절 사이 요셉의 아들들의 자녀들이 기록되어 있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여기서 한 가지 정리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지금 창세기를 통해 기록된 70명의 경우는 분명 그때 태어난 자들을 기록한 내용입니다. 그럼 요셉의 두 아들의 자녀들은 태어난 것인가?
일단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될 때의 나이가 30세입니다(창41:46). 그리고 그때 결혼하게 됩니다. 만약 요셉이 총리가 되고 얼마 되지 아니한 때에 풍년과 흉년이 연속적으로 일어난 일이라면 요셉의 아들들의 자녀들이 태어났다고 말하기는 불가능합니다. 만약 가능하려면 요셉이 총리가 되고 난 뒤 곧바로 풍년과 흉년으로 들어갔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요셉의 자녀들이 태어난 때가 흉년 전의 일이기 때문에(창41:50) 가능하려면 풍년과 흉년이 연속적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풍년 이후 어느 정도 꽤 시간이 지나야만 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요셉이 총리가 되고 난 뒤 오래지 않아 풍년과 흉년이 연속적으로 일어났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요셉의 아들들의 자녀가 태어났다고 볼 수 없는데, 70인역이 잘못된 것은 아닌가? 그리고 스데반이 75명으로 언급한 것은 사본 상의 오류가 아닌가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 우리가 매우 주의해야 할 것이 있는데, 성경의 기록을 함부로 잘못되었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사본 상의 오류를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자체는 오류가 없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감동으로 사도행전을 기록하게 하셨을 때, 스데반으로 하여금 75명을 언급했다면 거기에도 오류가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왜 하나님께서 75명을 기록하게 하셨을까, 그렇게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묻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만약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것처럼 요셉이 총리가 되고 난 뒤 오래지 않아 풍년과 흉년이 일어났다면 요셉의 아들들의 자녀들은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그들의 이름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스데반을 통해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말씀하신 사실, 즉 애굽으로 내려간다 할지라도 거기서도 내가 너로 하여금 큰 민족으로 이루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앞서 보낸 요셉의 가문을 통해 어느 정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요셉의 아들들의 자손까지 기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기록되었다고 할 때 성경이 잘못되었다는 그런 쪽으로 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합당한 자세가 아닙니다. 여기서 이렇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저기서는 저렇게 말씀하신다고 할 때 성경이 틀렸다는 쪽으로 가서도 안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렇게 기록하게 하셨는가를 생각하는 것이 성경 앞에서의 합당한 자세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을 보시면 야곱 가문이 고센 땅에 머물게 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데, 28절 이하 30절은 야곱과 요셉의 만남에 대하여 기록합니다. “야곱이 유다를 요셉에게 미리 보내어 자기를 고센으로 인도하게 하고 다 고센 땅에 이르니 요셉이 그의 수레를 갖추고 고센으로 올라가서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을 맞으며 그에게 보이고 그의 목을 어긋맞춰 안고 얼마 동안 울매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 28절에서 야곱이 유다로 하여금 고센으로 인도하게 했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야곱이 고센 지역을 잘 알아서 고센으로 가려고 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요셉이 형들을 가나안으로 보낼 때 아버지와 가족을 이끌고 고센이라는 지역으로 오도록 말한 바가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럼 요셉이 왜 아버지와 그 가족들을 고센 지역으로 오도록 했는가? 이후에 나오는 것처럼 야곱 가문은 대대로 목축을 하였는데, 고센 땅이 목축을 하는 데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고센으로 오는 과정 속에서는 야곱이 유다로 하여금 요셉에게 미리 보내어 고센에 도착해 간다는 것을 알렸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고, 도착 후 요셉이 고센으로 올라와 아버지를 만나게 되면서 한편으로는 기쁨의 눈물을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동안 뵙지 못했던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렸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야곱의 기쁨이 얼마나 큰지 지금까지 살아 있는 요셉을 보았기 때문에 지금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까지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죽었다고 생각한 요셉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부터, 그리고 이제 만나면서 기쁨의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서 요셉이 고센에 머물 수 있도록 언급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31절 이하 34절입니다. “요셉이 그의 형들과 아버지의 가족에게 이르되 내가 올라가서 바로에게 아뢰어 이르기를 가나안 땅에 있던 내 형들과 내 아버지의 가족이 내게로 왔는데 그들은 목자들이라 목축하는 사람들이므로 그들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를 이끌고 왔나이다 하리니 바로가 당신들을 불러서 너희의 직업이 무엇이냐 묻거든 당신들은 이르기를 주의 종들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목축하는 자들이온데 우리와 우리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소서 애굽 사람은 다 목축을 가증히 여기나니 당신들이 고센 땅에 살게 되리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처음부터 요셉은 아버지 야곱과 그의 가문이 고센에 거주하도록 할 목적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 땅에 목축을 하는 데 있어서 가장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이유를 더 확인할 수 있는데, 34절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애굽 사람들은 목축을 가증히 여긴다는 부분입니다. 