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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112. [역경의 열매] 한연희 (1-14) 9명 입양한 나와 우리 가족이 특별하다구요?
나는 십수년째 인터넷에 일기를 써오고 있다. 가족의 일상을 담은 글을 다듬지 않고 거침없이 쓰다 보면 때론 발가벗고 무대에 선 것 같아 민망하다.
그럼에도 내가 꾸준히 인터넷에 일기를 쓰는 이유는 나를 비롯한 우리 가족 모두가 보편적인 가정의 범주에 속한다는 확신을 갖기 때문이다.
살면서 겪는 갈등, 부조화, 번민, 안타까움, 기쁨, 즐거움, 감격 등은 일상 가운데 자연스레 갖게 되는 감정이다. 입양가정이라 특별히 겪는 감정은 아니다. 입양가정이라서 남들보다 일상이 더 특별할 이유는 없다.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로 감사하며 평범한 일상을 살아갈 뿐이다.
간혹 사람들이 9명을 입양한 나와 우리 가족을 특별하다고 말하곤 한다. 그럴 땐 그저 고개를 끄덕인다. 예전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뭐가 특별하지?’라며 속으로 반문했다. 질문자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어 오히려 웃음이 나던 때도 있었다.
내가 항상 가고 싶었던 길은 ‘분주함이 없는 편안하고 조용한 삶’이었다. 아이와 마주보고 눈을 맞추며 까르르 웃는 순간, 경치 좋은 찻집에서 좋은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며 가을단풍이 화려한 자연 속에 푹 잠겨 사색을 하는 순간…. 정말 이런 순간만큼은 시간을 멈추고 그대로 머물고 싶을 정도다.
하지만 막아서는 사람 한 명 없는데 나는 늘 시간에 쫓기고 일에 몰려 녹초가 돼 살았다. 누가 나로 하여금 이 모든 것을 못하게 하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소풍을 온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동안 나는 하고 싶은 일 대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했다. 아이를 입양하고 기른 것도, 입양 홍보 일을 하게 된 것도 모두 하나님의 뜻에 순종키 위해 한 일이었다.
쉬지 않고 열심히 달리던 어느 날, 나는 뇌경색이란 진단을 받았다. 고혈압과 당뇨병 증세도 연이어 나타났다. 의사는 약을 먹어도 더 이상 나아지지 않으니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자연 속에서 휴양하라고 권했다. 나는 머지않아 다가올 그날, 천국에서만 쉴 참이었다. 하나님과 함께 끝나지 않는 소풍을 천국에서 영원히 즐기고 싶었다. 하지만 2013년 3월 하나님께서는 뜻하지 않은 쉼을 선물하셨다. 산이 병풍처럼 둘러진 경기도 이천의 아주 특별한 농가에서 지친 심신을 쉬도록 허락해주신 것이다.
가정이 필요한 아이들을 위해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14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한 장로님을 사용해 이 집을 꾸미게 하셨다. 시한부 선고를 받았던 장로님께서는 요양 차 허물어져가는 이 집을 구매해 기도하면서 자연을 벗 삼아 건강을 회복했다고 한다. 이런 사연을 가진 장로님이 내게 이 집을 파신 것이다.
신실하신 하나님, 나보다 내 필요를 더 잘 아시는 분 앞에 무릎을 꿇었다. 며칠 기도하면서 나는 우리 집을 ‘생명 숲 하우스’로 이름 지었다. 이 집에서 생명이 흘러넘쳐 거대한 숲을 이루게 되라는 의미에서였다.
성인이 된 아들과 대학생을 제외한 고등학생, 중학생, 초등학생 자녀 다섯 명이 모두 이천으로 내려왔다. 잠시만이라도 엄마와 하루 종일 함께 지내고 싶다는 아이들은 지금 이 집에서 소풍 온 듯 행복하게 지낸다.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생명이 가득 담긴 이 집에서 나는 아이들과 땅을 일구며 지내고 있다. 각종 채소로 소박한 밥상을 차리고 하나님께 기도한다. “하나님, 소풍 같은 일상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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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1957년 11월 1일 충남 부여 출생 △서울 신광여자고등학교 졸업 △서울사이버대학교 사회복지학 재학 △성산생명윤리연구소 생명윤리상담사과정 강사 △한국입양홍보회 전 회장
***[역경의 열매] 한연희 (2) ‘10자녀 키우는 동업자’ 부부, 13년만에 앙코르 웨딩
남편은 원래 정갈한 집에서 여유롭고 조용한 시간을 함께 보낼 아내를 원했다. 그는 내가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매 끼니마다 정성어린 음식을 만들어주는 엄마의 역할을 해 주길 바랐다.
크고 작은 사고를 수시로 치는 아이 10명을 기르고, 공개입양운동을 하느라 분주한 내게 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도 남편의 요구가 부모로서 당연한 소박한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내게 이런 것들을 요구하면 할수록 그에겐 미안함보다 섭섭함이 쌓였다. ‘누군 몰라서 못하나. 내가 얼마나 피곤하고 매 순간 얼마나 열심히 사는지 다 알고 있지 않은가’라는 식으로 나는 줄곧 당연히 그가 날 이해하고 배려해줘야 한다고 여겼다.
평소 나는 남편에게 비굴할 정도로 복종하며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9명의 아이를 입양할 때마다 남편의 허락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입양 이외의 일로 그에게 내 의견을 제대로 펼쳐본 적이 없다.
그러나 남편을 위해 내 목숨을 내어줄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아니 그럴 필요를 전혀 못 느꼈다. 그 반대면 모를까. 무늬만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처럼 보였을 뿐, 내 사랑은 내용면에서 참으로 불량했다. 그럼에도 남편은 나를 위해 눈을 질끈 감아줬다. 나는 보통 아내들처럼 퇴근 후 그를 집에서 반겨주지 못했다. 입양 홍보를 위해 우리 부부와 자녀들의 삶이 만천하에 알려지게 될 때도 그는 날 이해해줬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자녀수가 늘면서 어느새 우리는 부부가 아니라 ‘애 키우는 동업자’가 돼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의 대화는 늘 아이들 얘기뿐이었다.
애 키우는 동업자라니! 가슴이 시려 눈물이 났다. 우리는 애 키우는 동업자를 청산하고 부부관계를 회복코자 결혼한 지 13년 만인 2004년 5월에 앙코르 웨딩을 했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를 위해 목숨을 내어준다는 의미다. 목숨을 내어주는 행위는 수많은 불편을 감수한다는 얘기도 된다. 여기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받았던 수치와 모욕, 고통과 죽음까지도 감수해야 한다는 뜻도 분명 담겨 있을 것이다.
