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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할렐루야. 오늘도 거룩한 주의 날 주님의 성전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저와 여러분의 삶 가운데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도 말씀에 순종하여서 우리 앞뒤 좌우 계신 분들에게 사랑의 고백과 축복의 인사를 나누겠습니다.
주 안에서 사랑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 공관복음이라고 들어보셨죠? 공관복음이라는 것은 사복음서 중에 요한복음을 제외한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요한을 제외한 누가복음까지 이 세 복음서를 통틀어서 이야기하는 것을 공관복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공관이라는 한자를 보면 한 가지 공 관자를 사용하게 되는데 실제 세계 복음서를 이렇게 살펴보면 그 진술이 거의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는 복음서를 대조해서 해석하는 데 큰 장점이 있게 되죠.
그중에 하나의 본문인 오늘 본문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오늘 본문 17절에 보시면 한 사람이 달려와서 무릎을 꿇고 예수께 묻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요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까?
예수님께서 예수님께 달려와 질문한 이 사람을 공관복음으로 이렇게 비추어 보면 마태복음에서는 그 사람에 대해서 젊은 청년이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고요. 마가복음에서는 부자다 그리고 누가복음에서는 관원이다 그렇게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를 조합해 보면 예수님 앞에 나아와 질문한 사람은 젊은 관원이자 부자 청년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지 엘리트 중에 엘리트라고 보시면 되겠고요.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볼 때 매우 유력한 고급 관리였다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능력 많은 젊은 청년이 왜 예수님 앞에 나와 무릎을 꿇고 묻게 된 것일까요? 그것도 영생에 대해서 선한 선생님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이 질문을 들은 예수님은 두 가지 반응을 보이십니다.
오늘 그 두 가지 반응을 함께 좀 살펴보려고 하는데요. 먼저 선한 선생님이라는 이 부분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반응을 하세요. 18절 우리 한번 읽어보실까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답변하신 의미가 도대체 무엇일까? 여러분 예수님은 지금 젊은 부자 청년이 어떤 의도로 질문을 하고 있는지 이미 알고 계셨던 것이죠. 이 부자가 예수를 향해서 선한 선생님이라고 했던 것은 선함이라는 것이 영생의 조건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질문을 자세히 보십시오. 무엇을 해야 이게 핵심이에요.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즉 무슨 선한 행동을 할 때에 제가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묻고 있는 것이죠.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잖아요. 예수를 믿다 보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받을 수가 있어요. 특별히 내 가족 중에 믿지 않고 전도 대상자가 갑작스럽게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어 교회에 가면 영생을 얻는다는데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어라고 물으신다면 여러분들은 뭐라고 대답을 해 주시겠어요?
그러게 그러고 마실 건가요? 오늘 본문을 통해서 확실한 지혜가 저와 여러분 가운데 있기를 소망합니다.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 이 영생에 대한 문제죠. 영생은 다르게 이야기하면 구원이죠. 하나님의 나라를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원의 문제는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절대로 들어갈 수 없는 그러한 불가능한 일인 것이죠. 문제는 아무리 선한 일을 열심히 하고 또한 많이 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죄성 아담으로부터 흘러내려오는 이 원죄 부분을 씻어낼 수가 없다는 거예요. 따라서 선한 행동은요. 영생을 가져다 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구원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에베소서 2장 8절 9절인데 우리 큰 목소리로 함께 읽어봅시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오.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하니라.
