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어부의 실천
얼마 전에 함께 근무하던 선배님 부부를 점심에 초대하였다. 여러 가지로 내가 많은 신세를 지고 도움을 받았으며, 특히 아내에게도 친절하여 항상 고마움을 잊지 못하던 두 내외분이었다. 여러 가지 그 시절에 얽힌 사연 속에서 다시 돌아가고 싶고 아름답기만 했던 지난 추억을 반추하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특히 언젠가 내가 이야기했다는 ‘승어부(勝於父)’에 대한 말씀을 꺼냄에 따라 깜짝 놀랐다. 그 말을 새겨 다른 좌중에서 그에 대한 중요성을 설파하신다하니 나로서도 무척 반가운 소식이었다.
‘승어부’는 과거 우리 전통사회에서 가정의 어른들이 자식 교육을 하면서 주로 강조하시던 말이다. 한마디로 아비보다 나은 자식이 되라는 의미이다. 인품과 덕망, 사회적 직위, 교육의 정도, 생활수준, 경제적 여유, 자식 교육, 문화적 배경과 인적 교류에 이르기까지 보다 발전되고 한 단계 향상된 가정을 이루라는 이야기다. 이 말 속에는 전통적인 가부장제도의 모순이 있지만 그리 크게 논리적으로 벗어난 이야기가 절대 아니다.
주위를 살펴보면 실제로 그 아비를 능가하는 제반 여건을 구비한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 이 모든 결과 역시 따지고 보면 제대로 교육을 시키지 못한 그 아버지의 책임이다. 그래서 모든 부모는 가정교육을 중시하고 자식의 올바른 성장에 노력을 집중한다. 그러나 가정과 학교 그리고 일반 사회의 유기적인 통합교육의 부재로 많은 부작용이 많다. 한마디로 서열에 의한 줄 세우기 문화의 폐해로 진정한 교육기능이 마비되었다. 그 이면에는 부의 양극화가 초래한 기득권의 대 물림현상이 자리 잡고 있다. 부와 교육의 세습화는 우리사회가 풀어야 할 주요한 당면과제이다.
우리가 부러워하는 미국의 교육 현실도 만만치가 않다. 아주 평등하고 균등한 기회가 주어지는 사회지만 내부적으로는 그렇지 못하다. 초, 중학교의 과정에서 다양한 과정이 있는데 이를 소화하기 위해서는 부모의 역할이 아주 중요하다. 주로 방과 후에 이루어지는 각 종 프로그램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부모 중의 한 명이나 임시 고용인이 안내해야 한다. 둘 다 직장에 매달리거나 고용인을 구하지 못하면 다양한 교외 활동에 참석하지 못하고, 결국에는 운동이나 단체 활동 혹은 음악연주 등의 실경험이 부족하여 나중에 대학 입학에도 불이익을 받는다.
이런 현상이 우리나라에도 만연하여 교육에 고통을 받게 되니 점차 출산마저 꺼리는 국가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누구나 아비의 입장에서는 성장하여 제 역할을 다하는 자식이 대견하기 마련이다. 돌이켜보면 선친께서도 아들을 앞에 내 세우기를 즐거워 하셨다. 만 20세의 차이여서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마치 형제처럼 보였다. 초, 중, 고 학생 시절에 약도를 받아 심부름을 하면서 만났던 친구 분들도 무척 부러워 하셨다. 특히, 위탁교육을 받은 서울대학교의 졸업식 날에 「윤동주」시인의 유고를 펴낸 「백영(白影) 정병욱」, 소설가 「전광용」, 고전문학자인 「김진세」 교수님 등을 모시는 자리에 선친께서도 합석하여 유쾌한 시간을 보냈다. 이를 기회로 교수님들과의 교유가 시작되어 자식으로서 큰 보람이 있었다.
언젠가 주기적으로 점심 모임이 있어 종로 1가의 단골집에 갔다. 인근의 사무실에서 근무하고 있는 아들이 찾아와 두루 인사를 올리고 밥값을 치루고 갔다. 어느덧 성장하여 제 역할을 하니 보기에 좋았다. 하지만 당사자로서는 번거롭고 어색한 자리가 되었을 것이다. 이후에도 그런 자리가 많았지만 가능한 권유하지 않았다.
