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암 이한응의 시문학에 반영된 성리 자연 미의식
이원걸
Ⅰ. 머리말 Ⅱ. 생애와 저술 1) 생애 2) 문집 Ⅲ. 시문학 창작 배경 1) 산수자연 인식론 2) 춘양 산수 애호와 퇴계 산수관 계승 Ⅳ. 산수자연 시문학의 형상성 1) 화훼 애호의 정서 2) 전원 은거의 정취 3) 자연 동화의 흥취 4) 선유의 전통과 「춘양구곡」 창작 배경 5) 「춘양구곡」의 성리 미학 (1) 운곡천의 원두와 유선(서시․1곡) (2) 사미정과 풍대의 향기(2곡․3곡) (3) 연지와 창애정의 고절(4곡․5곡) (4) 쌍계와 서담에의 전설(6곡․7곡) (5) 한수정과 도연의 추억(8곡․9곡) Ⅴ. 마무리 |
Ⅰ. 머리말
경북 지역은 타 지역에 비해 출중하게 명현 거유를 배출하였다. 이들은 수려한 산수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후진을 양성하여 구곡문화가 선진적으로 형성되었다.봉화의 경우 ‘춘양’․‘법계’․‘구룡산구곡’ 등지에서 구곡이 경영되었다. 경암敬菴 이한응李漢膺(1778-1864)은 봉화군 춘양면에 춘양구곡을 경영하였는데 춘양은 신령한 골짜기와 맑은 시내를 가졌다. 특히 이 지역은 병자호란 이후 태백오현 잠은潛隱 강흡姜恰(1602-1671)․각금당覺今堂 심장세沈長世(1594-1660)․포옹抱翁 정양鄭瀁(1600-1668)․손우당遜愚堂 홍석洪錫(1604-1680)․두곡杜谷 홍우정洪宇定(1595-1654)이 은거하며 강학하던 곳이다. 춘양의 물은 태백산 서남 두 계곡으로부터 흘러오다가 남류로 합하여 낙동강으 로 들어가 수백 리를 흐른다. 태백산은 신령하고 빼어나며 광활한데 춘양 지역은 그 중심에 처해 있다. 그래서 산세가 깊어 골짜기를 따라 시냇물이 흘러내려 구비를 형성해 가경佳境을 선사하고 있다.
본고는 춘양의 선비 경암 이한응에 주목하고자 한다. 경암은 많은 한시 작품을 통해 유학자로서 본연에 충실하며 산수 자연미 의식을 담아내었다. 그의 시문학이 지닌 속성을 생애와 반추하여 종합하는 것은 춘양 지역 선비 문화 이해의 기반을 다지는 일환이다. 그의 시문학 작품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산수 자연 미학을 담은 시가 매우 많다는 점이다. 특히 경암은 「춘양구곡」을 지었다. ‘춘양구곡’은 현 봉화군 법전면 어은동에서부터 춘양면 서동리 춘양중학교 앞까지의 운곡천 물굽이를 따라 아홉 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곡은 ‘어은동’, 제2곡은 ‘사미정’, 제3곡은 ‘풍대’, 제4곡은 ‘연지’, 제5곡은 ‘창애’, 제6곡은 ‘쌍호’, 제7곡은 ‘서담’, 제8곡은 ‘한수정’, 제9곡은 ‘도연서원’이다.
이러한 경암의 산수 자연 미학과 그의 성리 사유 의식과의 연관성을 추적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그의 생애와 저술 양상을 검토하고 시문학을 ‘목가 서정과 산수 자연미’․‘기행과 감회 서정’․‘교유 활동과 성리 이념’로 개괄한다. 시문학 창작 배경으로, ‘산수 자연 인식론’․‘춘양 산수 애호와 퇴계 산수관 계승’으로 정리한다. 경암 산수 시문학의 형상을 ‘화훼 애호의 정서’․‘전원 은거의 정취’․‘자연 동화의 흥취’․‘선유의 전통과 「춘양구곡」 창작배경’․‘「춘양구곡」의 성리 미학’으로 정리한다. 일련의 검토 과정을 거쳐 경암 산수 자연시와 그의 성리학 사유 의식의 상관성을 파악하고자 한다.
Ⅱ. 생애와 저술
1) 생애
경암敬菴 이한응李漢膺(1778-1864)의 본관은 진보眞寶이며, 자는 중모仲模, 호는 경암敬菴이다. 시조는 고려 때 현리로서 생원시에 합격한 석碩으로, 밀직사密直使로 증직되었다. 아들 자유子攸는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통헌대부通憲大夫에 이르렀다. 홍건적을 토벌한 공으로 송안군松安君으로 봉해졌으며 후일 안동安東으로 이거移居했다. 손자 정禎은 강개慷慨하고 큰 포부를 지녔으며 말 타고 활을 잘 쏘았다. 모적毛賊을 정벌한 공으로 이급二級의 벼슬을 받았으며 선산부사善山府使를 역임했고 호조참판戶曹參判으로 증직되었다. 정禎은 계양繼陽을 낳았는데 단종端宗 때 진사進士가 되었지만 은둔하여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고 호를 ‘노송정老松亭’이라 했다. 그는 예안禮安의 온혜溫惠로 이거移居했으며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증직되었다.
계양溪陽은 우堣를 낳았는데 호는 송재松齋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호조판서戶曹參判에 이르렀다. 송재는 문장文章과 행의行誼로 당대에 추앙을 받았다. 형 찬성공贊成公 식埴과 계현사啓賢祀에 병향幷享되었다. 이분들은 퇴계退溪(1501-1570)의 숙부로서 퇴계를 훈적訓迪한 공이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5대를 지나 고조부 이동표李東標(1644-1700)의 자는 군칙君則, 호는 난은懶隱이다. 난은은 도학과 문학으로 중망을 받았으며 출처대의에 분명하여 ‘소퇴계小退溪’라는 칭호를 받았다. 인현왕후仁顯王后 손위遜位 때 상소문으로 극간極諫하여 청절淸節이 빛났다. 1741년(영조17)에 자헌대부資憲大夫․이조판서吏曹判書․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學․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오위도총부총관五衛都摠府都摠官으로 추증되었으며, 자손들을 관직에 등용하라는 하교와 함께 ‘역주청의수립탁연[力主淸議樹立卓然]’이라는 증첩贈帖을 하사받았다. 이어 1784년(정조8)에 ‘충간忠簡[危身奉上曰忠 正直無邪曰簡]’의 시호가 내려졌으며 ‘청백리淸白吏’로 기록되었다. 증조부 제겸濟兼은 문과에 급제하여 찰방察訪을 지냈으며 호는 두릉杜陵이다. 조부 중경重慶은 통덕랑通德郞을 지냈고 호는 운고雲皐이다. 부친은 진굉鎭紘으로 호는 계애溪涯이다. 모친은 하산성씨夏山成氏인데 통덕랑 현인顯寅의 따님으로 응교應敎 이성以性의 현손玄孫이다.
경암 이한응은 1778년(정조2) 2월에 태백산 남쪽 봉화군 춘양읍 녹동鹿洞 집에서 태어났다. 태어나면서부터 기골이 크고 준수했다. 불행하게 3세에 모친을, 7세에는 부친을 여의고 이웃집 할머니 손에 자라났다. 조금 자라나서 백조伯祖 누실옹陋室翁에게 학문을 배웠는데 번거롭게 가르치지 않아도 스스로 학문을 깨우쳤다. 이에 누실옹은 “우리 문호를 크게 할 사람은 반드시 이 아이일 게다”라고 하며 극찬했다. 평소 독서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어릴 때 입을 벙긋하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학문을 즐겨 주리고 목이 마른 사람처럼 열심히 노력하였다. 심지어 침식을 잊을 정도였는데 지치고 땀이 날 정도로 공부하였다. 집안 어른들은 이를 보고 지나칠까 염려하여 만류하였지만 경암은 마지못해 응해서 쉬곤 하였다. 10여 세부터 옛사람들이 추구하던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뜻을 두고 학문에 정진했다. 과거 공부는 즐겨하지 않았지만 어른들의 권유에 의해 응거하다가 서른 살이 된 이후로 과거 공부를 단념했다. 오직 학문에 뜻을 두었는데 집안이 가난하여 어려움이 많았지만 편안하게 여겼다.
바르게 책상에 앉아 독서하고 사색하여 침식을 잊을 정도였다. 성현의 말씀에 유의하여 한 말씀이나 한 글자라도 지나치지 않고 반드시 마음으로 이해하고 체득했으며 서체도 단정했다. 이따금 시를 지었는데 ‘염락溓洛’의 의취意趣가 있었다. 그러다가 부천공鳧川公에게 학문을 배웠는데 학동이 매우 많았는데 경암이 가장 어렸다. 당시 경암은 날씨와 관계없이 늘 아침 일찍 일어나 많은 아이들 보다 앞서 서당 문 밖을 깨끗이 쓸고 화롯불을 준비해 두고 문밖에서 굻어 앉아 스승을 기다렸다. 이에 스승 부천공은 그를 기특히 여기 ‘후일에 반드시 크게 될 인물이다’라고 하였다.경암은 조실부모하여 두 어버이를 모시지 못한 것을 지극한 한으로 여겼는데 기일이 되면 목욕제계沐浴濟戒하고 제사를 모시며 곡읍哭泣하기를 노년이 될 때까지 하였다. 두 형과 우애가 있게 지냈는데 출입할 때 반드시 마당에 내려와 공경스럽게 대하여 항상 화기애애하였다.
항상 선현들의 말씀을 ‘잠명箴銘’으로 나타냈으며 산수를 애호하여 가끔 시로 표현했다. 항상 거경居敬 공부에 주력했으며 정자程子․주자朱子․퇴계退溪의 가르침을 표준으로 삼아 ‘함양수용경진학재치지涵養須用敬進學在致知’ 열 자를 벽에 써서 걸어두고 조석으로 보고 이를 실천하고자 했다.백씨白氏가 경암이 살던 곳과 10리 정도 떨어진 하곡荷谷으로 이사를 왔다. 백씨는 위장병을 앓았는데 경암은 약물과 침구로 손수 치료를 해드리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한 정성에도 불구하고 백씨가 별세하자 경암은 슬퍼하며 장례를 치렀으며 형수를 지성으로 섬겼다. 백씨의 두 조카가 요절하여 가정 형편이 매우 곤란해지자 중씨仲氏와 상의하여 돕고 중씨의 둘째 손자를 백씨의 양자로 입적시켜 대를 잇게 했다. 또한 숙모를 지성으로 섬겨 반찬 공궤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중씨와는 팔십 평생을 함께 지내면서 화목하게 지냈다. 문밖을 출입할 때 항상 문아래 마당에 내려와 기다리며 공경을 다해 섬겼다. 맛난 음식 한 그릇이라도 얻게 되면 반드시 형과 함께 나누어 먹었으며 의복도 그렇게 하여 형제의 우애를 돈독히 하였다.
실제로 그는 평생 산림처사로 자처할 만큼 선비로서 수신과 근학에 전념하였다. 자제들이 과거에 응시하는 과정에서 ‘분경奔競’의 폐단을 보고 과거 응거를 그만두길 당부하면서 “선비로서 이 세상에 살면서 ‘수신修身’과 ‘근학勤學’으로 주어진 목숨을 다하면 그만이다”라고 하였다.경암의 글은 ‘궤격은심詭激隱深’하거나 ‘조탁화식彫琢華飾’하지 않고 ‘평이간고平夷簡古’하여 옛 작가들의 규범을 잃지 않았다. 시 짓는 것은 여사餘事였지만 내용은 ‘전아웅심典雅雄深’․‘간화박채刊華剝彩’하여 ‘우의재도寓意載道’의 내용으로 ‘염락아송溓洛雅頌’의 풍운風韻을 띄었다.서법 또한 고건古健하였는데 어려서부터 익히지 않았어도 천성적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당시 누정이나 편액한 기문에서 경암의 글씨를 얻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
경암은 평생 후진 양성에 뜻을 두어 이만준李晩埈 등의 문인을 두었으며 또한 저술에 전념하여 주자朱子․장식張軾․여조겸呂祖謙과 이황李滉의 저서 중에서 622조의 글을 뽑아 14권의 속근사록續近思錄을 만들었다.그는 이황의 학설을 따라 ‘사단四端·칠정七情’은 ‘인심人心·도심道心의 다른 명칭’일 뿐이며 ‘인심은 기氣를 주로 하고 도심은 이理를 주로 하여 말한 것’이라 하였다.이와 함께 그는 서예와 시문에도 탁월한 솜씨를 보였다.
1849년(헌종15)에 추천으로 선공감역繕工監役이 되었다. 이듬해인 1850년(철종1)에 봄에 영남 고을 선비들이 청량산 ‘오산당吾山堂’에서 강회를 가졌는데 모인 자가 600여 명이나 되었다. 당시 경암은 도산서원 원장으로 즉석에서 좌장으로 추천되어 대학 「변론문답辨論問答」에 응답하였다. 이에 경암은 탁월한 박학다식한 실력으로 질문에 박아정해博雅精解한 대답을 하여 좌중을 경탄케 하였다. 이로부터 경암에게 학문을 배우러 오는 자들이 더욱 많아졌다. 만년인 1851년(철종2)에 시냇가에 작은 집을 짓고 ‘경의재敬義齋’라고 편액하였다. 작은 연못을 파서 두르고 강학 활동을 펼치며 제자 양성에 주력하였다. 아울러 퇴계의 ‘징분질욕懲忿窒慾’․‘신기독愼其獨’을 써서 걸어두고 심신을 수양했다. 1857년(철종8)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으며 1860년에는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이 되었다.
1864(고종1) 11월 16일에 별세하니 향년 87세였다. 이듬 해 3월에 구가동九佳洞 두릉杜陵의 묘소 좌측 간좌艮坐에 이장했다. 1898년(광무2)에 봉화읍 소천현小川縣 황목리荒木里 갑좌甲坐로 이장했다. 저서로 경암집敬菴集15권이 있다. 부인은 청주정씨淸州鄭氏로 정간공貞簡公 약포 정탁의 8세손으로 사인士人 필육必陸의 따님이다. 슬하에 2남 3녀를 낳았다. 장남은 도상道相이며 차남은 헌상憲相이다. 첫딸은 정지기鄭之夔에게, 둘째 딸은 류진석柳進奭에게, 셋째 딸은 서상렬徐相烈에게 각각 시집갔다. 장남 도상은 아들을 낳지 못해 헌상의 아들 흥로興魯를 양자로 맞아 후사를 이었다. 도상의 맏딸은 이수연李洙淵에게 시집을 갔다. 정지기의 아들은 의규儀逵, 류진석의 아들은 도능道能이다. 류진석의 맏딸은 김구하金龜河에게, 둘째 딸은 정호관鄭好寬에게, 샛째 딸은 진사 이만윤李晩胤에게 출가出嫁했다. 서상렬의 양자는 재두在斗이며 맏딸은 박해익朴海翼에게, 둘째 딸은 이희동李羲東에게 출가했다.
2) 문집
경암선생문집敬菴先生文集은 목판본 15권 12책이다. 이 책은 1885년(고종21)에 손자 이흥로李興魯 등에 의해 편집․간행되었다. 간기刊記가 분명하지 않지만 경암의 「묘지명」이나 「서문」을 보면 사후, 아들 헌상憲相, 경장景章 등이 이수영李秀榮과 함께 유고를 정리한 지 7년에 유집 간행의 작업을 시작하다가 경장景章이 죽었다. 이에 경장의 아들 흥로가 이수영에게 부탁하고 또 외손 류도능柳道能이 수 백리 밖에서 저자의 유고를 보내며 유집의 간행을 간곡히 부탁하였다. 그러므로 경암 사후 22년 만인 1885년에 이수영이 「묘지명」을 쓴 기록을 보아 그 때에 동시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권1에는 시가 실렸다. 권2에는 시가 실렸다. 권3에는 「서書」 14편(柳相祚1․姜海隱8․趙奎應2․姜擎厦1․柳耳仲2)이 실렸다. 권4에는 「서書」 18편(柳致明2․趙炳相1․成聖思1․李相羲1․李致休1․姜景仁․李致宇1․鄭先壁1․李天裕1․權道和1․李昌瑞1․李迪裕1․趙彦明1․朴元愚1․朴性翁2)이 실렸다.
