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宣城邑誌 禮安烏川君子里 聯關記錄 撮要(1)
[解題-예안현(禮安縣) 관련의 읍지(邑誌)는 안동시가 영가지(永嘉誌)와 합본하여 번역한 권시중(權是中, 1572,선조 5-1644, 인조 22)의 초고본 선성지(宣城誌) 외에도 1846년의 예안읍지(禮安邑誌), 1895년 필사(筆寫)의 예안읍지(禮安邑誌), 1899년 필사의 예안군읍지(禮安郡邑誌), 및 간행 연도가 불분명하나 일제강점기에 석판(石版) 인쇄된 선성읍지(宣城邑誌) 등이 있었다 하는데, 여기 뽑아 실은 내용은 바로 그 석판본 선성읍지 가운데에 보이는 예안 오천 군자리 연관 자료를 정리한 것입.]
1. 建置沿革
본디 고구려 매곡현(買谷縣)이었는데 신라가 선곡(善谷)으로 고치고 내령군(奈靈郡)에 딸린 현(縣)으로 삼았다. 고려 태조(太祖) 떄에 성주(城主) 이능선(李能宣)이 의거(義擧)하여 고려에 귀순하니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고, 승격시켜 군(郡)으로 삼았다. 현종(顯宗) 때에는 길주(吉州)에 부속시켰으나 신우(辛禑)가 그의 태(胎)를 이곳에다 묻고 다시 군(郡)으로 삼았다가 곧 승격시켜 주(州)로 삼았다. 공양왕(恭讓王)이 감무(監務)를 두었고, 강헌태조(康獻太祖) 원년에 고쳐져 현감(縣監)을 두었다.
2. 郡名
매곡(買谷), 선곡(善谷), 선성(宣城), 예안(禮安)
3. 官職
현감(縣監) : 문관으로 음직(蔭職) 6품.
안동진관병마절제도위(安東鎭管兵馬節制都尉) : 훈도(訓導) 1인, 좌수(座首) 1인이고 별감도 1인이나 지금은 없다.
4. 姓氏
이(李) : 선성(宣城), 진보(眞寶), 월성(月城), 평창(平昌), 영천(永川), 영천(潁川), 울진(蔚珍), 강릉(江陵)
김(金) : 예안(禮安), 의인(宜仁), 의성(義城), 안동(安東), 월성(月城), 광주(光州), 김해(金海), 청풍(淸風), 영양(英陽), 순천(順天), 영해(寧海), 강릉(江陵), 삼척(三陟), 평해(平海), 당악(唐岳)
우(禹) : 단양(丹陽)
조(趙) : 예안(禮安), 양천(楊川), 한양(漢陽), 횡성(橫城), 김해(金海), 함양(咸陽)
안(安) : 순흥(順興)
권(權) : 안동(安東), 예천(醴泉)
강(姜) : 진주(晉州)
박(朴) : 함양(咸陽), 영해(寧海), 울진(蔚珍), 밀양(密陽), 나주(羅州), 여주(麗州), 무안(務安)
정(鄭) : 창녕(昌寧), 동래(東萊), 장기(長鬐), 청주(淸州), 정선(旌善), 경주(慶州), 영일(영日)
최(崔) : 월성(月城), 해주(海州), 강릉(江陵), 밀양(密陽), 선산(善山)
가(賈)
남(南) : 영양(英陽), 의령(宜寧)
금(琴) : 봉화(奉化)
윤(尹) : 파평(坡平), 덕산(德山)
신(申) : 평산(平山), 영해(寧海)
손(孫) : 월성(月城), 밀양(密陽), 평해(平海)
오(吳) : 고창(高敞), 해주(海州), 남원(南原)
류(柳) : 풍산(豊山)
심(沈) : 청송(靑松)
임(任) : 풍천(豊川)
