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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논검 3부 홍칠공편]
제1장 홍안루에서
예로부터 번화한 임안(臨案)은 남송(南宋)의 서울이 되자 더욱 부유하고 호화로운 향락의 도회지로 변했다. 서호(西湖)같이 구경하기 좋은 명소가 많은데다가 먹고 마시는 데도 많았다. 그중 서호가의 취선루(醉仙樓), 경가(京街)의 홍안루(鴻雁樓), 운가(雲街)의 악사거(樂士居)가 가장 유명했다.
어느 날 새벽이었다. 해가 뜨려면 아직 멀어 인적 하나 없는 조용한 시각에 홍안루의 문이 삐걱 열리더니 심부름꾼 하나가 잠이 덜 깬 눈을 비비며 걸어 나왔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덧문을 떼려던 그의 두 눈이 갑자기 휘둥그래졌다.
문앞 좌우 양편에 난데없는 거렁뱅이들이 서넛씩 일렬로 늘어앉아 있는 게 아닌가? 그들은 옆에 지팡이 하나씩을 놓고 머리를 숙인 채 말없이 앉아 있었는데 하나같이 등에는 일여덟 개씩의 자루들을 지고 있었다. 모두들 나이깨나 먹은 것을 보면 개방 중에도 항렬이 높은 축에 속하는 듯싶었다. 그들은 홍안루 심부름꾼이 문을 열고 나온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었다.
한편 거렁뱅이들로부터 좀 떨어진 곳에는 첫눈에도 부호들임을 알 수 있는 여섯 사람이 오만하게 걸상에 앉아 있었다. 뒤에는 그들이 타고 온 준마나 교자가 있고 옆에는 그들이 데리고 온 노복들이 공손히 서 있었다.
심부름꾼은 이게 웬 돈 덩어리들인가 싶어 얼른 다가서며 허리를 숙였다.
"아이고 반갑습니다. 이렇게 신새벽부터 우리 홍안루를 찾아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어서들 안으로 드시지요."
"오늘 우리 형제 여섯이 너희네 주루를 하루 사서 놀아야겠는데 가능하겠느냐?"
몸집이 실한 노인 하나가 빙글빙글 웃으며 물었다.
심부름꾼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 잠시 대답을 못하였다. 예쁜 기생을 하루 사서 독차지한다든가, 술상을 한 상 몽땅 산다든가 하는 것은 봤지만 주루 전체를 사서 하루 놀겠다는 사람은 난생 처음이었던 것이다. 이 부호들이 돈이 너무 많아 정신이 돌았나?
심부름꾼이 대답이 없자 뚱뚱한 노인이 이죽거렸다.
"왜 대답이 없지? 이 좋은 돈벌이가 싫어서 그러느냐?"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런 것이 아니오라……, 어서 안으로 들기부터 하시지요. 쇤네가 주인님을 모셔 오겠습니다. 그 문제는 주인님과 의논하시지요."
심부름꾼은 헤헤 웃으며 허리를 굽신거렸다.
부호들이 가슴을 내밀고 누각에 올라 좌정을 하니 심부름꾼이 주루 주인을 불러 왔다. 주인은 부호들에게 읍을 하며 공손히 말했다.
"이렇게 오셔서 저희 누각을 빛내 주시니 고맙습니다. 누각이 협소하여 죄송합니다만……."
"우리 형제들이 자네와 의논할 일이 있어 찾아왔는데, 자네네 홍안루는 하루에 얼마나 버는가?"
뚱뚱한 노인이 물었다.
주루 주인은 내심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잘사는 부호들이란 남아 얼마나 버는가를 묻기 꺼려 하는 법인데 이 부호들은 좀 이상한데?'
하지만 돈벌이를 하려면 이런 부호들을 비위 상하게 해서는 안되었다. 주인은 얼굴에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홍안루가 명성은 좀 있지만 하루에 은자 백 냥도 못 벌지요. 다른 세 집에 비하면 턱도 없지요."
"하루에 은자 백 냥씩 번다면 벌이가 괜찮은 셈이 아닌가? 일년에 못 벌어도 몇만 냥은 벌겠구먼?"
뚱뚱한 노인이 빙그레 웃었다.
"아이고, 몇만 냥인 뭡니까? 투자한 돈과 그때그때 들어가는 비용이 있잖습니까? 그걸 제하면 남는 것도 없습지요. 제일 많이 버는 날이나 겨우 백 냥 벌까말까 하답니다."
주루 주인은 급히 덧붙여 설명했다.
"그러지 말고 솔직히 말해 보게. 정말 은자 백 냥밖에 못 번단 말인가?"
뚱뚱한 노인이 따지듯 물었다.
'이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꿍꿍이속으로 이러지?'
주점 주인은 아무래도 불길한 예감이 들어 되도록 수입을 적게 말하는 것이 낭패가 없겠다고 판단했다. 그래야 혹시라도 술 먹고 술값 안 내고 가는 일도 없을 것이고, 그럴 리는 없겠지만 설령 뭔가를 갈취하러 왔다면 빼앗겨도 적게 빼앗기게 될 것이다. 주인은 마음을 다져 먹고 자기의 하루 수입을 5분의 1이나 낮추어 말했다.
"정말인뎁쇼. 정말로 하루에 은자 백 냥도 벌까말까래두요."
"그래? 그럼 좋다. 동생, 그 돈 좀 이리 내게."
뚱뚱한 노인이 옆에 있는 다른 노인에게 웃으며 말했다. 옆에 있던 노인이 품에서 삼천 냥짜리 어음 하나를 꺼냈다.
"우리 형제들이 자네 홍안루를 30일 동안 몽땅 사겠네."
뚱뚱한 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예? 아니, 삼천 냥으로 어떻게 30일 동안을 삽니까?"
"우리한테 밥상도 차릴 필요 없고 술상도 챙길 필요가 없이 그저 30일 동안 문만 닫고 있으면 되네. 그러니 이 삼천 냥은 공돈을 버는 셈이지, 밑천 하나 안 들이고 말야."
뚱뚱한 노인이 빈정대듯 웃었다.
주루 주인은 그만 속으로 자신을 꾸짖었다.
'바보 같은 자식, 하루에 백 냥밖에 못 번다고 할 게 뭔가? 한 천 냥은 번다고 해 뒀으면 좋았을걸……."
"나으리, 그건 좀 곤란합니다. 30일이나 문을 닫으면 홍안루는 망하고 맙니다요. 제발 사정 좀 봐 주십쇼. 죄송합니다만 그 삼천 냥 은자는 못 받겠습니다."
주루 주인은 애써 웃음을 지으며 사정하듯 말했다.
"이 사람아, 홍안루가 뭘 하는 곳인가? 손님을 받아 접대하는 곳이 아닌가? 내가 돈 내고 사겠다는데도 안 된단 말인가?"
"글쎄 술상을 챙겨 오라면 얼마든지 챙겨 올리겠습니다만…… 얼마든지 대접해 올린다니깐요. 하지만 우리 누각을 사시겠다는 말씀은……."
"그럼 좋네. 자네 생각이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
뚱뚱한 노인은 즉시 휘파람을 불어 형제들을 불렀다.
그러자 누각 아래에서 시끌벅적 떠드는 소리가 들리더니 숱한 사람들이 주루로 밀려 들어왔다.
