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의존교회150612a (돈과 구원)―이 근호 목사
디모데전서 6장 17절부터 하겠습니다.
딤전 6:17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딤전 6:18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딤전 6:19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요한복음이나 신약에 와서 특히 강조되는 것은 문에 대해서 언급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문이다. 예수님께서 예수님 자신을 선한 목자요, 문이라고 했어요. 그 문이 있다는 말은 사실은 구약에서 벧엘도 하나님의 하늘에 문이라 했는데 문이 있다는 것은 막혀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막혀있는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간다는 아이디어는 나올 수가 없죠. 막혀있다는 말 자체가 다른 세계를 전제로 할 때나 아, 우리는 막혀있네! 우울함에 갇혀있네! 이런 성립이 되는 것이지 다른 세계가 없으면 막혀 있다, 갇혀 있다가 말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다른 세계가 있다고 생각할 때 그리고 다른 세계와 이 쪽 세계로 왕래가 성립이 되지 않을 때 이 쪽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건너갈 수 있는 그런 여지가 전혀 없을 때 문의 중요성이 이제 높아지는 거죠.
‘하늘의 문이 열리고’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이야기한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있을 때나 문이 의미가 있지 하나님의 언약이 없으면 그냥 이 땅 농토에서 나오는 곡식 먹고 사는 겁니다. 옛날 사람들이 다 그렇게 했어요.
하늘과 땅은 개방 되어 있지 폐쇄적이고 닫혀있다는 생각을 그들은 한 적이 없습니다. 하늘에서 보면 땅이 바로 보이잖아요. 그러니까 하늘과 땅이 가로 막힌 게 없습니다.
이런 종교를 가지고 바알종교라고 이야기 합니다. 바알 종교의 핵심은 뭐냐, 신과 인간이 합일되는 거예요. 하나가 되는 겁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종교를 한 마디로 말하면 바알종교입니다. 그리고 바알의 아버지가 엘이고 엘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우리말로 하면 그냥 신이에요.
신은 계시다.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농토 주시고 햇볕과 공기를 주시고 그리고 빗물을 내리시니까 신은 계시다! 끝! 이게 바로 바알종교에요. 그래서 농사 잘되면 복 받은 거고 농사 안 되면 저주 받은 거고 그게 바알종교에요.
이 의미는 뭐냐 하면 하늘과 땅은 막혀있지 않다는 겁니다. 쳐다보면 태양이 있고 그래서 세상의 모든 종교들이 이렇게 여러 가지로 동물도 섬기지만 궁극적으로 그들이 섬기는 것이 뭐냐 하면 저 붉게 빛나는 태양입니다.
그 대표적인 태양신이 이집트에요.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출애굽의 열 가지 재앙 가운데 9번째 재앙을 아시죠. 태양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할 때 그것은 애굽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입장, 그들의 세계관에서 그들이 그렇게 숭배하는 태양이 영 힘을 못 쓸 때에 그 이유를 너희들은 아느냐?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아느냐? 너희들이 섬기는 그 신이, 신이라 하는 것은 영원토록 밝게 빛나야 되거든요.
그런데 사흘 동안 캄캄하게 완전히 흑암이 되었다는 이 말은 그 원인을 너희들이 찾아야 마땅하지 않느냐? 라고 촉구하는 거죠. 그 원인은 어디 있었느냐 하면 그 원인은 바로 그들과 함께 살고 있으면서도 이질적인 종족이 너희들 속에 들어 있다는 거예요.
이질적인 종족, 그 종족이 언약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인데 그 언약의 백성을 성경에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이라고 풀이 하고 있죠.
그 언약의 종족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거죠. 어떤 사람이냐, 아브라함이고 이삭이고 야곱의 계통에서 출현한 그 종족, 후손들이 바로 너희들과 함께 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뭐고 이삭은 뭐고 야곱은 뭐가 대단하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대단한 것이 아니고 그들이 받았던 약속이 대단해요.
어느 정도로 대단 하느냐 하면 바로 태양이 빛을 잃을 정도로 대단한 겁니다. 자연세계를 총괄하죠. 자연 세계를 총괄하면서 그 신은 자연에 속한 자연물로는 표현이 불가한 대상, 자연을 만들고 그 만들어 진 것을 가지고 아무리 멋들어지게 표현해도 표현 못 할 분!
애굽 사람들은 신을 표현할 때 아주 인자한 암소 형상으로 표현을 했습니다. 그것을 누가 배웠느냐 하면 그것을 바로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배웠잖아요.
그런데 그 송아지 형상과 대립적인 지점에 있는 것은 송아지 형상 맞은편에 사람의 형상이 아니고 송아지 형상 맞은편에 있었던 것은 돌 판의 언약입니다.
문자이고 계시이고 말씀이었어요. 형체가 없어요. 모양새가 없습니다. 암소 형상을 가지고 이것은 여호와라고 이렇게 주장을 했는데 그것은 형상이 있어요. 뚜렷하고 윤곽이 있어요. 그러나 계명은 형상이 없어요.
그러면 없는 형상을 어디서 도입을 할 것이냐? 형상이라 하는 것은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왔을 때 일어나는 변화가 바로 말씀이 원했던 그 형상이거든요.
십계명이라는 형상이 없는데 그 십계명을 지키고자 덤벼들고 십계명에 의해서 어떤 낯선 인물이 등장할 때 비로소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는 참된 형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형상이 누구입니까? 말씀을 다 이룬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죠. 여기서부터 어려운 거예요. 예수님을 본받자고 성형외과 가서 예수님 사진하고 똑같이 성형하면 구원받습니까?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으라며? 형상 개념이 눈에 보이는 모양새가 형상이라면 그렇다면 예수님을 본받는 방법은 뭡니까? 예수님의 머리카락과 색깔과 덩치, 척추, 신체 구조, 얼굴 모습 그것을 빼다 박는 게 그게 형상 아닙니까?
형상 개념이 눈에 보이는 모양새가 형상 개념의 전부라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들었다고 할 때에 인간의 형상을 따라가면 우리하고 비슷하게 생긴 분이 하나님이라는 그런 식으로 형상 개념을 그렇게 규정을 한다면 그것을 모든 곳에다 적용을 시켜야 이게 옳지요.
그러면 예수님을 본받으라 하면 예수님의 얼굴 따라하면 되겠네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사실은 없다고 하지만 전 국민이 언어를 몰랐을 때는 이콘이라고 해서 아이콘이죠. 특히 동방종교에는 아직도 마찬가지이고 천주교도 마찬가지고 천주교도 마찬가지고 개신교도 마찬가지이고요.
성화라는 것을 그려가지고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은 우리 집에 주인이요, 이렇게 하면서 예수님의 모습도 찍고 중국에 말 타고 가다가 엎어져서 우연히 눈 덮인 예수님의 모습이 찍힌 모습을 가지고 예수님의 형상이라 해서 밥 한 그릇 놓고 숟가락 하나 더 놓고 그런 식으로 증인이라고 하는데 예수님의 형상은 우리 인간이 보고 있는 형상이 아닙니다.
왜냐 하면 우리 인간이 보던 것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감추어진 형상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이 본다고 하니까 못 보게 만든 거예요. 본다고 하니까 엉터리로 보게 만든 요인이 예수에게서 나온 겁니다.
그것을 형상이라고 하지만 이것을 인간 세계에서 비슷하게 쓴다면 기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관목은 관 조립하는 기능을 하죠. 이발사는 머리 깎는 기능을 하고 만화가는 그림 그리는 기능을 하죠.
예수님의 형상은 예수님의 기능으로 말 해 줍니다. 이것을 예수님의 기능을 가지고 요한복음에서 이것을 일(work)이라고 하죠.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그러면 예수님의 형상은 일이다.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셨어요?
여기서부터 나대셔야 돼요. 우리가 하는 일은 우리 일로 우리 일에서 멈춰버려요. 내가 일해서 남이 좋아 질수가 없어요. 일은 내 얼굴이고 내 가치이고 내 존재성이고 존재감이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일은 희한한 일인데 예수님 본인이 일한 것이 예수님이 아닌 다른 개체한테 그 효과가 전달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 중의 하나의 예가 뭐냐, 느브갓네살 왕이 꿈을 꿨잖아요. 그 꿈에 대해서 아무도 몰라요. 심지어 꿈을 꾼 본인도 몰라요. 꿈을 꿨다는 것만 알지 내용이 뭔지 모릅니다.
그 말은 느브갓네살이 지금 누구한테 당했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어젯밤에 누구한테 당했다! 그런데 그 누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나에게 강제로 꿈을 꾸게 해 놓고 떠나간 그분! 꿈만 꾸고 떠나간 그분! 사랑만 남겨 놓고 떠나간 그런 거 아니고 뭔가 이름도 모르고 성도 밝히지 않고 사랑만 남겨 놓고 떠나간 사람, 물론 우리는 얄미운 사람이라고 아는데 지금 느브갓네살은 얄미워도 너무 얄미운 거예요.
제가 지금 하나님의 기능을 이야기합니다. 그 기능이 없으면 구원의 문을 통과될 수가 없어요. 교회 나왔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거든요.
뭔가 사랑만 남겨 놓고 떠나간 사람이 있어야 구원을 받는데 왜냐 하면 느브갓네살이 그렇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누구이냐 하는 겁니다. 따라서 느브갓네살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에게 당했던 사람이에요. 또 비슷한 예가 사도행전 9장에 나옵니다.
사도바울이 다멕석, 시리아 쪽으로 내려가는데 누가 나타나요. 그때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이 “주님이시죠? 제가 안 그래도 믿으려고 했어요.” 이렇게 이야기한 게 아니에요. 도리어 묻습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일방적으로 당했다는 거예요.
점잖기 짝이 없고 평소에 자기 삶에 충실한 나를 누구신데 건드리십니까? 왜 저를 건드리죠? 저를 건드리는 당신은 과연 누구시란 말입니까?
구원은 이렇게 되는 겁니다. 내가 주님을 믿고자 한다면 잘못인데 왜 주님을 믿는 것이 잘못이냐 하면 우리가 뭔가 하게 되면 우리의 개체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우리의 개체는 아담의 형상이거든요.