허(許) : 양천(陽川)
송(宋) : 덕산(德山), 회덕(懷德), 야성(冶城), 함양(咸陽)
성(成) : 창녕(昌寧)
홍(洪) : 남양(南陽)
전(田) : 정선(旌善), 월성(月城)
지(池) : 단양(丹陽), 영해(寧海)
엄(嚴) : 영월(寧越)
주(朱) : 거창(居昌)
장(張) : 순천(順天), 안동(安東), 인동(仁同), 울진(蔚珍), 단양(丹陽)
반(潘) : 기성(岐城), 거제(巨濟)
임(林) : 울진(蔚珍), 예천(醴泉)
한(韓) : 청주(淸州)
유(劉) : 상주(尙州), 경주(慶州)
고(高) : 제주(濟州)
서(徐) : 장성(長城), 기평(岐平)
방(方) : 온양(溫陽)
천(千) : 안동(安東), 월성(月城)
백(白) : 대구(大邱)
여(余) : 밀양(密陽), 의령(宜寧)
문(文) : 안동(安東)
현(玄) : 하양(河陽)
배(裵) : 흥해(興海)
채(蔡) : 평강(平康)
강(康) : 신천(信川)
5. 山川
용두산(龍頭山) : 현(縣)의 북쪽 20리에 있다. 봉화(奉化) 태백산(太白山)으로부터 내려온 맥(脈)이다. 최선(崔詵)의 용수사(龍壽寺) 기(記)에 “태백산으로부터 남쪽으로 일어나서 300여리를 엎드려 있다가 갑자기 빼어난 것이 용두산이니 실은 영가군(永嘉郡)을 짊어지고 도호부(都護府)를 만든 산이다”고 하였다.
국망봉(國望峯) : 현(縣)의 북쪽 20리에 있다. 용두산의 서쪽 줄기이다. 단조 대왕께서 영월(寧越)에서 왕위를 양위(讓位)하시니 판서(判書)에 추증된 이계양(李繼陽)이 계유(癸酉)년의 진사로서 봉화의 훈도(訓導)로 있다가 벼슬을 버리고 가족을 이끌고 용두산 아래에서 황무지를 개간하며 봉우리 위에다 단을 쌓고, 항상 단종의 죽음을 당한 날에
1) 북쪽으로 영월(寧越)을 바라보고 절을 하니 후인들이 그 봉우리를 이름하여 국망(國望)이라 하고, 단을 수리하고, 비석을 세우며 명(銘)을 지어 말하기를 “한결같이 감싼 높은 봉우리 우주의 동량(棟樑)이로다” 하였다.
영지산(靈芝山) : 현(縣)의 북쪽 5리에 있다. 용두산 남쪽 기슭이 내린 것이다.
성황산(城隍山) : 객관 북쪽에 있다. 진산(鎭山)이다. 영지산 남쪽 기슭이 내려 온 것이다.
요성산(邀聖山) : 현(縣)의 북쪽 20리에 있다. 용두산 서쪽 기슭이 내려온 것이다. 고려말 문과에 급제하고 교찬(校贊) 벼슬에 있던 김을방(金乙邦)이 벼슬을 버리고 이 산에 들어와 아래에다 집(室)을 지어 둔번초당(遁煩草堂)이라 편액을 걸고 드디어 숨어 살다가 조선조가 들어서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녹전산(祿轉山) : 현(縣)의 서쪽 30리에 있다. 요성산 서쪽 기슭이 내려온 것이다.
용각산(龍角山) : 녹전산의 남쪽 줄기이다.
장갈현(長葛峴) : 현(縣)의 동쪽 30리에 있다. 영양(英陽)으로부터 일월산(日月山) 서쪽 기슭이 내려온 것이다.
비암(鼻巖) : 현(縣)의 남쪽 3리에 있다. 높이가 10여 길이(丈)나 되고, 그 위에는 5,60명이 앉을 수 있으며 앞에는 큰 시내가 닿아 있어 고을 사람들이 놀며 완상하는 곳이다.
