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를 얘기하기 전에 먼저 세 가지 사실을 확인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첫 번째는 '마음의 꿈은 전염된다'는 사실입니다.
긴장이 가득한 회의장에 들어섰을 때 우리도 모르게 어깨가 긴장된다든가, 슬퍼하는 이와 함께 있으면 같이 슬퍼진다든가 등과 같이, 이는 우리가 아주 일상적으로 이미 확인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마음은 전염됩니다. 그래서 마음이 꾸는 꿈도 함께 전염됩니다. 우울의 꿈이든, 외로움의 꿈이든, 화의 꿈이든 간에, 각각의 꿈들은 그 꿈을 실현해줄 자가 비로소 나타날 때까지 끊임없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동하며 꿈꾸어지게 됩니다.
두 번째는 '꿈은 이야기를 통해 사실처럼 둔갑한다'는 사실입니다.
사회학에서 사용되는 F.O.A.F(Friend Of A Friend)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는 "친구의 친구에게서 들은 이야기인데 말이지───"라는 외연을 통해 출처미상의 이야기가 사실처럼 확산되는, 현대사회에서의 이야기의 전파 구조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꿈은 이야기의 형태를 띠게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서사의 구조가 담보됨으로써, 인간의 인지적 도식 속에 편입되기 수월한 조건을 갖추게 됩니다. 우리 뇌는 정리하는 일을 좋아하거든요. 애초 형태가 모호한 꿈은 이처럼 이야기화됨으로써, 우리에게 마치 사실과도 같은 영향력을 제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이야기화된 꿈은 자기충족적 예언으로 기능한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이야기처럼 예언된 미래가 펼쳐졌다고 할 때, 이는 예언이 정확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 예언에 따라 미래를 똑같이 만든 것뿐입니다. 즉, 불확정성으로 존재하는 미래에 '예언된 미래'라는 특정한 목표를 설정함으로써, 우리의 삶을 그 목표에 스스로 이끌리게 한다는 것이죠. 그 결과, 우리는 스스로 그 예언된 미래를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언이라는 것이 정말로 우리의 삶을 예지해주는 것처럼 착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언이란 일종의 저주와도 같습니다. 미래의 무한한 가능성을 사멸시키고, 오직 특정한 의도에만 미래가 고착되도록 하니까요.
이 세 가지 사실 위에서 영화 얘기를 해보도록 하죠.
이 영화의 주요한 소재가 되고 있는 '꿈'은 그저 말 그대로의 꿈입니다. 배고픈 이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고, 화난 이의 얼굴이 붉어지듯이, 꿈은 지금 거기에 어떤 마음이 존재하는가를 알려주는 단순한 신호입니다. 배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는 배의 주인이 영적으로 고귀하고 지혜롭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단지 그가 배고프다는 사실만을 알려줄 뿐입니다.
그리고 그게 곧 지혜입니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졸리면 잠을 잔다는 이 단순한 사실을 가장 정확하게 알고 사는 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그런데 이 배고픈 마음이 스스로를 드러내기 위해 꾸는 '꼬르륵'이라는 꿈을, 우리가 단순한 신호 그 자체로서 받아들이지 않을 때, 그 자리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바로 이야기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왜 신호를 단순하게 받아들이지 않게 되냐면, '나'라고 하는 정체성이 어떠한 마음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그 신호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도, '나'라는 정체성은 배고픈 자여서는 안됩니다. 그건 '나'라는 특별한 정체성에 어울리지 않는 부조리한 마음이라고 느끼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단순한 신호에 불과했던 꿈을 복잡하게 풀고자 시도하게 됩니다. 꿈을 풀어 지난한 이야기로 만들게 됩니다. 전술했듯이, 우리의 정체성이 납득할 수 있는 형태로 우리의 인지적 도식 속에 편입시키기 위해서요. 이를테면, 지금 이 배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는, 인도의 대지의 신인 나가가 용트림을 하는 소리고, 내일 지구가 그 용트림 때문에 결국 멸망할 징조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즉, 우리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마음의 꿈을 임의대로 통제하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 또한 그렇게 우리의 입맛에 맞게 만들어진 이야기는 당연하게도 우리에게 매혹적인 정동을 자극하는 까닭에, 역설적으로 단순한 신호로서의 꿈보다 오히려 쉽게 받아들여집니다.
