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부석(望夫石) 설화
신라 초기 내물왕이 즉위한지 36년, 경인(庚寅, 390 A.D)에 일본이 사신을 보내어 말하기를, "앞으로 침략하지 않는다는 표징으로 왕자 한 사람을 보내어 달라"고 하므로, 셋째 아들 미해(美海)를 보냈더니 돌려보내지 않았다.
또한, 눌지왕 때에는 고구려가 화친한다는 이름 아래 왕자 보해(寶海)를 보내 달라고 하므로 부득이 하여 눈물을 머금고 보냈더니 역시 돌려보내지 않았다.
이에 눌지왕은 아우 둘을 남의 나라에 두고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이를 안 박제상은 고구려로 가서 보해를 구해냈다. 다시 일본으로 왕의 동생 미사흔(未斯欣)을 데리러 간 박제상(朴堤上)이 왕자를 구출했지만 자신은 돌아오지 못했다.
왜왕에게 환심을 산 후 미해를 신라로 귀국시킨 박제상은 결국 붙잡혀 고문을 당하게 되었다. 이 때 왜왕이 박제상에게 미해를 빼돌린 이유를 묻자 제상은 자신은 신라의 신하지 왜왕의 신하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자 왜왕은 왜국의 신하라 한다면 상을 주겠다고 하자, 제상은 차라리 신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벼슬과 녹은 받지 않겠다고 거절한다.
제상은 왜왕에게 다리 가죽을 벗기고 갈대 위를 걷는 형벌, 뜨거운 쇠 위에 세워놓은 형벌 등을 받고, 결국은 불태워 죽임을 당하였다.
그의 아내가 자녀를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가 일본을 바라보며 박제상을 기다리다가 돌이 되었다. 뒤에 사람들은 그녀를 치술령의 신모(神母)로 모시고, 이를 소재로 지은 노래가 '치술령곡'이다.
망부석(望夫石) 설화
절개 굳은 아내가 외지에 나간 남편을 고개나 산마루에서 기다리다가 만나지 못하고 죽어 돌이 되었다는 설화이다.
망부석의 유래 설화로, 아내가 죽어서 돌이 된 것이 아니라 자연석인 돌에서 기다려 그 돌에 망부석이라는 이름이 붙은 경우의 설화도 이에 해당된다.
대표적인 설화는 신라시대 박제상(朴堤上)의 아내가 치술령에서 죽어 망부석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눌지왕 때 고구려에 볼모로 잡혀간 왕제(王弟)를 구해 온 박제상은 집에도 들르지 않고 바로 일본에 건너가 또 다른 왕제를 구해 보낸 뒤 일본에서 신라의 신하임을 고집하다 죽는다.
그의 아내는 일본에 간 남편을 기다리다 죽어서 망부석이 되고, 그 곳 주민은 부인을 칭송한다.
박제상의 부인은 죽어서 치(鵄)라는 새가 되고 같이 기다리다 죽은 세 딸은 술(述)이라는 새가 되었다는 전설도 있고, 이들 모녀가 치술령신모(鵄述嶺神母)가 되었고 이에 주민들이 사당을 지어 모셨다는 기록도 있다.
엄밀히 말해서 사람이 돌로 변한다는 화석(化石) 모티프는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돌'이라는 단어에는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찬양받을 만한 기념물이라는 뜻이 있다.
이러한 돌로 후에 인공으로 기념비를 세우거나 죽은 장소에 있던 자연석을 기념하는 대상물로 삼게 되면, 그 곳 주민은 망부석(기념비나 자연석)을 대할 때 훌륭한 부인을 대할 때와 같은 경건한 존경심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줄이면 바로 사람이 죽어 망부석이 되었다는 화석(化石)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부인이 죽어 새가 되었다는 '치술령 망부석 전설'에서의 새의 의미는 일본에 건너간 뒤 소식이 없는 남편을 기다리는 심정이며, 새가 되어 훨훨 날아 바다를 건너가고 싶어하는, 살아서의 공간을 극복하려는 의지이다.
부부의 만남이 산 몸으로는 불가능하므로 죽은 뒤에 새가 되어 소원을 푸는 것이니, '이 몸이 새가 된다면' 하는 살았을 적의 소원이 죽어서 실현이 된다는 죽음을 초월한 부부의 사랑을 뜻한다. 마찬가지로 새가 되어서라도 아버지를 만나고 싶은 소원 때문에 딸도 새가 된 것이다.
경상북도 월성군 외동면의 치술령 아래에 이들 새가 살았다는 은을암(隱乙庵)과 위패를 모신 당(堂)이 있다. 오랜 기념정신은 망부석으로, 죽어서라도 만나겠다는 의지는 새로, 주민의 부인에 대한 존경심과 신앙심은 산신으로 나타난 것이다.
전라북도 정읍시 정읍사공원에 있는 망부석은 아내가 장사를 나간 남편을 기다리던 곳을 기념한 돌이며 여기에 '정읍사(井邑詞)' 노래와 이 노래를 이야기로 꾸민 전설이 있는데, 이것도 오랜 기념정신을 뜻하는 것이다.
경상북도 영일군의 '망부산(望夫山) 솔개재전설'은 신라 말 경애왕 때 소정승(蘇政丞)이 일본에 사신으로 가 돌아오지 않자 부인이 산에 올라가 기다리다 지쳐 죽어 산 이름이 망부산이 되었으며, 부인을 기념하는 뜻에서 사당인 망부사(望夫祠)를 짓고 같이 기다리던 개와 말의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는 내용이다. 즉, '치술령 망부석 전설'의 변형이라 할 수 있다.
다만 망부석이 망부산으로 규모가 커진 것이 다르다. 고기를 잡으러 갔거나 혹은 중국에 사신으로 간 남편을 기다리다가 아내가 떨어져 죽었다는 서해안의 '낙화암전설(落花巖傳說)'도 이 '망부석설화'의 변형으로 보인다.
역사적인 사건을 한 여인의 정절을 통해 고통 속에 소화하고, 후세 주민이 이를 기린다는 내용의 '망부석설화'는 한국인의 의식을 단적으로 제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