주루 주인은 그만 눈앞이 캄캄해졌다. 어디서 몰려들었는지 누각 아래엔 몇 백이 넘는 거렁뱅이들이 득실거렸다. 외팔이가 있는가 하면 절름발이도 있고 하나같이 너덜너덜한 넝마 같은 차림의 사람들로 주루 안은 온통 혼잡을 이루었다.
뚱뚱한 노인이 다시 한 번 휘파람을 세게 불었다.
"형제 여러분, 떠들지 마시오. 이 홍안루는 보통 부귀한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 아니오. 누각에 올라왔으면 조용히 앉아 먹고 싶은 거나 청해다 먹으시오."
그제야 주루 주인은 마음이 좀 놓였다. 옷이 더러운 거렁뱅이들이지만 밥이나 먹으면 가 버릴 테니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얼른 심부름꾼에게 분부했다.
"어서 이 나으리들께 주안상을 차려 올리도록 하여라."
그 말에 심부름꾼은 냉큼 뛰어가서 요리 안내판을 들고 왔다.
"아니, 그런 건 뭐하러 가져오나?"
뚱뚱한 노인이 물었다.
"이걸 보시고 요리를 시키시지요."
주루 주인이 말했다. 그러자 심부름꾼이 뚱뚱한 노인에게 물었다.
"나으리들께선 무슨 요리를 잡수시렵니까?"
뚱뚱한 노인은 자기 동료들을 둘러보더니 엉뚱한 소리를 했다.
"난 차 한 잔만 주게."
주루 주인은 내심 흠칫하였으나 잠자코 있었다.
심부름꾼이 옆의 다른 노인에게 묻자 그 역시 대답이 같았다. 또 다른 여섯 노인에게 물어도 모두 한결같이 차 한 잔만을 청했다.
그러자 누각 아래 거렁뱅이들도 입을 모아 떠들었다.
"주인님, 뭐 그렇게 바삐 도실 건 없습니다. 우리들한테 그저 차 한 잔씩만 돌리면 되니깐요. 우리 형제들은 그저 차 한 잔이면 밤늦게까지도 앉아 있을 수 있거든요."
주루 주인은 애가 탔다. 이 거렁뱅이들과는 전에 상종도 없고 원수진 일도 없는데 무엇 때문에 와서 이런 야료를 부리는 것인지 통 알 수가 없었다.
주루 주인은 허리를 굽신거리며 애원하듯 말했다.
"나으리들, 저의 홍안루를 꾸중할 일은 꾸중하시고 분부할 일이 있으면 마음대로 분부하십시오. 그저 저희들이 잘못한 게 있다면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 주시기만 바랄 뿐이옵니다."
"우리 형제들 몇몇과 저 누각 아래 사람들은 모두 홍안루의 명성을 듣고 이렇게 찾아왔으니 대접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네."
뚱뚱한 노인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말했다.
홍안루는 임안에서도 워낙 이름난 곳이라 언제든지 손님이 그칠 새가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야단이 났다. 손님들은 밖에서 홍안루 안을 들여다보고는 낯을 찌푸리고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다른 데로 가 버리곤 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누각 위아래를 차지하고 앉아 시끌벅적 떠들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남루한 옷에 얼굴엔 때가 얼룩진 거렁뱅이들이 아닌가. 머리는 봉두난발을 하고 발에는 닳아 해져 발가락들이 다 나오는 더러운 짚신들을 신고 있는 이 거렁뱅이들
을 옆에 두고 누군들 술 마실 생각이 나겠는가?
거렁뱅이들은 반나절이 지나도록 누구 하나 자리를 뜰 생각을 하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비단옷을 입은 노인들도 말없이 앉아만 있었다.
주인은 자기가 지금 도깨비한테 홀린 게 아닌가 싶었다.
그는 속이 뒤틀릴 대로 뒤틀려 당장 쫓아내 버리고도 싶었지만 가까스로 눌러 참았다. 만일 놈들이 앙심을 품고 달려들어 주루에 불이라도 지르는 날이면 그야말로 큰일이었던 것이다. 한편 그는 평소 같으면 갈가마귀 들끓듯 할 거렁뱅이들이 오늘따라 잠잠히 앉아만 있는 게 아무래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나으리들, 저희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르겠사오나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그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주루 주인은 또 비단옷을 입은 노인들에게 사정했다.
비단옷을 입은 노인들은 여태까지 찻잔을 들고 있었으나 차는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그저 잔을 들었다가는 놓고 들었다가는 놓고 할 뿐이었다. 차는 이미 식은 지 오래였고, 그들은 벙어리처럼 침묵만 지켰다.
주루 주인은 애가 닳았다.
"나으리, 무슨 분부가 계시면 말씀만 하십시오. 무슨 일이든 분부대로 받들어 모실 테니깐요. 그저 저희를 용서해 주시기만 바랄 뿐이옵니다."
"뭐 용서할 것도 없고 분부할 것도 없네. 우린 이렇게 앉아만 있으면 족하네. 어째 싫은가?"
뚱뚱한 노인이 덤덤한 기색으로 말했다.
"아……아닙니다. 싫을 것까지야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됐네. 우린 꼭 서른 날은 이렇게 앉아들 있어야겠으니 그때 가서 영업을 다시 시작하게. 그래도 되겠지?"
"아이고, 그러면 저더러 이대로 망해 먹으란 말씀입니까?"
주루 주인은 우는 소리를 하였다.
노인이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대꾸했다.
"아니, 자넨 무슨 말을 그렇게 함부로 하는가? 허, 허무한 소리로군. 그러다가 정말 망하면 어쩌려구?"
주루 주인은 어처구니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여러 형제들, 우리 좀 참고 기다려 보세. 좋은 수가 보이네. 이 주인님이 홍안루가 망할 것이라는데 그렇게 되면 우리가 이 홍안루에다 비단가게를 낼 수도 있잖아? 거기다가 기생집까지 꾸미면 비단도 팔고 웃음도 팔고 장사 한번 멋들어지겠는데?"
노인은 약이라도 올리듯 연신 빙글대며 말했다.
유가 성을 가진 노인이 좋다고 맞장구를 쳤다.
"이거 대운이 트이는가 부다. 홍안루에서 간판을 떼겠다면 내가 대신 수고해 줄까?"
그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당장 몸을 솟구치더니 창 밖으로 씽 날아 나가 누각 문앞에 이르렀다. 문 위에는 '흥안루'라고 쓴 편액이 있었는데 노인은 거기에 박은 대못 서너 개를 손으로 쭉쭉 뽑아 편액을 메어 들고는 다시 누각 위로 돌아왔다. 그는 편액을 탁자 위에 소리나게 내려놓았다.
"주인장, 어서 이 편액을 고쳐 달게. 기생집을 꾸리려면 '야야향(夜夜香)'이라 하면 좋겠고, 비단가게를 꾸리려면 '화서상(和瑞祥)'이 좋겠군. 어쨌든 이 편액은 없애 버리라구."
노인은 편액을 치켜 들어 당장이라도 박살낼 기세였다.