권5에는 「서書」 28편(金道明1․黃中琯1․金重垕1․李士實2․李應淵1․金燦圭1․朴周鍾2․李洛鉉1․姜楗2․金輝濬3․金景玉2․姜稷1․權騝1․滄洲士林1․洪起華2․黃繼夏1․金景典1․友人1․鄭夔1․吳世潤1․柳道能1)이 실렸다. 권6에는 「서書」 20편(李仁行1․李汝用1․李義卿1․李近道1․李源伯1․李君睦2․李彙主1․李彙炳1․李彙載1․李彙蘭1․李泰魯1․李彙承1․李博汝4․李秀行1․李謹休2)이 실렸다.
권7에는 「서書」 17편(李彙白1․氣翁1․孤山門中1․李汝擴6․李漢綺1․李漢中1․李江叟1․李得魯1․李憲相1․李敎英1․李明魯1․李興魯1)이 실렸다. 권8은 「잡저雜著」인데 「自省錄」이 실렸다. 권9에는 「잡저」 16편(伊川先生立子說辯․讀韓子鄠人對․讀韓子對禹問․讀葛庵論西厓心無出入說․近思錄葉註疑義․心經刊補箚疑․論語箚疑略․中庸疑義․讀韓南塘經義記聞錄․四端七情說․木匜說․圓冠說․禮說․蛛網說․義媼傳․遊鹿門錄)이 실렸다.
권10에는 「서序」 7편(洞約序․月隱金公實記序․琴易堂裵公文集序․靜齋曺公實記序․澄江吉公逸稿序․臥遊堂朴公文集序․續近思錄序) 및 「기記」 4편(喬峰軒記․逸白盧記․約齋記․溪齋記)․「발跋」 8편(書李士實所藏武夷九曲圖後․書李工自省四十目後․書樂天水北金公兩世遺事後․書工夫節略後․書講規後․書汝擴改過說後․書朱子與黃勉齋書贈柳壻進奭․書朱子與受之魏應仲書贈族曾孫敎弘)․「잠명箴銘」 4편(元日箴․杖銘․硯匣․席銘)이 실렸다.
권11에 「상량문上樑文」 2편(九佳菴上樑文․豊隱李公祀講堂上樑文)․「고유문告由文」 2편(葛庵先生綜牒焚黃告由文․潛菴先生金公贈職焚黃告由文) 및 「제문祭文」 8편(洪枟․鄭必睦․族丈․柳麟祚․權鳴遠․李鎭璜․從兄․李泰相)․「애사哀辭」 4편(李致迪․金繪明․洪煥猷․權載淨) 및 「묘갈명墓碣銘」 8편(贈吏曹參判竹林權公神道碑銘並序․贈參判申公墓碣銘並序․襄貞公李公墓碣銘並序․伊溪南公墓碣銘並序․慵訥齋李公墓碣銘並序․上舍金公墓碣銘並序․學山金公墓碣銘並序․龍峯金公墓碣銘並序) 및 「묘지명墓誌銘」 9편(魯庵金公․處士柳公․再從姪聖輔․祖妣孺人順興安氏․先兄處士公配宣城金氏․六小娘․再從弟孟遇․再從姪士謙․再從姪婦淸州鄭氏)이실렸다.
권12에 「행장行狀」 11편(藏谷先生權公․素庵金公․孤松朴公․問月堂吳公․處士金公․風臺洪公․忠武衛副司勇吳公․處士洪公․處士李君․進士洪君․再從妹柳夫人李氏)이 실렸다. 권13에는 「가장家狀」 6편(曾祖考杜陵府君․王考通德郞府君․從大父僉知中樞府事陋室公․從大父通德郞莊窩公․先府君․先妣夏山成氏)․「청량정사강의淸凉精舍講義」가 실렸다. 권14 「부록附錄」에는 「가장家狀」․「행장行狀」․「묘갈명墓碣銘」․「묘지명墓誌銘」․「배문록拜門錄」․「기술記述」․「제문祭文」․「만사輓詞」가 실렸다.
Ⅲ. 시문학 창작 배경
1) 산수자연 인식론
경암의 산수 자연 미학에 대한 심미 의식을 관련 시를 검토하여 정리한다. ‘산수자연’은 누구에게나 향유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전심으로 여기에 귀의하는 자만이 체감할 수 있다는 논리를 전개한다.
맑은 유람 호방한 흥은 이전에 없었고 淸遊豪興蓋無前
돌아오니 아득히 한 바탕 꿈일세 歸坐依然一夢邊
동정을 맞게 해야 의미가 있나니 動靜適宜方有味
이제 알건대 참으로 신선과 멀지 않네 如今始信不離仙
유람을 통해 흥겨움을 한껏 누린 시인은 맑고 호방한 흥취에 취했다. 속세와 결별은 곧 자연 귀의를 통해 희열을 향유한다. 지난 세월 세상사에 관심을 두었던 것은 일장춘몽과 다를 바 없다. ‘출’과 ‘처’를 분명히 할 때 ‘동’과 ‘정’의 의미도 선명히 제시된다. 그렇기 때문에 경암은 산수자락의 의미를 제대로 체득하였고 그가 살고 있는 춘양은 신선 세상과 다르지 않은 ‘별천지’임을 강조하였다. 그러기에 자연은 변함이 없이 존재하는 특별한 신의 선물이다. 이처럼 한적한 멋의 경지를 누리는 그는 신선이 사는 세상에서 즐거움을 향유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기쁨에 충만하다. 이 때문에 그의 생활은 남들이 동경하는 신선의 세계와 다를 바 없다. 이처럼 산수자연은 참된 그 의미를 체득하고 그 가운데 참 즐거움을 누리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특권임을 강조했다. 이는 참된 자연미를 발견하는 안목을 지녀야 가능하다.
많은 들꽃 국화처럼 보이고 野花多假菊
산촌 새들 진짜 새라네 村鳥摠眞禽
참과 거짓을 말하지 말지니 莫將眞假議
꽃과 새는 저마다 무심하다네 花鳥自無心
들꽃이 무수히 피어 국화인 것처럼 착각을 일으키게 하였다. 게다가 많은 새들도 재잘대기 때문에 ‘국화’나 ‘산새’의 진위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다. 구태여 ‘참’과 ‘거짓’을 따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꽃’은 ‘꽃’대로 저마다 주어진 자연 조건에 따라 피고지기를 충실히 할 뿐이다. 갖가지 야생화 나름의 고유한 속성에 따라 아름다운 꽃을 피게 함으로써 자연 질서의 조화에 참여한다. 자연의 순환과 질서에 순응하여 아름다운 하모니를 연출한다. 그것을 따지는 발상 자체가 무의미하다. ‘꽃과 새가 무심하다’고 함으로써 ‘산수자연의 변함없는 이미지’를 강조한다. 현시된 자연 자체의 미감을 온전히 인식할 수 있는 심미 의식과 감식력을 지닌 이 만이 향유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산수의 주인은 누구일까?
산수는 본래 주인이 없나니
한가한 자가 주인이라네.
산수자연은 애당초 주인이 없다. 한가하게 이를 간파하여 즐기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임을 강조한다. 자연의 시혜를 누릴 수 있는 한거청적閑居淸寂한 멋을 누리는 이만이 차지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산수’와 ‘주인의 만남’은 필연적이다.
산수가 주인을 만나고 못 만남은 운수에 그 사이에 존재한다. 굽어보고 올려다보며 감흥이 일어 공경하며 선생의 시에 차운해 시 한 수 짓다.
산수 자연과 주인의 만남과 그렇지 못함은 특별한 인연에 달려있다. 산수의 절경을 알아보는 심미안을 가진 자만이 획득할 수 있다. 아무나 그러한 혜택을 누리는 것은 아니다. 자연 개관 대상의 실체를 정확히 인식하고 이에 대한 혜안과 심미 의식을 지녀야 가능하며 그러한 자연 대상을 체인體認하여 교감交感할 때 자연스럽게 ‘산수’와 ‘주인’의 만남은 이루어진다. 이과정에서 경암은 ‘관찰력’을 중시한다. 이른바 ‘주마간산’식으로는 진정한 자연 대상의 실체를 파악할 수 없다는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경암은 객관 자연 대상을 자세히 관찰하여 자연이 선사하는 풍광과 미적인 현상을 체감하며 희열을 느끼는 경지까지 이를 수 있는 심미안을 갖추었다. 그래서 자연 대상을 주시하여 자세히 관찰함으로써 사실적인 시를 창작하였다.
조용히 보니 사물마다 빛 靜觀物物得
모두 목욕해 빛난 것 같네 俱是浴恩光
다시 성긴 비 내린 산 빛을 보니 更看疎雨群山色
날 위해 면면이 보여주는 것 같네 若爲遊笻面面開
비가 내린 뒤의 산은 아름다운 빛을 발한다. 산수 자연에 대한 인식 논리의 하나로 객체인 자연 대상을 관찰함으로써 자연 경관 및 자연 경관에 펼쳐진 사물의 동태를 시간적 추이나 변화 양상을 핍진히 그려내었다. 어여쁜 여인이 삼단 같은 머리를 감은 듯 윤기가 흐르고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준다. 청명한 하늘과 반짝이는 태양 아래 신록은 눈부시게 빛난다. 금방 목욕을 마친 산천이 시인에게 멋진 볼거리를 제공한다. 때문에 시인은 맑은 하늘과 산뜻한 산천의 동태를 시간적 추이와 변화 양상에 따라 핍진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 시 창작 과정에서 이는 매우 중요한 사안이다. 그러한 심미의식을 경암은 이미 터득하였다.
칠월 기망의 이름 오래 되었는데 七望名千古
장차 개인 뒤에 보려네 將敎霽後看(…)
이내 구름이 몰려가 頃刻驅雲盡
은근히 나에게 보게 해주네. 慇懃使我看
경암은 갠 하늘을 보고자 희망했다. 이를 기다린 듯이 구름이 몰려가고‘광풍제월光風霽月’의 선경仙境을 선사했다. 여기에 유가적 사상성을 크게 내포하지는 않지만 산수 자연 감상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시인과 산수자연의 교감 양상을 반영한 것이라고 보면 되겠다. 이에 경암은 다음처럼 산수 자연은 이러한 심미안을 가진 이들이 공유할 수 있는 대상임을 언급했다.
그대는 봉래산 나는 태백산 유람 君去蓬萊我太白
하늘 끝에 앉아 조용히 시를 읊는다 擡頭天末坐沈吟
멀리 일만 이천 봉 위 달을 생각하니 遙知萬二千峯月
우리 두 사람 마음을 골고루 비쳐주네 分照吾人兩地心
상대방은 봉래산 기행을 하고 있고 자신은 태백산 기행을 하고 있다. 먼 하늘 끝에서 서로의 일정을 회상하며 시를 짓는 풍류미학을 드러냈다. 먼저 상대방의 자연 감상 현실을 상정했다. 상대방이 봉래산에서 일만 이천 봉을 만끽하며 즐길 것을 회상하였다. 문득 휘영청 밝게 떠오른 달을 떠올리며 상념에 잠겼다. 상대방과 자신의 간극을 하늘에 오른 달이 메워준다. 하늘의 달은 거리나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정서를 지닌 자에게 무한한 감동을 준다. 그래서 서로 떨어져 있는 이질감을 극복하고 상호 일체를 형성케 하는 매개 역할을 한다. 이처럼 자연은 멋을 알고 이러한 정서에 동화되는 이들끼리 즐거움을 공유할 수 있는 단계로 진전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처럼 산수 자연 공유 의식은 산수자연에 귀의함으로써 얻는 효과로 파급된다.
누대 앞 강물에 더위 식히고 濯熱臺前水
누대 위 바람에 서늘함 느끼네 乘凉臺上風
선인들 뵈올 수 없으나 前人不可見
물고기 보는 즐거움은 여전하다네 魚樂至今同
누대 앞 강물에서 발을 담그고 세수를 하여 무더위를 식히고 누대 위에서는 불어오는 바람을 쐬며 청량감을 만끽한다. 누대에서 강학 활동을 하며 후학들을 지도하며 유학의 발전과 정착을 위해 수고하신 선현의 행적을 추모하였다. 그분들을 직접 뵐 수는 없지만 아쉬운 정념과 추모 정서가 일어난다. 하지만 그 분들이 누렸던 물고기의 유영을 바라보면서 심신을 정화하고 자연 속에서 심성을 도야하던 그 면모를 재현할 수 있어 기쁘다. ‘물고기 바라보는 즐거움’은 다음과 같은 배경이 있다. 장자莊子와 혜자惠子의 물고기 논쟁이다.이처럼 장자와 혜자는 논리적 언쟁을 많이 했다. 장자는 사람이면서 고기의 마음을 알겠다는 만물제동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반면, 혜자는 자신의 입장이 없이 상대의 논리를 반박하는 데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관어觀魚’의 역사는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기록될 만큼 유구하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관어는 귀족층의 오락의 일종이 됐다. 고려사高麗史 「세가世家」에는 ‘예종이 대동강에 가서 배를 타고 물고기를 구경했다’고 했으며 우왕이 ‘비와 우박이 내리는 날인 데도 불구하고 물고기를 보다가 발가벗고 물에 들어가서 고기잡이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부터 물고기의 자유스러운 ‘군집유영群集遊泳’을 ‘안분지족安分知足’ 또는 ‘원천적인 즐거움의 상징’으로 여겼다 한다. 다시 말하면 ‘어관觀魚의 경지’는 ‘달관達觀 경지’라고 할 수 있다. 달관의 경지에서 자유와 평안을 누리는 심정을 말한다. 유유히 흘러가는 냇물은 그들이 지향했던 정신의 지속적 유동 상태임을 암시한다. 후학의 입장에서 그러한 즐거움을 누리고 있기에 구분들과 일체감을 형성해 자연에서 참된 즐거움을 누린다. 이에 자연에 재현된 천기를 통해 그러한 즐거움도 누린다.
비 그치자 밝은 햇살 새벽 창에 들어오고 雨霽淸暉曉戶明
고운 산새 어디선가 아침을 알려오네 珍禽何處送新聲
조용히 귀 기울여 마음을 여니 犂然傾耳心開地
천기가 절로 통해 한결같이 청아하네 天機自通一樣淸
비 그치고 햇살이 창문에 비치는 고용한 아침 풍경이다. 고운 산새가 울음 울어 아침을 알린다. 시인은 조용히 귀를 기울여 마음을 연다. 마음의 안정을 찾으며 내면의 성찰을 시도하는 단계로 진입한다. 천기가 통해 내면의 정화가 이뤄져 청아한 경지를 향유한다. 자연과의 일체감 형성을 통해 내면의 정화를 이루는 현상을 포착했다. 결국 경암은 자연의 신비로운 경관과 멋을 아는 이만이 산수자연을 차지하며 그러한 미적 체감을 하는 자들과 산수 자연의 즐거움을 공유할 수 있다는 논리를 전개했다. 나아가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인간 내면의 정화와 수양의 과정까지 이룰 수 있다는 산수자연관을 지녔다. 이러한 경암의 산수자연 인식론은 퇴계의 산수 자연 인식론에 기초하며 당대 안동 산림처사들이 공유했던 산수자연관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하지만 그는 산수 애호 정신에 근거한 각별한 산수 심미 의식을 소유했다.
