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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13장 31-38절
지금은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가룟 유다의 정체를 밝히셨습니다. 그는 마귀의 자식이라는 것이요, 겉으로는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있지만 결국 예수님을 배신하게 될 것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 사실은 오병이어 사건과 관련된 내용에서부터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다만 드러나게 말씀하시지 않다가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노골적으로 드러내셨습니다. 물론 노골적으로 드러내셨다고 해서 나머지 제자들이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게 되리라는 것을 알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보아도 보지 못한 자로, 들어도 듣지 못한 자로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팔 생각을 한 가룟 유다 자신은 모를 수가 없었습니다. 적어도 가룟 유다 자신은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돌이켰는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더욱 강퍅해졌습니다. 지난주 살핀 본문에서는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갔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처음부터 사탄의 종으로 있었지만 예수님의 말씀 이후 더욱 더 사탄의 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그에 대하여 성경은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마26:24)는 말씀을 합니다. 또한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눅22:22)고 말씀하십니다. 즉 예수님께서 가시는 그 길이 고난의 길이요 십자가임을 구약에서부터 예언했던 것이고, 좀 더 근원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그 길을 가도록 작정하셨다는 겁니다. 거기에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게 될 것이 없었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작정, 하나님의 예언의 성격 때문에 하나님을 죄의 저자, 혹은 죄의 원인자, 죄의 승인자로 이해할 수 있는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죄는 피조물에게서부터 나옵니다. 사탄이 죄의 원인자요, 동시에 죄인이 죄의 원인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 화가 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오늘 본문은 가룟 유다에 이어 사도 베드로의 부인에 대하여서도 말씀하시는데, 앞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31절과 32절입니다.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인자의 영광에 대해서는 요한복음 7장 39절에서 이미 언급한 바가 있습니다. 거기서는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가 자신의 사역을 완성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의 사역의 완성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는 그 때 자신의 사역이 완성됩니다(요19:30). 물론 십자가에서 죽으실 예수님은 다시금 부활하실 것이고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실 것입니다. 십자가만이 아니라 그의 모든 사역이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가룟 유다가 나간 후 남아 있는 열 한 제자에게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인자의 영광이란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역을 완성하신 때이고, 그것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할 때 아직까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아닙니다. 이런 측면에서는 인자가 영광을 받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자가 영광을 받았다고 말씀하신 것은 그 일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서두에서도 말했지만 인자는 자기에 대해 기록된 대로 갑니다. 또한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갑니다. 예수님의 행보는 성경의 예언을 따라 가고 있는 것이고, 좀 더 근원적으로는 영원한 작정을 따라 그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거기에 가룟 유다의 배신이 있는 것이고, 지금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기 위해 나간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뜻하신 바가 이루어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죽음을 앞두고 있는 것이고, 그 죽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뜻하신 바를 완성하실 것입니다. 그 확실성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영광을 받았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인자가 영광을 받는 것은 그를 보내신 하나님께서 인자로 말미암아, 좀 더 정확히는 인자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확실한 만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도 확실하기 때문에 영광을 받으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왜 이 말씀을 하시는가? 예수님은 남아 있는 열 한 제자를 붙들기 위해서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여러 차례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은 자신의 제자 중 한 사람이 자신을 배신함으로 일어나게 될 것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결국 십자가를 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고 죽는 것으로 끝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말씀하실 때 부활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확실성은 나사로의 부활 사건을 통해 보이셨습니다. 비록 얼마 있지 않으면 죽으실 것이지만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셨고, 또한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음은 결코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가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부활할 것이요 다시금 생명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의 죽음으로 자기 백성의 죄를 사하실 뿐만 아니라, 그의 부활로 자기 백성에게 의를 전가하실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그의 모든 사역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데, 비록 그의 사역을 완성한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완성하실 것에 근거해서 예수님은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안에서 영광을 받으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언급되고 있지 않지만 베드로의 부인을 말씀하시기에 앞서 예수님은 모든 제자가 나를 버리리라고 말씀하십니다(마26:31 참조). 예수님께서 잡혀 가시게 될 때 나머지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십자가는 제자들에게 반가운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저들 입장에서 십자가는 승리가 아닌 패배와 같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의미로 환언해서 말하자면 십자기는 죄를 보게 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사망을 보게 합니다. 사망이 있는 만큼 십자가는 하나님의 진노를 보게 합니다. 그래서 결코 반가운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거기서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피합니다. 도망합니다. 예수님을 버립니다. 이것이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가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십자가가 영광일 수 있는가? 자신에게도 영광이요, 하나님께도 영광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십자가는 죄를 보게 하지만 죄만을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죄 문제를 해결하기 때문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사망을 보게 하지만 십자가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수 있는 것도 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만 보는 것이 아니라 진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긍휼이 있다는 것을 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 안에서 영광을 받으셨다는 말씀을 통해 저들을 붙들고자 하십니다. 정작 십자가 사건에서는 열 한명의 제자가 도망하게 되지만, 그것이 영광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심으로 주님은 저들을 붙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이 말씀이 저들을 붙드는 것은 아니지만, 나중에 십자가를 통해 드러내신 영광을 전하는 자로 있게 하시기 위해 저들을 이 말씀으로 붙들고자 하시는 겁니다.
