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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부 투쟁과 죽음
어쩌면 좀 잔인한 것 가지만
내가 지나온 길을 자네를 동반하고 또다시 지나지 않으면
고갈한 내 심정을 조금이라도 적실 수 없을 것 같네
내가 앞장설 테니 뒤따라오게.
(전태일의 1969 년 9월 수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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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동친목회
1970년 9월 전태일은 다시 평화시장에 모습을 나타내었다. 머리를 빡빡 깍은
모습으로 오랜만에 나타난 그를 보고 사람들은 "저 사람 한동안 안 보이더니 그 사이
큰집 갔다 온 모양"이라고 숙덕거렸다. '큰집'이란 형무소를 뜻하는 은어이다.
우선 돈도 급하고 또 노동운동을 제대로 하려면 평화시장 안에 근거를 잡아야
하기도 했으므로 취직을 해야 할 터인데, "큰집 갔다 왔다"는 평판 대문에 좀체로
취직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큰집 갔다 온 것이 아니고 삼각산에 가서 노동운동
본격적으로 할 결심하고 머리 깎고 내려왔다고 선전하고 다닐 수도 없는 일이라
한동안 그는 모자를 푹 눌러써서 머리를 가리고 평화시장을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때마침 재단사를 구하는 가게가 있어서 거기에 취직이 되었다. 일 년
전만 하더라도 전태일은 평화시장의 웬만한 업주들 사이에서는 노동운동 선동하고
다니는 놈으로 다 소문이 나 있어서 취직하기가 거의 불가능하였지만, 그 사이에
그런 소문도 어느 정도 가라앉고 또 업주가 바뀐 곳도 더러 있었으므로 겨우
취직이 된 것이다. 그가 취직한 곳은 왕성사.
취직문제가 일단락되자 태일은 김개남을 찾아갔다. 삼각산 올라갈 때 아무
연락도 않고 올라간 터이므로, 한 다섯 달쯤 만에 다시 만나게 된 셈이었다. 그
동안 어디 갔다 왔으며 왜 그렇게 소식 한 번 없이 지냈냐고 궁금해하는 개남에게
태일은 그 사이의 일을 대충 털어놓았다. 그리고는 "이번에 가서 고생도 많이
했고 생각도 많이 했는데 뜻있는 사람들끼리 다시 한 번 모여서 본격적으로
해보자"라고 하였다 한다. 다시 한 번 해보자는 것은 물론
'근로조건개선'문제였다.
전태일은 어쩔 수 없이 젊은 재단사들의 지도자였다. 아니 그렇게 말하기보다는, 이
당시만 해도 평화시장에서 노동운동을 자신의 필생의 사업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가 평화시장을 떠났던 기간 동안에 뿔뿔이 흩어져 있었던
바보회 회원들이 그의 출현을 계기로 다시 모였다. 그 사이에 군대에 간 사람들과
직장이 바뀌어 어디로 가버렸는지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을 제하고 나니 모두 여섯 명의
회원이 다시 규합된 것이었다. 여기에 나중에는 여섯 명의 재단사가 새로 추가되어
도합 열두 명의 재단사가 자주 모임을 갖는 사이로 발전하게 된다.
이때를 전후하여 전태일은 틈나는 대로 서울시청, 노동청 등을 찾아다니며
진정서를 내기도 하고 신문기자들을 만나거나 방송국을 찾아가기도 하였다.
9월 중순 어느 날이었다. 재단사인 차정운(가명)과 유상천(가명)은 때마침
추석대목을 막 지난 뒤라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기 위하여 평화시장에 나오다가
국민은행 건물 앞 '인간시장'을 지나게 되었는데, 이때 전태일이 두꺼운 책 한
권과 무슨 서류뭉치 같은 것을 한아름 안고 나왔다.
정운이 상천을 돌아보며,
"저 친구 참 재미있는 친구야. 우리들 근로조건이 개선될 수 있게 한다고 밤낮
돌아다니는데 상천이 너도 한 번 사귀어 봐라"라고 하였다. 이때 태일이 정운에게로
다가와서, 오늘 동양방송 '시민의 프로'에 나가서 우리들의 요구사항을 발표해보려고
하는데 같이 가자고 권했다. 그래서 세 사람은 동양방송국 쪽으로 가는 시내
버스에 함께 타게 되었다.
버스 안에서 상천은 태일과 처음으로 인사를 나누었는데 상천의 기억으로 이때
전태일이 아주 열의에 차서 찻간에서 근로기준법책을 펴들고 근로시장(제42조),
휴일실시(제45조) 등의 항목을 소리내어 읽어주면서, " 우리는 너무 억울하게
살고 있다. 근로기준법대로 하면 평화시장의 3만 명 노동자들이 지금 보다 훨씬
나은 조건에서 일할 수 있게 되는데, 그렇게 되도록 만들려면 우리 재단사들이
단결해서 근로기준법을 물고 늘어져서 싸우는 수밖에 없다. 이렇게 만났으니
앞으로 힘을 합쳐서 잘 해보자"하였다 한다.
유상천은 그때까지만 해도 근로조건이니 노동운동이니 하는 것은 말도 몰랐고
생각해 본 일도 없었는데 태일의 열변을 들으면서 "그런 법도 다 있었나? 정말
법대로 할 수 있을까? 어쨌든 그렇다면 한번 해볼 일이다."하는 놀라움,
호기심, 기대감, 새삼스러운 분노 따위가 뒤범벅이 된,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는
흥분된 심정으로 버스가 목적지까지 닿아도 닿은 줄도 모르고 내릴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한다.
새 재단사는 동양방송국에 도착하여 '서민의 소리'프로 담당자를 만났다. 태일이
평화시장 실정을 대충 이야기하고 '시민의 소리'에 출현하여 시청자들에게 호소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담당자는 거절하였다. 확실한 통계자료나 근거가 없는 '추상적인
이야기(!)'는 방송에 내보낼 수 없으니 좀더 구체적인 자료를 정리해 가지고
다음에 와보라는 것이었다.
방송국의 화려한 건물 문을 벗어나면서 태일은 정운과 상천을 보고, 이대로
그냥 돌아가기도 안되었으니 온 김에 서울시청 사회과에나 한번 들려보자는
것이었다. 동양방송국에서 시청까지는 걸어서 5분 정도밖에 안 걸리는 거리였다.
그들이 사회과에 도착하여 보니, 마침 점심시간이 되어서 관계직원들이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기다려서 만나보려면 한 시간 이상을 보내야 했다. 정운과 상천은
무료하여 그냥 돌아가기로 하였고, 태일은 혼자 남아서 직원을 만나보고 가겠다고
하여 거기서 그들은 일단 헤어졌다.
정운과 상천이 평화시장에 돌아와보니 국민은행 앞길에 평소부터 친한 재단사
친구 몇 명이 모여 서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 국민은행 앞길이라는 곳은
점심시간이나 퇴근시간에 평화시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노동자들이 가장 많이
통과하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노동자들이 서로 일자리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거나 또는 업주들이 고용할 노동자를 구하는 노동력의 거래가 이 장소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일이 많아서 언제부터인지 노동자들은 이곳을 '인간시장'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정운과 상천이 조금 전에 태일과 헤어지면서 저녁에 만나기로 한
약속장소도 이곳 인간시장이었다.
두 사람은 먼저 모여서 이야기하고 있던 재단사들 틈에 끼어들어 전태일을
화제로 하여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모두들 흥미 있어 하였고 그 중
성준창(가명)이란 재단사는 특별한 관심을 보이면서 전태일을 기다렸다가 한번
만나보겠다고 하였다.
이날 오후 늦게(6시경) 태일이 인간시장으로 돌아왔다. "반가운 소식을
전한다"고 하면서 친구들에게 낮에 있었던 일을 보고하였는데, 서울시청 사회과에
가서 담당직원에게 평화시장의 근로조건을 기준법대로 개선시켜달라고
요구하였더니 "너무 어려운 문제가 되어서 여기서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고
발뺌하면서 노동청 본청에 가서 말해보라고 미루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노동청을 찾아갔는데 가보니 노동청 정문 앞에서 마침 출입기자들을 만났다고
한다. 잘 되었다 싶어서 기자들을 붙잡고 사정 이야기를 하며 신문에 평화시장의
참상이 보도되도록 해줄 수 없겠느냐고 매달려봤더니 그들이 무척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며, 혼자서 일을 하려면 잘 안될 뿐만 아니라 3만이 되는 직공에
앙케이트 30매 정도로는 자료가 충분하지 못하니 여럿이서 힘을 합쳐서 좀더
많은 조사보고서를 받고, 구체적인 자료들을 모아서 여러 사람 이름으로 정식으로
진정서를 제출해보라고 권하더라는 것이었다. 상기된 표정으로 이런 경과를
이야기하면서 전태일은 앞으로 잘만 하면 평화시장 얘기가 신문에 실릴 수
있으니,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조직을 갖추어 실태조사를 대대적으로 해보자고
제의하였다.
평화시장의 실정을 신문을 통하여 세상에 폭로한다는, 또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새로운 전망, 그것은 실로 암흑 속에서 빛을 보는 것같은 가슴 뛰는 발견이었다.
전태일은 용기백배하였고, 이제껏 '근로조건 개선'이 과연 실현될 수 있는 일인가
하는 회의 때문에 소극적이었던 그의 친구들의 움직임도 아연 생기에 차고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1970년 9월 16일 저녁 그 동안 자주 모여서 노동문제를 이야기하던 열두 명의
재단사들이 평화시장 근처의 은호다방에서 회합을 가졌다. 이 은호다방은
다방마담이 태일이 하는 일에 퍽 동정적인 사람이어서 여러 가지로 도와주고
싶어하였고, 그래서 어느새 태일의 연락처처럼 되어버린 곳이었다.
이날 밤의 모임에서 그들은 그 동안의 '바보회'를 '삼동친목회'로 이름을 바꾸어
새 조직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바보회가 그 동안 별 다른 활동 없이 지내온 지
오래되기도 하였고 그 사이에 회원들도 많이 바뀌었으므로 면목을 일신하여 새
기분으로 출발하자는 생각에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저녁 7시에 시작되어 밤
11시가 가까워지도록 계속되었던, 열기로 설레이던 이날 모임의 분위기를 다음
글이 전한다.
지금도 들려오는 쟁쟁한 목소리.
목이 메도록 외쳐도, 목이 터지도록 외쳐봐도
들은 체도 않는 냉정한 세상.
옳게 살아보자고 의롭게 살아보자고 굳게 손을 잡던 그날.
.
우리의 이름이 바보라 바보처럼 살 수밖에 없나 보다.
이름을 바꿔서 만인을 위해 횃불을 밝히고자 약속하던 그날.
처음엔 비웃던 레지양들이 마감시간이 넘도록 나가달란 말도 못하던 모습.
아마 그것은 우리의 진심에 감동해서였으리라.
그리고 다시 태어난 바보 아닌 삼동회의 일들을 잊을래야 잊을 수 없으리라.
(고 전태일 1주기 추도식 삼동친목회 대표의 추도사에서)
삼동이라 함은 평화시장, 동화시장, 통일상가의 세 건물을 가리킨 것이다.
삼동친목회는 일년 전에 창립되었던 바보회를 단순히 이름만 바꾼 것인 것처럼
보이지만은 그러나 이것은 바보회와는 성격이 구별되는 하나의 새로운 조직으로
보아야 한다.
'바보 아닌 삼동회'라는 구절에서도 느껴지듯이 삼동회는 바보회 창립 당시에
비하면 훨씬 더 구체적인 투쟁의 전망을 가지고 발족 한 것이었다. 바보회의
활동이 실제로는 기업주나 노동당국에 '진정'하고 '호소'하는 데에 그쳤던 것에
반하여, 삼동회는 평화시장의 불법시장이며 비인간적인 노동현실을 세상에
'폭로'하고 그것을 하나의 발판으로 하여 공동으로 '투쟁'할 것을 활동지침으로
하였던 것이다.
이날 그들은 삼동회의 목적을 새로이 "연소근로자를 보호하기 위한 대책을
강구하고,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공동으로 행동"(강조는 지은이)하는 것으로
설정하는바, 이로써 우리는 삼동회가 바보회와 같은 '진정단체'가 아니라
'투쟁조직'임을 느낄 수 있다. 말하자면 바보회가 한 단계 발전하여 삼동친목회가 된
것이다.
이날 토의된 삼동회의 당면 활동계획은 대체로 다음과 같았다 한다.
1. 빠른 시일 안에 노동조건 실태조사용 설문지를 돌리고, 일방으로 3개 시장
일대의 작업환경을 조사하여 보고서를 작성하고, 노동청 앞으로 그 보고서를
제출함과 함께 근로조건 개선을 구할 것.
2. 회원 각자가 최소한 10명 이상씩의 협력자를 확보하여 조직을 넓힐 것. 이
협력자들에 대하여는 평소의 회합에서 회원 상호간에 정보를 교환하고 철저히
신상을 파악하여 믿을 수 있다고 판단될 때는 정회원으로 가입시킨다.
3. 근로조건 개선 요구가 관철되지 않을 때는 데모, 농성 등으로 항의한다.
4. 삼동회는 노동조합으로 발전시키며, 회사측과 노동청에 그 지원을 요구한다.
임원선출이 있었는데 회장에 전태일, 총무에 임현재, 서기에 이승철이 각각 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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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개선 진정서
삼동친목회의 첫 사업으로서 전태일의 동지들은 평화시장 일대의 근로자들을
상대로 설문지를 돌렸다. 이 설문지는 그 전해에 전태일이 인쇄해두었다가 미처
다 돌리지 못하였던 것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성명: 성별: 종교:
생년월일 19 년 월 일생
본적
주민등록지
직종 경력
1. 1개월에 몇 일을 쉽니까? ( )일
2. 1개월에 몇 일을 쉬기를 희망합니까?
A. 휴일마다 B. 일요일마다
C. 2번 D. 1번
3. 왜 주일마다 쉬지를 못하십니까?
A. 수당을 더 벌기 위하여
B. 기업주가 강요하기 때문에
C. 공장규칙이니까
4. 1일에 몇 시간을 작업하십니까? ( )시부터 ( )시까지
5.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작업을 하시면 적당하시겠습니까?
( )시부터 ( )시까지
6. 왜 본의 아닌 시간을 작업하십니까?
A. 수당을 더 벌기 위하여
B. 일이 바쁘니까
C. 공장주가 강요하기 때문에
7. 그만한 시간이면 당신 건강에 어떤 영향을 줄 것 같은가?
