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卿宰
李尙毅 碑銘[洪宇遠]
公姓李氏, 諱尙毅, 字而遠, 號少陵, 黃驪人。 高麗仁勇校尉仁德之後也, 世有冠冕。 七世至允芳, 爲司醞署令, 贈嘉靖大夫、同知中樞院事。 中樞生珍, 判司僕寺事、贈兵曹參議。 參議生猷, 奉化縣監、贈禮曹參判。 參判生依仁, 廣興倉副承、贈兵曹判書。 判書生繼孫, 官至兵曹判書。 嘗出按永安道, 北土地接胡羯, 俗喜弓馬馳射, 而鮮有以文爲業者。 公始至, 不鄙夷其民曰: “惟民有敎無類, 惟敎只在作成。” 遂以《詩》、《書》敎之。 自是一方民物爭相勸趨, 文風丕變, 蔚有文翁治蜀之化焉。 本道人士爲公立祠, 祀以春秋, 成廟嘉之, 特贈正憲大夫、議政府左參贊、兼藝文館大提學, 賜諡敬憲, 寔公之五世祖也。 高祖諱之時, 堤川縣監、贈左承旨; 曾祖諱公礪, 贈吏曹參判; 祖諱士弼, 弘文館應敎、贈領議政; 考諱友仁, 司宰監僉正、贈領議政。 妣貞敬夫人陽川許氏, 修撰坰之女, 以嘉靖庚申二月二十三日生公。 公儀觀魁偉, 氣像厚重。 學問夙成, 文章日就, 遊于伴宮, 多士推之。 乙酉, 魁司馬, 又魁庭試, 直赴丙戌別試, 選入槐院。 戊子, 薦爲注書。 庚寅, 遷成均典籍, 除司憲府監察, 薦爲兵曹佐郞。 辛卯秋, 陞司憲府持平。 壬辰春, 拜兵曹正郞。 夏四月, 日本大擧兵入寇, 宣祖大王西幸龍灣, 公以檢察使從事留臨津, 追詣行在。 秋, 拜弘文館副應敎。 冬, 拜侍講院弼善。 癸巳七月, 拜司憲府掌令。 九月, 拜成均館司藝, 尋拜弘文館校理, 又移拜掌令, 俄拜典翰。 閏十一月, 拜弼善。 甲午春, 拜副校理。 四月, 拜司諫院司諫、兼承文院參校、春秋館編修官。 六月, 丁內艱。 丙申八月, 服闋。 九月, 拜弼善, 俄陞輔德。 丁酉正月, 拜司憲府執義。 二月, 拜副校理、兼輔德。 三月, 復拜執義。 四月, 又以校理拜執義。 六月, 拜副應敎。 八月, 轉應敎。 九月, 兼輔德。 十一月, 差陳慰使書狀官赴京, 仍呈文陳本國事情, 洞辨被誣而還。
戊戌六月, 拜司藝。 七月, 拜司諫, 伸己丑徵士崔永慶之冤。 八月, 拜輔德。 九月, 拜弘文館直提學, 仍陞通政, 拜承政院同副承旨, 轉至左副。 己亥正月, 拜兵曹參知。 未幾, 再入銀臺爲右承旨。 四月, 復入爲左承旨。 八月, 拜司諫院大司諫。 九月, 拜刑曹參議。 十一月, 復爲左承旨。 庚子三月, 復拜參知。 冬, 拜都承旨。 時當請見天將, 因事又請一將, 上慮禮物之不足。 公奏曰: “或意有此, 已備之矣。” 上甚嘉之, 嘗語臣僚曰: “李某言訥, 若不出口, 而外似遲緩, 觀其行事, 未嘗有遺失, 中心之捷敏可知。” 特陞嘉善, 拜兵曹參判。 辛丑八月, 復拜兵曹。 十二月, 拜行副提學。 壬寅正月, 拜吏曹參判。 閏二月, 兼同知經筵事。 七月, 復拜大司諫。 癸卯秋, 出爲成川府使。 莅官之初, 剔去宿弊, 興行惠政, 一境大治。 本府僻在遐遠, 民不知學, 莫有占科名者。 公遂以興學爲先, 擇其民之俊秀者, 親自訓勵, 郡中翕然競勸, 絃誦相聞。 不三年, 有一人中小科, 人謂之破天荒。 自是登小科者相繼, 而至有捷大科出宦途者, 人皆稱之。 乙巳六月, 公之爲政於成, 已三載矣。 上有旨, 褒之曰: “今觀御史書啓, 卿之自奉甚約, 撫民以惠。 予極庸嘉之。” 賜以表裏。
丙午, 秩滿還朝, 邑人相與立石, 頌其淸德善政。 五月, 拜大司成。 六月, 拜副提學, 尋移拜都承旨。 十二月, 復拜都承旨。 戊申七月, 復拜都承旨。 九月, 陞資憲, 拜刑曹判書。 十二月, 拜大司憲。 己酉二月, 拜吏曹判書。 三月, 以儐使迎冊封詔使。 六月, 進階正憲。 自東西分黨之後, 搢紳分裂, 更相排擯。 及公秉銓, 不問色目, 唯人才是用, 一時稱其公道。 庚戌八月, 遞拜知中樞府事。 九月, 拜大司憲。 十二月, 兼同知春秋館事。 辛亥正月, 兼五衛都摠管、世子右賓客。 四月, 拜大司憲。 秋, 差東宮誥命冕服奏請使赴京師。 壬子五月, 竣事復命。 六月, 進崇政階。 