"아이고, 그러지 맙쇼. 그 편액을 제발 부수지 맙쇼. 주선(酒仙) 이백(李白)이 친필로 쓴 것인데, 우리 밥통이 그 흥안루라는 편액에 달렸습니다요. 그 편액으로 이름이 나서 저희가 밥을 벌어 먹고 사는데 그걸 없애면 우린 당장 밥줄이 끊깁니다. 그 편액은 저희 생명이나 다름없지요. 제발 이렇게 빌겠습니다."
주루 주인은 황급히 꿇어앉아 고개를 연신 조아리며 애원하다가 마침내는 눈물까지 펑펑 쏟았다.
그러나 노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빈정대듯 말했다.
"내 보기엔 홍안루 편액을 달고도 장사가 시원칠 않은데 그래? 이따위로 장사할 거면 홍안루라는 편액을 때려부수고 장사를 그만 두는 게 좋겠다는데 자넨 뭘 믿고 그렇게 고집을 피우는 건가?"
"어르신들 제발 이러시지 마십쇼. 무슨 마땅찮은 일이 있으시면 말씀하시면 될 게 아닙니까요? 왜 자꾸 이러십니까? 무슨 일로 이러시는지는 모르겠사오나 말씀만 하십시오. 잘못된 게 있으면 당장이라도 시정하겠습니다."
"뭐 잘못을 책망하자고 이러는 건 아니고 사실 청이 있어 왔네. 들어줄 수 있겠나?"
"무슨 일이든 말씀만 하십시오."
주인이 얼른 대답했다.
뚱뚱한 노인이 곁에 앉은 사람에게 말했다.
"내려가서 나 장로를 불러오게."
그 사람은 내려가더니 곧 네 사람을 데리고 올라왔다. 온몸이 흙투성이인 그들은 거만한 표정으로 목에 잔뜩 힘을 주고 올라와서는 부호 차림의 노인들 맞은편에 앉았다.
"범 장로님, 주루 주인이 대답을 하였습니까?"
얼굴에 검은 기미가 있는 노인이 물었다.
주루 주인은 바짝 긴장하여 그들의 눈치만 살폈다.
잠시 말이 없던 범 장로가 빙그레 웃으며 주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무슨 분부든 따르겠다고 했지? 그렇다면 우리가 은자 삼천 냥을 줄 터이니 홍안루에서 부리는 일꾼들을 몽땅 내보내게, 어떤가?"
그 말에 주루 주인은 다시금 울상이 되었다.
"아이고, 그건 소인의 목숨을 내놓으라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홍안루가 지금에 이른 것은 순전히 제가 부리는 일꾼들의 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요. 주방장이나 술청의 심부름꾼, 술 빚는 일꾼……, 이 모두가 특별한 재주꾼들이어서 내보내면 다시 구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재주 있는 자들을 다시 못 구해 들이면 이 홍안루는 망하고 맙니다요."
주루 주인은 다른 일은 몰라도 이 일만은 절대로 시키는 대로 할 수 없다고 마음을 다졌다. 주방장 소씨 거렁뱅이만 해도 그렇다. 소씨 거렁뱅이는 그가 아주 많은 돈을 주고 데려온 인물이다. 그의 요리 솜씨는 누구도 따를 자가 없었는데 무엇보다 '강산이개(江山易改)'라는 요리로 명성이 높았다. 이 요리를 한 접시 만들어 내놓으면 우선 그 색깔, 그 향기, 그 모양부터가 기가 막힌 데다가 한 번 입맛을 보면 어느 누구도 탁자를 치며 절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닭고기와 물고기를 한데 섞어 볶고 지지는데도 닭고기는 닭고기 맛이 그대로 살아 있고 물고기는 물고기대로 제 맛을 잃지 않으니 세상 누가 이렇듯 여러 가지를 한데 볶아도 서로의 맛이 혼합되지 않도록 할 수가 있겠는가?
홍안루가 처음부터 이렇듯 명성을 날리고 손님이 많았던 것은 아니었다. 뭐니뭐니 해도 소씨 거렁뱅이의 공이 컸다. 소씨 거렁뱅이만 없으면 이 홍안루는 썰렁한 여느 요릿집들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주루 주인은 안타깝게 말했다.
"나으리들, 저희 흥안루와 원수진 일도 없으신데 왜 이러십니까? 저희 홍안루에 무슨 불만이 있으시다면 그 연유라도 말씀해 주십시오.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으니 이런 답답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홍안루야 뭐 좋지. 난 그저 자네 집에서 일하는 일꾼들이 눈에 거슬려서 그러네. 그것들을 내보내는 게 아무래도 좋을 거야."
범 장로가 싱글거리며 말했다.
"정 그러시다면 일꾼들을 몽땅 내보낼 까닭이야 없지 않습니까? 그러지 마시고 누구를 내보낼지 찍어 말씀하십시오. 그러면 저도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그럼 좋네. 이봐, 자넨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지 알지?"
범 장로가 물었다.
"아다 뿐입니까? 여기 계신 분들은 개방 어른들이시고, 하나같이 고명하고 훌륭한 분들입지요."
"그만하면 눈이 바로 박혔군 그래. 그럼 어서 가서 임자네 주방장을 불러 오게. 어떤 사람이 와서 그를 내쫓아 버리라고 분부하더라고 하면서."
나 장로가 엄하게 말했다. 주루 주인은 그제야 어느 정도 감이 잡혔다.
'그렇구나. 이 사람들이 소씨 거렁뱅이와 무슨 척진 일이 있어 그를 찾아온 거로구나. 그런데 소씨 거렁뱅이가 무엇을 어쨌기에 이 사람들한테 이렇듯 미움을 사게 된 것일까? 날이면 날마다 음식 기름에 절어 나다닐 새도 없이 주방에만 처박혀 지내는 사람이 언제 무슨 일로 이 사람들과 원수를 졌을까?'
주인은 도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캐물을 경황도 아니었다. 주루 주인은 급히 심부름꾼을 불러 당장 소씨 거렁뱅이를 데려오도록 했다.
잠시 후 급히 층계를 오르는 소리가 나더니 소씨 거렁뱅이는 오지 않고 심부름꾼만 다시 돌아왔다.
"나으리, 주방장님께서는 자기는 그럴 겨를이 없으니 이 어른신들더러……."
심부름꾼은 어물어물 말을 잇지 못하고 눈치를 살폈다.
"그래 우리더러 어쩌라는 거냐?"
나 장로가 눈을 부릅떴다.
심부름꾼은 겁에 질린 눈으로 나 장로를 바라보았다.
"어물거리지 말고 제대로 말해 봐. 그 소씨가 도대체 뭐라고 했지?"
이번엔 범 장로가 웃는 낯으로 어르듯 말했다. 이에 기운을 얻은 심부름꾼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주방장님께선, 어르신들더러 어서 물러가기나 하라고……."
그 말에 주루 주인은 그만 털썩 주저앉아 버릴 뻔했다. 그는 간이 콩알만해져서 절망적인 심정으로 범 장로 일행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은 심부름꾼의 말을 듣고는 별로 노하는 기색도 없이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은근히 소씨 거렁뱅이를 두려워하는 눈치이기도 했다.
잠시 후 범 장로가 웃으며 주인을 향해 말했다.
"우리가 좀 너무한 것도 같은데 그리 언짢게 생각할 건 없네. 아무래도 주인인 자네가 직접 가서 소씨를 데려오는 게 좋을 것 같군. 소씨만 데려오면 그 다음은 관계치 말게. 우리도 홍안루의 다른 일은 관계치 않을 테니. 어떤가?"