2) 춘양 산수 애호와 퇴계 산수관 계승
경암은 춘양의 녹문산에 대한 애정이 강했다. 향토와 향토 산수애의 반영이다. 경북 최북단 지역에 자리를 잡은 봉화는 동쪽으로 울진군과 영양군을, 서쪽으로는 영주시를 경계로 한다. 남쪽으로는 안동시, 북쪽으로는 강원도 영월군․태백시․삼척시와 경계를 이룬다. 특히 봉화는 전체 면적의 83%가 산악지대이다. 북쪽은 소백산맥과 태백산맥이 분기하는 지역이어서 ‘태백산’․‘구운산’․‘금산’․‘선달산’ 등 높은 산이 자리하고 북동쪽 역시 높은 산이 물굽이처럼 뻗어 경북 최고의 산악 지역으로 꼽힌다. 산이 높으니 자연히 골짜기가 깊고 그 사이로 맑은 냇물이 흘러내림으로써 천연의 수려한 경관을 선사한다. 봉화의 중앙을 남서로 관류하면서 작은 지류를 모아 흐르는 내성천을 비롯하여 작은 시냇물이 봉화의 계곡과 들판을 적신 뒤 낙동강에 유입된다.
이처럼 수려한 산수 자연을 배경으로 한 봉화 지역에는 무수한 산림처사들이 선현을 추모하며 조상을 모시며 학문을 연마하며 후진을 양성하고 자신의 내면을 고결하게 하는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들은 퇴계를 존숭하여 그의 학문을 계승하고자 노력하였다. 경암의 녹문산에 대한 관심은 향토 산수에 대한 애정 의식의 소산이다. 경암의 이러한 의식 저변에는 퇴계가 청량산을 두고 ‘우리 산’이라고 애창한 것과 같다.
녹문산은 우리 집에서 소유한다.
녹문은 가장 궁벽하고 깊은 산 속에 있다.
춘양의 지역적 특성에 맞게 은둔형 선비가 살기에 적합한 녹문산은 궁벽하고 깊은 산이라고 하였다. 경암은 퇴계처럼 녹문산을 ‘우리 산’이라고 하였다. 녹문산을 깊이 사랑했던 애정의 흔적을 파악할 수 있다. 그래서 향토 산수 자연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지금 세상 누가 진실을 아는가 今世何人能識眞
기괴함으로써 새롭다고 다투네 惟將奇詭競爲新
산과 물을 보는 것 이와 같으니 看山看水亦猶是
반드시 수고롭게 물 건널 필요 없다네 不必勞勞遠涉津
현실 세상의 부조화를 언급했다. 기괴함을 새롭다고 다투는 세인의 안목이 도리어 우습다. 세리와 세상 명리에 목숨을 걸고 아웅다웅하는 세태를 은근히 풍자하였다. 이에 대한 극복 대안은 언제나 변함없이 참된 면모를 보여주는 자연 만이 유일한 것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먼 곳을 유람하며 기괴함을 찾는 것은 크게 권장할 일이 아님을 강조한다. 춘양에 있는 산이나 타지에 명산대천을 따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경암은 자신이 생장했고 대대로 은둔형 선비들이 강학 활동을 하고 학문에 매진했던 춘양 지역이 어느 곳보다 산수가 우수하다고 자부심을 드러내었다. 이런 향토 자연 애호 정서는 다음 시에서도 파악된다.
지팡이 짚고 달빛에 은빛 모래 벌 밟고 聯笻乘月蹋明沙
조용히 감상하며 읊조리니 경관도 좋구나 緩賞微吟景轉多
들판 빛 하늘 두르고 먼 산굴은 아득해 野色環天迷遠峀
시냇물 언덕 둘러 초가집 감추었네 溪痕繞岸隱茅家
교묘한 그림자 숲 사이로 아른거리고 巧印疎影婆娑樹
때로 그윽한 향기 꽃에 역력히 우러나네 時到幽香的歷花
승경에 정이 끌려 늦게 돌아오고 勝牽情興歸來晩
하필 수고스럽게 멀리 유람할 필요 있나 何必勞勞遠涉波
은자의 평온한 삶을 표백하였다. 달빛 아래 지팡이 짚고 은빛 모래를 밝는 청아한 분위기가 전개된다. 달 빛 아래 펼쳐진 경관도 아름답다. 들판의 푸른빛은 하늘을 두르고 멀리 보이는 산의 동굴도 아득하다. 언덕을 돌아 흐르는 시냇물은 초가집을 감추듯 평온하다. 달 빛 아래 일렁거리는 그림자와 함께 이따금 그윽한 향기가 우러나와 시인의 후각을 상큼하게 한다. 승경에 젖어 흥취가 절로 발하여 자연히 귀가 시간이 늦어지고 말았다. 이처럼 평온한 춘양의 절경에 흠뻑 취해 굳이 먼 곳으로 기행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향토 자연 애호 사상이 강하게 담긴 작품이다. 이와 함께 향토 자연 속에서 시를 짓고 주석을 겸비한 모임을 갖는 것도 예외일 수 없다.이러한 표현은 시에 종종 보인다. 머물면서 시 짓고 술 마시며 즐기니 정서를 반영한 작품도 있다.향토 자연 애호 사상과 함께 사우 교유 양상도 살필 수 있다. 이러한 산수 자연에 대한 인식이나 향토 자연 경관 애호 사상은 퇴계의 산수자연관과 다르지 않다. 퇴계의 향토 산수 애호 정신 계승 전통은 후계後溪 이이순 李頤淳(1764-1832)에게서 확인된다.이러한 향토 산수 애호 정신의 전통을 경암이 계승했음은 물론이다.
평소 경암은 선조인 퇴계를 존숭하였다. 퇴계의 학문과 사상을 답습했음은 물론 이거니와 산수 자연관 역시 퇴계의 그것을 추종하였다. 사실 「춘양구곡」 창작 동인도 퇴계의 「도산구곡」 창작 정신을 답습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도산에서 도장을 열었으니 陶山闢道場
문에 들어서자 가슴 뭉클해지네 入門懷慨傷
사도 퇴폐한 지 오래 되어 嶊頹今幾世
자연스레 혼미하고 광란스럽네 居然昏且狂
도산서원을 방문하고 상덕사에 참배하였다. 선조인 퇴계께서 이곳에 서원을 세우고 후학을 양성하며 학문에 정진했던 광경을 떠올리니 절로 가슴이 뭉클하였다. 하지만 사도가 피폐되어 온 세상이 혼미하고 광란스럽게 되었다며 우려를 표했다. 하지만 자신은 퇴계를 사숙하여 기 실마리를 이어가고 있다며 자부했다.
퇴도를 사숙한 지 그 얼마나 지났나 私淑陶山世幾下
아득한 실마리 긴 밤처럼 이어졌네 茫茫墜緖爲長夜.
퇴계를 존숭하며 성리학적 전통과 심오한 철학 사상을 이어가길 다짐하는 내면의 심지를 반영했다. 긴 밤처럼 퇴계의 유훈이 이어졌다고 함으로써 퇴계의 정신적 지향이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영속됨을 강조했다. 이처럼 퇴계를 존숭하는 정신은 퇴계가 즐겼던 산수 유람의 행적을 답사하면서 더욱 간절히 표현된다.
산수가 주인을 만나고 못 만남은 운수에 그 사이에 존재한다. 굽어보고 올려다보며 감흥이 일어 공경하며 선생의 시에 차운해 시 한 수 짓다.
임술년 여름에 주천에서부터 정자경과 함께 두루 다니며 방문했다. 자경과 그의 며느리가 기쁘게 맞아 웃으며 술을 대접했다. 태백산을 유람하면서 공경하며 「퇴계잡영」을 감상했다.
이러한 사례 외에도 경암은 퇴계를 존모하는 의식을 「중춘경차퇴계춘일한거육절」․「춘일경차퇴도선생계당우흥십절」․「도산알묘후경차선생개복도산서당지유감운」에서 표현하였다. 경암은 퇴계가 생전에 산수를 유람했던 곳을 탐방하면서 그의 학문 정신을 추모하며 이를 계승해 나가려는 의지를 굳혔다.
서신에 지극한 훈계 있으니 書紳有至訓
실추하거나 엎어지게 못해 造次懼墜覆
곧 앞으로 나가기만 힘쓸지니 正爾勵前程
어떻게 감히 순숙해 지길 바라리 那敢望純熟
퇴계의 가르침이 엄연히 존재하기에 그 교훈을 실추하거나 엎어지게 할 수 없다고 하였다. 더욱 학문에 매진하면서 유훈을 실천하길 다짐했다. 다른 어떤 방도로도 수신이나 학문 적용에 기여할 수가 없다고 언명하였다. 이러한 의지는 퇴계가 산수 자연을 애호했던 사상을 답습하는 것으로 연결된다. 경암은 나무 심기를 즐기는 성품을 지녔다. 이 역시 퇴계의 산수 자연 애호 사상을 답습한 사례이다. 이는 퇴계가 도산서당에 화단을 만들어 ‘연’․‘송’․‘죽’․‘매’․‘국’을 심은 뒤에 ‘절우사’라고 이름을 지었던 것과 연관이 있다. 퇴계는 평소 매화를 좋아하여 ‘매형’이라고 불렀다.퇴계는 식물인 매화에게 인격을 부여하여 이처럼 존중하며 고결한 벗으로 대했다.
그리고 퇴계는 자신이 세상을 떠나던 날 아침에도 제자들에게 분재한 매화에게 물을 주라고 부탁했을 정도로 평생 매화를 곁에 두고 애정을 기울였다. 퇴계에게 매화는 너무나 소중한 벗이었다. 매화의 고결한 인격을 그리워하여 그러한 인격을 구비한 매화를 벗으로 맞았다. 퇴계는 ‘소나무’․‘국화’․‘매화’․‘대나무’․‘연꽃’ 가운데 유독 ‘매화’를 좋아했다.그래서 퇴계는 매화를 가장 먼저 ‘절우사’에 심었다. 경암도 퇴계처럼 매화를 무척 애호하였다.이 역시 퇴계의 산수 자연 미의식을 계승한 사례다.
황매화에 비 내리고 雨度黃梅樹
바람 불자 온갖 꽃 피었네 風來百合花
종일 찾는 이 없어도 盡日無人問
맑은 향기 절로 일품일세 淸香自一家
봄비가 내리는 한적한 시골 정취가 담겼다. 황매화가 환하게 피었고 조용히 이슬비가 내린다. ‘황매화’와 ‘봄비’는 ‘붉은 색감’과 ‘흰 색감’의 조화를 이뤄 봄 정서를 강조한 매체로 작용한다. 잔잔한 시상의 전개를 통한 매화 핀 향촌 서정을 풍부하게 해준다. 매화가 핀 것을 시샘하듯이 바람이 불어 와 다른 꽃의 만개를 돕는다. 온갖 꽃이 만발하여 더욱 풍성한 봄 꽃 잔치를 연출해 준다. 경암은 ‘매화’의 고유한 속성을 말미에서 제시하였다. 이처럼 온 산천에 가득한 많은 꽃을 찾는 상춘객의 발걸음이 연이어 지지만 매화를 찾는 이는 거의 없다는 사실을 주목하면서 매화와 일반 꽃과의 차별성을 강조하였다. 매화의 고유한 속성을 아는 이만이 매화를 찾는다는 논리를 제시함으로써 매화가 지닌 미적 기품을 제고하였다. 매화는 찾는 이 없어도 홀로 향기를 발하며 선비다운 풍모를 잃지 않는다. 그러한 점을 주목한 경암의 의식 저변에 퇴계가 즐겼던 매화의 품성과 군자다운 향취가 흐르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그러한 매화의 어여쁜 모습은 시인의 필치를 통해 아름답게 꽃으로 피어난다.
옥 같은 줄기 얼음 같은 얼굴 신기한 조화 玉骨氷腮造化新
붉고 자줏빛 없어도 천진한 모습 손색없네 不庸紅紫損天眞
비단처럼 곱고 담박하게 단장한 봄 맵씨 練艶淡粧春意態
시인묵객의 시에 눈 속에 핀 정기 살아나네 蕭騷冷韻雪精神
매화의 고운 모습을 ‘살결이 맑고 깨끗한 미인’이란 뜻의 ‘빙기옥설氷肌玉屑’로 표현되었다. 신의 조화라고 할 만큼 곱다. 매화의 고결한 자태만으로도 눈부시게 아름답다. 붉거나 자줏빛의 색상이 없고 흰 색상만으로도 매화 자체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발휘되었다. 이처럼 어여쁜 매화는 흰 비단결처럼 곱고 담박한 자태로 피어나 보는 이에게 신비스러운 탄성을 발하게 한다. 시인은 그 순간을 카메라에 담듯이 시에 담아낸다. 시인이 그려 둔 시에 매화의 눈 속에 고절하게 핀 매화의 모습으로 재탄생된다. 오랜 세월을 두고 그 매화는 은은한 향기와 절개를 드러내며 감동을 준다. 매화의 고고한 자태는 청아한 선비 형상으로 재현된다.
문 닫고 홀로 지내니 杜門守幽獨
매일 정회가 담박하다네 孤懷日自淡
시절이 따뜻하고 고우니 時物正暄姸
춘풍이 이미 세 번 불었네 春風已暮三
신선 매화가 날 오라 부르시니 梅仙肯超我
일어나 두세 번 찾아갔네 起來再三探
암향은 절로 차갑고 暗香氣自冷
성긴 그림자 애당초 담박해 疎影質本澹
흐릿한 밤에 함께 즐겨 依依參夜橫
달빛 아래 아침 이슬 내리네 皎皎露朝濫
그대는 장부 행차하시니 君是丈人行
춥고 괴롭겠지만 감당하리 寒苦力自擔
높은 절개 반짝이며 綽約任高潔
속진 멀리한 아름다움 품었네 藏艶遠塵暗
날마다 배회하리니 日夕可徘徊
어찌 속된 선비가 넘보랴 肯遣俗士瞰
기묘년 3월에 매화가 만개하여 공경스러운 마음으로 퇴계 선생의 시에 차운한 작품이다. 경암은 이 시에서 ‘매화’를 ‘매선梅仙’이라고 했다. 춘양 산골에 봄이 찾아 왔다. 시골 담박한 생활 가운데 어느덧 봄이 많이 지난 갔다. 이즈음 매화 신선이 불러 주어 두세 번 매화를 찾아갔다. 아직 차가운 날씨지만 매화의 향기는 추위를 이겨내고 핀 꽃인 만큼 은은한 향기를 발한다. 달 빛 아래 매화를 찾은 시인에게 신비스러운 광경이 펼쳐진다. 매화 그늘에서 매화 향기를 맡으며 선비의 지조와 품격을 새삼 확인했을 터이다. 선비로서 지조와 몸가짐을 바르게 하리라는 다짐도 했다. 매화와 정신적인 교감을 이루어 형용하지 못할 위안과 기쁨을 누렸다. 그러는 사이 시간이 흘러 새벽이 되었다. 찬 이슬이 옷깃에 적시는 것을 깨닫고 그 감흥은 극에 달했다. 으스름 달 빛 아래 신선 같은 매화 모습 어여쁘고 향기는 감미롭다. 게다가 이슬마저 내려 시인의 시심을 적신다. 찬 날씨 속에서 굴하지 않고 피는 매화의 고상한 절개를 추상하면서 경암은 속세 선비들과 차별화된 삶을 누릴 것을 다짐하였다. ‘매선’은 ‘매형’으로 표현된다.