목축을 가증히 여기기 때문에 애굽에서 목축을 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애굽 사회에서 가장 낮은 신분 혹은 노예가 하는 일에 속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목축을 통해 생산되는 것들은 반드시 필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조선 시대에 보면 백정이라고 해서 도살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도살한 고기를 양반들이 먹었습니다. 고기를 먹기 위해서는 백정이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조선 시대의 백정은 천민 중에서다 가장 낮은 위치에 있었는데, 지금 애굽에서 목축이 그런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애굽 사람들은 목축을 가증히 여겼고, 가증히 여겼기 때문에 굳이 애굽 중심 지역에서 떨어진 고센이라는 비옥한 땅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고센이라는 지역은 애굽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는 곳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애굽 사람들 입장에서 최소 70명이나 되는 한 가문이 애굽으로 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도 그들이 가증히 여기는 목축하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요셉은 애굽의 중심 도시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가족들이 요셉이 머무는 곳에 함께 머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애굽 사람 중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요셉은 이러한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애굽 사람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 안에서, 그러면서도 목축을 하는 아버지 가문에게도 유익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비옥하지만 그러나 현재 애굽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는 고센이라는 곳에 머물도록 계획을 세웠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더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들이 싫어하는 목축을 통해 그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저들이 목축을 가증히 여기지 않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고센이 아니라 애굽 사람들과 섞여 살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분명 저들과 동화되어 살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애굽 사람들이 가증히 여기는 목축을 야곱 가문이 하고 있었고, 그 결과 저들은 애굽 사람들에게 반가운 손님이 아니라 반길 수 없는 손님으로 자리할 수 있었던 겁니다. 가까이 지내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거리를 두고 싶은 사람들로 있었던 겁니다. 바로 그것이 야곱 가문으로 하여금 저들끼리 더욱 유대를 공고히 할 수 있게 하며, 애굽에 동화되는 것이 아니라 애굽과 구별된 자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이런 방식을 통해 자신의 교회를 지키시고 보호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칼빈의 주석을 보면 “이제 저들의 비천하고 초라한 생계방식은 그들과 애굽인들을 갈라놓는 장벽이 되었다.”고 말하면서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의 후손들이 애굽 사람 속에 동화되고 말 처지에서 구출하려는 것이었다.”고 설명하는데(창세기 47장), 요셉은 주된 목적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칼빈은 이런 해석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교훈을 하기도 합니다. “교회의 영내를 벗어나서 왕궁 속에 거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여호와의 전의 한 귀퉁이에 사는 것이 얼마나 더 좋으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의 멸시와 비난을 받으면서라도 하나님의 아들들과의 신성한 유대를 확보할 수 있다면, 그것을 괴롭다고 생각지 말자. 요셉은 애굽에서의 온갖 호화 생활보다는 이 유대를 더 좋아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세상으로부터 교회가 멸시와 천대를 받는가? 하나님은 왜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멸시를 받고 천대를 받도록 내버려두시는가? 그들이 우리를 반기지 않는다는 것을 통해 그들과 동화될 수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 받는 고난이 우리의 잘못으로 인한 고난이라면 세상으로부터 멸시를 받고 천대를 받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머리를 숙여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진리가 있고 진리의 말씀을 따른다는 것 때문에 우리를 멸시한다면,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고 그분을 따른다는 것 때문에 우리를 천대한다면, 우리 역시 그들과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즉 그들과 동화되기보다는 그들과 구별된 자로서 서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높은 자리가 아니라 낮은 자리를 선택하는 것이라면, 그것 때문에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구하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 때문에 때로는 손해도 보는 것이라면 그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창세기 47장으로 오시면 고센 땅에서 야곱 가문이 살 수 있도록 애굽 왕 바로의 허락을 받는 내용입니다. 