주루 주인은 결과야 어찌 되든 간에 소비 거렁뱅이를 데려오고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많은 거렁뱅이들이 욱실욱실 몰려들어 홍안루를 벌써 반나절이나 점하고 있는 형편이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소씨 거렁뱅이를 데리고 와서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끄고 볼 일이었다.
급히 주방에 들어선 주루 주인은 그만 속이 뒤집혔다. 일이 없어진 주방 사람들이 하나같이 속 편하게 모여앉아 한담을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제 주루가 아니라고 해도 한솥밥 먹는 처지에 어떻게 저렇듯 남의 일처럼 희희낙락 노닥거리고 앉아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게다가 소씨 거렁뱅이의 태도는 더욱 비위를 긁었다. 그는 주방 복판에 있는 낡은 태사의(太師椅)에 몸을 기대고 앉아 주인이 들어오거나 말거나 조롱박을 들고 술만 마셔 대고 있었다.
소씨 거렁뱅이는 괴상한 인간이었다. 이 홍안루에 올 때 그는 다른 물건은 가져오지 않고 오직 그 낡디낡은 태사의 하나만 가지고 왔다. 이 황제가 앉는 용의(龍椅) 같은 태사의는 담향목(檀香木)으로 만든 것인데 어찌나 낡았는지 등받이 위에 새겨진 독수리의 눈은 없어졌고 날갯죽지는 떨어져 나간 꼴이었다. 또한 팔걸이도 오른쪽이 없어져 왼손만 걸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이따위 거저 줘도 가지지 않을 헌 의자를 가져다 놓고는 매일 거기에 궁둥이를 깔고 앉아 거
의 붙어 살다시피 했다. 주루 주인은 오늘따라 그러한 그의 모습이 여간 눈꼴사나워 보이지 않았다. 주인은 속이 뒤틀려 한마디 해 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계제가 아니라는 생각에 꾹 눌러 참았다.
"여보게, 여보게."
그는 애써 친절하게 소씨 거렁뱅이를 불렀다.
"왜 그러시우? 어느 놈이 배가 고프다고 조릅디까?"
소씨 거렁뱅이가 심드렁하게 물었다.
주인은 비굴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누각에 손님 열이 올라와 있고 아래층에는 거렁뱅이들이 한 무리 와 있는데 모두들 글쎄 차 한잔씩 시켜 놓고는 저렇게 떠날 생각을 않는군. 그러면서 자네를 꼭 한 번 만나 보자는데 나가 보는 게 좋지 않겠나?"
"그것들더러 어서 썩 물러가라고 내가 말했지 않소?"
소씨 거렁뱅이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주루 주인은 또 발끈 열이 올랐다.
'무슨 이따위가 다 있어? 제 놈 때문에 저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홍안루를 쑥밭으로 만들고 있는데도 뭐 잘났다고 큰소리야? 그렇게 잘났으면 여기 앉아 큰소리 치지 말고 냉큼 나가서 직접 쫓아 내든 말든 해 볼 것이지.'
그러나 주인은 다시 한 번 눌러 참았다. 그는 안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웃으며 소씨 거렁뱅이를 얼렀다.
"여보게, 아무튼 나가 보라니깐. 그 사람들이 자네를 꼭 만나 보자는데 무턱대고 버티는 것도 실례가 아닌가?"
"날 좀 내버려두시오. 시끄러워 죽겠소. 내가 뭣 땜에 그런 거렁뱅이들을 만나야 하오? 거 어디 사람같이 생긴 놈이 하나나 있소?"
주루 주인은 어이가 없었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더니 자기도 명색이 거렁뱅이이면서 거렁뱅이들을 무시하는 태도는 정말이지 눈뜨고 봐 줄 수가 없었다.
"제발 그런 소리 말고 한번 나가 보게. 그 사람들을 어떻게 해서라도 돌려보내야지, 그렇지 않고 그냥 이러고만 있으면 우리 홍안루는 끝장이야."
주루 주인의 우는 소리에 소씨 거렁뱅이는 하는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거 참, 사람 성가시게 구는군. 좋소. 정 그렇다면 내 한번 나가보지."
그는 냉큼 몸을 일으켜 성큼성큼 주방을 빠져 나갔다.
소씨 거렁뱅이가 누각에 올라오는 걸 보고도 범 장로 일행은 일어서지 않았다. 그저 기색이 약간 변해 있을 뿐이었다.
"소 장로, 그동안 별고 없었소?"
범 장로가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별고야 없지. 별고 없지 않구. 그런데 오늘 어쩐 일이오? 어디서 도적질을 해서 횡재 한번 톡톡히 한 모양이오? 이 뜨르르한 홍안루엘 다 찾아온 걸 보니."
나 장로가 노기등등 호통쳤다.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워. 네가 율을 위반하여 우리 개방의 일대(一袋) 제자로 떨어졌으면 응당 애써 입공속죄라도 해야 하거늘, 그러지 않고 그냥 제멋대로만 놀고 있으니 언제나 네가 사람 구실을 하겠느냐? 개방 10대 장로들을 보고도 무릎도 꿇지 않고 절도 하지 않고 문안 인사도 하지 않으니, 이 놈, 그래 무슨 반란이라도 일으켜 보겠다는 심산이냐?"
"허 참, 내 이미 개방에서 나온 몸인데 율은 무슨 율이오? 난 이제 율 따위는 모르외다."
소씨 거렁뱅이의 대답에 범 장로가 집법장로를 불렀다.
집법장로가 얼른 몸을 일으켰다. 마흔 안팎 나이의 얼굴에 엄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집법장로, 저 소씨 거렁뱅이가 우리 개방의 율을 위반했거늘 어떤 벌을 주어야 마땅할까?"
범 장로가 물었다.
"소씨 거렁뱅이는 본 방의 율을 어기고도 웃어른들께 버릇없이 굴며 항거하였으니 이는 본 방의 세 번째 계율을 위반하였고, 개방의 제자로서 개방의 일을 복종하지 않고 사사로이 홍안루에 와서 주방일을 하니 이는 본 방 계율 제7조를 위반함이요, 돈을 받아 먹으며 남의 일을 해 주고 있으니 이 또한 우리 개방의 율에 벗어난다 하겠습니다. 그러하매 마땅히 저 소씨를 총부에 끌고 가서 엄벌에 처해야 할 줄로 아룁니다."
집법장로의 대답을 듣고 범 장로는 엄한 기색으로 호통쳤다.
"소씨는 네 죄를 알겠느냐?"
"뭐, 죄? 내가 무슨 죄가 있어? 거렁뱅이질 하기 싫어 요리사가 된 것도 죄요? 주방장 노릇도 거 해 볼 만한 노릇이더구만. 은자 받지, 술 공짜로 마시지, 그런데다가 손아래 스무 명 남짓을 머슴처럼 부릴 수 있지, 그만하면 위풍이 대단하지 않소?"
그 말에 범 장로가 피식 웃었다.
"이것 봐, 다른 사람을 호령하는 게 그리 좋으면 우리 개방에 돌아가도 얼마든지 네 마음대로 호령하게 해 주겠다. 우선 개방 총부에 돌아가 처분부터 받고 보자구."