아담의 형상은 모양새가 아닙니다. 뭡니까? 기능이죠. 우리가 어떤 개체에서 무엇을 하게 되면 이 기능이 나와요. 기능이 나오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 우리의 속에 담긴 우리의 속성이 일에 섞여서 같이 나오죠.
그러면 우리가 예수를 믿고자 하는 순간 그 예수는 뭐냐 하면 내 욕망과 욕구를 성취시켜줄 내편이 되어 줄 나의 구세주라는 입장에서 믿게 되는 거예요.
마치 유대인들이 로마의 압제에서 메시야를 기다리는 이유가 어서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서 선지자가 약속한대로 자기 유대 나라가 이 나라에 이 온 우주에 제사장 나라가 되는 그것을 호응해 주고 그것을 달성 시켜 주시기 위해서 오실 메시야를 그들은 기다렸던 겁니다.
그 기다림의 기능, 그 일의 마지막은 십자가였습니다. 당신은 아니야! 당신은 절대로 아니야! 내 손에 장을 지질 게 당신은 메시야 아니야! 거기에 표한 표 던진 사람이 누구이냐? 사울이라는 사람이에요.
예수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일, 메시야의 일에 자기는 긍정적으로 지금 봉사하고 있다고 본겁니다.
예수 믿는 암적 존재, 이러한 잘못된 독소 조항을 제거함으로서 온전하게 하나님의 메시야를 영접할 수는 환경이 조성된다고 자부하고 그는 끝까지 따라 가서 예수 믿는 사람을 체포하고 죽이기 위해서 사울이라는 사람은 아담의 형상을 마음껏 발휘했습니다.
아담 형상의 진수는 어디서 밝혀지게 되겠습니까? 아담이 죄를 지은 아담의 형상이 가장 절정으로 제대로 나타나는 순간은 어떤 순간이겠어요? 십자가죠. 십자가입니다.
이 말은 ‘원수를 모르면 내 인생을 모른다.’는 뜻입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는데 원수를 만들지 마라 했거든요. 너 사는데 불편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공자는 평생을 살면서 자기가 누구의 원수인지를 몰라요. 로마서 5장 10절을 몰라요. 아마 들이대 줘도 안 믿었을 겁니다.
원수 된 자를 의롭다 하시는 그 대목을 몰라요. 그렇지요? 인생에서 자신의 인생의 원수를 알려고 애쓸까요? 아니면 원수, 적을 친구로 만들기를 애쓸까요? 어느 쪽이겠습니까? 원수를 친구로 만들려고 애를 쓰겠죠. 인생에서 언젠가는 혹시 나한테 도움이 될까봐
그런 생각하잖아요. 지금 제가 문에 대해서 계속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왜 자꾸 오늘 본문과 달리 나가느냐? 달리 나가는 게 아닙니다. 미리 당겨서 이야기해 드릴까요?
재물이라는 것, 돈이라 하는 것이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 돈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에 보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했거든요. 인간이 돈을 갖고 있을게 아니에요.
갖고 있으면 내 놓을 수 있어요. 하지만 돈은 인간의 모든 섬김의 구체화입니다. 인간이 돈을 갖고 있는 게 아니에요. 인간에게 신이 있는데 그 신이 돈이라는 이름으로 구체화된 거예요. 재물이라는 이름으로 구체화되고 거기에 돈이 바로 얼굴이고 자존심이고 자기 의미이고 가치에요.
돈이라는 것은 피를 닮았어요. 어떻게 닮았느냐 하면 돈은 모든 것을 용서합니다. 오랜만에 좋은 소리 하는데 돈이 있으면 모든 것이 용서가 됩니다. 아무리 어릴 때 말썽꾸러기 아들도 외국 나가서 돈을 벌어보게 되면 용서가 돼요.
아무리 애 먹이는 남편이지만 한 석 달 만에 돌아와서 돈다발 갖다 주면 과거가 일거에 다 용서가 된다니까요. 용서해 줄게! 고생했다!
사랑이요? 그것은 돈으로 말하는 겁니다. 사랑 사랑 누가 말 했나? 꼭 돈을 못 벌어 주는 남편이 사랑타령을 많이 해요. 자기가 미안하거든요. 돈 벌어주면 모든 게 다 용서가 되고 사랑 이야기 안 해도 사랑하는 줄 충분히 알건만 사랑을 말로 진짜 실질적인 사랑을 때우려고 비겁한 사람
인간의 기능은 하나님의 원수가 그 안에 내장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라이벌이 들어있어요. 고대에서는 바알종교에서는 신과 인간이 합일된다고 했죠. 이것은 뭐냐 하면 신이 갖고 있는 바알이 갖고 있는 햇빛과 공기, 이 땅의 축복 권을 아예 내가 그냥 조금씩 감질나게 뜯어먹는 것보다 차라리 점점 더 하나가 되어버리면 마음껏 바알의 능력을 내 마음대로 필요할 때 마다 끄집어 낼 수 있는 경지에 까지 이를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완벽한 축복이 아니겠는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신과 바알과 자기가 하나가 되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아쉬울 때 마다 그 바알 종교에게 돈으로 또 재물로 뇌물을 줘요. 뇌물을 주게 되면 받아먹은 놈이 가만히 있으면 안 되죠. 받아먹은 만큼 내 놓게 되어 있어요.
특히 자식을 바칠 때는 이것은 극단적입니다. 자식 바치게 된다면 바알종교는 그 앞에 그 성의에 할 말을 잊어버리고 무엇을 원하느뇨? 나라의 반을 주겠다! 이런 식으로 나와요. 왜냐, 이 쪽 인간 쪽에서 극단적으로 나왔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보상도 바알종교도 극단으로 나오게 돼요.
바알 종교 하면 모든 신은 다 바알이란 이름으로 다 통합이 돼요. 신의 이름이 다 가지가지라도 사실은 전부 다 바알의 분화입니다. 분화현상입니다. 바알의 가지치기, 그런 거예요.
변덕스러운 성질 더러운 이 자연을 다루는 방법은 바로 자연을 바알의 얼굴로 봐가지고 그때 마다 신을 달래기도 하고 협박, 공갈하기도 하고 그렇게 하면 돼요. 그것이 애굽에서 쭉 해 왔던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러면 목사님, 진짜 하나님을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섬기면 됩니까? 이렇게 나올 거예요.
진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우리한테는 없고요, 우리 기능에는 없고 우리의 일에는 없어요. 거기서 탈출하면 돼요. 이 세상에서 탈출하면 돼요. 이 세상에서 탈출하면 돼요. 그 탈출하는 구멍이 뭐냐? 그게 하늘의 문입니다.
그런데 그 문은 바로 인격으로 나타나요. 인격으로 나타나고 그 인격의 변화를 통해서 그 문은 우리한테 주어지는데 그 인격을 변화시키는 요소를 가지고 그것을 약속 또는 언약이라 합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아브라함의 하나님, 아브라함은 아담의 후손입니다. 안에 자기 속에는 자기의 work, 자기의 기능이 나와요. 아담의 형상이라는 것은 그 만큼 죄를 지었다 이 말이에요. 결국 살아봤자 애 낳고 살아봤자 죽었더라!
뭐 이렇게 저렇게 해 봤자, 결국은 죽었더라! 이것이 아담의 형상이 담고 있는 하나님의 약속의 차원입니다. 네가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령 죽으리라 했잖아요. 그 죽으리라 하는 약속 차원이 어디까지 번졌느냐 하면 우리의 인생, 우리의 몸에 번진 거예요.
그것도 조상대대로 계속 번져 나오는 겁니다. 애 하나 임신해서 낳게 되면 임신할 때 죽든지 낳고 나서 죽든지 늙어 죽던지 맨 죽기는 마찬가지이에요. 그것을 해석하게 되면 내 몸에서 죽을 내 몸에서 죽을 아이가 나온 겁니다.
너무 극단적인 발언을 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실제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아담의 형상이 이렇게 죽음 안에 갇혀 있고 죽음의 세대 간에 놓여 있어요. 그래서 바알 종교에서 어떤 아이디어를 냈느냐 하면 죽으면 억울하잖아요. 다시 살수 없을까? 그것이 바알종교 안에 장착되어 있어요.
씨를 뿌리면 분명히 겨울에 죽을 것 같은데 봄 되면 다시 부활하죠. 부활종교가 바알종교 안에 들어있다니까요. 이집트에 여신도 마찬가지로 부활의 종교에요. 이집트가 미라를 왜 만듭니까? 참 순진한 것도 아니고 무식한 것도 아니고 코에 넣어서 두뇌, 뇌세포 끄집어내고요. 모양새는 있고 나중에 부활의 세계에, 님아 저 강을 건너지마라 했는데 강을 건너가 죽게 생겼는데 건너가면 껍데기는 있고 거기다가 건전지 빼내 버리면 이것은 새로운 영혼을 담아 버리면 다시 부활된다는 겁니다.
살아 있을 때뿐만 아니고 죽고 난 뒤에 부활까지 이제는 하나의 옵션으로 다 채웠으니까 뭐 이 정도 하면 완벽한 종교 아니겠습니까? 인도 같은 종교는 인도의 힌두라, 또 불교 이런 종교는 이집트 종교보다 더 뛰어나요.
그 쪽에는 종교라는 말을 쓰면 이상해요. 종교가 어디 있어? 우리 종교 없는데! 종교 없어요. 그러면 인도에서 섬기는 것은 뭐냐? 그것은 종교가 아니고 삶이에요.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제일 밑에 수드라, 이렇게 카스트제도가 4단계가 있죠.
그 네 카스트제도 자체가 뭐냐 하면 신이 이미 자리를 배정을 했다는 거예요. 그 배정받은 자리에 살게 되면 그것이 이미 신과 하나가 된 삶이 되는 겁니다. 그래 가지고 나라가 질서가 잡히니까 그러니까 종교 중에서 최고의 종교가 뭐냐, 종교인 듯 종교 아닌 종교 같은 종교 뭐 하여튼 종교 없이도 살아가는 삶 자체가 되는 거예요.
오다 보니까 어떤 젊은 아줌마가 머리에 수건 쓰고 있어요. 외국 사람인데 이슬람이잖아요. 이슬람도 종교가 아니에요. 그것은 모든 경쟁과 삶이 일체가 되어 있습니다. 합일되어 있어요. 그래서 그들은 죽고 나면 어디로 가느냐 하면 껍데기를 불에 태우면 비로소 영혼은 어디로 가느냐 하면 신에게 들어가서 제대로 합일되는 겁니다.
