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일(James Scarth Gale)은 1888년 25세에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이다. 그는 성경번역에 공헌했고, ‘한영사전’과 우리의 고전문학을 번역하여 서양에 소개하는 등의 많은 업적을 남긴 한국학자였다. 게일이 조선에 들어와서 10년간의 보고 들은 것들을 기록한 Korean Sketches는 구한말 우리 민족의 정서와 미처 알지 못했던 생활상들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게일은 상민들을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거칠고 투박하며 꾸밈이 없는 상민들이야말로 조선을 가장 조선답게 하는 이 땅의 보석이라고 여겼다. 서양 선교사의 눈에 비친 구한말의 기록은 어떤 부분은 매우 낮 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망해가는 나라의 무기력과 절망, 불합리함과 불법 속에서 고생하던 선조들의 삶이 애잔하게 그려진다.
상놈(상민, 일반 백성)- 조선의 빛이자 전부, 최고의 보석
(중략) 조선의 철학은 이렇게 말한다. 남자에게 필요한 것은 아름다움이 아닌 강인함이라고.
“강인함은 남자이고, 아름다움은 여자이다.”
그리고 상놈은 강인하다.
당신은 이들을 겪은 적이 없으며, 이들도 당신을 겪은 적이 없다. 아마 이곳에서 길을 걷다 보면 곧 상놈이 와서 부딪힐 것이고, 그 기름기 흐르는 어깨를 당신에게 문지를 것이다. 또 그럴 때마다 얼근 고개를 숙이고 인사하는 상놈을 보게 될 것이고, 밝은 미소 속에 깃든 말할 수 없이 깨끗한 양심과 함께 하루하루를 성스러운 날로 채워 나가고 있는 그의 삶 또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내 앞에 당당히 서 있던 한 상놈이 있었다. 조선 땅 깊숙이 떠나는 나의 여행에서 길을 안내해 주었던 그을린 얼굴의 땅딸막했던 이. 그는 항상 우리 앞길을 정리했고, 모든 일에 내 편의를 우선시했다.
하루에 60킬로터나 여행했던 어느 쌀쌀했던 저녁, 하룻밤 묵기 위해 어떤 집으로 들어갔던 우리. 주인은 방도 없고, 먹을 것도 없고, 외국인에게 쓰일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했다. 온 마을에 물어봤지만 모두가 같은 대답이었다. 그곳에서, 이 세상 어디에도 기댈 곳 없던 나는 혼자였다. 벌써 60킬로미터나 달려온 새까맣게 탄 이 작은 덩치의 상놈 외에 내가 기댈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그는 화를 못 참고 마을 사람들과 약 8초 동안 입씨름을 하더니,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닫자 제일 앞장서서 이야기하던 키 크고 호리호리한 사람에게 돌아섰다. 그러곤 그 도포자락을 양손으로 움켜잡고 순식간에 땅으로 처박아 버렸다. 이것으로 우리는, 주인은 그들이 아니며 오히려 우리가 온 마을을 내쫓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결국 주민들은 우리에게 방도 내주고 밥과 달걀도 주며 하룻밤 편히 지낼 수 있게 해주었다.
그 후로 오랫동안 나는 까만 얼굴의 이 왜소한 상놈에게 전적으로 의존했다. 그는 단 한 번도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나를 등에 업고 개울을 건너고, 자신의 안위는 팽개친 채 눈과 빗속에서도 굳게 버텼다. 반도를 여행하는 내내 마주친 모든 상황을 즐겁게 만들어준 사람. 그는 마치 형제 같이 믿음직하고 하늘의 해처럼 한결같은, 인생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동반자였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까지 했던 것일까? 고향의 온돌방에서 지내며 벌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적게 준 돈 몇 푼 때문에? 그것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이것이 우정과 명예의 문제였던 것이다. 사는 곳이 달라 우리가 떨어져 지낸 것이 벌써 오래지만, 인편이나 우편으로 아직도 자주 한글로 쓴 두꺼운 편지 뭉치를 받는다. 아직 잘 살고 있다는 자신의 안부를 전하며, 나의 안녕과 장수를 기원하는 편지를. 작은 덩치에 그을린 얼굴을 한 상놈의 서투르고 조심스런 서명이 담긴 편지를.
제임스 S 게일 지음, 최재형 옮김, 『조선, 그 마지막 10년의 기록(1888~1897)』(성남: 책비, 2019), pp. 92~93.
