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그의 아들인 신영순 이냐시오가 돈을 가지고 대구로 가서
부친의 시신을 찾아 고향으로 운구해 왔으나 고향 명례에는
지방 유지들의 반대로 안장할 수가 없었다.
부득이 낙동강을 건너 한림정 뒷산
노루목(현 김해시 한림면 장방리)에 가매장하였다.
그 후 진영 성당에서는 순교자의 묘소를 진영읍 여래리에 있는
성당 공원묘지로 이전하였다.
신 마르코의 미망인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명례리에서 살았고
후손은 아들 이냐시오에게서 아들 4형제가 났고,
네 아들 중 막내가 신순균(申順均, 1910~1948, 바오로) 신부이다.
1935년 사제품을 받고 고성 황리 성당 초대 신부로 재직했다.
그러나 1948년 지병으로 선종하여 대구교구 성직자 묘지에 안장되었다.
당시 38세의 젊은 나이였다. 마르코의 4대 후손이 명례리 상촌의
현지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고 한다.
▒신석복 (마르코)의 세례명▒
신 마르코는 《치명일기》(1895년 발간)의 기록에서 세례명이 이냐시오로 되어있다.
“신 이냐시오 - 본디 밀양 사람이라. 대구포교에게 잡혀 교하여 치명하니
나이는 39세요. 때는 대개 병인 2월 15일 이러라.”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번호 2)에 「김 베드로는 본래 경상도 김해에 살더니
병인년 군난에 잡혀 대구 읍내로 와서 죽을 때에 다른 교우 두 사람과 함께 죽었노라.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은 신 말구(마르코)요. 또한 사람은 김가요.
그때 본 이는 김가의 아내라」라고 기록되었는데
치명일기를 편집하는 과정에서 잘못 전달되어 이냐시오로 되었다.
때문에 후손들은 바로잡아 주길 청했다.
다음은 병인 《치명사적》(1925년 발간) 18권에 나오는 내용이다.
《치명일기》 “795에 있는 신 이냐시오는 이냐시오가 아니라 말구오니
본명을 바꾸소서.” 이냐시오는 말구의 장남 신영순(申永淳)의
세례명이었던 것이다.
▒슬픔 맑게 닦으며 (진영성당 공동묘지에서) <김영수>▒
단감밭 가로질러
낮은 무덤들 가로질러
이슬들 헤치며 오르노라면
문득 이마 닿는 십자가
그 그늘 아래 우뚝 무덤 하나 있습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죽음에다 자꾸만 가슴 헹구는 일입니까
내 잠의 허물들 벗으며
슬픔 맑게 닦으며
정결한 숲가에 내리려는 일은
대지와 하늘을
함께 마시려는 일 그것입니까
마침내 일상의 거친 숨결들 무너지고
가슴에 초원 따스히 일어설 때
나에게도 죽은 이가 깨워내는
그 아침을 거닐게 되리이까
◆ 순교자 신석복 마르코(1828-1866년) <하느님의 종 124위>
경상도 밀양의 명례(현 경남 밀양읍 명례리) 사람인
신석복 마르코는 장사를 하면서 생활하던 신자로,
1866년의 병인박해 때 창원 마포로 장사를 나갔다가 돌아오던 길에
오 야고보 등과 함께 대구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때는 마르코가 천주교에 입교하여 신앙생활을 해온 지
10여 년이 지난 뒤였다.
포졸들은 밀양에서 하루를 머무는 동안 마르코에게 무수한 형벌을 가하였다.
그런 다음 그를 대구로 끌고 갔는데, 이때 그 사실을 알게 된 그의 형제들이
돈을 마련해 가지고 대구로 가는 일행을 뒤 쫓아 갔다.
그들 일행을 만난 마르코의 형제들은 포졸들과 수작한 뒤, 마르코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러자 그는 형제들에게 말하기를 ‘한 푼도 포졸들에게 주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대구로 가는 동안 자주 능욕을 당해야만 하였다.
대구에서는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아 유혈이 낭자하고 뼈가 부러지게 되었다.
그런 다음 며칠을 옥에 가두었다가 1866년 3월 31일(음력 2월 15일) 교수형을 집행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39세였다. 이후 마르코의 가족들이
그의 시신을 찾아다 고향에 안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