이렇게 보니까 기독교하고 다른 종교하고 차이점이 점점 더 식별이 안 되죠. 우리가 원했던 옵션 맞춰서 다하고 있잖아요. 기독교라는 종교가 점점 더 사람들이 갖고 있던 아담의 형상, 아담의 일, 아담이 할 수 있는 기능에 일치되도록 그런 내용들을 계속 유발하고 만들어 내는 겁니다.
오늘 본문 19절을 보면
딤전 6:19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생명, 영생이 나오잖아요. 사도 바울 에게 있어서의 영생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 잠시 살다가 떠난 분이죠. 이 세상에 없어요. 이 세상에서 빠져 나왔던 분이 바로 생명입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놓쳤어요. 누구를 놓쳤어요? 생명이요 부활인 분을 놓쳐 버렸어요. 발목이나 잡지, 발목이나 잡을걸! 발목은커녕 빨리 내 쫓기 바빴잖아요.
마지막 기회도 놓쳤잖아요. 바나바하고 예수님하고 누구를 선택 할래? 할 때 그 때는 바라바를 선택했어요. 예수, 저자는? 죽이소서! 이구동성으로 그렇게 했어요. 그들은 결정을 잘 했다고 본겁니다. 그들은 결정의 동기는 뭐냐? 자기의 work, 자기의 일이죠. 자기의 기능입니다.
이것은 자기의 일이기 때문에 내가 여기 있음에 나오는 기능이고 속성이기 때문에 이것을 어떻게 변조하거나 교묘하게 꾸밀 수가 없어요. 있는 그대로 그냥 내 뱉은 그것이 예수님을 밀치는 일입니다.
바로 이러한 절차 없이 예수를 받아 들였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내가 믿는 예수님이 진짜 영생인지를 아니면 예수님과 내 사이에 뭔가 입장이 맞는 것이 있어서 야 이 분은 나한테 필요한 분이야! 해서 입장 맞는 것이 있어서 내가 그것을 챙기려고 예수를 믿는 것인지 스스로 공통점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라도 있으면 가짜입니다. 진짜 예수님은 우리가 원하는 기능하고 같은 것이 완전히 하나도 없어야 돼요. 왜냐 하면 하나님의 기능,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서 인간에게 배척당하는 분의 기능이기 때문에 거기에 배척하도록 원인제공자가 누구이냐 하면 바로 우리거든요.
따라서 주님은 우리를 떠나면서 네 속에 나의 원수가 있다고 지적 했거든요. 그렇다면 원수이기에 떠나보내야 했고 원수들만 있는 세계에 오셔서 심한 설움과 비난과 배척을 받으시고 홀연히 홀로 그것도 홀로 12제자도 소용없어요. 홀로 떠나보내는 그 분, 그 분이라면 그 다음부터 우리가 해야 될 것은 뭐냐? 도대체 내 안에 뭐가 들어있느냐를 다시 한 번 주시해 봐야 되죠.
오늘 본문에서는 돈이 들어 있다. 내 안에 재물이 있어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했으니까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내 안에 돈이 들어있는 거예요. 돈은 그냥 지폐를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아담의 속성으로서의 모든 행함의 최종적인 도달점을 실체와 구체적으로 손에 잡히는 구체적으로 뭔가 실적으로 남길 수 있다면 그것은 돈으로만 표출이 되고 표현이 되는 겁니다. 부자 되는 겁니다.
누가복음 12장에 어떤 사람이 부자가 농사가 너무 잘 됐어요. 농사가 잘 돼서 창고를 더 크게 지었습니다. 그 다음에 하는 말이 뭐냐 하면 내 영혼아 염려 하지 마라!
자, 제가 묻습니다. 이 부자의 영혼은 어떤 조건하에서만 평화를 얻게 되는 영혼 입니까? 돈이 많은 조건하에서만 평화를 누리는 조건이 되겠죠. 이 사람이 바로 우리와 같은 아담의 자손입니다. 아담의 형상을 입었어요. 아담 같은 기능으로 우리가 잠복되어 있습니다. 여기 잠재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돈이 별로 없어서 이 본문을 하는데 만약에 갑자기 돈이 한 2,700억이 있다면, 어떤 죽은 사람이 유산을 너는 나를 모르지만 나는 너를 알았거든, 나는 너를 양자로 삼았단다. 이제 죽기 전에 너희 빌딩 3채와 아파트를 너의 이름으로 바꾸게 했다. 빨리 변호사 사무실 찾아가거라! 이렇게 할 때 우리가 찔찔 울면서 “주여, 이런 고난을 주시면 어떻게 합니까?” 이렇게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내 영혼아! 편히 쉬자! 여보, 차부터 바꿉시다! 당신은 아파트부터 바꿔야지! 이제는 바꾸는 경쟁, 싸움을 해요. 차부터 바꿀 것인지 아파트부터 바꿀 것인지 우선가방부터 바꾸고! 즐거운 비명을 한번 질러봤어요. 그런 즐거운 비명!
그 이야기나, 내 영혼아! 이제는 걱정하지 마라! 과거에 너도 참 고생 되게 했는데 하나님께서 너를 긍휼히 여기사 네 고생의 보상을 이런 식으로 갚아 주는구나! 고생한 보람을 돈으로 갚아 주는 것을 감사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웃습니다.
평소에 믿던 예수님하고 다른 예수를 장착하고 있었던 거예요. 탑재하고 있었어요. 보세요. 이 의존교회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런 부자도 없고, 이런 부자가 되는 이런 저주를 오늘도 주께서는 영혼을 생각해서 이러한 큰 시험을 우리에게 베풀지 않고 있잖아요.
그래서 그 부자한테 이렇게 합니다. ‘오늘 밤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이 말씀이 참 재미있죠. 그냥 도로 찾으리니 이제 내가 가져간다. 이러면 될 건데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 다음에 뭐라 하느냐 하면 ‘저 창고에 있는 곡식은 누구의 것이냐!’ 이렇게 이야기하죠. 그러니까 네 영혼과 뭐가 결부 되어 있다는 겁니까?
네 영혼이 안심하고 평안히 누리는 것은 이것은 바로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돈을 매개로 해서 연결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하시기전에 앞에 하신 말씀이 뭐냐, 사람의 생명은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아니한다는 거예요.
이것은 무엇을 이미 의식하고 하신 말씀이냐 하면 사람의 생명은 소유의 넉넉함에 있습니다. 주님 몰랐어요? 하나님, 그거 몰라요? 우리는 다 알고 있는데! 사람의 생명은 소유의 넉넉함에 비례함이라는 것을 철석같이 이미 유통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모든 인간 세계에 그 사상이 지금 유통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돈을 언급하는 순간은 탈출이 되겠느냐는 순간과 같이 고려해서 말씀해 주시는 겁니다. 그렇게 돈을 갖고 있는 게 문제가 아니고 돈을 섬기는 게 문제라니까요. 그런데 그 돈을 섬기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느냐 하면 우리의 영혼의 속성은 돈을 섬기는 방향으로 확정되어 있어요. 축복이냐 아니냐를 돈으로 평가하는 거예요.
내가 가치가 있는 인간이냐 가치가 없는 인간이냐, 내가 착한 사람이냐 내가 나쁜 사람이냐 하는 것은 그냥 하면 빈 말이 되어 버려요. 뭐와 관계되어 있느냐? 돈 유무와 관계되어 있습니다.
목사님, 우리 남편은 돈은 없어요. 저를 굉장히 사랑해요. 실례하지만 돈이 어느 정도 없습니까? 한 달에 50만원 밖에 못 벌어요. 그러면 한 20만원 줄어들어도 사랑이 사랑이겠습니까? 우리 남편은 20만원 뭐도 사랑할 거예요. 그러면 마이너스 통장을 줘도? 계속 이게 사랑스럽습니까?
더 나아가서 남편이 마누라까지 잡혀가면서 노름해 져서 마누라가 강제 이혼 당해서 팔려나가도 그래도 그 남자를 남편이라고 여기면서 사랑하시겠습니까?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사실은 답변을 못하죠.
여러분, 초 안에 뭐가 들어있죠? 심지 들어있죠. 연필 안에 연필심이 들어 있죠. 우리 안에 돈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은 돈과 결부되어 있고 떨어질 수 없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영생은 뭐냐 하면 인간의 힘으로 떼어낼 수 없는 돈에 대해서 영생과 결부해서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갈치나 고등어 같이 뼈에서 살을 발라내는 것은 젓가락만 있으면 되죠. 젓가락 없으면 그냥 입으로 뜯어 먹으면 돼요. 뼈에서 살을 발라 떼어내면 돼요. 돼지 갈비, 소갈비 젓가락으로 떼어내면 돼요. 떼어내면 떼어집니다.
그런데 인간의 영혼에서 돈이 떼어지겠어요? 이게 안 떨어진다니까요. 왜? 그냥 붙어 있으면 떼어내면 되겠는데 아이고, 귀찮은 돈! 이렇게 떼어내면 되겠는데 이게 섬김이 되어 버리면 이게 나의 가치이고 나의 의미가 돈으로 계산이 된다면 이것은 떼어질 수가 없게 되어 있어요. 돈 몇 푼 기부할 수는 있어요.
하지만 돈을 기부한다고 해서 떨어지는 게 아니에요. 그 기부한 돈이 신사임당으로 보입니까? 그게 내 얼굴이에요. 신사임당의 얼굴이 내 얼굴이라니까요. 내가 돈을 줬는데 이거 누가 줬는지 모르겠다! 하면 줘 놓고 기분 되게 나빠요.
그런데 받았는데 ‘이거 누가 줬습니까?’ ‘아이고 신사임당이 줬잖아요.’ ‘농담하지 마시고 누가 줬습니까?’ ‘아이고 내가 했다고 받기 싫은데’ ‘아이고, 고맙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돈에서 내가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또 한 번 확인하는 겁니다.