조산수(造山藪) : 부진(浮津) 남쪽 기슭에 있다.
나화석천(羅火石川) : 현(縣)의 동쪽 28리에 있다. 곧 봉화 매토천(買吐川)의 하류(下流)이다.
손량천(損良川) : 현(縣)의 동쪽 5리에 있다. 곧 나화석천의 하류인데 현(縣)의 남쪽 1리에 이르러 부진(浮津)이 되고, 남쪽으로 흘러 안동에 이르러서는 견향진(犬項津)이 된다.
부진(浮津) : 곧 나화석천의 하류인데 안동부에 이르러서는 요촌탄(寥村灘)이 된다.
명월담(明月潭) : 현(縣)의 동쪽 25리에 있다.
도산(陶山) : 현(縣)의 동쪽 10리에 있다. 이황(李滉)이 그 가운데에다 집을 짓고, 도(道)를 강의하고 거처하며 그 당(堂)에다 편액(扁額)하여 도산서당(陶山書堂)이라 하고, 헌(軒)은 암서(巖栖)라 하고, 재(齋)는 완락(玩樂)이라 하였다. 그 서쪽에 또 농운정사(隴雲靜舍), 관란헌(觀瀾軒), 시습재(時習齋), 지숙료(止宿寮)가 있으며 또한 시와 기도 있다.
부용산(芙蓉山) : 현(縣)의 동쪽 7리에 있다. 조목(趙穆)이 그 아래에 살았다.
고산(孤山) : 현(縣)의 동쪽 25리에 있다.
건지산(搴芝山) : 현(縣)의 동쪽 25리에 있다. 한 줄기는 서쪽으로 나와 낙모봉(落帽峯)이 되었다.
단사협(丹砂峽) : 현(縣)의 동쪽 25리에 있다. 주삣한 암벽이 낙동강의 구비를 둘러 안고 있다. 이황(李滉)은 이를 이름하여 단사협이라 하였는데 돌색깔이 붉은 것이 많은 까닭이었다. 가장 기이한 승지(勝地)라고 칭하며 남쪽에는 왕모성(王母城), 갈선대(葛仙臺), 고세대(高世臺)가 있다.
어름산(御廩山) : 현(縣)의 남쪽 5리에 있다.
농암(聾巖) : 분천(汾川) 위, 애일당(愛日堂) 아래에 있다. 이현보(李賢輔)가 여기에 기인하여 호(號)를 삼았다.
신암폭포(新巖瀑浦) : 현(縣)의 북쪽 30리에 있다. 양 언덕에 흰 돌이 이어져 깔려 있으며 시냇물 가운데에서 물이 솟아나와 못이 되었다. 그윽한 경치가 가히 볼만하다.
퇴계(退溪) : 건지산 남쪽에 있다. 이황(李滉)이 여기에 터를 잡아 살면서 인하여 호(號)를 삼았다. 시가 있어 가로되
몸은 벼슬에서 물러나니
어리석은 내 분수에 평안하고
배움은 물리치니
늙으막에 근심이구나
시냇가에 비로서
터잡아 살아가니
날마다 물가에서
깨달음이 있도다.
분천(汾川) : 농암 아래에 있다.
오담(鼇潭) : 관수대(觀水臺) 아래에 있다. 분천 하류이다.
풍월담(風月潭) : 부용산 아래에 있다. 오담 하류이다.
청음석(淸吟石) : 온계(溫溪) 하류에 있다. 옛날의 도계반석(兜溪盤石)이다. 이우(李堣)가 일찍이 완상하며 노닐던 곳이다. 조카 황(滉)에 미쳐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었다.
성천(聖泉) : 둔촌리(遁村里) 동서쪽 양 언덕에 있다.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차가와 심히 맛볼만하다.
6. 風俗
“풍속이 절약하고, 검소함을 숭상한다(俗尙節儉)”고 관풍안(觀風安)에 있다.