十一月, 錄衛聖三等功臣, 進崇祿, 封驪興君。 癸丑五月, 兼知春秋館事。 甲寅, 爲平市署提調, 陳達市弊, 請以文官爲令, 以察署事, 市民便之。 乙卯七月, 拜工曹判書。 丙辰正月, 進輔國崇祿、驪興府院君、兼工曹判書。 戊午八月, 拜議政府左贊成、兼世子貳師。 己未正月, 兼知經筵。 癸亥春, 仁祖反正, 衛聖功罷, 除勳, 封降一資。 夏, 辭遞贊成, 拜知中樞府事。 甲子八月二十一日, 以疾卒于正寢。 訃聞, 上命輟朝二日, 致弔祭。 十月, 禮葬于驪州烏鴨山寬谷甲坐之原。 後二十四年丁亥, 以宣祖朝扈聖原從功, 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 是年六月十八日, 移葬于江陰縣東雪蘿山卯向之原。
좌찬성 이상의[李尙毅]의 신도비명(神道碑銘) -홍우원(洪宇遠) 찬
공의 성(姓)은 이씨(李氏)이고, 휘(諱)는 상의(尙毅)이며, 호(號)는 소릉(少陵)이다. 본관은 여주(驪州)이니 고려 때 인용 교위(仁勇校尉) 이인덕(李仁德)의 후손으로 대대로 벼슬이 끊이지 않았다. 7세(世)를 내려와서 이윤방(李允芳)은 사온서 영(司醞署令)으로서 가정 대부(嘉靖大夫)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추증되었고, 중추원사의 아들 이진(李珍)은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로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추증되었다. 병조 참의의 아들 이유(李猷)는 봉화 현감(奉化縣監)으로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추증되었고, 병조 참의의 아들 이의인(李依仁)은 광흥창 부승(廣興倉副丞)으로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또 병조 판서의 아들 이계손(李繼孫)은 벼슬이 병조 판서까지 올랐다. 일찍이 평안도 안찰사(平安道按察使)로 나갔는데 북도는 지역이 오랑캐와 닿아 있어서 풍속이 활쏘기와 말달리기나 좋아하고 학문을 하는 사람은 적었으나 공이 처음 부임하여 그 백성들을 오랑캐시하지 않고 타이르기를, “백성이란 가르치기만 할 뿐 차별을 두지 않는 법인데, 가르침의 목표는 오직 사람을 만드는 데 있다.” 하고, 드디어 시서(詩書)로써 가르친 바 이로부터 한 지방의 백성들이 앞다투어 서로 권장하며 나아와서 문풍(文風)이 크게 진작되니 옛날 문옹1)(文翁)이 촉군(蜀郡)을 다스릴 적의 융성한 교화를 다시 이룰 수 있었다. 그 결과 본도의 선비들이 공을 위하여 사당을 세워 봄ㆍ가을로 제사를 받드니 성종(成宗)이 이를 가상히 여겨 특별히 정헌 대부(正憲大夫)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 겸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추증하는 동시에 경헌(敬憲)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니 바로 공의 5대조이다. 고조(高祖) 이지시(李之時)는 제천 현감(堤川縣監)으로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고, 증조(曾祖) 이공려(李公礪)는 증 이조 참판(吏曹參判)이며, 조(祖) 이사필(李士弼)은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로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아버지 이우인(李友仁)은 사재감 첨정(司宰監僉正)으로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어머니는 정경 부인(貞敬夫人) 양천 허씨(陽川許氏)로 수찬(修撰) 허경(許坰)의 딸인데 가정(嘉靖) 경신년(庚申年, 1560년 명종 15년) 2월 23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나면서부터 의용(儀容)이 걸출하고 기상이 중후하였다. 