여러분 어떠한 선한 행동일지라도 구원을 가져다 줄 수는 없다고 성경은 가르쳐줍니다. 그래서 저도 어렸을 때 불었던 복음성 중에 여러분도 기억하실 거예요. 손으로도 못 가요. 하나님 나라 기억하십니까? 힘으로도 못 가요. 하나님 나라 벼슬로도 못 가요. 하나님 나라 지식으로 못 가요. 하나님 나라 어여뻐도 못 가요. 기억나세요? 망착해도 못 가요. 어떻게 갑니까? 거듭나면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여러분 오직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따라갈 때에 얻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이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들음에서 나는 것이고, 들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요 디모데 후서를 기록하면서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다. 그렇게 선언해 주셨다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지금 열심히 나오고 있지만 혹시라도 아직 구원의 확신이 없으신 분이 있다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져야 되는 것이고요. 그리고 더불어서 저와 여러분들이 그래도 할 수 있는 것 말씀을 펼쳐 읽고 들을 때에 믿음이 생기는 거예요. 그 말씀 속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씨앗이 마음밭에 뿌려져서 그것이 뿌리 내릴 때에 열매를 맺어갈 수 있다는 거예요.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예수님 따라가는 제자의 길 그러한 시간을 우리가 보내자라고 하면서 성경 읽기를 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성경 읽기 도대체 왜 하는지 모르겠다라고 하시는 분들도 있을 거예요. 그러나 여러분 부정적인 마음은 하나님께서 그리 기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읽는 동안 그 복된 시간을 갖는 동안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저와 여러분 가운데 부어지기를 소망하고 더불어 구원의 기쁨이 회복되어지고, 그 기쁨으로 인하여서 믿음이 더욱더 강건해지는 축복의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 선함이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신 예수님께서 갑작스럽게 계명을 이야기하세요. 우리 19절 말씀 한번 보실까요?
내가 계명을 아노니 살인하지 말라 가늠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내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계명은 사실 너무나 잘 아는 말씀이잖아요. 보신 바와 같이 내용을 보면 5계명부터 10계명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평범하죠. 그런데 이 구조를 보면서 눈 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습니다.
무엇일까요? 여기 보니까 내가 계명을 아나니 예수님께서 그 부자 청년에게 하신 말씀이죠. 내가 계명을 아나니 이게 무슨 말이에요? 부자가 계명을 너무나 잘 알았을 뿐만 아니라 남다른 열심 속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는 거예요. 따라서 유추해 볼 때 이 부자 청년은 자신이 열심히 계명을 지키는 자로서 선하게 살아왔습니다는 것을 선하신 예수님께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었던 거예요. 그래서 급하게 달려와서 어떻게 하면 내가 영생을 얻을 수 있으니까 선한 선생님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일부러 그 선함의 포인트가 되는 계명을 알려주신 것이죠.
특별히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잖아요. 먼저 말씀하자. 하나님 외에는 선한 분이 없다고 이야기한 것은 그래 하나님께서 선함을 주시는데 그 선함의 근본 되신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으로 너의 삶을 다시 한 번 비춰봐라오라고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특이한 점은 10계명을 이야기하는데 몇 개명부터 몇 개명까지 얘기해 5계명부터 10계명까지 예수님이 이야기하시려면 1계명부터 쭉 얘기해 주셔야 되는 거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5계명부터 10계명까지만을 이야기하신 의도가 있겠죠. 먼저 당시 유대인들은 계명을 지키는 것보다 더 소중히 여겼던 한 가지가 있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장로들의 유전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들이 가지고 있던 전통 즉 10계명을 잘 지키기 위해서 여러 가지 파생되는 행동들을 만들어낸 것이죠. 그것이 유전이 되어서 내려왔던 거예요. 그래서 이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보다 유전을 지키는 것, 이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는 것에 더욱 열심히 했던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앞에 내용을 보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 제자들 중에 몇 사람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잘못을 지적하게 되죠. 그 지적을 예수님께 묻습니다.
어째서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습니까?
이렇게 공격해 온 거예요. 그때 예수님께서 이사야 말씀을 인용하셔서 그들을 책망하십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을 교훈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한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것이죠.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계명을 지키는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신 거예요. 당시 이제 예수님께서 한 가지 예를 드신 거예요. 그것이 뭐냐 하면 고르반이에요. 고르반 고르반 들어보셨죠? 제가 기관 모임 때 고르반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분들에게 드렸습니다. 고르반이라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재물이에요. 즉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온전하게 드려지고 그것이 중심이 되어서 열심히 드리면 내 부모를 공경하라는 그것 좀 등한히 여겨도 된다. 부모를 공격하려면 물질이 있어야 되잖아요. 물질로 부모를 섬겨야 되는데 이 물질을 가지고 다 하나님께 드리면 그래 잘했다. 하나님 섬기는 거 잘했으니 됐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들이 만든 정통은 계명을 잘 지키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해서 만든 거예요. 얼마나 귀합니까?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에 치중하다 보니까 실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따르지 못하는 그러한 모순적 사용이 이들에게 나타났다는 거예요. 따라서 이들의 전통은 신앙을 빙자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무효화하는 아주 악한 전통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계명을 이야기하신 것은 그 계명을 지켜야만 영생을 얻을 수 있다. 그 말씀을 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거예요. 장로들의 유전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계명이다. 장로들의 유전을 따르는 것보다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는 것이 훨씬 더 옳은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죠.
