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이 가면 작약이 온다
신은숙
파란시선 0074 / B6(128×208) / 119쪽 / 2020년 12월 20일 발간 / 정가 10,000원 / (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 신간 소개
살아진다는 말은 사라진다는 말
신은숙 시인의 첫 시집 <모란이 가면 작약이 온다>는 진솔한 존재론적 기원에 대한 탐색과 절절한 사랑의 시학에서 발원하고 완성된다. 신은숙 시인은 이러한 견딤과 위안을 주는 치유와 긍정의 기록을 첫 시집에 단정하게 실었다. 물론 그것은 폐허와 상처의 잔광(殘光)을 통한 안간힘의 기록으로 남았다. 좀 더 확장해 보면, 상처를 감싼 사랑의 기억이 그녀의 존재 형식을 그대로 담은 정신운동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그녀의 시는 지난날들을 일일이 호명하면서 그 안에서 사랑으로 나아가려는 의지를 선명하게 보여 준다. 비록 고독 때문에 시를 쓴다 하더라도 이 깊고도 지속적인 긍정의 시 쓰기는 인간의 근원적 존재 형식에 대한 탐구 작업으로 끝없이 이어져 갈 것이다. 이처럼 <모란이 가면 작약이 온다>는 아득한 세월을 지나 고백과 긍정의 언어로 거듭나는 과정을 아름답게 담고 있다. 신은숙 시인이 들려준 존재론적 기원에 대한 사유, 상처와 사랑의 에너지를 통한 심원한 형상을 우리는 깊이 기억할 것이다. (이상 유성호 문학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신은숙 시인은 1970년 강원도 양양에서 태어났고, 201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모란이 가면 작약이 온다>는 신은숙 시인의 첫 번째 신작 시집이다.
■ 추천사
시편 곳곳이 생의 된비알이다. 오르기에 버겁지 않은 것은 재물, 애욕 따위의 기울기를 신은숙이 지워 준 까닭이다. 비탈이 평지가 된 것이다. 시인은 동음이의(同音異義) 세계를 넘나들며 통념을 바루고 비탄을 달게 본다. 젖은 종이 같은 이미지를 남용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를 버리고 홍조(鴻爪)와도 같은 존재들을 사늘하게 표현해 냈다. 자기 연민을 은유한 이미지들을 자전적 상처라며 도금해서 팔아먹지 않는다. 폴라로이드처럼 단 하나의 컷으로 채집해 내는, 후보정을 염두에 두지도 않는 결벽을 견지한다. 명랑한 것 같지만 감정 제어가 섬세해서 조울로 널을 뛰거나 참혹으로 추락하지도 않는다. 신은숙의 시편들을 일독하면 무중력 상태를 느끼게 된다. 결리는 곳이 없고 쓰라림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렇게 감정의 편향이 없는 것이 시의 정석이다. 매혹은 극(極)에서 분화(噴火)하는 것임에도 거기까지 이르지 않고 가만가만 어루만지는 매력이 충분하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인력을 가진다. 사랑했고 미워해 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부분이겠거니와 언어조차 서로 친밀해지고 때로는 반발하게 마련인데 그 인력과 척력을 다룰 줄 알아서 문장 안에서 결합시키고 행을 가르며 대비해 놓은 것이다. 편편마다 일어나는 정서적 환기 때문에 적바림을 멈출 수 없는 시집이다. 고향을 한 정거장 앞둔 딸처럼 가만가만 손을 잡아 보게 되는 감정의 회목이다. 문자로서는 일현금(一絃琴)인데 천 갈래 만 갈래로 휘어지고 공명하는 진술들의 축음기다.
―전영관(시인)
■ 시인의 말
비가 내리고 잎들이 진다
바람이 불고 구름이 흩어진다
재스민이 가고 수국에 단풍 든다
늦봄과 초여름은 다른 피부다
오월엔 모란, 유월엔 작약으로
모란이었던 엄마,
그 나무 그늘 흔들리며 피는 작약 한 포기
슬픔이 한 생을 복기하는 순간
아무도 기억 못 하는 쓸쓸을
새삼 쓰다듬는다
■ 저자 소개
신은숙
1970년 강원도 양양에서 태어났다.