학문과 문장이 일찍 성취되어 성균관에 유학할 적에 많은 선비들이 추중(推重)하였다. 을유년(乙酉年, 1585년 선조 18년)에 사마시(司馬試)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정시(庭試)에 또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며, 직부(直赴)하여 병술년(丙戌年, 1586년 선조 19년) 별시(別試)에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으로 선발되어 들어갔다. 무자년(戊子年, 1588년 선조 21년)에 주서(注書)로 추천되었다가 경인년(庚寅年, 1590년 선조 23년)에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으로 옮기고 이어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제수받았다가 병조 좌랑(兵曹佐郞)에 추천되었다. 또 신묘년(辛卯年, 1591년 선조 24년) 가을에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으로 승진하였다.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 봄에 병조 정랑(兵曹正郞)에 임명되었다. 이해 4월에 일본이 대거 침입하여 와서 선조 대왕이 의주(義州)로 파천하였는데, 공이 검찰사(檢察使)의 종사관으로 임진(臨津)에 머무르다가 행재소로 따라갔다. 가을에 홍문관 부응교(弘文館副應敎)가 되고, 겨울에 시강원 필선(侍講院弼善)에 임명되었다. 계사년(癸巳年, 1593년 선조 26년) 7월에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에 임명되고, 9월에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가 되었다가 얼마 안되어 홍문관 교리에 임명되었다. 다시 사헌부 장령으로 옮겼다가 이윽고 한림원 전한(翰林院典翰)에 임명되었다. 윤11월에 필선(弼善)이 되고, 갑오년(甲午年, 1594년 선조 27년) 봄에 부교리가 되고, 4월에 사간원 사간 겸 승문원 참교(承文院參校)와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官)에 임명되었다. 6월에 어머니 상을 당하였다.
병신년(丙申年, 1596년 선조 29년) 8월에 상기(喪期)를 마치고 9월에 필선(弼善)에 임명되었다가 얼마 안되어 보덕(輔德)으로 승진하였다. 정유년(丁酉年, 1597년 선조 30년) 정월에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가 되고, 2월에 부교리 겸 보덕에 임명되었다가 3월에 다시 집의가 되고, 4월에 또 교리에 임명되었다가 집의가 되었다. 6월에는 부응교가 되고, 8월에는 응교로 승진하였으며, 9월에 겸 보덕이 되고, 11월에 진위사(陳慰使)의 서장관에 차출되어 연경(燕京)에 갔다. 이때 정문(呈文)으로 본국의 사정을 진술하여 종계(宗系)에 대한 변무(辨誣)를 통쾌하게 해결하고 돌아왔다.
