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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75
골로새서 1장 18절 [25장 4-6항]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5장은 교회에 대한 내용으로, 1항에서는 택자의 모든 수로 구성된 보이지 않는 교회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즉 보편 교회는 비가시적이며,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아래 하나로 모여졌었고, 모여지고 있고, 모여질 택자의 모든 수로 구성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에 대한 표현으로 신앙고백서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의 신부요, 몸이요, 충만이라고 고백합니다.
이어 2항에서는 보이는 교회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보이지 않는 교회와 보이는 교회가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시적 교회 역시 복음 아래에서 보편적이라고 고백하면서 참된 종교를 고백하는 세계 곳곳에 있는 모든 자들과 그들의 자녀들로 구성됨을 말합니다. 비교하자며 율법 아래에서는 한 국가로 제한되어 있었지만 복음 아래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에 대하여 신앙고백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하나님의 집과 가족으로 표현하면서 그런 교회를 떠나서는 일반적으로 구원의 가능성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3항은 이런 가시적 교회에 주신 방편들에 대한 내용으로, 이 보편적이며 가시적인 교회에게 그리스도께서는 현세에서 성도들을 모으고 완전토록 하기 위해 세상 끝 날까지 하나님의 사역과 말씀들과 규례들을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약속을 따라 자신의 임재와 성령에 의해 그것들을 유효케 하신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가시적 교회로 모으실 뿐만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완전하게 하도록 하기 위해 직분을 주실 뿐만 아니라 말씀들과 규례들을 주셨다는 것이고, 그것들을 사용해 효력이 있게까지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이는 교회는 보이지 않는 교회, 다시 말해 택자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염두해 두어야 합니다. 혹 택자로만 구성되어 있다 할지라도 그들을 완전하도록 하기 위해 세상 끝 날까지 하나님의 사역과 말씀들과 규례들을 주셨다고 한다면, 거기에는 불완전함이 여전히 있다는 것을 염두해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소위 곡식과 함께 가라지가 있는 곳이 보이는 교회로 있으며, 곡식만 있다 하더라도 부패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 보이는 교회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5장 4항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이 보편 교회는 때로 보다 잘 보이고 때로 보다 덜 보입니다(롬11:3,4, 계12:6,14). 보편 교회의 지체인 개교회들은 “복음의 교리가 가르쳐지고 수용되는 것에 따라서, 규례들이 실행되는 것에 따라서, 공예배가 개교회들 안에서 보다 순수하거나 덜 순수하게 실행되는 것에 따라서” 보다 순수하거나 덜 순수합니다(계2-3장, 고전5:6,7).
먼저 이 보편 교회는 때로 보다 잘 보이고 때로 보다 덜 보인다고 고백하는데, 가시적 교회일지라도, 다시 말해 보이는 교회일지라도 보다 잘 보일 때도 있고 보다 덜 보일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1장 3절과 4절은 엘리야 시대 때의 일을 언급합니다.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 나라는 남과 북으로 갈라졌습니다. 이때 북이스라엘은 시작부터 정통적인 신앙을 버리고 출발했습니다. 겉으로는 여호와 하나님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되어 있지만, 사실은 미신적이고 혼합적인 신앙으로 변질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아합 시대 때는 그 심각성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엘리야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엘리야 선지자 하면 가장 유명한 사건이 바알과 아세라의 이방 선지자들과 대결한 내용인데, 결국 엘리야가 섬기던 하나님이 참 신임을 드러내셨습니다. 이방 선지자가 아니라 엘리야가 승리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에 대하여 아합 왕의 아내인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려고 하자 엘리야는 광야로 도망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방금 읽은 3절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만큼 북이스라엘 나라 안에는 보이는 교회를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엘리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보이는 교회는 덜 보일 수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그러나 하나님께만 보이는 교회만큼은 언제나 늘 두신다는 것입니다.