그런 측면에서 32절의 강조가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다면, 하나님도 반드시 자기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주실 것인데, 곧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모든 행보가 그러하듯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이 우선됩니다. 이런 예수 그리스도를 받지 않으실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자신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주지 않을 리도 없습니다. 그의 죽음이 결코 헛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이요, 죽음만이 아니라 부활로 나타나 그 유익을 반드시 자기 백성이라고 칭하는 자들에게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33절입니다.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지금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작은 자들’이라고 부르시는 것은 그들이 무지하고 연약하여 쉽게 넘어지는 자들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그들이 다 도망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실행이 아직까지는 조금 더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조금 더 있으면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이미 유대인들에게 말한 것처럼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일단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은 요한복음 7장에 나옵니다. 33절 이하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시니 이에 유대인들이 서로 묻되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그를 만나지 못하리요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한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니라”(요7:33-36) 예수님께서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한다는 것은 저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간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죽음과 부활 이후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실 것을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때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도 못하고,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있는 곳에 갈 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너희와 함께 있지만 얼마 있지 않아 내가 너희를 떠나는 날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때는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날 수 없고, 또 내가 가는 곳에 올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에게 하신 말씀의 의미와 지금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의 의미는 결코 같지 않습니다. 유대인에게 하신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영원토록 너희는 나를 볼 수 없다는 내용으로까지 확장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잠시 나를 보지 못할 뿐이다. 이것은 곧바로 이어지는 요한복음 14장에서 분명히 밝히십니다. 1절과 2절을 보시면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즉 내가 너희를 떠나 있는 것은 너희를 완전히 버리기 위함이 아니란 것입니다. 보지 못한다고 해서 근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너희를 떠나는 것은 잠시 떠나는 것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왜 이 말씀을 하십니까? 내가 너희와 함께 있지 않더라도 14장의 말씀처럼 낙심하지 말라, 근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인내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인내만 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무엇을 이루기 위함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34절과 35절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정확하게 예수님께서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의미가 여기서 드러납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입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여기 보면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셨다고 기록합니다. 그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이고, 죽음과 부활을 거쳐 승천할 날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육신적으로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물론 승천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9-20) 즉 그들에게 사명을 주시면서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겠다는 것입니다. 육신적으로는 함께 하실 수 없는데,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시겠다는 것인가? 우리는 쉽게 인성으로는 함께 하실 수 없지만 신성으로는 함께 하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칼빈은 성찬에 임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신성으로만 임한다고 하는 어떤 개혁자의 입장에 대하여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칼케돈 신조(451)의 고백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는 인성을 취하신 이후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분리도 분할도 혼합도 전이도 없고, 다만 구별만 있을 뿐이라고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신성이 임한다고 하면 의도치 않게 인성과 분리되는 개념이 들어올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전(全) 그리스도(totus Christus)가 임하시되, 그리스도의 모든 것(totum Christi)이 임하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던 것입니다(기독교강요, 1559, 4권 17장 30절). 이때 ‘전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이 분리할 수 없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나 전 그리스도가 임한다고 해서 인성도 어디에나 계실 수 있는 것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인성은 승천 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이상 거기에만 있습니다. 그러나 신성이 어디에나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러나 신성만이라고 하지 않고 분리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전 그리스도’가 임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모든 것’이 임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 것은 인성의 편재를 의식한 것입니다. 전 그리스도가 임한다고 해서 인성이 임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때 단순히 인성이 임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 것은 인성이라고 말함으로 신성과 분리시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신성과 인성의 비분리성을 유지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할 것이라는 것은 전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비록 그리스도의 모든 것이 함께 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하나님은 함께 하실 수 있습니다. 다만 요한복음 13장에서 말씀하고 계신 내용은 그의 죽음과 부활 이후 너희와 육체적으로 함께 있을 수 없다는 것이고, 그런 측면에서 1절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간다, 33절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종합적으로 이해하자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간다 할지라도, 또 내가 가는 곳에 너희가 잠시 동안을 올 수 없을지라도 그리스도께서는 그들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근심하지 말라, 인내하라는 것이고, 좀 더 적극적으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모든 내용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요한복음 13장에서는 발을 씻기시는 행동으로 친히 본을 보이신 것이고, 이제 본을 보이신 그것을 친히 말씀으로 확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새 계명’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새 계명의 내용이 무엇인가 할 때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보통 ‘새’ 계명이라고 할 때는 ‘옛’ 계명과 다른 의미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을 통해서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레위기 19장 18절입니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이것이 두 번째 돌판의 요약입니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자면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은 결코 ‘새 계명’이 아닙니다. 구약의 율법의 가르침과 동일한 가르침입니다.