동량하고 기부하고 이렇게 하면서 내 이름 계속 전파되고 있습니다. 헌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주께서 내가 돈 낸 것을 주께서 아시겠지! 주께서 아시죠. 돈 내는 과정에서 얼마나 아까워했다는 것을 그 과정을 통해서 아시죠. 충분히 아시죠. 구약에서 십일조는 있지만 실제로 이스라엘 역사에서 십일조는 강제로 한 잠깐 이외에는 거의 십일조를 못했습니다.
할 수가 없어요. 왜냐 하면 이미 재물이 나오는 땅을 확보했기 때문입니다. 이미 가졌으면 내 놓기 힘들어요. 욥이 사단이 왔을 때 욥이 돈을 스스럼없이 내 놨습니까? 빼앗겼습니까? 강제로 빼앗긴 거예요.
뺏어가는 사단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욥한테 돈을 뺏어가 보세요. 욕 하나, 안 하나! 사단이 그 말을 했다는 것은 그 전에 사단이 이미 인간 세상을 한 바퀴 순회하고 왔어요. 한 바퀴 돌아왔거든요. 돌아오고 난 뒤에 ‘너 어디 갔다 왔어?’ 하니까 ‘인간 세상 한 바퀴 돌아보고 왔습니다.’ 그러니까 유독 하나를 딱 집어서 “너 욥을 눈여겨봤나?” “봤죠.” “어떠냐? 돈이 있어도 교만치 않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그렇게 하니까 사단이 하는 말이 “돈 때문에 영광 돌리잖아요!” 라고 했다는 말은 모든 인간은 그렇게 그런 식으로 다 살아가는 거고 욥도 별거 없습니다. 그 중의 인물 중의 하나 일뿐입니다. 라고 한 거예요.
그래서 내기 한 것을 보세요. 뭐냐, 욥의 믿음이 보편적인 인간적인 믿음인지 아니면 하나님이 직접 집어넣은 믿음인지 그 믿음을 놓고 하나님과 사단이 내기를 시작하고 그 내기 때문에 그냥 재수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모르겠지만 걸려들어서 고생만 직살 나게 하는 것이 욥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여러분을 향하여 내기를 한다면 여러분 어떻게 하겠습니까? “저는 아직 믿음 없습니다. 저한테 오지 마시기 바랍니다. 믿음 좋은 사람한테 하시기 바랍니다.” 목사님한테 하는 소리이지 저는 아직 잽도 안 됩니다. 이렇게 겸손아닌 겸손으로 떠벌리면서 자체 사수에 나갈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짜 성령에 의해서 믿음을 받았으면 이미 우리가 거절을 해도 시험은 벌써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기부를 해서 영생을 얻는 방법? 아니에요. 우리 자신은 결코 하늘의 문이 될 수 없다. 나는 결코 내 뼈에서 돈이라는 살점을 떼어낼 수가 없다! 분리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뭐냐 하면 말씀에 의해서 다루어지는 경우에만 주의 기능이 말씀이 들어 올 때만 주의 기능은 우리의 육신을 이기면서 밖으로 나올 수가 있습니다. 육신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 말씀을 내가 주체가 되어서 이 일을 행사할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내가 성경대로 말씀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내가 못 산다는 것을 감안해서 주께서는 나에게 이미 찾아 오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오는 모든 결과가 예수께만 영광이 되고 예수님의 공로가 돌아가는 식으로 말씀이 그렇게 전개하는 거예요.
그 이유가, 예수님의 공생애가 이미 인간은 아담의 후손으로 죄인이라는 것을 확정짓고 공생애를 사셨고 그 공생애가 끝나고 난 뒤에 성령께서 오실 때 이미 그 점을 감안해서 오신 거예요.
예를 들면 아까 이야기했던 사울이라는 사람이 “주여! 누구십니까?” 했죠. 그 이야기를 다시 해 볼까요? 사울은 지금 당한 거예요. “아,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을 너무 체포했어! 양심이 가책이 돼! 예수 한번 믿어볼까?” 이렇게 개가 천성한 것이 아닙니다. 그냥 쳐들어 온 거예요. 그냥 난데없이 뭔가 사랑만 남겨놓고 떠나간 사람처럼 뭔가 찾아온 거예요.
찾아와 보니까 자기는 됐어요? 자기의 가능성? 자기의 가치? 의미? 없어요. 나는 죄인 중에 괴수가 되어 버린 겁니다. 내가 율법으로 의롭게 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십자가의 원수에 적합한 모양새가 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내 안에 아담의 형상이 그 자체가 십자가의 원수로서 기능을 해 왔다고 지금도 그 기능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겁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주님의 원수로 사시면 됩니다. 그것을 못해요? 제일 쉬운 건데요.
주님의 원수로 사시면 돼요. 왜냐 하면 주님의 원수로 사는 것은 피동적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하고 그 다음에 그 원수를 하나님의 원수를 용서하시고 그런 원수를 가지고 주의 일을 하게 하시는 그 몫은 누구 몫이냐 하면 내 몫이 아니고 내 과제가 아니고 주님의 말씀으로 하실 거예요.
목사님, 하실 거예요가 아니라 만약에 안하게 되면 나만 영생 못 얻으면 나만 손해가 아니겠습니까? 또 이런 걱정을 하시는데 주님의 영이 안 오면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조차도 우리가 감지를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원수입니다. 이 육신 자체가 주의 원수입니다. 우리가 똑같은 심성을 가진 인간들이 예수님을 십자가 못 박아 죽였는데 만약에 그 현장에 있었다면 저도 거기다 표 한 장 던졌을 우리는 똑같은 성질,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라고 인지 한다는 자체가 이미 성령을 받은 사람이고 그 자체가 예수님을 증거하는 이미 전제로 주께서 깔아 놓은 거예요.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거기에다가 무슨 씨앗을 뿌려도 그 열매는 주님에게 공로가 돌아가게 되어 있어요. 옛날에 할머니가 동지쯤 되면 시루떡을 했어요. 아, 그거 집에서 시루떡 해 먹으면 맛있었는데 단지에 하얀 천, 광목으로 덮어서 하는데 가마솥에 쪄먹으면 맛있거든요.
맛있는데 어떻게 하는가를 어릴 때 호기심이 많아 우리 할머니가 만들 때 봤다 말이죠. 옛날에는 강정도 집에서 만들었어요. 설되면 일주일 전부터 강정 만드느냐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유월절도 아닌데 일주일 전부터 준비하고 있어요.
광목을 평평하게 하고 난 뒤에 거기에 팥고물을 놓아요. 그 평평하게 하는 작업, 하나님께서 너는 죄인이라고 평평하게 하는 작업이에요. 기부했다고 재물로 선한 일했다고 하면 울퉁불퉁해서 안돼요. 고르게 평평하게 해 놓고 그 다음에 주의 말씀, 아까 약속이죠. 아브라함을 아브라함 되게 하고 이삭을 이삭 되게 약속이 들어와 버리면 그 자체가 하늘의 문이 되는 겁니다.
출구가 돼요. 탈출구가 돼요. 우리가 주의 탈출하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 자신이 이 세상에 탈출구가 돼요. 왜냐, 우리 자체가 예수의 증인이니까요. 예수님이 문이고 길잖아요. 예수님의 증인 노릇을 한다는 것은 나를 볼 생각하지 말고 소자한테 한 것이 곧 나한테 한 것이다. 그 소자의 위상은 어떻습니까?
나는 예수님께 물을 떠 드렸습니다. 내가 예수님이 아플 때 내가 돌보았습니다. 이게 소자입니까? 소자는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아요. 제가 언제 주님 앞에 했습니까? 왜? 그런 말을 하죠? 본인은 죄 아닌 적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 앞에 원수라고 아는 것은 이미 성령이 와서 우리를 고르게 했다는 그 주님의 작품으로서의 우리가 평탄작업이 된 상태에요. 10분 쉬고 합시다.
서울 의존교회150612b (돈과 구원)―이 근호 목사
하나님에서 일하실 때 깨끗하고 돈 안 밝히고 구제하기 좋아하는 그런 사람하고 같이 손잡고 일을 안 하시고 왜 주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일을 벌이시기를 주님은 원치 않으실까요?
이미 그 일을 한 사람들이 있어요. 누구냐 하면 바리새인들이 그 일을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뭐냐, 과거에 구약에서 선배들이 잘못한 것, 오해한 것,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키지 않은 것을 되풀이 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옛날 그 다윗의 영화를 회복하려고 그렇게 시도를 한 거예요.
역사에서 교훈을 얻고 자한 거예요. 잘못된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보다 개선된 인간성으로서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 하는 것이 하늘나라에 보탬이 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역사의 교훈이라고 생각한 거죠.
역사의 교훈 자체가 이것은 도저히 하나님한테는 해당될 수 없는 거예요. 왜냐 하면 인간은 반성하면 할수록 그 반성한 것 때문에 자기의 진짜 죄를 더 깊숙한 곳에 숨기는 법입니다.
반성해서 죄를 끄집어냈다는 말은 아직도 반성해서도 끄집어 낼 수 없는 죄가 그 반성하는 것 때문에 손에 걸려서 더 깊숙한 곳에 들어가 버렸어요. 끄집어 낼 수 없을 지경으로요.
착한 사람의 딜레마가 그거에요. 착한 사람들은 나중에 반성 한다는 게 힘들어요. 뭐 나쁜 짓을 해야 반성을 하지. 나중에 미쳐 버립니다. 세상모든 것이 자기가 구원 받기에 합당한 그런 세상으로 오해를 하는데 그것은 크나큰 오해입니다.
이 세상은 인간이 죄인이라고 지정하기 위한 세상이지 내가 이 세상에서 바르게 살아서 나만 달랑 구원받기에 좋은 그런 세상을 하나님이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이 세상은 예수님마저 죄로서 삼킨 세상이에요.
의인마저 죄인을 만들어 버리는 세상에 어떻게 죄인인 주제에 의인이 되려고 설칩니까? 유대인들은 십일조를 거뒀습니다. 강제 징수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느헤미야에 나와요. 느헤미야 때에 그들이 나라를 잃고 난 뒤에 그들이 반성하는 차원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모세에게 준 율법을 위반했기 때문에 우리는 이 고생하고 있다. 성전을 지어도 정말 폼 나지 않게 이방 나라의 후원을 받아서 성전을 지었잖아요.
모든 그 자재나 필요한 모든 것을 전부 다 이방나라, 바사 나라에 허락을 받고 했어요. 따라서 진짜 성전 지을 때 후원부터 해서 축하 테이프 끊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 바사 나라 임금님이 테이프를 잘라야 돼요.