A. 무방하다 B. 피로하다
C. 유해하다 D. 모르겠다
8. 건강상태는?
A. 신경통 B. 식사를 못한다.
C. 신경성 위장병 D. 폐결핵
E. 눈에 이상이 있다(날씨가 좋은 날은 눈을 똑바로 뜨지 못하고 눈을 바로
뜨려면 정상이 아니다)
F. 심장병
9. 작업장에서 근로기준법 22조의 규정을 비치한 것을 볼 수는?
A. 있다 B. 없다
10. 보건소의 건강진단은?
A. 1개월에 한 번
B. 4개월에 한 번
C. 6개월에 한 번
D. 1년에 한 번
E. 한번도 한 적이 없다.
11. 당신 교양을 위한 서적은?
A. 본다 B. 안 본다
C. 볼 시간이 없다.
12. 취미
13. 1개월 수당.
위의 설문지는 전태일이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작업조건에 관한 주요한
문제점이라고 평소부터 느껴왔던 것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른바 '과학적인'
조사방법론자들은 이 설문지가 답변자들의 답변을 일정한 방향으로 유도하고
있어서 '객관적 공정성'을 결여하고 있다고 비판할는지 모르나, 어쨌든 전태일은
이 설문지를 받은 노동자들이 어떤 내용의 답변을 할 것인지 충분히 예견하고
있었다고 보인다. 그는 너무나 깊은 관심을 가지고 너무나 오랫동안 보아왔기
때문에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설문지를 돌리는 데에는 작년의 실패 경험도 있고 하여 기업주 측에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만반의 주의를 다하면서 신중을 기하여 돌렸다. 삼동회 회원
전원이 동원되어 각자의 친분에 따라 연줄열줄로 각 작업장에다 돌렸는데
여기에 협력한 재단사나 미싱사들은 삼동회의 정회원은 아니라 하더라도 최소한
삼동회 취지에 찬동하고 회원들과 다소간의 면식이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작업장 안에서 일반 노동자들에게 전달할 때는 반드시 업주가 자리를 비운 틈을
이용하여 하도록 하였으며, 업주의 친척이나 연고자가 종업원으로 근무하는
작업장에는 아예 뿌리지도 않았다. 그 결과 며칠 만에 126매의 설문지가
성공적으로 회수되었다.
회수된 설문지들에 나타난 조사결과 어떠했는지는 삼동회 회원들이 그것을
기초로 하여 노동청 앞으로 제출한 진정서에 반영되어 있으므로 다음에 설명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한 예로 전태일 자신의 답변 내용을 보기로 한다. 앞의 설문항목과
대조해보시기 바란다.
설문항목 답변
1 2일
2 B
3 B
4 오전 8시부터 오후 10시까지
5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6 C
7 B, C
8 A, B, C, E
9 B
10 E
11 C
12 독서
13 23,000원
한 달에 4일을 쉬었으면 싶은데 2일밖에 못 쉰다. 기업주가 강요하기 때문이다.
하루에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9시간만 일했으면 싶은데 오전 8시부터 오후
10시까지 14시간을 노동해야 한다. 기업주가 강요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과중한 노동으로 건강은 형편없이 나빠졌다. 신경서 위장병을 앓고 있어 식사를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이며, 눈은 항상 충혈되어 있어서 밝은 햇빛 아래서 눈을
제대로 못 뜨고, 젊은 나이에 신경통까지 앓고 있다. 이런 형편인데도 기업주들은
치료는커녕 건강진단 한번 제대로 안 시켜준다. 긴 노동시간으로 나의 취미인
독서도 할 겨를이 없다. 그렇게까지 일해 주는데도 경력 5년의 재단사인 나의 한달
임금이 고작 2만 3천 원이다.
이러한 말을 전태일은 설문지를 통하여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말을
거의 모든 노동자들이 하게 되리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삼동회회원들은 회수된 설문지 126매에 나타난 자료를 종합하는 한편 설문지에
나타나지 않은 자료에 관해서도 평화시장 일대를 직접 돌아다니며 조사를
진행하였다. 이 무렵 그들은 거의 매일과 같이 은호다방을 중심으로 모였다.
모여서는 그날그날의 활동내용을 합의, 결정하고, 흩어져서는 각자가 맡은 임무를
수행하곤 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시장 일대에 흩어져 있는 작업장 수백 개의
위치, 건평, 직공 숫자, 조명 시설, 다락 높이, 환기장치, 그리고 평화시장 전체의
상수도시설, 변소시설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자료를 수집할 수가 있었다.
또 그들은 노동청에 낼 진정서의 진정인 명의를 가급적 많은 노동자들을
끌어들여 공동명의로 하기로 하고, 노동자들의 서명을 받아내기 위하여
동분서주한 결과 삼동 회원 외에도 90여 명의 서명을 받는데 성공했다.
1970년 10월 6일 그들은 드디어 노동청장 앞으로 '평화시장 피복 제품상
종업원근로개선 진성서'를 제출하였다. 이 진정서의 원본은 노동청에 제출되어
현재로는 그 행방을 찾을 길이 없고, 그 내용도 당시 신문에 보도된 중요 부분
외에는 정확히 알 길이 없으나, 다만 전태일의 일기장 갈피에 이 진정서의
초안으로 보이는 기록이 끼어 있어서 그것을 소개한다.
대학 노트 15페이지에 걸쳐 전태일의 필적으로 씌어 있는데 그 중 한 페이지는
찢겨져 나가서 내용을 알 수가 없다. 당시의 신문 보도를 보면 전태일 등이
평화시장 노동자 126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그중 120명(95%)이 하루
14--16시간 노동을 하고 있고, 96 명(77%)이 폐결핵 등 기관지 계통 질환에 걸려
있으며, 102명(81%)이 신경성 위장병으로 식사를 제대로 못하고 있으며, 전원이
밝은 곳에서 눈을 제대로 뜰 수 없고 눈꼽이 끼는 안질에 걸려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하는 기사가 있는데 이 찢어진 페이지에 바로 이러한 내용이 기재되어
있었다고 추측하는 것이 전후문맥으로 보아 온당할 듯하다.
노동청장 귀하
제목: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조건 개선 진정
평화시장 피복제품상에 근무하고 있는 종업원 3만여 명의 대부분은 매일
12시간 이상의 격무와 작업환경의 불량으로 인하여 위장병, 신견통, 눈병 등 각종
직업성 질환에 허덕이고 있음이 우리들의 자체조사 별첨 앙케이트처럼
나타났습니다.
우리 피복계통에 종사하는 종업원들은 이와 같은 악조건하에서는 더 이상
작업을 계속할 수가 없고, 건강을 더 이상 유지할 수가 없어, 당국의 강력한
시정조치가 요구된다고 사료되어 94명의 서명으로 진정하는 바입니다.
(가운데 한 페이지 찢어지고 없음)
진단을 받는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건강진단이라 인정할 수 없으며, 진단을 하는
의사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서류상의 형식에 지나지 않으며, X레이 촬영시
필름을 사용하는지 심히 의심스럽습니다.
종업원의 직종
1. 재단사: 재단사는 대부분 남자로서, 연령은 23--50세 층이며, 1천2백명이며
1개월 월급은 평균 3만 원
2. 미싱사: 미싱사는 전체가 여성으로서, 연령은 18--23세 정도이며, 1 만2천명,
월급은 평균 1만 5천 원
3. 시다: 시다는 전체가 어린 소녀이며, 연령은 13--15-17세의 다층이며, 1만2천명,
1개월 월급은 3천원입니다(4--5 년 전에 책정된 임금임).
1일 작업시간: 평균 오전 8시부터 오후 9시까지
1개월 작업시간: 28일(첫 주일과 셋째 주일 휴일)336시간
3번에 해당되는 시다들은 시간수당이 없으며, 연령이 어린 관계로 정신과
육체적으로 성장기에 있으므로 장시간의 많은 작업량이 정신, 육체의 발육과정에
있어 재기할 수 없는 심한 피해가 됩니다.
진정인 대표:
평화시장 종업원의 친목회의 삼동친목회 회원 일동
대표 전태일 인
서기 이민섭 인
정회원 신진철 인
최종인 인
김영문 인
조병섭 인
강진환 인
주현민 인
별첨 93인
호수: 286호, 3층까지 하면 825호(가, 나, 가, 나, 한줄은 이층 가게로서 제외). 호당
10명의 종업원(여기서 호수는 평화시장의 피복제조공장이나 점포의 총숫자를 말함).
평화시장 직공 명수: 약 10,000명(동화시장: 160개 공장 4,800명, 통일상가와 근접
건물: 200여 개 공장, 8,000명 평하시장, 신평화시장: 500개 공장, 14,000명)
전체 명수 10,000 명에서 직책별로 나누어보면:
미싱사: 4,000명
시다: 4,000명
재단사: 300명
재단보조: 400명
기타(시아게, 공장장 점원): 300명
주인, 주주: 1,000명
* 합계: 10,000명
하루의 작업시간:
아침 8시 30분부터 저녁 10시 30분까지 1일 14시간 작업.
1달 720시간 중 372시간. 휴일 매달 첫 주일과 셋째 주일 2일 국제 근로기준의
2배에 해당하는 시간임.
급료:
재단사: 15,000원에서 30,000원까지
미싱사: 7,000원에서 25,000원까지
시다: 1,800원에서 3,000원까지
재단보조: 3,000원에서 15,000원까지
연령별 직책:
12세부터 21세까지 시다 19세부터 38세까지 미싱사
22세부터 50세까지 재단사 18세부터 25세까지 재단보조, 점원
12세부터 21세까지 여자 시다가 하루수당 70원, 14시간 작업
건강상태:
재단사 100% 전원이 신경성 소화불량, 만성위장병, 신경통, 기타 병의 환자
미싱사는 90%가 신경통 환자임. 위장병, 신경성 소화불량, 폐병 2기까지
시다는 평균 15세 어린이들로서 하루 14시간의 작업을 당해내지 못함.
평화시장 종업원 중 경력 5년 이상 된 사람은 전부 각종 환자임.
특히 신경성 위장병, 신경통, 류마치스가 대부분임.
시장 안의 구조:
현대식 3층 건물로서, 1층은 점포, 2.3층은 공장임.
10,000 명 이상을 수용하는 건물이면서도 환기장치가 하나도 없으며, 더구나
휴식시간인 오후 1시부터 2시까지에도 햇빛을 받을 장소가 없음.
작업정도:
우리나라의 어떤 노동보다도 제일 힘과 정신 빨리 피로해지는 노동임. 정신적,
육체적 최하 노동.
공임:
우리나라에서 여기보다 더 싼 데가 없음. 경영주들은 서로 경쟁을 직공들의
공임에서 함. 가령 하루에 8시간을 작업하고도 1개월 급료가 10,000원인 사람과,
하루에 15시간을 작업하고도 1개월 급료가 10,000원밖에 안됨.
세면시설:
평화시장 400여 공장에 상수도 3곳임. 1평 정도
이상이 진정서 초안의 중요부분이다.
진정서 대표의 이름들이 서명된 곳을 경계로 하여 뒤의 부분은 앞부분과 다소
중복이 되는데 어긋난 내용도 있다. 예컨대 앞부분에서는 1일 작업시간이 "평균
오전 8시부터 오후 9시까지"로 되어 있는데 반하여, 뒤에 와서는 '아침 8시
반부터 저녁 10시 반까지1일 14시간 작업"으로 되어 있다.
실제로 노동청에 제출한 진정서에서는 앞부분에 가깝게 하였는데 이것은 계절에
따라 또 그때그때의 제품수급 사정에 따라 작업량이 차이가 있고, 따라서
작업시간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삼동회 회원들의 지식수준으로 평균치를 낼
수가 없어서 결국 될 수 있는 한 노동청 당국자들이나 기업주들이 과장된
숫자라고 반론을 제기할 수 없을 정도로 줄여서 계산한 결과였던 것 같다.
이 초안에는 위에 소개한 부분 외에도 진정인들의 성명, 주소, 본적이 첨부되어
있고, 한 페이지 가득히 큰 글씨로(전태일의 필적)쓴 기준법을 준수하라는 구호도 적혀
있으며, 평화시장 안의 각 작업장의 명세도 기록되어 있는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평화시장 3층 가 176 창별사
건평 2평: 종사원 13 명
다락높이 1.6m: 형광등
2. 평화시장 3층 가 181 단성사
건평 8평: 종사원 32명
다락높이 1.5m: 형광등
3. 평화시장 2층 277 동방사
12평: 종사원 50명: 형광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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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평화시장 기사특보' 나던 날
1970년 10월 7일 그러니까 노동청에 진술서를 낸 그 다음날 시내 각
석간신문에 평화시장의 참상에 관한 보도가 실렸다. 기다리고 기다렸던 기적이
마침내 일어난 것이다.
경향신문사 신문 게시판 앞에서 가슴을 조이며 기다리던 전태일은 새로 나온
석간 신문 한 장을 사들고 미친 듯이 평화시장으로 달렸다. 인간시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삼동회회원들은 바라던 기사가 난 것을 확인하자 환호성을 터뜨리며
얼싸안았다.
그날 경향신문 사회면 톱기사로 '골방서 하루 16시간 노동'이라는 표제와 '소녀
등 2만여 명 혹사', '거의 직업병 노동청 뒤늦게 고발키로', '근로조건
영점 평화시장 피복공장'이라는 부재 아래 실렸던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어린 여자들이 좁은 방에서 하루 최고 16시간 동안이나 고된 일을 하며 보잘것
없는 보수에 직업병까지 얻고 있어 근로기준법을 무색케 하고 있다. 이들은
서울시내 청계천 5__6가 사이에 있는 평화시장내 각종 기성복 가공업에 종사하는
미싱사, 재단사, 조수 등 2만 7천여 명으로 노동청은 7일 실태조사에 나서
근로기준법을 위반한 업체는 전부 고발키로 했다. 노동청은 이밖에 5백 여 개나
되는 서울시내 기성복 가공업소도 근로자의 실태를 조사키로 했다.
평화시장내의 피복가공 공장은 4백 여 개나 되는데, 이들 대부분의 작업장은
건평 2평 정도에 재봉틀 등 기계와 함께 15명씩을 한데 넣고 작업을 해 움직일
틈이 없을 정도로 작업장은 비좁다. 더구나 작업장은 1층을 아래위 둘로 나눠
천정의 높이가 겨우 1.6m 정도밖에 안돼 허리를 펼 수 없을 정도인데 이와 같이
밝은 햇빛 아래서는 눈을 똑바로 뜰 수 없다고 노동청에 진정까지 해왔다.