첫댓글 모처럼 한국교회사의 글을 보는군요. 아마 일부 독자들은 게일 선교사에 대해서조차도 생소한 분이 있을 지도 모릅니다. 게일의 가치관과 판단이 보이는데, 상놈에 대한 의미를 조금 잘 파악해야 합니다. 외국인의 시선 정도에 머물러 있습니다.
일리 있네요. 상당 부분 공감합니다.
공감합니다.
제임스 게일 James Scarth Gale
요약 캐나다 출신의 미국 장로교 선교자. 조선 선교사로 활동하며 성서를 한글로 번역했으며 학당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등 한국인의 교육을 장려했다. 1888년 대학교 졸업 후 YMCA의 지원으로 1889년 황해도 해주와 경상도 지방에서 전도를 시작했다. 1981년에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회로 옮겨 성서 번역에 참여해 마태복음서, 에베소서 등 신약성서 일부를 번역했다. 1897년에는 한국 최초 <한영사전>을 간행했다. 이 밖에도 한국의 역사·문화·언어를 연구해 많은 저작들을 남겼다.
이하 아래 Daum 백과사전 참조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01g2515a
캐나다 출신이지만 '미국' 장로교의 선교사라는 점이 조금 독특한 것 같습니다.
@노베 캐나다인 출신이지만 소속은 미국 장로교에 속해서 파송을 받았나 봅니다.
게일역 성경전서 신역신구약전서新譯新舊約全書
번역자 게일은 1888년 내한해서 1890년부터 성서번역위원으로 참여하였기 때문에 성경 번역의 경험이 풍부한 초기 내한 선교사 중 한 명이었다. 1900년 신약, 1910년 구약 번역이 완료되어 한글 성경이 출판된 직후 대영성서공회는 성경 개역(revision) 작업에 착수하여 1911년 개역자회를 조직하였는데, 게일도 참여하였고 1917년부터 회장직을 맡아 구약 개역 작업을 추진하였다. 그런데 게일은 번역 원칙과 방법에서 다른 번역자들과 의견이 달랐다. 대부분의 번역자들은 성경 원문과 한글 번역문이 그 뜻은 물론이고 양도 비슷해야 한다는 ‘축자적’(literal) 번역 원칙을 고수한 반면 게일은 ‘조선어풍’(朝鮮語風)이라 하여 한국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성경의 내용을 가감 없이,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히브리-영어식 문장이 아니라 부드럽고 쉬우며 매끄럽게 흘러가는 조선어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게일의 주장은 성경 본문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다른 번역자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특히 1921년 게일의 번역 원칙을 따른 「창세기」 교정지를 둘러싸고 번역자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전개되었고, 대영성서공회의 지지를 얻지 못한 게일은 결국 1923년 개역자회 회장직을 사임했다.
이외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링크 참조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76570
성경 번역에서 활약은 했지만 매끄럽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부산에서도 활동했던 제임스 스카트 게일
한국의 역사·문화·민속·언어에 해박했던 한국학의 대가였다. 부산에 왔던 첫 서양 선교사로서 부산 지방 기독교 형성에도 영향을 끼쳤다.
이외 한국한중앙연구원 링크 참조
https://busan.grandculture.net/Contents?local=busan&dataType=01&contents_id=GC04201389
종로5가 근처 연동교회만 알 것이 아니라 부산의 ㄱ기독교 선교 활동도 알아야 하겠습니다.
본문과 댓글을 보니 선교사님이 한국과 문화에 잘 밝으셨던 것 같습니다. 좋은 포스팅 감사합니다.
좋은 포스팅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알면 초기 내한 선교사를 알고 그들의 생애와 한국을 바라본 면면을 잘 알 수도 있습니다.
게일 선교사가 정식으로 신학 교육을 받지 않아서 다른 내한 선교사들과 결을 조금 달리하여 출판 등 문서사역을 주 특기로 했던 것 같습니다. 성경번역은 레이놀즈, 알렉산더 피터스가 잘 했고, 게일은 성경번역에 참여하긴 했지만 개인 번역인 사역에는 공을 들이고, 성서공회가 하는 번역은 많이는 참여하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신학교를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신학적 지식을 많이 요하는 성경번역보다는 한국학 쪽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 같습니다.
그랬군요. 좋은 설명 감사합니다 👍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