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설 클래식 음악,그 중에서도 독일음악의 관점에서 보자면19세기를‘영웅의 세기’라고 부를 수도 있지 않을까?베토벤이1804년에‘영웅 교향곡’을 발표한 이래,독일의 작곡가들은‘영웅’을 가장 중요한 화두 가운데 하나로 인식하고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그것을 형상화했다. 교향곡의 경우에는 슈만과 브람스가 대표적이고,오페라 계에는 바그너가 있었다.그리고 교향시 장르에서는 역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꼽아야 할 것이다.슈트라우스는1899년에<영웅의 생애>를 발표함으로써‘영웅의 세기’에 마침표를 찍은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슈트라우스는 작품 속 영웅의 이미지에 자기 자신의 모습을 그 누구보다도 선명하게 투사했다.물론 영웅을 테마로 한 작품들에는 어떤 식으로든 자전적인 성격이 개입되게 마련이었지만,슈트라우스만큼 그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사례는 달리 찾아보기 어렵다.
전체6부로 구성된 교향시<영웅의 생애>의 제5부에는 이전까지 슈트라우스 자신이 발표했던 작품들의 단편들이 차례차례 등장한다.그 흐름에 가만히 귀 기울이고 있노라면,이 곡의 표제가 가리키는‘영웅’이 바로 슈트라우스 자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다시 말해 칼 대신 펜을,방패 대신 악보를 든 영웅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이다.실제로 슈트라우스는 로맹 롤랑에게 이런 말을 한 적도 있다고 한다.
“왜 자신에 관한 교향곡을 쓰면 안 되는지 모르겠다. 나는 나폴레옹이나 알렉산더 대왕에 못지않게 나 자신에 대해서도 흥미를 느끼고 있다.”
어떤 이는 이 대목에서 슈트라우스의 나르시시즘을 거론하며 조소를 보내기도 하지만,어떤 이는 그 특유의 유머를 음미하며 미소를 짓기도 한다.사실 슈트라우스는 유머가 풍부한 사람이어서,이 곡을 스케치하고 있을 무렵인1898년7월에는 친구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낸 적도 있다고 한다.
“베토벤의‘에로이카(영웅 교향곡)’는 우리 지휘자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작품으로,드물게 연주되고 있네. 그래서 나는 절박한 필요에 의해 지금‘영웅의 생애’라는 제목을 붙인 교향시를 작곡하고 있지.장송행진곡은 없지 만, 역시 E♭장조이며 많은 호른이 들어간다네.”
물론 당시 지휘자들이 베토벤의‘영웅 교향곡’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농담이다.슈트라우스가 이 곡을 작곡하면서 베토벤을 의식했다는 정도로 받아들이면 되지 않을까.아울러 이 작품은 슈트라우스 자신의 관점을 강하게 반영하여 인생의 역경을 극복하며 궁극의 성취를 향해 나아가는 한 영웅,즉 위대한 예술가의 초상을 그린 작품 정도로 간주하면 적당할 듯싶다.
■ 작곡과 초연 1899년 초에 작곡하여 같은 해3월3일에 프랑크푸르트에서 슈트라우스 자신의 지휘로 초연된 <영웅의 생애>는 슈트라우스의 마지막‘교향시(음시)’이다.다만 이후의<가정 교향곡>이나<알프스 교향곡>도 넓은 의미에서 교향시로 간주할 수 있지만,어쨌든 이 곡이 그 때까지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창작을 결산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슈트라우스는 이 작품으로‘영웅의 세기’의 피날레와 더불어 자신의 교향시 창작 여정의 피날레도 장식했던 것이다.
■ 음악 해설 슈트라우스와 친분이 두터웠던 네덜란드의 지휘자 빌럼 멩엘베르흐(Willem Mengelberg)에게 헌정된 이 장대한 교향시는 크게 여섯 부분으로 나뉘는데,전체는 자유롭게 확대된 소나타 형식으로 파악되기도 한다.
1.영웅(Der Held) 칼과 방패를 든 기사’가 등장한다.젊고 순수한 사나이의 야망으로 충만한 가슴과 고결한 신념,성스러운 의지로 빛나는 얼굴을 가진 그가 확신에 찬 걸음걸이로 당당하게 행진한다...이 부분은 소나타 형식의 제1주제부에 해당한다.
2.영웅의 적들(Des Helden Widersacher) 영웅과 대립하는 적들이 등장한다.질투와 몰이해로 무장한 그들은 오로지 비난하고 트집 잡는 것밖에 모른다.조소하고 희화화하는 그들의 끈질긴 공격에 영웅은 상처를 입고 낙담한 나머지 잠시 비관적인 상태에 빠진다.그의 분노와 항거...경과부에 해당하며,일종의 스케르초로 볼 수 있다.
3.영웅의 반려(Des Helden Gefährtin) 영웅에게 사랑이 찾아든다.영웅을 유혹하고,달래고,재촉하는 연인의 모습이 바이올린 솔로의 선율로 그려지고,영웅은 그런 그녀와 사랑의 줄다리기를 한다.결국 영웅은 연인을 포옹하고,그녀에게서 휴식과 위로를 얻는다...제2주제부에 해당하며,느린 악장이라고 볼 수도 있다.
4.영웅의 전장(Des Helden Walstatt) 갑자기 무대 밖에서 나팔 소리가 들려온다.신념과 의지는 다만 생명의 영예로운 투쟁 속에서만 살아있는 법.영웅은 이제 보다 성숙해진 모습으로 전장에 나선다.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고,적들의 공격 속에서도 영웅은 연인의 격려를 받으며 마침내 승리를 쟁취한다(금관의 힘찬 팡파르).영웅은 연인과 팔짱을 끼고 행진하며 승리의 노래를 부른다...발전부에 해당하며,이제까지의 주요주제들이 모두 나와 한꺼번에 어우러진다.
5.영웅의 업적(Des Helden Friedenswerke) 차분해진 가운데 영웅이 업적을 차근차근 쌓아가는 장면이 펼쳐진다.그것은 다름 아닌 슈트라우스의기존 작품들에서 취한 단편들의 메들리로, <돈 후안>, <차라투스트라>, <죽음과 변용>, <돈키호테>, <틸 오일렌슈피겔>, <군트람>, <맥베드>등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그리고 거기에<영웅의 생애>에서 나온 주제들이 섞인다.
6.영웅의 은퇴와 완성(Des Helden Weltflucht und Vollendung) 적들이 영웅에게서 멀어져 가고 비난과 조소도 사라진다.영웅은 마지막 의욕을 발휘해보지만,이내 그것도 가라앉고 차츰 체관의 정조에 빠져든다.이제 그는 전원에서 휴식을 취한다.목동의 피리소리가 들려오고,자연이 그에게 속삭인다.영웅은 회상에 젖는다,과거의 치열했던 투쟁,연인과의 사랑,그리고...마지막 빛이 서서히 상승하며 힘을 더해간다.그리고 마침내 정점에 이른 후 은은한 여운을 남기며 사라져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