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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안다는 것
본문<요7:26~36>
성경을 펴자마자 선악과와 생명과가 나옵니다. ㅎ님께서 ‘생명과는 먹되 선악과는 먹지마라, 먹는 날에는 정령 죽으리라’ 말씀 하십니다.
그런데 성경 전체를 통해 조망해 보면 결국 선악과는 먹으라고 주신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ㅎ님은 모든 인간을 죄 가운데 일단 가두시고 나서, 거기서 인간 자신이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한 후에, 그런 자를 아무 조건 없이 죄의 사슬에서 건져 주시는 그 은혜를 세세토록 찬양하게 하시는 것이 창조목적이며 구원의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치로 볼 때 반드시 먹어야 할 생명과는 선악과 속에 감추어 놓았다고 해도 무방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생명과를 먹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악과를 먼저 먹어야 한다는 필연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선악과는 먹고 죽으라고 준 것이라는 말이지요. ㅎ님이 사단마귀를 이미 거기에 있게 한 것은 사람을 미혹해서 먹게 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잘 알다시피 육신을 가진 인간이 영적 존재인 사단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게임이 안 되지요. 사단이 하와를 보고 이거 먹으면 ㅎ님처럼 된다는 말을 듣고 보니까, 그 선악과가 그렇게도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이더라는 말입니다. 내일 산수 갑산을 가더라도 한번 꽂히면 저지르고 마는 게 육신의 속성입니다. 죽는 거는 나중 일이고 일단은 먹고 보자는 심산으로 먹어 버린 것이지요. 이처럼 육신은 죄에 대해 속수무책입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됩니까? 자신이 벌거벗을 것을 보게 되지요. 한마디로 죄를 깨닫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죄를 가리려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해 입잖아요. 이것은 자기 죄를 감추려고 온갖 거짓 행위로 선을 만들어 낸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인조된 선은 저녁이 되어 날이 서늘해지니 다 말라비틀어지지요. 즉 어떤 사건이 오면 내면의 죄성이 그대로 표출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때 어김없이 ㅎ님이 찾아오십니다. 언제오신다구요?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았을 때에, 온갖 거짓 선과 의로 치장된 것들이 다 폭로되고 내면의 죄가 백일하에 드러났을 때에 ㅎ님이 찾아오셔서 무화과 나뭇잎 대신에 가죽옷을 지어 입히십니다. 그리고 그 옷을 입은 여자를 향해 ‘산자의 어미’ 하와라고 부릅니다. 하와란 생명이라는 의미 값을 가집니다. ㅎ님의 생명인 영생을 소유한 최초의 사람이라는 말이지요.
그럼 아담은 어디로 갔습니까? 이게 또한 비밀이지요. 바로 아담이 죽어 남긴 옷이 가죽 옷이라는 말입니다. 자기 남편의 죽음을 통해 얻어진 새생명의 존재가 하와요, 그리스도의 아내된 교회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ㅎ님은 이미 창세기 서두부터 십자가 복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먹지 말라던 선악과는 죄를 깨닫게 하는 율법을 상징하고 생명과는 바로 IX를 상징하지요. 율법은 그리스도로 안내하는 몽학선생이니까 율법으로 죄를 깨달으면, 그 죄를 사하시는 IX께로 나아가 죄사함 받고 의롭게 되는 이치를 설명하는 게 선악과와 생명과 속에 감추어진 비밀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모른다면 그리스도도 모르게 되지요. 율법 속에 그리스도를 감추어 놓으신 것입니다.
율법이란 단순히 십계명에 국한 된 용어가 아닙니다. 신구약 전체는 사실 ‘하라, 하지마라’로 규정되어 있는데, 이러한 명령형으로 일컫는 모든 말씀이 다름 아닌 율법입니다.
히4.15절이 이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히4:12~16> 읽으면서 ..
말씀을 통해 내면의 실체가 낱낱이 드러나면?=> 빽박 죄인으로 나타남. IX께로 갈 수밖에..