몇 년 전 나는 남편에게 부끄러운 고백을 했다.
“결혼 서약 내용을 이제야 지킬게요. 목숨을 버리기까지 우릴 사랑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나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내 남편과 자식을 위해 목숨을 버리겠습니다.”
한 살 연상인 남편은 자잘한 일로 내 속을 뒤집어 놓을 때가 많았다. 내성적이며 민감한 성격인 그는 화가 날 때면 말을 하지 않았다. 입양 허락을 받을 때 남편은 종종 말을 전혀 하지 않곤 했다. 집안에 냉기가 돈다. 어려운 아이를 볼 때마다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는 나는 막막하고 속상한 마음에 남편 앞에서 울음을 터트렸다.
그러면 남편의 태도가 평소와 사뭇 달라진다. 자상한 아버지처럼 자신의 가슴을 넓게 펴고 황소처럼 울어대는 나를 달래준다.
“걱정하지 마. 괜찮아. 오늘 걱정은 오늘만 생각하자.”
말수가 적은 남편이 같은 말을 반복하며 내 등을 토닥여줄 땐 그 어떤 말보다 큰 위로가 된다. 남편은 집안 분위기가 무겁다 느끼면 기타를 치며 내가 좋아하는 찬송가를 불러준다. 툭 치면 울 것 같은 내 앞에서 주름이 자글자글한 남편이 윙크를 하면 눈물 대신 웃음이 난다. 그러고 보면 참 멋있는 남편이다. 이웃집 청년이던 그는 나와 결혼하고 싶은 마음에 1명의 아이를 입양하고 교회를 다니겠느냐는 내 말에 선뜻 그러겠다고 답했다.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남편은 이 약속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아이를 자녀로 품는 결단을 했다. 모든 일을 사랑으로 품어온 남편은 하나님이 나를 위해 준비해주신 배우자임이 확실하다.
***[역경의 열매] 한연희 (3) 형·아우 아홉을 가슴으로 받아들인 큰아들 명곤
2005년 4월, 우리집 장남 명곤이가 침례를 받았다. 나이에 비해 마음고생을 많이 하고 자란 아들이라 그런지 더 감격이 컸다. 평소 아들에게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고 싶었는데 이제 그 소원을 이룬 셈이다.
동생이 생기기 전까지 평탄한 삶을 살던 아들이었다. 침례를 받기까지 24년 동안 명곤이는 참 힘든 인생을 살았다. 시부모님과 우리 부부에게 소중한 아들인 명곤이는 어린 나이에 겪기 힘든 것들을 너무 많이 경험한 것이다. 아이가 느꼈을 삶의 무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주 미안하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이 위로가 될 수 있을까. 그만큼 명곤이에게 미안한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명곤이는 1981년 팔삭둥이로 태어나 면역력이 약했다. 많은 병에 노출된 상태라 걸핏하면 응급실에 가야 했다. 특히 천식이 심해 야외활동뿐 아니라 식사도 마음껏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오직 건강하게만 자라 달라’는 기도를 하며 아이를 키웠다.
명곤이는 9살이던 90년에 갑자기 세 살 많은 형과 세 살 아래 동생이 생겼다. 형은 내 친정조카로 제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시는 걸 어린 나이에 목격해 정신적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아이였고, 동생은 보육원에서 자란 아이였다. 사랑을 받으며 혼자 자라던 명곤이는 졸지에 형과 동생의 역할을 한꺼번에 해야 했다. 처음 본 사람을 가족으로 맞아야 하는 아이의 고통은 내 예상보다 몇 배는 더 컸다.
이를 알게 된 건 친정조카가 젊은 나이에 교통사고로 죽었을 때였다. 명곤이는 몸부림치며 괴로워했다. 평소 자기를 괴롭혀 내심 미워했는데 이 때문에 죽은 거라 생각해 죄책감에 시달린 것이다. 아들은 엄마인 내가 생각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고 상처를 받아온 것 같았다. 차마 아이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광야 같은 거친 시간을 보내고 마침내 보혈을 지나게 된 우리 아들. 세례식 때 명곤이는 눈물이 차올라 말을 잇지 못했다. 내가 아들의 아픔과 고뇌를 왜 모르겠는가. 죄를 회개하고 주님을 주인으로 받아들인다는 눈물어린 고백을 할 때 나를 비롯한 많은 교인들이 그 자리에서 함께 울었다.
침례 과정에서 물속에 담겼던 머리가 다시 나올 때 얼굴에 흐르던 물기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모른다. 앞으로 우리 아들은 악은 그 어떤 모양이라도 취하지 않고 순결한 삶을 살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소망한다.
명곤이가 군에 입대하던 날에도 우리 부부는 어린 자식을 한 명씩 등에 업고 의정부 훈련소에 갔다. 어린 동생 때문에 안아주지도 못한 채 훈련소로 보냈다. 거대한 무리 속으로 사라지는 첫째아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너무도 미안해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십수년째 계속되는 어린 동생들의 소란 때문에 아기 울음소리만 들어도 소름이 돋는다던 아들이었다. 동생들에게 질려 절대 결혼을 안 하겠다던 아들은 28세에 동갑내기 신부와 결혼해 딸 둘을 낳았다. 사회복지사가 된 명곤이는 현재 형편이 어려운 어르신들을 돌보며 씩씩하게 살고 있다.
“명곤아, 고맙다. 내가 네게 무슨 말을 더 하겠니. 내 목숨 다할 때까지 널 사랑한다. 내 태에서 나오기 전부터 너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 주님을 주인으로 맞이한 것은 네 인생 최고의 기적이야. 앞으로 너의 삶이 주의 말씀과 능력으로 정결케 되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역경의 열매] 한연희 (4) 보육원 7년 봉사… 40여 원생들의 영원한 멘토로
나는 1987년부터 7년 동안 매주 경기도 시흥시 송암보육원을 찾아 그곳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체험학습의 하나로 이들과 한 줄로 서서 콩을 심기도 했고 이불에 누워 오랫동안 이야기도 나눴다. 아이들에게 줄 부침개를 부치려고 밀가루 포대를 이로 뜯다가 앞니가 빠져서 난감했던 일도 있었다.
남편 역시 고아원 봉사에 열심이었다. 나중엔 회사 직원들까지 함께 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아이들 학교에서 운동회가 열리면 나는 학부모가 돼 줬다. 응원 소리에 힘입어 학부모 대표로 힘껏 달리기를 하느라 아픈 허벅지 때문에 일주일간 고생하곤 했다.
