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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이무웅목사/절제 (갈 5:19-26)
현대인들의 생활 가운데 가장 필요한 덕목이 무엇일까?
특히 요즘 젊은 세대들 가운데 갖추어야할 덕목이 무엇일까? 저는 나름대로 현대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절제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현대인들의 생활특징은 자유와 방종, 무절제, 무한한 쾌략 향유일 것입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훈련, 연단, 인내와 권징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무엇보다도 절제가 강조되어야 하는 시대인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씨를 뿌리는 농부나 모집자를 기쁘게하는 군사나 면류관을 얻는 경기자로 비유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한결같이 모든 일에 절제한다는 사실을 말해주었습니다. 신앙생활은 절제를 훈련하고 연습하고 절제의 능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절제할 줄 모르면 삐뜨루 나가기 가 쉬운 것입니다. 절제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있어서 인간다운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꼭 필요한 것입니다. 절제가 안되는 사람은 인격자가 될 수가 없습니다. 절제라는 것은 자기 통제, 즉 자기를 억제하고 조정하고 다스리는 능력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절제의 능력이 뛰어난 사람일수록 좋은 인격자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의 자동차가 부레이크가 고장나서 급발진을 한다든가 통제가 안 된다면 대형 사고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무슨 힘이든지 통제가 되고 조정이 될 때 그것이 유익하게 사용이 되는 것이지 통제가 안되면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요즘 통제를 못해서 돌이킬수 없는 후회를 하는 인생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습니까?
노름으로 집을 날린 사람이 후회를 합니다. 아, 내가 처음 몇푼 잃었을 때 털고 일어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세상에는 절제하지 못해서 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질에 대한 지나친 욕심을 절제하지 못하기 때문에 망하는 사람, 먹을 것을 절제하지 못해서 너무많이 먹어 성인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남여의 성을 절제하지 못해서 성범죄자가 되는 사람도 있고, 일을 절제하지 못해서 과로로 쓰러져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두가 절제하지 못해서 생기는 고통입니다.
사람이 화가 날 때도 그것을 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미국 하버드대학의 정신 신체 의학자인 월터 캐논박사는 "화의 구름"이 있음을 발견하고 이 구름이 뇌신경에 모이면 눈에 핏발이 서고 얼굴이 붉게 상기되며 말을 더듬게 되는 증세가 생긴다고 분석을 했습니다. 캐논박사는 화의 해악성에 대해 이렇게 구체적으로 말을 합니다. "호흡이 가빠지고 심장박동이 불규칙해지며 피가 위와 장기에서 심장 중추신경계근육 등으로 역류를 한다. 소화기관의 기능이 중지되고 간에 저장되어 있던 당분이 유출되며, 아드레날린이 분비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믿음생활에도 절제가 필요합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믿음에 절제를 지키지 못하는 믿음은 결국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절제는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모든 탐욕은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자신을 다스릴줄 아는 사람은 큰성을 빼앗는자 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면 방종과 무절제로 결국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가장 의로운 노아도 방주에서 나와 포도주의 취하여 자신의 하체가 드러난지도 모르고 자신의 아들을 저주하는 실수를 했습니다. 에서는 배가곱아 팥죽 한그릇에 절제를 못하고 장자의 명분을 팔았습니다.
천하장사 삼손은 나실인의 몸으로 절제를 못하고 방탕하다가 두 눈을 뽑히고 연자맷돌을 돌리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절제할줄을 알아야하고 바울같이 자신을 쳐서 십자가에 복종시킬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전서 9:25절에도 "모든 일에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절제한다" 했습니다.
태능 선수촌에 가보면 올림픽을 앞에놓고 선수들이 금메달을 목에 걸려고 얼마나 땀을 흘리며 훈련을 하며 절제를 하는지 모릅니다. 시합을 앞에놓고 체중조절을 하기위하여 음식을 조절하고 4분동안의 경기시합을 위하여 4년동안을 땀을 흘리며 훈련하며 인내하며 준비합니다.
