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1. 형조판서 윤급 초상.
사도세자의 비행을 고변해 세자를 죽이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도세자(1735~1762)는 과연 '정치적 희생양'인가. 언젠가부터 우리는 사도세자가 노론의 음모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런 인식은 사도세자가 남인, 소론, 소북 세력과 가까이 지내면서 집권세력인 노론의 견제를 받았다는 생각을 전제로 한다.
노론은 자신들을 멀리하는 세자에게 불안감을 느낀 나머지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 씨, 영조가 총애하던 숙의 문 씨 등과 공모해 세자의 비행을 자주 왕에게 고해 바쳤다. 영조가 세자를 불러 심하게 꾸짖는 일이 잦아지고 아들은 그런 아버지에게 두려움을 느꼈다.
세자는 자신을 아끼던 정성왕후(영조비)와 인원왕후(숙종의 계비)가 잇달아 세상을 떠나고 조정에서 강경 노론이 득세하자 극심한 신경증과 우울증 등 정신병에 시달렸다. 결국 영조는 그런 아들을 죽이는 결정을 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사도세자의 부인이었던 혜경궁 홍 씨(1735~1815)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 혜경궁 홍씨는 영조 11년 태어나 손자인 순조 15년 81세로 사망했다. 대표적 노론 명문가인 풍산 홍 씨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홍봉한이다.
10세 때 동갑인 사도세자와 가례를 올렸으며 사도세자와의 사이에서 정조를 포함해 2남2녀를 뒀다. 남편이 뒤주에 죽을 때는 28세였다. 사도세자 사후 영조의 배려로 궁에서 살았으며 아들 정조가 즉위한 뒤 혜경궁 칭호를 받았다.
<한중록>은 혜경궁이 61세부터 72세까지 쓴 '나의 일생' '내 남편 사도세자' '친청을 위한 변명' 등 세 차례에 걸친 회고가 합쳐진 책이다. 글은 친정 식구 또는 손자인 순조에게 보일 목적으로 집필됐다.
책은 혜경궁 자신이 겪은 파란만장한 삶을 때로는 담담히, 때로는 격정적으로 뒤돌아보고 비판하고 분석한다. 영조와 남편 사도세자 등 여러 인물들의 생각과 행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으며 실록에서 언급되지 않는 사실도 다수 담고있어 가치가 높다. '인현왕후전' '계축일기'와 함께 궁중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혜경궁 홍 씨는 <한중록>에서 "후대의 사람들이 이러쿵 저러쿵하는데 누가 그 사건을 나만큼 잘 알까"라면서 "사도세자가 병환으로 천성을 잃어 스스로 하는 일을 몰랐다.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한 일에 어찌 터럭만 한 과실조차 있다 할 것인가"라고 적었다.
혜경궁 홍 씨의 아들 정조가 죽고 손자 순조가 즉위한 후 사도세자 죽음을 둘러싼 논란이 불거졌다. 여러 견해 중 하나는 사도세자가 원래 병환이 없었는데도 영조가 헐뜯는 말을 믿고 과한 행동을 했다는 것이다. 혜경궁은 그러나 <한중록>을 통해 이 사건이 초래된 근본 원인은 사도세자에게 있었음을 분명히 하고있다.
사진2. 사도세자가 그린 견도.
어미를 따르는 강아지를 통해 사도세자가 아버지의 정을 그리워하는 심정을 표현했다고 해석되기도 한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영조 38년(1762) 임오화변(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사건)의 단초가 된 사도세자의 정신병은 아들을 '호학군주'로 키우려던 영조의 과욕이 불러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혜경궁은 다른 요인도 제시한다.
세자는 어릴 적부터 공부보다는 유희를 즐기고 활쏘기와 칼 쓰기, 기예에 집중했다. 그림 그리기로 날을 보냈으며 딱딱한 경전을 멀리하고 기도나 주문서, 잡서를 좋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도세자는 <옥추경(玉樞經·귀신을 부리는 주문)>을 읽기 시작하면서 정신이상 증세가 생기기 시작한다.
밤마다 옥추경을 읽던 세자는 "뇌성보화천존(雷聲普化天尊·천둥을 주관하는 신)이 보인다. 무서워, 무서워!"라면서 덜덜 떨었다고 혜경궁 홍씨는 전한다. 그때부터 세자는 천둥이 칠 때마다 귀를 막고 엎드려 두려워했다. 구급약 옥추단(玉樞丹)도 <옥추경>과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겁내서 받지 못했다.
혜경궁 홍 씨는 "영조 28년(1752) 겨울에 그 증상이 나셔서 이듬해 놀라 가슴이 두근거리는 증세를 자주 보이셨다. 영조 30년(1754) 이후 점점 고질병이 되었으니 그저 <옥추경>이 원수"라고 원망했다.
세자의 병환은 스펀지에 물이 번져가듯 깊어졌다. 영조에게 문안인사도 건너뛰고 수업을 못하는 날도 많아졌다. 영조의 질책은 더 잦아지고 아버지에 대한 사도세자의 두려움은 공포 수준이 됐다. 사실 영조도 지금의 눈으로 보면 편집증 환자였다.
