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금여석(見金如石)-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재물에 지나친 욕심을 버려라) 이상호(소소감리더십연구소 소장) ==================================================================
견금여석(見金如石) 見(볼 견), ⾦(소김, 돈, 재물), 如(같을 여, 같다), 石(돌 석) 예로부터 청렴은 관리의 기본 덕목으로 여겨 왔다. 이유는 청렴한 관리가 되는 것이 너무나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관리가 청렴하려면 황금(돈) 보기를 돌덩이처럼 하라고 하였다. 이 말은 고려말 충신이었던 최영 장군의 일화를 소개한 용재총화에서 유래하였다. ==================================================================
1. 아무리 돈이 지배하는 세상이라지만 어쩌면 인류 역사를 총체적으로 볼 때 돈(재물)은 늘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다. 고대로부터 재물은 권력과 함께 사람을 지배하고 사람 위에 군림하는 도구였다. 그것은 지금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예외는 아닌 듯하다. 그러기에 많은 이들이 권력을 가지면 재물을 모으기에 바쁘다. 그래서일까? 예로부터 훌륭한 관리가 되려면 재물을 함부로 모아서는 안 되며 정치는 재물을 고르게 분배하여 국민의 삶이 균형 있게 유지되고 삶의 위화감이 조장되지 않도록 애쓰는 것을 첫 번째 덕목(德目)으로 여겨 오기도 했다. 재물은 인간의 삶을 지탱하고 생존을 이어가게 하는 기본요건이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재물을 특정 계층, 특정 집단의 전유물로 여겨 왔다. 그 특정 계층과 특정 집단은 신분과 권력을 이용하여 많은 재물(땅 포함)을 소유하면서 사람들을 고용하고 부려 왔다. 사람들은 생존을 위하여 그들의 휘하에 들어가 그들을 위해 충성하면서 삶을 이어왔다. 전국 7웅의 4군자(君子) 중의 하나로 알려진 제나라 맹상군이 3천여 명의 식객을 거느릴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을 먹여 살릴 만한 막대한 땅과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재물과 권력의 상관관계는 오늘날도 예외는 아니다. 현대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신분제가 폐지되고 모든 사람이 동등한 인권과 지위를 누리고 사는 민주주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우리나라도 그렇다. 그런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와 한 가족을 이루고 지내면서 공존한다. 그래서 신분이 폐지되고 모든 인간이 존엄하다고 하나 아직도 권력과 자본에 의해 인간은 다르게 대접하고 대접받는 세상이다. 과거가 철저한 신분에 의해 차별을 받았다면 지금은 자본에 의해 차별화되는 그런 사회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현대는 가히 자본 만능의 시대라 할 수 있다. 자본 만능 시대의 인간은 돈에 의해 지배받고 돈에 의해 대접받는 경우가 많다. 모든 측면에서 돈이 지배하는 세상은 누가 뭐라 해도 천박한 자본주의 시대다. 그러나 우린 어찌할 수 없는 사회구조적 모순 속에 살아간다. 오늘날은 상당한 영역이 돈에 의해 평가되기에 아무리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라 하더라도 돈이 없으면 존재 가치를 상실하게 되는 시대인 듯하다. 그래도 옛날에는 가난한 현자(賢者)를 존경할 줄 알았던 시대였다. 그러나 오늘날은 어떤가 가난한 현자(賢者)를 존경하는 일은 찾기 어렵다. 그리고 현자에 대한 존경 자체도 사라진 시대인 듯하다. 특히 정치권에서 돈은 그 위력을 엄청나게 발휘한다. 