이처럼 운동 경기를 하는 선수가 그냥 금메달을 따는게 아닙니다. 피나는 훈련과 절제를 합니다. 먹고 싶은 것 마음대로 먹고, 자고싶으면 마음대로 자고 하고 싶은 것 마음대로 하고 놀고 싶은것 마음대로 놀면 금메달을 목에거는 좋은 운동선수가 될 수가 없습니다.
절제를 하며 철처한 훈련을 받아야 승리의 메달을 목에 걸수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에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도 이렇게 훈련을 하고 절제를 해야 하는데 하물며 썩지 않을 면류관을 얻으려는 사람이 어떻게 절제하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 하는 것이 사도 바울의 권면입니다.
그런데 우리인간은 자기가 스스로 자기를 절제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5장에서는 절제를 성령의 열매에 포함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이 곧 절제의 삶으로 우리를 인도한다는 사실입니다.
절제는 금욕주의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고행주의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충만해서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인생을 긍정적으로 살아갈 때 맺쳐지는 삶의 열매인 것입니다. 절제는 수도원주의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활가운데 성령을 따라 살아갈 때 얻어지는 최고의 열매인 것입니다.
지금 런던에서 올림픽이 개최되어 세계 70억 인구의 모든 나라들의 이목이 영국 경기장에 집중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메달을 목에 거는 사람들을 보면 이들이 훈련을 받을 때 처음 기본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모든 운동의 핵심은 호흡조절에 있다고 합니다. 호흡조절은 모든 운동의 기본이고 마라톤과 달리기는 물론이고, 수영, 골프, 역도, 높이뛰기 던지기, 모두가 어떻게 호흡을 조절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수들에게 호흡조절이 훈련의 기본입니다. 모든 운동의 훈련이 여기에 집중되어 있고, 이것을 중심으로 선수들이 연습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훈련도, 삶의 성숙도, 신앙의 열매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인의 삶을 위한 가장 필수적인 연습은 바로 영적 호흡조절에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큼 자기를 조절하느냐, 바로 이것이 성공과 실패의 열쇠입니다.
성령의 마지막 열매인 절제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절제는 곧 조절을 말합니다. 운동선수가 호흡을 조절하듯, 우리가 모든 삶의 조절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조절할 것이 무엇일까요? 본문은 그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늘 그것을 마음에 담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감정의 조절입니다.
24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정’이 바로 정욕, 열정, 감정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부름을 받고 믿음으로 사는 삶의 길은 바로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고, 나의 감정을 조절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절제의 열매를 맺는 길입니다.
감정은 인격의 3요소 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감정은 지식, 의지와 함께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될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감정이 있기에 우리가 울고, 웃고, 기뻐하며 즐거워합니다. 감정이 있기에 우리가 말하고 표현하고 느끼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감정의 아름다움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도 세상에서 감정을 느끼며 사셨습니다. 때로는 나사로의 무덤앞에서 슬픔에 눈물을 흘리셨고, 성전안에서 장사하는 장사꾼들을 체찍으로 쫒아내는 분노를 발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그 감정이 변덕이 없이 일정하게, 정상적으로 가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갑자기 감정이 폭발하는 것입니다. 정상호흡이 아니라 호흡이 거칠어지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을 조절하는 힘이 절제요 참고 인내하는 신앙이 절제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가장 큰 실패의 대표적인 모델이 ‘모세’입니다. 모세는 감정을 조절하는데 실패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애굽사람을 죽이고 미디안 광야에서 훈련을 받았고 다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다가 물이없어 모세는 한순간에 감정의 폭발로 반석을 지팡이로 반복하여 내리치는 큰 실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이 패역한 너희들아’ 하면서 안될 말이 나왔고,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 나옴으로 모세는 안타깝게도 그렇게 소원했던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감정이라는 것은 순간적인 것이기에 조절하지 않으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자신도 모르는 것입니다.