무술년(戊戌年, 1598년 선조 31년) 6월에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에, 7월에는 사간원 사간에 임명되어 기축 옥사(己丑獄死) 때 희생된 징사(徵士) 최영경(崔永慶)의 억울한 죄를 신원(伸寃)하여 주었다. 8월에 세자시강원 보덕(世子侍講院輔德)에 임명되었고, 9월에는 홍문관 직제학이 되고, 이어 통정 대부(通政大夫)로 승급하여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었다가 좌부승지로 옮겼다. 기해년(己亥年, 1599년 선조 32년) 정월에 병조 참지(兵曹參知)가 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재차 승정원으로 들어가 우승지가 되고 4월에 다시 좌승지가 되었다. 8월에 사간원 대사간에 임명되고, 9월에는 형조 참의에, 11월에는 다시 좌승지가 되었다.
경자년(庚子年, 1600년 선조 33년) 3월에 다시 형조 참지가 되고, 겨울에 승정원 도승지에 임명되었다. 이때 임금이 명장(明將)을 초청하려는데 무슨 일로 한 사람을 더 초청하게 되자 임금이 예물이 부족할까 염려하였다. 이에 공이 아뢰기를, “혹시 이렇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 벌써 준비를 하여 두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매우 가상히 여기며 신료(臣僚)들에게 말하기를, “이 아무개는 말이 어눌하고 입을 열지 않아서 굼뜬 것 같기도 하나 하는 일을 보면 빠뜨리는 적이 없으니 중심의 민첩함을 알 수 있다.” 하고, 특별히 가선 대부(嘉善大夫)에 승급시켜 병조 참판을 제수하였다.
신축년(辛丑年, 1601년 선조 34년) 8월에 병조 참판이 되고, 12월에 행 부제학(行副提學)에 임명되었다. 임인년(壬寅年, 1602년 선조 35년) 정월에 이조 참판이 되고, 윤2월에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를 겸대하였으며, 7월에 다시 사헌부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계묘년(癸卯年, 1603년 선조 36년) 가을에는 성천 부사(成川府使)로 나갔는데, 부임하던 날부터 숙폐(宿弊)를 척결하고 선정(善政)을 베풀어 온 경내가 잘 다스려졌다. 또 성천 고을은 외진 변방에 멀리 떨어져 있어 백성들이 학문을 몰라서 과거에 이름이 오른 자가 없었는데, 공이 드디어 학문 진작을 정책의 우선으로 삼고 백성 가운데 뛰어난 자를 선발하여 친히 가르치고 독려하니 온 고을이 하나 같이 앞다투어 경쟁하며 서로 권장하여 글 읽는 소리가 전역에 이어졌다. 그 결과 3년이 못 되어 한 사람이 소과(小科)에 합격하니 사람들은 이를 파천황(破天荒)이라 하였다. 이로부터 소과에 오르는 자가 이어지고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가는 사람까지 나오니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였다. 을사년(乙巳年, 1605년 선조 38년) 6월에 공이 성천 부사로 나간 지가 벌써 3년이 되었는데, 임금이 교지를 내려 칭찬하기를, “이제 어사(御史)의 서계(書啓)를 보니 경의 자봉(自奉)은 매우 검소히 하고 백성에게는 혜정(惠政)을 베풀어서 내가 아주 가상히 여기노라.” 하고, 옷감 한 벌을 상으로 내렸다.