이것이 말씀이 주는 역할입니다.
지난주에 주님이 유대인들에게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라는 말의 의미를 살펴 보았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을 목숨처럼 여기며 지켜왔는데, 그런 자들에게 주님은 아주 파격적인 선언을 하신 것이지요(너희 중에 ~없도다.) 주님의 말씀의 의도는 ‘너희가 율법을 제대로 지켰으면 죄인임을 깨닫고 내게로 와서 고침을 받을 터인데 내게로 오지 않는 것을 보니 율법을 안 지킨 것이야’라는 말씀인 것이지요.
주님은 율법의 기능과 목적을 말씀하신 거지만 유대인들은 문자대로 율법을 실천하는 것을 율법지킴으로 오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의 의로 흠이 없다고 자부하는 자들은 자신이 나름대로 거룩하고 의롭다고 여기기 때문에 예수가 필요 없는 것이고, 창기와 세리는 죄가 백일하에 드러났기에 그 죄의 짐이 무거워서 IX를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럼 누가 율법을 지킨 꼴이 됩니까? (창기와 세리겠지요./ 이처럼 성경은 인간의 이성과 상식을 뒤집어엎고 있습니다. 누가 이같은 ㅎ님의 지혜를 알아먹겠습니까?)
ㅎ님 말씀을 지키며 반듯하게 사는 자들을 마귀 자식이라고 질타를 하시고, 죄에 빠져 살던 창기와 세리를 두둔하는 예수를 유대인들이 이단으로 생각하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게다가 초막절 명절에 신학교도 안나온 자가 성전에서 말씀을 가르치다니 어디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초막절은 3대 명절인데 그런 때에 성전에서 누구 맘대로 말씀을 가르친다는 말입니까?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들이 즐비한데, 허락도 없이 무명인사가 말씀을 가르친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지요. 그래서 대중들이 수군대는 장면이 25절 이하입니다.
<25~27> 25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혹이 말하되 이는 저희가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 26 보라 드러나게 말하되 저희가 아무 말도 아니하는 도다.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 27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
이미 예수의 기이한 행적으로 인해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찍혔기 때문에, 그를 잡아 죽이려는 것을 군중들은 어렴풋이 잠작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선뜻 잡지 않는 것을 보니, 혹시 당국자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는 것인가?’라고 비꼬는 말이지요.
그러면서 ‘우리는 이 예수가 어디서 왔는지 아는데, 우리가 아는 바대로 갈릴리 나사렛 목수의 아들인데 그런 자가 어떻게 그리스도 이겠느냐? 진짜 그리스도는 아무도 모르게 신비하고 힘있고 강한 모습으로 오실거야’ 라고 조롱 섞인 말들을 나누는 장면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27절에, 그리스도는 어디서 오시는지 알지 못한다는 말은 구약에서 온 말입니다.
말3.1절을 보면, 너희의 구하는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합니다.
여기서 주가 임하실 때에 홀연히 임한다는 말을, 신비스럽고 강하고 힘있게 임한다는 의미로 선입견을 갖고 있으니까,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 그리스도일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메시야 그리스도는 ㅎ님의 아들인데 어떻게 천한 목수의 아들이겠는가? 라는 이런 생각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겠지요. 메시야,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해 인간들은 놀랍고 신비하게 오실 것을 상상하는 성향이 다분히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생각들이 이단사설을 만들어 냅니다.
영지주의라는 이단은 예수의 육체로 오심을 믿지 않습니다. 어떻게 거룩하신 ㅎ님이 천한 육의 몸을 입고 올 수 있는가? ‘예수님은 영이신데 마치 육신을 입은 것처럼 활동하신 것뿐이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힌 것도 육신이 아니기에 아무 고통도 없이 죽은 것이다-라고 하는데, 이런 주장을 가현설이라고 합니다(요일4장은 이것을 지적: 적그리스도 세력이라고 선을 긋습니다. 위험한 교리이지요. 십자가 사건이 쇼라는 의미니까요..)