안동 고을 깊고 적막한 산촌 花山深處寂寞村
매형에 의탁해 시혼을 달래네 惟有梅兄托吟魂
눈 내린 밤 이 마음은 평온한데 芳心寂寞白雪夜
달은 기울고 매화 향 흩날리네 暗香浮動月黃昏
얼음 옥처럼 맑아 세상사 멀리하니 氷淸玉潔逈塵雜
정원의 많은 꽃 가운데 으뜸일세 百花䕺裏冠一園(…)
경암은 퇴계처럼 ‘매화’를 ‘매형梅兄’이라불렀다. 안동 고을 춘양 깊은 산골에 적적하게 지내지만 매화에 의지해 외로움을 달래고 있다. 겨울 철 눈 내리는 가운데 피는 매화를 형상하였다. 조용히 눈이 내리고 마음은 평온하다. 달이 기운 깊은 밤이 되었다. 달빛이 기울고 매화 향기가 흩날리며 시인의 마음에 감동을 선사한다. 맑고 고운 모습과 은은한 향기는 정원의 많은 꽃 가운데 으뜸이라고 한다. 고운 자태는 세상을 멀리한 은자의 형상이다. 그러한 매화의 이미지는 은둔 학자 경암의 내적인 투영체이다. 그러기에 경암은 매화의 자태를 형상화하여 자기의 모습을 이입시킨 것이다. 그러한 은일 군자의 형상화는 퇴계의 매화 애찬과 궤를 같이 한다. 이런 은일형 군자의 이미지는 퇴계가 지향했던 산수자연관과 일치된다. 말하자면 퇴계의 산수 자연 미의식을 정확히 계승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이러한 퇴계의 학문 전통은 자연스럽게 후손인 경암에게 이어져 정신적 계승과 함께 산수 자연 미의식도 이어졌다.
Ⅳ. 시문학의 형상성
경암의 매화 사랑은 각종 화훼 애호 정신에서도 동일하게 표현되고 있다. 경암의 산수 자연미 의식이 시문학으로 형상된 결과이다.
1) 화훼 애호 정서
경암의 화훼 애호 정서는 산수 미학 의식의 구체적 실천이다. 경암은 천성이 산수를 즐겼고 나무 심는 것을 애호하였다. 나무를 심고 성장 과정을 지켜보면서 자연과 어우러진 삶을 누렸다.
나무 심는 것 즐겨해 性本好種樹
집 둘레에 겹겹이 심었네 重爲茅齋栽
전나무는 산에서 옮겨왔고 樅自山阿移
오동은 숲에서 가져왔네 梧從林屋來
그 사이로 목단을 심고 牧丹間其列
도리도 심었다네 桃李又成培
대 없어 속될 까 염려되고 懼俗偏無竹
만나는 이마다 매화 찾았네 逢人必問梅
이처럼 색색이 갖추었으니 如何色色備
좋은 시절에 활짝 피겠네 佳節爛漫開
애당초 나무 심는 것을 좋아했다. 집 둘레에 종류별로 각종 화훼를 빽빽하게 심었다. 산에서 전나무를, 숲에서 오동나무를 옮겨왔다. 가운데 목단과 복숭아나무를 심어 조화를 이루도록 배치하였다. 게다가 대나무를 심어 고절한 선비 형상을 이어가고 매화도 수소문하여 구해 심었다. ‘전나무’․‘오동나무’․‘목단’․‘도리’․‘대나무’․‘매화’를 집 둘레에 심고 사시사철 감상했다. 나무의 특성상 저마다 고유한 속성을 지닌 만큼 ‘절개’와 ‘군자’ 등의 이미지와 배합되게 하였다. 화훼를 이종하고 여유로운 생활을 만끽한다.
봄이 산문에 이르러 일마다 평화롭고 春到山門事事幽
따뜻한 바람 가랑비에 근심이 사라져 和風細雨解塵愁
난 정리 국화 이종 때에 맞게 하고 培蘭移菊皆時政
뜨락에 서서 자유롭게 소일하네 荷鍤中庭只自由
봄이 온 산촌은 일마다 평화롭다. 춘풍이 불고 때 맞은 가랑비 내려 농부의 가뭄 근심을 해소한다. 비가 온 때에 맞추어 난초를 정리하고 국화 이종도 마쳤다. 묵은 과제를 이행하고 나니 마음이 가볍다. 뜨락에 서서 소일하며 한가로운 시골 생활을 즐긴다. 소박한 시골 선비의 한온한 정서가 담겼다. 화훼를 이종하고 자적 여유로운 생활을 만끽한다. 봄을 수놓은 아름다운 복숭아꽃을 읊은 작품에서 여성 정감을 드러낸다.
봄바람에 매일 꽃 피우더니 東風日吹開
봄바람에 매일 꽃 지고마네 東風日吹落
필 때는 그렇게 곱더니만 開時何灼灼
질 때는 이렇게 허무하네 落處還寂寞
피고 질 때 봄바람 같건만 前後一東風
홀연히 후박이 다르네 忽焉殊厚薄
인정도 이와 같이 人情從可知
슬프더니 기쁘다네 焉用悲且樂
진분홍 색상으로 봄을 곱게 물들여 놓은 복숭아꽃을 형상했다. 매일 꽃을 피우고 지는 특성을 포착하여 애상스러운 정감을 그렸다. 곱게 화사하게 핀 꽃을 볼 때는 즐겁지만 시들 때는 허무한 마음이 든다고 했다. 이에 꽃이 피고 지는 변덕은 인정세태와 흡사하다고 하면서 희비의 교차 정감을 그렸다. ‘희열’과 ‘비애’의 교차를 통한 ‘도리’에 대한 애정의 눈길을 주었다. 다음은 여름철 훤추리를 찾아든 나비를 표현한 작품이다.
비온 뒤 훤추리가 雨後萱草花
빈 뜨락에 조용히 피었네 空庭寂寞開
호랑나비 한 마리 惟有玄文蝶
이따금 찾아든다네 時時獨訪來
비 내린 빈 뜰에 핀 원추리의 모습은 청신하다. 맑은 빗물이 꽃받침에 맺혀 있는 정경은 보는 눈을 즐겁게 해준다. 정적감이 맴돌고 시각적 심상이 드러난다. 그런데 이처럼 영롱하고 고운 빗물을 껴안고 있는 화려한 붉은 색상의 훤추리에 호랑나비 한 마리가 등장함으로써 색채미를 더해준다. 경암의 예술적 안목이 두드러진 작품이다. 시각적인 이미지를 점증시켜 시 작품의 표현 미학을 심화했다. 다음은 연꽃에 맺힌 빗방울을 묘사한 작품이다.
연못에 푸른 연꽃 심었더니 盆池種碧蓮
연잎 크기가 대야만 하네 蓮葉大如盤
비 맞고 바람 따라 흔들리니 帶雨隨風動
고운 구슬이 동글동글 구르네 明珠互轉團
연못을 만들어 연꽃을 심어 운치를 더하게 하였다. 연꽃이 충실하게 자라나 크기가 대야만 하였다. 넓은 연잎은 빗물을 받기에 넉넉하다. 빗물이 연잎에 내려 바람결에 따라 동글동글 뭉쳐지는 순간을 포착했다. 초록색 연꽃잎과 맑고 투명한 빗물의 선명한 이미지가 신선한 느낌을 준다. 게다가 바람의 움직임에 따라 방울이 모여 큰 물방울을 형성해 굴러다니는 순간을 시에 그려내었다. 섬세한 표현력과 시간 추이를 반영한 복합 이미지 합성화가 이루어졌다. 이에 시 작품의 수월성이 강화되었다. 시를 읽는 독자들은 가슴이 상쾌함을 느낄 만큼 경쾌한 상상력을 발휘하게 하였다. 이른 가을 난초를 통해 선비와 군자의 형상을 찾는다.
이른 추풍이 불어오는데 不識秋風早
어느덧 네 잎이 돋았네 居然已四䕺
향기 찾아 갔더니 聞香起訪去
정원 가장 깊은 곳에 있구나 園草最深中
때 이른 가을바람이 부는 시점이다. 아직 완전한 가을은 아닌 것 같다. 가을이 오려고 하는 때인 것으로 보인다. 난초 잎이 네 잎이나 새로 돋아 시인을 즐겁게 하였다. 한 동안 그것을 잊을 무렵이었다. 갑자기 어디선가 은은한 향기가 퍼져 나오는 것이다. 경암은 그 향기에 매료되어 찾아가보았다. 정원 깊은 곳에 몸을 숨긴 난초에게서 퍼져 나오는 향기였다. 시인은 절로 감탄사를 표했다. 숨어서 향기를 피우는 아름다운 자태에 희열감을 맛보았다. ‘군자’처럼 은은한 향기와 기품을 드러내는 모습에 감동하였다. 가을 국화의 기품 역시 아름답다.
희고 붉어 오색이 갖춰져서 白白紅紅五色推
대청 앞의 마루 가에 활짝 피었네 軒前堂上爛漫開
늘 즐겨 감상해도 싫증나지 않으니 常對愛賞無倦意
서리 이겨내는 절개 돋보인다네 凌霜淸節勝含來
대청 앞에는 형형색색의 국화가 만개하였다. 아침저녁으로 지켜보면 그윽한 그 모습에 매료되어 전혀 싫증이 나지 않는다. 보는 그 자체도 즐겁지만 서리를 이겨내고 꽃을 피우는 ‘고상한 절개’는 ‘은일 군자’의 형상이다. 그러한 이미지를 높이 평가해 국화에 대한 애정을 발휘하였다. 여러 꽃과의 우열을 통해서도 국화 특유의 멋은 드러난다.
창 앞에 국화 심었더니 꽃이 침범했지만 種菊窓前衆卉侵
봄여름 동안 화려함 다투지 않았네 經來春夏不爭榮
한 밤에 찬 서리 내린 뒤에 一夜天霜嚴打後
늠연한 굳은 절개 분명하게 보였네 凜然勁節自分明
창 앞에 국화를 심었더니 여러 꽃이 침범해 함께 봄과 여름을 거쳐 자라났다. 봄과 여름 동안 뭇 화훼들이 화려함을 자랑했지만 국화는 조용히 자신을 지키며 화려함을 자랑하지 않았다. 그런데 가을 무서리가 내린 다음 날 강인한 국화는 절개를 지키며 꼿꼿이 서있지만 다른 꽃은 모두 시들어 버린 참상을 드러내었다. 가을 서리 가운데 본연의 기품과 기상을 표상하는 국화의 은일한 자태를 극찬하면서 국화의 정신 기상은 고고한 은일 선비 형상과 다름없음을 강조하였다. 꽃에 담긴 미학과 이미지까지 곁들여 작품의 미학을 제고했다.
경암의 수준 높은 시 창작력과 감식안에 의해 이처럼 우수한 시가 창작되었다. 이처럼 경암은 퇴계가 산수자연을 애호하면서 심성 수양과 학문 연찬에 전념했던 바와 같이 자연을 애호하며 성리학 연구와 제자 양성에 이바지했다. 이러한 그의 행적은 자연 귀의를 통한 심성 도야와 자연동화의 경지를 이룬다.
대청 아래 작은 연못 고요한데 軒下小塘靜
연못가 산체나무 우거졌네 塘邊嘉檓繁
이따금 홀로 앉아 有時成獨坐
뜻이 맞아 할 말 잊었네 意會自忘言
대청 아래 작은 연못은 수면이 아주 잔잔하다. 잔잔한 연못은 자연과 동화된 시인의 마음이 평정된 상태를 의미한다. 내적 심성의 안정과 자연 합일의 경지로의 몰입 상태를 말한다. 연못 둘레에는 산체나무가 우거졌다. ‘산체나무’는 연못이 잔잔해 지고 소음을 일으키는 바람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평온한 연못의 보존을 위한 ‘방어 기제’이다. 이 역시 외부 요인에 의해 마음이 동요되는 것을 막아주는 ‘거경居敬’을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시인은 내적 평정과 자연 합일의 경지에 들어가 더할 수 없는 내적 희열로 충만해진다. 그러한 상태를 이 시를 통해 표현하였다. 경암의 화훼 애호 정서는 퇴계의 산수관 계승의 반영이다. 이는 산수 애호 정서의 연장이며 퇴계가 자연을 통해 정심과 수신을 지향했던 정신 지향과 맞닿아 있다.
2) 전원 은거의 정취
이제 경암이 은거하면서 누리는 은거 미학과 낭만 정조가 담긴 작품을 보기로 한다.
오년 동안 집을 지어 經營五載屋
산뜻하게 서까래 몇 개 얹었네 蕭灑數架成
성품처럼 나직하고 좁게 했지만 湫隘從吾拙
상큼하고 우뚝해 지형에 맞추었네 爽塏得地形
주거 공간을 마련하고 지은 작품이다. 5년 동안 집을 짓고 난 감회를 소박하게 담아내었다. 크고 웅장하지는 않다. 나직하고 좁지만 지형과 조화를 이루어 나름 우뚝하고 상큼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은거지에서 느끼는 감회 서정은 다음 작품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된다.
마음 편하고 경관 더욱 좋네 心定境愈僻
한가한 집에 찾는 이 적고 門閒客少過
난초 향기 깊은 골짜기에 풍기네 蘭香深處聞
솔바람 소리 찬 날씨에 윙윙거리고 松韻歲寒多
흥에 따라 시 지으니 고아스럽네 遣興詩全古
가슴 시원하고 술은 반쯤 올라 開懷酒半酡
초연히 석양 길에 서서 超然立暮道
목청껏 노래 부르네 爲我一高歌
마음을 편하게 하니 주위의 경관도 아름답다. 한가로운 시골 생활을 하노라면 찾는 이가 없지만 여유롭다. 깊은 골짜기를 거닐다보면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난초 향기의 신비감을 맛볼 수 있다. 소나무가 차가운 바람을 맞아 윙윙거리는 청가 심상도 담아내었다. 이 무렵 시인은 난초 향기 맡고 솔바람 소리 들으며 흥에 따라 시를 짓는다. 이에 가슴이 시원하고 흥이 올라 목청껏 노래 부르는 낭만 정서가 절로 우러나왔다. 흥에 따라 시를 술 마시며 즐겁게 살아가는 전원 취향의 평온한 서정성이 함축되었다. 이는 풍류 흥취의 표현으로 이어진다.
한가해서 풀 자란 것 바라보고 砌閒看草長
조용한 집엔 산새들 재잘대네 家靜任禽噪
주인이 술에 취해 잠들자 主人方醉臥
객이 와도 깨우지 않네 客到信無報
풀이 한가롭게 자라는 것을 지켜보며 소일한다. 조용한 산골 마을에 산새가 흥겹게 재잘대며 시인의 마음을 즐겁게 해준다. 흥겨움에 겨워 낮술을 마신 탓에 잠이 들고 말았다. 객이 찾아 왔지만 술에 취해 잠든 주인을 애써 깨우지 않는다. 평화와 여유 및 낭만 정조는 은거 풍류 정서로 잔잔히 파급된다.
안석에 기대 냇물 소리 듣고 隱几灘聲遠
사립문 열어 산 빛을 들이네 開門岳色堆
앉아 담소하다 밤이 되었으니 坐談移夜色
구름 걷힌 달 강에 비치네 江月捲雲來
안석에 의지해 냇물 소리를 듣고 사립문을 열러 산 빛을 받아들인다. 방안 가득 산 빛이 들어왔고 시인의 가슴 가득 산의 정기가 스며들었다. 방 안에 있어도 신선한 산의 면모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자연과의 동화를 절로 이룬다. 모처럼 방문한 길손과 담소를 즐기다 보니 밤이 되고 말았다. 구름 걷힌 산뜻한 달이 강에 비치는 어여쁜 정경이 펼쳐진다.
