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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사람과 문제 앞에서 하나님 관계법>의 줄거리 :
요셉은 애굽 나라 바로의 아버지가 되고 바로 왕가의 주인이 되며 거대한 왕국 애굽의 통치자가 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비현실적인 이야기로 들립니다. 그러나 실제로 요셉이 이렇게 된 과정은 너무 간단합니다. 요셉은 하나님 앞에서 바로를 상대한 것이 아니라, 바로 앞에서 하나님을 상대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문제 앞에서 하나님 관계하는 법을 알아봅니다.
사람과 문제 앞에서 하나님 관계법
(창세기 45:1~15)
1.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리니 그 때에 그와 함께 한 다른 사람이 없었더라
2. 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3.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대답하지 못하더라
4.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6.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8절 이후에 요셉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형들에게 아버지를 모셔 올 것을 부탁합니다. 그리고 요셉은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울고 다른 형제들을 끌어안고 우는 감격스러운 장면이 묘사됩니다. 2절을 보면 요셉의 우는 소리가 바로의 왕궁까지 들렸습니다. 이것은 요셉의 총리 관저와 바로의 왕궁이 우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웠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바로에게 달려가서 총리 요셉이 형들을 만나서 울고 있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본문을 중심으로 ‘사람과 문제 앞에서 하나님 관계법’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창세기 17장 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라고 말씀하신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할례 언약을 맺기 전에 이와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나 문제나 사건을 관계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말은 틀린 말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 앞에서 사람과 문제와 사건과 과제 등을 관계하려다 보면 관점이 바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앞에서 하나님을 관계하는 것이 됩니다. 좀 더 쉽게 말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을 만날 때 사람도 놓치지 않고 하나님도 놓치지 않으려면 내 마음속에서 관계를 위하여 겨냥하는 대상은 누구일까요?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앞에서 하나님을 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도 놓치지 않고 사람도 놓치지 않습니다.
라틴어 코람데오(Coram Deo)는 ‘하나님 앞에서’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관계한다고 생각하면 거의 하나님을 놓치고 맙니다. 사람은 몸으로 마주하기에 놓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기에 어느덧 마음에서 놓치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음에서 놓치기 쉬운 하나님을 의식적으로 겨냥하여 관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놓치지 않을 때 사람을 관계하는 법도 하나님이 깨우치게 해주십니다. 이것이 사람과의 관계에서 사람과 하나님을 다 얻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올바르게 관계함으로써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사람과 문제와 과제와 사건 앞에서 하나님을 의도적으로 겨냥하여 제대로 관계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보여줍니다. 본문은 참 극적인 장면입니다. 요셉은 청지기를 시켜서 베냐민의 곡식 자루에 은잔을 숨김으로 누명을 씌웁니다. 이에 유다는 베냐민이 돌아가지 못한다면 아버지가 죽을 것임을 호소하며 자신을 노예로 삼아달라 자처합니다. 요셉은 이러한 유다의 모습을 보고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참지 못해 모든 신하들을 물리친 후에 자기가 형들이 애굽에 판 요셉임을 밝힙니다.
한편 이러한 사건 중에 요셉의 아름다운 신앙이 드러납니다. 5절을 보면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요셉이 자기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신앙적으로 합리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그렇게 계획하셨습니다. 야곱의 식솔들을 애굽에 들어가게 하시기에 앞서 요셉을 보내시고자 형들의 악한 시기심과 질투심을 이용하셨습니다. 요셉은 결과적으로 모든 것이 다 좋게 되었기에 하나님의 뜻으로 합리화하며 내가 다 용서하겠다는 심정으로 이런 말을 했던 것이 아닙니다.