누구나 참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민주주의 시대라지만 돈이 없으면 참정권을 행사할 수 없는 것이 오늘의 정치 풍토다. 이런 구조를 보면 옛날과 큰 차이가 없거나 옛날만도 못하기도 한 것 같다. 그래도 과거에는 가난한 선비가 과거에 합격하여 현명한 정치를 하면 존경하기라도 했지만, 오늘날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어쨌든 오늘날은 정치에서 특히 옛날 이상으로 돈의 위력이 크다. 그러기에 돈은 정치를 뒷받침하고 뒤흔드는 마녀와 같다. 따라서 모든 권력을 가진 자들은 돈에 매료되고 돈 앞에서는 정의도 팽개치는 일들이 왕왕 자행되고 있다. 지금 한국의 정치 현실이 그런 것 같다. 돈이 지배하는 것은 정치만 아니다. 아이들의 학습에도 돈이 지배한다. 돈이 없는 아이들은 공부하기도 어려운 세상이다. 많은 아이가 학원으로 몰리고 학원비를 못 내는 아이는 학교 수업에서 뒤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 천박한 자본주의 시대를 사는 우리를 옥죄는 것은 신분보다 더한 돈이라는 현실을 무시할 수 없는 현실에서 어쩌면 돈에 목숨과 삶을 거는 사람들의 마음도 이해할만하다. 그러니 나라를 이끈다는 지도층 인사들이 돈에 얽혀 구설에 오르지 않는 자들이 많지 않은 현실을 어떻게 하랴. 이런 현실에서 지금 견금여석(見金如石-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이란 말을 되새기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인듯하다. 그러나 우린 지금 천박한 자본 만능의 시대에 민주주의가 부패하고 있는 현실에 서 있다. 군주주의 시대와 달리 국민이 지도자를 선택하고 국민이 정치를 지탱하는 시대에 서 있다. 그런 지금 부정부패와 각종 비리 의혹으로 얼룩진 정치인들과 지도자를 보면서 우리 국민은 올바른 민주주의를 성숙시키고 건강한 자본주의를 성장시키기 위해서 어떤 사람을 지도자로 선택하여야 하느냐의 문제에 직면해 있다. 금전적 비리와 의혹에 연류된 자들을 정치 지도자에서 퇴출하는 것도 국민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래야 현대 정치는 천박한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지 않고 올곧은 길로 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린 지금이 아무리 돈이 지배하는 세상이라 시대에 맞지 않는 말이라 하지만, 특히 정치인들은 견금여석(見金如石-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2. 지도자들이 가슴에 새겨야 할 견금여석(見金如石) 견금여석(見金如石)은 앞에서도 말했지만,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말이다. 이는 나라를 다스리는 관리 특히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재물에 대한 욕심을 지나치게 가지지 말 것 즉 지도자가 재물에 대한 절제의 미덕을 가질 것을 강조한 말이다. 이 말은 용재총화(慵齋叢話)의 최영 장군의 일화에서 유래 되었다. 용재총화는 조선 전기 학자 성현이 고려로부터 조선 성종에 이르기까지의 민간 풍속·문물 제도·문화·역사·지리 등 문화 전반을 다룬 잡록이다. 이 책은 총 10권으로 1525년(중종 20) 경주에서 간행되어 3권 3책의 필사본으로 전해 왔다. 1909년 조선고서간행회(朝鮮古書刊行會)에서 간행한 『대동야승(大東野乘)』에 채록되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성현은 예문관 · 성균관의 최고 관직을 역임한 학자 · 관료로서 폭넓은 학식과 관직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이 책을 정리하였다. 고려의 권문세가에서 태어난 최영 장군이 어렸을 때 그의 아버지는 항상 그에게 늘 마음에 경계하여야 할 것을 일러주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견금여석(見金如石-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이었다. 