"이거 참, 이젠 거렁뱅이질을 안 하겠다는데도 왜 자꾸 이러쇼들?"
소씨 거렁뱅이는 답답하다는 듯 투덜댔다.
한동안 말이 없이 동태를 지켜 보던 나 장로가 갑자기 소리쳤다.
"솔직히 말하지 그래? 네가 일대 제자로 떨어진 게 벨이 꼴려 그러는 거 아냐?"
"그런 억지 소리는 하지도 마시오. 그까짓 일대 제자면 어떻고 이대 제자면 어떻소? 난 정말 개방에 있기 싫어져서 그러는 거요. 내 자유로 홍안루에서 요리나 만들고 밥 벌어 먹으니 세상 편한데 뭣 땜에 또 거렁뱅이질을 하겠소?"
소씨 거렁뱅이는 코웃음을 쳤다.
나 장로가 다시 꾸짖었다.
"넌 본디 개방의 구대(袋) 장로로서 개방 11명 장로 중의 한 사람이었으나 노는 행실이 너무 지나쳐서 일대 제자로 떨어졌으니 아마 그것에 불만을 품고 개방을 나간 것이 분명하다. 이유야 어찌 됐든 이대로 놔둘 수는 없어. 그리고 홍안루 주인한테 물어 봐. 홍안루 주인도 감히 너를 계속 데리고 있겠다고는 못할테니."
"주인, 그래 날 내쫓을 셈인가?"
소씨 거렁뱅이가 주루 주인에게 물었다.
주루 주인은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낸들 어쩌겠나? 나야 자네가 계속 있어 주길 바라지만 저분들이 저렇게 성화니……. 내가 아무리 사정해도 저분들은 꼭 자네를 내보내야 한다는 거야."
그의 말에 소씨 거렁뱅이는 머리를 숙이고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럼 좋소. 당신이야 무슨 죄가 있겠소? 나 때문에 홍안루를 문닫게 할 수는 없지. 내 팔자에 요릿집 주방장은 무슨 주방장?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유리걸식하는 거렁뱅이가 제격이지."
소씨 거렁뱅이는 냉큼 몸을 돌려 누각을 걸어 내려가려 했다.
"잠깐!"
범 장로가 소리쳤다.
"또 뭐가 문제요? 여기서 술 한잔 먹자는 거요? 거 구미가 당기는데? 사실 여기 온 지 그렇게 오래 되지만 여태까지 여기 누각에 올라와 술 한잔 마셔 본 적이 없거든."
소씨 거렁뱅이는 태연히 자리를 잡고 앉으며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혼자서 열 사람이나 대적하고 있는 그였지만 얼굴에 일호의 위구도 읽을 수 없었다.
이때였다. 아래층에서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누각 위에 자리가 있소?"
그렇지 않아도 이럴 때 손님들이 왕창 밀려들어 이 개방 떨거지들을 몰아냈으면 하던 참이라 주루 주인은 반색을 하며 소리쳤다.
"어서 올라오시오. 자리야 많지요. 어서 올라오십시오."
느릿느릿 누각 위에 올라온 사람은 모두 다섯이었다. 그들은 저마다 모양새가 각각 달랐는데 첫머리에 올라온 사람은 둥글넓적한 얼굴에 배를 내밀고 어기적어기적 걷는 품이 십분 오만한데, 생긴대로 탁자의 상석에 자리잡고 앉았다. 두 번째 따라온 사람은 아주 대조적으로 퉁방울 같은 눈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한 말라깽이였다. 세 번째는 보기 흉할 정도로 뒤뚱대는 오리걸음에 허리가 굽고 손가락이 유난히 앙상했다. 네 번째는 얼굴이 수수떡같이 벌겋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뒤를 돌아보는 게 인상적이었으며, 다섯째는 무슨 불쾌한 일이라도 있었는지 아니면 아직 잠이 덜 깼는지 얼굴이 찌뿌둥한 게 만사 성가신 표정이었다.
이들 다섯은 느릿느릿 탁자에 자리잡고 앉았다. 상석에 앉은 사람이 품에서 물건 두 개를 천천히 내놓았다. 채소나 고기를 써는 식칼 한 자루와 주먹밥 두 개는 담을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자루가 긴 국자였다. 두 번째 사람은 가마 닦는 큰 솔을 내놓았는데 일반적인 솔에 비해 엄청나게 크고 무거워 보였다. 세 번째 사람은 아무것도 내놓지 않고 그저 맨주먹만 두 개 식탁 위에 올려 놓았고, 네 번째 사람은 팔짱을 지른 채 눈을 내리감고 앉아 있었으며, 다섯 번째
사람은 저울 하나를 내놓았는데 그것도 저울이라기보다는 병장기에 가까웠다.
다섯 사람이 내놓은 병장기들을 본 개방 사람들은 모두 적이 놀랐다. 병장기만을 보고서도 이 다섯 사람이 임안성 안에서 명성이 높은 황궁 안의 대내오주(大內五廚)들인 묘수인주(妙手人廚) 묘대야(妙大爺), 천도만과(千刀萬 ) 과이야(過二爺), 유소화작(油 火炸) 허삼야(許三爺), 백수십권(百手十拳) 우사야(虞四爺), 일지칭(一支秤) 평오야(平五爺) 등임을 알 수 있었다.
"주인장, 우리가 여기 온 건 주인장과 볼일이 있어 온 것은 아니고 소씨 거렁뱅이를 한 번 만날까 해서 왔은즉 소씨를 만나게 해주게."
주루 주인은 또다시 간이 콩알만해졌다. 도대체 소씨 거렁뱅이가 어떤 인물이기에 이렇듯 별 사람들이 다 와서 그를 만나자는 것인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소씨 거렁뱅이를 힐끗힐끗 눈길질해 보며 사람들의 눈치를 살폈다. 소씨 거렁뱅이가 묘수인주 묘대야를 보고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내가 바로 소씨 거렁뱅이인데, 내가 그렇게 유명한 모양이지? 나를 보겠다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 걸 보니 말야."
묘수인주가 빈정거리듯 말했다.
"글쎄, 나는 그 명성을 익히 들어 왔지만 내 이 칼과 국자가 알아줄지 의문이지."
그러자 나머지 넷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은 곧 웃음을 거두고 꼿꼿한 눈길로 소씨 거렁뱅이를 쏘아보았다.
"홍안루에 천하 별미인 '강산이개'라는 요리가 있다는 말을 오래 전부터 들어 왔는데, 오늘 우리 형제 다섯이 맛 좀 볼까 해서 왔네."
일지칭 평오야가 차갑게 말했다.
주루 주인은 또 속이 탔다. 방금 소씨 거렁뱅이를 구슬려 겨우 내보내기로 했더니 이번엔 어디서 이런 도깨비 같은 사람들이 느닷없이 나타나서 강산이개를 만들어 내라고 성화인 것인가. 강산이개는 소씨 거렁뱅이가 아니고선 누구도 만들어 낼 수 없는 명요리가 아닌가.
소씨 거렁뱅이의 성미를 아는 주루 주인은 얼른 앞으로 나섰다.
"이거 죄송하게 됐습니다. 우린 방금 소씨를 내 보내기로 한 터이라 강산이개는 해 드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것말고 다른 요리들은 얼마든지 해 드릴 수가 있으니 다른 걸로 시키시지요."
