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청구권협정으로 일본에 대한 배상청구권은 소멸되었는가? / 이상갑 변호사
이명박 대통령이 최근 한일정상회담에서 군 위안부 할머니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해결노력 필요성을 제기하면서 한일관계가 냉각되고 있다는 보도가 지면을 크게 장식하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한일과거사 문제는 이미 법적으로 종결되었다고 주장하면서 나아가 서울 일본대사관 앞에 설치된 평화비 철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식민지배와 관련한 한일과거사 문제는 과연 법적으로 마무리된 것일까요?
저는 지난 12월 2일(금) 조선여자근로정신대 할머니 문제에 대하여 미쓰비시중공업측과 11차 협상을 하기위해 도쿄를 방문했습니다. 미쓰비시측과의 협상을 마친 다음 12월 5일(월)에는 대한변협 일제피해자인권특별위원회 소속 변호사님들, 일변련 소속 변호사님들과 공동으로 심포지엄을 가졌습니다. 당일 오후에는 요코미치 중의원 의장, 일본 민주당 ‘전후보상의 미래를 논하는 의원연맹’, 민주당 간사장실 등을 예방하여 일본 의회가 군 위안부 문제를 포함한 한일과거사 문제 해결 및 동북아시아 평화협력네트워크 구축에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해 줄 것을 주문하였습니다.
저희가 일본 의회 지도자들을 예방한 시기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1천여차 집회(12월 14일)를 10여일 앞둔 때였습니다. 일본 의회 지도자들은 한결같이 세 가지 문제를 언급하였습니다. 하나는 ‘수요집회가 1천회를 맞이하고 있는데 20년이 다 되도록 위안부 문제에 진전이 없는 현실은 문제가 있다, 1천회가 되기 전에 일본 측의 성의 있는 의사표시가 필요하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일본 국민들이나 사회지도자들 사이에 일본 식민지배 문제에 대한 역사인식에 큰 편차가 있다, 일본 민주당 안에도 젊은 의원들 사이에는 이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분들이 많아 당론 결정에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최근 한국 헌법재판소가 일본정부에 대하여 한국정부가 무대응하고 있는 행위를 위헌이라고 판결한 것을 보고 놀랐다. 헌법재판소 결정의 영향으로 인해서, 한일정부간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다시 논의하지 않으면 안되는 전기가 마련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헌법재판소는 지난 8월 30일, 군 위안부할머니들과 원폭피해자들이 제기한 헌법소원 사건에서 재판관 6대 3의 의견으로 “한일청구권협정 제3조는 ‘본 협정의 해석 및 실시에 관한 양 체약국 간의 분쟁은 우선 외교상의 경로를 통하여 해결하고, 외교상 경로를 통해 해결할 수 없는 분쟁은 중재위원회를 구성하여 그에 회부한다’라고 규정하고 있음에 비추어 볼 때, 대한민국 정부가 위 협정 제3조에 따라 분쟁해결 절차로 나아갈 의무는 헌법에서 유래하는 작위의무로서 이러한 작위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재량이 있다고 할 수 없음에도 현재까지 분쟁해결절차를 이행할 작위의무를 이행하였다고 볼 수 없으므로 대한민국 정부의 이러한 부작위는 헌법에 위반된 것이다”라고 판단하였습니다.
이 결정에서 헌법재판소는 “한일청구권협정 제2조 제1항(양 체약국 및 그 국민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1951년 9월 8일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서명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 제4조(a)에 규정된 것을 포함하여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의 해석과 관련하여, 일본정부 및 사법부의 입장은 원폭피해자를 포함한 우리 국민의 일본국에 대한 배상청구권은 모두 포괄적으로 위 청구권협정에 포함되었고 위 청구권협정의 체결 및 그 이행으로 포기되었거나 배상이 종료되었다는 것이며, 반면 우리 정부는 2005. 8. 26. ‘민관공동위원회’의 결정을 통해, 원폭피해자 문제 등은 위 청구권협정에 의하여 해결된 것으로 볼 수 없으므로 일본 정부는 법적 책임이 인정된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라고 보고 있습니다. 헌법재판소는 이와 같이 양 정부 사이에 청구권협정 해석을 둘러싼 법적 분쟁이 있음을 전제로 대한민국 정부의 헌법적 작위의무를 도출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방문 중 열렸던 심포지엄에서 ‘일본정부의 한일청구권협정 해석의 변천’이라는 주제의 발표를 한 야마모토 세이타 변호사는, 일본정부 기록 등을 근거로 제시하면서 일본 정부의 입장은 모순이 있음을 지적했다. 즉, 히로시마 원폭피해자와 시베리아 억류피해자들이 ‘피해자 개인들이 미국이나 소련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손해배상청구권이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과 일소공동선언(그 내용은 한일청구권협정 제2조와 동일 또는 유사하다)에 의해 포기되었다’면서도
일본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소송에서는 “일본 정부가 두 조약에 의해 포기한 것은 일본정부가 일본 국민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외교보호권일 뿐, 피해자 개인이 상대국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배상청구권을 소멸시킨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야마모토 변호사의 결론은 한일청구권협정에 의해 포기된 것은 소송법상의 청구권 뿐이고 실체적인 권리는 존속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일제피해자들이 일본정부나 가해기업을 상대로 소송외적 절차를 통해 배상을 요구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뿐만 아니라 법적으로도 정당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번 방일 심포지엄을 통해 한일청구권협정의 의미에 대해서 설득력있는 새로운 해석론을 접하게 되어 흥미로웠습니다. 그러나, 보다 본질적으로는, 협정 문구의 해석 문제를 떠나, ‘동아시아 평화체제의 구축’ 내지 ‘평화국가 또는 인권선진국가로의 일본의 재탄생’을 위해 일본의 식민지배 사죄와 배상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역사를 바로세우기 위해서 노력하는 많은 일본의 법조인들과 정치인들을 만날 수 있어 희망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