최영은 아버지가 이 말을 얼마나 강조하였는지 항상 이 네 자를 허리띠에 새겨 가슴에 새기며 죽을 때까지 가슴에 지니고(갑옷에 넣고) 잃지 않았다. 비록 최영은 국정을 도맡아 하면서 이웃 나라까지 그 권세를 떨쳤지만 일호(一毫-터럭 하나)라도 남의 것을 탐내지 않았고 집안의 가진 것만 만족하면서 살았다(崔鐵城瑩少年 其夫常戒之曰 見金如石 瑩常以四字書諸紳終身服膺而勿失 雖秉國政威行中外而一毫不取於人家才足食而已) 최영 장군은 고려말 충신이었다. 당시 고려는 원나라의 속국으로서 원나라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과 취약한 고려왕권 그리고 권세가들의 횡포 속에 혼란 그대로였다. 그런 시기에 최영은 국가 기반을 안정시키고 원나라의 속박에서 벗어나는데 기여한 공로가 컸던 인물이다. 최영의 본관은 동주(東州)이며 시호는 무민(武愍)이다. 아버지 최원직과 어머니 봉산 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문화 류씨에게 장가들었는데 그 사이에서 장남 최담, 차남 최민, 직녀 최민을 얻었다. 그리고 첩인 씨부인에게서 얻은 딸이 우왕의 아내 영빈 최씨가 되었다. 그래서 최영은 고려가 망하는 순간까지 고려 왕실과는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최영은 늦게 벼슬길에 올랐으며 30대 중반에서야 중앙 정계에 발을 들여놓았던 대기만성(大器晩成)의 인물이었다. 고려말은 왜구가 수차례 쳐들어 와 행패를 부렸다. 이때 양광도도순문사(楊廣道都巡問使) 휘하에서 왜구 토벌에 공을 세워 우달치(迂達赤-司門人)가 되었다. 그리고 공민왕이 즉위하면서 공민왕의 신임하에 승승장구하게 된다. 1352년(공민왕 1년)에 조일신(조일신(趙日新, ?~1352)의 난을 평정하고 호군(護軍-고려 말기의 장군(將軍)의 고친 이름)의 지위에 올랐다. 1354년 원나라에서 한족인 ‘장사성(張士誠)의 난’ 때 원나라의 요청으로 대호군(大護軍)으로 출정하여 난을 평정하고 귀국하여 서북면병마부사(西北面兵馬副使)가 되었다. 이때 원나라에 복속되었던 압록강 서쪽의 8참(站-마을, 부락)을 수복했다. 최영이 원나라 ‘장사성의 난’을 평정하면서 원나라의 실상을 정확하게 파악했다. 당시 원나라는 쇠퇴와 부패, 혼란 그대로였으며 곳곳에서 반란의 조짐이 었었다. 이점은 공민왕이 강릉대군으로 있을 때 파악한 원나라의 상황과 일치하였다. 둘은 반원 정책에 뜻이 통하였다. 그러나 고려나 원나라나 중앙정치가 엉망이 된 상태에서 우환이 겹치기는 마찬가지였다. 1358년 양광도 전라도 일대에 왜적들이 대거침입해 왔다. 이때 최영은 양광도 전라도왜적체복사(楊廣全羅道倭賊體覆使)가 되어 오예포(吳乂浦)에 침입한 왜선 400여 척을 격파했다. 1359년 4만의 홍건적이 난을 일으켜 고려로 진격해 와 서경이 함락되고 개경까지 진격해 왔다. 이때 최영은 이방실 등과 출정하여 개경까지 진입한 홍건적을 물리쳤다. 그러나 홍건적은 이에 굴하지 않고 1362년 10만 군사를 이끌고 개경까지 침입해 와 공민왕이 위기에 처했다. 최영은 공민왕에게 개경에 머물면서 개경을 지킬 것을 강력히 주청하였으나 위기를 느낀 공민왕은 경북 안동까지 피난하면서 개경이 함락되었다. 이에 최영은 안우, 이방실 등과 맹활약하여 홍건적을 물리치고 개경을 수복하였으며, 공민왕이 개경으로 돌아오게 했다. 나라는 안정되는가 했더니 곧바로 ‘흥황사의 변(개경 인근의 흥황사에서 김용이 일으킨 반란)’이 일어났다. 최영은 이들을 진압하여 일등 공신이 되어 초상이 공신각에 걸리게 되었다. 1363년 왜구는 213척의 배로 또 쳐들어왔으며 1364년 원나라 덕흥군과 최유가 기황후의 후원을 받고 1만 명에 달하는 군대를 이끌고 고려로 쳐들어왔다. 이때 최영은 이성계와 원나라 군대를 전멸시키고 왜구를 격퇴하는 빛나는 공을 세운다. 이때 이성계의 위상은 날로 높아져 갔다. 반면에 공민왕의 최측근이 된 신돈의 모함으로 최영은 좌천당해 계림군으로 부임했으나 왕을 원망하지 않고 묵묵히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최영을 제거하고자 하는 신돈의 모함은 계속되었고 신돈의 일파인 이득림 등의 국문으로 삭탈관직당하고 가산을 몰수당한 채 6년간 귀양살이를 간다. 