이들과 정이 깊어갈수록 내 머릿속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평소에도 특별히 부족한 게 없다고 느꼈지만 보육원 아이들과 비교하면 거추장스러울 만큼 가진 게 많았다. 난 그들이 가지지 못한 부모, 형제, 친구, 남편, 그리고 편히 쉴 수 있는 집을 가지고 있었다. 아이들과 실컷 웃으며 놀다가 돌아올 때면 너무 미안해서 뒷덜미가 허허로웠다.
결국 나는 보육원에서 가장 어리고 덩치가 작은 남자아이를 입양했다. 90년도의 일이다. 입양 후에도 우리는 보육원을 계속 찾았다. 총무는 다른 보육원생이 자신들도 입양될 수 있다는 기대를 너무 많이 하고 있다며 우리에게 방문을 자제해 달라고 부탁했다. 결국 우리는 94년 그간 정을 쌓았던 보육원에 발길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보육원생들은 그러나 큰일이 생길 때마다 내게 연락을 했기에 인연은 계속됐다. 그러면서 볼꼴 못 볼꼴을 다 봤다. 오토바이 타다가 사고로 죽는 것도 보고, 학교 다니던 여자아이가 짙은 화장을 하고 술집에 앉아 있는 모습도 봤다. 막을 새 없이 낙태하고 누워 있는 모습도 봤고 다방에서 나이 많은 어른들에게 손이며 신체부위를 쉽게 내주던 아이들도 있었다. 이들에게 부모, 형제 같은 바람막이가 없으면 사막 한가운데 서 있는 것만큼이나 막막하다는 걸 이때 알았다.
나는 이들의 초롱초롱하던 눈에서 생기가 사라지는 슬픈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자신의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걸 알게 될 때 이런 모습을 보였다. 어렸을 땐 안아주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돼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장성한 이들을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다.
40∼50명은 어른이 된 지금도 내게 연락을 해온다. 이젠 오히려 날 걱정하고 따뜻하게 보살펴 주려고 한다. 보육원에서 성장했다고 모두 잘못되는 건 아니다. 이제 마흔을 넘긴 영제를 보육원에서 처음 봤을 때가 기억난다. 중학생이던 영제는 말수는 적지만 붙임성 좋고 성실한 학생이었다. 다른 아이와 달리 영제는 내게 특별한 요구를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가끔 우리 집에 놀러 와서 놀다가는 게 전부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영제는 친구 가족이 경영하는 벽돌공장에서 지게차 기사로 일하면서 친구 부모를 자신의 부모님 대하듯 잘 섬겼다. 착실히 돈을 모아 아파트를 사고 삼십대 후반에 결혼을 앞둔 영제에게 나는 우리 며느리와 똑같은 예물을 마련해 함을 전달했다. 영제가 결혼 후 첫딸을 낳았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영제에게도 마침내 혈연관계가 생긴 것이다. 정말 감격스러웠다.
매달 우리 집을 찾는 영제를 나는 ‘집 나간 큰 아들’이라 부른다. 거저 얻은 장성한 아들이라 그렇게 칭했다. 영제는 입양홍보사업에 정기적으로 후원금도 내고 가끔씩 내게 용돈도 쥐어준다. 영제가 최근 이사한 이천 집에 들러 장작을 패며 도움을 주려고 이곳저곳 살피는 모습을 보면 마냥 든든하다.
***[역경의 열매] 한연희 (5) 둘째 이후 포기한 입양, 외환위기로 고아 다시 늘자
우리 가족은 1999년 12월부터 본격적으로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기자들은 우리가 처음으로 입양한 둘째 아들 희곤이에게 인터뷰를 신청했다. 당시 중학생이던 희곤이는 처음에는 자연스럽게 인터뷰에 응했으나, 횟수가 늘어나고 자신이 예상치 못했던 질문을 받자 나중엔 이를 극구 거부하기 시작했다.
“기자들은 진짜 이상해. 인터뷰하면서 가장 황당했던 질문이 뭔지 알아요? 낳아주신 부모님이 보고 싶지 않느냐는 거예요. 그걸 질문이라고 해? 자길 낳아주신 분을 보고 싶은 건 당연한 거죠. 또 어이없는 질문은 지금 부모님이 잘해 주시냐고 묻는 거예요. 자식에게 잘해주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어. 살다보면 잘해주기도 하고 못해줄 때도 있는 거잖아요. 정말 짜증난다니까요!”
우리가 입양한 다른 아이들과 달리 희곤이는 유독 인터뷰에 민감했다. 그러던 어느 날, 희곤이는 내가 출연한 ‘사랑의 위탁모’란 방송을 보고 인터뷰에 대한 생각을 바꿨다. 저조한 국내 입양 현실을 보고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이제부터 인터뷰에 적극적으로 응할래요. 엄마가 방송에서 그러셨죠. 방송 보고 한 명이라도 부모를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고요. 절 보고 입양을 결정한 사람이 있을 수 있으니 다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90년 우리 부부가 처음으로 입양한 희곤이는 귀엽거나 호감 가는 인상은 전혀 아니었다. 거친 외모를 가진 아이는 분노 조절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야뇨증도 심했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희곤이를 입양한 걸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지금도 ‘너를 입양한 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라 말해주면 30세가 넘은 다 큰 장정의 얼굴에 어린아이 같은 웃음이 떠오른다. 희곤이는 남편이 사랑의 매로 자신을 때린 일과 경찰서에서 안아줬을 때 참 고마웠다고 했다. 내 경우엔 독서를 강조하면서 오랜 시간 붙잡고 공부시켰던 기억이 선명하다고 했다. 희곤이는 우리 부부가 자신을 위해 혼내고 위로할 때 가장 부모 같다고 생각해 감동을 받은 것 같았다.
그럼에도 한계는 있었다. 희곤이는 자신이 입양아라 뭐든지 잘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렸다. 자신이 못하면 모두 ‘입양해서 그렇지’란 말을 할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자기 때문에 입양한 형제자매가 도매금으로 나쁜 평가를 받게 될까봐 매번 전전긍긍했다.
‘아, 이게 입양의 한계로구나!’ 나 역시 희곤이를 가족으로 품기까지 5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더 이상의 입양은 하지 않기로 스스로 결심했다. 하지만 이 결심은 외환위기인 98년 무너졌다. 경제 위기로 어느 때보다 많은 고아가 발생한다는 소식을 접한 나는 남편과 시아버지에게 다시 입양을 해 보자고 설득했다.