신앙고백서는 요한계시록 12장에 있는 내용도 인용하는데, 6절입니다.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천이백육십 일 동안 그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14절도 보시면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 일단 여자가 광야로 도망한다는 것은 신랑되신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가 광야로 도망할 수밖에 없는 그런 어려움을 받는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13절에 의하면 ‘용’ 때문에 도망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이 용은 9절에 의하면 ‘옛 뱀 곧 마귀라가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는 자입니다. 에베소서 2장의 표현으로 하자면 공중의 권세 잡은 자입니다(엡2:2). 이런 마귀요 사탄을 피하기 위해 교회는 광야로 도망하는 겁니다. 이 광야에서 얼마나 있게 되느냐? 6절은 ‘천이백육십 일’입니다. 같은 뜻으로 14절은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입니다. ‘때’를 언제나 1년으로 환산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 1년으로 환산하면 3년 반이 되는데, 한 달을 30일로 잡으면 3년 반이 천이백육십 일이 됩니다. 이것을 달로 계산하면 ‘마흔두 달’이 되는데, 요한계시록 13장에서는 이 표현이 나옵니다(13:5). 같은 뜻의 또 다른 표현으로 요한계시록 11장에서는 사흘 반(11:9), 삼 일 반(11:11)으로도 기록합니다. 뿐만 아니라 ‘십 일’(계2:10)이나 ‘천 년’이라는 말로도 표현됩니다. 이러한 숫자들이 의미하는 것은 결코 문자 그대로가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가 지상에서 수고하는 동안 겪을 여러 환난과 곤란의 때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광야로 피하지만 광야 자체가 여러 환난과 곤란을 겪는 장소인 것이고, 놀라운 것은 이러한 장소가 하나님께서 교회를 양육하시는 도구로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요한계시록 12장은 교회가 지상에서 수고하는 동안 겪을 여러 환난과 곤란의 때 동안 양육을 받는데, 이것은 결코 특정 시대가 아닙니다. 창세로부터 마지막에 이르는 모든 시대를 의미합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교회는 사탄으로부터 위협을 받습니다. 그래서 광야로 몰리게 되고, 그곳에서 어려움을 겪지만 오히려 그것을 통해 더욱 양육을 받습니다. 이런 점에서 지상의 교회는 늘 전투하는 교회로 있습니다. 신앙고백서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이렇게 환난을 받는 교회를 생각해 볼 때 외적으로는 보이는 교회가 덜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복음으로 말미암아 사도들이 순교하던 때의 보이는 교회는 사람들 눈에 덜 보이기도 했습니다. 반면 순교하던 때가 지나고 평안할 때 교회는 더 잘 보이기도 합니다. 이때 우리는 보이는 교회가 덜 보인다고 해서 덜 순수하고, 보이는 교회가 더 잘 보인다고 해서 순수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점에서 신앙고백서는 보편 교회의 지체인 개교회들은 “복음의 교리가 가르쳐지고 수용되는 것에 따라서, 규례들이 실행되는 것에 따라서, 공예배가 개교회들 안에서 보다 순수하거나 덜 순수하게 실행되는 것에 따라서” 보다 순수하거나 덜 순수하다고 고백합니다. 일단 신앙고백서가 인용하고 있는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은 에베소 교회, 서머나 교회, 버가모 교회, 두아디라 교회, 사데 교회, 빌라델비아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말씀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칭찬을 받기도 하고, 또 어떤 교회는 책망을 받기도 하는데, 칭찬을 받을 만큼 순수한 교회가 있는가 하면, 책망을 받을 만큼 덜 순수한 교회가 있기도 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린도전서 5장 6절과 7절에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음행의 문제를 말하면서 출교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책망하고 있는 내용인데, 분명 고린도 교회이지만, 그리고 그런 점에서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고전1:2) 편지하고 있지만, 죄악된 행동으로 말미암아 순수함에 있어서 덜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교회의 순수함의 여부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신앙고백서는 세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 복음의 교리가 가르쳐지고 수용되는 것에 따라 판단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지금 우리가 갈라디아서를 살피고 있지만, 말씀을 가르치느냐 가르치지 않느냐가 아니라 말씀을 참되게 가르치느냐 가르치지 않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8-9)라고 강하게 말했던 것입니다. 