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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아나율과 天眼(천안)
莊嚴性空世界(장엄성공세계)라. 성품이 텅 비어서 공하다고 하는 그런 것을 꿰뚫고,
그러면서 또 얼마나 멋지게 장엄 했 습니까? 性空世界 인 줄을 알면서도,
그 實體(실체)가 공하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정말 부처님 궁전은
아주 아름답고 근사하게 이렇게 잘 장엄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거 뭐 비만 안 새면 되지.’
하고 이렇게 할 일이 아닙니다. 잘 장엄해야 됩니다. 얼마나 환희심 납 니까?
볼수록 환희심나지요. 그러면서 이것이 性空世界 인 줄 알고 장엄을 해야 됩니다.
“장엄하되 性空世界 라고 하는 사실을 알아야 된다
” 이것이 中道正見(중도정견)입니다.
바른 소견 입니다.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바른 소견 입니다.
유마경에서 앞에서도 끊임없이 그런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러면서 앞으로도 계속 그런 관점에서 이야기되어지고 있는 겁니다. 왜냐?
세속인으로서 출세간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融通自在(융통자재)해서 걸림이 없어요. 결국 融通自在해서 걸림이 없는
세간에서출세간을ㆍ출세간에서 세간을,출세간 사람들은 세간사에
너무 그렇 게 걸릴 필요 가 없습니다.
‘아이, 속인들이나 하는 것이지’ 자기는 언제 출세간 사람이 됐는데?
엊그저께 세간 사람이었으면서...
그렇 게 우리 중생 들은 그저 집착하는 병이 너무 많아가지고
그저 집착ㆍ집착. 자기가 어디에 소속되면 그만 엊그저께 일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거기에 바로 집착해버리는 것이지요. 莊嚴性空世界라.
羅列幻化供具(나열환화공구)입니다. 부처님 앞에 공양물을 잔뜩 차려 올립니다.
초파일 돼보십시오. 얼마나 많이 차려 올립니까? 그런데 그런 공양물을 차려 올리되
幻化ㆍ 환영(幻影). 幻影과 같은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고 나열해야 됩니다.
‘그것 부처님이 먹나? 어쩌나?’
이렇게 생각 하고 나열하지 않는 것은,
이 것은 또 큰 병 입니다. 잘못된 것이지요.
대개 시자들이 그런 생각에 많이 떨어져 있는데요.
그 전에 제가 어릴 때 오대산 참선방에 살 때,
겨울 되면 참 그... 그 때만해도 먹을 것이 없어요.
거기는 본래 짜기로 유명한 동네 아닙니까?
한암스님께서 참기름 병을 딱 당신 품에 안고, 지푸라기를 가지고
꽂아놓고는 국그릇을 들고 지나가면 거기에 한 번 적셔서
국그릇에 흔들어요. 그러면 참기름 한 방울이나 두 방울 떨어질 정도지요.
그런 정도로 참기름 냄새를 맡은 곳이고,
또 상원사 김치는 짜기가 소금하고 안 바꾼다 그래요.
“소금보다 더 짠 것이 상원사 김치다.” 그런 이야기가 되어 있어요.
우리는 거기에 한 몇 철나서 그런 전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전설이 아니라 실화지요. 그런데 그 때 어쩌다가 아주 특별공양.
특별공양이라고 하는 것은 찹쌀 부꾸미입니다.
그것 어쩌다가 기름 볶는 냄새를 맡으면 얼마나 구수합니까?
그런데 한 쪽에서 그것을 굽고 있는 겁니다. 저것을 얼른 주워 먹고 싶은 겁니다.
그래도 그것 참습니다. 참아야 옳은 것이지요. 그래서 한 쟁반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한 쟁반 되면 부처님 앞에 부전이 들고 가서 절을 하는데, 큰 절 3배 하는데
한 3초밖에 안 걸려요. 그것이 무슨 절입니까? 이것은 무슨 춤추는 것도 아니고,
굴신 운동도 아니고 큰 절 3배 하는데 그냥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렇 게
속도 빠르게 하는 겁니다. 그렇 게 불경하게 절을 하지만, 절 같지 않는 절이지만
그래도 부처님께 공양 올리고 절을 하고 내려 먹는 그것이 불자로서ㆍ
수행하는 사람으로서 바람직한 소견입니다. 그것이 옳은 소견이라고요.
