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씨 뿌리는 자 비유와 해설(마 13:1-23)
<IVP 성경배경주석>, pp. 1298-99.
13:3-4 보통 농부들은 밭을 갈지 않은 상태에서 씨를 뿌렸으며(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랬을 경우 본문과 같은 상황이 언제든 생길 수 있었다. 아마도 여기서 그랬듯이 농부는 씨를 뿌리든지, 아니면 씨앗 자루를 동물의 몸에 걸쳐 자루에 뚫은 구멍에서 씨가 떨어지게 했다. 밭에는 이렇게 다니는 ‘길’이 여러 갈래 나 있었다.
13:5-6 팔레스틴 경작지의 상당 부분은 바위 위에 토양층이 살짝 깔린 형태였으므로, 농부가 밭을 미리 갈지 않으면 모르고 바위 위에 파종을 함으로써 씨앗을 소모하는 낭패를 당하곤 했다.
13:7 가시떨기 역시 눈에 잘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뿌리를 뽑지 않고 그냥 자르거나 불태우기만 할 수도 있었지만, 그럴 경우 남은 뿌리에서 다시금 가시가 자라나 씨앗의 성장을 방해했다.
13:8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는 갈릴리 토양의 기준으로 볼 때 엄청난 풍작이다. 요단 계곡의 경우는 열 배에서 백 배의 수확이 가능했으므로, 백 배가 꼭 기적에 의한 풍작은 아니었다(창 26:12; 참고. 암 9:13). 하지만 팔레스틴 땅 전체를 놓고 볼 때 평균 수확량은 열 배 정도였으며, 따라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숫자는 모두 대단한 풍작이다.
13:10-23 씨 뿌리는 자 비유 해설: 말씀의 이해
제자들 중 일부가 끝까지 참고 견디지 못하리라는 것은 구약의 가르침과도 일치한다. 구약에서 사울과 같은 사람은 하나님을 순종하는 삶을 버리고 타락한 반면, 다윗과 같은 인물은 수많은 시련을 이기고 견뎌냈다.
13:14-15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이해하고 회개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사야 당시의 사람들과 다를 바 없었다(사 6:9-10).
13:16-17 몇몇 유대 문헌들은 구약의 의인들이 메시아적 구원과 하나님의 좀 더 완전한 계시가 허락되는 때를 갈망했음을 증언한다. 어떤 사람을(여기서는 13:15의 눈먼 자들과 달리 예수님을 본 사람들) 축복함으로써 다른 사람에 대해(여기서는 예수님) 말하는 것은, 당시에 통용되던 수사법 중 하나였다.
<톰슨Ⅲ 주석>, p. 2042.
13:13 비유로 말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즉 진리를 말해도 그들이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오히려 능욕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비유로 말함으로써 들을 귀와 볼 눈 있는 자에게만 진리를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13:17 신약 시대 성도들의 구속사적 축복 상태를 말하고 있다. 즉 구약 시대에는 구원의 복음이 모형과 예표였으나 신약 시대의 성도는 구원의 실체이신 그리스도의 계시를 직접 받았다(11:11; 히 11:1-13).
* 네 가지 종류의 밭
-길 가: 닳을 대로 닳아 빠져서 진리를 겸손히 수용할 마음이 아예 없는 뻔뻔스러운 마음 밭을 가리킨다.
-돌밭: 흙이 얕은 이 밭은 문자 그대로 경박한 마음을 가리킨다. 즉 진리를 신중히 받아들이고 엄숙히 그리고 철저히 따라가지 못하는 허약하고 나태한 마음을 가리킨다.
-가시떨기: 그 토양은 비옥하나 밭에 여러 가지 장애 요소로 인해 씨를 자라게 하지 못하는, 즉 자아가 분열된 마음을 가리킨다. 특히 이런 밭은 신앙 안에서 살기는 하지만 참 신앙의 결단을 하지 못하고 끝내 세상에 휘말리는 사람을 가리킨다. 한편 이 같은 사람을 괴롭히는 요소가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라는 사실에 유의하자. 따라서 성도는 신앙을 위협받을 만큼 세상 일로 염려해서는 안 되며 하늘나라의 영원한 기쁨을 이 세상의 거짓 기쁨과 바꾸어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도 안 된다(6:31-34).
-좋은 땅: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겸손한 마음을 가리킨다. 그러나 땅은 결코 그 자체로는 열매 맺지 못한다. 씨가 뿌려져야 하고 적당한 비와 알맞은 햇빛이 있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복음을 믿고 구원을 얻음도, 그에 합당한 신앙의 열매를 맺게 됨도 전적으로 나의 의지와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된 것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고전 3:7; 엡 2:8).
<베이커 성경주석: 신약편>, p. 46.