특히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에서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건물을 지을 때 어떤 재료로 짓는가가 중요하다고 말하는데, 금, 은, 보석이냐 아니면 나무, 풀, 짚이냐에 대해 말합니다. 13절에 의하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고 말하면서 불로 시험할 때 금, 은, 보석의 경우는 사라지지 않지만 나무, 풀, 짚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을 통해 나타내고자 하는 핵심은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사라지는 가르침을 가르쳐서는 안 되고, 사라지지 않는 가르침, 그리스도라는 터와 어울리는 가르침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교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하게 가르쳐지느냐, 그리고 그런 가르침을 얼마나 잘 수용하느냐에 따라 교회는 순수하기도 하고 덜 순수하기도 합니다. 참고로 우리는 오직 성경과 함께 전체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추어야 하는데, 이런 점에서 지금 우리가 배우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같은 전체 주제에 따른 교리에 대한 공부를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규례들이 실행되는 것에 따라서 판단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규례들이 어떻게 실행되느냐에 따라 판단할 수 있다고 할 때 대표적인 내용으로 성례를 제시하는 게 보편적입니다. 1561년 벨직 신앙고백서는 참된 교회의 표지 세 가지를 명시적으로 말했습니다. 첫째, 순수한 복음 설교가 선포되는가, 둘째,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대로 성례의 순수한 집행을 계속해서 유지하는가, 셋째, 죄를 교정하고 징벌하는 교회의 권징을 실행하는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의 순수함의 여부에 대하여 규례들이 어떻게 실행되느냐에 따라 판단할 수 있다고 할 때 대표적인 규례로서 성례로 이해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154문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그의 중보의 유익들을 우리에게 전하시는 외적 수단들은 무엇인가?” 할 때 다음과 같이 답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중보의 유익들을 그의 교회에게 전하시는 외적이며 보편적인 수단들은 그의 규례들, 특히 말씀과 성례와 기도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그들의 구원을 위해 택함받은 자들에게 효력이 있게 합니다.” 이런 점에서 복음의 교리, 즉 말씀과 함께 규례들을 말한다면 성례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7장(성례), 제28장(세례), 제29장(성찬)에서 살펴볼 것인데, 규례들이 어떻게 실행되느냐에 따라 순수함을 판단할 수 있다고 할 때 화체설이나 공재설은 거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방금도 말했지만, 그래서 벨직 신앙고백서는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대로 성례의 순수한 집행을 계속해서 유지되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다만 벨직 신앙고백서가 말하고 있는 세 가지 중 권징에 대한 언급은 여기에 없는데, 딕스 혼은 규례들이 실행되는 것에 따라 판단할 수 있다고 할 때 권징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인용한 요한계시록 2장과 3장, 그리고 고린도전서 5장 6절과 7절은 교회의 권징과도 관련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고린도전서 5장의 경우 교회의 권징을 가르치는 전형적인 본문이라는 것이고,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은 책망을 받는다는 점에서 권징의 필요성을 볼 수 있다는 것인데, 참고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셋째, 공예배가 개교회들 안에서 보다 순수하거나 덜 순수하게 실행되는 것에 따라서 판단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지난 주일에도 갈라디아서(4:8-11)의 본문을 통해 말씀을 드렸지만, 하나님께서 그런 예배를 명하셨는가, 명하지 않으셨는가에 따라 순수하기도 하고, 덜 순수하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God-made[갓 메이드]냐, man-made[맨 메이드]냐 여기에 따라 순수함의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1장 종교적 예배와 안식일에 대한 내용에서 살핀 바가 있지만, 참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적합한 방식은 하나님 자신에 의해 제정되어서 하나님 자신의 계시된 뜻에 제한한다는 규정적 원리가 중요합니다(1항). 철저히 God-made[갓 메이드]만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식으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의 교리에 따라, 규례들의 실행에 따라, 공예배가 개교회들 안에서 보다 순수한가, 아닌가에 따라 순수함의 여부가 결정된다고 할 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5장 5항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교회의 현실에 대하여 고백합니다.
하늘 아래 가장 순수한 교회들이어도 혼잡과 오류에 종속되어 있습니다(고전13:12, 계2-3장, 마13:24-30,47). 일부 교회들은 그리스도의 교회들이 아니라 사단의 회당들이 될 정도로 매우 타락했습니다(계18:2, 롬11:18-22).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교회가 지상에 항상 있을 것입니다(마16:18, 28:19,20, 시72:17, 102:28).