먼저 1절과 2절을 보시면 “요셉이 바로에게 가서 고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와 내 형들과 그들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가나안 땅에서 와서 고센 땅에 있나이다 하고 그의 형들 중 다섯 명을 택하여 바로에게 보이니” 이미 요셉은 고센 땅에 거주하도록 하기 위해서 아버지 야곱으로 하여금 고센 땅으로 오도록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의 허락을 받고자 하는데, 여기서 우리는 애굽 왕 바로에 대한 요셉의 자세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가 요셉을 애굽 총리로 세우면서 준 권세는 무엇입니까? 창세기 41장 40절에 보면 “너는 내 집을 다스리라 내 백성이 다 네 명령에 복종하리니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니라” 하고자 한다면 못할 일이 없을 정도로 높은 권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소위 애굽에서는 2인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자신을 세운 자가 바로임을 잊지 않았습니다. 바로에 의해 세워졌기 때문에 바로의 허락을 통해 자신이 계획한 일을 실행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위에 있는 권세에 대한 존중이 분명 나타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는 부분에서도 말씀드린 바가 있지만 세속 권세자들에 대한 존중은 하나님의 명령임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존중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들이 명하는 것이나 그들이 금하는 것에 대하여 순종하는 것입니다. 물론 전제되는 것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합당한 것만’이라는 전제입니다. 때문에 만약 세속 권세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쪽으로 명하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결코 따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보다 더 높은 권세를 지니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께서 바로 세속 권세자들을 세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위에 있는 권세자들에게 복종해야 하지만, 가장 위에 계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자로서 복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들에 대한 존중입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가정에 부모와 자녀를 두셨다면 자녀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와 권위를 따라 부모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중적인 죄를 짓는 것인데, 한편으로는 부모에게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5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께도 죄가 됩니다.
반면 부모는 자녀들에게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부모로서의 권위를 주셨기 때문에 함부로 해도 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맡겨주신 자녀들이기 때문에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해야 합니다. 부모로서 자녀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축복하는 것, 때로는 격려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책망함으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걸어갈 수 있도록 지도하는 것 등, 그것이 믿음의 부모가 해야 할 일입니다.
여러분, 십계명 중 다섯 번째 계명이 부모 공경에 대한 내용인데, 하나님께서는 이 계명을 통해 모든 질서와 권위에 대하여 존중과 존경이 나타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만이 모든 질서 위에 계시고 하나님만이 모든 권위 위에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세속 권세자들이나 세상의 부모는 다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질서를 따라 먼저 태어나게 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권위를 부여하신 것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보다 더 높은 권세를 가지고 있는 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말씀 안에 세속 권세자들에 대한 순종이 있는 겁니다. 그 말씀 안에 부모 공경의 명령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말씀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세속 권세자들에게 순종해야 하지만, 말씀에 위배된다면 그때는 따를 수 없습니다. 부모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셉은 자신을 세운 애굽 왕에 대한 존중을 잃지 않고 항상 같은 자세를 가졌습니다. 그래서 왕으로부터 권세를 받았지만 왕의 허락을 받아야 할 경우가 있다면 왕의 허락을 요청했습니다. 이때 요셉은 70명이 넘는 수가 애굽으로 왔지만 그들 모두를 바로 앞에 세우지 않습니다. 우리말 번역에서는 형들 중 다섯 명을 택하여 바로 앞에 보였다고 되어 있는데, 여기에 무슨 의도가 있어서 그렇게 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어쨌든 바로는 저들에게 요셉에게 관용을 베푼 것처럼 관용을 베푸는데, 3절에서 6절을 보시면 “바로가 요셉의 형들에게 묻되 너희 생업이 무엇이냐 그들이 바로에게 대답하되 종들은 목자이온데 우리와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고 그들이 또 바로에게 고하되 가나안 땅에 기근이 심하여 종들의 양 떼를 칠 곳이 없기로 종들이 이 곳에 거류하고자 왔사오니 원하건대 종들로 고센 땅에 살게 하소서 바로가 요셉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아버지와 형들이 네게 왔은즉 애굽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땅의 좋은 곳에 네 아버지와 네 형들이 거주하게 하되 그들이 고센 땅에 거주하고 그들 중에 능력 있는 자가 있거든 그들로 내 가축을 관리하게 하라” 앞서도 말했지만 목축을 가증히 여기지만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것들을 취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애굽 왕도 그가 소유한 가축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애굽 왕 바로는 고센 땅에 머무는 것을 허락하면서 자신의 가축까지 관리하도록 명합니다.