상황 자체를 보면 요셉은 형들에게 감사해야 할 처지인지도 모릅니다. ‘형님들! 제가 아버지의 편애를 받아서 채색옷을 입고 살 때 저를 시기 질투해서 죽이려고 하셨던 걸 기억합니다. 그래도 죽이지는 않고 애굽에 노예로 팔아서 정말 고맙습니다. 형님들이 저를 팔지 않았다면 제가 어떻게 바로의 아버지가 되고 바로 집안의 주인이 되며 애굽의 통치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이제부터는 형님들이 저를 노예로 팔아넘긴 은혜를 잊지 않고 톡톡히 갚겠습니다.’라고 할만한 상황이기도 합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계획이 차질 없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원수가 무슨 해악질을 하든 그에 대해 불만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우리 또한 원수에 대해서 원수님이라고 불러가며 ‘당신이 나에게 해악질을 한 것이 너무나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지경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나를 향해 갖고 계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그 계획에서 어떤 원수의 해악질도 나의 삶의 여정을 조금도 벗어나게 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원수의 해악질은 하나님이 나를 향해 갖고 계신 계획이 이루어지기 위해 동원되는 수단이 됩니다. 결과적으로 원수의 해악질이 없었더라면 큰일 날 뻔한 인생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이끌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형들은 요셉을 노예로 파는 참혹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되돌아보자면 형들이 이 참혹한 일을 벌이지 않았다면 요셉은 총리가 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8절을 보면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형들이 요셉을 노예로 판 참혹한 사건을 통해 초강대국 애굽의 일인자인 바로의 아버지가 되게 했고, 형들의 해악질을 계기로 삼아 왕가의 주인이자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만드셨습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계획하신 뜻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어떻게 하든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마음의 조건을 갖출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어떤 원수가 어떤 해악질을 하더라도 ‘아이고! 원수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요셉을 바로의 아버지가 되게 하셨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바로가 자기 신상에 관한 일이 생기면 모든 일마다 오직 요셉의 지시를 따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왕가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은 바로가 집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말과 행동을 해야 할 때 요셉의 지시를 기다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왕가의 실질적 주인은 요셉입니다. 또한 바로는 자기 신상에 관련된 영역이 얼마나 넓은지 거대한 애굽 온 땅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는 통치자로서 애굽 온 땅에서 일어난 일들을 처리해야 할 때마다 요셉의 지시를 기다렸습니다. 그렇기에 요셉은 결국 애굽 온 땅의 통치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너무나 비현실적인 이야기로 여겨집니다. 우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께는 너무나 간단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주권자로서 바로와 바로의 집안과 애굽 온 땅에 대해서도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칠 년 풍년과 칠 년 흉년입니다. 그런데 이 일을 실제로 땅에서 수행하실 때 절차나 대비책이나 해결책을 요셉에게만 알려주셨습니다. 애굽은 문명의 발상지였던 만큼 각 분야의 전문가가 있었고 점성가나 술사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가 통치하는 애굽에 대해 갖고 계신 계획을 그 어떤 전문가나 점성가나 술사들이 아닌 오직 요셉에게만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요셉은 애굽 온 땅의 통치자이자 왕가의 주인이며 바로의 아버지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이 어떠했기에 이렇게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뜻하신 바가 계곡물 흘러가듯 거침없이 콸콸 쏟아져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일까요? 또 요셉과 나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계획하시고 뜻하신 바가 콸콸 쏟아져 들어와서 지정의 언행에 담깁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뜻대로 생각하고, 감정을 느끼고, 의지가 움직이면서 말하고 행동할 수 있습니다. 바로와 바로의 집안과 애굽 온 땅에 대한 하나님이 주권자로서 갖고 계신 계획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주권자로서 갖고 계신 계획을 요셉에게만 콸콸 흘려보내셨고 요셉의 지정의 언행에 담기게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요셉은 바로의 아버지가 될 수밖에 없었고, 왕가의 주인이 될 수밖에 없었고, 애굽 온 땅의 통치자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생애는 어떨까요? 나에게는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계획과 뜻이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뜻 없이 태어난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문제는 내가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요셉처럼 콸콸 쏟아져 들어오지 못하는 상황에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요셉처럼 애굽 전역을 다스리는 통치자의 자리에 서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정주부로서 가정을 돌보는 일조차도 하나님께는 애굽을 통치하게 하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을 통치하게 하시는 것이나 애굽을 통치하게 하시는 것이나 하나님께는 덜 힘들거나 더 힘든 일이 아닙니다.