그럼에도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이 부분을 조금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사도 요한의 서신인 요한일서 2장을 보겠습니다. 7절과 8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 7절에서는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8절에서는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쓴다고 말합니다. 일단 옛 계명이든 새 계명이든 내용 자체가 다른 것은 아닙니다. 그럼 무엇을 가지고 ‘옛’ 혹은 ‘새’라고 말하는가? 내용보다는 구약과 신약의 형식의 차이 때문입니다. 이런 형식을 지금 요한일서에서 어떻게 표현하는가?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침이라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구약은 어둠의 형식이라는 것입니다. 그 자체로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고, 그 말씀을 통해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지만, 밝은 빛으로 비춘 것처럼 있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밝히신 이후 신약 시대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명확하게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 당시 율법에 대한 이해는 많은 부분 퇴색되어 있었습니다.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지만 그 말씀이 밝히 드러나 있지 않음으로 잘못 이해한 까닭입니다. 한 예로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사랑의 법과 관련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마5:43) 이것이 저들이 이해하고 있는 율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본래부터 주어진 법의 의미를 다시금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 율법의 의미가 바뀐 것이 아닙니다. 옛 율법은 이것인데, 새 율법은 옛 율법과 다른 것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옛 율법이나 새 율법이나 내용은 동일합니다. 그러나 옛 법은 어두운 데서 보는 것과 같았다면 새 법은 밝은 빛에서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비록 내가 너희는 떠나게 된다 할지라도 내가 너희에게 가르친 핵심 된 내용에 있어서는 실천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새 계명입니다. 새 계명이라 할지라도 옛 계명과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구약에서 희미하게나마 보인 것을 내가 너희에게 드러냈다면 그 말씀을 따라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말씀을 잘못 이해한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이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가르친 내용을 따라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그 사랑을 친히 나타내셨습니다. 실천하셨습니다. 실천으로 본을 보이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극치는 그의 십자가 죽음에서 더욱 분명히 밝혀질 것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도 사랑을 나타내신 것이지만 자기 백성을 위한 죽음, 죄인을 위한 죽음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사랑의 극치를 보이실 것입니다. 그것으로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그런 사랑을 나타내 보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 곁에 없다고 해서 낙심하고 근심만 하지 말고, 인내하면서 너희에게 가르친 바를 행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너희가 내 제자임을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나타내는 것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랑을 나타내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형제는 사랑하고, 이웃은 사랑하고, 원수에 대해서는 미워하라는 정도가 아니라, 원수까지라도 사랑하고 그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주인이면서, 선생이면서 종 된 자들의 발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입니다. 심지어 가룟 유다의 발까지 씻으셨습니다. 자신을 배신할 것을 아셨음에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원수라 할 수 있는 자의 발을 씻기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라면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그 길을 걸어가는 데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지 않는 자를 그리스도의 제자라 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가 보이신 본처럼 서로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좀 더 넓게는 그리스도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순종할 수 있도록 자신을 돌아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지난주 말씀드린 것처럼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면서 늘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해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 너희 힘에 달려 있다, 너희 능력에 달려 있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이것을 단적으로 드러내신 것이 베드로의 부인에 대한 말씀입니다. 36절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33절에서 얼마 있지 않아 예수님께서 어디론가 가신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내가 가는 곳에 너희가 올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시몬 베드로가 질문합니다.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그 말은 주께서 가시는 그 길을 나도 가겠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어디를 가시든 계속해서 주를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앞에서 말한 것처럼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은 죽음의 길입니다. 그러나 죽음으로 끝나는 길이 아닙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실 것입니다. 고난의 길을 걸어가시고 난 뒤 영광의 자리에 앉으신다는 것입니다. 그 길을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영광의 자리는 사람에게 달린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따라올 수 없지만 후에는 따라오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면 왜 굳이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야 하겠습니까? 