병오년(丙午年, 1606년 선조 39년)에 임기가 만료되어 조정으로 돌아오게 되자 고을 사람들이 모여서 빗돌을 세워 청덕(淸德)과 선정(善政)을 칭송하였다. 이해 5월에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이 되고, 6월에는 부제학에 임명되었으며, 얼마 안 지나 승정원 도승지로 옮겼다가 12월에 다시 도승지가 되었다. 무신년(戊申年, 1608년 선조 41년)에 다시 도승지가 되었고, 9월에 자헌 대부(資憲大夫)로 승급하여 형조 판서에 임명되었다가 12월에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다. 기유년(己酉年, 1609년 광해군 원년) 2월에 이조 판서에 임명되고, 3월에 빈사(儐使)가 되어 책봉조사(冊封詔使)를 영접하였으며, 6월에는 정헌 대부(正憲大夫)로 승급하였다.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의 분당(分黨)이 생긴 이후로 사대부가 분열되어 번갈아 가며 서로 배척하였는데, 공이 인사권을 잡고부터는 색목(色目)을 불문하고 오직 인재만을 등용함으로 한때 공도(公道)라고 일컬었다.
경술년(庚戌年, 1610년 광해군 2년) 8월에 이조 판서에서 체직(遞職)되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가 9월에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며, 12월에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를 겸대(兼帶)하였다. 신해년(辛亥年, 1611년 광해군 3년) 정월에 오위도총관(五衛都摠管)과 세자시강원 우빈객(世子侍講院右賓客)을 겸대하고, 4월에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이해 가을에 동궁 고명면복 주청사(東宮誥命冕服奏請使)로 차출되어 중국에 가서 임자년(壬子年, 1612년 광해군 4년) 5월에 일을 끝마치고 복명(復命)하였고, 6월에 숭정 대부(崇政大夫)로 승급하였으며, 11월에 위성 삼등공신(衛聖三等功臣)으로 녹훈되어 숭록 대부(崇祿大夫)에 오르고 여흥군(驪興君)에 봉군(封君)되었다.
계축년(癸丑年, 1613년 광해군 5년) 5월에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를 겸대하였고, 이듬해에는 평시서 제조(平市署提調)가 되어 시장의 폐단을 진달(進達)하고 평시서 영(平市署令)을 문관으로 임명하여 일을 보도록 할 것을 계청(啓請)하여 시장 백성들이 편리하도록 만들었다. 을묘년(乙卯年, 1615년 광해군 7년) 7월에 공조 판서에 임명되고, 이듬해 정월에 보국 숭록 대부(輔國崇祿大夫)로 승급하여 여흥 부원군(驪興府院君)에 봉군되고 또 공조 판서를 겸대하였다. 무오년(戊午年, 1618년 광해군 10년) 8월에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임명되어 세자시강원 이사(貳師)를 겸대하였고, 기미년(己未年, 1619년 광해군 11년) 정월에 지경연(知經筵)을 겸대하였다. 계해년(癸亥年, 1623년 인조 원년) 봄에 인조가 반정하여 위성 공신을 혁파하면서 공훈이 삭제되고 한 자급 강등되었다. 여름에 사직으로 찬성에서 체직되어 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갑자년(甲子年, 1624년 인조 2년) 8월 21일에 병으로 정침(正寢)에서 세상을 마치니 임금이 이틀 간의 철조(輟朝)를 명하고 예관을 보내 조제(弔祭)하였다. 10월에 여주 오압산(烏鴨山) 관곡(寬谷)의 갑좌(甲坐)의 터에 예장(禮葬)하였다. 24년이 지난 정해년(丁亥年, 1647년 인조 25년)에 선조 때의 호성 원종공(扈聖原從功)으로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가 추증되었다. 이해 6월 18일 강음현(江陰縣) 동쪽 설라산(雪蘿山) 묘향(卯向)의 언덕에 이장하였다.