예수의 탄생에 대해서 천주교는 어떻게 알고 있을까요? 동정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것은 개신교와 같지만, 마리아가 예수님의 동생들은 안 낳았다고 합니다. 이런 주장 역시 예수님의 탄생을 억지로 신비하게 포장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는 이단교리에 불과 합니다. 그렇기에 마리아를 신격화하고 있지요(구원관도 이단: 김수환 추기경, 동국대 강연-선한 삶으로 구원됨을 주장, 산의 정상에 올라가는 노선은 여러 개가 있다고 구원의 다원화를 인정함)
(마13:55절)에 보면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상세히 나옵니다.
이 중에서 야고보와 유다는 성경을 기록한 인물들입니다. 야고보서 1.1절에는 ㅎ님과 IX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12지파에게 문안한다(시작~).
유다서 1절도 자신을 IX의 종으로, 4.4절은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IX라고 부릅니다.
아니, 예수님과 어려서부터 같이 자란 친동생들이지요. 같이 밥먹고, 똥싸고, 자고, 병치레 하며 지지고 볶이면서 살아온 친형에 대해서 자신들을 IX종이라고 낮추며, 그리고 유일하신 주재(통치자 ㅎ님), 주 그리스도라고 높입니다. 이게 육신으로 되는 차원인가요? 성령이 임하여 영의 눈이 열리니 제대로 보게 된 것이지요. 주님은 완전한 ㅎ님이셨고 또한 완전한 사람이셨습니다. 즉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영이신 ㅎ님 이십니다(이것이 진짜 신비다.)
이렇게 한 태에서 난 육신의 동생들도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지만, 성령의 간섭이 없는 인간은 육신의 예수만 볼 뿐이지 영이신 예수의 모습은 보질 못합니다. 예수의 출생지, 예수의 육신의 가족, 예수의 성장과정, 예수가 행하는 표적 등 모두 육의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예수를 판단할 뿐입니다.
- 예수님은 이들을 향해 28절에서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로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너희가 나에 대해서 알고 있는 앎은 잘못된 것이라는 지적을 하시는 것입니다. 즉 '그래 너희는 내가 어디서 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너희들의 생각일 뿐이다'는 뜻으로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이 있다'는 것을 언급합니다. 그리고 그분에 대해 '참이시니'라는 말을 함으로서 그분이 곧 하나님이신 것을 언급합니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은 '너희가 하나님을 안다면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보내서 오게 되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를 모르는 것을 보니까 결국 너희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모른다는 말은 그들을 분노하게 하고도 남을 만큼 엄청난 말입니다. 그들의 신앙을 부인하는 것이고 모욕하는 말입니다. 유대인이라면 스스로 하나님에 대해서는 완벽하다할 정도로 철저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너희는 하나님을 모른다'는 말은 그들의 분노를 살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 유대인의 입장에서 볼 때는 자기를 높이는 자기 고집에 지나지 않고 정신나간 사람의 외침이며 ㅎ님을 모독하는 이단으로 취급될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얘기는 신약에 와서 비로소 언급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약에서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구약의 예언을 확인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구약에 대한 자기들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또 메시아에 대한 지식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들의 지식을 기준으로 할 때 예수님은 도저히 메시아, 또는 그리스도라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아는 강한 자였습니다. 강한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시키는 극적인 일을 이루어 내실 분이 그들의 그리스도며 메시아였기 때문에 예수는 도저히 그들의 메시아 조건에 충족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이사야서 53장에서 예언되는 것처럼 메시아는 강한 자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질고를 당하고 매맞음을 당하는 약자의 모습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사53:4~5>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3절~간고를 많이 겪었고 질고를 아는자-왜? 인생을 체휼..우리 처지를 이해하시려고..자비와 긍휼을 베프시려고 자원해서 질고와 간고를 많이~)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말씀과는 정 반대의 메시아를 소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곧 그들이 성경을 말하되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이요, 하나님을 말하되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ㅎ님을 말하나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과 다릅니다. 예수님을 말하나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님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 예수님이 맞다고 여깁니다. 이들은 '네가 하나님을 모른다'는 말에 대해서 발끈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앎을 신뢰하고 있기에 자신의 신뢰를 부인하는 말을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복음을 말하는 사람에 대해서 이런 말을 많이 합니다. '너만 아느냐 나도 안다', '너만 복음이냐 나도 복음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다 틀리고 너만 옳으냐?'라는 것입니다.