하지만 잠깐 세월이 지나고 나면 머지않아 이미 부모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아들도 손자가 자라 그런 자리가 주어지면 아비와 함께했던 그 짧은 시간을 끝내 다시 공유할 수 없음을 아쉬워 할 것이다. 여하튼 바쁜 일과에 아이들을 키우며 고생하는 아들에게 스트레스를 줄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이 세상의 모든 부모는 자식이 잘 자라 사회와 국가의 동량이 되길 희망한다. 로마의 「키케로」는 아테네에서 유학 중인 아들에게 편지를 썼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의무론』이다. 「프레데릭」 대왕이 ‘지금까지 씌어졌거나 씌어 질 수 있는 도덕에 관한 최상의 책’이라고 극찬했다고 전한다. 그가 생각하는 기본적인 4 가지의 덕목인 지혜, 정의, 용기, 절제에 대한 주제는 오는 날 까지도 서양 문화의 뿌리로 작용하고 있어 통상 ‘서양의 논어’라고도 불린다.
동시에 그리스의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크세노폰」이 쓴 『키루스의 교육』은 진정한 리더의 전형적인 상(像)을 제시한다. 세상살이가 더욱 힘들어지고 절망하는 젊은 세대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주는 책이다. 페르시아의 왕인 「키루스」는 누구보다 인재를 고르는 안목이 달랐다.
먼저 ‘신앙심을 가진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절제심이 강하고 도덕적 기준이 높다고 보았다. 두 번째 기준은 사려 깊은 사람보다 ‘자제심이 강한 사람’을 더 선호했다. 사려 깊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눈에 띌 때 부끄러운 행동을 하지 않지만, 자제력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보지 않을 때도 그런 짓을 삼가기 때문이다. 마지막 기준은 ‘탁월함을 발휘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맡겨진 일 뿐만 아니라 맡겨지지 않은 일에도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쏟아 붓는 사람을 신뢰하였다.
「키루스」는 인간이 본래 복종하기 싫어하는 존재로 파악하고, 이런 인간을 자발적으로 복종하도록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그야말로 「키루스」는 사람들의 자발적인 동의를 얻어 통치하며 공동체의 안정과 질서 그리고 나아가 발전을 이룩하였다. 현대의 모든 리더들에게 주는 시사점이 크다.
이렇듯이 동서양에는 시대의 흐름에 관계없이 일관된 정형의 이상적인 교육이 행해졌다. 다만 동양에서는 개인의 수신제가에, 서양에서는 공공선의 통합을 강조하는 차이가 있다. 여하튼 이들 동서양의 관련 고전들을 잘 활용하여 후대에게 희망과 꿈을 실현하는 기본 바탕을 만들어 주는 책임은 바로 부모에게 있다.
무조건 욕심만 낸다고 교육은 절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고, 지혜로운 교육의 방법을 고안하여 제시하고 솔선을 보이는 길이 첩경임을 알아야 한다. 아무리 생활에 매달려 살더라도 자식의 교육을 위해 보통의 방식과는 다른 효과적인 방안을 찾아 절망하는 후대에게 희망을 주는 일은 숭고한 사명이기도 하다.
자칫 본인이 고생했으니 자식을 편하게만 키우면 기껏 애써 쌓은 부와 명예도 손자 대를 넘지 못하고 한 순간 미풍에 날아갈 수 있다. 모름지기 스스로 독립하여 난관을 극복하려는 능력과 의지를 심어 주어야 한다.
‘승어부’의 개념은 따지고 보면 시대착오적일지도 모른다. 과거와는 훨씬 다양하고 개인의 창의성이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획일적인 가치를 강요하는 것은 오히려 부작용만을 끼칠 수가 있다. 그러니만큼 기본적인 개념은 계승하되 각자의 개성과 자질을 우선하는 지혜롭고 창의적인 지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2023.10.26.작성/11.15.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