첫 번째 비유는 사람들을 씨를 받아들이는 다양한 토양에 비교함으로써 천국 메시지에 대한 다양한 반응을 보여 준다. 마태는 8~9장과 11~12장에서, 큰 믿음부터(8:5~13) 공공연한 거부(12:24)에 이르기까지 온갖 다양한 반응을 말했다. 이 비유에서는, 예수님이 전파하시고 임하게 하시는 천국에 대한 어떤 이해도 없는 사람들(13:19)에서부터 예수님의 메시지를 듣고 이해하며 많은 열매를 맺는 사람들까지 다양한 사람이 있다.
<IVP 성경주석>
(막 4:1-20 씨 뿌리는 자 비유) p. 138.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청종할 각오가 된 사람이라도 피상적인 반응은 위험하다. 뿌리가 전혀 없이 부주의하거나 피상적으로 듣는 사람들 혹은 지나친 걱정이나 쾌락(때때로 이들은 동일하게 위험하다)에 빠진 사람들은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오직 듣고 발아들이고 실천하는 사람들만이 열매를 맺을 것이다. 이 비유는 영적인 끈기를 가르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영적인 보상에 대한 약속이기도 하다.
(마 13:10-17 비유는 어떻게 작용하는가) p. 68.
예수님은 여기서 비유가 진리를 감추기 위해서 고안된 것이며, 따라서 사람들을 천국 바깥에 두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모든 사람은 그 비유의 의미를 꿰뚫어볼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 능력은 인간적인 영리함의 결과라기보다 제자들에게 ‘허락되는’ 것이다.
<개혁주의 스터디바이블>, pp. 1630-31.
씨를 뿌리는 자.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의인들이 거둬들여지고 악인들은 멸망당하는(시 1:3~5), 추수 기간이 될 것이라는 기대와 정반대로, 예수님의 첫 번째 강림은 씨를 뿌리는 기간이었다. 이때 예수님이 뿌리시는(전하시는) 말씀은 취약한 씨앗과도 같이, 거부하는 반응과 받아들이는 반응을 모두 겪게 된다.
13:11~17 하나님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능력은 그에 대한 반응은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따라 나눠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13:11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그들에게는. “비밀”보다는 “신비”로 번역하는 게 더 나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교도 바벨론 왕에게, 다니엘만 해석해야 하는 비유식의 예언적 환상을 계시하셨던 단 2:28~30, 47에 대한 암시일 수 있다. 그 환상의 초점은 하나님이 미래에 악한 열방을 진멸하시고 그의 나라를 지상에 세우실 것이라는 데 있다. 예수님은 이것을 비록 신비로운 방식이지만, 자신의 사역에서 완성되어야 하는 출발로 보셨다. 여기서의 “신비”는 다니엘이 예언한 나라가 이루어지기 시작하고 있지만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뒤따르는 비유들은 이 나라가 작게 시작하지만, 느리게 눈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크게 될 것을 드러낸다. 하나님 나라가 실재하지만, 아직 마지막 심판이나 보상은 주어지지 않았다. 악인과 의인도 여전히 공존한다.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이런 모습은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이다. 그들은 위대한 나라가 완성된 형태로 단번에 나타나서 악인들은 곧바로 심판을 받고 의인들은 상급을 받을 것으로 기대했다.
13:20~22 두 가지 종류의 땅은 처음에는 말씀에 긍정적으로 반응하지만 결국에는 열매 없음이 드러나는 이들의 반응을 대변한다. 돌밭은 “기쁨으로” 즉각적인 관심을 보이지만, 얕은 믿음으로 입증되고, 핍박 앞에서 곧 시드는 이들의 반응을 상징한다. 가시떨기는 일상에서의 염려와 즐거움을 수단으로 한 방해의 위험성을 보여 준다. 이도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말씀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마지막 추수의 열매는 거두지 못한다.
13:22 재물의 유혹. 부로 인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면, 그 재물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다. 그러나 부로 인해 마음이 사로잡혀 빼앗긴다면, 그 재물은 위험한 올가미가 되고 말 것이다(전 5:19; 딤전 6:9).
13:23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 오직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순종으로 표현되는 믿음이 함의된다)만이 열매를 맺는다. 어떤 이들은 일시적으로 말씀을 받아들이나 반대를 피하기 위해 믿음을 저버리기도 하고 세상의 재물을 좇아가기도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열매를 맺는 일에도 다양한 수준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오직 두 종류의 땅이 있다. 말씀을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땅(눅 8:15)과 그렇지 않는 땅이다.
첫댓글 좋은 해설을 올려 주셔서 저에게 도움이 많이 되겠습니다.
네, 저에게도 그렇습니다.
초신자나 주석이 없는 분들은 이 내용을 성경과 함께 읽으면 공부가 될 것입니다. 이단이나 신비주의자들이 비유를 잘못 해석하므로 이 포스팅을 읽으면 안전한 지식이 될 것입니다.