이들에 의하면 이런 환경 속에 하루 13시간^36,36^16시간의 고된 근무를 하고
있으며 첫째, 셋째 일요일을 제외하고는 휴일에도 작업장에 나와 일을 하고, 여성들이
받을 수 있는 생리휴가 등 특별휴가는 생각조차 못할 형편이라는 것이다.
특히 13세 정도의 어린 소녀들이 대부분인 조수의 경우 이미 4--5 년 전부터
받는 3천 원의 월급을 현재까지 그대로 받고 있다. 이 밖에도 이들은 옷감에서
나는 먼지가 가득찬 방안에서 하루종일 일해 폐결핵, 신경성 위장병까지 앓고
있어 성장기에 있는 소녀들의 건강을 크게 위협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처럼 근로조건이 나쁜 곳에서 일하는데도 감독관청인 노동청에서 매년
실시하는 건강진단은 대부분이 한 번도 받은 일이 없으며, 지난 69년 가을
건강진단이 나왔으나 공장측은 1개 공장 종업원 2__3명씩만 진단을 받게 한 후
모두가 받은 것처럼 했다는 것이다.
이 짤막한 몇 줄의 기사가 어째서 평화시장의 젊은 재단사들을 기쁨에 미쳐
날뛰게 만들었던 것일까.
삼동회 회원들은 경향신문사로 달려가서 경향신문 3백 부를 샀다. 가진 돈이
없어서 우선 회원인 최종인이 차고 있었던 손목시계를 풀어서 신문사측에 담보로
맡겨 놓고 신문대금은 신물을 팔아서 갚기로 했다. 그렇게 산 신문 3백 장을 들고
그들은 다시 평화시장으로 달려갔다. 큰 모조지를 잘라서 그 위에다 붉은 글씨로
'평화시장 기사특보'라고 쓴 단장을 만들어 그것을 모두 어깨에다 두르고 시장내
이 건물 저 건물을 쫓아다니며 신문을 돌렸다. 돈을 받고 팔기도 하였고 어린
시다들에게는 무료로 주기도 하였다.
신문 한 장이면 그때 값으로 2십 원, 노동자들이 신문을 사서 보는 일이란
드물었는데 그날 신문 3백 부는 삽시간에 다 팔려버렸다. 어떤 노동자들은 신문을
나눠주고 있는 삼동회회원들을 보고 "수고가 많다"고 말하면서 1백원씩 또는
2백원씩을 신문값으로 내기도 했는데, 신문 한 장 값으로 1천원을 내놓은
노동자도 한 명 있었다.
그날 저녁의 평화시장 일대는 축제분위기로 들떴다. 군데군데에 노동자들이
몰려 서서 신문 한 장을 두고 서로 어깨 너머로 읽으면서 웅성거렸다. 평화시장의
오랜 침묵이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만 받아온 그들, 고층건물이 곳곳에 솟아 있는 수도 서울에
살면서도, 바로 창문만 열면 삼일고가도로를 호기롭게 달리는 자가용차의 화려한
행렬을 볼 수 있으면서도,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햇빛조차 주어지지 않는 먼지
구덩이 속에서 온종일 꼿꼿이 앉아서 손발이 닳도록 중노동에 시달리면서
살아야만 한다고 생각해왔던 그들. 굶주림과 질병과 멸시와 천대와 그리고서도
세상의 철저한 무관심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었던 그들. 좋은 것은 모두 남들의
것, 더욱이 신문이라고 하는 것은 높은 사람들만의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 바로 그들이. 바로 그 신문에 하찮은 쓰레기 인간들인 자신들의
비참한 현실을 고발이라도 하듯 실려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것은 깊은 지층 속을
숨죽여 흘러갔던 용암의 분출구를 만나 지맥을 찢고 드디어 터져오르는 듯 오랜
동안 쌓이고 쌓였던 통곡과 울분이 한꺼번에 폭발하는 순간이었다. "우리도
인간인가 보다. 우리 문제도 신문에 날 때가 있나보다." 이러한 자각이
노동자들의 잠자던 가슴을 뒤흔들며 평화시장 일대에 퍼져나갔다.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각 작업장 비좁은 먼지 구덩이 속의 화제는 모두 '평화시장의 기사특보'
이야기였다. 많은 노동자들이 삼동회 회원들을 찾아와서 인사를 하고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협력하며 싸울 것을 다짐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라는 외국 여자가 리차드 버튼이라는 외국 남자와 몇 번 결혼하고
몇 번 이혼했는가를 사람들은 안다. 신문에 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화시장의 열세
살짜리 여공들이 하루 몇 시간을 노동해야 하는가를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신문에 안
나기 때문이다. 재클린, 오나시스라는 외국 여자가 승마를 하다가 발가락을 삐었다
한다는 사람들은 늦어도 바로 다음날까지는 그 사실을 알게 된다. '신속 정확한' 신문
보도의 덕분이다. 그러나 강원도 어떤 탄광에서 갱도가 무너져 광부들이 매몰되어
죽었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 사실을 반드시 알지는 못한다. 신문에 나지 않거나,
나더라고 거의 눈에 띄지 않을 만한 구석 자리에 작은 기사로 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 사회의 신문인 것이다.
우리 사회가 빈익빈 부익부의 현상에 비틀거린다면, 우리 사회의 신문 역시
강한 자, 부유한 자의 속성에 비틀리고 있다. 신문사의 주인은 대재벌급의 기업가.
그들이 밑바닥 인생들의 문제에 기본적으로 관심을 표시할 이유가 없다. 그들은
자기의 신문경영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정치권력의 비위를 일부러
거슬릴 필요도 없다. 하지만 신문경영도 하나의 장사이므로 신문을 사보는
독자들의 구미에 당기는 기사를 제작할 필요는 있다. 그러나 신문의 독자층이래야
대체로 중산층이다 그들의 구미를 맞추려면 엘리자베스 테일러 같은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신문경영자들은 판단한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서민대중들은 신문과 인연이 멀어지게 마련이다. 그들이
신문을 사서 보는 일도 드물거니와 그들의 문제가 신문에 취급되는 일도 드물다.
신문제작에 종사하고 있는 일선 기자들은 대학교를 갓 졸업한 젊은이들로서
개중에는 비인간적인 사회현실에 대한 젊은이다운 분노를 아직 지니고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아니하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이 그저 이 눈치 저 눈치 살펴가며
안일하게 살고 싶은 소시민들이다.
노동청 출입기자들이 왜 한국에 수많은 근로기준법 위반업체들이 있다는 사실,
아니 거의 대부분의 업체가 그러하다는 사실을 몰랐을 리가 있겠는가? 평화시장의
참상에 대해서도, 기자들은 적어도 전태일을 만난 후로는 충분히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스스로 평화시장에 찾아가서 그 노동실태를
파헤쳐서 보도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럴 용기가 나지를 않았을 것이다.
만약 어떤 기자가 자진하여 그런 일을 하였더라면 신문사 안의 어떠한
'웃사람'도 그것을 달가와 할 사람은 없을것인 반면에, 권력자니 기업주들은 "왜
너만 유독 노동문제에 관심을 가지느냐"고 색안경을 쓰고 그를 주시하게 될 것임에
틀림이 없다. 전태일이 모든 자료를 갖추어 노동청에 정식으로 진정서를
제출하였을 때에야 비로소 노동청 출입기자들은 그것을 빌미로 하여 평화시장
기사를 다룰 용기가 났던 것이었다.
전태일과 그의 친구들이 뚫은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두터운 벽의 일각이었다.
그것은 무관심의 벽, 차디찬 상업주의의 벽, 인간을 물질화하는 이 세대의 억압과
침묵의 벽이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그것을 뚫었다. 스스로의 행동이 저
어마어마한 신문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인정되었다는
엄연한 사실을 눈앞에 보고 그들은 참으로 용기백배하였다. 자신들의 손으로
평화시장의 현실을 개혁할 수 있다는 확신이 삼동회에 모인 젊은 재단사들을
정력적인 투쟁으로 몰아넣었다.
신문보도가 있던 날부터 평화시장주식회사(사장)에서는 노동청에 진정낸 사람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 늦게 삼동회회원들은 다시 회합을 갖고,
평화시장주식회사측에 대하여 요구조건을 제출하기로 결의하고 삼동회의 활동지침을
새로이 마련하였다. 이날의 회의록에는 다음과 같은 항목이 기록되었다.
10월 8일 건의사항
1. 작업시간은, 여름은 오전 8시부터 오후 7시까지로 하고, 겨울은 오전
9시부터 오후 8시까지로 한다.
2. 휴일은 정기적으로 일요일마다 쉬는 것으로 한다.
보충사항: 부득이한 경우, 작업초과시는 사전에 종업원의 양해를 구하고
수당을 요구할 수 있도록 한다.
3. 작업시간은 어기는 기업주에 대해서는 본회의 명의로 고발 조치한다.
4. 건강진단은 1년에 두 번은 전원 다 한다. 전염병이 나돌 때는 시장에서도 꼭
예방주사를 맞을 수 있게 해준다.
5. 시다들의 월봉은 현 3천원 기준에서 100% 인상하여 최하 6천원으로 함.
6. 본회는 정기총회를 제3주 휴일로 정하고, 오전 10시에 사전 합의한 장소에서
한다.
7. 임시총회는 필요시 언제든지 소집할 수 있다.
다음날(10월 8일) 전태일, 김영문, 이승철, 세 사람이 삼동회를 대표하여, 위의
요구조건들에다가 다락방 철폐, 환풍기 설치, 조명시설 개선, 여성 생리휴가의
보장, 노동조합결성의 지원 등을 합친 8개항의 요구조건을 적은 건의서를 가지고
평화시장주식회사 사무실을 찾아갔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사장과 종업원의
사이라면, 군대로 치자면 장성과 졸병의 사이나 마찬가지로서 평소에는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하고 뻣뻣이 서 있을 처지였다(한 삼동회 회원의 술회에 의하면,
바보회 시절부터 전태일이 주식회사 사무실에 올라가서 진정을 하자고 제의하여
회원들이 그렇게 하기로 동의한 일이 두어 차례 있었는데, 그때마다 번번이 막상
사무실에 올라가려니까 '떨려서' 그만두곤 하였다 한다). 그러나 이제는 달랐다.
신문보도로 인하여 용기를 얻은 재단사들이 기업주들의 대표기관에 찾아가서
당당히 일대일로 따질 것을 따진 것이다.
회사측에서는 "진정 내용은 잘 알겠다"고 하면서, 지금 실정으로는 다
들어주기는 어려우니 조금만 참고 기다리면 환풍기 설치와 조명형광 등의 대체는
이루어지도록 힘써 보겠다는 대답이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대답이었으나
그들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내려왔다.
이야기가 조금 늦었지만, 이 당시 전태일은 왕성사에서 다시 해고당하여
실직상태에 있었다. 10월초순 어느 날 그는 작업이 밤 11시 20분에 끝나게 되어
창동 집까지 갈 수가 없어서 삼각산 수도원으로 가려고 세검정행 버스를 탔다.
종점에 내려서 조금 걸으니 벌써 자정이 넘어 파출소로 연행되어, 그날 밤을 꼬박
파출소 바닥에서 새우고 그 다음날 아침 식사도 못하고 출근을 했었다. 그랬더니
하도 심신이 피로하여 낮 1시경이 되자 도저히 작업을 계속할 수 없어서 주인의
친척이었던 재단보조에게 몸이 아파 일찍 들어가야겠다고 말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출근한 그를 보고 주인은 전날 아무말도 없이 조퇴하였다는
이유를 대며 그만두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트집이었다. 채용할 때는 몰랐으나
차차로 두고 보니 노동운동 하는 사람인 줄 알게 되어서, 언제든 무슨 꼬투리만
생기면 해고해버리려고 기회를 노래고 있던 업주에게 전태일이 걸려든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취직한 지 겨우 보름만에 쫓겨난 것인데, 그 동안 일한 삯도 받지
못하고 나왔다.
10월 7일 이후 전태일은 친구들과 함께 왕성사로 몰려가서 밀린 임금을 달라고
요구하여 5천원을 받아내었다. 이 돈은 그후 삼동회의 회합비용과 데모할 때의
플래카드를 만드는 비용으로 사용되었다. 또 이 무렵 다른 회원들이나 친분 있는
재단사들이 임금을 제대로 못 받고 직장을 그만 두었던 경우가 있었는데, 그런
경우 삼동회회원들은 집단적으로 그 업체에 몰려가서 임금을 받아내고는 상당히
기뻐하기들도 하였다.
노동자들, 특히 삼동회를 둘러싼 재단사들이 이렇듯 사기가 충천하였던 것과는
반대로 기업주측과 정부 당국(특히 노동청)에서는 안절부절을 못하였다. 이때는 바로
1971년 봄의 대통령 선거를 7개월 남짓 앞두고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가 국정 전방에
걸쳐 비판의 소리를 높여가고 있었기 때문에 박정권이 그 어느 때보다도 사회여론을
면밀히 살피고 있었던 때였다. 만약 노동자들의 참상이 매스컴을 통하여 계속
보도된다면 그것은 대통령 선거에서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음에 틀림없었고,
주무관청인 노동청은 책임추궁을 당하게 될 것이 틀림없는 형편이었다.
삼동회의 진정서 내용이 신문에 보도될 것 같은 낌새를 채자, 노동청에서는
허겁지겁 뒤늦게서야 실태조사를 하겠다느니, 근로기준법 위반업체를
고발하겠다느니 하는 소란을 피웠다. 그 며칠 후 노동청 근로감독관이 삼동회
회원들을 찾아왔다. 그는 전태일 등을 보고 "모범 청년"이라느니, "노동절에
포창하겠다"느니 하는 따위의 말을 하며 그들을 회유하려고 들었다. 또
이즈음 경찰서에서 정보계 형사들까지 파견되어 회원들의 주변을 맴돌았다.