"아니, 이 주인장이 우리를 어떻게 보고 이래? 우리 형제 다섯이 일손을 놓고 일부러 찾아왔는데 뭐가 어째? 우리 비위를 상하게 하면 재미가 없을걸? 주인장, 내 이름이 뭔지 알어? 내가 천도만과 과이야야. 알아? 그래 내 솜씨를 좀 봐야 정신이 들겠나?"
천도만과 과이야가 거들먹거렸다.
주루 주인은 잔뜩 겁을 집어먹고 이번엔 소씨 거렁뱅이를 향해 사정했다.
"번거로운 부탁이지만 마지막으로 이분들에게 강산이개를 해 드리고 갈 수 없겠나?"
"미안하지만 그러고 싶은 생각 없수다."
소씨는 일언지하에 거절하고는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주루 주인은 소씨 거렁뱅이가 한마디로 거절하자 아주 난처하게 되어 묘수인주 묘대야에게 또 사정하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나으리, 저 친구는 한번 하지 않는다면 죽어도 하지 않는 성미이니 이거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그러자 대내오주들은 소씨 거렁뱅이를 보며 또다시 앙천대소를 했다.
"이봐 소씨 거렁뱅이, 우리 대내오주에게 요리 솜씨를 보이는 게 두려워서 그러는 거 아냐?"
유소화작 허삼야가 비웃었다.
소씨 거렁뱅이는 코웃음만 칠 뿐 대꾸하지 않았다.
이번엔 백수십권 우사야가 말했다.
"그냥 돌아들 갑시다. 소씨 거렁뱅이의 강산이개라는 요리가 소문만 요란할 뿐 별게 아닐 거라지 않았소. 소문난 잔치 먹을 것 없다고 막상 먹어 보면 실망만 할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저 소씨가 요리를 안 하겠다고 뒤 꽁무니를 빼겠어요?"
"천만에! 이 소씨 거렁뱅이는 남의 말을 듣지 않을 뿐이야. 황제 폐하가 와도 내가 하기 싫으면 안 하는 성미니까."
소씨 거렁뱅미가 거만하게 말했다.
묘수인주네 다섯은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이 대내오주는 비록 요리사에 불과하지만 황궁 내의 일부 고관대작들보다 더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민이식위천(民以食爲天)'이란 말이 있듯이 기실 황제도 먹지 않고는 못 사는 법이요, 맛 좋은 음식을 즐기기는 백성이나 매한가지였다. 그러므로 대내오주들은 황궁의 외사방(外事房)에서 누구보다 대접을 받았으며 감히 그들을 건드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소씨 거렁뱅이로부터 이렇듯 무시를 당하고 보니 피
가 거꾸로 솟아 더는 참고 있을 수가 없어졌다.
"이봐, 재간이 있으면 어디 솜씨 좀 보여 주지 왜? 오늘 우리 대내오주하고 어디 한번 겨루어 볼까?"
천도만과 과이야가 비양거렸다.
"도대체 뭘 겨루어 보자는지 알 수 없구만. 손을 쓰자는 건가, 발을 쓰자는 건가?"
소씨 거렁뱅이는 가소롭다는 듯 대꾸했다.
묘수인주 묘대야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좋아, 우리 솜씨를 겨루어 보자구."
홍안루 주방은 아주 넓었다. 양편에 늘어선 부뚜막엔 아궁이가 스무 개가 넘었고 채소를 다듬는 사람, 고기를 써는 사람, 요리를 볶는 사람 등 쉰 명이 넘는 사람들을 전부 수용할 수 있을 정도였다.
누각에 있던 사람들은 주루 주인을 따라 주방에 들어섰다. 소씨 거렁뱅이를 선두로 대내오주, 개방 장로 열 명이 죽 들어서자 주방의 일꾼들은 사뭇 긴장한 태도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저리들 비켜서!"
소씨 거렁뱅이가 호통을 쳤다.
"소씨, 자네가 이아(易牙)가 환생한 사람만 아니라면 난 꼭 이길 수 있네. 우리 형제들의 솜씨를 보고 나면 자네도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고 하늘 위에 또 하늘이 있음을 알게 되겠지."
묘수인주 묘대야가 말하자 천도만과 과이야가 히죽 웃으며 나섰다.
"그럼 내가 먼저 본때를 보이지."
과이야는 느린 걸음으로 도마 곁으로 걸어갔다. 도마 위에는 돼지고기 한 덩어리가 놓여 있었다. 과이야는 칼을 번쩍 치켜 들더니 고기 한 점을 길게 베어 냈다. 그리고는 두 손바닥을 펴서 기를 모아 내밀었다. 얼마 안 가 그 돼지고기는 꽁꽁 얼어붙었다. 천하 최고의 한빙(寒氷) 장력(掌力)이었다. 사람들이 일제히 환성을 올렸다.
갈채 소리에 신명이 난 천도만과 과이야는 언 돼지고기를 왼손으로 집어 들더니 오른손으로 품에서 뭔가 자그마한 물건을 꺼내어 손가락에 끼우고는 왼손에 쥔 고기를 싹싹 내리훑었다. 도대체 무얼 하려는지 사람들이 미처 깨닫기도 전에 과이야의 손으로부터 가느다란 실오라기 같은 것이 뿜어져 나와 부글부글 끓고 있는 솥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이윽고 천도만과는 부뚜막에 사발 하나를 가져다 놓고 젓가락으로 솥 안을 휘휘 저어 건더기를 건져 냈는데, 그것은 마
치 국수가락 같은 고기 요리였다. 먹기 좋게 익은 고기가락은 색깔도 좋고 맛도 구수할 것 같았다.
사람들은 또 갈채를 보냈다. 장수면(長守面), 조단면(挑 面), 열탕면(熱湯面) 같은 것들은 많이 봐 왔지만 고기를 국수처럼 훑어 만든 육면(肉面)은 보다 처음이었다.
"이봐, 소씨! 어떤가?"
천도만과 과이야가 어깨를 으쓱하며 물었다.
소씨 거렁뱅이도 내심 탄복했다. 장풍으로 고기를 꽝꽝 얼리는 것도, 고기를 국수가락같이 가늘게 훑어서 육면을 만드는 것도 절세의 기공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번에는 일지칭 평오야가 앞으로 나섰다. 그가 저울대를 들고 한 번 척 휘두르니 물고기 한 마리가 낚시에 걸리듯 저울고리에 덜컥 걸려 나왔다. 푸른색과 붉은색이 뒤섞인 서호 잉어였는데 물에서 갓 잡아 올린 듯 무척 싱싱해 보였다.
평오야는 이번에는 저울대를 돌려 저울대 앞머리를 잉어 아가미에 쑥 쑤셔 넣더니 탁탁탁 아래로 몇 번 흔들었다. 그러자 저울에 달린 두 갈래 가느다란 사슬에 물고기 배가 갈라지며 내장이 쏟아져 나왔다. 이런 식으로 내장을 빼낸 그는 또 그 사슬로 쓱쓱 고기 비늘을 벗겼다. 그리고 저울대를 돌려 물고기를 기름이 부글부글 끓는 솥 안에 넣어 튀겼다.