빌딩을 지어놓고 빌딩 준공되면 테이프 자르는 사람 있잖아요. 그 사람들이 외국인 노동자입니까? 양복 싹 빼입고 온 사람들이 삽질하잖아요. 기공식 할 때 폼 잡고 장갑 끼고 해 본적이 있지만 공사판에 오지도 않았어요. 철근 떨어질까 싶어서 오지도 않았죠.
그런 사람들이 나중에 준공되고 난 뒤에 가위로 테이프 자르잖아요. 왜 그렇습니까? 자기가 돈을 냈거든요. 그러면 성전, 예레미야 때에 성전 준공할 때 돈을 누가 댔습니까? 바사나라 임금님이 냈어요.
느헤미야가 성전을 건축하고 난 뒤에 누구를 모셔 왔느냐 하면 에스라를 모셔왔습니다. 에스라를 왜 모셔왔느냐 하면 제사는 형식적으로 됐지만 인간들의 마음 자체가 변화되지 않으면 안 되겠다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교사를 초빙했는데 그게 에스라입니다.
에스라 느헤미야가 합작이 돼서 사람들을 전부 다 개과천성 시켰는데 그 결과가 뭐냐, 이방 여자 하고 결혼한 사람을 다 강제 이혼시키고 그 다음에 제사장 뽑아서 순번대로 제사를 드리고 세 번째가 뭐냐, 바로 십일조를 강제로 한 겁니다.
십일조를 왜 해야 되느냐, 십일조를 해 줘야 이사야 예레미야에 보면 옛 선지자 말이 너희들이 가난한 이웃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너희들은 이웃 사랑실천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나라가 망한다고 되어 있어요.
이곳이 성전이라는 하는 이야기를 듣지 말라 너희가 너희 이웃에게 불의를 행했으니까 저울을 속이고 가진 자가 없는 자를 억압을 했기 때문에 너희는 이 나라가 망한다. 옛날 출애굽할 때는 다 같이 거지꼴이었는데 거지꼴로 들어와 놓고 왜 그때의 하나님의 자유를 잊어버리고 네 주위에 고아와 과부를 돌보지 아니하느냐,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의 억울함을 호소하사 그것을 너희에게 소위 가진 자에게 너희에게 퍼부었으니까 너희가 이렇게 망한다.
그 이야기를 이미 그들은 알고 있어요. 따라서 강제로 십일조를 거두어서 구제를 함으로서 다시 하나님 앞에 예쁨 받아서 ‘나 예쁘지?’이렇게 귀여움 받아서 다시 그때 그 나라 잘나가던 시절의 나라로 통일될 수 있도록 그런 염원에서 강제 십일조를 거둔 겁니다.
제사 드리고 제사에 필요한 일꾼, 레위인들 일꾼들을 두려고 하면 십일조가 필요하고 또 어려운 사람들의 복지자금 쓰려면 십일조가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누가 복음19장인가 보면 나오죠. 성전에서 바리새인들이 자랑질 하잖아요. 나는 이레의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하고 구제했나이다. 주께서 뭐라 했습니까? 세상에 너하고 나는 죽이 잘 맞는구나! 우리 같이 손잡고 해 보자! 이렇게 했습니까? 이 땅에 하늘나라를 건설해 보자! 뭐 이랬습니까?
십일조 한 적이 없는 세리가 오히려 그 순회 재판에서 즉석으로 합격해서 영생을 얻었습니다. 재산 팔아서 부한 재산을 나눠져서 영생의 터를 닦아서 영생 얻은 게 아니에요. 이웃을 동정해서 영생 얻는 게 아닙니다. 그냥 주님 앞에 뭐했기 때문에?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하는 거기에 의인되어서 영생 얻는 거예요.
오늘 디모데의 말씀하고는 마치 안 맞는 것처럼 보일 겁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제대로 봐야 돼요. 관건은 이겁니다. 과연 사람이 인간성이 달라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오셔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나를 왜 핍박하느냐? 이렇게 찾아오셔서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달라진 게 뭐냐? 그렇게 찾아오셔놓고 훌쩍 떠나 버리고 난 뒤에 그 다음부터 사도들에게 찾아온 게 뭐였나? `사도 바울, 돈 좀 있지? 그거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면 나는 너에게 영생 줄게` 이렇게 바꿔치기 했습니까?
돈 주고 영생 챙겼습니까? 그런 식으로 사도 바울은 그렇게 살았습니까? 사도 바울에게 찾아온 게 뭐냐, 그것은 바로 하늘의 문 곧 십자가 사건이었습니다. 십자가 사건이 찾아왔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주님의 일이라 했습니다. 처음 강의시간에 뭐라 했습니까? 인간의 형상은 기능으로 나타나고 하나님의 형상도 기능으로 나타나죠. 예수의 얼굴처럼 성형한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라 했죠.
뭔가 강제적인 기능이 태풍처럼 여기에 덮치는 겁니다. 덮치게 될 때 사울아! 너 돈 있지? 그거 팔아서 어려운 사람 주면 아이고 잘했어요. 그럼 영생 줄게 하면서 바꿔치기 하는 식이 아니고 십자가가 찾아온 거예요.
십자가가 찾아올 때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 21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주님의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일이다 이 말입니다.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은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는 겁니다.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이 일뿐이겠습니까? 생각하는 것조차도 마찬가지이죠.
이미 신약에서는 인간을 전적으로 어떤 행위를 해도 그것이 죄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에서 인간이 해 내지 못하는 율법을 갈라디아서에서 제시합니다. 이게 오늘 설교의 하이라이트입니다. 인간이 해 내지 못하는, 인간으로서는 감히 해내지 못하는 법을 주님께서는 제시해 버리죠.
그게 마태복음 6장에 나옵니다. 19절에 보면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오늘 첫 번째 강의 내용의 다시 여기에서 끌어 당겨서 이해를 돕도록 하겠습니다.
인간이 어떤 약속이 등장하지 않으면 인간은 갇혀있다는 생각을 못합니다. 바알종교의 특징은 뭐라 했습니까? 하늘과 땅이 다 개방되어 있다 했죠. 저 하늘에 하나님 계시고 땅에는 인간이 살고 그러니까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그래서 죽은 씨앗도 부활되듯이 봄에 다시 나오니 이 온 천지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드러내는 도다.
뭐가 골치 아프고 어렵습니까? 십자가와 죽음이라는 왜 들어가요. 거기에 들어갈 이유가 없어요. 출애굽이 왜 있어야 합니까? 노아의 물 홍수는 왜 있어야 됩니까? 인간이 아무리 잘못을 해도 잘못을 했으면 잘못했다고 나무라면 되지 그것을 물로서 덮쳐버리면 인간이 물고기도 아니고 갈치도 아니고 고등어도 아니고 어떻게 살라고 덮칩니까?
우리는 우리의 행동에 비해서 주님이 주시는 최후의 벌이 너무 과도하다고 생각이 안 듭니까? 우리 인간에게 내리는 가장 큰 벌은 불심판도 아니고 물심판도 아니고 인간 자체를 모독하는 사건입니다.
그게 무슨 사건이냐 하면 바로 십자가 사건이 인간에게 때릴 수 있는 최고의 아픈 채찍입니다. 너 때문에 내가 죽었잖아! 이 말이에요.
여러분들이 다 알고 있는 교과서 이야기 나오죠. 그런데 그 이야기는 그때는 이해가 됐는데 지금은 이해가 안 되는지 모르겠어요. 청개구리 이야기입니다. 동으로 가라면 서로가고 서로가라면 동으로 가는 청개구리가 그렇게 말을 안 듣던 청개구리가 어느 날 엄마가 죽고 난 뒤에 묘를 만들어 놨는데 홍수가 와서 묘지가 떠내려갈까 걱정이 돼서 만날 거기 옆에서 개굴개굴 울다보니까 개구리 울음소리가 개굴개굴되었다는 거예요.
제가 지금 와서 이해가 안 되는 이유가 동으로 가라면 서로가고 서로가면 동으로 가는 그 성질 같으면 엄마 무덤이 떠내려가도 그것은 엄마 무덤이 떠내려가도 그것은 노래를 불러야지 왜 우느냐? 갑자기 개구리가 왜 개과천성 하는지 그 근거가 뭐냐는 거예요. 그것을 도대체 모르겠어요.
부모 죽는다고 인간됩니까? 그게 도저히 납득이 안돼요. 새사람 됐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우리 남편이 새사람 됐어요.” 아 그걸 믿어요? 술 먹여 보세요. 사람인지 개인지? 술 먹여보면 알건데요.
저는 새사람 같은 것은 안 믿습니다. 하나의 처세술 아니겠어요. 그때만 살짝 넘어가려는 하나의 얄팍한 처세술 아닙니까? 십자가는 그것을 믿었다고 인간 되는 게 아니에요.
십자가 믿고 사람 됐다고 하는데 십자가 믿고 인간 된 사람이 없습니다. 십자가 믿으면 자기 본색이 드러나지 인간의 인간이 되지는 않아요. 십자가 믿고 난 뒤에 “아이, 들켰네!”이렇게 되지 새사람 되는 게 아니에요.
새사람은 어떤 경우에 되느냐 하면 내가 죽을 때만 새사람이 돼요. 내가 옛사람이 없어 질 때 새사람 되는 거예요. 나를 날마다 죽을 때 새사람 돼요. 새 사람의 몫이 누구의 몫이냐 내 몫이 아니고 날마다 나를 죽이는 주님 몫이에요. 나를 죽이기 위해서 어떻게 됩니까? 죽을 이유가 타당해야 되잖아요. 죽을 만큼 나쁜 짓이 내 속에서 나와야 되는데 우리가 밥 먹는 게 죽을죄입니까?
아까 빵을 드셨죠? 에이 죽을 죄 지었네! 빵 먹는 것이 죽을죄라는 것은 누구 앞에서냐 ? 말씀 앞에서 말씀 안에 십자가, 말씀 앞에서 우리가 먹든지 마시든지 나의 영광, 내가 밥 먹고 살기 위해서 빵을 먹었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환경 속에서 우리는 죽을죄인, 밥을 먹어가면서 죽어야 돼! 밥 먹고 죽어야 돼! 하고 빵을 먹는 거예요.