10월 중순 어느날 노동청 근로기준국장으로 있던 임정삼이라는 사람이
평화시장으로 나와서 삼동회회원들을 만나자고 하였다. 만나보니, 그는 "너희들
깡패모양 그렇게 직업도 없이 돌아다니고 있어서는 진정사항을 다 들어줄 수
없다. 취직을 하도록 하라. 그러면 일주일 이내로 다 개선시켜주겠다"라고
하였다. 물론 그는 정말로 일주일 이내로 다 개선시켜줄 생각은 없었다. 회유를
해서 이 말썽의 근원이 되고 있는 재단사들을 일단 취직만 시켜 놓으면 모두들 제
할 일에 바빠서 노동운동 같은 것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삼동회 회원들이 취직을 하고 안하는 것과, 근로조건 개선과 대체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인가? 임국장의 말은 애초에 논리도 닿지 않는 억지였다. 그러나
물에 빠진 사람들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격으로 삼동회 회원들은 "일주일 안에
다 개선시켜준다"는 약속이 너무나도 반가워서 모두 일단 취직들을 하였다. 이때
전태일은 삼미사 재단보조로 취직을 하였다. 재단사였던 그가 한 급 아래인 보조로
취직한 것은 이것저것 조건을 가릴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근로기준국장이 시장에 다녀가고, 삼동회회원들이 모두 취직을 하고, 그러고도
일주일이 지났으나 약속했던 근로조건 개선은 조금도 이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전태일은 근로감독관을 찾아가서 약속했던 일들이 어떻게 되는 것이냐고
따졌다. 근로감독관의 대답은 진정내용을 실현시키려고 노력을 해보았으나
현실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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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시위
전태일은 삼동친목회를 소집하였다.
그는 근로감독관을 만나고 온 전말을 보고하면서, "이렇게 말로서 해결 안
나겠으니 10월 20일날 노동청 정문 앞에 가서 데모를 하자"는 제의를 하였다.
10월 20일은 노동청에 대한 국회의 국정감사가 있을 예정이었는데 전태일은 그
기회를 이용하여 노동청의 약점을 치자는 것이었다.
평화시장 들어온 지 6년, 그 노동지옥의 쇠사슬을 끊으려는 전태일의 노력은
결국 '데모'라는 두 글자로 귀결된 것이다.
시다들에 대한 개인적인 온정, 진정과 호소, 모범기업체 설립구상 등등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해 보았으나, 아무 것도 해결책이 될 수 없었고 결국은 데모였다.
결국은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실력대결 방법뿐이었다.
데모라는 것은 '보여준다', '과시한다'를 뜻하는 영어 '데몬스트레이션'의
준말이다. 이것을 우리말로 시위라고 번역하는데, 이 시위라는 말이 오히려 데모의
본 뜻을 잘 나타내는 것이다. 즉, 위세, 위력을 보여줌으로써 겁을 준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떨게 한다, 그리함으로써 이쪽의 요구조건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도록
강박한다는 것이 데모의 본질인 것이다. 그러므로 데모라는 것은 진정이니 호소니
청원이니 건의니 하는 따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엉터리 비폭력주의자들이 무엇이라고 말하건 간에 데모란 상대편의 양심이나
자비심이나 동정심을 구걸하는 행위가 아니라, 이쪽 편의 실력(그것이 선거에서의
투표권이든, 적나라한 폭력이든, 사회여론에 대한 영향력이든 간에)을 배경으로 한
상대편에 대한 공갈인 것이다. "제발 이렇게 해주십시오"하는 것이 데모가 아니라,
"이런데도 네가 말을 안 듣고 배기겠느냐?"라고 윽박지르는 것이 데모인 것이다.
그러므로 '데모'란 상대편에 대한 대항하는 자의 당당한 선전포고이며,
요구조건이 관철될 때까지 끊임없이, 갈수록 더욱 격렬하게, 위협적인 도전을
감행하겠다는 경고인 것이다.
왜 억압자들은 그들이 말하듯 '일부 극소수'에 불과한 수백 명의 학생들 혹은 수십
명의 노동자들의 맨손으로 하는 데모를 그렇듯 두려워하는 것일까? 그것은 까닭이
있는 일이다. 한 개의 조약돌이 잔잔한 수면에 수백, 수천 개의 파문을 아로 새기듯,
한 개피의 성냥이 산더미 같이 쌓인 화약고를 모두 폭파시키듯 데모에 나서는 이들
'일부 극소수'는 수십만, 수백만의 고통 받아온 가슴에 무한한 격동을 일으킨다.
억압자에 대한 오랜 굴종을 벗어던지고 일 대 일의 당당한 선전포고를 알리는
데모행렬의 진군의 북소리는 일상생활의 비굴에 잠겨 있던 모든 민중의 피를 끓게
한다. 그들의 북소리는 착취와 억압이 심하면 심할수록, 강요된 민중의 침묵이
오래고 굳은 것이면 굳은 것일수록 더욱 크게 울려온다. 그리하여 억압자의 깊은
죄의식으로 신경과민이 된 귀에는, 그것은 자시의 종말을 알리는 불길한'조종'의
첫소리로 들려오는 것이다. 억압자가 수백 명의 평화적인 시위 행렬을 탄압하기
위해 광분하거나, 경우에 따라서 그들의 요구조건을 수락하는 양보를 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인 것이다. 역사상의 모든 억압자들의 '양보', 민권의 '평화적'인
승리란 본질적으로 바로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졌던 것이다.
진정한 호소만으로는 아무 무제도 해결될 수 없다. 억압자의 마음이란 구약성서
출애굽기 속의 '바로'왕의 마음이 상징하듯이 굳고 완고한 것이다. 관료사회에서
평화시장의 저 어린 소녀들이 나날이 겪고 있는 참혹한 고통에 대하여 누가
따뜻한 반응을 보였겠는가? 기업주들과 마찬가지로 노동청 관료들 또한 어떠한
관심도, 아무런 감동도, 연민도, 양심의 아픔도 느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의
양심은 억압자의 생리 또는 관료주의의 타성으로 굳게 닫혀져 있었다. 그것은
그들 개개인의 마음이라기보다는 권력의 윤리, 억압자의 속성인 것이다. 그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진정'이나 '호소'로 아무리 목메이게 두드려보았자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결국 자극을 줄 수 있는 행위는 시위였다.
데모를 하자는 데 대해서 두려움을 느끼고 망설이는 회원들도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무얼 안다고 무턱대고 데모를 한단 말이냐? 좀더 배워서 천천히 하자"고
했다.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하면 된다. 우리의 의사를 발표하는데 무슨 방법이
따로 필요한가? 데모도 지금 해야지 (1971년도)선거 끝나고 나면 할 수 없게
된다"라고 전태일은 그들을 설득했다.
평소에 쓰레기 취급을 당하던 밑바닥 인생들도 선거철만 되면 "존경하는 유권자
여러분!"의 한 사람이 도기 때문에, 사람 대접을 받고 다소 활개를 펴게 마련이다.
선거 때마다 판잣집 철거가 중단되고, 곳곳에 새 판자촌이 생기고, 취로사업이
확장되고, 밀린 노임이 청산되고, 농협 융자금이 풍성해지고 하는 것이 다 그
때문이다. 이 시기에는 그 동안 바보인 척 죽어지내던 서민들이 용기를 내어 제가끔
자신의 권익을 주장하는 투쟁을 전개하게 되는데 이에 대해 그렇게 심한 제재가
오지는 않는다. 이것이 바로 1971년도까지의 한국의 정치계절 풍경도였던
것이다(민주주의 혹은 정치적 자유라는 것도 이렇듯 민중의 생존권과 밀접한 관계를
하지고 있다. 노동운동이 필연적으로 정치운동의 성격을 띄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전태일은 확신에 찬 어조로, "지금 선거 때니까 탄압 받아봤자 별거
아니다"라고 하면서 망설이는 친구들의 용기를 북돋우었다. 10월 7일의
신문보도가 있은 이래로 전태일의 지도력은 매우 강화되어 있었고, 친구들은 그의
주장을 예전보다 더 존중하게끔 되어 있었다. 이렇게 하여 그가 제의한
10^3456,12,245^ 데모 계획은 결행하기로 합의가 되었다.
삼동회 회원들의 주변에 엄중한 사찰망을 펴고 있었던 당국은 10^3456,12,245^ 데모
계획을 눈치챘다. 근로감독관이 전태일을 찾아왔다. 그는 별별 소리를 다하며
"앞으로 근로감독권을 강력히 발휘하여, 업주들로 하여금 당신들 요구조건을 다
들어주도록 할 터이니 며칠만 참고 기다려 보라"고 애원하다시피 하면서
전태일에게 데모계획의 중지를 요청했다. 전태일은 "속은 셈치고 또 한 번 기다려
볼 터이니 반드시 약속을 지키라"고 대답하고는 친구들에게로 돌아와
전말을 이야기하고 10^3456,12,245^ 데모를 일단 보류하기로 하였다.
노도청에 대한 국정감사가 끝난 바로 다음날 전태일은 다시 근로감독관을
만났는데 그는 점심을 사주겠다고 하면서 태일을 음식점으로 데리고 가더니
한다는 소리가, "너희들 요구조건은 당초부터 도저히 실현불가능한 무리한 것이니
그만 포기하라. 네가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무슨 애로사항이 있으면, 그것은
내가 얼마든지 도와줄 터이니 이제 노동운동은 그만큼 하고 여기서 손떼는 게
어떤가?" 하는 따위의 속보이는 회유였다. 전태일이 격앙된 어조로 약속이 틀리지
않느냐고 따지고 덤벼드니, 근로감독관은 도리어 화를 벌컥 내면서 "그렇게
타일러도 말을 안 듣느냐? 이제 국정감사도 다 끝났으니 그렇다면 어디 너 할대로
해보라"고 하면서 배짱을 턱 내미는 것이었다. 노골적인 배신이었다.
전태일의 보고를 들은 삼동회 회원들은 모두 격분했다. 그들은 만장일치로 10월
24일 오후 1시에 평화시장의 국민은행 앞길에서 데모를 감행하기로 결의했다.
이때가 10월 21일. 그들은 곧 세부계획 의논에 들어갔다.
거사시각을 오후 1시로 한 것은 1시부터 2시 사이가 점심시간이므로
노동자들이 그 시각에 국민은행 앞길로 밀려나올 것을 예상한 때문이었다. 이
사람들을 궐기시키기 위해서는 사전에 많은 협조자들을 만들어둘 필요가 있다고
인정되었다. 회원 1사람당 10여 명씩의 협조자를 포섭하기로 결의했다. 그
동안에도 협조자를 만들어내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특히 10월 7일 이후에는 많은
노동자들이 삼동회 주변에 몰려들었으므로 이것은 그다지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데모할 때 외칠 구호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일요일은 쉬게
하라!", "16시간 작업에 일당 백원이 웬말이냐!" 등으로 하기로 결정되었다.
다음날부터 그들은 각자 맡은 임무를 다하기 위하여 각 작업장을 돌아다녔다. 각
작업장의 노동자들 중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재단사였으므로
회원들은 연줄연줄로 해서 아는 재단사에게도 연락을 해주도록 부탁하였다. 데모
당일에, 이 부탁을 받은 재단사들이 할 일이란 무엇보다도 자기의 작업장 안에
있는 미싱사, 보조, 시다들을 데모현장까지 동원하는 일이었다. 기업주들에게
데모계획이 누설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회원들은 각 작업장에 가서는
포섭대상자인 재단사를 작업장 밖으로 불러내어 은밀히 이야기를 하곤 했다.
10월 24일이 되었다. 전태일은 노동청 출입기자에게 오늘 오후 1시경 데모가
있을 것이니 평화시장에 와서 추재를 해달라는 부탁을 하고 시장으로 나왔다.
나와 보니 평화시장 일대의 각 작업장으로 통하는 일곱 개 골목 모두 시장
경비원들이 쫙 깔려 있었다. 평화시장의 경비원은 모두 30명 정도로서 15명씩
격일제로 교대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그 15명 전원이 두 명씩 짝을 지어 곤봉을
들고 각 골목길을 지키고 서 있었다. 삼엄한 분위기였지만 삼동회 회원들은 각
작업장을 돌아다니며 "점심시간에 좋은 구경거리가 있으니 국민은행 앞길로
나오라"고 연락을 했다. "무슨 구경이나"고 묻는 사람이 있으면 "하여간 나와 보면
안다"는 식으로 대답하곤 하였다.
오후 1시, 거사 시각이 가까워지자 전태일과 그 친구들은 국민은행 앞길로
나왔다. 그대부터 꾸역꾸역 밀려나오기 시작한 노동자들이 잠깐 사이에 약 5백 명
가까이 되어 국민은행 앞길에서 웅성거렸다. 그 중에는 데모를 할 것이라는
얘기를 전해 듣고 나온 사람도 적지 않았지만 영문을 모르고 그저 나오라니까
나와본 사람들이 더 많았다. 이때부터 곤봉을 들고 늘어섰던 경비원들은 활동을
개시하여 모인 사람들을 해산시키려고 들었다.
당시 평화시장 2층에 경비실이 있었다. 그 경비실에서 삼동회 회원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갈팡질팡하고 있던 회원들이 갑자기
그들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고 쳐다보니 경비실 창문가에서 오형사가 이쪽을
내려다보며 올라오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순간 그들은 모든 것을 깨달았다.
오형사라는 사람은 10월 7일 이후 평화시장에 파견되어 나온 정보계 형사였다.
그는 삼동회 회원들 주변을 맴돌면서 능구렁이 짓을 하였다. 회원들에게 가장
공감을 표시하는 척하면서, 친절하게 밥도 사주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도와주겠다고 하는 가운데에서 정보를 수집해온 것이다. 회원들 중에 여기에 속아
넘어간 사람이 있었다. 10월 24일 데모계획만 하더라도 어떤 회원은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는 다 숨기면서 오형사에게는 협조를 구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이런 경우
정보계 형사는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오형사, 그는 "데모? 참 좋은
생각이다"라고 하면서 그 회원을 부추겼다. 도와주겠다고 이야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는 돌아서서 경찰서로 달려가서는 몇 월 몇 일 몇 시 어디에서 데모가
있을 것 같다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는 한 건수를 올리고
민완형사가 되는 것이다.
알고 보니 형사들도 시장 일대 이곳저곳에 깔려 있었고, 각 작업장 중에서는
기업주들이 문을 닫고 노동자들을 밖으로 내보내지 않은 곳이 많았다. 삼동회
회원들은 일이 틀린 것을 깨닫고 이층 경비실로 올라갔다. 전태일과 서너 명의
회원들이 경비실 안으로 들어가서 오형사를 만났다. 오형사는 평화시장주식회사측
사람들과 동석하고 있었다.
"왜 여태 한 가지고 개선이 안됩니까?" 회원들은 언성을 높였다.
"오형사, 정 이렇게 하깁니까?"
오형사와 회사측 사람들은 유들유들 웃으면서 시간을 끌었다.