사람을 한 번 싫어하면 집요하게 미워했다. 영조 31년(1755) 나주에서 소론 일파가 조정을 원망하는 흉서를 써붙이자 영조가 친국한 후 일당을 처형했다. 처참한 친국장과 사형장에 매번 세자를 불러냈다.
혜경궁 홍 씨는 "길한 일에는 세자를 참여치 못하도록 하고 상서롭지 못한 일에만 자리하게 했다"고 했다. 백성들이 얼어죽거나 굶주려죽거나 가뭄 같은 천재지변이 있어도 세자가 부덕해서 그렇다고 질책했다.
세자는 '의대증(衣帶症)'이라는 희귀병도 앓았다. 옷을 갈아입기를 고통스러워하는 강박증이다. 혜경궁 홍 씨는 "옷을 한 번 입으려면 스물에서 서른 벌의 옷을 준비해야 한다"며 "입지 못한 옷은 귀신을 위해 불태웠다"고 했다.
1757년(영조 33) 사도세자가 마음을 의지했던 정성왕후, 인원왕후가 같은 해 승하하자 세자의 증상은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그해 6월 화증이 더하여 사람을 살해하기 시작했다. 세자는 사람을 여럿 죽이고야 마음을 풀렸다.
혜경궁 홍씨는 영조 36년(1760)이후 내관, 나인 중에 다치고 죽은 이가 많으니 다 기억하지 못할 정도라고 했다. 내수사 담당관 서경달은 내수사 물건을 늦게 가져왔다고, 점치는 맹인은 점을 치다가 말을 잘못했다고 죽였다. 하루에도 죽은 사람이 여럿일 때도 있었다고 혜경궁은 말한다.
사도세자는 자신의 후궁인 귀인 박 씨도 죽였다. 영조 36년(1761) 정월, 궁 밖으로 나가려고 옷을 갈아 입다가 의대증이 재발했다. 이때 옷시중을 귀인 박 씨가 들고 있었다.
영조 33년(1757) 9월 인원왕후 침방 나인 빙애를 데려다가 방을 꾸며 살게 하는데 그녀가 귀인 박 씨다. 그녀는 은전군과 청근현주를 낳았다. 세자는 귀인 박 씨를 마구 때린 뒤 버려둔채 그냥 궁 밖으로 나가버렸다. 귀인 박 씨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사람을 죽이지 못할 때는 짐승이라도 죽여 화를 삭였다. 혜경궁 홍 씨는 "하루는 전하께서 어디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세자를 직접 찾아 한 일을 바로 아뢰라고 다그쳤다"고 했다.
세자는 "심화가 나면 견디지 못하여 사람을 죽이거나 닭 같은 짐승이라도 죽여야 마음이 낫더이다"라며 "상감께서 (저를) 사랑하지 않으시니 서럽고, 꾸중하시기에 무서워 화가 되어 그러하오이다"라고 실토했다.
사진3. 화성능행도병풍.
1795년(정조 19)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 씨의 회갑을 기념해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이 있는 경기도 화성에서 개최한 행사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능행의 규모를 볼 때 정조가 아버지 추숭사업에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짐작케 한다. 국립고공박물관 소장.
사도세자가 죽인 사람은 도대체 몇 명이나 될까. 조선 후기의 문신 박하원이 '임오화변'을 기록한 <대천록(待闡錄)>에는 사도세자가 죽인 사람의 숫자가 나오는데, 놀랍게도 그 숫자가 백 명이 넘는다.
영조 38년(1762) 5월 22일, 마침내 사도세자의 운명을 결정짓는 사건이 발생한다. 형조판서 윤급의 청지기 나경언이 그간 세자의 비행을 고변한 것이다. 폭로가 있은 후 궁지에 몰린 세자는 주윗사람들에게 "칼을 차고 와서 부왕을 죽이고 싶다"는 극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자 생모 영빈 이 씨가 나서 영조에게 고했다.
"어미로서 차마 드릴 말씀은 아니지만 동궁의 병이 점점 깊어지니 상감의 옥체와 세손을 보전하고 종사를 편안히 하기 위하여 대처분을 내리소서."
세자는 영조 38년(1762) 윤 5월 13일, 아버지의 명령으로 뒤주에 갇힌 지 7일 만에 사망한다. 혜경궁 홍 씨는
"오후 3시쯤 폭우가 내리고 천둥 번개가 쳤다. 세자가 천둥을 두려워하시니 필시 이 무렵 돌아가셨을 것"이라고 했다.
사도세자는 비록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비명횡사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아들인 정조 이후 조선의 모든 왕들이 그의 직계 후손에서 나왔다. 순조와 헌종이 각각 손자, 고손자, 철종(사도세자의 아들 은언군의 손자)이 증손자였고 또한 고종이 법통적 고손자(고종의 조부 남연군이 사도세자 아들인 은신군의 양자), 순종이 법통적 5대손이었다.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신문 기자 :<배한철의 역사의 더께> - 내시 머리 들고 다니며 자랑했던 사도세자 [한중록] / 매일경제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