여러분,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방식이 얼마나 놀라운지 모릅니다. 애굽 사람들 입장에서는 가증하고 천박하다고 생각한 그 일이 하나님께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는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적용해 보면 세상 사람들이 하찮게 여기는 일을 한다 할지라도 그 일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일,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하나님이 지시키고 보호하시는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요셉과 같은 자리에 앉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비전을 가지라고 외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거창한 비전을 가질지라도 우리의 소원대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될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 백성 중 많은 사람을 요셉과 같은 위치에 오르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요셉의 형들처럼 그렇게 살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런 삶은 실패한 인생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고 계시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기준으로 해서 판단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셔야 합니다. 누가 우리를 구원할 왕이 구유에서 태어날 줄 알았겠습니까? 온 세상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이가 인성을 취하여 이 땅에 오실 때 구유에서 시작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가장 낮은 자리에서부터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시작하게 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식은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방식일 때가 많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지혜는 우리보다 깊고 높고 넓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롬8:33-34)
우리는 간혹 이렇게 말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이게 더 낫지 않습니까? 이게 더 나은데 왜 이렇게 하십니까?” 그리고는 자기 생각대로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교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까지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것까지 다 헤아려 생각하시고 작정이라는 틀로 정하셨습니다. 거기에 이런 저런 수식어가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수식어를 붙입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지혜가 더 높고 깊고 넓습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어지는 내용은 요셉이 아버지 야곱을 바로 앞에 서게 한 일입니다. 7절 이하 10절을 보시면 “요셉이 자기 아버지 야곱을 인도하여 바로 앞에 서게 하니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매 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나이가 얼마냐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 권위에 있어서는 분명 왕이 높은 자로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누구를 축복하느냐? 야곱이 왕을 축복합니다. 외적으로 보자면 야곱이 왕을 의존합니다. 애굽에서 살게 된 것 자체가 그것을 분명 보여준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복을 비는 자는 왕이 야곱을 향해 하는 것이 아니라, 야곱이 왕을 향해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진실이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 앞에서 우리가 없는 자일 수 있습니다. 세상 앞에서 우리가 가지지 못한 자일 수 있습니다. 세상 앞에서 우리가 연약한 자처럼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가 세상을 향해 축복하는 자로 있지, 세상이 우리를 축복하는 자로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창세기 12장 2절과 3절입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복은 복음이라고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영적인 복입니다. 이 복을 어떻게 세상이 우리에게 줄 수 있겠습니까? 세상은 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이 복을 가진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외적인 복에 있어서는 세상이 많은 것처럼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야곱 가문이 애굽으로 온 것처럼 애굽이 더 풍성한 외적 복을 가진 자로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외적일 복일뿐입니다. 진정한 복은 야곱 쪽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애굽 왕 바로가 야곱을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야곱이 애굽 왕 바로를 축복하는 형태로 있는 겁니다. 우리가 세상 앞에서 잊지 말아야 할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세상이 줄 수 없는 복을 이미 받았습니다. 세상의 어떤 것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다고 고백할 수 있는 복을 이미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것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 육체를 보존하기 위해서 세상의 것을 채우기도 하십니다. 야곱 가문이 애굽을 의존하게 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런 모습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지 나사로와 같은 자로 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로 인하여 만족하며 살 수 있는 자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이 줄 수 없는 복은 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뿐만 아니라 외적인 형태는 야곱 가문이 애굽을 의존하는 형태로 있지만, 그것까지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애굽이 애굽처럼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럼 왜 그렇게 하셨는가? 애굽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살핀 바 있는 것처럼 야곱 가문을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애굽으로 하여금 야곱 가문을 받게 하신 것이고, 그것보다 앞서 요셉을 먼저 보내셨던 겁니다.