"너희들 마음대로 해봐라"라고 협박끼 있는 조롱을 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또
누그러진 목소리로 '현실'을 이야기하면서 "서로 좋은 것이 좋은 것 아니냐?"고
회유하기도 하였다. 전태일 등이 격분하여 다시 밖으로 뛰어나가려 하니까
그때서야 그들은 당황한 빛을 보이며 "11월 7일까지는 선처해주겠다. 그때까지만
참고 기다려보라"고 약속을 하였다.
적잖은 위축감을 느끼고 있던 회원 몇 사람은 이 약속을 듣고 상당히 마음이
풀렸다. 그들은 11월 7일까지 한번 더 기다려보겠다는 말을 남기고 국민은행
앞길로 다시 내려왔다. 이 사이에 한 시간이 흘러버렸다. 내려와보니 아까 모여
있었던 3백여 명의 노동자들이 거의 다 흩어지고 없었다. "괜히 나왔다"고
투덜대면서 작업장으로 올라갔다는 것이었다.
11월 7일. 약속한 날짜가 되었건만 약속은 아무 것도 지켜지지 않았다.
삼동회는 다시 모였다. 전태일은 몹시 심각한 표정으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하자고 제의하며 모두 희생할 각오로 싸우자고 말하였다. 정해진 거사일자는 11월
13일. 시각은 역시 오후 1시. 전태일을 포함한 세 명의 회원이 플래카드를 만들
책임을 맡았는데 구호는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1주일에 한 번만이라도
햇빛을!", "하루 16시간 노동이 웬말이냐?" 등으로 하기로 하였다. 연설은 탁자
하나를 준비해뒀다가 노동자들이 모일 때 그 자리에 내어놓고, 전태일이
근로기준법 책을 들고 그 위에 올라가서 근로기준법 중요 조문들을 소리내어 읽고
"이런 조문이 다 무슨 소용이냐? 지켜지지도 않는 이 따위 허울좋은 법은 화형에
처해버리자!"라는 취지의 선동 연설을 하여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거행하고, 그리고
나서는 전태일이 구호를 선창하고 회원들과 모인 사람들이 복창하면서 곧 바로
데모에 들어가기로 하였다. 이 화형식을 위하여 전태일은 휘발유통 하나를
준비하겠다고 하였다.
이러한 계획들이 세워지고 나서 전태일은 다시 회원들을 향하여 "이번만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결단코 물러서지 말고 싸우자"라고 힘주어 말했는데, 이 말이
바로 목숨을 던질 엄청난 결심을 품고 그 자신의 마음을 다지는 말인 줄은 아무도
깨닫지 못하였다. 휘발유통을 사겠다고 하였을 때 이미 그의 마음속에는 스스로의
몸을 불태워 죽음으로써 끝내 폭압의 벽을 뚫고야 말겠다는 움직일 수 없는
결심이 서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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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불꽃
당신은 나의 죽음 속으로 오셔요.
죽음은 당신을 의하여 준비가 언제든지 되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쫓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당신은 나의 죽음의 뒤에 서십시오.
죽음은 허무와 만능이 하나입니다.
죽음의 앞에는 군함과 포대가 티끌이 됩니다
죽음의 앞에는 강자와 약자가 벗이 됩니다.
그러면 쫓아오는 사람이 당신을 잡을 수는 없습니다.
오셔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습니다, 어서 오셔요
(한용운 '오셔요')
자아의 좁은 환상에 집착하여, 그 속에 밀폐되어 껍질을 쌓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아무 것도 참으로 사랑할 수 없으며 아무것도 참으로 소망할 수 없다.
일상생활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많은 것을 희망하고 많은 것을 사랑하는 것처럼
착각한다. 부과 권력과 명예와 미모의 이성과 그러나 그것들은 알고 보면 자기
자신을 더욱 빈곤하게 만들고 더욱 처절한 고통과 고독의 심연으로 몰아넣는
허구의 욕망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 탐욕으로 가득찬 세상에서 전태일은 오히려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약점은 희망함이 적다는 것이다"라고 썼던 것이다.
한 인간이 그의 인간성을 풍성하게 하는 과정은 곧 좁은 자아의 환상을 버리고,
그 껍질을 깨고, 자신과 이웃과 세계에 대한 참되고 순수한 관심의 햇살이 비치는
곳을 향하여 나오는 과정을 뜻한다. 참된 소망, 참된 사랑, 참으로 순수한
그리움만이 인간을 구원하고 풍성하게 하는 것이다.
'참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목숨을 바칠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참으로 바라는 것이 있는 사람이라면, 참으로 절절하게 사랑하고 희망하고
그리워하는 것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그가 사랑하고 소망하고 그리워하는 것을
향하여 "당신은 나의 죽음 속으로 오셔요"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전태일에게는 참으로 바라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나라였다. 약한 자도,
강한 자도, 가난한 자도, 부유한 자도, 귀한 자도, 천한 자도, 모든 구별이 없는
평등한 인간들의 '서로간의 사랑'이라는 참된 기쁨을 맛보며 살아가는 세상,
'덩어리가 없기 때문에 부스러기가 존재할 수 없는' 사회, '서로가 다 용해되어
있는 상태', 그것을 그는 바랐다. 부유하고 강한 자들의 횡포 아래 탐욕과
이해관계로 얽혀진 '불합리한 사회현실'의 덩어리(인간을 물질화하는
'부한 환경'), '생존경쟁이라는 이름의 없어도 될 악마'의 야만적인 질서, 그것이
분해되기를 그는 바랐다.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들이 그 잔혹한 채찍으로부터
구출되기를 그는 너무나도 절절하게 바랐다.
자본가들을 살찌우기 위한 이윤의 도구로서 기계취급을 받으며 살고 있는
노동자들이 인간다운 대접을 받게 되기를, 하나의 존엄한 인간으로서 인정받게
되기를, 그리하여 괴로운 노동이 즐거운 노동으로 바뀌는 그날이 오기를 그는
열망하였다. 그가 항상 '나의 전체의 일부'라 불렀던 소외된 밑바닥 인간들,
저주받은 현실이 쓰다 버린 쪽박들, 불쌍한 현실의 패자들을 그는 너무나도 뜨겁게
사랑하였다. 그들이 오랜 무기력과 위축과 굴종과 침묵과 자학을 벗어던지고
인간다운 위엄을 되찾아 일제히 궐기하기를, 그리하여 이제껏 자신들을 짓밟고
가두어왔던 억압과 착취의 벽을 온몸으로 두드리며 맞서 싸우기를 그는 애태우며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 모든 것을 참으로 절실하게 소망하기 때문에 그는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끝내 굽히지 않고 다시 일어서 싸워왔던 것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애써도 그가
바라는 것은 좀체로 오려고 하지 않았다. 산이 나에게로 오지 않으면 내가 산을
향해 가야 한다. 이제 그는 마지막으로 그의 모든 것을 던져 "당신은 나의 죽음
속으로 오셔요. 죽음은 당신을 위하여 언제든지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라고 말할
차례가 된 것이다.
1970년 11월 13일의 그의 죽음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우리는 죽음에까지 이르는
그의 비극적 투쟁의 내면적 투쟁을 다시 한 번 간략히 되돌아보기로 하자.
아래에 소개하는 글은 그가 '현실에 반항하는 청년의 몸부림'이라는 제목 아래
구상한 소설작품의 줄거리인데, 여기서 그는 노동운동에 투신한 이후의 그 자신의
투쟁과정과 그 비극적 결말을 너무나도 선명하게 그려내고 있다. 쓰여진 시기는
1970년 초여름, 그러니까 아직 삼각산에서 최종적으로 죽음을 결단하기 이전에
고뇌하면서 쓴 것으로 보인다.
현실에 반항하는 청년의 몸부림
작품구상
때: 1969년 3월 16일부터^36,36^현재까지
곳: 서울시내 전역
주재: 자유와 방종 현세대의 사회적 성격과 기성세대의 경제관념. 그리고
현실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기성세대의 경제관념에 반항하는 청년의 몸부림
등장인물
J: 주인공 23세의 청년으로 제품업에 종사하는 재단사
B: 피복공장 미싱사로서 주인공의 사고력에 큰 영향력을 끼친 20세의 나약한 소녀
줄거리
1. 중부시장의 시끄러운 공장소음으로 시작하여 B의 유린당하고 있는 인간본성
2. B의 참상을 보고 마음의 충격을 받는J의 결심
3. 공장 분위기와 과로, 직업병으로 인한 J의 고심과 직장을 못 다니게 된 동기.
4. 구로동 맞춤집의 고된 일과 J부친의 사망
5. 바보회를 조직하는 J와 친구 재단사들간의 의견대립
6. 창립식 이후 다시 정기총회를 개최하지 못하는 J의 심정과, 바짓집의 싼
공임으로 앙케이트 인쇄하기까지
7. J의 가정형편과 식구들의 성격상태
8. 일반인의 생각과 현 사회실정이라는 자기 나름대로의 판단 아래 당황하는 J
9. 앙케이트가 기능공들의 의사표기를 대변하는 것이었으나, 기업주들의
강제적인 의사통제로 3만 기능공들의 인권을 유린하는 데까지
10. 시청근로감독관의 무성의한 태도와 J의 감정상태
11. 사회를 신임하고 있던 청년 J의 낙심과, 사회를 신임하지 않게 됨.
12. 한미사 주인의 이중인격과, 사회를 처음 대하던 18세 J의 실망과 기성
세대의 탐욕으로 인해 제물이 될 뻔한 J의 상태
13. 협신사 주인의 비인간적인 경제관념과 기업주로서의 상대적 지위 남용으로
인해 피해를 보는 기능공과 J의 울분
14. 방황, 범죄에 대한 공상과 자본을 구하기 위한 공상
15. 오랜 공상과, J를 중심으로 얽매여 있는 사회환경에 견딜 수 없는 구속감과,
본능적으로 이런 환경에서 벗어나보려는 J의 방황
16. 바보회 창립 당시 회원들에게 한 중요한 발언과, 자기가 이 문제를
성공시키지 못함으로 인한 기능공들의 예전보다 더 한 실망감과, 이 문제에
대해서 더욱 실망적인 결과만을 남기게 된 책임감을 느끼고 책임을 완수하기 위해
애절하게 몸부림치는 J
17. 대구로 여행하여 J마음의 고향, 육신의 고향에서, J의 일생중 가장 아름다웠던
추억이 있는 대구 여기에서, 옛동창들을 모아놓고 파티겸 마지막으로 쓸쓸한 사망의
길로 가려고 하는 자기의 인생을 남기기 위한 눈물겨운 크리스마스 이브가 된다.
18. 옛 동창 앞에서 자기 선전을 한다. J자신이 자기를 극도로 과장해서
선전하며 현실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리라고 믿었지만, 이 선전을 통해 곧 되는
것처럼 동창들에게 과장해서 자랑하며, 실로 어처구니없는 미래의 자기 위치를
설명한다. 즉 기능공에 대한 교육기관을 건축하고 오락시설을 갖추어야 할
인격완성 등, 기능공들을 위한 이러한 여러 가지 요건을 갖추는 데 필요한 금액의
출처, 금액을 마련하는 방법 등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일동들은 잠시나마 벅찬
감격을 느낀다.
J자신도 자기 자신이 정말로 그렇게 되는 줄로 잠시나마 생각하다가 자기만이
느끼는 사회환경에 몸서리치면서, 자기의 원 계획대로 몇 개월 후의 자기 위치를
설명한다.
19. 상경하여서 J가 피부로 느끼는 사회의 반응과 마지막을 위한 환경정리
20. 친구들이 J를 대구에서 기다린다. 약속 날짜는 4월 19일. 여기에 날아드는 유서
한 장
이 소설 작품 구상의 주제인 '자유와 방종'에 있어서의 '자유'라 함은 참된 자유,
인간으로서의 살기 위한 자유를 뜻하는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것은 또한
억압받는 자의 자유를 뜻하기도 한다. '방종'이라 함은 '자유'라는 허울 밑에
방치되고 있는 야만적 무정부적인 탐욕, 무제한한 이윤추구의 자유(!), '사기업의
자유'라는 간판 아래 인간성을 파괴하는 착취와 억압의 횡포를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현세대의 사회적 성격'에 반항하는 그의 몸부림이 작품의 주제인 것이다.
그의 반항은 그 자신이 억압의 현실 아래 고통받는 자의 하나였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지만, 그의 몸부림이 일어나게 된 계기는 "인간성을 유린당하고 있는 B"라는 한
여공의 참상에 충격을 받은 데 있다. 그 자신의 고통, 그리고 이웃에 대한 인간적인
애정과 관심이 그를 눈뜨게 하고 반항으로 몸부림치게 만드는 것이다.
몸부림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그는 하나하나 현실의 벽에 부딪쳐 가고, 마침내는
부와 권력의 결합체가 지배하는 전체 사회현실의 거대한 덩어리가 인간성을
파괴하는 야수적인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거대한 힘은
인간성을 위해 몸부림치는 그 자신을 꼼짝 못하게 얽어두고 있는 굴레였다.
여기서 그는 "J(그 자신)를 중심으로 얽매여 있는 사회현실에 견딜 수 없는
구속감"을 느끼고 "본능적으로 이런 환경에서 벗어나보려고 방황"한다.
오랜 공상과 방황이 모두 끝났을 때 그는 자신의 인간적인 책임을 완수하기
위하여 만난을 극복하고 싸워야 한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고, 그 앞에 남겨진
마지막 투쟁의 길이 죽음의 길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앞에서도 우리가 보았듯이, 그는 이 작품 구상을 쓴 후로 삼각산에 올라가 노동을
하면서 죽음을 위한 마지막 마음의 정리를 하고 내려와서, 다시 평화시장의
투쟁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면 그는 어째서 최후의 투쟁방법으로 죽음을
택하였는가, 아니 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일까?
그것은 우리 사회의 특수한 성격과 관련이 있는 문제이다.
세계의 어떤 곳, 어떤 시대의 노동운동의 역사에서도, 분신자살을 투쟁방법으로
택한 예가 아마도 없었던 것이다 목숨을 걸고 싸운 노동운동가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의 목숨을 스스로 끊음으로써 노동운동을 전진시키려고 한
노동자는 없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건 참된 노동운동의 길은 결코
평탄하지 않다. 그러나 6.25(한국전쟁) 이후의 한국사회에서 만큼 노동운동이
처절한 불모지였던 곳이 있었을까?