시아버지께서는 희곤이를 입양할 때보다 더 강력하게 반대했다. 남편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여동생이 내게 싫은 소리를 했다.
“그렇게 싫어하시는데 꼭 해야겠어? 제발 좀 그만둬. 왜 이렇게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 거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무도 날 이해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시무룩하게 집에 들어서다 남편과 마주쳤다. 남편 표정은 나보다 더 시무룩했다.
우리 부부 모두 신경이 곤두서서 그런지 여차하면 크게 한판 붙을 판이었다. 집안 공기가 얼마나 무거웠는지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무작정 집 밖으로 나와 인근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거기서 나는 밤이 깊어 인적이 드물 때까지 묵상을 했다.
‘단 한 사람도 지지하지 않는데 혼자서 입양하겠다고 고집을 펴고 있다. 과연 이 일을 주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입양을 다시 하는 게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일까.’
***[역경의 열매] 한연희 (6) 하나님이 우리를 양자 삼았듯 입양으로 보답을
집 앞 벤치에 홀로 앉아 스스로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졌다. 그때 문득 떠오른 장면이 있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발각돼 잡혀온 여인을 고발하는 무리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습이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 울컥 눈물이 나왔다. 자녀를 버린 누군가를 원망하기보다 내가 엄마가 돼 아이의 고통을 덜어주는 편이 더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한번만 더 버려진 아이의 엄마가 되기로 다짐하고 시아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시아버지께서는 진지한 표정으로 또 다시 거절하셨다.
“얘야, 네가 고아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충분히 잘 알겠다. 그렇지만 어디 고아가 한두 명이냐. 도와주는 건 나도 좋다. 하지만 네가 가진 능력이나 돈으로 더 많은 고아를 도와주는 게 낫지 않겠니. 한 아이를 온전히 키우는 것보다 그게 더 좋은 방법이야. 집으로 데려오는 건 제발 참아다오.”
나는 한번 더 시아버지께 매달리기로 했다.
“아버님, 지금 고아들은 굶지 않아요. 옷이 없어 헐벗지도 않고요. 다만 이 아이들은 엄마가 필요할 뿐이에요. 저는 그 한 아이의 엄마가 되고 싶어요. 제발 허락해 주세요.”
내가 계속 간청하자 시아버지께서는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방으로 들어가셨다.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다음날 시아버지께서는 입양을 허락해 주셨다. 시아버지의 허락을 받자 남편도 입양을 동의해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6개월 된 남자아이를 집으로 데려올 수 있었다.
우리 부부는 이 아이의 이름을 ‘하나님의 선물’이란 의미로 ‘하선’이라 지었다. 현재 고등학생이 된 하선이는 우리 가족에게 낳았든 입양했든 부모자식간 사랑은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알려준 아들이다. 희곤이를 집으로 데려온 이후 느꼈던 입양의 한계를 하선이를 기르면서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입양에 그토록 반대했던 남편은 하선이를 키우면서 얼마나 행복했든지 아이를 추천한 입양기관 사회복지사에게 몇 차례 감사편지를 썼다. 종종 남편은 내게 이런 말을 하곤 했다.
“눈만 뜨면 ‘어떻게 우리가 이렇게 많은 복을 받았지’란 생각이 들어. 하나님께 참 감사해. 우리가 보답할 방법은 없을까?”
이렇듯 나와 남편은 아이를 입양해 키우면서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됐다. 또 이전보다 주님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더 헤아릴 수 있게 됐다.
예전에 교회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양자 삼으셨다’는 설교 말씀을 들은 적이 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내 마음속에 감동이 밀려왔다.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고 가족이지만 이전의 내 신분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두려움과 낙망을 주는 영에게 종살이하는 신분이 아니었을까?’
하나님은 종 같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아들인 예수님을 보내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다. 그 은혜로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가 된 것이다. 죄에 종살이하던 나를 주님께서 양자 삼은 것에 비하면 내가 우리 자녀들을 양자 삼은 것은 새발의 피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양자 삼기 위해 특별히 예수를 보내셨다는 사실이 내게 감동이 되듯 자녀들도 그랬으면 좋겠다. 우리 부부가 양자 삼기 위해 가졌던 간절한 소망과 아픔을 알고 감동을 느꼈으면 좋겠다.
우리 아이들은 아픈 만큼 더 많고 깊이 성숙해질 것이다. 아픈 만큼 완성도 높은 인생을 살 것이다. 그래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남들보다 더 깊이 빠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출생에 얽힌 비화가 아니라 믿음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마음과 행동이란 것을 알게 되리라.
***[역경의 열매] 한연희 (7) ‘지적장애 3급’ 내리를 치유한 것은 엄마의 사랑
결핍은 있어야 할 좋은 것들이 없다는 의미다. 부모 자녀 사이에 있어야 할 좋은 것들이 없었던 아이들에게 두려움의 흔적을 보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다.
7번째로 입양한 우리 딸 내리는 지적장애 3급으로 2007년 우리 집에 왔다. 미혼모에서 태어난 내리는 신생아 때 어느 부부에게 입양됐으나 양육 미숙으로 오랫동안 방임돼 4년 6개월 만에 파양됐다. 어릴 때부터 이런 환경에 노출된 내리를 병원에 데려가 정기적으로 치료를 받게 했다. 내리가 아픔과 상처, 결핍과 어려움을 평생 간직하며 살도록 놔두고 싶지 않았다. 의사는 내리에게 인지능력이 떨어진다며 지적장애 3급 진단을 내렸고 놀이치료를 받도록 권유했다. 학자들은 어릴 때 결핍이 심할 경우 완전히 회복되는 것은 어렵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우리 딸이 먼 훗날 자신을 세상에 단 한 명밖에 없는 귀중한 사람으로 여기길 바랐다. 또 불가능해 보이는 조건에서도 어떻게 당당히 원하는 걸 성취했는지 고백하길 희망했다.
“내리야! 너는 잘못한 게 아무것도 없어. 어른들이 잘못해서 네가 고생하는 거란다. 우리 가족은 널 사랑하기로 작심했어. 너와 죽을 때까지 함께 울고 웃기로 결정한 사람들이야. 우리 힘껏 해보자.”
내리가 엄마의 사랑을 느낄 때까지 열심히 노력하기로 다짐하고 기도했지만 상처 많은 아이가 새 가정에 적응하는 건 쉽지 않았다. 아이는 일주일째 내 눈치를 심하게 살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내게서 눈길을 떼지 못하는 딸을 보면서 애잔한 감정을 수습하기 힘들었다.
