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빈의 섭리론(攝理論)(기독교 강요 제1권 16장 3, 1559년 라틴어 최종판 직역,문병호 옮김,PP.445-447)
3.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에 따른 섭리(攝理)로 말미암음
온당하게도
하나님은 자기의 전능(全能)하심을 주장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 의해 그것이 자기에게 돌려지기를 원하신다.
궤변가(詭辯家)들은(514) 이(전능)를 헛되고, 한가하며,
거의 무의식적(無意識的)인 것으로 상상(想像)하지만,
그것(전능)은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작용하는 것으로서
언제나 깨어 있고, 효과적(效果的)이며, 활동적(活動的)이다.
514) "sophistae." 이는 스콜라 철학자들을 지칭한다. 다음은 칼빈의 섭리론이 결정론과는 다름을 지적한다. KarlReuter, Das Grundverständnis der Theologie Calvins (Neukirchen: Verlag des Erziehungsvereins,1963), 157ff.
실로 그것은 단지 강이 한번 정해진 수로로 흘러가도록 그가 명령하시는 것과 같은
복합적인 운동의 일반적 원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이 특수하고 개별적인 운동들에 이르도록 방향을 지시하고
이끈다.
이러므로 그가 전능(全能)하시다고 여겨지는 것은 그가 실제로 활동을 하실 수 있으시나
때로는 이를 그만두고 한가히 쉬시거나 이전에 정해진 자연의 질서를 본능적으로 계속해서 유지시키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하늘과 땅을 자기의 섭리(攝理)로 다스리시면서
모든 것을 규율(規律)하여 그의 계획(計劃)이 없이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하시기 때문이다.
시편의 말씀이 우리에게 지시하듯이,
하나님은 자기의 확실하고 확정된 뜻에 따라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신다(시 115:3).
그러므로
선지자가 전하는 말씀들을 철학적(哲學的) 방식(方式)으로 해석(解釋)하여,
하나님이 첫 번째 동자(動者)(517)가 되시는 것은
그가 모든 운동의 시작이며 원인이시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미건조(無味乾燥)하다.
517) "primum agens." Cf Aquinas, Summa Theol. 1. xix. 6. Quot, Battles tr, n. 6.
왜냐하면
신자(信者)들은 여러 가지 일로 인해 역경(逆境)에 처한 가운데서도 자기들이 하나님의 손 아래 있기 때문에
그의 정하심과 명령에 의하지 않고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마음을 달래면서 한결 위로(慰勞)를 얻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처럼 그의 모든 작품(作品)에 미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자연의 흐름에 가두는 것은 치기어린 억지(抑止)이다.
마치 하나님이 자연(自然)의 영속적(永續的)인 법(法)에 맡겨
모든 것이 자유로운 행로(行路)를 좇도록 허용(許容)하기라도 하신 듯이
그의 섭리(攝理)를 그토록 좁은 한계에 가두는 자들은
그에게서 그의 영광을 사취(詐取)하는 것 못지않게
그들 자신으로부터 가장 유용(有用)한 교리(敎理)를 걷어 내고 있다.
왜냐하면
만약 사람이 하늘, 공기, 땅, 물의 어떤 운동에 임의(任意)로 맡겨진다면,
그보다 더 비참(悲慘)한 존재는 어디에도 없을 것이며,
또한 같은 방식으로,
각자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特別)한 선(善)하심은
아주 약화(弱化)되어 무가치(無價値)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윗은 아직 어머니의 젖에 매달려 있는 아이들까지도
하나님의 영광을 송축하리만큼 유창한 입을 가지고 있다고 외친다(시 8:2).
왜냐하면
확실히 그들은 어머니의 몸에서 나오자마자
천상적(天上的) 돌보심으로 그들을 위하여 마련된 양식(糧食)을 찾아내기 때문이다.
우리의 경험이 공공연히 입증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우리의 눈과 지각들이 피해 갈 수 없을진대,
어떤 어머니들에게는 풍부하고 넘치는 젖이 있는 반면
다른 어머니들에게는 그것이 거의 말라 있는 것은
하나님이 한 아이에게는 더욱 후하게 먹이고
다른 아이에게는 더욱 인색하게 먹이고자 원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전능(全能)하심에 합당(合當)한 찬송(讚頌)을 올려 드리는 자들은
다음 사실로 이중적(二重的) 열매를 누리게 된다.
첫째, 하나님의 소유는 하늘과 땅에 미치며
모든 피조물이 그의 지시에 주목하고 헌신(獻身)하여
그에게 순종(順從)하기에 이르게 되는바,
이는 선을 행하기에 충분한 능력이 하나님 자신 안에 있기 때문이다.
둘째,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보호(保護) 아래 안전(安全)하게 쉴 수 있게 되는바,
이는 우리가 두려워하는 해로운 것들이
어디에서 연원(淵源)하든 모두 그의 뜻에 종속되고,
사탄이 자기의 모든 광포와 자기의 전체 장구를 갖추고 나타나나
그의 주권(主權)으로 제압(制壓)당하고,
우리의 안전에 역행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의 지시에 따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위험에 처할 때마다 반복해서 우리에게 엄습하는
과도하고 미신적인 공포들을 조절하거나 완화시킬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피조물들이 우리를 위협하거나 경악시키며
어떠한 공포로 내몰 때, 그
것들이 우리를 해칠 힘과 권능을 마치
그것들 자체로부터 스스로 지니기라도 하듯이,
혹은
그것들이 우리를 무모(無謀)하게 우연(偶然)히 해(害)치기라도 하듯이,
혹은
그것들의 위해(危害)를 물리칠 도움이 하나님 안에 충분하지 않기라도 하듯이 우리가 두려워한다면,
우리가 미신적(迷信的)으로 겁을 먹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하나님의 자녀들은 불신자(不信者)들과 달리
하늘의 별들과 징조들을 두려워하는 일을 금하여야 한다고
선지자는 경고한다(렘 10:2).
물론 그가 모든 종류의 두려움을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불신자(不信者)들이 세계의 통치를
하나님으로부터 별들로 이양(移讓)할 때
그들은 자기들의 복이나 비참함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별들의 작정들과 전조들에 달려 있다고 공상한다.
그리하여
그들의 두려움이 그들이 바라보아야 할 유일(唯一)한 분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별들과 혜성들에게로 뽑혀 옮겨진다.
그러므로
이러한 불신앙(不信仰)을 경계하려는 자로 하여금,
모든 피조물(被造物)은
그 무슨 권능이나 행위나 운동에 있어서도
제멋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으며
예외 없이 하나님의 은밀(隱密)한 계획(計劃)에 의해서
다스려지고 있으므로,
하나님의 지식(知識)과 뜻에 의한 작정(作定)에 의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음을(519) 항상(恒常) 기억(記憶)하도록 하자.
519) “non erraticam vel potentiam, vel actionem, vel motionem esse in creaturis, sed arcano Dei consilio sic regi, ut nihil contingat nisi ab ipso sciente et volente decretum." 다음 글에서 칼빈은 점성 술을 반대하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지혜와 정의와 선함에 달려 있다고 강조한다. Advertissement contre l'astrologie qu'on appelle iudiciaire, et autres curiositéz qui regnent aujourd'huy au monde, 1549 (CO 7.513-5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