물론 야곱 가문은 애굽 왕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체요,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 때문에 도구로 사용되는 사람의 손길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누군가 나를 돕는다면 돕는 손길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이웃 사랑을 말씀하시는 계명을 통해 도움을 받는 사람은 돕는 사람에게 감사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일로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과 함께 그 모든 역사를 하나님이 쥐고 계시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계속해서 본문을 보시면 바로 앞에 선 야곱에게 바로는 나이를 묻습니다. 여기에 대해 야곱은 나그네 길의 세월이 130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비교하기를 조상들에 비해서는 얼마 되지 않는 나이에 불과하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야곱이 강조하고 있는 바가 무엇이냐 하면 자신이 나그네로서 험한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나이는 조상들에 비해 오래 산 것은 아니지만 그 짧은 인생길이 나그네로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럼 왜 이런 말을 하고 있느냐? 애굽으로 와서 애굽에 의존하는 것처럼 살지만 자신과 그의 가문의 본질은 이 땅에 매여 사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바로에게 축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히브리서 11장을 통해 더욱 분명히 나타나는데, 8절 이하 10절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그리고 13절 이하 16절을 보시면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한 마디로 이 세상에 매여 사는 자가 아니라, 하늘 본향을 바라보며 사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 20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 자인 겁니다(골3:2 참조). 그리고 그런 자로서 복을 빌 수 있는 자인 겁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낮은 자리에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받은 복은 세상의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복임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세상의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복을 이미 받았기 때문에 세상을 부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것 때문에 마치 우리가 낮은 자리에 있는 것처럼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세상은 우리를 낮은 자로 볼 수 있을지 몰라도, 우리는 결코 낮은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가 세상을 향해 축복할 수 있는 자인 겁니다.
아브라함이 소돔의 멸망에 앞서 기도한 것이 무엇입니까? 의인 열 명만 있다면 소돔을 멸하지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소돔 안에 아무리 많은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그들이 멸망 받지 않는 이유,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당장 받지 않는 이유가 의인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우리의 가치가 높은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어떻게 표현합니까?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6:9-10)
때문에 우리 스스로 우리를 비하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무능하고 죄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겸손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 앞에서는 얼마든지 당당할 수 있는 자가 바로 우리라는 사실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비록 나그네 인생이지만, 이 땅에서는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서 세상을 의존하는 것처럼 있지만,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복을 이미 가진 자로 있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복을 빌어줄 수 있는 자, 그래서 그들 앞에서 얼마든지 당당할 수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 11절과 12절로 오시면 “요셉이 바로의 명령대로 그의 아버지와 그의 형들에게 거주할 곳을 주되 애굽의 좋은 땅 라암셋을 그들에게 주어 소유로 삼게 하고 또 그의 아버지와 그의 형들과 그의 아버지의 온 집에 그 식구를 따라 먹을 것을 주어 봉양하였더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결국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제공하신 것임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정리할 것은 11절에서 바로가 야곱 가문에게 애굽의 좋은 땅 라암셋을 그들에게 주었다고 되어 있는데, 고센의 또 다른 지명이 라암셋입니다. 그러니까 세월의 흐름 속에서 그 지명이 바뀔 수 있는데, 출애굽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어디서부터 출발했는가 할 때 라암셋으로부터 출발한 것으로 말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을 떠나서 숙곳에 이르니...”(출12:37) 특히 출애굽기 1장에 보면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학대할 때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을 짓게 하는데, 그 성의 위치가 비돔과 라암셋입니다(출1:11). 즉 이스라엘 백성이 거주하고 있던 비옥한 땅에 국고성을 짓도록 하면서 그들의 인력을 동원하고, 그런 방식으로 그들을 괴롭게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곳에 이스라엘의 터전을 마련해 두시고, 거기서 큰 민족을 이룰 목적을 가지고 계신 겁니다. 그러나 거기에 완전히 거주하도록 하신 것이 아니라 잠깐 그곳에 머물도록 하실 뿐입니다.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오게 하실 것입니다. 즉 약속의 땅인 가나안이 있는 한 애굽은 나그네로서 잠깐 거처 가는 곳일 뿐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자면 가나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본향은 어디 있느냐? 하늘에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요14:2)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주께서 예비하러 가신 곳이 바로 우리가 영원토록 거주하게 될 본향인 겁니다.
그러므로 고센 땅에 영원히 거주할 것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요셉을 통해 고센 땅에 살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일시적일 뿐이라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가나안도 마찬가지고,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집 사는 것이 매우 어렵다고 말합니다. 혹 집을 샀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거기에 영원히 거주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옮기게 하시면 옮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땅에서는 ‘영원히’라는 말은 없습니다. ‘영원히’라는 말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만 가능한 말입니다. 히브리서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히11:16)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 역시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자로서 이 땅에 거해야 할 것입니다. 한 마디로 우리의 인생은 나그네 인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