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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교실 스크랩 성군과 폭군의 양면을 가진 군주 태종 이방원
심상진 (호) 송정 추천 0 조회 54 14.02.16 11:0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태종의 이름은 방원이고 자는 유덕. 아버지는 태조 이성계이며, 어머니는 신의왕후 한씨이고, 비는 민제의 딸 원경왕후이다. 방원은 성균관에서 수학하고 길재와 같은 마을에 살면서 학문을 강론하기도 하였으며, 일시 원천석(元天錫:고려 말, 조선 초의 문인)에게 학문을 배우기도 하였다. 그는 1383년 우왕 9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1388년 창왕 즉위년부터 이듬해까지 명나라에 파견된 정사 문하시중 이색의 서장관이 되어 남경에도 다녀왔다. 1392년 공양왕 4년 3월에는 이성계의 조선개국의 최대 걸림돌인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살해하였다. 그 해 도평의사사로 하여금 이성계 추대를 결의하게 하고, 고려의 왕대비(공민왕비 안씨)를 강압하여 공양왕을 폐위시키게 한 뒤 이성계를 등극하게 하였다. 조선이 개국되자 1392년(태조 1) 8월에 방원은 정안군으로만 책봉되었을 뿐, 강비(태조의 계비), 정도전 등 개혁파의 배척으로 군권과 개국공신책록에서 제외되고 만다. 자신의 세력기반인 사병마저 혁파당할 단계에 이르자, 평소의 불만을 폭발시켜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고 정도전과 세자 방석 등을 제거한 뒤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그 뒤 제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한 뒤 세자로 책봉되면서 내외의 군사를 통괄하게 되었다. 세자로 책봉되자 병권장악·중앙집권을 위하여 사병을 혁파하고 내외의 군사를 삼군부로 집중시켰으며,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고치어 정무를 담당하게 하고 중추원을 삼군부로 고치면서 군정을 담당하도록 하고. 이어 1400년 11월에 형인 정종의 양위를 받아 등극하였다. 이때부터 태종은 왕권의 강화와 중앙집권 확립을 위하여 공신과 외척을 대량으로 숙청하기 시작했다.1404년에는 3년 전에 있었던 이거이 난언사건을 들추어 이거이 및 이저를 귀향 조처하였고, 1407년에는 불충을 들어 처남으로서 권세를 부리던 민무구, 민무질 형제를 죽였다. 다시 1409년에는 민무구와 관련된 인물로 연계시켜 이무, 윤목, 유기등을 각각 목 베었다. 그 뒤 1415년에는 불충을 들어 나머지 처남인 민무휼. 민무회 형제를 서인으로 폐하였다가 이듬해 죽이고 자기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고 싸운 이숙번을 귀향 보냈다. 이와 함께 1414년에 잔여공신도 부원군으로 봉하여 정치일선에서 은퇴시켜 말년에는 왕권에 견제가 될 만한 신권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이를 토대로 육조직계제를 단행하고 사전의 일부를 하삼도(충청. 전라. 경상도)로 이급 하였다. 태종은 조선왕조와 후대를 위해 자신이 악역을 맡아 조금이라도 조선의 왕실에 누를 끼칠 것 같은 신하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심지어는 처남에 또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고 군사를 동원한 이숙번까지 죽이고 귀양 보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이숙번은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도 죽을 때까지 그를 풀어주지 말라고 말해서 세종은 아버지 태종의 말을 따라 이숙번이 귀양처에서 죽게한다. 국왕이나 왕세자의 장인을 국구(國舅)라고 하는데, 동반 정1품에 제수되는 척리이다. 왕의 외척을 척리라고 부르는 이유는 한나라 때 장안(서안)의 척리라는 마을에 임금의 인척들이 살았던 데서 기인하였다. 불과 수십 년 전까지도 서울을 장안이라고 부른걸 보면 무척이나 중국에 대한 동경심이 컸었나 보다. 조선의 척리는 품계는 높아도 정사에는 참여할 수 없었는데, 이런 원칙을 만든 임금이 태종이었다. 위에 말한 대로 태종이 부인인 원경왕후 민씨의 친동기 넷을 사형시킨 사건은 유명하다. 민무구·무질은 어린 세자(양녕대군)를 끼고 권력을 잡으려 했다는 협유집권 혐의로 처형했고, 무휼과 무회도 그 연장선상에서 제거한 것이다. 또 태종은 상왕 시절 세종의 장인 심온도 제거했다. 영의정 심온이 사은사로 명나라에 갈 때 전별하는 거마가 장안을 뒤덮었다는 보고를 듣고 자신의 사후 세종의 왕권 강화를 위해 제거한 것이다. 심온의 동생인 총제 심정이 상왕 경호 문제를 언급한 것을 역모로 몰아 죽이고 심온까지 연루시킨 것이다. 그런데 이 비정한 외척 제거에 대해 성호 이익선생은 성호사설 인사문에서 “민씨·심씨 두 집안이 함께 흉화를 당하게 되었으니, (태종의)대개 먼 장래를 생각함이 매우 깊었던 것이다.”라고 긍정했듯이 역사의 평가는 냉혹한 것이었다. 중국에서는 한문제가 처남 두광국을 쓰지 않고, 외숙인 장군박소를 죽인 것을 들어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그런데 외척의 정사 금지는 꼭 임금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태종 때 양녕대군의 장인 김한로의 처남이었던 대호군 전맹겸이 저자 사람의 생선을 빼앗자 경제 문제를 담당하는 경시서는 즉각 고발했고 사헌부도 그를 논박했다. 태종이 양녕대군의 부인 숙빈을 생각해 용서했으나 두 기관은 재차 고발했고, 태종은 할 수 없이 태(笞) 40대를 때렸다.1418년 무절제와 방탕한 생활을 한 사실을 들어 장자인 세자 양녕대군 제를 폐하고 충녕대군을 세자로 삼아 2개월 뒤에 선위하였다. 그리고 1422년 태종은 악역으로 보낸 일생을 마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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