고기가 제대로 튀겨지자 평오야는 또 저울대를 들어 휙 휘둘렀다. 그러자 튀겨진 물고기는 곧바로 큰 접시 위에 날아가 떨어졌는데 놀랍게도 고기는 아직도 죽지 않고 아가미를 벌름거리는가 하면 눈도 말똥말똥 뜨고 있는 게 아닌가?
"이게 뭔지 아는가? 산 물고기 튀김이라는 거야."
평오야가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괜찮구먼. 그 솜씨면 우쭐댈 만도 하겠어."
소씨 거렁뱅이가 대꾸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평오야의 솜씨에 머리를 끄덕였다.
"소씨, 우리 형제들이 솜씨를 보였으니 이젠 자네 쪽에서 뭔가 보여 줘야 하지 않겠나?"
천도만과 과이야가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급할 것 뭐 있소? 당신네들 대내오주가 모두 고수들인데 나머지 세 분의 절기를 마저 보고 난 뒤에 내 솜씨를 보이도록 하겠소."
소씨의 대답에 백수십권 우사야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럼 이번엔 내가 솜씨를 보여 주지."
그는 곧장 부뚜막 앞으로 가 서더니 아무런 동작도 취하지 않고 솥에서 닭 한 마리를 꺼냈다. 털을 뽑은 생닭이었다. 우사야는 닭을 도마 위에 올려 놓고는 소매를 걷더니 주먹으로 냅다 내리쳤다. 그는 또 발길을 날려 한 번 툭 걷어차더니 번갈아 같은 동작을 몇 번 되풀이했다.
사람들은 그의 동작을 유심히 눈여겨보았으나 닭은 여전히 제 모양 그대로였다. 우사야가 이번엔 장풍으로 그 닭을 자기 쪽으로 척 끄는 듯하자 닭은 도마 위에서 가볍게 몸을 뒤채였다. 우사야는 뒤집힌 닭에 대고 또 주먹질과 발길질을 번갈아 안겼다.
개방 장로 열은 일견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백수십권 우사야가 죽은 닭에 대고 열심히 주먹질과 발길질은 해대고 있지만 이렇다 할 변화가 통 보이지 않자 그가 헛수작을 하면서 사람들 눈속임을 하는 게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소씨 거렁뱅이의 표정은 사뭇 심각했다.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그는 이미 그 닭에서 괴이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우사야는 이번에는 그 닭에다가 조미료들을 뿌리고 나서 닭다리를 번쩍 집어 들었다.
"모두들 닭고기를 한두 번 잡숴 본 게 아닐 테지만 이런 닭고기는 아마 처음일 거외다."
우사야는 이렇게 말하며 닭을 끓는 기름솥에 던져 넣었다. 닭이 어느 정도 튀겨진 듯싶자 그는 큰 접시에다 닭을 건져 놓더니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러분 생각이 있으시면 맛 좀 보시지요. 이 요리는 유모계(油毛鷄)라고 하오."
'유모계?' 개방 열 장로들은 겨우 기름에 튀겨 낸 닭고기 정도가 무슨 대단한 요리라고 저러나 싶어 모두들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이때였다. 갑자기 팍 하는 소리가 나더니 닭고기가 툭툭 갈라 터지기 시작했다. 닭껍질에 있는 기름이 모두 말라 버려 그렇게 된 모양인데 그보다도 놀라운 것은 닭털이 한줌한줌 부스스 일어서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게 무슨 조화속인가 싶어 하나같이 제 눈을 의심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닭털이 아니라 닭고기 살들이 실낱같이 가느다랗게 터져 올라온 것이었다.
그제야 사람들은 크게 깨닫는 바가 있었다. 백수십권 우사야가 닭에게 주먹질 발길질을 하였을 때 닭의 살코기들은 이미 갈갈이 찢어진 채 껍질 안에 멀쩡한 듯 싸여 있었던 것이다.
"멋지네. 기가 막혀!"
소씨 거렁뱅이가 탄복했다. 그는 곧 닭고기살 몇 가닥을 뜯어 내어 입에 넣고 맛을 보았다.
"맛도 괜찮구먼. 백수십권 우사야 재주가 이만저만이 아닌데?"
개방 장로 열도 평소의 오만함은 간데없이 사라지고 속으로 저마다 혀를 내둘렀다.
이번에는 유소화작 허삼야가 나서며 소씨 거렁뱅이에게 읍하였다.
"소씨께서 정말 우리 형제들과 겨루어 볼 생각이라면 내 재주도 한번 구경해 보시오."
유소화작 허삼야는 펄펄 끓는 기름솥 앞에 다가서더니 대뜸 두 손을 기름솥 안에 쑥 넣었다. 자글자글 기름에 튀겨지는 소리가 나는데도 그는 꿈쩍도 하지 않고 물끄러미 소씨 거렁뱅이만 바라보고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손을 천천히 꺼내 들었다. 끓는 기름이 뚝뚝 떨어지는데도 손과 손목은 전혀 이상이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펄펄 끓는 기름솥에 넣고 그토록 오랫동안 튀겨 냈는데도 무사하다니 이야말로 천외기문이 아닌가!
허삼야는 득의양양한 태도로 이번에는 한 손을 주먹 쥐어 들고 솥 안에 있는 펄펄 끓는 기름을 주먹 쥔 손에다 끼얹었다. 주먹 쥔 손의 솜털이 타며 연기까지 피어 오르더니 뻘겋고 번들번들하게 부어 오르는 듯했다. 한동안 그렇게 끓는 기름을 끼얹은 뒤 허삼야는 두 주먹을 다시 불끈 쥐더니 큰 구리솥을 둥둥둥 북 두드리듯 두들겼다. 주먹에 아무 이상도 없음을 과시하려는 수작이었다.
개방 장로들은 도무지 믿기지 않는 듯 얼빠진 표정으로 잠자코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때 허삼야가 손바닥을 슬쩍 펴 보이는 것을 본 사람들은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허삼야의 손바닥은 붉은 색을 띠던 것이 하얗게 변하고 그것이 또 자색으로 변했는데 그제야 사람들은 그가 천하 최고의 무서운 내공심법(內功心法)을 갖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런 심법만 있으면 물도 불도 겁나지 않고 불에 데이거나 튀겨져도 끄떡없는 것이다.
묘수인주 묘대야가 소씨 거렁뱅이를 향해 빈정대듯 말했다.
"이봐 소씨, 이젠 자네 솜씨도 좀 보여 주지 그래? 도대체 무슨 재주가 있기에 자네가 이 경성에서 제일 뛰어난 요리사로 이름이 났는지 우리도 좀 보세."
소씨 거렁뱅이는 웃기만 할 뿐 대답이 없었다.
그러자 묘수인주 묘대야가 조리대 앞으로 다가가서 도마 위에 있는 채소들 중에 배추 한 포기를 집어 들었다.
"난 이걸 요리해 보지."
묘수인주는 배추를 손바닥 위에 올려 놓더니 다른 손바닥으로 배추를 내리누르기 시작했다. 한참 후 그는 배추 포기를 내려놓았다.
"기실 이건 자랑할 만도 못한 잔재주에 불과하지만 어디 보라구."