제 2차대전 후의 한반도는 강대국 냉전의 제물로 떨어진 세계 사상 유례가 드문
치열한 이데올로기의 격전장이었다. 좌우익이 대립한 동족전쟁에서 수십만,
수백만의 사람들이 희생되고 학살되었다. 그리고 한반도의 남쪽에는 친미파인
우익정부가 자리잡고 좌익세력은 철저하게 말살해버렸다. 이 과정은 물론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좌익탄압을 핑계삼아 일체의 비판세력 제거, 일체의
대중운동말살로 연결되었다.
이때부터 한국 노동운동의 오랜 침묵이 시작된 것이다. "노동운동이란 곧
좌익운동"이라는 역사적인 낙인이 찍혀졌고, 노동운동이니 노동자니 하는 노자만
발음해도 사람들은 '빨갱이'로 몰릴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노동조합이 없는 것도 아니고 노동운동이란 용어가 아주 사라진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이승만 시대부터 정치권력의 철저한 통제 아래
놓여진 어용단체, 어용운동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풍토 아래서 노동운동은 장기간 불모지대로서 존속할 수밖에 없었다.
6^3456,12,15^ 이후의 오랜 기간 동안, 사회의 모든 계층의 사람들 대부분이 보신책에
급급한 피해망상증 환자가 되어 노동운동은 생각도 말아야 할 타부가 되었다.
야당은 물론이요, 권력에 대해서 다소 비판적인 지식인들도 노동문제만은
언급하기를 꺼리게 되었고, 노동자들 자신도 아예 참된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 득책으로 되어버렸다.
전태일의 외로운 투쟁은 바로 이와 같은 가열한 탄압과 무거운 침묵의 시대에
전개된 것이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보자면 그야말로 '바보'짓이리만치
무모한 것이었다. 그것은 도대체 될 일이 아닌 것 같았다. 그가 싸우면 싸울수록,
그는 일층 무거운 벽에 부딪쳐 갔다. 그가 아무리 외쳐도, 아무리 싸워도, 세상은
관심조차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동료인 노동자들까지도 적극적으로
그와 합세하여 투쟁에 나서려 하지 않았다.
1970년 10월 7일 그는 모처럼만에 세상의 무관심의 벽의 일각을 뚫는 데
성공했다. 그는 새로운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그 희망은 잠시 반짝이다가 다시
사라지려 하였다. 신문보도에 인해 잠시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참상에 관심을
가지는 듯했던 사회여론은 다시 잠잠해지려 하고 있었다. 잠시 동요되었던
노동청과 기업주들은 몇 차례 노동자들을 속이며 시간을 끌다가 사회의 관심이
평화시장에서부터 멀어지자 다시 배짱을 내밀었다. 오히려 경찰까지 끼어들어
제약은 더욱 가열해졌다. 10월 7일 이후 한동안 술렁대던 노동자들은 다시 깊은
체념의 늪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10월 24일의 데모가 실패로 돌아간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것은 노동자들의 투쟁자세가 확고하지 못한 데 있었던 것이다.
기업주들이 작업장의 문을 닫고 내보내지 않았다고 해서 왜 노동자들이 그것을
뚫고 나오지 못했던 것인가? 경비원과 형사들 수십 명이 곤봉으로 막는다고 해서 왜
수백 명이나 모인 노동자들이 순순히 해산 당해야만 했던가? 삼동회 회원들은
어째서 확고한 자세로 모인 노동자들을 규합하여 데모를 결행하지 못하고,
기업주, 경비원, 형사들의 눈을 피해 뿔뿔이 흩어져 우물쭈물하고 있었는가? 바로
이와 같이 노동자들이 흔들리고 우물쭈물하였기 때문에 노동청과 기업주측에서는
노동자들의 투쟁을 깔보고 점차로 무성의한 태도를 나타내게 되었던 것이다.
10월 24일 데모 이후 전태일은 더 이상 기업주측의 약속을 믿지 않았다. 11월
7일까지 기다려보기로 한 것은 친구들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다시 그들이 타협적인
태도를 청산하고 싸움에 나설 기회를 기다린 것에 불과했다. 그날 2층 경비실에서
내려오면서 그는 옆에 있는 한 친구를 돌아보고, "11월 7일까지 개선이 안되면 어떻게
하겠느냐?"라고 물었다. 그 친구는, "그러면 다시 한판 벌이는 거다"라고 대답했다.
전태일은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이번 만큼은 몇 사람의 희생을 각오하고라도 반드시
데모를 성공시키도록 하자고 다짐하였던 것이다.
이 어려운 상황에서 모든 것을 내거는 단호한 투쟁이 아니고서는 아무 것도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노동자들을 단호한 투쟁으로
이끄는 것은 말로써나 이론으로써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피로써, 그 자신의
스물 둘의 젊은 목숨을 아낌없이 던지는 모범을 보임으로써 비로소 가능하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억압의 벽아래에서 인간의 고통에 대한 모든 인간적이 관심을 포기하고
침묵하고 있는 사회의 저 두터운 무관심의 벽을 깨뜨리는 것도, 진정서나 말로 하는
호소로써 가능한 것이 아니라 오직 불타는 육탄의 항의로써 가능하다는 것을 그는
절실히 깨달았다 억눌리고 있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껏 통곡하게 하고,
그리함으로써 그들의 위축과 좌절을 떨쳐버리고 일어서게 하기 위하여 그는 병든
육신을 통곡의 횃불에 바치기로 한 것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불꽃의 모든 사람들의 눈에 빛을 던진다. 불꽃이 아니면
침묵의 밤을 밝힐 수 없다. 허덕이며 고통의 길로 끌려가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삶의
길을 비추어 보이는 것은 오직 불꽃뿐, 불타는 노동자의 육탄뿐.
얼음처럼 굳고굳은 착취와 억압과 무관심의 질서를 깰 수 있는 것은 오직
죽어가는 노동자의 참혹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불꽃뿐이다.
전태일은 자신은 죽음이 결코 헛되지 않으리라고 믿었다. 그것은 인간성에 대한
신뢰 때문이었다고 해도 좋다. '원섭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 뭉친
덩어리를 분해하기 위해 아름다운 색깔의 향을 피우겠다"고 하면서, 그 향내를 맡으면
덩어리는 저절로 풀어져서 다시는 뭉칠 생각을 아니할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원섭에게 그는 "너는 또한 보지 않을 수 없을 걸세"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존엄을 부르짖으며 시위하는 광경을 수없이 목격해왔다. 노동청기자들이
자신에게 격려의 말을 던지고 협조를 약속하여 그것이 마침내 평화시장에 간한
신문보도로까지 발전하였을 때에, 그는 불의한 억압의 손길에 의해 강요되었던
침묵은 반드시 깨어질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그리고 그는 보았다. 10월 7일의
신문보도를 접한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솟구쳐 오르는 분노와 자각의 물결. 당황한
억압자들의 동요. 더구나 때는 바야흐로 대통령 선거를 눈앞에 두고 여론의 힘을
발휘하는 절호의 기회였다.
여기서 그는 그의 죽음이 어떤 성과를 거두리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던 것
같다. 이 무렵 그는 친구들에게 간간이 지나가는 말처럼, "나 하나 죽어지면 뭔가
달라지겠지."하고 말하는 일이 찾아졌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렇게 말하자. 억압이 가장 가열한 사회에서는 죽음이야말로 그
억압을 뚫는 가장 유력한 전술의 하나이라고, 목숨을 거는 단호한 투쟁만이
노예의 굴레를 벗어나는 유일한 활로라고. 전태일의 죽음은 바로 인간답게 살기
위한 삶의 의지의 폭발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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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전야
11월 13일을 며칠 앞두고부터 전태일은 마음이 고요하지를 못했다.
근로기준법을 화형에 처하기로 했다. 그렇게 소중하게 품속에 간직하고 다니던
책. 쏟아지는 졸음을 쫓아내어가며 뚫어지게 보고 또 보던 책. 그의 모든 희망의
원천이었던 노동자들의 권리의 장전. 그것을 불태워버리기로 했다.
근로기준법에 있어서 노동자들이 살 수 있게 된 것이 아니라, 근로기준법이
있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참상은 더욱더 숨겨지고 전태일의 가슴은 더욱 분노로
터졌던 것이다. 있으나마나 한 법, 한 장의 휴지 조각. 8시간 노동문제는 다
무엇이며, 주휴제, 야간작업금지, 시간외 근무수당, 월차휴가, 생리휴가, 해고수당
따위가 다 무엇인가? 누구를 위한 법이며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법이란 말인가?
"평화시장을 보라!"
전태일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국민의 혈세를 받으며 노동자들의
피땀을 밟고 그 위에 선 정부가 뻔히 지켜지지 않고 있는 줄 알면서 가장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척하며, '근로기준법'이라는 빛좋은 개살구를
내세우고 있는 그 더러운 위선을 발가벗겨 폭로하고 공격하고 싶었던 것이다.
노동자들에게, 그리고 인간다운 삶을 바라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의 권리는
종이조각에 지나지 않는 그 허울좋은 법조문에 의하여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들 스스로의 불굴의 투쟁에 의해서만 쟁취되고 지켜지는 것이라는 진리를
일깨우고 싶었던 것이다.
며칠 째 불기가 꺼진 얼음장 같은 방바닥 위에서 전태일은 지그시 그의 손때로
까맣게 쩔어 있는 근로기준법 책, 심태식 저 "축조 근로기준법 해설"을
노려보았다. 저 헤진 책과 함께 그의 병든 육신의 생명도 이제 불길 속에 휩싸여
사라질 날이 가까워 있었다. 그 무슨 기이한 인연이란 말인가?
스물 두 해의 지루하였던 고통의 생애. 그러나 아직 스물 둘의 젊음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며칠 후면 아시게 될
것이다. 그때에 올 무서운 충격. 그것을 줄어야 하겠다고 생각했음인지 그는
이즈음 어머니에게 평소에는 하지 않던 몇 가지 이야기를 했다.
"어머니. 시장 일이 아무래도 크게 한판 벌여야 하게 생겼어요."
"왜? 네가 안하면 안되니? 제발 서른 살 될 때까지라도 좀 참아라. 이 에미가
불쌍하지도 않나?"
"허 참, 어쨋든 안할 수는 없게 되었으니, 요번 13일날 1시에 국민은행 앞으로
나와서 꼭 구경하세요. 어쩌면 아들 얼굴 오랫동안 못 보게 되실지도 모르니."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잡혀간단 말이냐? 아니면 네가 죽기라도 한단 말이냐?"
"그런 게 아니라, 한판 왕창 벌이고 나서 불리해지면 어디 일본 같은 데로
밀항이라도 해야 될지 모르잖아요. 그러고 나면 평화시장 근로개선 운동은
어머니가 내 대신으로 좀 해주세요."
"듣자듣자 하니 별 소리 다 듣겠다."
어머니는 불안했다. 이즈음 태일의 거동이 어딘지 모르게 수상한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혼자서 방 청소를 하고 있을 때 근로기준법 책이 눈에 띄었다.
'보기만 해도 징그러운' 책이었다. 그날따라 꼭 저놈의 책 때문에 무슨 일이 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전류처럼 온몸을 휩쌌다. 어머니는 책을 집어서 부엌에
걸려 있는 빈 솥 안에다가 숨겼다. 어머니는 기억으로는 이때가 11월 11일.
11월 12일 아침. 이날은 전태일이 그의 어머니와 동생이 살고 있는 집을 영원히
떠나는 마지막 날이었다. 그날 밤은 13일날 사용할 플래카드를 만들기 위하여
친구집에서 보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아침에 그는 집을 나서야 했다.
집을 떠날 때의 전태일의 모습은 가족들이 보기에 참으로 이상하였다. 그는
평소에 옷차림 같은 것에 별루 신경을 쓰지 않고 아무렇게나 텁수룩한 모습으로
다니는 편이었는데, 그날 아침 따라 웬일인지 유난히 깨끗한 차림새를 갖추려고
애를 쓰는 것이 아닌가? 간밤에 잠을 잤는지 안 잤는지 알 수 없었으나, 새벽부터
일어나 정성스레 세수를 하고 방을 깨끗이 정돈하고, 그리고는 거울 앞에서
머리를 몇 번 빗고, 작업복 바지도 새로 다리고 평소에는 입지 않던 헌 검정
바바리코트를 꺼내어 먼지를 깨끗이 털고 걸쳐 입는 것이었다. 그렇게 차림새를
갖추면서도 낯빛은 몹시 침울해 보였다.
얼마 후 그는 무엇을 찾는 듯이 두리번거렸다. 말할 것도 없이 근로기준법 책을
어디에다 감추셨느냐고 하면서 기어이 찾아내어 달라고 졸라댔다. 어머니는
모르겠다고도 하다가, 또 그 책 때문에 아무래도 사고가 날 것 같아서
내다버렸다고도 하다가, 나중에는 제발 그놈의 책 이제 그만 가지고 다니지
말아달라고 애원도 해보았다. 그러나 태일은 "다른 것은 다 어머니 말씀대로 할
수 있어도 이 일만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책을 안 내준다고 화까지
내었다. 어머니는 하는 수 없다고 체념하고 책을 꺼내주었다. 책을 받아든 그는
"죄송합니다"고 하면서 무엇을 더 말하려는 듯 잠시 머뭇거리다가 곧 입을 굳게
다물고 침울한 표정으로 한참 동안이나 묵묵히 앉아 있었다.
밥상이 들어왔다. 라면이었다. 말없이 식사를 하고 있는 그를 보고, 여동생 순옥이
옆에 앉아있다가 조심스레 "오빠, 15일까지 돈 좀 안될까?" 하고 물었다. 이
말을 듣고 태일은 고개를 떨구었다. 눈물이 앞을 가렸던 것일까? 그는 "순옥아.
미안하구나" 하는 한마디를 남기고는 젓가락을 놓고 일어서서 방문을 나섰다.
따라서 일어서는 순옥을 등진 채로 그는 다시, "순옥아, 며칠만 기다려라, 곧
월급 타올 테니 그리고 순옥아, 아무리 살기가 어렵더라도 어머니께 돈 때문에
졸라대지 않도록 해라" 하였다.
이 순간의 그의 가슴을 찢는 통곡을 우리가 말로써 표현할 수 있을까? 어떻게
무엇이라고 표현한단 말인가? 가족들에 대한 죄책감이 죽음의 길을 떠나는 이
마지막의 순간에까지 그의 심장을 비수처럼 후벼팔 때, 그것은 과연 누구의
탓이었던 것일까?
전태일은 막내 동생 순덕이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는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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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1970년 11월 13일.
그날은 아침부터 옅은 잿빛 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었다.