밤마다 달빛은 창문을 열게 하고 夜夜月開戶
아침이면 안개가 사립문 잠그네 朝朝霧掩扉
세상 일로 어이 그리 분주한가 世事何紛紜
스님은 산문 밖에서 돌아오시네 僧從山外歸
밤이 되면 찾아오는 밝은 달빛 탓에 창문을 열어 달빛을 방안 가득 받아들인다. 달빛이 비친 방안은 은근한 밤 풍경을 연출한다. 산촌의 고즈넉한 밤을 만들기에 충분한 서정을 제공한다. 게다가 아침이 되면 사립문에 안개가 가득 맴도는 신비로운 풍경도 감상한다. 먼 곳을 주시하다 보니 일을 마치고 분주히 절간으로 돌아오는 스님의 모습이 나타났다. 시인이 보기에는 스님의 분주한 생활이 안쓰럽다. 동양화 한 폭을 감상하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이다. 시인의 은거와 스님의 일상이 대립되어 은둔 선비의 정적인 미학을 드러낸 작품이다. 이처럼 은일한 삶을 즐기는 경암은 절묘한 표현 미학이 담긴 정취의 시를 담아낸다.
비에 젖어 소나무 윙윙 대지 않고 雨濕松無響
산은 높고 길은 비스듬하네 山高路轉迤
흰 구름은 골짜기에 휘감겼고 白雲深鎖洞
석양 절간에 경쇠 차갑게 들려오네 寒磬暮寺起
비에 젖은 소나무의 모습을 주목하였다. 소나무 잎이 물기를 듬뿍 적셨기에 바람이 불어도 소리를 내지 못한 채 달려 있다. 높은 산의 허리로 난 굽은 길은 멋스러운 곡선 미학을 드러낸다. 검푸른 골짜기에 휘 감긴 흰 구름은 선명한 시각 이미지를 제공한다. 석양 무렵 절에서 들려오는 경쇠 소리를 담아냄으로써 시각과 청각 이미지 합성을 통해 작품의 구조가 긴밀하게 강화되었다. 한 폭의 그림 속에 자연 생태와 주변 정황까지 세세히 담아내었다. 봄을 즐기는 동산에서 이러한 낭만 정서는 흥취 미학적 표현으로 확대된다.
궁벽한 곳에서 좋은 시절 즐기니 僻處愛佳節
산촌의 봄이 숲에 돌아왔네 山村春返林
묵은 잣나무에 연기 노을 맴돌고 老栢煙霞纏
네모난 못은 세월만큼 깊어라 方塘歲月深
대 사립문 초막에 선비가 시 읊고 竹戶吟醒士
바람 부는 헌에서 거문고 연주하네 風軒喧古琴
그윽한 흥취 여기에 있으니 幽興此間在
때로 함께 와서 담소 나누세 時來共說心
궁벽한 산촌에 봄이 찾아 왔다. 선비가 은거하며 구도하는 곳에 봄이 찾아 와 만물이 생동함을 보여주었다. 온 산천에 삼라만상 자연 이법이 구현되어 봄의 소리와 모습을 재현해 낸다. 잣나무에 연기 노을이 맴돌고 네모난 연못은 깊고 그윽하다. 선비의 지조를 상징하는 대 나무 사립문을 한 초막엔 선비가 시를 읊고 거문고 연주하는 멋스러움이 담겨 있다. 이곳에 그윽한 흥취가 넘치기에 벗을 불러 담소하고픈 속내를 드러내었다. 홀로 산을 대하며 수신과 정심을 다짐하는 멋도 담아내었다.
옛 마을 저무는 노을 아침 안개 속 古洞暮霞朝霞裏
맑은 강 한 굽이 두 굽이 사이일세 淸江一曲二曲間
다시 고정에 올라 봉자 운의 시를 쓰며 再到孤亭題鳳字
홀로 앉아 읊으며 앞산을 마주보네 沈吟獨坐對前山
역사가 깊은 춘양 고을에서 아침 안개와 저녁노을을 배경으로 냇물이 한 두 줄기 쉼 없이 흘러간다. 이처럼 아름다운 산수 자연 속에서 시를 지으며 산을 조망하면서 내면의 정화를 시도한다. 이와 같이 경암은 산수 자연 속에서 진정한 멋과 낭만을 누리며 평온한 삶을 유지하였다. 그러면서 내면의 수양과 성리학자로 지향해야 할 유가 이념을 실천하였다. 산림처사의 전형을 확보하고 수신과 정심을 실천했다.
나무 심어 울타리 두르고 栽樹因爲籬
시냇가 졸졸 흐르는 물소리 듣네 臨溪澹聽瀯
날마다 여기서 시 읊으니 日夕在滋詠
공경의 벼슬도 부럽지 않네 不願公與卿
궁벽한 맑은 낙동강 가에서 擬窮淸洛上
먼저 고인의 향취를 찾았네 先啄故人扃
종일 산가의 흥취를 누리니 盡日山家趣
찬 강에 빗소리 섞여 들려오네 寒江雜雨聲
각종 화훼를 심어 울타리 삼고 계절마다 꽃 피게 안배하였다. 집 앞에는 시냇물이 졸졸 흐르며 청안한 음향을 내어 심금을 울린다. 날마다 시를 읊는 경암은 공경의 벼슬아치가 부럽지 않다고 자부했다. 낙동강을 중심으로 하여 형성된 퇴계 학파의 연원과 학문 정신을 추모하며 그 정신을 이어가길 다짐하였다. 그의 이러한 이념 지향은 「춘양구곡」에 오롯이 반영되어 있다.
3) 자연동화의 흥취
경암은 산수 자연에서 심성을 도야하며 자연과 동화된 즐거움을 향유하였다. 그러한 내면의 희열이 시문학에 반영되었다.
어계 노인 황운은 漁溪老友黃雲甫
순진하여 고인의 풍모 지녔네 純眞不失古人模
내가 오래 술 마셔 흥 없음을 알고 憐我久無盃酒興
주막 근처에 주석을 마련하였네 亟謀野飮延近壚
청풍교 옆 석계 언덕의 靑楓橋上石溪畔
대여섯 노인 모두 백발일세 五六老叟還白鬚
장작불 피워 고기 굽고 푸성귀 곁들여 焚柴煮魚雜野蔌
술을 마련해 자리 잡고 앉았네 儼然麴生來座隅
즐거이 술 잔 들고 양껏 마셔 欣然對酌不計數
향기론 시내 산 노을 보며 배를 두드리네 溪香山靄笑膚腴
일에 따라 부대끼는 것 말해 무엇해 從事督雜何足辯
시 짓고 근심 떨친다는 말 틀림없네 詩釣愁帚誠不誣
고운 나무그늘 따라 석양에 산보하니 取來淸陰步夕照
이 즐거움 산밖에는 없을 것일세 樂哉此樂山外無
산촌에서 즐기는 삶을 담아내었다. 주막 근처엣 주석을 마련하고 대여섯 명 노인이 모여 술을 즐기며 흥겨운 놀이를 만끽하였다. 장작불을 피워 고기를 굽고 푸성귀까지 곁들이니 맛이 일품이다. 향기롭게 보이는 산을 두른 노을을 바라보니 흥겨움이 다한다. 술에 달아오를 무렵 석양이 기우는 산을 바라보면 즐거움은 극치에 이른다. 산 중 생활의 즐거움을 표현하면서 달관의 경지에 이른 은일한 즐거움을 표현하였다. 그러하기에 그가 접하는 모든 대상은 즐거움을 주기 마련이다.
산골 소나무 백 척이나 높고 澗松高百尺
산의 달은 가지 끝에 달렸네 山月出其枝
일렁거리는 그림자 보느라 要看婆娑影
일부러 느릿느릿 배회한다네 徘徊上故遲
높은 소나무 가지에 달이 걸린 상태를 주목하였다. 문득 시인은 달빛에 일렁이는 자신의 그림자를 보고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느릿느릿 걸음을 걸으며 배회하였다. 호젓한 시인의 풍류는 하늘의 달빛과 동화된 시인 고유의 멋과 향취이다. 다음은 내적 평화가 충만한 상태를 읊은 것이다.
독서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讀罷悠然起
물길 따라 내키는 대로 간다네 從流任所之
내게 무슨 일 있냐고 하지만 問我緣何事
마음이 평온하여 세상사 잊었네 心閒不自知
독서를 파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물결이 흐르는 대로 정처 없이 발걸음을 옮긴다. 어디에도 구애될 것이 없다. 발길이 가는 대로 마음이 내키는 대로 따라서 할 뿐이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의아해 하지만 경암은 내적 평온의 상태가 견고하기에 그에 대한 답변의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때문에 잠시 일그러진 마음도 자연 촉매를 통해 이내 원상 복구되기 마련이다.
산새는 창문 엿보고 지저귀고 山鳥窺窓喚
뜰의 꽃은 비 맞아 산뜻하네 庭花帶雨明
문득 한 번 웃으며 깨닫건대 覺來還一笑
즐거운 마음 이내 돌아오리라 意更惺惺
시인의 내면 정서가 일시적인 동요를 일으켰던 것 같다. 그런데 창문가에 산새가 날아와서 울음을 울며 귀를 즐겁게 해준다. 순간 동요되었던 마음이 급전환되어 기쁨으로 채워지기 시작하였다. 이아 뜨락에는 비를 맞은 어여쁜 꽃이 피어 우울했던 시인의 마음을 환하게 해주었다. 급기야 시인은 미소를 짓고 말았다. 산수 자연 미물이 자신을 기다린 듯이 이처럼 다정스럽게 대해주니 이내 즐거움을 회복했다.
고기야 넌 무엇이 즐겁니 問魚何所樂
푸른 물결 누비며 노니구나 蒼波任自躍
술자리 파하자 암벽의 꽃잎 흩날리니 酌罷巖花飛
나도 나만의 즐거움에 빠져든단다 吾亦樂吾樂
물고기의 유영을 응시하면서 관조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물고기는 자유로운 기쁨의 세계를 누린다. 시인은 물고기가 물결을 헤치고 수초 사이로 마음껏 노니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자유로운 향연을 동경하였다. 실제 경암은 그러한 정신적 자유와 내면의 희열을 맘껏 누리고 있다. 벗들과 술자리를 파하고 나오자 암벽의 꽃잎이 흩날린다. 흥겨운 정서와 낭만 정조가 배합에 이어 꽃잎이 날리는 정경을 함께 담아냄으로써 물고기가 즐거움에 빠져 들었듯이, 자신도 독자적인 자유를 향유한다고 기뻐했다. 자연 미물과 동화된 삶은 다음 시에 표백되어 있다. 자연과 동화된 상태에서 이러한 자유와 기쁨은 갑절로 늘어난다.
쓸쓸한 가을에 달은 밝은데 潦落秋生月正明
문에 기대앉으니 마음이 맑아지네 倚門閒坐一心淸
이에 내가 만물임을 인식 못할 정도 此時不覺身爲物
천지가 탁 트여 만고가 푸르네 天地廓然萬古情
자연과 친화를 이룬 탓에 밝은 달을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도 맑아진다. 이런 상태서 물아일체의 경지를 이룬다. 이에 시인은 기질지성을 극복하고 심성의 정화를 이룬 경지에 몰입된다. 천지가 광활하고 만고가 푸르게 느껴지는 신선한 느낌에 젖는다.
하얀 두 마리 학 皎皎雙白鶴
머리 맞대고 모래 벌에 섰네 交首立明沙
가까이 가도 피하지 않고 近人機不動
강 하늘엔 황혼에 해 기우네 江天夕陽斜
모래 벌에 두 마리 학이 머리를 맞대고 서있다. 학도 사람도 동화된 일체감을 형성했기에 가까이 가도 무서워하거나 놀라지 않는다. 그래서 미물도 사람을 무서워하거나 기피하지 않는다. 평화로운 강 마을에 저녁 기운이 내린다. 황혼에 해가 지는 비경이 연출된다. 학과 사람의 동화된 평화와 저녁놀이 수놓은 정경은 서정과 서경의 조화가 이룬 평화의 미학적 표현이다. 이처럼 평온한 은자의 삶은 ‘기질지성’을 극복해야 가능하다.
눈 위의 달 비할 바 없이 밝고 雪月皎無比
하늘과 땅이 문득 경관을 바꾸었네 乾坤頓改觀
기질지성을 이겨내야 可知由氣質
본성을 온전히 회복할 수 있다네 本性自全完
눈 내린 밤이다. 눈 위에 비친 달은 더없이 밝고 곱기만 하다. 하늘과 땅이 모두 흰 색으로 뒤덮였다. 특히 땅 위의 모든 것을 다 덮어 버린 상태는 인간 내면의 기질지성이 모두 극복된 상태를 의미하는 철학적 사유 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여기서 ‘눈’은 인간의 ‘욕망’과 세속적 ‘집착’에 의한 일체의 ‘물욕’을 차단해 주는 주요 기제이다. ‘눈’의 원관념을 제대로 살려서 순수한 절제 능력을 지닌 ‘이성’에 견주었다. 눈 내린 산천을 주시하면서 경암은 ‘기질지성을 극복해야 본성을 회복한다’는 명제를 강조하였다. 그러한 내면의 상태를 유지하고 싶었다. 그것은 자연과의 일체감을 형성한 자연 동화의 상태에서 가능했다고 믿었으며 실제 경암은 이를 체현했다. 그러한 내적 희열을 시를 통해 표현해 내었다.
4) 선유의 전통과 「춘양구곡」 창작 배경
이러한 경암의 산수자연관이나 향토 산수 애호 정신은 퇴계의 산수자연관을 계승한 것이다. 특히 퇴계의 「도산구곡」 창작 전통을 이어 ‘춘양구곡’을 설정하고 경영한 것은 퇴계의 정신 지향을 반영한 실증이다. 이는 결국 「춘양구곡」 창작의 동인으로 작용하였다. 「춘양구곡」 창작 배경 가운데 하나인 선유船遊의 행적을 보기로 한다. 경암의 「춘양구곡」 창작 동인은 배를 타고 노니는 선유의 전통에서 비롯된다. 다음 시는 그러한 유흥을 즐긴 경암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낙동강 선유의 풍경을 담고 있다.
좋은 날 함께 낙동강에서 노니니 勝日同遊洛水隈
무궁한 맑은 경관 돌아가길 잊었네 無窮淸賞却忘迴
밝은 달 빛 물 위에 내려 고요하고 澄輝月上涵漣靜
궁벽한 촌가 인적이 언덕 너머 들리네 喧語村深隔岸來
바람 잦아 배 저어 맑은 물 헤쳐가고 風靜船橫明鏡裏
붉은 꽃 수놓은 절벽은 그림 병풍일세 花紅壁立畵屛開
이즈음 술기운 약해질 까 염려되어 此時酒力猶嫌小
봄 산을 대해 앉아 다시 한 잔 마시네 坐對春山更一杯
벗과 함께 좋은 시절에 낙동강 선유를 즐긴다. 낙동강 좌우에 펼쳐진 수려한 경관은 신선 세계에 몰입한 착각을 일으켰다. 그래서 일행은 돌아가길 잊었다. 시간이 경과하여 저녁이 되어 밝은 달빛이 멋진 밤의 풍광을 선사했다. 낙동강 고요한 수면 위로 잔잔한 달빛이 비단처럼 곱게 펼쳐진다. 이러한 시각적 심상의 흐름에 이어 시골 마을의 인기척을 삽화함으로써 청각적 운치도 가미했다. 언덕 너머로 인가가 있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두런두런 들리며 시골 저녁 풍경을 눈에 선연하게 배치했다.