아마 당시 유대인들도 예수님에 대해 이런 마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겨우 갈릴리 나사렛 출신이며 목수의 아들인 자가 전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들 앞에서 성경을 말하고 하나님을 말하며 심지어 스스로를 하나님이 보낸 자로 일컬을 때 정신 나간 사람으로 보여지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너만 아느냐 나도 안다', 또는 '너만 복음이냐 나도 복음이다'라는 등의 말은 결국 자신의 지식과 자기 복음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기존의 앎(지식)을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앎을 세웁니다. 이 모두는 성령이 오심으로 되어 집니다. 따라서 성령을 받는 자가 그리스도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필히 거치는 과정은 기존의 앎에 대한 부인입니다. 내 지식과 상식으로 알고 있었던 신에 대한 지식이나 예수님에 대한 지식들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신에 대한 인간의 앎을 부인해야 합니까? 그것은 인간은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인간이 생각하는 신이란 자기를 위한 신일뿐 입니다. 자신을 도와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신이며, 그러한 신의 호감을 사기 위해서 신에게 나름대로 정성을 바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ㅎ님께 잘 보이기 위해서 뭔가를 계속 해야 한다는 이 종교성이 복음을 훼손하는 가장 큰 악임을 모릅니다.
복음을 말하면서 복음을 모르고 십자가를 말하면서 십자가를 모르는 자들이지요. 입에서는 같은 단어 같은 용어를 사용하니까 같은 신자라고 여기지만 내용이 다르니까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에 대해서도 크게 오해를 합니다. 이적을 단지 신기한 능력으로 받아들입니다. 당시 유대인들도 이러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31절에 보면 "무리 중에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의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반면에 예수님을 믿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예수님을 알아서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을 근거한 믿음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그리스도가 온다고 해도 예수가 행한 표적을 따르지 못할 것이다는 말까지 합니다(예수님의 놀라운 표적에 대해서는 모두 인정하고 있었다는 말)
그러나 이들은 누가 진짜 그리스도냐라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관심은 이스라엘을 해방할 강한 자였던 것입니다. 자신들을 해방시키는 사람이라면 그를 믿겠다는 것입니다. 즉 이들은 그리스도를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위한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러한 잘못은 오늘날 신자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을 믿는다며 예수님을 찾는 많은 사람들은 정작 예수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들은 '무엇이 참된 예수냐?'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어떤 예수든 상관없이 자신의 일을 도와주고 문제가 있을 때 해결해줄 수 있는 신이라면 진짜로 여기겠다는 것입니다. 이게 인간이 만든 종교이고 신입니다. 자신의 필요를 위해 존재하는 ㅎ님이지요. 이같이 탐심으로 찾는 ㅎ님을 골3.5절에서는 우상숭배라고 폭로 합니다.