평화시장 일대에 감도는 긴장감은 10월 24일 데모 때보다 더욱 짙었다. 경비원들은
전보다 더 불어나 있었고 출동한 경찰대가 이곳저곳에 삼엄하게 진을 치고 있었다.
낮 1시.
각 작업장에서는 업주들이 종업원들에게 "오늘 몇몇 깡패 같은 놈들이 주동이
되어 좋지 못한 움직임이 있으니 절대로 가담해서는 안된다"고 주의를 주고
있었다. 경비원들과 형사들은 국민은행 앞길로 통하는 통로를 막고 노동자들을
못 나오게 하였다. 그러나 삼동회의 그 동안의 동원활동이 활발하였던 때문인지
삽시간에 약 5백명의 노동자들이 국민은행 앞길에서 웅성거렸다.
이 시각 삼동회회원들은 형사들의 눈을 피하여 평화시장의 건물 3층의
어두침침한 복도의 한 구석에 모여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회원 중 몇 사람은 이미 시장 경비원들에게 끌려가서 회사 사무실에
감금되어 있었다. 그날 아침 플래카드 제작책임을 맡았던 전태일과 한 또 한
사람의 회원은 준비된 플래카드를 몸에 감고 옷 속에 감추어 시장에 나왔다.
1시 30분경.
그들은 플래카드를 꺼내어 펼쳐 들고 아래로 내려갔다. 2층 복도에까지 왔을 때
형사 두 사람이 뛰어와서 플래카드를 빼앗으려 하였다. 전태일은 무어라고
소리치며 빼앗기지 않으려고 몸부림쳤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쓰여진
플래카드를 두고, 빼앗으려는 자와 빼앗기지 않으려는 자 사이에 밀치고 당기는
실갱이가 벌어졌다. 그 통에 종이로 만든 플래카드는 쉽게 찢어졌다. 몇 명의
회원은 형사들에게 심하게 얻어맞고 끌려갔다. 나머지 회원은 바싹 약이 올라서
"좋다! 플래카드 없으면 못할 줄 아느냐!"고 소리를 치며 국민은행 앞길로
뛰어내려가려 하였다.
이때였다. 전태일은 몹시 심각한 표정으로 친구들을 향하여, "너네들 먼저
내려가서 담뱃가게 옆에서 기다려라. 난 좀 있다 갈 테니" 하였다.
친구들은 다소 의아하게 생각하였지만 그의 말에 따라 그를 혼자 남겨두고
국민은행 앞길로 내려갔다. 그들이 그곳에 도착하였을 때 웅성거리던 5백여 명의
노동자들은 경비원들과 경찰들의 몽둥이 앞에 밀리며 이리저리로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사전에 연락을 해두었건만 신문기자들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먼저
내려온 회원들은 전태일이 내려오기를 기다리며 담뱃가게 옆에 서 있었다.
약 10분 후에 전태일이 내려왔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김개남의 웃소매를
끌어당기며 눈짓을 하여 그를 사람이 좀 덜 다니는 옆 고목으로 끌고 갔다.
"아무래도 누가 한 사람 죽어야 될 모양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여 김개남에게 성냥불을 켜서 자신의 몸에 갖다 대어달라고
부탁했다.
그 전날 저녁에 김개남은 전태일이 내일 "누구 한 사람 죽는 것처럼 쇼를 한판
벌여서 저놈들 정신을 번쩍 들게 하자"고 하는 말을 들은 일이 있었다. 성냥불을
켜서 갖다 대어달라는 전태일의 부탁이 심각하였기 때문에 불길한 예감이 퍼뜩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긴 했으나, "설마." 하는 생각에 그는 성냥불을 켜서
전태일의 옷에 갖다 대었다.
순간 전태일의 옷 위로 불길이 확 치솟았다. 친구들보고 먼저 내려가라고 한 뒤,
그는 미리 준비해두었던 한 되 가량의 석유를 온 몸에 끼얹고 내려왔던 것이다.
불길은 순식간에 전태일의 전신을 휩쌌다. 불타는 몸으로 그는 사람들이 아직
많이 서성거리고 있는 국민은행 앞길로 뛰어나갔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그는 몇 마디의 구호를 짐승의 소리처럼 외치다가 그 자리에 쓰러졌다. 입으로
화염이 확확 들어찼던 것인지, 나중 말은 똑똑히 알아들을 수 없는 비명소리로
변하였다.
때마침 그 자리에 있었던 한 회원이 근로기준법 책을 전태일의 불길 속에
집어던졌다. 이렇게 하여 근로기준법의 화형식은 이루어졌던 것이다.
쓰러진 전태일의 몸 위로 불길은 약 3분 가량 타고 있었는데 너무나 뜻밖의
일이나 당황하여 아무도 불을 끌 엄두를 못 내었다. 그러다가 한 친구가 뛰어와서
무어라고 소리를 지르며 잠바를 벗어서 불길을 덮었다. 불은 꺼졌다.
이때쯤 되어서 흩어져 가던 노동자들과 길가던 행인들까지도 갑자기 일어난
불길을 보고 와서 웅성거렸고, 뒤늦게 평화시장에 나타났던 기자들도 뛰어와서
수첩을 꺼내 들고 취재를 하기 시작했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 !"
그것은 지옥 끝에서도 볼 수 없을 것 같은 실로 참혹한 풍경이었다. 그의 몸은
옷의 엉덩이 부분을 제외하고는 전신이 숯처럼 시커멓게 타고, 온 살결은
화상으로 터지고, 그의 눈까풀은 뒤집히고, 입술은 퉁퉁 부르터서 그를 낳고
22년 동안 기른 어머니라 할지라도 누구인지 식별할 수 없을 정도의 모습이었다.
인간의 모습이라고 할 수 없는 그 참혹한 몰골로, 그는 마지막 남은 생명의 힘을
다 짜내는 듯 야차처럼 울부짖었는데,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는 외마디
소리를 제외하고는 도저히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기자들이 그의 곁으로 다가섰다.
인터뷰였다. 참혹한 인터뷰였다.
그들은 아마 "동기가 무엇이냐"고 묻는 듯했다. 전태일은 무어라고 입술을
움직거렸는데 발음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까맣게 탄 얼굴 근육을
실룩거렸는데, 우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잠시 후 그는 또다시
길바닥 위에 쓰러졌다. 기절한 모양이었다.
앰블런스 차가 왔다. 친구 두 사람이 그를 들어 차에 올려놓았다. 그는 인근의
한 병원(메디칼센터)으로 옮겨졌다. 이때가 2시경.
한 재단사가 분신자살했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평화시장 일대에 퍼졌다. 그러나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국민은행 앞길 부근의 행상들이나 길가던 행인들은 분신자살 현장으로 몰려들어
구경을 하고 있다가 참혹한 광경에 낯을 찌푸리고 하나 둘 돌아서고 있었다.
소식을 듣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재단사들과 그 밖에도 그들이 하는 일을
알고 있었던 수십 명의 노동자들이 달려왔다. 그들만은 이 죽음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2시 30분경.
그들은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데모를 벌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누가 전태일을 죽였는가?"
"우리도 사람이다. 16시간 노동이 웬말이냐?"
플래카드가 없었다. 빼앗기고 없었다. 빼앗긴 플래카드 대신, 최종인을 비롯한
몇몇 삼동회원들이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썼다. 그 피의 플래카드를 펼쳐들고
그들 분노에 미친 젊은 노동자들은 긴급 출동한 기동경찰과 혈투를 벌이면서
동대문 쪽으로 밀려갔다.
잠시 후 그들은 경찰의 곤봉 아래 머리가 깨어지고 구둣발 아래 짓밟히면서
경찰서로 개처럼 끌려갔다.
병원으로 옮겨진 전태일은 응급치료를 받았는데, 온몸을 붕대로 감아 사람을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가 병원으로 실려갈 때, 그의 친구 하나가 쌍문동
태일이네 집으로 달려가서 어머니를 모시고 왔다. 그 친구는 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씨에게 사건 경위를 약간 이야기하고 그러나 생명에는 아무 지장이 없을
것 같으니 크게 염려하실 것 없다고 하였는데, 이소선 씨는 헐떡거리고 달려와서
전갈을 해주고 있는 아들 친구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는 것을
보고는 모든 것을 각오했다.
그녀가 병원 안으로 뛰어들어 가니 어디가 어딘지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중에도,
어디선가, "선생님! 물 좀 주시오!" 하고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즉각적으로
그것이 아들의 음성임을 알았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달려가서 "태일아!" 하고 불렀다.
태일은 어머니가 오신 것을 알고는 어머니와 함께 병실 문을 들어서는 친구를
향하여, "엄마한테 연락하지 말지." 하면서도 무척이나 반가운 듯하였다.
"어머니, 놀라시면 안됩니다."
태일이 어머니에게 한 첫마디는 이것이었다. 어머니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아들의 얼굴을 만져보니 이미 다 굳어 있었다. 팔과 다리도 굳어서 펴지지가
않았다. 그러나 화기는 약간 가신 듯, 말소리만은 또랑또랑한 것을 보고 어머니는
외상이 심할 뿐 죽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실날같은 희망을 가져보려
애썼다 그러나 역시 죽을 것 같았다.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애쓰면서 어머니는 죽어가는 아들의 가슴에 손을 얹고
기도했다.
"근로자를 위하여 애쓰는 태일이의 뜻이 이 모양으로 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면, 하나님 뜻대로 하옵소서. 참새 한 마리도 당신의 뜻이 아니고는 떨어질 수
없다고 하였으니 이 가엾은 목숨도 당신 뜻대로 하소서."
기독교 신자이신 어머니는 품 속에 품고 온 성경책을 아들의 머리맡에
놓아주었다. 그러는 어머니의 얼굴을 쳐다보며 전태일은 말했다.
"어머니 담대하세요. 마음을 굳게 가지세요. 그래야 내가 말을 하겠습니다."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보고 아들은 말을 계속했다.
"어머니, 우리 어머니만은 나를 이해할 수 있지요? 나는 만인을 위해 죽습니다.
이 세상의 어두운 곳에서 버림받은 목숨들, 불쌍한 근로자들을 위해 죽어가는
나에게 반드시 하나님의 은총이 있을 것입니다. 어머니, 걱정 마세요. 조금도 슬퍼
마세요. 두고두고 더 깊이 생각해보시면 어머니도 이 불효자식을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머니, 저를 원망하십니까?"
어머니는 웬일인지 마음이 착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흉하게 탄 아들의 얼굴에서
눈도 돌리지 않고 태연하게 말했다.
"나는 너를 이해한다. 어찌 원망하겠니? 원망하지 않는다."
아들은 빙그레 웃었다.
"역시 우리 어머니는 나를 이해해."
한마디를 하고는 손을 내밀려는 듯 몸을 움칫하다가 되려 잠잠해지며, "어머니,
내가 못다 이룬 일 어머니가 꼭 이루어주십시오" 하였다.
못다 일룬 일 어머니가 꼭 이루어달라는 아들의 이 한마디는 어머니의 가슴에
깊이 파고들어 박혔다. 입술을 깨물어 그 말을 되새기면서 어머니는 아들에게
약속을 했다.
"그래, 아무 걱정 마라.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기어코 내가 너의 뜻을 이룰게."
태일은 "어머니, 정말 할 수 있습니까?" 하고 세 차례나 되물어서 "그래,
기필코 하고 말겠다"는 어머니의 대답을 듣고 나자, "약속합니다!"하고 소리치며
움직이지도 않은 몸을 움직이려 들려고 하였다. 그러는 아들을 가만있으라고
제지하고 나서, 어머니는 그제서야 이대로 얘기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의사를
만나 어떻게 될 것인지를 물어보고 치료를 부탁해야 되겠다는 정신이 들었다.
그때 전태일은 어머니에게 친구들을 불러달라고 부탁하였다. 병원에 와 있던
서너 명의 친구들이 그의 머리맡으로 다가섰다.
" 자네들, 부모에게 효도해야 하네. 뭐니뭐니 해도 사람이란 부모에게
잘못하면 안돼 너희 부모들께 효도하고, 그러고 조금 시간이 남으면 우리
어머님께도 날 대신해서 효도를 해주게. 우리가 하려던 일, 내가 죽고 나서라도
꼭 이루어 주게. 아무리 어렵더라도,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되네. 쉽다면 누군들
안하겠나? 어려울 때 어려운 일 하는 것이 진짜 사람일세. 내 말 분명히 듣고
잊지 말게.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이렇게 당부하면서 전태일은 친구들에게 대답을 요구했다. 친구들은 잠시
아무말도 나오지 않았다. 전태일은 벌떡 일어나려고 하면서 큰 소리로,
"왜 대답하지 않는가!"
하고 외쳤다. 놀란 친구들이 급히 그를 제지하여 그대로 누워 있게 하고는,
북받치는 울음을 삼키며 "네 말대로 꼭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전태일은
다시 친구들에게 "큰소리로 맹세하라"고 요구하였다.
"맹세한다!"
전태일의 친구들은 큰 소리로 외쳤다. 그제서야 전태일은 눈을 감으며
잠잠해졌다.
전태일의 어머니는 추워서 떨고 있는 아들을 치마를 벗어 덮어주고는 의사에게로
갔다. 의사의 말로는 1만 5천원짜리 주사 두 대만 맞으면 우선 화기는 가시게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어머니는 훗날 집을 팔아서라고 갚을 터이니 주사를 맞게 해달라고
의사에게 매달리자 의사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그러면 근로감독관에게 가서 보증을
받아오라고 했다. 분신자살 소식을 듣고 노동청에서 평화시장으로 급히 파견되었던
근로감독관 한 사람이 병원에까지 전태일을 따라와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근로감독관에게로 가서 보증을 서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그는
"내가 무엇 때문에 보증을 서요?" 하고 퉁명스레 내뱉고는 도망치듯 그 자리를
피해버렸다. 이 악착 같은 말썽꾼이 미워서 였을까, 아니면 노동청으로부터
전태일을 살릴 것 없다는 무슨 지시라도 받고 있었던 것일까?
어머니가 다시 의사에게로 가서 애원을 하니 의사는 고개를 흔들며, "그 약이
지금 여기에는 없으니 성모병원으로 옮기도록 하라"고 했다. 이때까지 전태일은
간단한 응급치료만 받았을 뿐 서너 시간을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명동 성모병원으로 옮기기로 했다. 이때 근로감독관이 다시 나타나
전태일들과 같은 차를 타고 성모병원으로 갔다. 차중에서 전태일은 근로감독관이
어머니와 하는 소리를 듣고나서는,
"사람이 그럴 수가 있습니까? 감사가 끝났다고 그렇게 배신할 수가 있소?