이 화폭에 인가는 담기지 않았다. 시적 화자의 귀를 통해 들리는 농민들 목소리를 담음으로써 민가의 존재와 강촌의 풍광을 느끼게 하였다. 어느덧 바람이 잦아들고 노 젖기에 적합하였다. 노를 저어가면서 양쪽 절벽을 아름답게 장식한 단풍 절벽을 보노라면 화려한 비단 채색을 느낄 수 있다. 작가의 심미 의식이 작용하여 작품의 미학을 제고했다. 극한 유흥의 순간과 고조된 희열을 진솔하게 담아냈다. 시인은 이즈음 술기운이 떨어질 것을 염려하여 다시 술잔을 당겨 그러한 유흥을 이어나가길 희망하였다. 다음 작품에서 선유의 즐거움을 지속해 나가고픈 마음을 담았다.
산 사이 물굽이 山間與水曲
곡수유상 예전처럼 단란하네 曲水流觴勝事團.
물굽이 산굽이 길은 구불구불 水曲山回路百轉.
물굽이 산굽이 경치는 더욱 아름다워 水曲山回境轉幽.
위 작품은 실제로 그가 춘양구곡을 경영하고 창작하는 과정상 주요한 기제가 되었다. 주자의 「무이도가武夷棹歌」와 이를 화운한 퇴계退溪의 「한거독무이지차구곡가운십수閒居讀武夷誌次九曲櫂歌韻十首」는 그들의 삶에 있어 매우 주요한 시가 아닐 수 없다. 퇴계의 구곡시는 은거하는 사림들에게 시 창작의 전범 기제로 작용되었다. 봉화 지역에 거주하는 산림처사 역시 퇴계의 도산구곡시 전통을 이어 그러한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구곡원림을 경영하며 구곡시를 창작했다.
봉화에는 구곡원림이 네 군데 존재한다. 경암敬菴 이한응李漢應(1778-1864)이 춘양면과 법전면의 운곡천雲谷川을 중심으로 경영한 「춘양구곡春陽九曲」이 있다. 해은海隱 강필효姜必孝(1764-1848)가 법전면 일대를 중심으로 설정한 「법계구곡法溪九曲」과 봉화군 명호면․안동시 도산면에 걸쳐 설정한 「대명산구곡大明山九曲」이 있다. 그리고 노봉蘆峯 김정金亻正(1670-1737)이 물야면 오계에 설정한 「오계구곡梧溪九曲」이 있다. 이처럼 봉화의 선비들은 수려한 산수를 배경으로 하여 학문을 연구하고 성리학의 도가 구현된 고장을 만들며 구곡시 창작 정신과 성리학 전통을 이어나가기 위해 노력했다.
경북에서 맨 북쪽에 자리하고 있는 봉화는 강원도 태백․영월․삼척과 접하는 고을이다. 동해를 끼고 있는 울진을 빼고 나면 영남 내륙 지방에선 최북단에 속한다.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의 높은 분수령을 동서로 끼고 있는 환경 때문에 영남의 대표적인 오지로 꼽혀 왔다. 이러한 봉화의 북쪽에 위치한 춘양은 더욱 깊은 산골이다. 봉화는 이처럼 궁벽한 곳이지만 유명한 유학자들의 숨결이 곳곳에 묻어있다. 그러한 전통은 운곡천雲谷川을 따라 흘러왔다. 운곡천은 백두대간 태백산 줄기인 ‘문수산文殊山’․‘옥석산玉石山’․‘각화산覺華山’ 등에서 발원해 춘양면 서벽리․애당리를 적시고 법전면 소천리를 거쳐 명호면 도천리에서 낙동강에 합류하는 물줄기다.
경암은 운곡천에 춘양구곡을 처음 설정하고 경영하였다. 춘양구곡春陽九谷은 태백산에서 발원하여 춘양면과 법전면으로 흐르는 운곡천 8.4km에 걸쳐 설정된 구곡원림이다. ‘백두대간’과 ‘운곡천’을 끼고 있는 춘양은 자연 풍광이 아름다운 고장으로 알려져 왔다. 이와 함께 덕망이 높은 학자들이 은거하며 강학 활동과 제자 양성에 주력했던 유풍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아름다운 산수자연과 함께 은거구지隱居求志하는 유학자들이 있기에 경암은 이곳을 구곡으로 설정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 경암은 태백산 서남쪽 두 골짜기에서 나온 춘양 물이 남으로 흘러서 낙동강으로 들어가는 길이가 거의 100리라고 설명했다.아울러 태백산은 신령함과 빼어남이 충만한데 춘양이 그 가운데 자리하기에 그윽하고 깊으며 넓고 넉넉하여 아름답고 무성한 기운이 가득하다고 했다.경암은 이러한 춘양의 산수가 다른 지역에 비해 신령하고 청정한 공간임을 감안해 구곡 설정에 임했다.
춘양은 냇물이 그 가운데를 지나면서 맑고 차가우며 달고 깨끗하여 굽이굽이를 이룬다. 중간 십여 리에 서로 마주할 정도의 가까운 곳은 애당초 빼어난 곳은 아니지만 먼 지역의 사람들이 기이한 곳으로 여긴다. 때문에 농부들이 심은 뽕나무와 그들이 정성껏 가꾼 삼이 무성히 자라고 연기와 노을이 끼는 여느 곳과 별반 차이가 없는 공간이다.하지만 경암이 춘양을 주목한 이유는 무엇일까? 경암은 ‘춘양’의 지역 특성을 찾아냈다. 춘양은 외진 고을이지만 덕이 높은 선비가 많이 배출되었고 풍속과 예절이 빛나고 우아해 세인들이 칭송하는 곳임을 강조했다.
그래서 경암은 이곳 춘양이 성리학의 도가 구현되는 신성한 공간으로 설정되기에 최적합한 곳임을 착안했다. 아울러 춘양은 빼어난 산수가 ‘은구隱求’와 ‘양진養眞’의 공간으로 손색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춘양의 산수와 인물은 이를 알아보는 사람만이 찾을 수 있다며 춘양 산수자연과 인문지리적 특장을 강조하였다.실제로 경암이 설정한 춘양구곡의 굽이마다 덕이 높은 선비가 은거하며 학문에 정진하여 후진을 양성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이러한 역사 배경과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한 춘양은 성리학 전개와 통합의 신성한 공간으로 설정될 요인을 이미 갖추고 있었다.
4) 「춘양구곡」의 성리 미학
이러한 창작 배경 이해를 거쳐 춘양구곡 여행을 떠난다.
(1) 운곡천의 원두와 유선(서시․1곡)
태백산 남쪽은 맑고 신령하니 太白鎭南曲淑且靈
발원이 어찌 청결하지 않으랴 發源寧不潔而淸
춘양 평평한 들판에 굽이굽이 흘러가서 春陽平野逶迤去
굽이마다 구역 이뤄 대대로 명성을 남겼네 曲曲成區歲有聲
「서시」이다. 태백산 남쪽은 맑고 신령한 곳으로 알려졌다. 춘양을 관통해 흘러가는 운곡천의 원두源頭는매우 청결하다. 물굽이가 태백산의 신령한 기운을 흡수하여 흘러오면서 춘양 들판을 적시고 아홉 구비를 형성해 가는 자태가 아름답다. 굽이마다 덕이 높은 선비들이 깃들어 살면서 학문에 열중하였던 궤적이 남아 있다. 때문에 굽이를 거슬러 오르면 절로 구곡시를 짓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굽이마다 절의와 도의를 함양했던 유현儒賢들의 자취가 남아 있으며 대대로 그 명성이 전해져 오는 것을 가슴으로 느낀다. 그러한 성리학 전통과 정신 지향을 지속적으로 이어가고픈 내심이 강하게 발동되었다. 경암은 「서시」에서 ‘춘양구곡’ 설정의 의미를 함축했다. 구곡마다 전해져 오는 ‘춘양 선비의 절의와 학문 정신을 계승하기 위함에 초점이 있다’고 천명했다. 그 고유한 전통과 정신 유산을 이어 성리학 전통이 이어지는 신성한 공간 조성을 위한 의도를 밝혔다.
일곡인 피리 소에서 배 띄울 수 있으니 一曲笛淵可以船
옥순봉 밑에서 어천으로 들어가네 玉筍峰下注漁川
유선이 한 번 떠난 뒤로 찾는 이 없고 儒仙一去無人訪
발자취만 남았고 무학봉은 운무로 덮여있네 芳躅空留舞鶴烟
적연 위 석봉을 ‘옥순봉’이라 한다. 눌은 이광정이 정자를 지어 ‘어은정’이라 했다. 북쪽 언덕에 ‘무학봉’이 있다.
「1곡」은 ‘어은漁隱’인데 백두대간에서 발원해 춘양 들판을 적시고 흘러온 법전면 척곡리의 감의산을 만나 휘어 도는 물줄기다. 어은동은 감의산 북쪽 골짜기에 잇는 마을 이름이다. 이 마을 앞으로 흐르는 어은골 계류가 운곡천에 합류하는 굽이를 ‘어은동漁隱洞’이라 부른다. ‘어은’은 ‘물고기가 숨을 정도로 깊은 곳’이란 의미이다. 어은동 일대는 산줄기를 휘돌아 흐르는 운곡천 물줄기가 암벽에 부딪히면서 그 아래 깊은 소沼를 이룬다. 휘돌아가는 강물이 빚은 여울과 소, 그리고 암벽이 어우러진 풍경은 아름다우면서도 평화롭다. 운곡천 물길은 바위를 만나 크게 한두 번 굽이치고 흘러간다. 물이 부딪치는 바위소가 ‘적연’이고, 그 위로 솟은 암벽이 ‘옥순봉’이다.
현재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이 지었다는 ‘어은정’은 남아 있지 않고 ‘어은정’으로 추정되는 터만 남아 있다. 운곡천 하류에서 상류 쪽을 보면서 어은골 물과 합수되는 곳이다. ‘적연’에 대한 추적도 용이하지 않다. 세월이 흘러 지형이 변하면서 없어진 것인 지 경암이 운곡천 굽이도는 곳에 물이 고여 만든 연못을 ‘적연’이라고 했는지 분명치 않다. 지금은 모래가 강바닥을 덮어 배를 띄우지 못하지만 그 옛날엔 충분히 배를 띄울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운곡천에 임해 높이 솟은 바위 봉우리가 ‘옥순봉’이다. ‘옥순봉’이나 ‘무학봉’에 대해 현재 발행된 지도에는 이러한 이름을 가진 봉우리를 찾을 수 없다.
경암은 ‘적연’에서 배를 띄웠다. 적연 위에 석봉이 있는데 ‘옥순봉’이라고 불렀다. 경암은 옥순봉 아래에서 배를 타고 어천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 굽이는 현재 유선儒仙이 한 번 떠나가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했다. 여기서 ‘유선’은 한 때 이 굽이에 머물렀던 ‘눌은 이광정’을 지칭한다. 그는 어은동에 ‘어은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은거하였다. 하지만 경암이 방문한 그곳에는 눌은은 떠나가고 그의 향기론 자취는 무학봉을 덮고 있는 안개로 남아 애상스럽게 다가왔다. 여기서 무학봉을 두르고 있는 안개는 눌은을 재형상한 시각 이미지이다. 눌은에 대해 무한한 추모 서정과 성리학적 학문과 사상의 심원함을 사모하는 정신 지향이 반영되어 있다.
(2) 사미정과 풍대의 향기(2곡․3곡)
이곡은 맑은 계곡의 시냇가 봉우리 二曲玉川川上峰
그윽한 정자에서 마주함에 사람 얼굴 같네 幽軒相對若爲容
갈아도 갈리지 않는 너럭바위 위에 磨而不切盤陀面
천년토록 빛나고 밝은 달이 비치고 있네 千古光明月色重
시내의 남쪽은 산이 매우 높고 빼어나며 아래로는 마암과 횡반이 아주 넓다. 옥천 조덕린이 ‘사미정’을 지었다.
2곡은 ‘사미정四未亭’이다. 사미정은 경북 봉화군 법전면 소천리 554번지에 소재한다. 제1곡 어은에서 운곡천을 따라 약 1km 정도 거슬러 오르면 시내가 넓어지며 맑은 물이 천천히 흐르는 공간이 나오는데 이곳이 ‘사미정’ 계곡이다. 사미정 주변 경관은 산이 매우 높고 빼어나며 아래로는 마암磨巖과 횡반橫盤이 펼쳐있다. 시내의 바닥이 바위로 이루어져 그 위를 흘러가는 물은 매우 맑다. 사미정에서 바라보는 이 굽이의 경관은 아홉 구비 가운데서도 가장 으뜸이다. 둘째 굽이에 이르러 만나는 ‘옥천玉川’은 옥천玉川 조덕린趙德隣의 호이면서도 운곡천의 또 다른 이름이다.옥천 조덕린이 1737년(효종9)에 이곳 명승경관지를 찾아 정자를 건립하고 ‘창주정’이라 하였다. 그 후 후손들이 중수하고 정자 이름을 ‘사미정’으로 바꾸었다. 이는 현재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76호로 지정되었다.
경암은 옥천의 시냇가에서 솟아 있는 봉우리를 보았다. 옥천은 맑은 물이 흐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유헌’은 이 굽이 위에 세워진 ‘사미정’을 말한다. 유헌에서 바라보는 봉우리의 모습은 마치 사람의 얼굴과 같았고 갈리지 않는 ‘반타석’ 위에는 오랜 세월 변함없는 달빛이 비추고 있다. ‘유헌幽軒’에조덕린의 체취가 남아 있다. 정자에서 마주하는 냇가의 봉우리는 조덕린의 모습을 의미한다. 그리고 갈아도 갈리지 않는 반타석은 조덕린의 성품을 상징한다.
당쟁의 소용돌이 가운데에서 자신의 굳건한 의지를 잃지 않았던 군자 선비의 전형 조덕린의 형상이 빛나고 있다. 올곧은 선비의 정신 지향은 달빛을 받아 더욱 영롱하게 빛난다. ‘사미정’ 명칭에 대해서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이에 그는 네 가지 덕을 갖추기 위래 근신과 수신의 삶을 살고자 했던 겸손한 선비 학자였다. 경암은 제2곡에서 강직한 선비의 전형 조덕린의 삶과 정신 지향을 추모하며 회고하였다. 이와 함께 그의 정신 지향성이 냇물이 간단없이 흘러가는 것처럼 후대에 영속적으로 이어지질 염원했다. 결국 경암은 2곡에서 조덕린의 삶을 기리면서 밤하늘을 밝히는 어두운 달빛처럼 영원히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조덕린의 유덕幽德을 찬양하며 고고한 선비 정신을 후대에 계승해 주길 바라는 염원도 담았다.
삼곡은 어풍대 앞의 가약선 三曲風臺架若船
차갑게 이곳에 자리한 것 어느 해일까 冷然神御枉何年
물결 끊기지 않고 바위 언덕 오래되었는데 波流不盡巖阿古
우는 새와 지는 꽃 모두 가련하구나 啼鳥落花摠可憐
홍풍대가 창건한 정사는 훼손된 지 오래이다. 바위 봉우리가 매우 기이하다.
3곡은 ‘풍대風臺’이다. ‘사미정’에서 운곡천을 거슬러 약 1km 정도 올라가면 ‘옥계정玉溪亭’ 앞에 이른다. 맑은 냇물이 사미정을 향해 힘차게 흘러가는 운곡천 왼쪽에 옥계정이 있고 오른쪽에 풍대가 자리 잡고 있다. 풍대는 바위로 이루어진 작은 봉우리인데 운곡천에 인접해 있다. 현재 풍대 뒤로 난 도로 때문에 바위산 일부가 손상되었고 주위에 ‘소나무’․‘참나무’․‘느티나무’ 등 바위가 자라 그 옛날 풍대의 온전한 모습은 아니지만 이 굽이는 여전히 풍대와 운곡천이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운 경관을 선사한다.