먼저 하늘 아래 가장 순수한 교회들이어도 혼잡과 오류에 종속되어 있다고 고백합니다. 즉 복음의 교리를 순수하게 전할지라도, 성례의 실행함에 있어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따른다 할지라도, 또 예배를 드림에 있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말씀에 근거한다고 할지라도 완전한 교회는 지상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 스스로 완전하지 않고 늘 부패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요, 특히 보이는 교회라고 할 때 거기에는 보이지 않는 택자의 수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라 곡식과 함께 가라지도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고백서가 인용하는 고린도전서 13장 12절은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는 말씀입니다. 완성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지상 교회의 모습은 불완전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점과 흠이 있는 것이 지상 교회의 모습입니다. 때문에 혼잡과 오류에 종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을 인용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칭찬을 받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책망을 받는 교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칭찬을 받는다고 해서 그 교회가 완전하다, 점과 흠도 없다는 의미인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일곱 교회를 향해 말씀하실 때마다 마지막 부분에 가면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고 하시고, 또 ‘이기는’ 자는 어떻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들이 있는데, 지상의 교회는 전투하는 교회로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교회가 늘 승리만 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순수하더라도 혼합과 오류에 종속되어 있고, 또 얼마든지 종속될 수 있는 것이 지상의 교회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 24절 이하 30절의 말씀은 곡식과 가라지에 대한 비유인데, 곡식 자체도 점과 흠이 있지만 거기에 가라지까지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이 일이 언제까지인가? 3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그러니까 지상에 있는 교회는 마지막 심판의 때까지 늘 가라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신앙고백서는 일부 교회들은 그리스도의 교회들이 아니라 사단의 회당들이 될 정도로 매우 타락했다고 고백하기도 하는데, 혼잡과 오류에 종속될 뿐만 아니라 교회라고 하는 곳이 오히려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곳이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북이스라엘과 관련해서 말했지만, 솔로몬 이후 남과 북이 갈라졌다고 할 때 북이스라엘의 교회가 그렇습니다. 분명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예배가 아닙니다. 오히려 금송아지 신상을 벧엘과 단에 만들어 예배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이름만 있을 뿐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명하신 규례들에 따라 제사장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레위인이 아닌 자를 제사장을 세웁니다. 이런 모습들은 결국 교회라는 모양만 있을 뿐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닙니다. 신앙고백서가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사단의 회당들이 되었다고 말할 정도로 타락한 모습으로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교회가 지상에 항상 있을 것이라고 고백하는데, 인용하고 있는 구절들에 따르자면 그리스도께서 친히 반석 위에 교회를 세워 음부의 권세조차 이기지 못하도록 하시기 때문입니다(마16:18).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승천하시기에 앞서 말씀하신 것처럼 세상 끝날까지 주의 택한 모든 백성들과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마28:20). 시편 72편 1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의 이름이 영구함이여 그의 이름이 해와 같이 장구하리로다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니 모든 민족이 다 그를 복되다 하리로다” 하나님의 이름의 영원하다는 것은 그의 이름으로 약속한 모든 택한 백성들 또한 영원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주의 몸 된 교회가 지상에서 사라지는 일이 있는가? 없습니다. 그래서 시편 102편 2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의 종들의 자손은 항상 안전히 거주하고 그의 후손은 주 앞에 굳게 서리이다 하였도다”
끝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5장 6항은 1항에서 언급했던 사실을 부각시켜 강조하면서 로마 교황에 대하여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 교회의 다른 머리는 없습니다(골1:18, 엡1:22). 로마 교황은 어떤 의미에서도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없고, 오히려 그리스도를 대적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 칭해지는 모든 것을 대적하여 교회 안에서 자신을 높이는 적그리스도이며, 죄의 사람이며, 멸망의 아들입니다(마23:8-10, 살후2:3,4,8,9, 계13:6).
서두에서도 언급했지만 1항은 비가시적인 교회, 볼 수 없는 택자의 모든 수로 구성 된 교회에 대한 고백인데, 그들은 모두 머리되신 그리스도 아래 모이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6항은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 교회의 다른 머리는 없다고 고백합니다. 오늘 본문으로 읽은 골로새서 1장 1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본문 바로 앞에 있는 16절과 17절에 의하면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조주요, 섭리자이심을 말합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교회의 머리가 아니라 모든 만물의 머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창조주요, 섭리자이심을 고백하면서도 이어지는 18절에서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세상은 ‘흑암의 권세’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란 그런 ‘흑암의 권세’ 아래에서 건져내어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곳입니다(골1:13). 