상처 입지 않아도, 지적장애가 아니더라도 입양가정에 적응하는 데는 원래 시간이 걸리는 법이다. 하지만 일주일에 2번씩 병원에 다녀도 차도가 보이지 않는 아이를 볼 때마다 탄식이 나왔다.
입양을 계속하면서 우리 가정의 삶의 방식도 자연스레 바뀌었다. 회사를 다니던 남편은 자녀양육을 위해 고시원을 운영했고 때로는 바쁜 나를 대신해 전업주부 역할을 하기도 했다. 보조금으로 의료비를 충당하고 살던 집을 줄이기도 했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노후준비 대신 마이너스 인생을 택했다. 자발적으로 가난을 택했지만 아이가 힘들어할 때마다 온몸에 힘이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눈앞이 캄캄하고 아무런 대책을 세울 수 없을 때마다 나는 호세아서를 읽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부정한 아내를 사랑한 호세아처럼, 우상 숭배한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한 여호와처럼 상처투성이 지적장애 3급인 내리를 사랑해 주라고 말씀하셨다.
도저히 못하겠다는 생각에 도달하면 그대로 끝낼 것 같지만 사람의 감정이란 상황에 맞게 물 흐르듯 흘러가나 보다. 서로 피곤해서 그랬을까. 6년간의 놀이치료로 딸의 눈치 보는 강도가 옅어졌다. 다행히 고비는 넘겼다는 생각이 든다. 자녀를 키우며 한계에 다다를 때마다 이를 뛰어넘기 위해 내가 뼈에 새기듯 듣는 찬양이 있다.
‘그대 주님 만나려거든 그대 앞에 놓여진 그 길 중에서 좁고 험한 낮은 길로 떠나요. 먼저 주님 그길 가셨으니.’
‘좁고 험한 낮은 길’이란 가사가 마음에 들어온다. 우리가 잘 하지도 못하면서 가야 할 책임을 느낀다면 이는 순전히 주님이 먼저 가셨기 때문이리라.
‘그가 상처 입은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이 말씀처럼 우리의 죄와 아픔을 샅샅이 아시고 친히 해결해 주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아픔을 아시는 예수만이 우리를 회복시킬 수 있다.
***[역경의 열매] 한연희 (8) 부끄럽게 내민 알바 첫 월급봉투에 “사랑해 영환아”
넷째 아들 영환이는 ‘우울다혈질’적인 기질을 타고났다. 매사 비판적인 태도로 사람과 사물을 바라보곤 했다. 어린 시절 상처가 아이의 태도를 결정한 것이다. 1999년 12월 형 영범이와 함께 우리 집에 입양된 영환이는 어릴 때 노숙생활을 경험했다.
우리 부부는 이들 형제를 보육원에서 알게 된 아이의 소개로 만났다. 그 아이는 우리에게 이들을 맡아줄 부모를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원래 이들을 입양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양부모를 만날 때까지만 잠시 맡을 계획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입양하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이번엔 남편이 조심스럽게 내게 제안을 했다.
“아마 우리가 맡으라고 하나님께서 보낸 거 같아. 지금보다 변두리로 이사 가더라도 아이들 머물 방을 만드는 게 어떨까.”
노숙하며 학교를 다니지 않아 8, 9살임에도 한글도 못 뗀 아이들을 자녀로 받아들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특히 영환이는 반사회적 성향을 보여 키우기가 더 힘들었다.
베블리란 학자는 우리 같은 자녀를 둔 부모에게 이런 말을 했다. “하나님께서 그 아이를 당신에게 닦으라고 주신 다이아몬드로 생각하라. 일찍 시작하라. 일관성 있게 대해주며 이해하고 사랑해 줘라, 그러면 당신은 나중에 그가 별처럼 빛나는 것을 볼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섬길 만한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별처럼 빛나는 영환이를 보기까지 남편과 나는 오랜 시간을 참아야 했다. 감정 표현을 어려워하던 영환이는 손톱을 물어뜯는 버릇이 있었다. 얼마나 손톱을 뜯었던지 14살 땐 왼손 검지가 곪아버렸다. 잠을 설치며 신음소리를 낼 만큼 힘들어하면서도 아이는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며칠간 병원에 보냈지만 좀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영환이가 다닌 정형외과에서 나를 찾는 전화가 왔다. 담당의사는 아이가 하루 이틀 병원을 다니다 계속 오지 않았다고 했다. 염증이 뼈까지 전이됐을까 걱정돼 엑스레이까지 찍었다며 날 보여줬다. 현재 소견으로는 괜찮지만 반드시 꾸준히 병원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진단을 받고서도 영환이는 늘 그렇듯이 무표정했다. 유사자폐증세로 아이가 감정 표현을 어려워하는 걸 알면서도 자괴감에 빠졌다.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심정도 십분 이해가 갔다. 아이 양육을 잘하는 능력 있는 사람이 이런 일을 하면 모양새도 좋고, 아이의 마음도 이해하기 쉬울 텐데 이게 뭔가.
친구를 괴롭히고 남의 물건을 훔치고도 반성하지 않는 영환이를 보며 우리 부부는 남몰래 눈물을 쏟았다. 무엇보다 사회생활에 적응 못하는 아이로 성장해 잘못된 길을 갈까 두려웠다. 걱정될 때마다 나는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영환이가 우리의 보살핌을 받도록 허락하셨다’고 수없이 되뇌곤 했다.
그러던 영환이가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미술공부를 하며 달라지기 시작했다. 미술에 흥미를 붙인 영환이는 고등학교에 가서도 그림과 디자인 공부를 계속했다. 이는 대학진학은 꿈도 못 꿨던 영환이가 계원예대 디자인과에 합격하는 결과를 낳았다.
공군에 지원한 영환이는 학교를 휴학하고 시간이 남자 처음으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러더니 막 출근길에 나서는 내게 편지봉투를 건네준다. 작은 글씨로 ‘사랑합니다. -환-’ 이라 적힌 봉투엔 아르바이트 한 달 월급인 22만원이 담겨있었다. 태어나 처음 번 돈을 고스란히 엄마에게 전해주다니. 지금껏 적지 않은 자녀를 키웠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고생 많았어. 그리고 고마워. 정말 감동이다.”
내가 주는 한 달 용돈에도 미치지 못하는 돈이지만 마음만큼은 억만금을 얻은 기분이다. 하긴 영환이는 자기 전 재산을 내게 준 거니까 억만금보다 더 귀한 셈이다.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있다.