“그런 절 뭐 하려고 하느냐? 그럴 바엔 차라리 하지 말지.” 하지만, 아닙니다.
부처님께 올리고 그런 절이라도 하고...
供養具. 幻化 와 같은 供養具. 바로 내려다 지가 먹을 것이면서, 그러면서도
그렇 게 부처님께 올리고 내려 먹는 그것이 제대로 중도적인 안목을 갖춘
사람의 행위라는 것 입니다. 그래서 어려서 행자로 들어 왔을 때ㆍ사미로 있을 때,
그런 것을 철저히 아주 가르치지 않 습니까? 그것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몸에 익히기만 했습니다만,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것입니다. 부처님 도 幻化 입니다.
부처님 도, 불상도 허상 입니다. 저것이 돌이고ㆍ나무고ㆍ철이고 그렇지 뭡니까?
그래 우리가 불상 으로 만들어 놨으니까 부처님 불상이고,
그리고 부처님 이고 그런 것이지, 절하는 나는 또 뭡니까?
사실은 無眼耳鼻舌身意(무안이비설신의)입니다.
나도 허상이라고요.그러나 그런 것을 알고 열심히 공양물을 나열하고,
부처님께 깍듯이 절하고 하는 그런 자세. 이것이 중도적 관점에서
우리가생활을 하는 것이지요. 신행생활하는 것 입니다.
羅列幻化供具.
이런 말 한 마디만 우리가 제대로 이해를 해도요?
그냥 다른 문제가 다 해결됩니다. 풀어집니다. 그 다음에
供養影響如來(공양영향여래). 影響如來.
그림자 같고 메아리 같은 여래께 공양 올린다. 환화와 같은 공양들을 나열해서
그림자 같고 메아리 같은 여래에게 공양 올린다. 여래가 어디 무슨 실재 하는
어떤 자체로써 어디 눈앞에 나타나는 여래가 아니 잖아요.
讚歎彼我虛玄(찬탄피아허현)이라.
나도 남도 끝내는 다 텅 비었다고 하는 사실을 알면서 남을 칭찬한다.
隨喜讚歎(수희찬탄)한다 말 입니다.
隨喜讚歎한다.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고,
어떤 대상이 전부 彼 입니다. 다른 사람ㆍ아니면 다른 어떤 경계ㆍ
법당도 좋고ㆍ불사도 좋고ㆍ그 사람이 한 업적도 좋고ㆍ그 모든 것이
虛玄 한 줄을, 텅 빈 것인 줄을 잘 이해하면서도 잘한 일에 있어서는
끝 없이 찬탄 할 줄 아는 그런 자세. 能所平等(능소평등)함을 바라는,
주관과 객관이 궁극적으로 평등하다면, 부처도 나도 다 평등 합니다.
그렇 지만 부처가 되려고 발원 하는 이 사실. 궁극적으로 나나 부처님이나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사실 그렇 지요?
心佛及衆生是三無差別(심불급중생시삼무차별)이니까,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부처가 되려고
끝 없이ㆍ 끝 없이 발원 하는 그 자세.
이 것이 바로
제대로이치를 알고,
세상 이치를 알고ㆍ
진리를 알고 살아가는
사람의 신행생활의 모습이다 하는 것 입니다.
禮拜影現法會(예배영현법회)라. 그림자처럼 나타난 이 법회에 예배하는 겁니다.
隨喜同參(수희동참)하니까 하~ 우리가 상강례할 때 이 법당은 어떻게 음향을
잘 했는지 쉰 음성도 청아하게 들려요. 어떻게 했는지 쉰 음성도 청아하게 들리는
여기에 우리는 환희심을 느끼고, 그냥 같이 동참해서 염불하고 상강례 하는 것만으로도
참 가슴이 서늘하고 조금만 누가 건들면 그냥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는 것.
하지만 또 알고 보면 影現法會라. 그림자처럼 나타난 법회. 감동합니다. 감동하지만
그 실체에 대해서는 影現法會 라고 하는 사실을 알고 감동을 해야 합니다.
또 너무 집착해가지고 이 것이 실재 하는 냥 그렇 게 알고 법회가 다 끝났는데도
법당에서 기어이 안 나가려고 한다면, 그것도 또한 하나의 집착이고 잘못 된 소견이지요.
잘못 된 소견이라고 하는 것은
“치우친 소견이다.” 하는 것 입니다.
有면 유ㆍ
無면 무.
허망하다ㆍ
아니면 실재하다.