과거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에 나와 모세가 율법을 받으러 시내산으로 올라간 사이에 밑에서 아론과 함께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 앞에서 먹고 마시며 뛰놀았다고 합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요? 금송아지는 세상 복주는 ㅎ님을 상징하고, 그 앞에서 먹고 마시며 뛰놀았다는 말은 종교적 각종 행함으로 그 거짓 ㅎ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즐기며 취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오늘날 대형교회들이 성가대니 찬양대를 만들어 매 예배 때마다 오케스트라를 구성해서 찬양을 합니다. 그런 것을 ㅎ님이 과연 받으실까요? 제 카톡에 중고시절 교회 친구모임이 있는데, 대형교회 성가대원인가 봅니다. 찬양대원만 수십 명 이더군요. 얼마 전에 무슨 발표를 했나보던데 자랑삼아 올렸더라구요. 그랬더니 다른 친구들이 칭찬일색입니다. 와 잘한다. 대단하다, 은혜롭다, 프로들 같다. 이런 것들이 바로 ㅎ님 섬김을 빙자해서 자기들이 즐기고 있는 것으로서 금송아지 앞에서 먹고 마시며 뛰노는 겁니다(자기만족, 자기위로, 자기자랑)
어디 그뿐입니까? 각종 행사들로 바쁘지요. 선교 사업이니 구제 사업이니 이웃돕기니, 하면서 교인들이 여러 프로그램과 행사에 묶여서 쉴 틈이 없지요(자긍심 고취, 뿌듯함). 그것이 ㅎ님의 일인가요? 교회 행사에 쉴새 없이 쫓아다니면 더 큰 믿음으로 인정을 해 주나요? 목사나 다른 교인들이 인정을 해줄지 몰라도 ㅎ님은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육의 일들이니까요.
참고로 요즘 전도로 유명해진 부산에 있는 ‘세계로 교회’ 손현보 목사는 이런 교회 조직에 대해 쓴소리를 합니다. 그게 과연 교회의 본문이냐는 지적이지요. 교회는 오직 전도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목적의식으로 얼마 전부터 교회 모든 조직들-성가대, 남녀 선교회, 봉사부, 구제 복지부서등 다 없애고 예배 끝나면 전도하라고 내보낸 답니다. 교인 수가 3500명 정도라고 하는 대형 교회에서 성가대 없이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개혁적인 일이지요.
교회 문화 속에 감추어진 허장허세를 없애는 좋은 시도인 것같더라구요. (물론 그 교회에서 강조하는 전도 방식이나 사람의 열심과 충성, 십일조 생활을 마치 좋은 신앙인양 부추기는 면은 복음에서 벗어나 아쉬움이 있지만..성가대 등 각종 조직을 없앤 것은 아주 잘 한 일이라고 봅니다.) ㅎ님을 팔아 자신들의 취미생활을 하고 성도의 교제를 빙자해서 친목이나 도모하는 것들이 바로 금송아지 앞에서 먹고 마시며 뛰노는 것임을 누가 알겠어요? 이들은 단순히 절간의 부처나 다른 신을 섬기지 않는 게 금송아지 안 만든거라고 여기고 있을 뿐이지요.
예수를 알기 위해선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를 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 밖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안에 거하고 있었다면 그 언약의 성취로 이 땅에 등장하신 그리스도를 알아보았을 것입니다.
서두에 언급한 말3.1절에서 홀연히 임하실 주를 ‘언약의 사자’라고 했잖아요? 예수님이 신약에 어쩌다가 오신 분이 아니라 구약부터 언약하신 바로 그 메시야가 오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언약이란 성경 자체를 말하면서 성경의 핵심 주제이기도 합니다(성경=옛언약, 새언약)
ㅎ님을 언약의 ㅎ님이라고 하는 것은 ㅎ님의 언약 즉 ㅎ님의 시나리오가 있어서 그대로 구속사를 전개하신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언약의 사자이신 IX를 중심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신다는 말이지요. ㅎ님의 언약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어떤 구원인지를 안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를 현세의 삶의 불행에서 건져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의 본질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ㅎ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안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그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선 하나님의 언약을 알아야 합니다. 그 언약 안에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행17:11절)에 보면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라는 말씀을 합니다.
신사적이라는 말은 번역이 좀 어색한 면이 있습니다만, 원문은 유게네스라고 해서 ‘좋은 가문에서 태어난’ 의미 값을 가집니다. 즉 택함 받은 자들을 암시하는 용어 이지요. 신약성경에서 딱 두 번 쓰여졌는데, 다른 한 곳은 눅19:12절에서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길을 갈 때~’라는 구절에서 ‘귀인’이 바로 유게네스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장차 십자가로 죽고 부활하여 ㅎ님께 가실 것을 말씀하시는 내용인데, 자신을 귀인이로 묘사했습니다.