내가 죽어서라도 기준법이 준수되나 안되나 지켜볼 것이오." 하면서 차를 타고 가는
동안 내내 조금도 가만히 있지를 않았다.
성모병원에서는 그를 응급실에 얼마간 두었다가 입원실로 옮겼는데 이미 의사의
진단은 희생할 가망이 없다는 것이었다. 입원실에서도 별다른 치료를 해보지
못하고 거의 환자를 방치해두다시피 하였다.
어머니는 내내 옆에 서서 죽어가는 아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전태일은
목이 마르다면서 물을 달라고 수없이 졸라대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물을 마시면
화기가 입 속에 들어가서 영영 살릴 수 없게 된다는 생각에 물을 줄 수가 없었다.
나중에는 차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어서 갈증이라도 면하게 해주려고 가제에
물을 적셔서 입을 축여주었다.
저녁이 되면서부터 전태일은 기력이 탈진해가는 듯 잠잠하게 누워 있었다.
한동안 혼수상태에 빠진 듯하더니 눈을 떠서 힘없는 소리로 "배가
고프다."라고 하였다. 12일 아침 집에서 라면 한 그릇 먹고 나간 후로 이틀
동안 아무것도 안 먹고 굶었던 그였다. 이 한마디, 그의 스물 두 해의 고통을
말해주는 이 한마디가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밤 10시가 조금 지나 간호원이 침대를 옮기려는 순간, 그는 고개에 힘을 주려고
하다가 숨이 막혀 운명하였다.
청옥 시절의 동창들에게 보내는 편지의 형식으로 그가 우리 모두에게 남긴
유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사랑하는 친우여, 받아 읽어주게.
친구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주게.
그리고 바라네. 그대들 소중한 추억의 서재에 간직하여 주게.
뇌성 번개가 이 작은 육신을 태우고 꺾어버린다고 해도
하늘이 나에게만 꺼져 내려온다 해도
그대 소중한 추억이 간직된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을 걸세.
그대들이 아는, 그대 영역의 일부인 나
그대들의 앉은 좌석에 보이지 않게 참석했네.
미안하네. 용서하게. 테이블 중간에 나의 좌석을 마련하여 주게.
원섭이와 재철이 중간이면 더욱 좋겠네.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의 전체의 일부인 나.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다니러 간다네. 잠시 쉬러 간다네.
어쩌면 반지(지환 금력을 뜻함. 엮은이)의 무게와 총칼의 질타에 구애되지
않을지도 모르는, 앓기를 바라는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내 생애 다 못 굴린 덩이를, 덩이를
목적지까지 굴리려 하네.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또다시 추방당한다 하더라도 굴리는 데, 굴리는 데,
도울 수만 있다면
이룰 수만 있다면.
가장 인간적인 사람들의 가장 비범한 삶
"전태일 평전"의 개정판을 내면서 그 발문을 서달라는 청탁을 받고 깊은 상념에
잠긴다. 전태일을 노동운동의 불꽃으로 부활시킴으로써 노동운동뿐만 아니라 학생운동,
농민운동, 재야민주화운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이 책에, 저자인 조영래의 서문도
발문도 없는 것이 안타깝고 서글프다. 세계사적 대격변의 와중에서 표류하는 오늘의
참담한 민족현실을 볼 때, 조영래가 살아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기에 이러한
안타까움이 더욱 크다.
사실 전태일은 그의 위대한 죽음으로 그의 삶이 더욱더 빛나는 것이지만, 조영래는
그의 빛나는 삶으로 전태일의 뜻과 더불어 우리 모두의 꿈과 희망을 이룰 인물이었다.
'전태일 사건'을 계기로 운동의 새로운 차원을 열었고 조영래와의 어울림으로 운동을
힘있게 전개할 수 있었던 나로서는, 조영래 없는 세상이 싫기도 하거니와 조영래가
직접 이 글을 썼으면 하는 아쉬움이 너무 커, 이 글의 집필을 몇 번이나 거절했으나
숙명적 인연 때문인지 끝내 거절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내가 어찌 전태일에 대해, 조영래에 대해, 그리고 이소선 어머니와
평화시장의 노동형제들에 대해, 그리고 노동운동을 비롯한 사회변혁운동에 위대한
길잡이가 된 "전태일 평전"에 대해 할 말이 없겠는가. 더욱이 '영화 전태일'의
제작을 계기로 '투사'로서만 비춰져온 그의 모습을 바로잡아, 그의 참으로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이 평전의 개정작업에 착수한다고 하니, 전태일의
비범한 투쟁에서보다 그 밑바탕에 흐르고 있는 그의 사랑과 열정과 지혜와
성실에서 더 큰 교훈을 얻어온 나로서는 몇 마디 말을 보태지 않을 수 없다.
전태일은 한마디로 성자로서의 인품과 조건을 두루 갖춘 인물이다. 전태일은
단순한 투사가 아니다. 본래 단순한 투사가 있을까마는 전태일의 경우는 투사로만
인식되는 것이 너무나 억울할 정도로 그의 따뜻하고도 고결한 인품이 돋보이는
사람이다. 가히 성자의 인품을 그대로 갖추고 있었다.
전태일은 넉넉치 못한 가정에서 자랐으면서도, 스스로 "불우했던 과거를
원망한다면 그 과거는 너의 영역의 영원한 사생아가 아니냐"라고 반문할 정도로
불우한 환경 때문에 좌절하거나 타락하지 않고, 오히려 불우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키우고 그들의 처지를 개선해주기 위해 집요하게 노력했다.
전태일은 구두닦이, 신문팔이 등 밑바닥 생활을 하면서도 인간구원과
사회개혁의 높은 이상을 잃지 않았다. 인간구원과 사회개혁이 중요해서가 아니라,
한 인간이 엄청난 고난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높은 이상과 아름다운 꿈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더 없이 소중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전태일은 버림받고 실패하고
고뇌하면서도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해 끝까지
도전하였고, 마침내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온몸을 내던졌다. 전태일만큼 자기의
뜻을 이룬 사람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
전태일은 가난과 질병과 시련에 처해서도 인생을 항상 낙관했다. 이 평전에 실린
몇 장의 사진에서도 그의 명랑함과 활달함을 확인 할 수 있다.
전태일은 공부하고 싶은 간절한 열망으로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지만
학교교육을 받을 기회는 거의 갖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몇 푼 되지도 않는
석유곤로와 입던 바지를 팔아 통신강의록을 받아볼 정도로 향학열이 대단하였다.
마침내 청옥고등공민학교에 입학하여 길지 않은 기간이나마 학창생활을 보낸 그는
"정말 하루하루가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고 토로할 만큼 '한없는
행복감'에 젖기도 하였다. 이런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배움에의 열정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무감각한 일상을 반성하게 되며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귀중한 교훈을 얻게 된다.
전태일은 학교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어도 사물을 정확하게 통찰하는 명석함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그의 사상과 행적을 예술적으로까지 표현하는 문장력을 지니고
있었다. 전태일뿐만 아니라 이소선 어머니와 평화시장의 노동형제들 또한 하나같이
명석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의 명석함이란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얻어지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나는 내 나름대로
'사랑의 철학'을 정립하기도 하였다. 사랑이야말로 지식과 지혜의 원천으로서 무한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은 전태일의 삶에서 우리가 배우는 최대의 교훈이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전태일은 우리에게 투쟁을 가르치기보다 인간에 대한 사랑과
그 실천을 가르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전태일에게서 '가장 인간적일
때 가장 진보적이 된다"는 명제를 배우게 된다.
인간해방과 사회개혁을 위한 전태일의 투쟁이 참으로 위대하지만, 투쟁 이전에
그의 진실되고 아름답고 성스럽기까지 한 삶이 더욱더 감동적임을 우리는
토로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전태일을 이처럼 사랑하고 존경하고 경탄하는
것은 그의 비범한 투쟁 때문만이라기보다, 역경을 이겨온 그의 강인한 정신력과
고난 속에서도 꿈과 사랑을 키워온 그의 원대한 이상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전태일은 우리에게 과거만을 일깨워주는 것이 아니라 꿈과 사랑으로
미래를 창조할 수 있도록 해준다고 할 수 있다.
전태일은 스스로 뛰어나기도 했지만 성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들을 성자로 키운
이소선 어머니와 그의 뜻을 끝까지 따른 평화시장의 친구들, 그리고 "전태일 평전"의
집필로 전태일 사상을 정리하고 전파한 조영래 변호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가 인간구원을 위해 생명까지 바치는 큰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때문임을 성경은 시사하고 있다. 가난한 이웃집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예수는 그의 어머니의 요청 때문에 아직 '자기의 때'가 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기적을 행한다. 예수의 이웃사랑은 그의 어머니
마리아의 이웃사랑에서 연유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 하겠다.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아픔을 안아야 했고., 나아가 아들의 뜻을 펴는 일에 평생을 바쳤으니 예수의
어머니가 성모로 추앙받는 것을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전태일의 경우도 이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전태일이 쓴 수기를 보거나
이소선 어머니의 회고를 들어보면 전태일이 가난하고 억눌린 이웃을 그토록
사랑하도록 만든 것은 이소선 어머니임을 알 수 있거니와, 아들이 못다 이룬 뜻을
이루고자 한평생 생명을 건 투쟁을 해왔던 점을 상기할 때 이소선 어머니는
성모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전태일도 대단한 사람이지만 이소선
어머니도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다. 이소선 어머니의 헌신적 투쟁은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일이지만, 그 밑바탕에 깔린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날카로운
통찰력과 지칠 줄 모르는 투쟁정신은 전태일이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요인도 된다. '전태일 사건'이 있은 후,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란 말이
나왔던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전태일의 뜻을 세상에 펴는 데 전태일의 평화시장 친구들은 마치 성경의
사도들처럼 끝까지 훌륭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고 한
전태일의 유지를 세상에 전파하는 데 가히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역시 이
시대의 성전이라 할 "전태일 평전"을 집필한 조영래 씨이다. 흔히 바울이
없었다면 예수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는데, 전태일의 경우 조영래가 있었기에
전태일의 뜻이 보다 더 힘있게 펼쳐질 수 있었다.
"전태일 평전"은 조영래가 민청학련 사건 이후 수배상태에서 3년여에 걸쳐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해 집필한 '전태일 복음서'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전태일의 사랑과 투쟁만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저자인 조영래의 사랑과
지혜와 투쟁을 아울러 담고 있다고 보아도 조금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전태일의 삶과 투쟁을 알고 전태일의 수기, 일기 등을 깊이 알면 알수록,
저자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이 평전을 썼는가를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또한 이
책을 읽고 나면, 조영래가 전태일의 삶과 투쟁과 죽음, 그리고 전태일이 쓴 기록을
얼마나 잘 알고 깊이 연구했는가를 알 수 있다. 조영래가 요절한 것도 따지고 보면
이 책의 집필에 혼신의 정열을 다 바쳤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 "전태일
평전"을 4복음서와 서한집을 합한 신약성서와 흡사한 성서라고 말하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 책으로 엄청난 교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조영래는 이미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탁월한 사회개혁가요
인권변호사였다. 그는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 1970년대 말까지의 학생운동과
재야민주화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1980년 대에는 인권변호사로서
망원동 수재사건, 부천서 성고문사건 등을 도맡아 우리 나라 인권 변호의 새
장을 열었다. 이처럼 탁월한 능력과 훌륭한 업적은 그의 천재성과 무관하지 않다.
조영래는 서울대학교 입학시험에서 전체 수석을 했다. 수석도 수석 나름이겠지만
조영래의 수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조영래의 천재적 업적으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및 재야민주화운동은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다른 한편 그의 천재성으로 말미암아 학생운동과 재야민주화운동이 국민대중
속에서 자부심과 긍지를 드높일 수 있었다.
굳이 이 글에서 조영래의 천재성을 되새기는 것은 그의 위대한 천재성은 바로
인간에 대한 그의 남다른 사랑에서 비롯된 것임을 지적하고 싶어서이다. 조금만
불쌍한 사람을 보아도 마음 아파하는 조영래의 심성은 전태일의 심성과 꼭 같았던
것이다. 전태일도 조영래도 그리고 이소선 어머니도 하나같이 천재이고, 그
천재성을 모두가 인간에 대한 열렬한 사랑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우리 모두에서
사랑의 중요성을 거듭 인식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전태일 평전"은 이러한 조영래의 사랑에 기초한 천재성으로 전태일의 위대한
삶과 투쟁을 표현한 것이다. 나는 전태일과 조영래와 이소선 어머니를 높이
평가하는 것만큼이나 이 "전태일 평전"은 전태일에 대한 깊은 연구와 더불어
전태일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강렬한 사명감 못지 않게, 전태일을 열렬히 사랑할
뿐만 아니라 민중을 뜨겁게 사랑할 때만이 내놓을 수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한 인간이 다른 사람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입장에 설 줄 알아야 하고
그 사람과 똑같이 되지는 못할지라도 그 사람과 비슷하게는 되어야 한다. 그래서
성인의 경지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스스로 성인의 경지에 다다라야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전태일의 삶과 죽음, 나아가 전태일의 사랑과 투쟁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전태일과 같이 살고, 전태일과 같이 죽을 수 있는 결의를 다져보아야 한다.
조영래는 이러한 결의를 다지며 살아왔고 이런 결의에 충만해서 이 책을 썼기
때문에 이렇게 훌륭히 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전태일도 가고 조영래도 갔지만, 그들이 남긴 이 "전태일 평전"에서 우리는
오늘을 살고 내일을 개척하는 지혜와 용기와 사랑을 배우게 된다. 이 평전에
단순히 투쟁의 지침서가 아니라 시련을 극복하는 강렬한 의지를 심어줄 뿐만
아니라, 청소년들이 꿈과 희망을 키울 수 있게 하며, 나아가 인생을 밝고 아름답게
살게 하는 큰 교훈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마침 이 책의 개정판이 전태일이 산화한 지 25년째가 되는 해에 나오게 되니 그
의미가 더욱더 각별할 수밖에 없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강산이 두 번
반이나 변할 4반세기가 지났다. 더욱이 올해는 해방 50주년을 맞아 민족의 도약을
위해 새로운 비전이 요구되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전태일'의 의미도 새로운
차원으로 승화되어야 할 것이다. "전태일 평전"이 우리 사회를 서로 사랑하면서
살 수 있는 사회가 되게 하는 데 크게 기여하기를 바란다.
장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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