열 살짜리 아이의 행동이 나비효과를 일으켜서 남북이 통일되는 일이 일어난다면 엄청난 기적으로 여길 것입니다. 그에 비해 주부가 식사를 준비해서 가족이 즐거운 식사를 하는 일은 대수롭지 않습니다. 아르바이트생이 현장에서 사고 없이 일을 잘 하는 것은 평범한 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하나님께는 어려울 것도 쉬울 것도 없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대단한 일이 이루어져도 하나님께는 그까짓 일에 불과합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사소한 일로 여겨지는 일일지라도 하나님께는 꼭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일의 크기는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는 더 힘든 일도 없고 더 쉬운 일도 없고, 더 대단한 일도 없고 더 사소한 일도 없기 때문입니다. 필요해서 일어나게 하시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있어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요셉에게서처럼 이루어지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원수가 해악질을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원수에게 감사해야 할 정도의 결실들이 맺어지는 삶을 살고자 한다면 사람을 만날 때 태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만나려 하지 말고 만나는 사람 앞에서 하나님과 관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요셉이 바로와 처음 대면했을 때를 생각해 봅니다. 바로는 초강대국 애굽의 일인자였지만 요셉은 히브리 유랑민 족속의 아들로서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이미 바로와 바로의 집과 애굽의 온 땅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진행 중이었습니다. 바로는 하나님의 뜻에 의한 꿈을 꾸었지만 해석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만 꿈의 해석을 알려주셨습니다. 요셉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이 콸콸 들어올 수 있는 상태를 유지했던 것일까요? 어떻게 해서 요셉의 지정의 언행에 하나님의 뜻이 담길 수 있었을까요?
요셉은 바로 앞에서 하나님과 관계했습니다. 바로는 애굽에서 첫 번째 존재감을 가진 자입니다. 삼성의 직원들에게 이재용 회장의 존재감은 대단할 것입니다. 그러나 삼성이라고 해봐야 대한민국의 일개 기업일 뿐입니다. 지금 세계에서 대한민국이 차지하는 비중과 당시의 애굽이 차지하는 비중은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바로는 초강대국 애굽의 일인자였으니 그 존재감 또한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바로 앞에서 하나님과 관계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바로와 관계했던 것이 아닙니다. 바로의 존재감이 요셉의 마음을 뚫고 들어오려고 할 때 요셉은 ‘잠깐!’을 외치며 먼저 하나님을 관계합니다. 창조주요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존재감으로 바로의 존재감이 티끌이 되게 합니다.