“땅을 편벽되고, 토지는 박하다(地偏土薄)”고 김효정(金孝貞)의 동루시(東樓詩)에 있다.
“그 백성은 부리기 쉽다(其民易使)” 허목(許穆)이 사또 정유지(鄭維地)를 보내는 글(序)에 “예안(禮安)은 영남 가운데 산수가 아름다운 곳이요, 또 옛날에는 군자의 고을이라 끼친 풍속과 남은 가르침이 아직 있어 그 백성은 부리기가 쉽고, 가르치기가 쉽다”고 하였다.
7. 坊里
읍내면(邑內面)
관저리(官底里)
동부리(東部里)
서부리(西部里)
만촌리(晩村里) : 관문에서 3리 떨어져 있다.
교촌리(校村里) : 관문에서 3리 떨어져 있다.
대사리(大寺里) : 관문에서 3리 떨어져 있다.
선안리(宣安里) : 현의 남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3리 떨어져 있다.
월현리(月峴里) : 현의 남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5리 떨어져 있다.
양장리(羊場里) : 현의 서남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7리 떨어져 있다.
오천리(烏川里) : 현의 남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8리 떨어져 있다.
천전리(川前里) : 현의 남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5리 떨어져 있다.
서면(西面)
신안리(新安里) : 현의 서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10리 떨어져 있다.
가야리(佳野里) : 현의 서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10리 떨어져 있다.
사천리(沙川里) : 현의 서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15리 떨어져 있다.
양사리(讓仕里) : 현의 서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20리 떨어져 있다.
녹전리(綠轉里) : 현의 서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20리 떨어져 있다.
지례리(知禮里) : 현의 서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15리 떨어져 있다.
북면(北面)
신기리(新基里) : 현의 북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20리 떨어져 있다.
둔촌리(遁村里) : 현의 북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20리 떨어져 있다.
원당리(元塘里) : 현의 북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30리 떨어져 있다.
어리안리(於里安里) : 현의 북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35리 떨어져 있다.
굴현리(屈峴里) : 현의 북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25리 떨어져 있다.
의서면(宜西面)
운곡리(雲谷里) : 현의 북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20리 떨어져 있다.
안의리(安義里) : 현의 북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10리 떨어져 있다.
연곡리(鷰谷里) : 현의 북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15리 떨어져 있다.
온계리(溫溪里) : 현의 북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15리 떨어져 있다.
사곡리(斜谷里) : 현의 북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30리 떨어져 있다.
의동면(宜東面)
분천리(汾川里) : 현의 동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10리 떨어져 있다.
도산리(陶山里) : 현의 동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15리 떨어져 있다.
의인리(宜仁里) : 현의 동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10리 떨어져 있다.
상계상리(上溪上里) : 현의 동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15리 떨어져 있다.
하계상리(下溪上里) : 현의 동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15리 떨어져 있다.
천사리(川砂里) : 현의 동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20리 떨어져 있다.
단사리(丹砂里) : 현의 동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25리 떨어져 있다.
원대리(遠臺里) : 현의 동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20리 떨어져 있다.
백운지리(白雲池里) : 현의 동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25리 떨어져 있다.
이곡리(狸谷里) : 현의 동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20리 떨어져 있다.
가사리(佳士里) : 현의 동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35리 떨어져 있다.
고리현리(古里峴里) : 현의 동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30리 떨어져 있다.
광석리(廣石里) : 현의 동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40리 떨어져 있다.
동하면(東下面)
천상리(川上里) : 현의 동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7리 떨어져 있다.
역동리(易東里) : 현의 동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12리 떨어져 있다.
부포리(浮浦里) : 현의 동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10리 떨어져 있다.
대곡리(大谷里) : 현의 동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15리 떨어져 있다.
태동리(台洞里) : 현의 동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20리 떨어져 있다.
동상면(東上面)
성황리(城隍里) : 현의 동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30리 떨어져 있다.
전두리(田頭里) : 현의 동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20리 떨어져 있다.