밥을 맛있게 하면서 밥 먹고 죽어야 돼! 골프 치면서 죽어야 돼! 이게 뭐냐, 모든 하는 일이 죽어 마땅한 일로 보여 준다는 것은 그 현장에 주님의 십자가가 개입될 경우 일뿐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죄인이라 하는 것조차도 우리의 일이 아니고 주님의 성령이 맡은 성령 자신의 기능이에요. 하나님의 형상의 기능입니다. 성령의 십자가를 만나게 되면 자기의 위선이라는 그것조차도 만약에 맥이 빠지고 힘이 빠져서 위선할 여력도 없게 되면 주님, 제 찬양을 받으옵소서! 에이, 주께서 아닌 것 아시죠. 나도 아닌 것 아니까 찌르릉 하프 찬양대, 오늘은 여전도회에서 하프 연주하겠습니다. 찌르릉 찌르릉! 그러면 아멘! 할렐루야!
그런데 하프를 치면서 ‘에이 씨 주님 아시죠? 빨리 하고 차비나 얻어 갈라하는 것’본인이 알아요. 성가대 하면 앞에 권사님은 너무 은혜 돼서 울어요. 울면서 내 자식들도 교회 와야 되고 손자들도 교회에 와야 되는데 하면서 울어요. 주여! 하고 있는데 성가대는 아, 옆에 김 집사 오늘 소프라노 너무 잘 빠지는데 나는 오늘 왜 소프라노가 안 되지? 아이고 틀렸네! 아이고 오늘 성가대 대장 나한테 뭐라 하겠다!
소프라노 김 집사님! 박자를 빨리 치고 넘어가야죠! 오늘 성가대 80점! 지금 자기 영광을 챙기고 있잖아요. 반주도 마찬가지에요.
교회 꽃꽂이 해 놓으면 은혜 되는 듯싶죠. 내가 제일 미워하는 김 집사가 와서 꽃꽂이 다 꺾어놓으면 화나는 데요. 교회 청소 깨끗이 해 보세요. 애들이 함부로 해 보세요. 짜증난다니까요. 오늘 짜증이 제대로다!
자기가 마냥 것에 있어서 제일 먼저 교회에 와서 지난 토요일에 봉사한 것에 제일 먼저 주목을 한다니까요. 내가 깨끗하게 마이크 놓은 대로 그대로 있는가! 누구 손 타지 않았는가! 목사님이 눈치 채고 칭찬해 주지 않는가! 이런 것, 인간은 자기가 기능을 한 것에 시선이 가고 응시를 하게 되어 있어요.
그게 자기 영역에 하나의 포함이 되게 되어 있어요. 그게 자기의 역사이고 가기가 이 땅에 온 하나의 흔적입니다. 늘 인간은 꾸미면서 살아가요. 예술가에요. 늘 꾸미면서 살아가요. 자기를 아름답게 미화하면서 살아가요.
세상은 거기에 협조했노라! 하나님은 나를 도와줬노라!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게 뭐 하나님이 무슨 그 일을 도와줍니까?
고등어는 뼈에서 살집이 떨어져 나가겠지만 인간에서 돈은 절대로 떨어져나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돈을 소유하면 내 놓을 수 있는데 소유한 게 아니고 인간은 돈 섬김 외에는 다른 인생의 의미가 없어요.
돈 버는 것 외에는 다른 인생의 의미가 없어요. 왜 그렇습니까? 돈이 이 세상에 유일하게 통하는 마치 피처럼 모든 것을 용서하기 때문에 그래요. 이 인간 세계에서는 돈이 모든 것을 용서한다니까요.
뭐? 돈을 잃으면 조금 잃은 것이고 건강을 잃으면 전부를 잃은 것이다? 어디 거짓말을 치고 있어요. 아프다고 돈 내 놓을 것 같으면 애초부터 돈 벌지도 않았어요. 아파도 돈 안 내놔요. “애들아! 나 죽거든 링거 꼽고 병원에 돈 주지하라!”죽어도 돈 안 내놔요. 왜냐하면 돈은 자기 역사이기 때문에 그래요.
돈이 자기 역사에요. 아까 안양강의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cf가 인상적인 것이 있었는데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처녀가 제일 먼저 배운 것이 마법 같은 화장술을 배워요. “세상에 화장을 이렇게 하다니! 화장을 해서 내 모습이 이렇게 아름답게 변하다니!” 그렇게 화들짝 놀랄 때에 그것 놀라지 말고 이제 돈을 버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아세요! 삼성생명인가 증권인가
화장하는 것이 기쁘지만 막상 네가 돈을 벌려고 해 봐라! 그 예쁘게 했던 얼굴 돈 벌면서 다 날아갑니다. 치사하게 더럽게 하면서 왜 돈을 버는데요? 돈이 없으면 내가 존재하는 이유가 없어요.
인생을 왜 사는데요? 돈이 나의 욕망을 자극해요. 나, 저 옷 사고 싶어! 그냥 줍니까? 돈이 있어야 주죠. 돈이 있어야 그 옷을 사죠. 그러면 옷을 샀으니까 돈이 없어졌잖아요? 아니에요. 돈이 옷으로 변한 거죠. 나 옷 샀다! 이렇게 끝나지 않습니다. 옷을 샀는데 이게 얼마짜리다! 이렇게 해야 끝나는 거예요.
내 노동의 의미, 이 돈을 벌려고 애썼던 그 의미가 돈으로 변신돼서 돈 내 고생을 보상하고도 남아 있는 나의 면류관 같은 겁니다. 사람 사는 것 다 뻔하다. 그게 전부죠.
결혼해서 단칸방에서 살면서 여보! 우리는 서로 사랑하면서 그냥 단칸방에서 쭉 50년 동안 살자! 철이 없으니까 이런 소리 하죠. 그런데 동창생이나 친구나 누가 와서 아이고 답답하다 이런 데서 사나? 이렇게 나와 버리면 그 다음부터 갑자기 인생의 목표가 생깁니다.
넓은 데로 이사 가자! 빚을 내서라도 가자! 갑자기 목표가 생겨 버려요. 게다가 애하나 생겨 버리면 애한테 드디어 돈이 물량공세가 쏟아집니다. 피아노에다가 태권도에 막 쏟아집니다. 쏟아져도 그게 재미있어요. 왜냐하면 애가 피아노 배우는 그것이 자기가 돈을 버는 이유와 목적을 거기서 발견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돈을 가지고 남을 구제했다면 어떻게 됩니까? 구제가 뭐가 돼 버립니까? 십일조 걷어서 강제로 구제를 시켰다면 구제가 뭐가 됩니까? 구제 자체가 나의 영광이고 자존심이고 나의 의미가 되겠죠. 지옥 가죠. 왜 지옥 가는가? 자신에게 십자가가 필요치 않아요. 왜? 잘났기 때문에, 잘났는데 십자가가 왜 필요합니까?
에이 목사님 십자가 믿고 인간됐잖아요. 십자가 믿고 인간 안 된다니까요 십자가가 요구하는 인간상은 이제는 뭘 해도 죄래! 이거죠. 인간 되는 게 아니에요. 주여! 죽여주옵소서! 이거에요. 그래 죽여주마! 십자가가 그거에요.
십자가가 성령이 올 때 같이 능력으로 오는데 십자가의 능력은 나를 죽이는 능력이 십자가 능력입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아니하면 영생이 없잖아요.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 지는 것을 누가 합니까?
이것은 바로 성령님이 하시죠. 에이 목사님 제가 할 수 있는데요. 내가 할 수 있는 반성은 그것은 회개가 아니고 반성인데 내가 할 수 있는 반성은 그 반성 자체가 의로운 창고에 업적이 돼서 계속 의가 돼서 나간다니까요.
요새는 반성이나 회개나 똑같지만 내가 회개하게 되면 난 적어도 회개한 사람이라고 이게 하나의 업적 훈장처럼 따로 논다니까요. 이래 봐도 내가 이대 나온 여자야! 이대 나온 여자가 평생 동안 계속 자기 업적이 나온다니까요. 너 숙대 나왔지 하면 뭐라 하노! 내가 이대 나왔는데! 숙대 나왔냐는 그 말 한마디에 이대 나왔다는 것이 대번 튀어나와버려요. 안 잊어버렸어요.
그런데 십자가는 뭐라 합니까? 네가 이대 나오던 숙대 나오던 죽은 자다! 이게 십자가 안에 이미 죽은 자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십자가 앞에서 죽은 자이어야 하는데 왜 죽어야 합니까? 말씀을 지킬 수가 없으니까 죽어야 마땅하죠.
주님이 제시한 말씀을 못 지켜요. 마태복음 6장 19절에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고 했는데 땅에 쌓아 두지 말라는 말은 이미 하늘과 땅이 개방된 입장에서는 하늘과 땅이 사람을 둔 곳이 땅밖에 없어요. 왜? 땅이 전부이니까 그런데 그 뒤에 나온 말씀은 보물을 어디에 쌓아두라? 하늘에 쌓아 두라. 이게 지금 인간의 힘으로 가능합니까?
보물을 하늘에 어떻게 쌓아요? 하늘에 선반이 있습니까? 자, 하늘에 선반이 있다고 칩시다. 거기에 쌓아 두게 되면 그것은 하늘에 쌓는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땅에 쌓는 방식으로 이동해서 하늘에 있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것은 하늘 속에 있는 땅이 되어 버려요.
방식이 똑같으니까 동전을 쌓아두는 방식이 땅에서 성립이 되거든요. 땅은 중력이 있으니까요. 그것을 만약에 하늘에 둔다면 하늘에도 중력이 있다는 말이 되고 선반 있어야 되고 땅에 있는 방식대로 그것을 쌓아두어야 돼요.
그러니까 이 말은 네가 기껏 해 봤자 땅의 방식을 변경할 그런 능력은 너한테 없다는 이야기에요. 네가 땅에서 하는 행세? 그게 어디 가겠느냐 하는 겁니다. 하늘을 연상해도 하늘다운 방식이 아니고 땅에서 하는 행세를 하늘에서 하다 보니 그게 하늘이겠습니까? 땅이죠. 땅의 확장이죠.
