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학회에서 편찬하고 하성 이선근 박사가 저술한 <한국사>(최근세 편, 을유문화사, 1961년) 575면에 나온 태극기는 너무나 감동적이었다. 대한민국의 심벌이라고 이야기하며 태극기의 제정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놓았다. 실제 한국사 책 속에서 태극기에 대한 기술을 처음으로 발견한 셈이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기존 정설을 중심으로 정리되어 있는데 어딘가 부족함이 있는 서술이다. 1882년 박영효가 일본을 가면서 메이지마루에서 태극사괘도를 그려서 만들었고 고베항의 숙소에서 깃발을 게양하였다고 한다. 이 자료는 박영효의 <사화기략(使和記略)>이라는 친필 필사본 일기에 근거하고 있다. 이선근 박사는 이 필사본을 정사하여 보관한 바 있는데 국사편찬위원회에서 1958년에 활자화 하여 <수신사기록>(한국사자료총서 9)이라는 책에 부분적으로 들어갔다.
최근 발견한 미국 해군성에서 만든 <만국의 깃발들>이라는 책에는 중국의 깃발과 나란히 태극기가 실려있는데 박영효의 깃발보다 2개월 정도 앞서서 인쇄 출판된 책인 셈이다.그리고 1883년에는 고종이 태극기를 공식적으로 국기로 인정하였다고 한다.
한편 문일평의 <호암전집>제3권(조선일보출판국, 1939년)에는 106면-107면에 <태극국기의 유래>라는 글이 실려 있다.
"공주관찰사 이종원(李淙遠)이 제출한 태극팔괘의 도식에 의하여 비로소 태극으로써 국기를 결정하였다.그러나 태극국기를 사용하게 된 것은 임오난후 박영효가 일본에 특파대사로 갈 때 맨처음으로 내걸게 되었다. 그 후 박정양이 미국공사로 갈 때도 미국함선에서 이 태극국기를 내걸었다. 그러나 국내에서 사용하게 된 것은 을미이후의 일이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중국 청나라 때 태극팔괘도를 목판에다 새겨서 만든 것이 한국에도 전하고 있다. 연도는 150년 전후인데 나무에다 태극무늬를 하고 바깥 테두리는 금칠을 하였고 태극에는 검은 점이 두 개 찍혀있으며, 팔괘를 직렬식으로 배열하고 있는데 두 개의 판목에 각각 4괘도를 그렸다. 혹시 사당이나 관공서에 설치한 것이 아닌가 한다. 판목의 두께는 3센티미터 정도이고길이는 1미터 정도 폭은 30센티미터 정도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전매청이 나오기 이전에 외국의 담배를 수입하여 팔면서 선물로 준 태극기를 흔들리는 모양으로 제작하여 새긴 길이 25센티 폭 20센티 정도의 기념패도 있다. 한말 때 작품이라고 한다.(2010년 10월 16일 확인)
한국청소년연맹에서 간행한 <나의 사랑 태극기 이야기>라는 만화로 그린 30쪽 짜리 책자에는 운양호가 강화도를 지날 때 일본 국기를 배 위에 게양했는데도 불구하고 조선이 포격을 하여 일본의 항의가 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국기의 필요성을 느꼈다고 한다.
성균관대 유학대학 유승국 박사(동양철학)의 저서인 <한국사상의 연원과 역사적 전망>(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에는 태극기의 유래를 잘 정리하고 있다. 특히 양천허가 5세조인 허재 석관 뚜껑에 새겨진 태극무늬를 실제로 사진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태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은 <서울대 이태진 교수의 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태학사, 2005. 9. 30) 80-81면에서 태극기에 대한 언급을 하면서 1882년 4월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의 체결을 앞두고 조약체결 행사에 사용할 국기를 처음 제정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본인이 저술한 <고종시대의 재조명>(태학사)이라는 저서에서 국기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하였다. 가운데 태극이 청홍으로 나뉘어져 있는 상태는 만천명월주인옹자서의 민국이념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되며, 태극이 음양으로 나뉘어져 청홍색으로 되어 있고 태극이 분화되어 1600만개의 괘로 나뉜다는 주역의 분화론의 첫부분을 상징적으로 표시한 것이다.한국의 태극기는 곧 태극이 음양으로 나누어진 상태를표시한 것인데, 태극을 이렇게 갈라놓은 상태로 표시한 것은 한국의 태극기 뿐이다.중국의 경우는 태극이 음양으로 나뉘면 그 음과 양 속에 태극이 그대로 남아 있다.중국 쪽의 태극분화도를 보면 어느 것이나 음양으로 분화된 다음에 그 속에 태극이 그대로 남아 있는상태로 그려져 있다.무슨 뜻이냐 하면 한국의 태극기는 군주가 쪼개져서 백성이 되었다는 군주분신론(君主分身論)을 반영하는 것이고, 중국 쪽은 군주의 절대성을 견지해 결코 나누어질 수 없는 것이란 인식이 그대로 유지된다.
송명호(서울시 공무원) 님이 일본 동경에 가서 일본의 신문 <시사신보>에 남아 있는 수신사 구성원의 인터뷰를 발견하여 고종이 창안한 태극사괘도를 국기로 제정했다고 보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