도동리(陶洞里) : 현의 동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25리 떨어져 있다.
청구리(靑丘里) : 현의 동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20리 떨어져 있다.
말곡리(末谷里) : 현의 동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10리 떨어져 있다.
피박리(皮朴里) : 현의 동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40리 떨어져 있다.
장갈리(長葛里) : 현의 동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40리 떨어져 있다.
8. 戶口
원호(元戶)가 1661호(戶)이고, 인구(人口) 5,492구 가운데 남자 2,949구, 여자 2,542구이다. 무자년을 기준으로 하였다.
17. 學校
향교(鄕校) : 현(縣)의 북쪽 2리에 있다.
역동서원(易東書院) : 현의 동쪽 10리에 있다. 고려때 좨주(祭酒) 벼슬을 한 우탁(禹倬)이 역학(易學)이 깊었는데 단양(丹陽)으로부터 현의 남쪽 지삼촌(知三村)에 이사와 살았다. 가정(嘉靖) 경오년에 이황(李滉)이 원우(院宇)세우기를 발의하여 사(祠)를 상현(尙賢)이라 하고, 당(堂)을 명교(明敎)라 하며 좌우의 나래처럼 있는 방을 정일(精一), 직방(直方)이라 하고 동•서 양재(兩齋)를 사물(四勿), 삼성(三省)이라 하고, 장서실(藏書室)을 광명(光明)이라 하며 바깥문은 입도(入道)라 하고, 모두를 역동서원이라 이름하였다. 숙종 갑자년(1684)에 편액이 하사되었다.
도산서원(陶山書院) : 도산(陶山) 안에 있다. 선조 갑술년(1574)에 세워 이황을 제사한다. 을해년(1575)에 편액이 하사되고 병자년(1576)에 봉안하였다. 뒤에 문인(門人)인 조목(趙穆)을 종사(從祀)하였다.
청계서원(淸溪書院) : 온계리(溫溪里) 동쪽에 있다. 현종 정미년(1667)에 세워 이식(李埴)을 제사하고 이우(李堣), 이해(李瀣)를 부향(祔享)한다.
분강서원(汾江書院) : 분천(汾川)가에 있다. 숙종 임오년(1702)에 세워 이현보를 제사한다. 묘(廟) 안에 유상(遺像)을 간직하였다.
마곡서원(磨谷書院) : 현의 서쪽 10리에 있다. 변계손(卞系孫)•김유용(金有庸)•이완(李完)•김생명(金生溟)•박사희(朴士熹)•류빈(柳贇)•윤의정(尹義貞)을 배향한 곳이다. 정사(精舍)로 있다가 서원으로 올랐다.
동계서원(東溪書院) : 부라리(浮羅利)에 있다. 금난수(琴蘭秀), 이안도(李安道)를 배향한 곳이다. 정사로 있다가 서원으로 올랐다.
낙천정사(洛川精舍) : 현의 남쪽 5리에 있다. 김효로(金孝盧)•김연(金緣)•김부인(金富仁)•김부필(金富弼)•금응협(琴應夾)•김부신(金富信)•김부의(金富儀)•김부륜(金富倫)•금응훈(琴應壎)•김기(金圻)•김해(金垓)를 배향한 곳이다.
한천정사(寒泉精舍) : 현의 동쪽 15리에 있다. 김택룡(金澤龍)을 배향한 곳이다.
18. 壇廟
사직단(社稷團) : 현의 서쪽 3리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향현사(鄕賢祠) : 현의 동쪽 1리에 있다. 이계양(李繼陽), 김효로(金孝盧)를 배향한 곳이다.
여단(厲壇) : 현의 북쪽 3리에 있다.
19. 塚墓
김방경(金方慶) 묘 : 현의 서쪽 지례촌(知禮村) 위에 있다.
이계양(李繼陽) 묘 : 용두산(龍頭山) 아래, 온계리(溫溪里) 뒤에 있다. 신용개(申用漑)가 묘갈(墓碣)을 지었다.