누구도 예외 없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만약 인간 스스로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죄성을 모르는 것입니다. 인간의 부패성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자력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는 모든 종교는 하나님 지식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지식 또한 없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인간의 본성은 무엇입니까? 로마서 3장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롬3:10-18) 이런 인간이 어떻게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결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그 스스로는 할 수 없지만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들을 이끌어 구원의 자리에 앉히십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의 죄를 사하시고, 그리스도의 부활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을 의롭게 하여 하나님 앞에 서도록 하십니다.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어 가십니다(빌1:6). 당연히 사랑의 실천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는 사랑할 수 없지만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십니다. 나타내시고 깨닫게 하십니다. 듣고 들음으로 그 사랑이 무엇인지를 우리 안에서 확증하십니다. 바로 그 결과가 사랑의 실천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36절에서 베드로가 반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주께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스스로 구원을 이루겠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마16:16-17). 하나님 아버지가 이끄셔서 믿음의 고백을 했다면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 받은 자로서 주께서 가시는 그 길에 대해서 갈 수 있다는 것이 베드로의 고백입니다. 주를 위하여 목숨조차 버릴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것이요, 그럴 힘과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마태복음에서는 이렇게까지 장담합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마26:33) 어떤 면에서 다른 사람보다 남다른 의지가 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38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그리고 이 말씀은 실제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굳게 결심하지만 그런 결심을 이룰 수 있는 힘이 그에게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베드로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로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며 그의 명령을 지켜 행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는 부패성이 있고 부패성이 있는 만큼 의를 행하기보다는 죄를 짓는 데 빠른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의 본성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연약한 부분들을 건드리기만 하면 죄가 나오지 않습니까? 우리의 마땅한 바는 주께서 주신 계명의 말씀처럼 서로 사랑하는 것이지만 사랑하다가도 사랑의 열매가 아닌 미움의 열매를 맺는 것이 우리 아닙니까? 심지어 사랑을 하는 데 있어서도 점과 흠이 있는 존재입니다. 완전한 사랑을 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을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이 헛되이 나타나지 않도록 하실 것입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처럼 세 번이나 주를 부인하게 됩니다. 베드로뿐 아니라 다른 모든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도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그들을 세워 사도의 직분을 감당할 수 있도록 만드십니다. 주를 위하여 순교도 하게 하시고, 박해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하는 자로 있게 하십니다. 주께서 그들을 그러한 자게 되도록 이끄시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여 부르신 이상 부름에 합당한 자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개인마다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열매 없는 자가 되게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어야 합니다. 내 힘과 내 능력, 내 지혜와 지식을 의지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철저히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시작하신 일이 더욱 증대되고, 그 결과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더욱 순종하는 자가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마태복음에 나온 베드로의 부인과 관련된 말씀에 대한 칼빈의 주석 몇 부분만 읽어드리면서 정리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각자는 자신의 연약성을 항상 명심하면서 성령의 도움을 청해야 마땅하며 아무도 주님께서 약속하시는 수준 이상의 것을 장담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주목해야겠다... 다른 한편, 우리는 불안을 뒤흔들어 버리고 교만으로 가득하게 하는 나머지 기도에 대한 열심을 소멸시키는 지독한 경시를 삼가야겠다... 자신의 연약성을 망각하고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는 나머지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자들은 마치 무모하게 적진으로 뛰어드는 술 취한 병사와 같다... 무분별한 열심보다 쉽게 무너지거나 사라지는 것도 없다.” 우리는 이런 자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섰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하고, 혹이라도 넘어지지는 않을까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늘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가 걸어가신 그 길을 뒤따라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뒤따라가는 데 있어서도 우리는 넘어지고 쓰러집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를 일으켜 주시고, 다른 모든 사도들을 다시금 세우신 것처럼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모든 사명을 완수하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그렇게 역사하실 것입니다. 때문에 더더욱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서 겸손히 주님만을 의지하면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