←이런 식으로 치우친 소견을 가지고 있는 것
. ‘저 사람은 내 사람이야.’ ‘저 물건은 내 물건이야.’
언제 내 물건이 되었고 내 사람이 되었나요?
아닙니다 그것. 그렇 게 집착하는 순간 그 때부터
상처받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 때부터 상처받기 시작하는 겁니다.
어느 물건도ㆍ
어느 재산도ㆍ
어느 사람도ㆍ
어떤 명성도
집착하는 순간부터,
그 때부터 상처받기 시작하는 겁니다.
왜냐? 본래로 그렇 게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을 공연히 환영에 사로잡혀서 집착하니까요.
그것은 正見. 바로보지 못 하는 것이지요. 존재를 바로보지 못 하는 것이지요.
그 어떤 것도 바로보지 못 하는 것이지요. 명예나ㆍ재산이나
그 무엇도 바로보지 못해서 일어나는 일들 입니다.
그 보면 무슨 空着(공착)인데 자기 한 4년쯤 살고는 내놓을 생각 안 하고는 거기에
조금 공들였다고 자기 절 인양 착각해 버려가지고 기어이 집착을 해가지고는
그 동안 꼬깃꼬깃 모아놓았던 돈 다 여기저기 빼 쓴다고 다 쓰고, 뭐 하고 하면서
빚까지 져가면서 버텨봤지만 결국은 쫓겨나는 것을... 그것이 현실 아닙니까?
때가 되면 척 일어날 줄 아는 것. 본래 그렇 게 되어있습니다. 본래 내 것이 아닙니다.
내 몸도 내 것이 아닌데 뭘 그렇 게... 그런 이치를 좀 알면 정말 불교를 전하고
포교하는데 크게 플러스가 되었을 텐데, 금세의 우리 불교 역사를 보면 이런 이치를
몰라가지고 그 미련ㆍ미련ㆍ미련부리다가 자기 망신하고ㆍ세상에 망신하고ㆍ
불교망신하고 그래서 일선 포교현장에서 아등바등 그 포교해놓은 것 그만 다 까먹어버리고요
←이런 상황들이 있습니다. 그것 참... 그래서 우리가 바른 소견을 가지고 산다는 것.
그 바른 소견은 바로 중도적인 소견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는 것. ←이런 뜻입니다.
이 용어들이요?
우리가 일상생활에 가장 가까이 접하는
육바라밀에서부터 보리심을 바라고ㆍ
불도를 구하는 일이라든지ㆍ
불사를 하는 일ㆍ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일ㆍ
절을 하는 일ㆍ
예를 들어서 우리의 모습을 어떤 마음으로
갖출 것인가 하는 이런 문제들.
이런 것까지도 일일이 다 이렇게 간단명료하게 지적을 했습니다.
降伏鏡像魔軍(항복경상마군). 거울에 비친 그림자와 같은 마군을 항복을 받는 겁니다.
魔軍 이라는 것은 실재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부하는 동안에 어쩌다가 일어나는
걸림돌 입니다. 그것이 鏡像魔軍 이라고요.
그 마군은 그림자처럼 나타나는 마군 입니다. 거울에 비친 그림자가 실재 하지 않 잖아요.
우리가 기도 하다가ㆍ공부하다가 “魔障(마장)이 일어났다.” “魔障이 일어났다.”
그러는데 그 魔軍 이 실재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재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동안... 알면 사실 바로 降伏 입니다. 그 다음에
大作夢中佛事(대작몽중불사)라. 그렇 습니다. 어떤 불사든지 佛事 는 꿈속의 일입니다.
꿈속 불사입니다. 꿈속의 불사인줄 알고 크게 불사를 일으켜야 됩니다. 大作 이라고 했잖아요.
夢中佛事 인줄 알면서도 크게 일으켜라. 크게 일으켜라. 아~ 참 근사하지요?
두 손 묶고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세상이 허망하고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인데
뭐 할 것이 있느냐고, 다 허망하고 공한데 뭐 할 것이 있느냐고 이렇게 하면 이것은...
정말 그런 병에 든 사람들이 많지요. 너무 많지요. “그 뭐 포교하면 뭐해?” 하고요.
그런 병에 들어있는 이 것이 출세간 사람들의 가장 큰 병 입니다. 大作夢中佛事 라고 했잖아요.