살인자들의 대부분은 바로 이 감정조절이 되지않아서 실패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욱하는 감정조절의 실패에서 소리를 치고 분노를 발하고, 집어던지고, 칼을 들이대고,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감정조절을 잘해서 성공한 예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모델이 사도요한입니다. 처음 그가 주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을 때의 별명이 ‘보아너게’였습니다. 이 말은 ‘우뢰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이 별명에서 보는 것처럼, 요한은 급하고, 거칠고,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쉽게 분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날 사마리아로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는데, 그 성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자 요한은 그 도시를 불바다로 만들어야겠다고 말한 사람입니다.
이처럼 거칠고 감정조절이 안 되는 사람이었는데 이런 사람이 어떻게 변하였습니까? 신약성경에서 ‘사랑’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요한1,2,3서는 모두 요한이 기록한 성경입니다. 이 모든 성경의 주제가 사랑입니다. 그는 사랑의 사도로 변한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요? 기질이 변한 것이 아닙니다. 조절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감정을 조절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고 날마다 감정을 조절하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이것이 절제의 열매를 맺는 길입니다. 이런 성령의 사람으로 성숙하게 변해 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욕심의 조절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박은 것은 ‘정’만이 아니라 ‘욕심’까지도 포함됩니다. 그래서 ‘정과 욕심’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욕심을 조절하고, 다스리는 것이 절제입니다. 감정만큼 중요한 요소가 바로 욕심입니다. 욕심을 다스려야 합니다.
왜 성경은 욕심을 다스리라고 할까요? 왜 하나님은 욕심을 부리지 말라고 하는 것일까요?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욕심이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욕심은 한이 없습니다. 통제하지 않으면 위험한 것입니다.
몇칠전 조선일보 기사에 로또의 저주라는 글이 쓰였는데 5년전에 광주에서 작은 주점을 하던 43살먹은 두아이를 둔 김씨가 있었는데 넉넉지 못한 생활에 늘 쪼들리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인생 역전을 꿈을 꾸며 늘 로또복권을 샀는데 1등에 당첨되어 23억원을 손에 쥐게 되어 요식업을 접고 친구들의 조언 따라 광주광역시에서 가장 번화한 상무지구에 유흥주점을 열고 엄청나게 투자를 했는데 오래가지 못했고 다음에는 음식점을 개업을 했는데 사업수완이 부족해 손해만보고 실패를 거둡하다가 면밀한 시세분석도 없이 주식에 투자를 했지만 신통치 않았습니다 그는 매일 술집을 다니며 흥청망청 탕진을 하다가 결국 업친데 덮친격으로 친구에게 사기를 당하여 당첨금을 다탕진하고 친척들에게 돈을 빌려쓰다 빛이 수천만으로 늘어나고 생활고가 심해지자 부인은 못살겠다고 이혼을 요청했고 결국 가정과 떨어져 별거를 하며 살다가 지난 23일 광주 화정동에 있는 남성 목욕탕에 들어가 아무도 없는 사이 목욕탕 천정 기둥에 노끈을 매고 목을 매어 죽었습니다.
그리고 작년에는 첫부인과 이혼하고 중국음식점에서 짜장면 배달부로 일을하고 있던 42살먹은 인천의 박모씨는 작년 10월에 로또복권에 당첨되어 19억원을 받게 되었는데 배달부일을 그만두고 펀드 메니저 처럼 행세를 하면서 돈이 많은 재벌가인양 룸살롱에서 하루밤에 수백만원씩을 쓰면서 탕진을 하였는데 돈많은 남자로 알고 김모여인을 소개받아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알고보니까 1년밖에 안됐는데 당첨금은 다쓰고 통장에는 5천만월 밖에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부인 통장에서 돈을 1억5천만원을 몰래 꺼내 주식투자를 하다가 날려버렸고 화가난 부인은 남편과 못살겠다고 싸우다가 오히려 남편이 때리고 기물을 던지고 부수다가 폭행죄로 경찰에 입건이 되었습니다.