부인은 정경 부인(貞敬夫人) 해평 윤씨(海平尹氏)로 고려 때 은자 광록 대부(銀紫光祿大夫) 윤군정(尹君正)의 후예이다. 증조 할아버지 윤변(尹忭)은 군자감 정(軍資監正)으로 해징 부원군(海澄府院君)에 추증되었고, 할아버지 윤담수(尹聃壽)는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추증되었으며, 아버지 윤현(尹晛)은 승문원 판교(承文院判校)로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광산 김씨(光山金氏)로 청주 판관(淸州判官) 김인서(金麟瑞)의 딸이다. 부인은 경신년(庚申年, 1560년 명종 15년) 8월 17일에 태어났는데, 아름다운 자질을 타고나서 규중의 법도를 잘 닦았고 시집을 가서는 시부모에게 효도하고 친척과 화목하여 공과 덕(德)이 잘 어울렸다. 공보다 한 해 뒤인 을축년(乙丑年, 1625년 인조 3년) 정월 13일에 세상을 마쳐 초장과 이장을 모두 공의 묘에 부장하였다.
슬하에 7남 4녀를 두었다. 장남 이지완(李志完)은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이고, 차남 이지선(李志宣)은 선교랑(宣敎郞)이며, 3남 이지굉(李志宏)은 군자감 정이고, 4남 이지정(李志定)은 통정 대부(通政大夫)로 부사(府使)이며, 5남 이지인(李志寅)은 성균 진사(成均進士)이고, 6남 이지유(李志裕)는 현령(縣令)으로 공의 아우 참판공에게 양자로 갔고, 7남 이지안(李志安)은 지평(持平)이다. 사위는 부사 정세미(鄭世美), 참의(參議) 이후천(李後天), 장령(掌令) 김덕승(金德承), 참판(參判) 이소한(李昭漢)이다. 이지완은 전주 이씨(全州李氏) 첨정(僉正) 이결(李潔)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이원진(李元鎭)은 강원도 관찰사이고, 차남 이숙진(李叔鎭)은 군수(郡守)이며, 사위는 검열(檢閱) 유흠(柳)과 이익엽(李益燁)이다. 이지선은 영의정 기자헌(奇自獻)의 딸에게 장가들어 3녀를 두었는데, 사위는 별좌(別坐) 유설(兪楔), 학생 이덕함(李德咸), 학생 유건(兪楗)이다. 이지굉은 목사(牧使) 구사흠(具思欽)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2녀를 두었으니, 장남 이두진(李斗鎭)은 병사(兵使)이고, 차남 이규진(李奎鎭)은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이며, 3남 이익진(李翼鎭)은 학생이며, 사위는 참봉(參奉) 김정지(金鼎之)와 봉사(奉事) 이명뢰(李命賚)이다. 이지정은 통제사(統制使) 이경심(李慶深)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2녀를 두었는데, 3남 이숭진(李嵩鎭)은 통덕랑(通德郞)이고, 차남 이항진(李恒鎭)은 현감이며, 3남 이형진(李衡鎭)은 수사(水使)이고, 사위는 급제(及第) 이계(李烓)와 첨지 유흡(柳潝)이다. 이지인은 판서 임취정(任就正)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자식이 없어서 이지유의 둘째아들 이세진(李世鎭)을 양자로 들였다. 이지유는 지중추(知中樞) 권희(權憘)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을 두었는데, 장남 이방진(李邦鎭)은 현감이고, 차남 이세진(李世鎭)은 학생으로 이지인에게 양자로 갔고, 3남 이광진(李光鎭)은 통정 대부로 부사이며, 4남 이창진(李昌鎭)은 통덕랑(通德郞)이다. 이지안은 종실(宗室) 영제군(寧堤君) 이석령(李錫齡)의 딸에게 장가들어 1녀 5남을 두었는데, 사위는 진사 이진혐(李震馦)이고, 장남은 가의 대부(嘉義大夫) 참판 이하진(李夏鎭)이고, 차남은 진사 이은진(李殷鎭)이며, 3남은 이주진(李周鎭)이고, 4남은 이국진(李國鎭)인데 요절하였고, 5남은 직장 이명진(李明鎭)이다.