개방의 장로들은 모두 이 묘수인주 묘대야가 황궁의 대내오주 중에서 우두머리이며 그 재주도 으뜸임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잘난 배추 포기 하나를 움켜쥐고 눌렀다 놓았을 뿐 배추 포기에 이렇다 할 변화가 없자 모두들 이상한 생각이 들었으나 그렇다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참다못한 나 장로가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그 배추로 뭘 보여 주겠다는 것인지 우린 잘 모르겠소. 설명해 주기 바라오."
그러나 소씨 거렁뱅이만은 놀란 눈길로 묘수인주 묘대야를 바라 보았다. 이 재주가 그의 다른 네 형제들보다 훨씬 더 고강함을 알고 있는 사람은 기실 소씨 거렁뱅이 혼자뿐이었다.
"대단하구만, 대단해! 이 소씨 거렁뱅이가 당신들 대내오주의 재간에 깊이 감복했소."
그래도 개방 장로 열은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소씨 거렁뱅이는 묘수인주 묘대야가 무슨 재주를 보였다고 저토록 찬사를 하는 걸까?
"어디 내가 좀 보자. 도대체 이 배추 포기가 뭐 어쨌다고 그러는거지?"
나 장로가 다가와 그 배추 뿌리를 쥐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배추 포기를 들 때면 들기 좋게 배추 뿌리를 잡는 법이다.
나 장로는 배추 뿌리를 쥐고 위로 척 치켜 들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배추 뿌리에 배추 줄거리만 딸려 올라오고 푸른 배추잎은 도마 위에 전부 그대로 남아 있는 게 아닌가.
사람들은 그제야 묘수인주의 재주가 아주 비범함을 알고 일제히 환성을 올렸다.
각기 자기 재주를 다 뽐낸 대내오주들은 모두 소씨 거렁뱅이를 쳐다보았다. 소씨 거렁뱅이는 그들을 보고 손사래를 쳤다.
"안 되겠소, 안 되겠어. 당신들 대내오주에 비하면 이 거렁뱅이의 재주는 아무것도 아니니 내 두손들겠소."
소씨 거렁뱅이는 도리질을 하며 대내오주의 눈길을 피했다.
"그럼 좋아! 우리한테 항복한다 이거지? 그럼 자네 입으로 난 바보다, 하고 말해 봐. 대내오주에게 졌으니 난 바보다. 이렇게 한마디만 하면 이것으로 오늘 일은 끝내기로 하지."
묘수인주 묘대야가 우쭐거렸다.
"뭐? 내가 바보라고? 내가 왜 바보야? 이 소씨 거렁뱅이가 바보는 아니지. 바보야 거기 대내오주들이 바보지. 제 손을 펄펄 끓는 기름솥에 넣어 튀기는 게 바보짓이 아니고 뭔가? 그래 펄펄 끓는 기름에다 아까운 제 손을 튀길 때 아프지 않던가? 돌이나 나무로 만든 손이 아니고서야 아프지 않을 수야 없겠지. 배추를 줄거리만 하얗게 남겨 놓은 것도 그래. 그렇게 줄거리만 먹으면 뭐 뼈가 굵어진다던가, 힘줄이 굵어진다던가? 그리고 그보다 더 한심한 건 물고기를 산째
로 기름에 튀기는 짓이지. 그런 잔인한 짓을 하면서도 기뻐하고 있으니 참 딱해 못 보겠더구만. 공자님 말씀도 모르는가? 공자님 가라사대 '군자원포주야(君子遠疱廚也)'라 하셨지."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대내오주들을 한심하다는 듯 둘러보더니 말을 이었다.
"군자가 왜 푸줏간을 멀리 하는가? 군자도 고기를 아니 먹지는 않지만, 짐승도 생명인데 그것들을 산째로 묶어 놓고 죽이는 것만은 차마 눈으로 볼 수가 없어 멀리 피하는 거지. 그런데 펄펄 뛰는 물고기를 산째로 기름에 튀기면서도 일말의 연민지심도 없이 오히려 우쭐대니 그보다 잔인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또 하나는, 고기를 얼려 그것을 국수가락처럼 훑어 가지고 기름에 튀겨 고기가락을 만들던데, 생생한 고기를 얼릴 건 뭐고 얼린 걸 훑어서 고기가락
을 만들 건 또 뭔가? 이런 걸 보고 바지 벗고 방귀 뀌듯 쓸데없는 짓을 한다는 거야. 그리고 또 바보 하나가 더 있지. 그 좋은 닭에다 애써 주먹질 발길질을 해서 뭣 때문에 볼 모양, 입맛도 없게 만들지? 참 눈뜨고는 봐 줄 수가 없더구만. 그런 바보 같은 짓거리들이 세상 천지에 어디 있겠느냐구?"
대내오주들은 처음엔 소씨 거렁뱅이의 말이 무슨 고담준론인가 귀를 기울였으나 점차 한심하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소씨 거렁뱅이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대내오주들이 말이 없자 소씨 거렁뱅이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이봐, 소씨. 이젠 말 다했나?"
묘수인주 묘대야가 물었다.
"뭐 그만해 두지."
소씨 거렁뱅이의 대답에 묘수인주 묘대야가 언성을 높였다.
"그럼 좋다! 말을 다했다 이거지? 우리 다섯 형제의 재주가 자네 소씨 거렁뱅이보다 못하다면 어디 자네 재주를 보여 봐. 왜 못 보이는 거야?"
소씨 거렁뱅이는 한동안 대답이 없이 눈만 껌벅거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방금 뭐라고 했지? 내 솜씨를 구경해야겠다구? 그럼 그러지 뭐. 난 내가 익숙한 그 요리나 하나 해 보이지. 거기 다섯이 내 요리 솜씨를 배워 낼 수 있을까 모르겠는데, 나처럼만 할 수 있다면 내가 정말 항복을 하겠소."
소씨 거렁뱅이는 느릿느릿 조리대 앞으로 다가서더니 갑자기 소리쳐 누군가를 불렀다.
"홍칠이! 이봐, 홍칠이! 이게 어디 갔나? 어서 이리 나와! 어서 나와 이 나으리들께 내가 가르쳐 준 요리 솜씨를 한번 보여 주라구."
그러자 어디선가 낮게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솜씨는 무슨 솜씹니까? 난 왜 사부님한테 무슨 솜씨가 있다는 걸 모르고 있었을까요? 아니, 저 사람들한테 보여 주긴 뭘 보여 주겠다는 겁니까?"
소씨 거렁뱅이는 새로 나타날 이 사람과 아주 가까운 듯 낮은 소리로 말했다.
"저 사람들이 글쎄 이 소씨 거렁뱅이의 강산이개를 만드는 솜씨가 부러운 모양이야. 자기들도 좀 배워 봤으면 한단 말이네. 자기들도 배울 수 있으면 우리 솜씨도 별거 아니라 생각할 테고, 배워 내지 못하면 우리가 저 사람들보다 여러 면에서 대단한 셈이 되거든. 저 사람들이 과연 배워 낼 수 있을 것 같은가? 어때?"
"사부님은 언제나 황당한 일만 하시는군요. 저 사람들이 우리 솜씨를 정말 배워 내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럼 사부님은 다시는 자기 솜씨를 자랑하지 못하게 될 거 아닙니까?"
주방에 딸린 방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사람은 한창 나이의 젊은 청년이었다.
"이 사람은 내 제자인 홍칠(洪七)이오. 이제 이 사람이 당신들한테 강산이개를 만드는 솜씨를 보여 줄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