쉽게 말해서 우리는 땅에서 하늘로 갈 수가 없어요. 우리가 기껏 알고 있는 아담의 형상의 기능은 땅을 염두 한 것을 전제로 해서 벌려진 행세이기 때문에 환경이 바뀌게 되면 그것은 안 됩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베드로가 평소에 좋은 분, 위대한 분이 있을 때 자기가 이 땅에서 주택을 지어서 모시는 것이 자기 할 수 있는 최대의 손님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변화 산에서 예수님하고 모세하고 나타날 때 베드로가 제시한 제안이 뭡니까? 정말 그때 베드로가 성령을 받았으면 “죽여주옵소서”이게 옳습니다. 왜? 이 땅에서 더 이상 살 필요 없습니다. 탈출해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나와야 되는데 뭐라 하느냐 하면 “여기가 좋사오니” 변화 산을 땅의 일부로 본거예요.
지금도 변화 산에 가면 모세하고 엘리야하고 기념촬영하고 있습니까? 손님맞이하고 있습니까? “어서 오너라! 아이고 변화 산 오느라 힘들었지? 기념사진 찍고, 모세처음 봤지? 모세 이렇게 생겼어! 엘리야 인사해야지 중간에 예수님 사진 찍고 김치-”뭐 이렇게 합니까?
없어요. 없다니까요. 왜 우리가 하늘을 못 가느냐 하면 이 땅에 우리가 하늘을 장악할 수는 하늘나라는 없어요. 왜? 사건이고 바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는 성령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가고자 하면 못 들어가고 그 쪽이 사울처럼 덮치면 우리는 그와 함께 삼켜져서 이미 성도로서 하늘나라 속한 백성으로 살 수 밖에 없어요. 어떻게? 이질적으로, 어떻게 이질적이냐? 다른 사람은 성경말씀이 있으니까 지키자! 이렇게 나오고 이질적인 사람은 주여! 이 말씀을 보니까 우리가 죄인이 맞군요!
이 죄를 용서해 주신 주님의 십자가에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 이런 다른 고백이 나와 버려요. 도대체 인간의 능력으로 나올 수 없는 숙대 나오고 이대 나온 것과 관계없이 초등학교도 안 나오고도 나 올수는 희한한 고백! 주여, 앞으로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십자가의 원수로서만 행동할 수밖에 없는 죄인인 것을 또 소급적으로 인정, 자인합니다.
이러한 고백이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은 이미 십자가에서 죽었죠. 로마서 6장 이야기입니다. 주님이 십자가 죽을 때 같이 죽고 살았을 때 같이 살아났습니다. 이것은 우리한테 묻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조치를 그렇게 해 버렸어요.
이제는 성령이 와서 주께서 하는 조치에다가 우리를 성령에 합체시키고 확인시키는 작업만 남은 거예요.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시험치고 난 뒤에 제일 초초한 순간이 시험 합격 통지서 받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삼성 그룹에 시험을 쳤습니다. 쳐놓고 만약에 오늘 아침 10시부터 합격자 통보가 개인별로 또는 회사 게시판에 공고난다고 했어요. 그래서 오늘 아침 10시 안됐습니다. 아침 7시입니다. 세 시간동안 얼마나 초조하겠어요? 이력서 100군데나 내서 다 떨어졌는데 마지막 이라고 냈는데 면접에서 좋은 인상을 남겼는데 될 것도 같고 안 될 것 같기도 하고 미치겠어요.
아침 10시가 안됐는데 7시 30분에 그 회사에 있는 친구가 전화 와서 “너 합격했어!”라고 한다면 그 다음에 우리가 할 일은 뭡니까? 그 친구가 성령이거든요. 성령께서 합격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우리가 할 일이 뭡니까?
합격했다고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이제는 랄랄라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그래도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본사 현관에 가서 아주 편한 마음으로 내 이름 확인하는 거죠.
이미 성령께서 너는 죽었다고 통보했다! 그냥 죽으면 너는 지옥 가는데 그냥 죽으면 지옥 가는데 예수와 더불어 죽은 자로 통보가 갔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죽은 자에 한 해서 만 그리스도가 살아나실 때 단번에 같이 살아났다는 겁니다.
시간을 초월해서 이것은 모든 시간에 다 해당되는 상황에서 그렇게 통보가 왔고 성령께서 통보해 줬고 이제는 우리가 한 평생 살면서 그것을 확인하는 거예요. 왜 나는 주님 앞에서 십자가 앞에서 죽어 마땅하고 왜 주께서는 죽어 마땅한 것을 주께서 어떤 일을 하셨기에 죽어 마땅한 것을 살려 내셨느냐 이미 끝난 상황이에요.
이미 살았어요. 왜 살려줘 버렸느냐를 우리가 확인하면서 평생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태복음을 볼 때에 합격한 통지서를 받은 사람으로 당당하게 보는 거예요.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우리의 답변은 주여, 저는 못합니다. 못할 줄 알고 내가 이 말 했다. 하늘에 쌓아 우리는 방법은 우리한테는 없어요. 땅의 방식만 알기 때문에 없습니다.
하늘에 돈을 쌓아 놓는 방법이 없어요. 베드로가 기껏 한 것이 빌라 세 채 드려서 여기가 좋사오니 그 식 밖에 못하거든요. 나중에 빌라도가 얼마나 들어와서 참내 네가 철딱서니 없는 짓을 했다!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가 어딘데? 여기를 떠나라 하는데 왜 여기에 그냥 머물러있어요.
가난한 사람을 동정하고 돈을 주고 하는 것은 이미 영생의 터가 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하게 하시는 것은 우리 몫이 아니고 주께서 주님의 자기 숙제가 되는 겁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일을 시킬 때 우리 보고 섭섭하게 여기지 마라 이것은 성경대로 하라고 실시하는 거예요.
그 실시 가운데서 우리의 느낌은 뭡니까? 아이고 내가 어떻게 번 돈인데 아이고 아까워라! 우리는 돈에서 내 자존심과 내 역사를 떼어놓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런 일들을 하면서 모든 영광은 누가 가져갑니까? 주님이 몽땅 다 가져가요.
도움 받는 사람이“아이고 목사님 고맙습니다.”이러면 “이 사람이 정말 내 사정도 모르고 참! 제가 한 거 아니거든요.” 제가 했으면 제가 영광을 받아야 하는데 이것은 분명히 제가 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주께서 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왜냐, 사도 바울이 그렇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헌금했어요? 안 했어요? 분명히 했죠. 자기돈 내서 했습니까? 고린도교회 돈 내라 했죠. 생색 자기가 냈습니까? 주님께 영광 돌렸습니까? 주님께서 영광 돌렸잖아요. ‘아, 이건 사도 바울이 겸손해서’ 겸손한 게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속죄의 의미를 가로막는 구제는 없습니다. 구제하는 내가 죄인인 것을 감추는 식의 구제는 우리한테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지금 구제하고 있는 내 모습이 이게 의미가 아니고 죄라는 것을 그것을 지워버릴 그런 구제는 없어요.
우리는 구제해 놓고 용서는 십자가 피로만 용서받아요. 구제하는 이것이 내가 속죄되어야 될 이유를 남들에게 보여 주는 겁니다. 구제가 복음전파죠. 어떻게? 이 구제해도 구원 못 받아요. 구제하는 내가 죄인입니다. 구제하면서도 난 돈이 아까워 미치고 환장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보여 주는 거예요.
고아원에 쌀 갖다 주면서 내년에 또 올게요. 그거 쓸데없는 장담이에요. 야고보서 4장 말씀처럼 주의 뜻이면 이것도 저것도 하리니
지금 내가 주의 뜻에 의해서 쌀가마를 주는데 제 마음이 내일되면 다시 뺏어올지 모르니까 단단히 빨리 받아가 잡수어야 됩니다. 내일돼서 떡 내놔라 할지 몰라요. 그 정도 인간밖에 안돼요. 이게 바로 영생의 터를 이미 닦은 사람, 영생을 찾기 위해서 주께서 나를 붙들고 해 내신 조치가 그 조치입니다.
주님께서 뭐라 했던가요?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손이 모르게 해라’ 그 말씀을 대하면서 우리가 그게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같은 두뇌에서 오른손 왼손이 신경세포가 내려가는데 뭐 수술할까요? 오른쪽 뇌를 아예 죽여 버려서 오른쪽 뇌니까 왼쪽 손이 되겠죠. 왼쪽 손이 하는 것을 오른쪽이 모르게 수술할까요? 오른쪽 모르게 하고 다시 수술하고요?
말씀을 지키려고 하면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안돼요. 성경은 못 지킵니다. 왜? 지키는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본성이 반드시 십자가의 속죄를 가리고 내 자랑질 하는 식으로 항상 동반해서 나오게 되어 있어요.
누구 도와줬다고 하면 찬란한 역사의 페이지에 장착하게 돼요. 나는 몇 년 며칠에 누구를 도와줬다! 잊을 수가 없어! 내가 그렇게 착할 줄 몰랐다! 나는 이제 새 인간되었구나! 새 인간 같은 소리를 하고 있네요. 잠복되어 있는 죄가 자기 의만 자랑질하고 싶은 그 욕구 비로소 그 구제를 통해서 발각이 된 거죠.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고 했어요. 이 모든 것을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찬송가에 나오죠. “아 하나님의 은혜로”강의 하다가 찬송하는 게 10년 만에 처음입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그 다음에 나오는 가사가 “이 쓸데없는 자”과거완료가 아닙니다.
내가 쓸데없는 자 되기에요. "되기"라는 말은 부정사거든요. 이미 시간을 초월해서 늘 항상 그렇게, 늘 항상 그런 존재이기에요 아 쓸데없는 자 그러기, 5천명 목회 해 놓고 돌아서서 내가 5천명 목회한 것이 아무 짝에도 쓸데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5천명 목회한 거예요.
뭘 해도 항상 쓸데없는 자로 다시 확인하기 위해서 인생을 하루하루 살게 하시는 겁니다. 만약에 내가 쓸모 있다고 조금만 느끼면 이스라엘 사람처럼 광야의 원망이 나와요. 주님이여! 왜 물이 없습니까? 왜 양식이 없습니까? 왜 나같이 가치 있는 인간 주께서 동업자로 쓰셔도 훌륭할 건데 왜 저를 이렇게 무시합니까?