또 한 가지 인간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계명을 완전히 다 지킬 수는 없다는 것을 말씀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무엇을 해야라고 질문한 부자에게 인간 스스로 그 어떤 것도 영생을 가져다 줄 수는 없다고 가르쳐주신 거예요.
이는 부자 청년의 대답을 듣고 다시 한 번 권면해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조명해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어요.
부자 청년이 대답합니다. 나는 이 계명 어려서부터 잘 지켰습니다.
아직 자신 있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마태복음에 보면 한마디 더 붙입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여러분 이 부자의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어깨에 힘이 빡 들어가가지고요. 예수님께 제가 어려서부터 이 계명 다 지켰습니다. 도대체 저에게 뭐가 부족합니까? 예수님께 그 시대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당시 유대인들이요.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던 사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공로로 의해서 구원을 얻는다는 사상이죠. 이 부자에게도 그러한 사상이 뿌리내리고 있었던 거예요. 여러분 사실 율법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10계명 우리 전에 말씀을 나눴잖아요. 10계명 누구에게 주신 거예요? 구원받아야 될 사람에게 준 거예요 구원받은 사람에게 준 거예요 출애굽에서 구원받은 자들에게 주신 거잖아요. 따라서 여러분 율법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가 그 은혜에 감격하여서 감사함으로 마땅히 행해지는 행동이 되는 것이죠.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주일을 구별하여서 온전히 예배드리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구원받기 위한 하나의 노력이 아니잖아요. 여기에 나 구원받으려고 나와서 예배드리는 사람이 있으십니까? 아닐 거예요. 내가 무엇이라고 나를 위해서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고난과 고통을 받으시고 결국에는 죽으셔야 했던가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서 생명을 주신 그 은혜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 은혜가 너무나도 감사하고 감격스러워서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 아니십니까? 그렇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내가 예배드리는 이유가 구원의 그 기쁨을 맛보기 위해가 아니라 이미 나에게 주신 구원의 기쁨이 있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하나님을 예배하는 그 자리. 이처럼 여러분 우리의 행동은요 은혜를 기초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동이 절대로 은혜를 가져다 주지는 못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은혜를 기초로 하는 행동이 될수록 거기에는 진정한 사랑이 담겨져 있게 되는 것이죠.
여러분 오늘 본문 2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어려서부터 계명을 잘 지켰던 부자에게 한 가지가 부족하다 그렇게 말씀합니다. 매우 중요한 거예요. 왜냐하면 부자 청년이 물었던 게 뭐예요? 영생이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한 가지 부족하다 했으면 이 한 가지 부족함이 영생하고 연결이 되는 것이겠죠. 이것만 잘 채워주면 영생을 얻을 수도 있다라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어요? 그러니 이 한 가지 부족한 것은 매우 중요한 거예요. 그럼 뭐가 부족한 것이었는가 우리 21절을 통해서 한번 보겠습니다. 함께 읽습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너에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부족함의 핵심이 뭐예요? 재물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라 그렇게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질문 하나를 던져야 돼요. 재물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면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있는가라는 거예요. 어떻습니까?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나눠주고 나면 구원의 조건이 됩니까?
그렇지 않죠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진짜 선한 행동이 무엇인지를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가르쳐주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5계명에서 10계명 대인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잖아요.
그러면 이 5계명에서 10계명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한 단어로 표현하면 너무 어려운 질문이다. 그럼 이렇게 이야기해 보시죠. 10계명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1계명부터 4계명까지는 무엇을, 6계명에서 10계명까지는 무엇을 1계명부터 4계명까지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5계명부터 10계명까지는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즉 계명의 근본은 사랑에 있다는 거 무슨 말입니까?
지금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율법을 온전하게 하기 위해서 오셨다. 즉 사랑으로 완성하기 위해 오셨다는 거예요. 즉 온전함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사랑이 담겨져 있다라는 거예요.
따라서 율법의 완성은 무엇입니까? 따라 합시다.