201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모란이 가면 작약이 온다>를 썼다.
■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그 여름 능소화 – 11
ㅁ의 이유 – 12
모란이 가면 작약이 온다 – 13
히말라야시다 – 14
묵호 – 16
곁 – 18
우기 – 19
오심(五心) - 20
홀로그램 – 22
하지 꼬리 잡기 – 24
당근 – 26
만삭 – 28
페이드아웃 – 30
사라짐에 대하여 – 31
제2부
일어나라 보풀 – 35
약국과 꽃밭 – 36
장미, 장마 – 38
추전역 – 39
은하미장원 – 40
광차는 달린다 – 42
서랍 바다 – 44
향기는 누가 데려갔을까 – 46
코스모스라는 별 – 48
울기 좋은 나무 – 49
샤콘느 – 50
선운사 – 52
春川은 흐른다(feat. cafe, 1989) - 54
절정 – 55
가지취의 내음 – 56
제3부
접시꽃이 꼬꼬댁 – 59
한계령 – 60
소리들 – 62
00시 30분 – 64
바다에 귀 하나 내어 주고 – 66
오월에 내리는 눈 – 67
엄마는 봉다리라 불렀다 – 68
낙산상회 – 70
의기양양 – 71
폐석장에서 길을 잃다 – 72
아버지의 엑셀 – 73
불화의 시간 – 74
장승리 – 75
연어 – 76
제4부
파랑 – 81
앞으로 앞으로 – 82
구월, 길상사 – 83
조용한 파문 – 84
어스 아워 – 86
반도네온 – 88
브라보 유어 라이프 – 90
미시감 – 92
작약을 심겠다 – 94
눈꽃 – 95
기슭 – 96
여수에 집 있다 – 98
울지 않는 동쪽 – 100
화양연화 – 102
해설 유성호 사라져 가는 것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시인의 존재론 - 103
■ 시집 속의 시 세 편
모란이 가면 작약이 온다
나는 작약일 수 있을까,
문득 작약이 눈앞에서 환하게 피다니
거짓말같이 환호작약하다니
직박구리 한 마리 날아간 허공이
일파만파 물결 일 듯
브로치 같은 작약 아니
작약 닮은 앙다문 브로치 하나
작작 야곰야곰 피다니
팔랑,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작약은 귀를 접는다
그리운 이름일랑 죄다 모아
저 귓속에 넣으면
세상의 발자국도 점점 멀어져
나는 더 이상 기다리는 사람이 되지 않으리
산사에 바람이 불어
어떤 바람도 남지 않듯 ***
사라짐에 대하여
살아진다는 말은 사라진다는 말
너 없이 살아진다고 썼는데 사라지는 나를 보았다
그때 나의 무게는 고작 21그램
돌아갈 별이 있다는 것은 돌고 도는 우주의 셈법
사라진다는 말은 살아진다는 말의 입버릇
노을이 사라지는 발코니에 매달려
소멸이 왜 아름다운지
개와 늑대의 시간엔 한 번쯤 짐승으로 돌아가
어둠이 사라질 때까지
울음만으로 완벽한 득음의 귀였다가
너 없이 살아질 동안
사라지는 나는 너의 다른 얼굴
견딘다는 말은 이유도 모른 채 태어난 이유
아직은 바라볼 별빛이 있다는 말
자꾸 태어나는 마트료시카들 ***
은하미장원
눈 내린 사북 거리
미용사는 일찍이 은하로 떠났는지
흰 슬레이트 검은 페인트 간판 하나
허공을 붙잡고 있다
사북 거리는 온통 간판만 운행 중이다
시몬이발소도 시몬이 떠난 지 오래다
빠마 고데 신부화장
벗겨진 선팅지 너머
꼬불거리고 빛나는 머릿결 쓸어 올린
눈 같은 신부가 앉아 있다
푸른 눈두덩 새빨간 입술
안개꽃 드레스 입고 웃고 있다
신부는 아직 사북에 남았을까
탄가루 날리는 봄
멀리 우는 함백역
기적 따라 떠났을까
미용실도 헤어숍도 아닌 미장원
가위 소리 사라졌어도
검고 흰 기억들만 교차하는
사북 거리
나도 한때 푸른 은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