신돈은 공민왕의 측근에서 국정농단이 극에 달했고 국정은 혼란했으며 백성의 삶은 도탄에 빠졌다. 6년 후(1371년) 신돈이 처형되자 최영은 찬성사로 돌아와 전함을 만들며 수군 양성에 주력하였다. 최영의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2,000여 척의 함선 건조 계획을 주장하였으나 피폐해진 백성들의 반대로 철회되었지만 수군 양성에 주력하였다. 묵호의 난이 일어나 최영이 탐라 정벌 중일 때 공민왕이 흥륜의 난에 의해 시해되었다(이때 공민왕의 나이 44세). 1376년(우왕 2년) 왜구가 다시 삼남 지방을 휩쓸고(원수 박원계가 참패) 부여까지 진격하자 최영은 출정하여 부여 홍산 전투에서 적을 대파하고 철원부원군(최영의 후처에서 태어난 딸이 우왕의 비가 됨-영빈 최씨)에 봉해졌다. 그리고 1377년 서강(西江)에, 1378년 승천부(昇天府)에 침입한 왜구를 이성계와 함께 대파하였다. 그러나 들끓는 왜구로 인해 우왕은 서경 천도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최영은 1380년 해도도통사(海道都統使)가 되어 이 계획을 막았으며 1381년 영삼사사(領三司事)를 지내다가 잠시 사퇴하고 은거했다. 신진세력이 득세하자 다시 문하시중(門下侍中)에 등용되었다. 그러나 고려는 그야말로 내우외환(內憂外患)의 위기를 겪고 있었다. 안으로는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져 있었고 권문세가들의 횡포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으며 신진사대부를 중심으로 한 신진세력의 성장은 고려의 개혁을 두고 구 세력과 대립하게 되었다. 이때 최영 이상으로 왜구 격퇴와 북방 평정에 공을 세운 이성계의 위상을 날이 갈수록 커졌으며 최영과 갈등을 빚게 되었다. 이때 중원에 새로 세워진 명나라가 철령위를 설치하고 북변 일대인 요동(遼東-랴오둥)을 귀속시키려 하자 최영의 주장으로 요동정벌 계획이 발표되고 최영은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가 되어 이성계에 명하여 위화도 정벌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각종 악조건에서 이성계로 하여금 위화도 정벌을 강행한 것은 이성계의 제거와 그 세력의 약화를 노린 측면도 강했다. 위화도에 도착한 이성계는 우기의 악조건에서 고투하다가 결국 회군하여 정권을 장악하게 되고 최영은 체포되어 고봉(高峯-고양)에 유배되었다가 개경에서 참형당한다. 청렴한 관리로서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최영의 생에는 막을 내리고 고려는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는 혼란과 부패 속에 망하고 이성계의 조선이 열린다. 3. 청렴한 정치 지도자의 세상을 꿈꾸며 앞에서 말했듯이 고려말은 내우외환(內憂外患)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권문세가들은 권력을 이용하여 그 횡포가 하늘을 찔렀으며, 왕권은 약했고 정치권은 분열과 기득권 다툼에 여념이 없었다. 개혁과 수구의 갈등은 첨예하였다. 그야말로 지도층의 부패와 분열 속에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졌다.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며 왕권은 풍전등화였다. 거기다가 남으로는 왜구가 들끓었으며 북으로는 원명 교체기의 환란 속에 홍건적이 득세를 부리고 있었다. 고려의 반원 정책 속에 기득권을 누리고자 하던 친원 세력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정치 집단 대부분의 부정과 부패였다. 당시 고려 사회는 수술 불능의 환자가 되었다. 지도층의 부정부패와 정치적 분열과 권력 다툼이 극에 달하면 국민의 삶은 도탄에 빠지고 나라는 망국의 길을 겪게 된다. 