우주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유일한 분입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을 믿는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존재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애굽이 거대한 나라이지만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 있음에 대한 존재감과 비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존재감이 태산이라면 바로의 존재감은 모래알 하나에 불과할 것입니다. 따라서 바로 앞에서 하나님을 관계한다는 것은 바로의 존재감이 티끌처럼 여겨질 정도로 하나님의 존재감을 크게 받아들임을 의미합니다. 요셉은 바로 그렇게 하나님의 존재감을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티끌 같은 존재인 바로를 향해 하나님이 갖고 계시는 계획과 뜻이 콸콸 흘러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에게 참 못돼 먹은 습관이 있습니다. 사람 앞에서 잘 보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하나님! 제가 바로 앞에서 잘 보이게 해주세요. 바로의 마음이 저를 호의적으로 대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다면 어떨까요? 요셉의 마음에서는 바로의 존재감이 태산처럼 느껴지는 상태입니다. 태산 같은 바로의 존재감 앞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하나님의 존재감은 전혀 느끼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문제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문제를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 앞에서 하나님을 관계해야만 합니다. ‘문제야! 잠깐만 기다려라. 나는 먼저 하나님과 관계해야겠다.’라는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문제를 맞닥뜨렸을 때 큰 존재감으로 마음을 뚫고 들어옵니다. 그 상태를 십자가에서 못 박아 죽여야만 합니다. 문제가 존재감을 크게 확장하여 내 안에 들어와 있는 상태에서 문제에 손대면 안 됩니다. 문제를 해결하려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려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 문제는 스스로 있는 유일한 분이신 하나님에 의해서 있게 된 것입니다. 있게 된 것을 있게 하신 하나님보다 먼저 관계하려고 할 수 없습니다. 애초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자라면 불신앙이고 죄와 저주에 빠진 무지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문제의 존재감에 압도되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광풍노도 속에 조각배를 집어삼킬 듯 한 상황을 생각해 봅니다. 조각배에 물이 넘쳐 들어오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속에서 잠이 드셨습니다. 광풍노도 속에서 깊은 잠을 주무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아름답고 굉장한 기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반면 같이 있던 제자들은 두려움에 압도되어 광란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깨어나신 예수님은 이들의 믿음이 없음을 질책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의 여호와임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몸으로 만나고 눈에 보이는 모든 대상들은 다 있게 된 것임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믿음이 없음이란 하나님이 스스로 있는 자이고 창조주이심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존재감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광풍노도가 대단한 일이지만 그래봤자 갈릴리 바다에서 일어나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셨다고 믿는 사람들이 광풍노도의 존재감을 태산같이 느끼는 동안 하나님의 존재감은 티끌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스스로 있는 자라고 백날 외워도 소용이 없습니다. 교리를 외워서 아는 것과 실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을 믿는 것은 별개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스스로 있는 유일한 분이시라는 사실 그대로를 믿으셨습니다. 그렇기에 광풍노도가 조각배를 삼킬 것 같은 상황에서 하나님의 존재감에 비해 광풍노도의 존재감은 티끌처럼 여겼습니다. 티끌 같은 존재감 때문에 마음이 불안해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깊이 주무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신이시지만 인간이십니다. 인간이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놀라운 기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셉이 보였던 태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요셉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판 형들을 관계하지 않았습니다. 형들에게 팔린 요셉은 형들에게 원수의 존재감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형들을 대하기 전에 ‘잠깐!’ 멈추고 하나님을 관계합니다. 하나님을 관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감이 내 안에서 가득 찰 때까지 씨름하였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감이 태산같이 커지면서 형들의 존재감을 티끌로 만들어 밀어버립니다. 그러자 형들에 대한 원망이나 원한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태산같이 커진 하나님의 존재감이 요셉의 마음을 채우고 있을 뿐입니다. 그 태산 같은 하나님으로부터 계획과 뜻이 요셉의 지정의 언행에 콸콸 쏟아져 들어와 담깁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계획과 뜻대로 생각하고 감정을 느끼며 의지하며 말과 행동을 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존재감이 지금 내가 몸으로 만나는 사람의 존재감보다 문제의 존재감보다 과제나 사건의 존재감보다 커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사람과 문제와 과제와 사건 앞에서 하나님을 관계하기만 하면 지정의 언행은 따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더라도 받아들여집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뜻대로 내 생각이 움직이고, 감정이 활성화되고, 의지가 작동하며, 말과 행동이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가 요셉과 같이 하나님을 관계해서 하나님의 존재감이 태산처럼 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요셉도 저도 여러분도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요셉의 마음이 오실 예수님 안에 들어있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 마음도 오신 예수님 안에 들어있지 않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이르신 과정이 역사적인 사건으로 일어났기에 뚜렷하게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이 과정을 우리처럼 알지 못했을지라도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의 의미 속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형들을 만날 때, 바로를 대할 때, 애굽 전역을 대할 때 하나님의 존재감이 커질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합니다. 이 죽음은 육체를 입은 나의 죽음입니다. 육체로 만나는 이 세상에서는 그 어떤 대상에 대해서도 존재감을 느끼지 않겠다는 것이 십자가 죽음의 의미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나는 육체를 입고 있는 ‘실제의 나’입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은 이제 이 지구 위에서는 육체로 만나는 그 어떤 대상에 대해서도 존재감을 느끼지 않겠다는 것이 세상에 대한 죽음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 들어갑니다.