네, 매우 공감합니다.
아마도 이단들이 자주 이용하는 구절이 오늘 포스팅의 본문일 것입니다. 적절한 좋은 포스팅을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칼빈주석: 공관복음> 마 13:11.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이 답변으로부터 우리는 하나님이 여러 가지 목적으로 사람들에게 구원에 관한 가르침을 전하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강론이 많은 사람들에게 수수께끼처럼 들려서, 그들이 듣기는 들어도 무슨 소리인지 잘 알지 못하도록 하시기 위하여, 그의 가르침을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전하시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는 감추어진 곳과 캄캄한 땅에서 말하지 아니하였으며 야곱 자손에게 너희가 나를 혼돈 중에서 찾으라고 이르지 아니하였노라”(사 45:19)는 예언이나, 다윗이 율법을 상찬(賞)하여 “주의 말씀은 내발에 등이요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시 119:105, 130)라고 찬미한 것과 모순되지 않느냐는 반론이 제기될 수도 있지만, 그 대답은 간단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로는 언제나 빛이지만, 그 빛이 사람들의 어둠으로 인해서 가려지는 것일 뿐이다. 왜냐하면, 율법은 일종의 베일에 감추어져 있었지만, 만약 사람들의 눈이 멀지만 않았다면, 하나님의 진리는 그 율법 속에서 분명하
분명하게 드러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에 대해서 바울은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고후 4:3-4)라고 단언한다. 게다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다윗이 말한 말씀이 지닌 조명(照明)의 능력과 이사야가 예언한 가르침의 방식은 둘 다 오로지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만 적용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의 눈이 멀어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어두운 경우를 제외하고는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모호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여전히 확고한 진리이다. 그렇지만 주님은 버림받은 자들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도록 하시기 위하여 그 "비밀을 숨기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두 가지 방법으로 그들에게서 그의 가르침이 지닌 빛을 박탈하신다. 즉, 그는 좀 더 분명하게 표현하실 수도 있으신 내용을 모호하게 말씀하시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하시고, 모호하지도 않고 은유를 사용하시지도 않는 가운데 자신의 마음을 분명하게 표현하시지만, 그들의 지각(知覺)을 둔하게 하시고 그들의 생각을 우둔하게 만드셔서, 밝은 대낮에도 그들로 하여금 아
하여금 아무것도 볼 수 없게 하시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하신다. 이것이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이 이 백성에게 그들이 알지 못하는 외국어로 말하는 야만인 같을 것이고, 예언적인 환상들이 배운 자들에게 닫히고 봉인된 책 같아서 그들이 그 환상들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며, 그 책이 열릴 때에 모든 자들이 일자무식(一字無識)인 자들처럼 그 책을 읽을 수 없어서 당혹스러워하게 될 것이라고 미리 경고한 말씀들의 취지이다(사 28:11; 29:11),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오직 소수의 사람들에게 그의 말씀이 깊이 뿌리를 내려 유익을 얻을 수 있게 하고, 그 밖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여 당혹스러워 하도록 하시기 위하여, 그의 가르침을 의도적으로 이런 식으로 베풀고 계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구원의 가르침을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목적을 위하여 전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기이한 뜻에 의해서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생명에 이르는 냄새”가 되게 하시고, 버림받은 자들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되게 하신 것이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고후 2:15-16). 그리고 바울은 그 누구도 이것에 대하여 감히 시비를 걸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
위하여, 바울은 바로 그 구절에서 복음이 어떤 효과를 가져오는지와는 상관없이(즉, 그것이 사망의 냄새일지라도), 그 냄새는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향기가 된다고 분명하게 선언한다.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구절의 의미를 확실하게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의도와 이유를 좀 더 면밀하게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먼저,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대비(對比)되는 말씀을 하신 의도가, 특히 누구에게나 무차별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닌 것을 그의 제자들이 받았다는 점에서 그들에게 주어진 은혜가 지극히 큰 것임을 나타내고자 하신 것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한 특권이 왜 사도들에게만 주어진 것이냐고 누가 묻는다면, 그 까닭이 사도들에게 있지 않다는 것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이 그들에게 "허락된 것이라고 하심으로써, 그들에게 어떤 공로가 있어서 그런 특권이 주어진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시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이 그의 “비밀들”을 계시해 주시는 그런 특별한 영광을 받는 몇몇 택하신 자들이 있는 반면에, 어떤 자들은 그러한 은혜에서 배제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선언하신다. 우리는 이러한 구별(discrimen)의 근거
근거를 하나님이 은혜로 거저 택하신 자들을 자기에게로 부르신다는 사실 외에 다른 것에서 찾을 수 없다.
@장코뱅 칼빈의 주석이 좀 길지만 올려주셔서 제게도 공부가 되네요. 칼빈이 저 말씀을 보고 저런 생각을 했었구나 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