그것은 동서고금을 두고 만고불변의 진리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가 처한 현실도 상황과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이런 내우외환(內憂外患)의 위기와 다를 바 없다. 안으로 정치 지도층들은 끝없는 정쟁과 기득권 싸움으로 국민까지 혼란에 빠뜨리고 있으며 온갖 의혹으로 국민이 분열되고 있다. 이에 국민 상당수가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패를 이루어 서로 비난하고 헐뜯는다. 그리고 일부 국민은 그것이 마치 정치적으로 정의를 바로 세우고 정치 사회적으로 자기 위상을 정립하는 일이란 착각에 빠져 있다. 그러나 ‘태극기 부대’고 ‘개딸’이고 모두 대한민국 정치를 왜곡시키고 분열의 길을 조장하는 일임은 분명하다. 중요한 것은 국민의 냉철하고 합리적인 사고와 선택이다. 팬덤화되어 분열된 국민은 자기들이 지지하는 정치 지도자라면 부정부패 의혹에 연류된 사람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검찰의 수사를 탄압이라 부르짖으며 규탄하고 그들을 옹호한다. 이것은 가치가 편향된 극단적 현상이다. 올곧은 정의를 추구하는 정상적인 국민이라면 이런 일에 동조하지 말아야 하며 검찰의 엄정한 수사를 촉구하여야 한다. 그런데 지금의 한국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나라가 혼란에 빠지고 분열될 때 나타나는 망국의 징조다. 지금 한국의 현실이 그런 것 같다. 50억 클럽 사건, 대장동 사건, 당 대표 경선 돈 봉투 사건, 정치인들의 각종 비리와 부정부패 의혹 등 온갖 일들이 투명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으며 당사자들은 오히려 정치 탄압을 외치며 특권 뒤에 숨는다. 검찰 수사도 난항이다. 정치적으로 여야가 화합하지 못하고 정부는 정부대로 야당은 야당대로, 서로 비방전에 열을 올린다. 거기다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는 날로 사나워지고 있다. 북핵 위협은 날이 갈수록 강해지고 한일 외교에는 복원되는가 싶더니 후쿠시마 오염수 관련 일 등으로 국론은 극도로 분열되고 있다. 정부 여당은 대국민 설득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특히 야당에 대한 정치적 설득의 힘을 전혀 발휘하지 못하고 노력도 하지 않는다. 모두 국민을 위한다는 슬로건 뒤에 권력적 야심만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대한민국의 정치 지도층의 상당수는 국민을 위한다는 가면을 쓴 권력의 야만에 취해 있다. 무역적자와 실업 위기 일자리 부족과 내부적으로 각종 분규 등도 해결될 기미가 없다. 언론 보도에 의하면 정의를 부르짖던 노조와 시민단체도 돈 앞에서 투명하지 못하고 온갖 비리 의혹에 빠져 있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위기다. 모두 지도층의 무능과 부패 탓이다. 지도층의 무능과 부패는 청렴 의식의 부재에서 출현한다.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牧民心書)』의 <율기 6조(律己 6條)>에서 관리(정치 지도자, 관료)로서 가져야 할 6가지 덕목을 강조하였다. 그 첫째는 바른 몸가짐을 갖는 일이다(飭躬). ‘일상생활을 절도있게 하고, 몸가짐을 단정히 하며, 백성을 대할 때 정중하게 대하는 것이 수령의 도리’라고 하였다. 특히 ‘술을 끊고 여색을 멀리하며, 노래와 음악을 물리쳐서 공존하고 단정하고 위엄있기를 큰 제사 받들 듯하고 감히 놀고 즐김으로써 거칠고 방탕해져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를 지키기 위해 중요한 것이 사욕(私慾)을 끊어 버리는 일이라 하였다. 그런데 지금도 성추행 의혹 등 방탕한 일로 무리를 일으킨 국회의원 등이 버젓이 활동하고 있으며 차기를 노리고 그들을 지지하는 국민도 있다. 둘째는 청렴한 마음이다(淸心). 다산은 청렴은 ‘수령의 본래의 직무로 모든 선의 원천이며 모든 덕의 근본이다. 따라서 청렴하지 않고서 수령 노릇을 잘할 수 있는 자는 없다’고 하였다. 다산은 청렴에는 세 가지 등급이 있다고 했다. 