즉, 누가 성경을 깊이 묵상하며 과연 그러한가하고 상고 합니까? 창세로부터 택하심을 입은 귀한 가문인 하늘에 속한 자들이라는 암시를 갖고 있습니다.
베뢰아 사람의 신사적인(즉, 고귀한, 하늘에 속한) 모습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한 것입니다. 즉 이들이 신사적이라는 것은 사람에 대한 태도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대한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들은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이것이 그러한가'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사적인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이러한 신사적인 모습이 필요합니다. 고귀한 모습, 위엣 것을 찾는 모습입니다.
요17:3에는, 영생은 유일하신 참 ㅎ님과 그의 보내신 자 IX를 아는 것이니이다. 라고 합니다.
여기서 참 ㅎ님을 언급하지요? 세속화된 교회에서 찾는 ㅎ님은 금송아지 ㅎ님 입니다. 자기들 소원을 들어주고 세상 복주는 ㅎ님이지요. 그래서 새벽예배를 강조하는 교회에 미어터지게 문전성시를 이루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복 받으려고 몰려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만난 사람들과 비즈니스도 하고 각종 취미생활도 함께하며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먹고 마시며 뛰노는 것입니다.
거짓 ㅎ님이 보낸 예수 역시 어떤 예수겠어요? 나의 열심과 충성을 보고 천국으로 인도하는 그 예수는 물론이고, 오병이어의 기적처럼 떡도 주고 병도 고치고 각종 문제도 해결하는 능력의 예수, 맘씨 좋은 예수이지요. 이런 거짓 ㅎ님, 거짓 예수를 계13장에서는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라고 합니다. 짝뚱 예수를 의미합니다.
그 거짓예수를 섬기라고 부추기는 자들이 바로 땅에서 올라온 짐승인데, 이들이 다름 아닌 거짓 선지자, 거짓 목사들입니다. 이들이 팔고 있는 신앙사상이 바로 666이지요. 강대상에서 영이 아니라 육을 판다고 합니다. 육은 영이 아니라 사람의 정신사조를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666을 사람의 수요, 짐승의 수(정신)이라고 말을 해 줘도 못알아 먹으니, 과연 성경은 그들에게는 닫혀진 책임이 분명 합니다.
정말 예수를 만난 자는 이 세상 것을 달라고 말을 못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을 통해 자신의 내면의 처참한 죄악상이 다 고발되었으니까요. 자신이야말로 한없이 솟구치는 죄로 인해서 저주와 심판의 대상임을 뼈 속까지 느껴지는 데, 어디 함부로 입이 벌려집니까? 말씀 앞에서 무릎이 꿇어지고 입에 커다란 자크가 채워져서 함구한 채, 오직 주님의 용서와 긍휼만 바라볼 뿐이지요.
고작 내 뱉는 말이라면-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주께서 용서치 아니하시면 저는 죽은 자입니다. 불쌍히 여겨 주세요..이 말만 되풀이 할 뿐입니다.
이런 심령을 가진 자들이 주를 만난 자이고, 주를 아는 자요, 참되신 ㅎ님을 아는 자입니다.
마5장에서는 이런 자를 일컬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 합니다.
주님은 자기 백성들을 이렇게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의 소유자로 이끌어 가십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을 것이니라’~
하신 말씀은 ㅎ님의 간섭하심으로 그런 존재가 되게 하시겠다는 주님의 자기 의지의 표현입니다. 결국 ㅎ님의 일하심 속에 안배된 자는 단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게 하시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내 의지로 나를 부인하거나 내 의지로 십자가를 지는 게 아니라,
ㅎ님의 일하심으로 그렇게 조성되어지는 것입니다.
사기꾼 야곱을 이스라엘로 만들어 가시는 것이 ㅎ님의 사랑이고 ㅎ님의 능력입니다.
이런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ㅎ님께 찬송과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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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랑과 복음교회 | - Daum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