사미정에서 굽은 운곡천을 따라 한 구비 돌면 평지마 건너편 물가에 단애가 있다. 굽이치는 운곡천에 퇴적 작용으로 흔적을 찾기가 힘들다. ‘어풍정御風亭’은 법전면法田面 소천리召川里에 소재하며 풍대風臺 홍범석洪錫範이 건립하여 학업을 정진하며 후학 배양에 힘쓰던 곳인데 지금은 흔적이 없다. 경암이 이 굽이에 이르렀을 때 홍석범이 창건한 정사는 훼손된 지 이미 오래되었다. 그 당시에도 풍대 바위 봉우리만 자리하고 있다.
경암이 이 지점을 3곡으로 설정한 이유는 홍범석의 자취가 서린 곳이고 기이한 바위 봉우리가 있기 때문이었다. 홍범석이 건립한 정사는 없어졌지만 변하지 않고 존재하는 풍대 바위 봉우리에 큰 의미를 두고 설정한 것이다. 이후 이 굽이에 ‘옥계정玉溪亭’이 건립되었다. 옥계정은 김명흠金明欽의 학덕과 효행을 추모하기 위해 의성 김씨 문중에서 지은 정자이다.의성 문중에서 그의 학덕과 효행을 추모하여 화장산에 건립하였는데 1939년 이곳으로 이건하였다. 옥계정에는 ‘옥계정’과 ‘졸천정사拙川精舍’라는 두 현판이 걸려 있다. 옥계정 뒤에는 옥계고택이 자리를 잡고 있다.
경암은 제3곡에 이르러 풍대에 걸려 있는 배를 보았다. 풍대의 윗부분이 배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주자가 「무이구곡」 제3곡을 시로 읊으면서 언급했던 ‘가학선架壑船’을 의미한다. 이는 그 옛날 ‘고월인古越人’이 이 굽이에 살면서 장례 지낸 배가 바위 벼랑에 그대로 남아 있어 주자가 이를 목격하고 시로 표현한 것에 근거한다. 이는 사람이 죽으면 배를 타고 다른 세계로 간다는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가학선’은 세월이 지나면 결국 그 형체를 잃고 만다. ‘풍대’가 그 옛날 역사적 배경만 전해진 채 현재 사라지고 없는 것을 의미하는 것과 유사하다. 하지만 풍대 아래로 흐르는 물굽이는 영구불변으로 존재한다. 환언하면 가변의 존재 가치가 유한성을 지닌 반면 영구불변의 풍대에 깃든 정신적 지향이 더 중요함을 강조한 것이다. 풍대와 풍대 아래로 흐르는 맑은 물은 주자 성리학의 간단없는 계승과 선현의 정신 유업이 영속적으로 존재함을 상징한다.
(3) 연지와 창애정의 고절(4곡․5곡)
사곡은 연지에 바위 그림자 비추니 四曲硯池印石巖
갈매기 언약과 물고기 즐거움이 생동하네 鷗盟魚樂日毿毿
만약 청련의 시구를 베끼게 한다면 若敎依寫靑蓮句
콸콸 솟는 물이 지금 절로 못을 채우리 滾滾如今自滿潭
연지는 옥계 가에 있다.
제4곡은 ‘연지蓮池’이다. 연지는 ‘벼루못’이다. ‘벼루 앞쪽의 오목하게 파진 부분’을 말한다. 이곳에 물을 부어 먹을 가는 곳이다. 한편 지명에서 ‘벼루’라는 것은 순우리말인 ‘벼랑’을 일컫는다. 그러므로 ‘벼랑 아래에 있는 못’이라 하여 ‘벼루못’이라 불렀으며 그것을 한자로 표기하면 ‘연지硯池’가 된다. 현재 이 연지 상류 쪽에는 관개용 농수 확보를 위해 보洑를 설치해 물이 가득하다. 3곡인 풍대에서 운곡천을 거슬러 약 800m 정도 거슬러 올라가면 커다란 보가 나타난다. 이 지점에 운곡천이 굽어 돌고 시내가 넓어진다. 굽어 도는 곳에 바위 벼랑이 우뚝 솟아 있다. 긴 보 위로 맑은 물이 쉼 없이 떨어지는 굽이를 만나게 되는데 이곳이 연지이다. 이 못의 이름은 경암이 명명한 것으로 보인다. 운곡천 상류에서 흘러 내려온 옥류는 연지의 바위에 부딪히며 잠시 숨을 고른다.
경암은 제4곡에 이르러 석암이 비치는 연지를 바라보았다. 연지 가에 솟아 있는 돌 바위는 휘어 도는 운곡천의 흐름을 절제하였다. 세차게 흘러오던 맑은 물이 이 굽이에 이르러 휘어 돌며 잠시 속도를 늦춘다. 그 과정에서 수면은 잔잔하여 마치 넓은 거울을 펼쳐놓은 것 같은 모습이다. 이 수면에 돌 바위가 비치면서 아름다운 경관을 만든다. 경암은 여기서 갈매기와 친하기로 한 약속을 이루고 물고기를 바라보는 즐거움을 누렸다. 자연에 물러나와 갈매기와 노닐고 생동하는 물고기를 바라보며 유유자적한 삶을 누리는 즐거움을 그렸다. 하늘에서 갈매기가 날고 연못에서 물고기가 유영하는 현상은 천리가 유행되는 자연의 질서가 안정적으로 운영되는 것을 상징한다. ‘갈매기 맹세’는 은거하겠다고 다짐한 ‘은자’를, ‘물고기의 유영’은 ‘천리가 유행하는 현상’을 비유한다.
경암은 4곡에서 은거하면서 천리가 유행하는 자연의 이치를 따르겠다고 다짐했다. ‘청련靑蓮’은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을 말한다. 그의 별호가 ‘청련거사靑蓮居士’이다. 콸콸 흐르는 물이 못을 채우는 것 역시 자연의 이치이다. 인위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천리가 ‘연비어약鳶飛魚躍’하듯이 물도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다. 유학자에게 물을 보는 ‘관수觀水’는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다. 경암은 연지에서 자연의 이치를 직접 목격하고 이를 배우며 깨닫고 즐기는 공간으로 삼고자 했다. ‘쏟아지는 물이 절로 못을 채운다’고 하였다. 원두에서 쉼 없이 흘러내리는 물로 연못을 가득 채우고 싶다는 것이다. 자연 속에 평범하게 흐르는 진리를 경암은 예리하게 간파하여 인욕이 제거되고 천리가 유행하는 가운데 진락을 누리는 은자를 염원했다.
오곡의 창애정 높고 깊숙하니 五曲滄崖高且深
병풍처럼 가려 운림을 숨겼기 때문일세 由來屛隱鎖雲林
그림자처럼 있던 그 분은 어디로 가셨나 依然影裏人何處
홀로 청산에 서니 만고를 회상할 뿐일세 獨立靑山萬古心
푸른 벽을 이름 하여 은병암이라 하였는데 창애공이 정자를 지었다. 그 위에 청산사가 있다.
제5곡은 창애滄厓이다. 제4곡 연지에서 운곡천을 거슬러 약 1km 정도 오르면 창애에 이른다. 이 지점에 이르면 운곡천이 큰 바위 벼랑을 만나는 지점에 이른다. 냇가 오른쪽에 우뚝 솟은 바위 벼랑이 제5곡 창애다. 운곡천이 크게 굽어 도는 지점으로 시내의 왼쪽에 ‘창애정滄厓亭’이 있고 오른쪽 산언덕에 ‘창랑정사滄浪精舍’가 있다. ‘주註’에서 ‘창애정사 위에 청산사靑山祠가 있다’고 했는데 현재로서는 ‘청산사’의 실체를 파악하기 어렵다. 당시에 세워졌던 사당 형태로 보이는데 지금은 흔적을 알 수 없다.
창애정은 창애滄厓 이중광李重光(1709-1778)이 1742년(영조18)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여러 벼슬에 임명되었지만 나가지 않고 명현들과 교유하며 학문을 토론하고 공부에 전념하며 후진을 양성했던 곳이다. ‘창애정사’와 ‘창애정’은 마주보고 있다. ‘창애정사’는 장동교에서 오미쪽으로 오른쪽 산기슭에 있다. 현재 ‘창애정’은 보수를 거쳐 산뜻하다. ‘창랑정사’는 난은懶隱 이동표 李東標의 둘째 아들 두릉杜陵 이제겸李濟兼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광무 4년(1900)에 문중 자손이 건립한 정자이다.두릉이 만년에 호를 ‘창랑’으로 했기 때문에 ‘창랑정사’로 이름을 지었다.난은 이동표와 두릉 이제겸은 경암 이한응의 선조이다.
경암은 제5곡에 이르러 창애정에 올랐다. 은병암 안에 창애정이 있어 은병암이 창애정을 두르고 있는 형상이다. 푸른 숲과 시내가 비경을 숨겨 둔 곳이다. 경암은 이 굽이에 이르러 은거하며 학문 정진과 후진 양성하던 이중광의 인기척이 들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주인은 온 데 간 데 없고 다만 창애정만 남아 있다. 이곳에서 학문에 정진하며 후진 양성에 심혈을 기울이던 이중광을 추모하였다. 홀로 청산에 올라서니 만고를 회상하며 창애의 정신을 추모하며 계승해 나가길 다짐했다.
(4) 쌍계와 서담의 전설(6곡․7곡)
육곡에는 쌍계가 바위 물굽이를 둘렀는데 六曲雙溪繞石灣
고봉이 중간에 솟아 중앙 관문이 되었네 孤峰中突作重關
상전벽해 억겁의 세월 원래 그러했으니 桑瀛浩劫元如許
이 골짜기 안의 세상은 절로 한가롭다네 壺裏乾坤自在閑
봉우리의 옛 이름은 삼척봉이다. 벗인 홍치기가 차지하여 쌍호정을 지었다.
제6곡은 ‘쌍호雙湖’이다. ‘창애정’을 뒤로 하고 운곡천을 오르며 물길은 왼쪽과 오른쪽으로 S자로 휘돌아간다. 제5곡 창애에서 운곡천을 거슬러 약 2km 정도 오르면 시냇가에 임한 ‘삼척봉三陟峯’이 나온다. 삼척봉은 소나무로 덮여 있어 멀리서 바라보면 봉우리의 모습을 확인할 수 없을 정도이다. 삼척봉 위에는 ‘명부대明夫臺’가 있다. 삼척봉 아래에는 남양 홍씨의 ‘연주정戀主亭’이 있다. 연주정 뒤로 난 농로를 따라 가면 이 굽이의 전경을 온전히 볼 수 있다. 긴 보 위로 시내의 맑은 물이 흘러 삼척봉 아래에서 굽어 돌며 흘러간다. 경치가 그렇게 빼어나지는 않지만 삼척봉과 맑은 시냇물이 어우러져서 아름다운 경관을 이룬다.
삼척봉은 ‘홀로 있다’해서 ‘독산獨山’․‘독봉獨峯’․‘고봉孤峰’ 등으로 불린다. 봉화에서 삼척으로 가는 길가에 있다고 하여 ‘삼척봉三陟峯’이라는 이름도 얻었다. 홀로 외롭게 서 있는 이 언덕 아래의 물줄기가 제6곡인 ‘쌍호’이다. 경암은 제6곡을 묘사하면서 쌍계가 석만을 두르고 높은 봉우리가 가운데 우뚝 솟아 문을 만든다고 하였다. ‘쌍계雙溪’는 ‘쌍호雙湖’를 의미한다. 노인들의 전언에 의하면 ‘연주정’ 옆에는 담潭이 있어서 옛적에 여기서 목욕도 많이 한 곳이라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깊지도 않고 수량도 적어 당시의 풍광을 자아내지는 못한다. 현재 주민들도 이곳에 쌍호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없다. 홍수로 인해 지형이 변함에 따라 그러한 자취가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경암은 이 굽이에 이르러 쌍호가 물굽이를 두르고 있고 삼척봉이 솟아 있는 굽이를 바라보며 세월의 무상함을 느꼈다. 세월이 흐르면서 모든 사물이 변해가는 사실을 주목했다. 원래 산이었을 이 봉우리가 변해 쌍계를 이루고 있으니 ‘상전벽해’라고 했다. 경암이 노래한 뒤 150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 운곡천의 쌍호도 사라져서 한쪽 물길은 들판이 되었으니 역시 상전벽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에 경암은 관조의 자세를 취한다. 억겁億劫의 세월이 원래 그런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독산 위에서 쌍호정 주변을 굽어보는 경암의 마음은 한가롭기 그지없다. 사물이 변하는 가운데 그 안에 내재하는 한가로움을 포착하였다.
칠곡의 서담은 시냇물이 여울로 들어가니 七曲晝潭注入灘
우뚝한 절벽 물에 비쳐 더욱 달리 보이네 丹崖涵碧更殊看
선을 살피던 당시 즐거움 도리어 안타까우니 卻憐觀善當時樂
경관이 맑아 탈속의 느낌으로 청아하다 聲色空淸鶴夢寒
제7곡은 ‘서담書潭’이다. 제6곡 ‘쌍호’에서 운천곡을 거슬러 약 1km 정도 오르면 소로교小魯橋가 나타난다. 소로교 앞으로 긴 보가 놓여 있고 그 오른쪽에 높지 않은 바위 벼랑이 시내에 임해 있다. 서담은 이 바위 벼랑 아래 운곡천이 굽어 돌며 만든 못을 말한다. 경암이 이곳을 ‘서담‘이라고 명명한 것은 과거에 이곳에 서당이 있었던 데서 비롯된다. 이 마을에서 언제 누가 서당을 운영하였으며 어떤 사람들이 공부를 했는지 확인할 자료는 없다. 서당은 이미 없어지고 그 터만 남았겠지만 그 옛날 이 지역의 학문이 이 서당에서 시작되어 걸출한 인물을 배출하였을 것이다.
경암은 제7곡에 이르러 서담 물이 여울에 들어가고 붉은 벼랑이 푸른빛을 머금는 기이한 경관을 바라보았다. ‘서담 물이 여울로 유입된다’는 말은 운곡천의 맑은 시냇물이 서담에 들어갔다가 다시 흘러가는 광경을 의미한다. 붉은 벼랑은 이 굽이 오른쪽에 자리한 벼랑을 말한다. 맑은 물이 쉼 없이 흘러왔다가 흘러가고 붉은 벼랑에는 갖가지 풀과 나무가 예쁘게 자라나 푸른빛을 더한다. 이처럼 아름다운 굽이에 서당이 있었을 것이며 그 서당에서 공부하는 학도들의 정다운 글 읽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관선觀善하던 즐거움’은 예기禮記에서‘선비가 서로 본받아 좋은 점을 배운다[사상관이선士相觀而善]’라고 한 것에 근거한다. 당시 서당에서 공부하던 즐거움을 말한다. 유가儒家의 공부는 선현의 가르침을 배우는 것이고 이것은 선善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성색’은 목소리와 얼굴빛이고 ‘학몽’은 신비하고 기이함을 꿈꾸는 것이다. 경암은 이곳에서 그 옛날 서당에서 학생들이 공부하던 모습을 생각하니 목소리와 얼굴빛이 저절로 맑아지고 신비하고 기이함을 꿈꾸던 생각이 사라졌다. 연못 주변의 경관을 보면서 탈속의 고고한 경지를 누리는 것 같다고 했다.
(5) 한수정과 도연의 추억(8곡․9곡)
팔곡인 한수정 가에 들판이 열리고 八曲寒亭際野開
선계의 초연대 높이 솟아 맑은 물 굽어보네 仙臺超忽俯澄洄
길손은 선현의 발자취 멀어졌다고 탄식 말지니 遊人莫歎遺芳遠
가을 달이 연못 속으로 밤마다 찾아온다오 秋月潭心夜夜來
정자는 한수정, 헌은 추월헌, 대는 초연대라고 하였다.