사랑 사랑
로마서 13장 10절 말씀 우리 큰 소리로 함께 읽습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할렐루야 그렇습니다. 율법의 완성은요. 사랑에 있다는 것이 이 부자 청년이 외적으로 볼 때는 계명을 정말 열심히 잘 지키는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부족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내적 순종 즉 사랑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거예요. 열심히 행하기는 했지만 그 중심을 이루는 사랑을 놓쳐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부자 청년에게 정말 사랑하는 마음으로 계명 순종하는 것이 이웃 사랑과 다르지 않다. 이것을 가르쳐 주신 거예요.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선한 견본이신 하나님 그 앞에서 계명을 다시 한 번 조명하면서 이 모습을 한번 들여다봐라. 그렇게 이끌어가고 계신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이 과정 속에서 부자 청년에게 찾아온 것은 진리의 말씀이니 참 감사합니다.
기쁩니다. 이것이 아니었고요. 슬픔과 근심이었다는 거예요. 우리 한번 22절 같이 읽어보실까요?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거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느라
왜 그랬을까요? 가진 재물이 많으니까 아마도 제가 부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니까 그 순간 고민했을 것 같아요. 하늘의 보화라고 했잖아요. 저울을 딱 갖다 놓고 하늘의 보화를 이쪽에 올려놓고요. 이쪽에는 내 제국을 올려놓는 거예요. 평행 저울에 올려보니까 뭐가 커요? 이게 보이는 게 뭐예요? 이게 재물이거든요. 하늘 보아는 보이지도 않아요. 보이지가 않아요. 당장 내 눈에 보이는 재물이 더 커 보이는 거예요. 재 보고 또 재 봐도 이게 하늘 보화가 크면 좋겠는데 마음은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뭐가 보여요? 재물이 보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근심하게 되는 거예요. 하늘 보화가 그 사람의 마음을 바꿀 만큼의 큰 매력적인 그러한 능력이 아니었다는 것이죠.
여러분 제가 말씀을 전하는 가운데 11조와 신앙의 상관관계를 이야기하면서 말씀을 선포하면 부자 청년처럼 슬픈 기색과 근심을 하는 분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11조의 개념을 한번 좀 생각해 봅시다. 평행 저울을 가져다 놨어요. 여기에다가 하나님께서 다 주셨는데 9을 올려놔라. 그리고 한쪽에는 하나를 올려놓으래 어떤 게 무겁습니까? 눈에 보여요. 아홉이 당연히 아무리 하나가 귀에도 이것이 힘을 주고 눌러도 아홉이 올라오지 않아요. 무게추가 아홉에 갑니다. 당연하죠. 그러면 이 무게추를 위에 있는 걸 다 제거하고 이제 하나를 올려놓으세요.
하나 예수님께 드려야 될 11조 하나를 올려놓으시고 이쪽에는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주셨던 하늘 문을 열고 복을 쌓을 것이 없도록 하나님께서 주시겠다는 말라기 말씀을 한번 올려보십시오. 어떤 게 더 무겁습니까? 어떤 게 더 무거워요? 당연히 인간의 눈으로 볼 땐 하나가 무거워요. 왜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이 말씀은 내 눈에 보이지 않거든요. 만약에 그 말씀이 하나가 아니라 야 너가 하나를 올려놨을 때 내가 여기에다 열을 주겠다 해서 열이 내려가면요. 당연히 이것을 선택할 거예요.
근데 우리의 시각에는 현실적인 게 보이는 거예요. 실제로 내가 살아가는데 11조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보다 그 11조가 나에게 더 유익이고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왜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축복이 가려져 있기 때문에 그래서 여러분 부자 청년은 재물에 대해서는 부유했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는 지극히 가난한 사람이었다는 거 따라서 예수를 따르는 제자가 되려면 선하신 하나님으로 부유한 자가 되어야 된다라는 것을 가르치는 거 그거 다 버리라는 얘기가 아니라 어디에다 가치를 두어야 되는가를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죠. 재물을 마음에 두고는 예수를 온전히 쫓기가 어렵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잖아요.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심히 어렵다.
그 말을 들은 제자들이 놀랍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시 한 번 말씀하세요.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보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훨씬 쉽다. 이제 그렇게 말씀하셨죠?