김효우(金孝友) 묘 : 현의 서쪽 사천(沙川)에 있다. 이우(李堣)가 묘갈명을 지었다.
김효로(金孝盧) 묘 : 김방경 묘의 뒤에 있다. 이황이 묘갈과 병서(幷序)를 지었다.
이현보(李賢輔) 묘 : 용두산 아래 도곡(道谷)에 있었는데 정조(正祖) 신해년(1791)에 안동 정자동(亭子洞)으로 옮겼다. 채제공(蔡濟恭)이 묘갈의 글씨를 썼다.
이식(李埴) 묘 : 이계양의 묘 아래에 있다. 기대승(奇大升)이 묘갈을 찬하고 금보(琴輔)가 글씨를 썼다.
이우(李堣) 묘 : 이식(李埴)의 묘 왼쪽 기슭에 있다. 최숙생(崔淑生)이 묘갈을 지었다.
이해(李瀣) 묘 : 연곡(鷰谷)에 있다. 동생 황(滉)이 묘갈명을 지었다.
이황(李滉) 묘 : 건지산(搴芝山) 아래 퇴계(退溪) 위에 있다. 스스로 묘갈명을 지었다. 기대승(奇大升)이 그 뒤에다 서(敍)하였다. 금보(琴輔)가 글씨를 썼다.
조목(趙穆) 묘 : 부용산(芙蓉山) 아래에 있다. 정온(鄭蘊)이 비문을 지었다.
금응협(琴應夾) 묘 : 지례촌 곁에 있다. 이준(李峻)이 비문을 지었다.
금난수(琴蘭秀) 묘 : 백운지(白雲池) 가에 있다. 유근(柳根)이 묘갈명을 지었다.
금보(琴輔) 묘 : 용두산 동쪽 기슭에 있다. 대흥당(大興堂) 금업(琴업)이 묘지명(墓誌銘)을 지었다.
김령(金坽) 묘 : 연곡(鷰谷)에 있다. 권유(權愈)가 묘갈명을 지었다. 뒤에 오천(烏川)의 계암(溪巖) 위로 옮기었다.
23. 樓亭
추흥정(秋興亭) : 객사 동쪽에 있다. 홍희(洪熙) 원년(1425)에 현감(縣監) 박결(朴潔)이 짓고, 관찰사 하연(河演)이 이름짓고, 기문을 썼다.
동루(東樓) : 현의 동쪽에 있다.
쌍벽루(雙碧樓) : 부진(浮津) 언덕 위에 있다.
관심루(寬心樓) : 일명 제시루(製詩樓)라 한다. 객사 동쪽에 있다.
망미루(望美樓) : 객사 문밖 누(樓)이다.
근민당(近民堂) : 곧 내 동헌(東軒)이다.
일조헌(一粗軒) : 일명 제금헌(製錦軒)이라 한다. 곧 바깥 동헌이다.
애일당(愛日堂) : 분천(汾川) 가에 있다. 이현보(李賢輔)가 어버이를 모시고 노닐던 곳이다.
추월한수정한서암(秋月寒水亭寒棲巖) : 퇴계 가에 있다. 이황이 깃들어 쉬던 곳이다.
탁청정(濯淸亭) : 현의 남쪽 5리에 있다. 김유(金綏)가 세웠다.
침류정(枕流亭) : 현의 남쪽 5리 우암(愚巖) 위에 있다. 낙동강에 임하여 아름다운 경치를 가졌다. 현감 김만균(金萬勻)이 세웠다. 세월이 오래되어 퇴락해 무너지니 김유(金綏)가 철거하고 다시 새롭게 지었다. 뒤에 또 물에 무너졌다.
영지정사(靈芝精舍) : 영지산 위에 있다. 이현보(李賢輔)가 허물어져 폐한 절을 다시 고쳐 정사(精舍)로 삼고 만년에 노닐며 완상했다.