제8곡은 ‘한수정寒水亭’이다. 제7곡 서담에서 운곡천을 거슬러 약 800m 정도 오르면 한수정을 만난다. 춘양 들판이 펼쳐진다. 춘양 들판 한복판 운곡천 물가에 자리 잡은 한수정은 1608년(선조31) 권래權來가 지었다. 원래 이 자리에는 원래 조선 중기 문신 충재冲齋 권벌權橃(1478-1548)이 건립한 ‘거연헌居然軒’이라는 정자가 있었는데,화재로 이 건물이 소실되자 그의 손자인 권래權來(1562-1617)가 이 건물을 세우고 이름도 새로 ‘한수정’이라 고쳐 붙였다.한수정은 현재 경북유형문화재 제147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수정’이란 ‘찬물과 같이 맑은 정신으로 공부를 하는 정자’라는 뜻에서 붙인 것이다. 주변 경광이 시냇물과 소나무가 어울려 조화를 이룬다.
한수정에 이르자 그 주변으로 ‘추월헌’․‘초연대’․‘피당’이란 연못이 있었다. 경암은 이곳에서 봉화 지역 유학 연원을 회상하였다. 봉화 지역 유학의 번성에 충재의 영향은 지대했다. 춘양 들판 가운데 한수정이 자리하고 있다. 아울러 ‘선대’가 우뚝 솟아 운곡천의 한 굽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선대’는 ‘초연대超然臺’를 의미하는 것 같다. 이곳을 유람하는 사람들은 선인들의 향기가 멀게 만 느껴진다는 아쉬움을 털어놓았다. 후인들은 시대가 멀어 권벌과 권래의 가르침을 접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경암은 한수정에 이르러, 선인의 고결한 행적과 여향이 그리 멀지 않다고 힘주어 말한다. 가을 달이 밤마다 연못 가운데로 찾아오는 것에 착안하여 충재 권벌과 권래의 충정과 기상이 청아한 가을 달빛으로 치환되어 밤마다 연못을 비춘다고 하였다. 그러한 청아하고 곧은 기상이 바로 충재의 기절과 권래의 선비 정신이라는 것이다. 경암은 이 구비에서 가을 달에 투영된 충재와 권래의 정신 지향을 회상하며 추모 서정을 발휘하였다. 밤이면 밝은 달빛이 연못에 찾아들 듯 선현의 가르침이 끊이지 않고 전해오기 때문에 위안을 받는다.
구곡의 도연서원 다시 넓은 기상 九曲道淵更浩然
봄 날 누에서 아련히 긴 시내 바라보네 春樓迢遞見長川
우리 도는 전처럼 서원이 있는데 의지하니 依舊賴有宮墻在
십리의 풍광이 마치 겨울 속의 하늘같네 十里風烟鏡裏天
제9곡은 ‘도연道淵’이다. 한수정에서 운천곡 물길을 900m 정도 거슬러 올라가면 춘양구곡의 원두인 제9곡 도연에 이른다. ‘도연’은 ‘도연서원’을 말한다. 아울러 제9곡에 있었던 연못이라 하겠다. 도연은 춘양구곡의 극치를 이룬다. 도연서원은 한강寒岡 정구鄭逑․미수眉叟 허목許穆․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을 모신 곳이었지만 1858년에 훼철되었다. 현재 춘양중학교 운동장 동쪽이 서원 자리이다. 지금 그 자리에는 두 개의 삼층 석탑인 봉화 서동리 삼층 석탑이다. 이곳은 신라 고찰이었던 남화사覽華寺의 옛터로 알려져 있다.
도연서원은 인재를 기르던 역할을 수행했고 도연은 맑은 물을 계속해서 운곡천에 공급하였다. 도연서원에서 공부한 선비들이 춘양을 성리학이 전개되고 성리 이념이 구현되는 성리학의 문화가 개화된 고장으로 만들었다. 춘양을 비롯한 봉화 지역의 유생들이 이곳에서 학문을 익히고 도를 공부했으니 춘양구곡의 원두요 극처로 삼기에 충분했다. 학문적 영기가 충만한 도연서원의 풍광을 묘사하고 쉼 없이 흘러가는 냇물처럼 유학의 도가 흘러가길 염원하였다. 아울러 도연에서 흘러내린 맑은 물은 춘양의 굽이를 적시면서 춘양을 맑은 고을로 만들었다. 성리학 정신이 집중된 도연서원의 성리학적 기맥이 운곡천을 형성하여 춘양 전역을 골고루 적신 것처럼 성리학 전통이 운곡천처럼 쉼 없이 흘러내려 성리학 문화가 전개되는 춘양을 만들었다. 경암은 그러한 염원과 소망을 이 「춘양구곡’을 통해 시문학으로 형상했다.
Ⅵ. 마무리
경암 이한응의 산수 자연 미학과 성리 사유 의식과의 연관성을 추적하고자 했다.
경암(1778-1864)의 고조부는 난은 이동표, 증조부는 두릉 이제겸, 조부는 중경, 부친은 진굉이며 모친은 하산성씨이다. 경암은 1778년에 봉화군 춘양읍 녹동에서 태어나 7세 이전에 조실부모하고 백조 누실옹에게 학문을 배웠는데 총기가 있었고 부지런히 면학했다. 평생 산림처사로 자처할 만큼 선비로서 수신과 근학에 전념하였다. 이만준 등의 문인을 두었으며, 중국 유학자 퇴계의 저서 중에서 622조의 글을 뽑아 14권의 속근사록을 만들었다. 서예와 시문에도 탁월한 솜씨를 보였다. 1850년 봄 도산서원 원장으로, 오산당 강회 좌장으로 대학 「변론문답」에 명쾌히 응답하였다. 1851년에 시냇가에 ‘경의재’를 짓고 강학 활동과 제자 양성에 주력하였다. 1857년 통정대부에 올라 첨지중추부사, 1860년에 돈녕부도정이 되었다. 1864에 향년 87세로 별세했으며 경암집15권이 있다.
경암집은 목판본 15권 12책이다. 손자 이흘로 등에 의해 1885년에 간행되었다. 권1․권2에 300여 수의 시가 실렸다. 권3에 「서」 14편, 권4에 「서」 18편, 권5에 「서」 28편, 권6에 「서」 20편, 권7에 「서」 17편, 권8은 「잡저」로 「자성록」이 실렸다. 권9에 「잡저」 16편, 권10에 「서」 7편․「기」 4편․「발」 8편․「잠명」 4편, 권11에 「상량문」 2편․「고유문」 2편․「제문」 8편․「애사」 4편․「묘갈명」 8편․「묘지명」 9편, 권12에 「행장」 11편, 권13에 「가장」 6편․「청량정사강의」, 권14 「부록」에 「가장」․「행장」․「묘갈명」․「묘지명」․「배문록」․「기술」․「제문」․「만사」가 실렸다.
경암 시문학 창작 배경으로, 첫째 ‘산수자연 인식론’에서 산수자연은 누구에게나 향유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심으로 여기에 귀의하는 자만이 체감할 수 있다고 했다. 자연의 신비로운 경관과 멋을 아는 이만이 산수자연을 차지하며 그러한 미적 체감을 하는 자들과 산수 자연의 즐거움을 공유할 수 있다는 논리를 전개했다. 나아가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인간 내면의 정화와 수양의 과정까지 이룰 수 있다고 했다. 이러한 경암의 산수자연 인식론은 퇴계의 산수 자연 인식론에 기초한다. 그는 산수 애호 정신에 근거한 각별한 산수 심미 의식을 소유했다. 둘째, ‘춘양 산수 애호와 퇴계 산수관 계승’ 정신이다. 봉화에는 예로부터 수려한 산수 자연을 배경으로 산림처사들이 선현을 추모하고 학문을 연마하며 후진을 양성하는 한편 내면을 고결하게 하는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들은 퇴계를 존숭하여 그의 학문을 계승하고자 노력하였다. 경암은 퇴계가 청량산을 애호한 것처럼 녹문산을 애호하여 향토 산수 애정 의식을 발휘했다. 경암은 퇴계를 존숭하였으며 그의 학문 사상을 답습했다. 아울러 산수 자연관 역시 퇴계의 그것을 추종하였다. 「춘양구곡」 창작 동인도 퇴계의 「도산구곡」 창작 정신을 답습한 사례이다. 그런 탓에 퇴계의 산수자연미 의식 역시 자연스레 경암에게 이어졌다.
경암 시문학의 형상화 양상을 살폈다. 첫째, ‘화훼 애호 정서’의 형상화이다. 경암의 화훼 애호 정서는 산수 미학 의식의 구체적 실천이다. 경암은 천성이 산수를 즐겼고 나무 심는 것을 애호하였다. 경암의 화훼 애호 정서는 산수 애호 정서의 연장이며 퇴계가 자연을 통해 정심과 수신을 지향했던 정신 지향과 맞닿아 있다. 둘째, ‘전원 은거의 정취’가 담긴 작품 분석을 통해 은거 미학과 낭만 정조를 표현했다. 경암은 은일한 삶을 즐기는 절묘한 표현 미학이 담긴 정취의 시를 담아내었다. 은거의 삶 중심에 낙동강을 중심으로 하여 형성된 퇴계 학파의 연원과 학문 정신을 추모하며 그 정신을 이어가길 다짐이 내재되었다. 이러한 이념 지향은 「춘양구곡」에 반영되어 있다.
셋째, ‘자연동화의 흥취’ 미학에 담긴 시를 보았다. 경암은 산수 자연에서 심성을 도야하며 자연과 동화된 즐거움을 향유하였다. 자연과 동화된 상태의 자유와 희열을 담아내었다. 이는 자연과의 일체감을 형성한 자연 동화의 상태에서 가능했다고 믿었으며 실제 경암은 이를 체현했다. 넷째, ‘선유의 전통과 「춘양구곡」 창작 배경’을 검토했다. 경암의 산수자연관이나 향토 산수 애호 정신은 퇴계의 산수자연관을 계승한 것이다. 특히 퇴계의 「도산구곡」 창작 전통을 이어 ‘춘양구곡’을 설정하고 경영한 것은 퇴계의 정신 지향을 반영한 실증이다. 경암의 「춘양구곡」 창작 동인은 배를 타고 노니는 선유의 전통에서 비롯되었다. 경암은 운곡천에 춘양구곡을 처음 설정하고 경영하였다. 춘양구곡마다 덕망이 높은 학자들이 은거하며 강학 활동과 제자 양성에 주력했던 유풍이 있다. 이러한 역사 배경과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한 춘양은 성리학 전개와 통합의 신성한 공간으로 설정될 요인을 충분히 갖추었다.
다섯째, ‘「춘양구곡」의 성리 미학’을 검토했다. ‘서시’에서 굽이마다 덕이 높은 선비들이 깃들어 살면서 학문에 열중하였던 유현들의 자취가 남아 있으며 대대로 그 명성이 전해져 오는 것을 체감했다고 서술했다. 경암은 서두에서 구곡마다 전해져 오는 ‘춘양 선비의 절의와 학문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것에 초점이 있다’고 천명하였다. 그 고유한 전통과 정신적 유산을 이어 성리학 전통이 계승되는 신성한 공간으로 조성하기 위함이라고 전제하였다. ‘1곡(어은)’에서 어은정을 짓고 강학활동을 하던 눌은을 떠올리며 추모 서정과 학문을 사모하는 내심을 담았다. ‘2곡(사미정)’에서 강직한 선비 조덕린의 정신을 추모하며 회고하였다. 그의 정신이 후대에 영속되기를 염원했다. ‘3곡(어풍대)’에서 풍대 홍범석이 어풍정을 건립해 학업을 정진하며 후학 배양에 힘쓰던 자취를 추모하며 풍대의 그러한 정신이 지속되길 다짐하였다.
‘4곡(연지)’에서 석암이 비치는 연지에서 자연의 이치를 직접 목격하고 이를 배우며 깨닫고 즐기는 공간으로 삼고자 했다. 인욕이 제거되고 천리가 유행되는 가운데 진락을 누리는 은자를 염원했다. ‘5곡(창애정)’에서 은거하며 학문에 정진하고 후진을 양성한 창애 이중광을 추모하며 그의 유학 정신이 변하지 않게 되기 염원하였다. ‘6곡(쌍계)’에서는 쌍호가 물굽이를 두르고 있고 삼척봉이 솟아 있는 굽이를 바라보고 상적벽해를 생각하며 관조의 자세를 취했다. 억겁의 세월이 원래 그런 것이라고 하며 독산 위에서 쌍호정 주변을 굽어보는 경암은 사물이 변하는 가운데 그 안에 내재한 한가로움을 포착하며 관조하였다. ‘7곡(서담)’에서는 서당은 이미 없어지고 그 터만 남아있는 곳에서 그 옛날 서당에서 학생들이 공부하던 모습을 회상했다. 연못 주변의 경관을 보면서 탈속의 고고한 경지를 누리는 것 같다고 했다. 학문 연원 추모와 계승 의지를 담았다. ‘8곡(한수정)’에서는 충재와 권래의 충정과 기상이 청아한 가을 달빛으로 치환되어 연못을 비춘다고 하면서 가을 달에 투영된 충재와 권래의 정신 지향을 회상하며 추모 서정을 표현하였다.
‘9곡(도연서원)’에서는 도연서원이 인재를 기르던 역할을 수행했고 도연은 맑은 물을 계속해서 운곡천에 공급함을 유추하였다. 성리학 정신이 집중된 도연서원의 성리학적 기맥이 운곡천을 형성하여 춘양 전역을 골고루 적시고 성리학 전통이 운곡천처럼 흘러 성리 문화가 충만한 춘양을 만들고 싶은 소망을 담았다. 그러한 염원이 「춘양구곡」을 통해 시문학으로 형상되었다.경암은 당대 퇴계 계술 문학 운동이었던 도산구곡창작 정신을 계승해 춘양구곡을 설정하고 경영하며 춘양구곡을창작하였다. 도연에서 흘러내린 맑은 물이 춘양을 맑은 고을로 만들었던 것처럼 성리학 문화가 꽃피는 춘양을 만들고 싶었다. 그러한 염원이 춘양구곡에 집약되었다.
결국 경암의 산수 자연 시문학 유산은 선조 퇴계의 산수 자연 심미 의식 계승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퇴계의 산수 자연관을 승계하고 춘양에 대한 애정 의식을 담아낸 산수 자연 미의식 표현하엿다. 경암의 시문학 유산은 ‘정심의 성리 철학 이념’과 ‘산수 자연 미학’이 융합된 ‘정심 지향의 산수 문학’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안동문화] 25집
[참고 문헌]
[退溪集]
[敬菴集]
[懶隱集]
[杜陵集]
[後溪集]
[玉川集]
이원걸. [매화나무 가지에 둥근 달이 오르네]. 도서출판 파미르. 2006.
이원걸. [김종직의 풍교 시문학 연구]. 도서출판 박이정. 2004.
이원걸. 「懶隱 李東標의 生涯와 詩」. 漢文學報 29輯. 우리한문학회. 2013.
이원걸. 「후계 이이순의 ‘도산구곡’ 창작 배경」. 영남문헌연구 창간호. 영남문헌연구원. 2013.
이원걸. 「後溪 李頤淳의 生涯와 思想」. 國學硏究 23輯. 한국국학진흥원. 2013.
이원걸. 「난은 이동표의 삶과 시문학」. 봉화문화 제21집. 봉화문화원. 2013.
이원걸. 「충재 권벌의 생애와 시문학 정신」. 봉화문화 제22집. 봉화문화원. 2014.
이원걸. 「두릉 이제겸의 생애와 시문학 정신」. 봉화문화 23집. 봉화문화원. 2015.
이원걸. 「수서 박선장의 생애와 시문학 정신」. 봉화문화 24집. 봉화문화원. 2016.
이원걸. 「매헌 금보의 생애와 시문학」. 봉화문화 25집. 봉화문화원.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