정세미는 4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학생 정위(鄭偉), 승지 정유(鄭攸), 지평 정수(鄭脩), 학생 정이(鄭儞)이며, 사위는 응교 윤계(尹棨)와 학생 정만세(鄭晩世)이다. 이후천은 2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이준악(李峻岳)은 목사(牧使)이고, 차남 이정악(李挺岳)은 부사이며, 사위는 학생 김만웅(金萬雄)이다. 김덕승은 2녀 1남을 두었는데, 큰사위는 학생 이준길(李浚吉)이고, 둘째 사위는 교관(敎官) 신행(申涬)이며, 아들은 군수 김홍경(金洪慶)이다. 이소한은 4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 이은상(李殷相)은 판서이고, 차남 이홍상(李弘相)은 정자이며, 3남 이유상(李有相)은 응교이고, 4남 이익상(李翊相)은 참판이며, 사위는 목사 김수일(金壽一), 군수 윤항(尹抗), 학생 김문수(金文遂)이다.
이원진은 5남을 두었는데 학생 이제(李), 현감 이자(李滋), 이심(李), 이관(李灌), 학생 이빈(李蘋)이다. 이숙진은 3남을 두었으니 이정(李瀞), 학생 이면(李), 참군 이명(李洺)이다. 이두진은 서자 이담(李湛)을 두었다. 이규진은 5남을 두었는데, 학생 이섭(李涉), 별좌 이식(李湜), 진사 이농(李瀧), 이택(李澤), 학생 이목(李沐)이다. 이익진은 4남을 두었는데, 학생 이육(李淯), 진사 이급(李汲), 이경(李), 학생 이필(李泌)이다. 이숭진은 좌랑 이영(李泳), 이항진은 학생 이형(李瀅), 이형진은 학생 이홍(李泓)을 두었다. 이세진은 이광진의 둘째 아들 이직(李溭)을 후사로 삼았다. 이방진은 2남을 두었는데, 장남 이성(李渻)은 판관이고, 차남 이항(李沆)은 승지이다. 이광진은 2남을 두었으니, 장남 이석(李)은 현감이고, 차남 이직(李溭)은 진사이다. 이창진은 재종(再從)인 집의(執義) 이화진(李華鎭)의 둘째 아들 이양(李湸)을 후사로 삼았다. 이하진은 5남을 두었는데 이해(李瀣), 이잠(李潛), 학생 이서(李漵)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이서는 이주진의 양자로 나갔다. 이은진은 아들 이진(李津)을 두었다. 이국진과 이명진은 모두 후사가 없고, 이명진은 이하진의 넷째 아들을 후사로 삼았다.
아! 공이여. 장덕(長德)을 이룸으로써 성조(聖朝)의 인정을 받아 은전(恩典)이 시종 끊이지 않아서 당세에는 명경(名卿)이 되고 후손에게는 은택을 끼쳤으니 아! 거룩하도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어눌한 그 말씨 느리고 굼뜬 것 같아도 마음속은 민첩하여 일에 실수가 없었네. 성군이 조명을 내렸으니 신하를 알아봄에 더 없었고, 연이어 사헌부 사간원 벼슬 옥패로 긴 옷자락 메웠네. 총재에 반열에 올라 이조 판서 되어서는, 인재 선발 공정하여 붕당이 용납되지 않았네. 드디어 찬성에 올라서는 의정부에 우뚝 섰네. 수많은 아들 손자들 찬란한 관복으로 뜰을 메웠어라. 완전한 그 복록 이 세상에 비길 이 없네. 설라산(雪蘿山) 높은 곳에 마루 같이 무덤 지었어라. 천백 년 영원히 허물어질 일 없으리.
각주
1) 문옹(文翁) : 한(漢)나라 경제(景帝) 때 사람. 촉군 태수(蜀郡太守)로 나갔을 때 성도(成都)에 학교를 세우고 우수한 인재를 많이 양성하여 문풍이 크게 진작되니 교화가 크게 행하여졌다.
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行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兼知經筵春秋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世子貳師李公神道碑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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