분명히 夢中佛事 이지만 그러나 크게 일으켜야 됩니다. 열심히 불사를 지어야 됩니다. 그리고
廣度如化含識(광도여화함식)입니다. 꼭두각시와 같은 중생입니다.
중생은 중생이 아니라고요. 그 이름이 중생입니다. 사실은 바로 부처입니다.
제도할 것도 없어요. 그런 사실을 알고 널리 중생을 제도해야 됩니다.
廣度. 널리 제도해야 됩니다. 열심히 제도해야 됩니다. 가르칠 수 있는 동안
열심히 가르치다보면 자기 공부됩니다. 자기 수행된다고요.
수행 따로ㆍ포교 따로ㆍ전법 따로가 아닙니다. 열심히 전법하고ㆍ포교다보면
자기 수행 거기에 따라와요. 언제까지 공부해가지고 그 다음에 그 때,
‘공부가 어느 정도 되면 그 때 내가 전법하고ㆍ포교하겠다.’ 그렇 게 작정 하고 해서,
포교한 사람, 제가 한 사람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대로 눌러 앉아버려요.
그리고 아무 짝에 쓸모없는 사람 돼버려요.
이제 행정을 하려니까 행정에 어둡지ㆍ세상에 어둡지ㆍ하기 싫지ㆍ염불도 못하지ㆍ
법문도 못하지, 그만 말 않는 것이 장점으로 알고 있으니까요. 말 안하고ㆍ책 안보고ㆍ
세상 것 모르는 것을 장점으로 알고 있는 겁니다.
야~ 이것 큰 병이지요. 그것이 장점인줄 알고 있는 겁니다. 저하고 같이 중 된 사람도
그래가지고 그냥 그대로 주저 앉아갖고 아무 짝에 쓸모없는 사람이 돼버렸어요.
이제 어디 갖다 쓰려니까 종무소에서 불러서 하려니까 나이 많아버렸지ㆍ재능 없지ㆍ
능력 없지ㆍ요즘 현대 사람들 제접 하는데 도저히 지식으로나 무슨 상식이 떨어져버리지,
아 이것 큰 문제입니다.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세월 가니까 이젠 몸은 병들고, 마음이 쪼그라들어 버렸어요.
정신이 쪼그라들어가지고는 이제 아무 것도...
나가서 뭘 용기 있게 할 수가 없어요. 겁이 나는 겁니다. 사람 대하기도 겁이 나버려요.
저는 참 그 점이 제일 참 안타까워요. 어디든지 쓸모 있는 사람이 돼야 됩니다.
옛 사람들이 쓸모없는 사람이 되라고 참 그것 잘 모르고 가르친 것이지요.
어쨌든지 사회도 마찬가지고ㆍ우리 불가에도 마찬가지 입니다.
어느 구석이든지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그 다음에
同證寂滅菩提(동증적멸보리)라.
寂滅. 텅 빈 깨달음을, 깨달음이라는 것이 뭐 있습니까?
없어요. 寂滅 한 겁니다. “實體(실체)가 적멸한 것이지만
그것을 함께 그것 을 함께 증득해야 된다.” 하는 그런 내용으로...
참~ 글 구성을 한번 보십시오. 얼른 보지만 보리에서 시작해서 보리로
딱 끝나게 되어있습니다. 이렇게 명문으로 수백 년 동안 人口에 회자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의 교훈으로 이렇게 남겨지는 것은요?
이 것이 보통 글이 아닙니다. 그리고 뜻만 이렇게 전달하는 정도가 아니고,
그 어떤 구성이라든지 짜임새라든지 그 다음에 어떤 문장으로 까지도 아주
뛰어나게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이것 부디 많이 복사해가지고 곳곳에 가서
접하지 못한 분들에게 많이 전하시고, 이러한 기준에 의해서 우리가 인생을 살면,
그야말로 세간에 있든ㆍ출세간에 있든 자기가 어디 가서 무엇을 하든 간에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다시 말해서 치우침의 병에 들지 아니하고,
원만하고ㆍ좋아하는 삶을 살 수 있다 하는 것 입니다.
이 유마경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세간인으로서 출세간법을 거침없이,
아주 화려하게 또 아주 현란할 정도로 설법을 펴는 것도 바로 그런
조화로운 인간ㆍ
조화로운 삶.
그것이 바로 유마거사의 인격이기 때문에,
바로 이러한 참 아주 훌륭한 경전이 우리 손에 이르게 됐다. 이런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