이렇게 '꿈'은 '해몽'을 거쳐 이야기로 변화됩니다. 그리고 이야기라는 형태로, 전달되기 쉬운 구조를 얻은 꿈은 이제 사람들 사이로 전파됩니다. 마치 시장에서 "내일 지구는 멸망할 것이다!"라고 큰 소리로 외치고 다니는 예언자의 영향력처럼요. 그 예언자의 이야기에 매혹된 이는, 예언자와 동일한 지구 멸망의 꿈을 꾸게 됩니다. 그 꿈을 꾼 이는 이야기를 통해 또 다른 이에게도 그 꿈을 전파하겠고요.
정말로 내일 지구가 멸망할 것인지의 사실 여부와는 아무 관계없이, 이야기는 내일 정말로 지구가 멸망할 것과 같은 파급력을 사람들에게 행사하게 됩니다. 이게 바로 이야기화된 꿈의 위력입니다. 미디어가 고도로 발달한 현대사회에서 허구의 힘은 이미 사실의 힘을 능가합니다. 모두가 지구 멸망의 이야기를 통해, 지구 멸망의 꿈을 꾸게 되면, 지구 멸망의 경험이 사람들에게 펼쳐집니다.
그리고 모두가 이처럼 지구 멸망의 이야기를 살아가는 동안, 처음 시작되었던 단순한 배고픔의 꿈을 살아가는 이들은 점차 사라져갑니다. 배고픔의 신호를 알아차리고 배를 채우면 바로 사라질 단순한 꿈이, 이야기를 통해 거대한 생명력을 얻어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화하게 되는 셈입니다.
하지만 이야기가 아무리 그럴듯한 모양새로 영향력을 확장해간다 하더라도, 결코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우리가 여전히 배고프다는 사실입니다. 배고픈 마음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영화의 여주인공이 자신의 마음을 통제하고자 꿈의 해몽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 그녀 앞에 펼쳐진 것은 그 해몽이라는 이야기가 만들어낸 영원한 표류의 현실일 뿐이었습니다. 그녀가 경험하는 모든 현상들은 해몽이 정확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단서들인 것처럼 그녀 앞에 다가오게 되었죠. 자기충족적 예언에 빠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언의 저주 속에서 그녀는 늘 똑같은 이야기만을 반복하며 단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여전히 늘 외로움을 느꼈죠.
네. 그녀는 바로 그 단순한 외로움을 만나야 했던 것입니다. 지난한 이야기가 아니라 말이죠.
결국, 여주인공이 자신의 외로운 마음에 대한 통제를 철회하고, 그 외로움을 정직하게 발견해서 스스로의 삶으로 살아내었을 때야 비로소 외로움의 꿈은 끝나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외로워서 작은 온기나마 필요했던 그녀가, 놀이터에서 성냥개비를 모아 피운 작은 모닥불을 쬐면서 통곡할 때, 그녀의 외로운 마음은 완벽하게 실현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외로움의 꿈이 끝난 자리에서, 그녀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이 그러했듯이, 우리는 현재 드러나고 있는 마음을 통제하고 싶어서 꿈을 이야기로 변화시킵니다. 그러나 아무리 무수한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하더라도 마음은 결코 통제되지 않습니다. 우리를 진정으로 힘들게 만드는 건 통제되지 않는 마음이 아니라, 마음을 통제하려고 하는 바로 그 고집입니다.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해몽에의 욕구가 바로 통제에의 고집임을 이해한다면, 그리고 바로 그 고집이 우리 삶을 고되게 만드는 진짜 이유임을 이해한다면, 그때 비로소 우리는 고된 삶의 역사를 멈출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살기 위해, 단순하게 꿈을 살면 꿈은 끝납니다. 우리가 정말로 살지 않기 위해, 복잡하게 이야기를 살면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그래서 진실로, 꿈보다 해몽이 고됩니다. 살지 않으려는 자에게 삶은 늘 고된 까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