요산정(樂山亭) : 현의 서쪽 10리에 있다. 이완(李完)이 지었다. 계부(系父) 황(滉)이 손수 써서 이름지었다.
월천서당(月川書堂) : 부용산 남쪽에 있다. 조목(趙穆)이 숨어 수양하던 곳이다.
읍청정(挹淸亭) : 탁청정(濯淸亭) 남쪽에 있다. 김부의(金富儀)가 지었다. 청량산(淸凉山)을 바라보는 까닭으로 이렇게 이름하였다. 이황(李滉)이 손수 편액(扁額)을 쓰고 또 12영(詠)을 지었다. [참고-읍청정’의 ‘挹-당길 읍, 물을 풀 읍’자는 ‘揖-절할 읍’자가 아닌데, 선성읍지에는 ‘揖’으로 썼기 때문에 그런 풀이를 하였으나 잘못임.
고산정(孤山亭) : 일동(日洞) 월명담(月明潭) 아래에 있다. 금난수(琴蘭秀)의 별장이다.
도암정사(道巖精舍) : 현의 서쪽 10리에 있다. 김생명(金生溟)이 세웠다.
격양정(擊壤亭) : 현의 서쪽 10리에 있다. 박사희(朴士熹)가 세웠다.
송원정(松遠亭) : 현의 서쪽 10리에 있다. 판관(判官) 김영근(金영根)이 세웠다.
침락정(枕洛亭) : 오천(烏川) 남쪽 3리에 있다. 김광계(金光繼)가 숨어 수양하던 곳이다.
청락정(淸洛堂) : 청량산 골 밖 나부천(羅浮村)에 있다. 임흘(任屹)이 깃들어 쉬던 곳이다. 헌(軒)은 주일(主一)이라 하고, 재(齋)는 양심(養心), 바위는 붕래(朋來), 대(臺)는 영요(領要)라 하여 무릇 28영(詠)이 있다.
정지재(定止齋) : 어름산(御凜山) 아래에 있다. 김확(金確)이 세웠다.
강정(江亭) : 의인강(宜仁江) 언덕에 있다. 이집(李集)이 세웠다.
침간정(沈澗亭):온계리 서쪽에 있다. 임세핵(任世翮)이 세웠다. 권두경(權斗經)의 시가 있다.
삼수헌(三秀軒) : 온계 동쪽에 있다. 이정흡(李廷翕)이 숨어 수양하던 곳이다. 지평(持平) 성언집(成彦집)이 기(記)를 썼다.
만가헌(晩暇軒) : 요성산 아래에 있다. 김원복(金元復)이 깃들어 쉬던 곳이다.
수석정(漱石亭) : 하계(下溪) 위 강 언덕에 있다. 이야순이 세웠다.
후계정(後溪亭) : 부라(浮羅) 동쪽 청동(淸洞)에 있다. 이이순(李頤淳)이 세웠다.
고계정(古溪亭) : 청음석(淸吟石) 동쪽 강가에 있다. 이휘녕(李彙寧)이 세웠다.
오류정(梧柳亭) : 요성산 아래에 있다. 김양직(金養直)이 세웠다.
침천정(枕泉亭) : 온계 서쪽에 있다. 이휘재(李彙載)가 세웠다.
성남서당(聖南書堂) : 요성산 남쪽에 있다. 김재선(金載璿), 김은한(金殷翰)이 책을 강(講)하던 곳이다. 김재숙(金載琡), 김재로(金載輅), 김도원(金道源)이 다시 수리하였다.
26. 道路
본현으로부터 서울은 545리 감영(監營)은 240리, 좌병영(左兵營)은 450리, 통영(統營)은 700리, 수영(水營)은 540리이다. 남으로 안동 지경까지는 15리이고, 북으로 봉화 지경까지는 30리, 동으로 영양 지경까지는 41리, 서로 영천 지경까지는 39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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