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도문불(外道問佛)
외도가 부처님께 물었다.
벽암록(碧巖錄) 육십오칙(六十五則)에 보면 외도문불(外道問佛)이 나온다. 하루는 외도가 부처님 처소에 찾아와서 물었다. 저는 말 없음으로도 묻지 않고 말이 있음으로도 묻지 않겠습니다. 세존께서는 아무 말도 없이 앉아계셨다. 이에 외도(外道)가 찬탄하며 말했다. 세존께서는 대자대비로써 저의 미혹한 마음의 구름을 열어 저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인사를 올리고 떠났다. 아난존자(阿難尊者)가 옆자리에서 보고 있다가 세존께 여쭈었다. 저 외도(外道)는 무엇을 증득(證得) 하였기에 저토록 세존을 찬탄(讚嘆)합니까? 세존(世尊)께서 말씀하셨다. 세간(世間)의 준마(駿馬)는 채찍 그림자만 보아도 내 달리는 것과 같다. 하셨다. 아난존자는 세존의 말씀을 듣고도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한자(漢字) 원문(原文) 본칙(本則)은 이렇다.<世尊因外道問 不問有言 不問無言 世尊據座 外道贊歎云 世尊大慈大悲 開我迷雲 令我得入 乃具禮而去 阿難尋問佛 外道有何所證 贊歎而去 世尊云 如世良馬 見鞭影而行> 무문선사(無門禪師) 평창(評唱)은 자상도 하시다. 무문선사가 평하여 말했다. 아난존자(阿難尊者)는 부처님의 제자이면서도 외도의 견해(見解)도 미치지 못한 것 같구나! 자~ 일러보아라! 외도(外道)와 부처님 제자(弟子)와 서로의 거리가 얼마인가? 게송으로 말하였다. 칼 날위에 걷고 살얼음 위에 달리네! 계단이나 사다리를 쓰지않고 낭떨어지에서 손마져 놓아버렸네! <無門曰 阿難乃佛弟子 宛不如外道見解 且道 外道與佛弟子 相去多少 頌曰 劍刃上行 氷稜上走 不涉階梯 懸崖撒手> 이 본칙은 외도와 세존과의 대화다.
부처님을 곁에서 25년을 넘게 시봉(侍奉) 했던 아난존자(阿難尊者)가 전혀 생각지도 못하였던 양구선화(良久禪話)다. 선불교(禪佛敎)에서 양구(良久)는 부처님의 이 선화(禪話)에서 비롯되었다. 유마거사(維摩居士)도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불이문답(不二問答)에서 양구침묵(良久沈默)으로 법(法)을 설파(說破)하였다. 참된 진리(眞理) 당체(當體)는 언어문자(言語文字)로 표현(表現)할 수 없다고 해서 이언설상(離言說相)이며, 이명자상(離名字相)이며, 이심연상(離心緣相)이라고 한다. 불립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을 체증(體證)을 주장(主張)하는 것이다. 외도(外道)와 같이 세존의 양구 침묵만 보아도 바로 깨달음을 얻어 직입(直入)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외도(外道)를 준마(駿馬) 양마(良馬)로 상근기(上根機)로 비유(譬喩)하셨다. 채찍 그림자만 보아도 천리(千里)를 달린다고 하셨다. 그런데 근기(根機)가 둔한 말을 뼈 살가죽이 멍이 들도록 맞고 달린다. 말 없는 말속에 뜻 말을 찾는 것이, 오늘, 이 본칙(本則) 선화(禪話)를 푸는 열쇠다. 무문선사께서는 게송(偈頌)으로 외도와 아난존자와의 거리는 얼마인가? 시뻘건 칼 위를 걷고 살얼음을 달리고 계단이나 사다리를 쓰지 않고 낭떨어지에서 잡았던 손도 바로 놓아 버려야만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다는 말씀이다. 백천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가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라는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