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봉의 길 / 박현숙
서예 공부 욕심을 행동으로 옮기기가 쉽지는 않았다. 우선 시간적 여유가 없었고 무엇보다 원하는 선생님을 찾기가 어려웠다. 최고에 배워야 최고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꿈을 꾸면 이루어진다더니 어느 날 문화원 벽을 장식한 플래카드에 오래도록 찾던 규빈선생님의 이름이 반갑게 다가왔다. 선생님은 울산을 대표하는 기관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으며 자신이 계발한 독자체를 보유한 서예의 대가이다. 가을 학기라서 일정이 바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냈다.
서예란 점과 선을 이용하여 미적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시각예술로 한국에서는 서예라 하고 일본은 서도, 중국은 서법이라 칭한다. 정목일 선생님은 서예를 수수하고 나긋하며 단아하다고 표현하였다. 선생님의 글씨는 품격이 있으면서도 따뜻했다. 그래서 내 마음이 끌렸다. 무엇보다 벼루 위에서 번지는 먹 향이 일상에 들뜬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어 좋았다.
열심히 집중하는 선배들 틈에서 야심 차게 시작은 했지만 붓을 잡으니 나이 탓에 손이 먼저 떨려왔다. 세상일이 쉬운 게 있으랴만 붓대를 바르게 잡는 일도 내겐 어려운 작업이었다. 팔에 힘을 주다 보면 자세가 틀어지고 자세를 바르게 하다 보면 팔이 굳었다. 선생님이 일러준 대로 바른 자세를 가지려 해도 몸과 붓은 따로 움작여 완법에 맞지 않았다.
젊은 시절, 산후인데도 불구하고 운동회 매스게임 지도한다며 무리하게 몸을 써서 류마티즘성이라는 불치병을 얻었다. 근무하는 학교에 여교사가 열다섯 명이나 있었음에도 모두가 못하겠다고 몸을 사리니 37kg의 몸무게를 유지한 내게 마지막 명이 떨어졌다. 교장 선생님의 부탁을 냉정하게 거절하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문제는 자세였다. 글을 쓸 때는 살짝 팔을 높이 들라는 주문이 내게는 무척 난이도가 높은 숙제였다. 약점을 이기는 길은 연습밖에 없었다. 붓을 놓고 있을 때도 머릿속에 글자 모양을 그리며 부지런히 획을 그었다. 세로획을 바르게 쓰기까지 수십 번 헤맨 후 제법 휙의 모양새가 갖춰졌다. 세로획이 예를 갖추려면 고개를 숙여야 한다고 말씀하신 선생님의 유머로 글씨 쓰는 일에 조금씩 재미가 붙어 한 고개를 넘었다. 기본 가로획은 시작점에 역입으로 붓을 제대로 놓는 것도 어렵지만 잠두로 만들어야 하는 끝마무리가 더 어려웠다. 가로 세로획만 제대로 되면 절반의 성공은 한 것 같은데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서예 용어 중에 획의 뼈대를 중봉이라 한다. 붓끝으로 점을 찍거나 화를 그을 때, 붓끝이 반드시 그 중간을 통과하거나 찍혀야 한다. 그러려면 붓을 세워서 수직으로 움직여야 한다. 반드시 지켜야 한다. 중봉 운필이 바로 서법의 전통적 필법이다. 글씨를 쓸 때, 잡념이 있거나 주의가 산만해지면 붓이 먼저 알고 제 길을 벗어나기 일쑤다. 그래서 중봉을 터득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동안 내 이름 앞에는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이라는 대명사가 붙어 다녔다. 컴퓨터가 없던 시절, 학교의 중요문서는 거의 내가 도맡아 썼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더니 초등학교 1학년 때 숙제하고 있는 나를 보고 친척 오빠가 육학년 보다 잘 쓴다고 칭찬해 주었다. 그분이 그냥 던져본 말인지도 모르는데 그 이후로 글씨를 더 정성들여 쓰게 되었다.
한글 서예는 여전히 어려운 작업이라 자음과 모음을 쓰면서 두 번째 고개 넘기가 시작되었다. 언제나 탁자 중심에서 당당하게 나를 지키고 있는 벼루, 품격 있는 향기로 심성을 다스려 주는 먹. 붓과 한마음 한뜻으로 희로애락을 다 받아 주는 화선지, 문방사우는 어느새 사랑하는 가족이 되었다. 글씨를 쓰기 전에 우선 마음을 정갈하게 다듬어 붓을 곱게 추스르고 시선을 떼지 않으려고 했다. 오늘도 정성껏 마묵을 하고, 자세를 바르게 하여 화선지 위에 한 자 한 자 적어 내려가는 것이 내 삶의 궤적이 된다.
서예는 삶과 다를 바 없었다. 거친 것은 부드럽게, 급할수록 느긋하게, 무거운 것은 가볍게, 가벼울 때는 무겁게. 희로애락과 거기에 대처하는 방법이 서예에는 다 들어 있었다. 글쓰기를 하면서 경중을 알았고, 매 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우게 되는 것이다. 중용의 중은 우도 아니고 좌도 아니며 위도 아니고 아래도 아님을 서예를 공부하면서 알았다. 살아오면서 많은 갈등으로 수업이 흔들렸던 내 마음을 잡기 위해 중용의 중을 마음 가운데 두고 지내왔다. 불교에서는 마음 심자 하나를 터득하기 위해 팔만 사천 경이 필요했다는데 내 안에는 잡경만 가득했다.
좌약우강, 상약하강, 좌하우상을 바르게 익혀 스승님이 가르쳐준 마음가짐으로 간가를 한다면 언젠가는 중봉의 경지를 넘을 수 있으리라. 그때는 이런저런 이유로 바로 서지 못했던 내 삶도 곧추서리라. 묵색창윤을 기다리며 벼루의 먹을 찍어 화선지 위에 힘차게 획을 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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