첫째는 봉급 외에는 그 어떤 것도 갖지 않으며 관직을 그만두고 돌아갈 때는 말 한 필로 가는 것이 최고의 청렴이다. 둘째는 봉급 외에 명분이 바른 것은 가지고 바르지 않은 것은 갖지 않는 것이며 셋째는 최하위로 규례가 된 것이라면, 명분이 바르지 않더라도 먹지만 그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먹지 않는 것이라 하였다. 특히 뇌물은 언제나 거절하여야 한다. 뇌물은 누구나 비밀스럽게 주고 받겠지만, 한밤중에 주고받은 것도 아침이면 드러나듯이 언젠가는 세상이 밝혀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는 제가(齊家)로 가정을 제대로 다스리는 일인데 개인의 행실이 제대로 서지 못하고 가족 간, 형제간의 불화가 만천하에 드러난 정치인을 용인하고 두둔하는 국민, 자녀의 비행, 이혼 등으로 제가조차 하지 못하는 자들이 국가를 다스리겠다고 하여도 용인되는 사회니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물론 자녀의 문제를 마음대로 할 수는 없지만, 정치인에게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는 만고불변의 진리다. 국민이 특히 이점을 새겨야 한다. 넷째는 청탁(請託)을 물리치는 일이다(屛客). ‘관부(官府) 안은 마땅히 엄숙하고 맑아야 하며, 친척이나 친구의 사사로운 청탁을 멀리하여야 하며, 윗사람의 청탁을 멀리하고 사사로이 관부(官府)에 출입하는 자를 경계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 많은 정치인과 고위직 들이 청탁에 연류되어 있고 특히 선관위원들의 자녀특채 논란은 점입가경이다. 그리고 김만배는 이발의 명목이지만 대법원에 김순일을 만나러 수차례 출입하였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다섯째는 씀씀이를 절약(節用)하는 일이다. 이에 대하여 다산은 이렇게 말한다. ‘수령 노릇을 잘하려는 자는 반드시 자애로워야 하고 자애로워지는 자는 반드시 청렴해야 하고 청렴하려는 자는 반드시 검약해야 한다. 씀씀이를 절약하는 일은 수령의 으뜸가는 직무다.’ 절용은 국가의 예산을 절약하는 일이다. 인심 쓰듯 함부로 나눠 줘서도 안 되고, 공사를 마구 하여서도 안 된다. 모든 국가의 예산은 백성의 피와 땀이다. 이를 절약하여 사용하는 것은 관리와 정치인들의 기본 도리이며 백성 사랑의 시작이요 끝이다. 여섯째 마지막으로 베풀기를 좋아해야 한다(樂施)고 하였다. 다산은 ‘절약만 하고 쓰지 않으면 친척이 멀어지듯이 정치를 절약만 하고 쓰지 않으면 백성이 어려워진다. 백성에게 기꺼이 베푸는 것은 덕을 심는 근본이다. 가난한 백성은 힘이 닿는 대로 도와야 하며 예산을 절약하여 백성에게 돌아가게 하여야 하고, 권문세가들을 후하게 섬겨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우리 정치인들은 과연 균형 있게 정말 필요한 국민에게 제대로 베푸는가? 이러한 다산의 말을 통해 보면 청렴이란 단순히 부당한 재물을 멀리하는 것을 넘어 선다. 관료와 정치 지도자들이 몸과 마음에 새겨야 할 6가지 덕목 즉 칙궁(飭躬), 청심(淸心), 제가(齊家), 병객(屛客), 절약(節用), 낙시((樂施) 은 한 덩어리로 작용하는 청렴한 관리(지도자)의 덕목이다. 우린 지금의 정치 지도자들에게 이것을 요구하여야 한다. 이를 위하여 적어도 그들의 특권을 내려놓게 하는 일도 중요하리라 본다. 내년 총선에선 꼭 청렴한 지도자를 뽑는데 국민이 함께 깨어나자. 그래야 청렴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 위가 맑아야 아래도 맑을 수 있다. 지도층이 청렴해야 나라의 질서가 바로 서고 국민이 화합한다. 최영 장군의 좌우명 견금여석(見金如石)을 살펴보며 오늘날 정치 지도자들이 청렴해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청렴한 대한민국을 꿈꾸어 본다. 이를 위해 선거에서 청렴한 지도자를 뽑는 일에 국민이 총력을 기울였으면 한다. 내년 총선이 다가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