그러므로 교회만큼은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머리로 계시며, 예수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이시기 때문에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 아래에만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4항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복음의 교리가 가르쳐지고 수용되는 것에 따라서, 규례들이 실행되는 것에 따라서, 공예배가 개교회들 안에서 보다 순수하거나 덜 순수하게 실행되는 것에 따라서 보다 순수하기도 하고, 덜 순수하기도 한데, 결국 이런 내용을 통해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만 순종하는 것이 가장 순수하다는 것이요 거기에 그리스도의 다스림의 충만함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 22절도 보면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비록 이 세상이 흑암의 권세 아래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통치권, 하나님께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통치권을 주셨다고 할 때 그런 통치권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모든 만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발 아래에 복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는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만물 위에 있지만, 그런 분을 특별히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만물도 그리스도의 다스림 아래에 있어서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교회라는 것입니다. 이런 교회에 대하여 지난 시간에도 언급했지만 23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만물을 충만하게 하실 만큼 충만하지만, 그리고 이 사실은 결코 변할 수 없는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충만하게 하는 대상이 누구냐? 교회란 것입니다. 교회 없는 예수 그리스도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교회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 교회의 다른 머리는 있을 수가 없는데, 신앙고백서는 이런 점에서 로마 교황에 대하여 비판합니다. 즉 로마 교황은 어떤 의미에서도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없고, 오히려 그리스도를 대적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 칭해지는 모든 것을 대적하여 교회 안에서 자신을 높이는 적그리스도이며, 죄의 사람이며, 멸망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미국 북장로교회가 1903년에 삭제한 부분인데, 핵심은 이런 표현이 로마 가톨릭의 교황에 대하여 지나친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교리는 분명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정요석 교수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삶을 읽다는 책을 참고하면, 일단 로마 가톨릭도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의 지체들이기 때문에”라는 표현으로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심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교황과 주교들이 그리스도의 권위를 지닌 스승이라고 하면서 “교황과, 그와 일치해 있는 주교들의 보편적이고 통상적인 교도권은 신자들에게 믿어야 할 진리, 실천해야 할 사랑, 그리고 희망해야 할 참 행복을 가르친다.”고 말함으로써 교도권이라는 의미로 교황을 그리스도의 권위를 지닌 스승으로 높입니다. 이뿐 아니라 이어 그들은 “그리스도의 권위에 참여하는 가장 높은 단계는 무류성의 은사로 보장된다. 무류성은 교회가 거룩하게 보전하고 충실히 설명하여야 할 하느님 계시의 위탁이 펼쳐지는 그만큼 펼쳐진다. 또한 무류성은 윤리를 포함해서, 구원을 위한 신앙 진리들을 지키고 설명하며 보존하는 일에 필요한 모든 교리 조항에까지 미치는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마치 교황이 교회의 머리가 되는 것처럼 여기게 만듭니다. 더 나아가 이들은 “진리의 기둥이며 기초인 교회는 구원의 진리를 선포하는 그리스도의 이 장엄한 명령을 사도들에게서 받았다.”고 말함으로써 사도들이 교회에 권위를 선포하였다고 말하고, 사도들 중 수석 사도가 교황이므로 교황을 교회의 머리로까지 은연히 끌고 갑니다. 이러하기에 이들은 “교회는 윤리 원칙들을 사회 질서에 관한 것까지도 언제나 어디서나 선포하고, 인간의 기본권이나 영혼의 구원에 요구되는 한에서는 어떠한 인간사에 대하여서도 판단을 내릴 소임이 있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교리들이 전혀 바뀌지 않고 있고, 여전히 성경을 왜곡하고 남용하면서 잘못된 가르침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로마 교황’이라는 명시적인 표현을 한 것은 종교 개혁이 이루어진 중세 시대의 폐해가 너무나도 컸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로마 교황이 권위와 권력의 측면에서 거의 교회의 머리에 이르렀기 때문에 성경의 표현을 따라 적그리스도로, 죄의 사람으로, 멸망의 아들로 표현한 것입니다. 신앙고백서 자체가 역사적 산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로마 교황만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 교회의 다른 머리를 두는 교리를 가지고 있고, 그것을 증거한다면 신앙고백서가 성경을 따라 표현한 것처럼 그들은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로 있을 뿐입니다. 때문에 교회 안에서 자신을 높이는 적그리스도라 불릴 수밖에 없고, 죄의 사람으로 불릴 수밖에 없고, 멸망의 아들로 불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라면, 그리고 그 교회에 속한 지체들이라면 우리의 머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다스림 아래에만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다스림 아래에 있다는 것은 그의 말씀만이 우리의 신앙과 삶의 규범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때도 말씀 해석이라는 문제가 등장하지만, 무엇이 금, 은, 보석이지 무엇이 나무, 풀, 짚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하여(고전3:12) 그리스도와 어울리는 가르침 아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칼빈이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롬12:6) 해야 한다고 할 때 이것이 성경의 모든 해석을 시험하는 아주 명백한 규칙을 제시한 것이라고 하면서 우리 자신에게서 모든 영광 돌릴 기회를 제거하여 그분 홀로 영광스럽게 부각되며 우리는 그분 안에서 영화로워하는 것보다 믿음에 더 잘 부합되는 것이 없다고 한 것처럼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것이 몸 된 교회의 정체성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