이 쓸데없는 자가 계속 유지돼야 되는데 그게 성령의 능력이에요. 그러면 성령의 능력은 우리가 소유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성령이 우리를 소유해야 되니까 우리가 소유할 수 없는데 성령이 우리를 소유하는 순간 그 때부터 우리는 쓸모 있는 자로 돌변해 버려요.
주여, 이제 성령 받았으니까 우리가 말씀을 지키겠습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쓸모 있는 자로 봐버려요. 쓸모 있는 자로 보는 순간, 주위를 돌아보면서 주님이여! 나에 대한 조치는 불합리합니다. 내가 이렇게 쓸모 있는 자인데 애는 성적이 왜 내려갑니까? 한 달 수입은 줄어들고 왜 세상은 나를 힘들게 합니까? 저보고 어찌 살라고 이렇게 합니까?
제가 그동안 얼마나 주님 앞에 십일조도 안 빠지고 다 했는데 지금은 안 하고 있지만 했는데 왜 주님께서는 이렇게 섭섭하게 합니까? 그 십일조 한번 떼어 먹었다고 아이고 참 좀스럽게 그 몇 푼 빼 먹었다고 적금 넣다가 한번 빠졌다고 계약해지 하면 어떻게 됩니까? 아이 마저 할게요. 이제 됐습니까? 이제 만족 하십니까?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뭔가 놓쳐버렸어요. 그게 잠복 되어 있던 하나님의 원수가 다시 한 번 활개를 친 겁니다.
오늘 본문을 한번 봅시다.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산상설교를 통해서 보게 되면 보물을 하늘에 쌓아둘 수 없다는 겁니다. 하늘에 쌓아 둔다는 것을 지키는 분은 약속을 하신분이 약속을 지키는 부분입니다. 다른 사람은 못 지킵니다.
그런데 저도 처음에 교회에 나왔을 때 하늘에 쌓아두라 해서 집을 팔아서 전세로 바꾸고 나머지 돈 가지고 교회에 헌금하고 그런 식으로 얼마나 사기를 당했는지 참 돌려받고 싶은 사람도 없어요. 왜, 그 좋다고 복 받는다고 좋아 했던 짧은 기쁨이 그 만큼의 가치를 하는 것 같아요.
돈 냈으니까 30배 60배 복이 오겠지 하는 은근히 기대했던 기대함의 그 짧은 순간의 희망이 그게 하나의 도박에 돈 꿇어 넣었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내 인생을 걸고 내 가치를 걸고 했던 도박에서 파토 날린 겁니다.
우리는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에 도박을 걸지 마세요. 죽은 자는 안 받습니다. 받아 주지를 않아요.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주님의 은혜로 살지 내 힘으로 못 살거든요. 내게 주어진 돈은 주님의 노동에서 주는 돈이지 내 돈 아니에요.
주님 돈을 우리를 가지고 사용하면서 우리는 마치 내 돈처럼 여기는 그 죄를 또 발각시켜 내면 또 구제라는 것을 통해서 우리의 죄를 또 하나씩 발각시킵니다. 그래서 충분하게 죄를 아는 사람은 구제하지 마세요. 자기가 잘났다 하거든 구제시킵니다. 시켜서 돈 아까운줄 알고 또 한 번 꼴아 박고 주여, 잘못했습니다.
조용하게 살면 주께서는 가만히 두는데 꼭 잘난 체하니까 데리고 물가에 고문하듯이 집어넣는 겁니다. 또 우리가 잘난 체하고 우리 의를 자랑하니까 한번 당해 보라고 물속에 집어넣는다니까요.
코미디 프로에 그런 프로가 있어서 의미 있게 봤어요. “아이고 시끄러워 죽겠네!”하니까 저승사자가 시커먼 모자 쓰고 와서 “어디 많이 시끄러워요?” “아니 전혀 시끄럽지 않아!” 랩을 얼마나 잘하는데 하면서 다시 돌려보내고 하는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에요.
“아이고 짜증나 죽겠네!” 하면 주께서 십자가에서 “한번 죽여 볼까?” “아닙니다. 아닙니다. 제가 얼마나 겸손한데요.”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는 것은 전부 다 누구의 몫입니까? 성령 받은 몫입니다. 우리는 성령께 소유 당하기 때문에 성령께서 그렇게 하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이 선한 일, 선한 사업은 바로 무엇을 경유해서? 나의 죄성을 경유할 때만 선함이 선함이 되는 겁니다.
왜?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나는 죄인 중에 괴수이기 때문에 죄인 중의 괴수를 가지고 선한 싸움을 벌였다면 그것은 누구의 공로에요? 누구 몫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대로 실시하시는 몫이에요. 그러면 일을 왜 벌이십니까? 그 가운데서 우리가 정말 영생의 터가 얼마나 네 돈보다도 더 귀하다는 사실 또다시 깨닫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아무 것도 하는 것도 없이 공짜로 천국에 넣어줬다는 것이 네가 돈을 쓰는 재미보다 더 즐거움을 준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지요. 그래서 어떤 목사는 이런 소리를 해요. 될 수 있으면 비싼 것을 사라 싼 것 사지 말고 왜? 비싼 물건을 사면서 돈으로부터 스스로 자유롭게 될 수 있기 때문에 비싼 물건을 사라는 겁니다. 너무 돈을 아끼면 점점 더 돈을 섬기는 그 행세가 도가 더 심해지거든요. 계속 돈을 섬기게 돼요. 그런데 비싼 것을 사게 되면 내가 비싸다, 헐하다하는 것 자체에 내가 자유롭게 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주의 뜻이 아니겠는가 하는데 저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비싸다는 말은 상대적인 거거든요. 진짜 비싼 것을 못 사서 그래요. 그것은 자기의 믿음 실력이 어느 정도인가 스스로 시험 드는 계기에 불과합니다. 그러지 마시고 무엇을 해서 하려고 하지 말고 범사에 감사하면 돼요. 주어진 것에 대해서 범사에 감사하면 되는 겁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성도다운 물건구입입니까? 그에 대한 정답은 늘 감사한 마음으로 살면 돼요. 물건 구입할 때 아이고 하나님이 비싼 거 사치스럽게 하면 가난한 사람생각 해라 했는데 내가 너무 설치지 않았습니까? 그런 생각을 하지 말고 일단 어떤 결과든 그런 마음이 들어 샀거든 산 이상은 “주여, 못난이에게 이런 좋은 물건 주셔서 감사합니다.”누구든지 감사로 끝나면 성령의 일이고 뭔가 자기가 선악적으로 따지면 이것은 사단의 시험에 빠진 거예요.
과거에 좋은 물건 많이 사셨습니까? 그러면 그만 고맙습니다. 하고 끝내세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이렇게 하고 끝내야지 내가 많이 아껴서 어려운 사람도와 줬다고 그 되지도 않는 소리입니다.
사람은 그때그때 상황이 자기는 최선이지만 돌아서면 다 부족한 것이 들어나기 마련이기 때문에 아직 까지 내일이 있는 이상은 오늘로 감사하면 돼요. 미리 당겨서 미리 해 보자 이렇게 하지 마세요. 내일이면 죽을 지도 모르는데 뭘 땡겨봐요?
19절에 봅시다.
19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이미 영생이라는 것이 나를 영생주기로 했으면 나의 인생전체가 나에게 영생을 주신 그분의 소유가 된다는 뜻이에요. 내가 영생을 이런 식으로 얻어야지 하는 그런 뜻이 아니라 이미 영생을 줬기 때문에 이미 확정된 미래를 네가 밟아 갈 수 밖에 없다는 뜻이에요.
네가 미래에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사전에 예고된 일이라는 사실을 살면서 받아들이라는 겁니다. 십자가 더욱더 감사하기 위해서 네가 반드시 거쳐야 될 인생의 절차라도 그렇게 받아들여야 돼요.
그래서 감사라 하는 것은 내가 주인공이 되면 감사가 안 돼요. 내가 주인공이 되면 내가 완벽하게 됐을까! 아니면 너무 성급했을까! 경솔했을까? 자꾸 따지게 돼요. 모든 가치와 의미는 나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죽은 자에게서 가치와 의미를 찾지 마세요.
가치와 의미는 죽은 자를 향하여 퍼부어 주신 주님의 가치와 의미만이 고스란히 남아있기를 주께서, 성령께서는 그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게 사도 바울이 나는 죄인이지만 주의 십자가 때문에 의인되었다는 그러한 취지가 모든 인생 행위 속에서 번져 나오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뭔가 주스를 마셨는데 마시고 난 뒤에 말씀을 마신 것처럼 느껴지도록 말씀이 새록새록 생각나도록 그렇게 성령께서 하지요. 네가 주스는 그렇게 맛있게 마시면서 네가 말씀은 맛있게 먹었느냐? 이런 질책이 막 들어올 때 이게 말씀이 엮여져 있잖아요. 이 세상은 말씀의 그물망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 일어난 모든 일이에요. 따라서 항상 말씀이 정당함을 우리에게 통보하는 식으로 우리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일부로서 참여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말을 할 때 당당하게 이야기했거든요. 앞으로 네가 구제하고 나눠주는 일이 있더라도 놀라지 말라! 그것은 네 돈이 아니고 주님 돈이고 그것은 너에게 영생의 터를 확인하기 위해서 주님이 필히 만들어 주는 조건이기 때문에 그냥 감사함으로 받아드려라!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려면 나에게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사용하셨다는 사실에 대해서 도리어 그것 때문에 감사하는 그런 것이 유지가 돼야 되겠죠.
여기 17절에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했는데 이 세대에 부한 자라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다른 세대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강의를 여러 번 했는데 항상 사람들은 이 세상이 전부 라고 하지만 성도는 달라요.
성도는 다른 세상이 있기 때문에 거기서 어떤 성령이 왔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대라고 제한적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을 제한적으로 본다는 것 자체가 이미 여러분은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봐 된 우리가 그리스도의 문이고 생명이고 영생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문이고 진리의 증인으로서 살아갑시다.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말씀 덩어리가 되게 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 속에서는 말씀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자랑이 나오는 것을 또한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 우리는 말씀과 대비시켜서 말씀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우리의 구원의 목적이 주님의 말씀성취에 있고 주님을 증거하는데 있음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