***[역경의 열매] 한연희 (9) “시각장애 여섯째 성일아, 너도 주님 선물이란다”
6개월 된 큰딸 하나에게 젖병을 물리고 눈빛으로 교감하던 어느 날, 나는 시각장애인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하나님께서는 시각장애를 가진 사람과 어떤 방법으로 감정을 나누게 하실까’ 이 같은 생각은 시각장애인 아이를 입양하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졌지만 행동에 옮기지는 못했다. 남편의 반대 때문이었다. 시각장애 아이를 키울 자신이 없다던 남편은 대신 다른 장애를 가진 아이로 입양하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우리는 2007년 지체장애가 있는 딸 내리를 집으로 데려왔다.
우연이었을까. 2년 뒤 6번째로 입양한 아들 성일이에겐 시각장애가 있었다. 우리 부부가 성일이를 집으로 데려올 땐 아이에게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입양 가정 적응에 실패한 경험이 있는 성일이는 학교에 가기 싫어했다. 정서적 안정을 위해 아이를 잠시 집에 데려온 나는 고등학교에 진학해 공부를 계속할 것을 권했다. 내 권유에 마음을 바꾼 성일이는 학교에 입학했지만 책을 읽지 못할 만큼 시력이 안 좋아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안과에 데려가자 의사는 약시와 색맹이 있지만 달리 손쓸 방법이 있는 건 아니라며 별다른 치료를 하진 않았다.
하지만 성일이의 눈 상태는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다. 책장을 얼굴 가까이 가져가 눈을 가늘게 뜨고 깜박이는 모습을 보며 나는 몇 년 전 잠시 돌봤던 맹아와 성일이의 행동이 유사하다는 걸 알게 됐다. 이후 성일이는 대낮엔 흰색이나 회색 차는 형체조차 보지 못했으며 가까이에 있는 사람조차 알아보지 못했다.
깜짝 놀란 나는 대학병원 안과에서 시신경이 있는 머리 부분을 MRI로 찍었다. 선천적인 문제라 치료로 나아질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안 좋은 시력임에도 게임중독증세를 보이는 아이를 위해 신경정신과에도 들렀다. 전반적으로 건강하지만 감정발달이 제한적이라 대인관계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심리검사 결과를 받았다.
성일이를 누구보다 정확하게 아는 하나님께서 손수 돌봐주시려는 걸까. 선천적으로 장애가 많은 성일이를 우리에게 보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지 궁금해졌다. 오른쪽 손가락은 왜 선천적으로 두개밖에 없는지, 눈은 왜 원인 없이 보이지 않게 됐는지 말이다. 보육원에서 어린 시절을 다 보낸 성일이가 중학교 1학년 때 뒤늦게 입양됐다 2년 뒤 우리 집으로 오게 한 그분의 뜻도 궁금했다.
그래서일까. 성일이를 생각하면 톨스토이의 책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가 떠오른다. 이 책에서 톨스토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부모 없는 쌍둥이를 기르는 여인이 남의 아이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릴 때, 여인의 모습에서 하나님을 보았다.”
“사람을 지탱하는 것은 자신을 보살피는 마음이 아니라 사랑이다.”
“하나님이 인간 각자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는 능력을 주시지 않은 것은 함께 모여 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책 내용처럼 성일이가 선천적 장애를 가지고 우리에게 온 것은 하나님의 섭리라는 생각을 해 본다. 성일이가 우리에게 오기 전 처음 입양된 날은 2006년 12월 28일이다. 우리가 시각장애 아이를 입양하려던 계획을 변경해 내리를 입양한 날과 정확히 일치했다. 선천적 시각장애가 있는지 모르고 입양가정과 학교생활 적응에 어려움을 겪던 아이는 2년 뒤 보육원으로 돌아왔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우리 집에 온 성일이는 이제 ‘잠시 머무는 보육원 아이’가 아닌 ‘한 가족’이 됐다. 병원에 다니느라 1년간 학업을 쉰 성일이는 이후 일반학교에서 서울맹학교 고등부로 옮겼다. 지금은 한국복지대학교 장애유아보육과에 진학해 열심히 공부 중이다. 호기심에 철없이 한 어리석은 기도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그저 놀라운 뿐이다.
***[역경의 열매] 한연희 (10) 열 아이 가정교육법?… 주님 안에서 자유를 줬죠
집에 온 첫째 명곤이가 밖에서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 투덜거린다. 아마 우리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우리 집에 처음 와 본 사람들의 느낌은 대체로 비슷한 편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집안이 어지럽다’거나 ‘자기주장이 강한 아이가 많다’는 말을 하곤 한다.
‘소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하려니와 소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으니라.’(잠 14:4)
어차피 우리 집은 애들이 많아 깨끗하게 정리된 상태를 기대하긴 힘들다. 하지만 아이들이 주는 기쁨 또한 많기 때문에 그리 심각한 문제는 아니라 생각한다. 하지만 남들 눈에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아이들에게 무한한 자유를 주는 것 같지만 좋게 말해서 자유지 솔직하게 말하면 방임이라고 한다. 또 이렇게 크면 독립적으로 성장할 순 있겠지만 조직사회에 어울리기 어려울 거라는 등 여러 부작용을 우려한다. 주변 이들의 우려 때문에 고민하던 나와 아들이 서로에게 물었다.
“내가 너희에게 무한한 자유를 줬니?” “글쎄요. 제가 어떤 면에서 방임돼 있었던 건지 잘 모르겠는데.” 둘 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기억을 헤아려 보지만 오리무중이다.
주변 사람들은 우리 가족이 물가에 있는 철없는 아이처럼 보여 걱정이 되는 것 같다. 나 혼자 살기에도 만만치 않은 인생인데 자꾸 애들만 늘리는 모습을 보니 얼마나 위험천만하겠는가. 앞길 창창한 첫째라도 앞으로 정신 차리라는 의미에서 누군가 넌지시 조언을 해준 모양이다. 다들 우리를 아끼고 사랑하기 때문에 큰 용기를 내 해준 말 일거라 생각한다.
다른 가정과 우선순위가 달라서 그렇지 우리 가족도 규칙은 있다. 무조건적인 방임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부부는 인생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에 대해 고민해 왔다. 이는 고아를 돌보는 것이라 판단했고, 그 결과 남들이 품기 힘든 아이에게 부모가 돼 줬을 뿐이다.