이어서 부활의 의미는 지구에 있지 않은 새로운 대상에 대해 존재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죽었으니 지구 바깥으로 나간 것입니다. 이제 지구 바깥에 있는 대상에 대해 존재감을 느끼는 것이 부활의 의미입니다. 그 존재가 구체적으로 누구냐는 것을 승천이 알려줍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올라가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우리 마음이 예수님의 몸을 입고 따라 올라가면 이제 부활했기 때문에 지구에 있는 존재가 아니고 다른 세계에 있는 존재에 대해 존재감을 느껴야 합니다. 그 존재감의 대상은 예수님을 따라갔더니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하나님을 마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간 우리의 마음은 어쩔 수 없어서라도 하나님을 상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사람 앞에서, 문제 앞에서 이렇게 하나님을 관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돈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제 돈 문제의 존재감이 내 마음을 뚫고 들어오려 합니다. 이때 십자가에서 죽습니다. 절대로 반응해서는 안 됩니다. 돈 문제를 내가 해결하겠다고 하거나, 돈 문제를 끌어안은 채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거나,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면 안 됩니다. 이것은 돈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고, 돈 문제의 존재감에 쫓기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처럼 큰 하나님 모독은 달리 없습니다.
돈 문제가 생겼을 때 돈 문제의 존재감을 느끼는 나는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합니다. 돈 문제가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내가 부활하여 존재감을 느껴야 할 대상은 누구일까요? 예수님이 나를 하늘로 끌고 가서 하나님을 마주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을 관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하나님의 있음으로 가득 차게 해주세요. 하나님의 좋음에 대한 열망으로만 가득 차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존재감이 커지고 커져서 돈의 존재감이 티끌로 되게끔 만듭니다. 그리고 나면 돈 문제에 대해 하나님이 갖고 계신 계획과 뜻이 내 지정의 언행에 콸콸 쏟아져 들어옵니다.
중요한 것은 십자가에서 돈 문제에 대해 완전히 죽고 관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돈 문제에 대해 갖고 계신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내 지정의 언행 속으로 콸콸 들어와 담길 수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 내가 감정으로 움직이는 것, 내가 의지하는 것, 내가 말하는 것, 내가 행동하는 것을 통해서 돈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자녀에 대해서도, 배우자에 대해서도, 인간관계에 대해서도, 과제에 대해서도, 모든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과 관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 앞에서 하나님을 관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관계하는 방식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음으로써 내 앞에 마주하고 있는 대상에 대한 존재감을 죽입니다. 부활함으로써 새로운 세계에 있는 대상의 존재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예수님 따라 올라가 하늘에서 하나님을 직면함으로써 하나님의 존재감만을 내 속에서 기도와 간구로 키웁니다. 이때는 목숨 걸고 간구해도 됩니다. ‘하나님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며 주여 삼창을 외쳐도 좋습니다. 하나님을 마주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있는 힘을 다해서 강청해도 됩니다. ‘아버지의 존재감만으로 채우게 해주세요. 아버지의 좋음에 대한 열망만으로 가득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 문제의 존재감이 작아지면 작아질수록 하나님의 계획과 뜻은 내 지정의 언행에 막힘없이 담길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요셉의 삶이 내게서도 재현될 수 있는 길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몇 년을 살더라도 요셉처럼 살게 해주시옵소서. 사람을 만나고, 문제를 만나고, 사건과 과제를 만나도, 우리는 그 앞에서 하나님을 관계함으로써 요셉에게 그러하셨듯이 아버지의 계획과 뜻이 지정의 언행에 온전히 담길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해 오늘도 그리스도 연쇄 과정의 예수님을 잠시도 놓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