여러분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 풍습을 보면은 잘 알 수가 있어요. 예루살렘의 성문이 있어요. 큰 문이죠. 거기에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고 합니다. 그런데 거기에도 규칙이 있습니다. 12시가 되면은 문을 닫는다. 문 닫는 시간이 있을 거라는 문을 닫고 나면 이 사람들이 다녀야 될 것 아니겠어요. 그래서 옆에 만들어놓은 좁은 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정해진 시간 이후에 다닐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문인데 그것이 바늘귀처럼 생겼다 해서 바늘귀라고 해요. 사진을 한 장 보여드릴까요? 요거 말고 뒤에 거 먼저 보여요. 요 사진을 보시면 보이시죠. 저 낙타가 짐을 싣고 있어요. 저거는 귀한 것이겠죠. 그런데 뒤에 보면 바늘귀가 보입니다. 첫 번째 이 사진은 저 낙타가 짐을 싣고는 절대로 들어갈 수 없는 상황임을 우리가 알 수 있어요.
두 번째 사진을 한번 보실까요? 두 번째 사진 짐을 저렇게 내려놓으면 낙타가 겸손하게 무릎 꿇고 들어가면 들어갈 수 있는 그러한 분 그러한 분이 있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 낙타는 부자라고 했잖아요. 부자가 가진 것 짊어지고 절대로 들어갈 수 없는 문이 바로 바들이었다. 그러나 다 내려놓고 겸손함으로 들어가면 부자도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전문이었다. 따라서 부자는 모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가 아니잖아요.
그렇죠 예수님께서 부자가 싫어서 그럼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아니면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은 다 찌질하게 가난해야 된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까요?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여러분 성경의 기록들을 보십시오. 저 사람보다 더 많은 부자들이 있었어요. 백부장도 그랬고 니고데모도 그래했습니다. 부자 청년보다 훨씬 부자였던 사람이 많아요. 삭개오를 보십시오. 세리였습니다. 그는 많은 불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 그런데 예수를 만나니까 가치관이 바뀐 것이죠. 자기가 가지고 있는 불보다 예수님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변한 거예요.
여러분 구약을 읽어보셔도 축복받은 사람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하고 연결해 보면 모두 구하고 연결이 되어 있어요.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순종하면서 그 길을 걸어갔더니 가는 곳곳마다 하나님께서 불을 축적해 주셨어요.
여러분 이삭은 흉년의 때에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100배의 소출을 얻었다. 뿐만 아니라 창대하고 왕성하여 거부가 되었다. 중명의 때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 우선주의로 살았더니 하나님께서 삶을 윤택하게 해주셨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고 하신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이겠어요? 정말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물질의 가치보다 예수를 더 따를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어디에 더 큰 가치를 두느냐에 따라서 방향은 달라지게 돼 있다는 거예요. 낙타가 성 안에 들어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짐을 내리겠죠. 그 안이 천국이라고 생각하면 짐을 내릴 거예요. 그런데 그 안보다 내가 가지고 있는 물질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낙타는 계속 짊어지고 들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가치의 문제라면 따라서 물질이 하나님 나라보다 우선순위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단호하게 말씀하시죠. 재물과 하나님을 경이 섬길 수 없다. 왜요? 섬김의 대상은 하나님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 시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내 평생 소원은 무엇인가? 여러분 평생 소원이 뭐예요?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 거기에 있습니까? 잘 생각을 해 보십시오. 예수 안에는 구원이 있습니다. 영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평화가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기쁨이 있고요. 행복이 있고 소망이 있고 사랑이 있습니다. 진정한 부하가 예수 안에 가득 차 있다는 거예요. 따라서 예수를 얻는 자 다 얻는 거예요.
그런데 그분보다 재물을 더 사랑하게 되면 예수를 얻기가 어렵다는 거 결론입니다.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마태복음 10장에 보시면 오늘 본문에 앞서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가장 쉬운 사람을 이야기해요.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아요? 어린 아이. 그리고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가장 어려운 사람이 누군가를 이야기해요. 그 사람은 바로 부자라는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자처럼 근심하는 자로 있다가 주님과 멀어지는 자가 아니라 어린아이처럼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섬김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축복을 마음껏 누리시고 더불어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는 존귀한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부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