욕망은 인간의 본능적 속성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욕망은 절제가 되어야 합니다. 절제가 되지 못하고 통제를 하지 못하면 결국 욕망의 끝은 비극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하나를 가지면 둘을 갖고 싶고, 둘이 있으면 셋을 생각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만족할 줄 모르고, 자족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끊임없이 채워야 하고,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뭔가 조절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성경에도 욕심을 부려 좋게된 예가 없습니다. 아간의 욕심이 아이성 전투에서 이스라엘의 큰 실패를 경험하게 했습니다. 엘리야 시대에 아합 왕의 욕심이 착하고 선한 사람 나봇을 죽이는 살인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가룟유다의 욕심이 스승을 배반하는 은30에 파는 파렴치한 결과를 낳게 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욕심으로 모두가 망한 사람입니다. 욕심은 좋지 않은 결과를 만듭니다. 반드시 죄를 만들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경고하기를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느니라” 그러므로 욕심을 조절해야 합니다. 욕망을 철저히 통제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늘 자족하는 마음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지금 나의 삶에 감사와 만족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서부터 욕망은 통제가 됩니다. 욕망의 조절을 통해, 절제의 열매를 맺으시기를 바랍니다.
3. 육체의 조절입니다.
본문은 신앙에 있어서 대비되는 두 영역을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육체의 일이 있고, 다른 하나는 성령의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서로 대비시키면서 23절의 끝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여기 이 말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 말은 곧, 대비되는 두 영역을 철저한 통제와 절제를 통해 다스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성령의 열매도, 육체의 일도 금지할 법이 없습니다. 오직 자기자신의 통제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잘 조절하는 힘에서 성령의 열매가 맺어지고, 육체의 일을 멀리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반드시 맺어야 하는 긍정적인 삶의 모습이라면, 육체의 일은 날마다 신앙인이 버려야 할 옛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육체의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19절부터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여기 적어도 15가지가 적혀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9가지인데, 이것 맺는 것보다 우리가 버리고 또 버려야 할 것이 더 많다는 결론입니다. 이것들을 조절하는 것이 절제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면서도 끊임없이 우리의 발목을 잡는 것들입니다. 이런 것이 전혀 없어야 신앙인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인에게도 끊임없이 이런 것이 얼마든지 자리 잡을 수 있고,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넘어 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육체의 일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방법은 오직 하나입니다. 통제하고, 다스려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 이런 육체의 일을 멀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인 절제가 필요한 것입니다. 절제만이 가능합니다. 자기를 다스리는 영적 조절이 없이는 이길 방법이 없습니다.
성경에서 어떤 것에 대하여 현저하게 대비되는 두 영역을 비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육체와 영혼을 비교하고, 하늘과 땅을 비교합니다. 안과 밖을 비교하고, 성령과 사탄을 비교합니다. 이 두 가지를 비교하는 이유는 선택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세상도 사랑하고 하나님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세상과는 멀어지게 되고, 세상을 사랑하면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는 법입니다.
이 두 영역에서의 결단과 헌신을 촉구하기 위해 끊임없이 성경은 대비시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체의 일을 성령의 열매와 대비시키는 이유는 우리가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열매를 맺으면서 음행과 더러운 것을 행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화평의 열매를 맺으면서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을 이룰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충성의 열매를 맺으면서 술취함과 방탕함으로 자신을 팽개쳐 버릴 수가 없는 법입니다. 그래서 절제가 중요하고 필요한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가운데 절제가 마지막으로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 모든 것의 취하는 것과 버리는 것은 오직 절제로서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내 삶은 취할 것도 있지만 버릴 것도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를 취하면서 육체의 일을 버려야 합니다. 버리고 취하면서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신앙의 본질은 승리에 있습니다. 우리는 승리해야 합니다. 이겨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 승리하기를 원한다면 바울의 권면처럼 절제해야 합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절제의 삶으로 결단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많이 맺고 주님이 원하시는 풍성한 열매를 많이 맺쳐서 주님께 칭찬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