이러한 부모 때문인지 우리 자녀들도 어릴 때부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해 숙고해 왔다. 첫째 명곤이는 인생에 대해 청소년기 때부터 고민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입양된 여러 동생들의 삶을 보며 자연스럽게 하나님과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됐을 것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하나님만이 소망이라 말해왔다. 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 속에 선한 건 없지만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우리의 희망이 될 수 있다고 말이다. 그래서 아픈 과거가 있어도 소망을 가지고 감사하며 살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럼에도 남들이 걱정하는 걸 보면 나도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많은 이들의 염려처럼 우리 집에 방임의 분위기가 있을 수 있다. 자유와 방임 이 두 가지가 섞여있어 분별하기 어려운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자녀들이 자라면서 주도적으로 삶을 이끌어나가길 원한다. 부모의 의사가 아니라 본인 의사가 더 많이 인생에 반영되길 원한다. 내가 볼 때 좋은 것임에도 아이가 이를 따르지 않아도 나는 강요하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게 한다. 이럴 땐 그대로 지켜봐주는 일이 선택을 종용하는 것보다 몇 배는 더 힘들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아이 스스로 결정하길 원한다. 우리가 정한 이 규칙을 종종 무시하고 아이들을 내 말에 절대 순종케 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기도 한다. 내 맘대로 아이들에게 보기 좋은 걸 쥐어주면 서로 갈등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돈도 시간도 절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내 이러한 욕구를 힘껏 누른다. 단지 나는 잠시 아이들 곁에 있을 뿐이다. 내가 없어도 아이들은 스스로 인생을 개척해나가야만 한다. 그래서 자유도 방임도 아닌 기도함으로 이들이 하나님 앞에 바로서기만을 간절히 바란다. 모든 선한 것은 하나님을 믿음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역경의 열매] 한연희 (11) 제주 4형제 입양 무산… 아쉬움은 또다른 사랑을
제주 모슬포에 있는 한 보육원을 방문했다가 초등학생인 4형제의 가슴 아픈 사연을 들었다. 이들 어머니가 정신병원과 보호시설을 전전함에도 친인척 모두 이들 형제를 돌보지 않아 9년째 보육원에서 지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남편과 4형제를 만나러 갔더니 원장은 아이들이 잠시 우리 집에서 살 수 있도록 허락했다. 보름간 4형제와 친해진 우리 집 아이들은 이들이 집에 오게 해달라고 남편을 졸랐다. 4형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남편 역시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러자 남편의 결정에 주변 사람들은 차갑게 반응했다.
“4명을 또 입양한다고? 이건 가정집이 아니라 완전 시설이네.” “지금 아이들도 생각해야죠. 새로운 입양으로 그 애들이 피해를 입는 것도 분명 있으니까요. 입양 한다고 다 좋은 건 아니잖아요. 잘못된다고 누가 책임을 져요? 그저 애들만 불쌍하지.”
물론 이들의 말도 일리는 있다. 입양에 실패하면 아이만 상처 받는 게 아니라 가족 모두에게 치명타다. 그걸 모르고 입양을 9번씩 했겠는가.
“여보, 차라리 그 애들이 헐벗고 굶주리는 상태라면 명분이라도 서지 않겠어. 보육원 대신 우리에게 온다 해서 더 나은 게 있을까.”
입양 고민으로 수없이 잠 못 이루는 밤이면 남편은 자꾸만 내게 묻는다. 나는 남편의 말이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라는 걸 잘 안다. 우리 부부에겐 부모가 되어준다는 명분 외에는 딱히 설득력 있는 이유가 없었다. 그러기에 우리는 4형제의 선택을 기다리면서 좋은 부모가 되려고 노력했다. 식탁과 부엌 조리대도 늘리고 여행용 가방, 각종 보드게임도 구입했다. 어린 4형제를 사랑으로 품겠다고 마음 준비도 단단히 했다. 과천에 올라온 마지막 날, 나는 제주 4형제에게 우리 가족 구성원 모두를 소개하며 입양 결정시 주의사항을 말해줬다.
“너희들이 계속 살고 싶다면 우린 입양에 필요한 서류정리를 할 거야. 입양을 하게 되면 이름의 성이 바뀐단다. 여기 있는 사람들과 가족이 되는 거지. 도중에 가족 하기 싫다고 바꿀 수 없다는 뜻이야, 그러니까 너희가 잘 생각하고 결정해야 한단다.”
그리고 입양이 돼도 낳아주신 엄마는 계속 엄마고, 비행기 표 값이 비싸 1년에 한 번 정도 만나러 갈 수 있을 거라는 말을 해 주는데 성일이가 갑자기 끼어든다. 성일이는 그렇게 말하면 못 알아듣는다면서 자기가 가장 최근에 왔으니 한마디 하겠다고 했다.
“난 보육원에서 14년 살았고 여기 온 지 얼마 안 됐어. 우리 집과 보육원과의 가장 큰 차이점은 꿈을 이룰 수 있는 곳이라는 거야. 여기선 뭐든지 하고 싶은 걸 하게 도와줘. 이것만 기억하면 된다.”
확신에 찬 성일이의 목소리를 듣고 마음을 굳힌 4형제는 제주도에 갔다 곧 우리 집에 오기로 했다. 하지만 4형제의 작은 아버지나 외종조부 등 친인척들이 입양을 극구 반대해 모든 절차가 무산됐다. 외부에선 우리가 아픈 엄마에게서 아이들을 빼앗는 무자비한 사람으로 비춰질 수 있었을 것이다. 절대 그게 아님에도 이해하기 쉽진 않았을 거다. 우릴 언제 봤다고 덥석 믿어주겠는가. 그럼에도 아이들은 입양 가고 싶으니 제발 도와달라고 말했다.
변호사에게 조언을 구하고 청와대에 탄원서를 쓰기도 했지만 우리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4형제를 위해 남편이 꾸며놓은 방은 주인이 없어 계속 텅 비게 됐다. 하지만 이 방보다 더 텅 빈 아이들의 마음이 느껴져 눈물이 핑 돌았다.
“하나님, 우리도 힘들지만 아이들이 너무 힘들어해요. 우리가 모르는 중요한 일이 있는 거 맞죠?”
2009년 그해 겨울, 하나님은 제주 4형제 대신 우리에게 계획에 없던 용민이와 운비를 주셨다. 이 일로 ‘사람이 계획을 세울지라도 그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임을 새삼 깨닫게 됐다.
