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김한수(金漢洙) - 개척자의 고난과 영광
1. 어려운 가운데서도
1 남해안에 인접한 장흥(長興)은 소백산맥의 지맥인 제암산, 억불산, 사자산이 군봉(群峰)을 이루고 그 중앙에는 탐진강이 흘러 유역에 평야가 잘 발달되어 있다. 내가 자란 집은 사자산 아래 위치한 장흥읍 삼산리 39번지이며 이 마을은 40여 농가가 옹기종기 모여있다.
2 부친(김철환)은 이 고장에서 이름난 한학자였으나 내가 아홉 살 때 5남매(4남 1녀)를 남겨두시고 이 세상을 떠나셨다. 어머니 혼자 살림을 꾸려 자연히 생활이 어려웠지만 어린 우리 형제들에게 내색을 하지 않으셨다.
3 나는 1944년 3월에 장흥국민학교에 입학하게 됐다. 막내인 나는 어머니와 형들의 보살핌으로 그럭저럭 국민학교는 졸업했으나 중학교 진학이 문제였다. 당시 가정 형편이나 한학만을 숭상하는 보수적인 어른들의 반대 때문에 진학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4 그러나 배워야겠다는 일념과 식구들의 도움으로 1950년 4월 장흥 농업중학교에 입학할 수가 있었다. 차츰 나이가 들어가자 학교에서 수업이 끝나면 곧장 집에 돌아와서 가사를 도왔다. 이렇게 어려운 가운데서도 나름대로 꿈을 키웠다.
5 그러면서 장로교회 집사인 국어 선생님의 권유로 교회에 관심을 갖게 됐고 이따금씩 예배에도 참석했다. 중학교를 졸업하자 또 진학 문제에 부딪쳤지만 이것만은 남에게 의지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기에 스스로 갈 길을 개척하지 않을 수 없었다.
6 나는 1953년 3월 무작정 상경했다. 당시 거리에는 전쟁의 상처가 채 가시기도 전이었다. 이 폐허가 된 거리에서 나는 무엇을 찾을 것인가? 공부를 하겠다는 투지로 서울에 발을 디딘 나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자리를 잡는 것이었다.
7 나는 신문로에 있는 시멘트 공장에 취직했다. 주인의 도움으로 공부를 할 수 있는 길이 열려 그 해 2월 5일 해양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됐다. 공부와 일을 열심히 하는 한편 태권도를 배웠다.
8 당시 사회가 불안정한 때인지라 사회악이 범람했다. 주먹이 센 사람이 인정받는 세상이었다. 나도 주먹의 힘을 믿고 문제의 학생들과 어울려 남대문 일대를 휩쓸고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살아갈 삶의 이정표는 되지 못했다.
9 1956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또 대학이라는 한 고개를 또 넘어야 할 처지임을 알았다. 우선 일하고 공부할 수 있는 곳을 찾아 나섰다. 김덕수 씨와 인연이 되어 그분의 도움으로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그 후 명지대학을 졸업하였고 학원을 나가면서 고시 공부도 했다. 이렇게 남이 걷는 기본 코스를 모두 걷게 된 것이다. 어려움을 딛고 목적한 바를 이루었다.
첫댓글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