***[역경의 열매] 한연희 (12) “꿈은 이루어진다” 영범이 14년만에 비파 연주자로
영범이는 중학교 1학년 때 특기적성으로 배웠던 비파를 전문적으로 배우고 싶다고 했다. 비파를 본 적도 없고 값도 잘 몰랐던 나는 악기도 사 주고 개인교습도 받게 해 주겠다고 했다. 아마 미리 알았더라면 이처럼 선뜻 허락하지 못했을 거다. 하지만 아이에게 좋다고 대답을 했으니 번복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간 나는 아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려주기 위해 한번쯤 벅찬 시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그렇기에 난 300만원을 들여 아이에게 연습용 비파를 사줬다. 그리고 그날부터 매일 명곡을 듣는다는 자세로 아이의 서툰 비파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우리 집의 사정을 아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영범이가 비파를 전공할거라 했을 때 혀를 내둘렀다. 우리가 부자도 아닌데 흔치 않는 고가의 악기를 가르쳐서 어쩌겠냐는 것이었다. 또 영범이가 나중에 비파로 밥벌이를 할 수 있겠느냐는 우려도 적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중도에 그만두더라도 영범이만 행복하다면 배워보게 할 작정이었다. 재능이 있었는지 아이는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입학은 기뻤지만 예고 등록금이 많이 비쌌기에 고민도 많았던 게 사실이다. 그러던 어느 날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영범이가 2학년이 되던 해 사립학교였던 예고가 국립으로 바꿔 등록금이 없어진 것이다. 등록금이 버거웠던 내게는 기적 같은 일이었다.
기적 같은 일은 또 있다. 서울예술대학이 개최한 동랑예술제에서 영범이가 대상을 받은 것이다. 대상 한 명에게만 입학금 면제 혜택을 준다기에 나간 대회였는데 정말로 그 대상자가 된 것이다. 아이는 대학 입시를 앞두고 더 좋은 대학에 가고 싶은 마음에 많은 갈등을 하더니 결국 서울예대에 원서를 냈다. 우리 형편을 고려해 입학금 면제가 되는 곳으로 대학을 결정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영범이가 내게 오더니 달뜬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학교에서 전화가 왔는데 제가 학과수석이래요. 학과 수석은 전액 장학금을 받을 거예요. 내일 학교 가서 물어봐야지."
이 소식을 우리 가족 때문에 늘 걱정하시는 시부모님께 가장 먼저 전해드렸다. 부모님 두 분께서는 기쁜 소식에 깜짝 놀라시면서 거의 동시에 물어보셨다.
“걔네 부모는 알고 있니? 학과수석 아무나 하는 게 아닌데. 자식이 수석을 해도 모르다니 참 안됐구나.”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었다. 시부모님 말씀을 듣고 보니 이 순간 그 누구보다 기뻐할 사람은 바로 영범이 친부모일 것 같았다. 해산의 수고를 한 이들에게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대학 입학금 면제와 학과 수석 입학도 이렇게 안타까운데 나중에 영범이가 결혼할 때 이들의 심정은 어떨까. 영범·영환 형제가 자신들의 성장과정을 이들에게 알리는 걸 원할까. 설혹 알린다고 해도 자녀를 보러 올까. 그간의 경험으로 볼 때 이들이 형제를 보러 오는 건 어려워 보였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라는 생각이 밀려왔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한없이 생각이 이어졌다. 기쁨은 나눌수록 커진다는데 이를 나눌 수 없어 안타까웠다.
입학 이후로 지금까지 영범이는 단 한 번도 등록금을 내지 않았다. 대학 4학년까지 뛰어난 학업성적으로 우등생 자리를 놓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모의 보살핌을 받지 못해 밥 한 끼 제대로 못 먹던 9살 아이, 한글을 몰라 책도 못 읽고 남의 눈치나 살피던 아이가 바로 영범이었다. 단지 부모 역할만 해줬을 뿐인데 아이는 불과 14년 만에 지상파 방송국과 세종문화회관 등에서 활약하는 비파연주자로 성장했다. 최근 영범이는 입양 부모들에게 아름다운 비파연주와 함께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며 희망을 심어주고 있다. 아마도 ‘수지맞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게 아닐까 싶다.
***[역경의 열매] 한연희 (13) 도둑처럼 찾아온 뇌경색… 주님, 3년만에 치유 허락
2010년 9월 3일, 나는 이날을 또렷이 기억한다. 이날 나는 좋아하던 CCM 밴드인 ‘꿈이 있는 자유’ 15주년 콘서트에 가기 위해 종일 분주히 움직였다. 콘서트 시작 전에 맞춰 공연장에 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전에 대학병원에서 촬영했던 MRI 검사결과도 홀로 가서 보기로 했다. 일정도 그렇지만 누구도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의사가 결과를 보자마자 안색이 변했다. 갑상선기능저하에 콜레스테롤 수치는 297, 혈압은 150에 100이 나왔다고 했다. 동행한 보호자 없이 혼자 왔다고 하니 의사는 놀라면서 내 연령대의 정상인 뇌와 내 상태를 비교해 보라며 사진을 보여줬다.
두 사진을 비교하며 의사가 설명하는데 들을수록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내 뇌에 손상된 부분이 무려 일곱 군데나 있다고 했다. 최근 몇 년간 운전하다 길을 잃는다거나 방금 한 말을 잊는 등 이해하기 어려운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있었는데 그 원인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어머니, 이때를 위해 제가 치매지원센터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하게 된 것 같아요. 어머니는 500만 명중 1명만 누릴 수 있는 행운의 주인공이란 걸 잊지 마세요. 뇌졸중은 쓰러지기 전에 발견되는 확률이 아주 낮습니다. 의사 소견으로는 지금 발견 못했으면 올 연말쯤 영안실에 왔을 확률이 100%라네요. 반드시 약 잘 드셔야 해요. 식이·운동요법도 열심히 병행하셔야 하고요. 조금이라도 치료에 소홀하면 10년 내 치매로 고생하게 된다고 하니 꼭 안내한 대로 하셔야 해요.”
큰아들 명곤이가 날 안심시키기 위해 의사와 나눈 대화로 전문적인 조언을 해 줬지만 난 대책 없이 눈물만 흘렸다.
돌연 누군가를 만나기가 두려워졌다. 누구에게도 망가진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계속 치매가 오기 전 의식이 있을 때 모든 걸 정리하자는 생각만 들었다. 그러면서 기억이 더 나빠지기 전에 가족에게 고맙다는 말도 하고 사랑한다는 말도 미리 해둬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난 죽음보다 치매가 더 두려웠다. 앞일이 걱정됐지만 두려움에 빠져 있기보다는 주님을 신뢰하는 편을 택했다. 생명의 주관자인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한 일은 무엇이든 최선일 것이고 주님이 함께 하신다면 이미 모든 게 충분하다는 생각에서였다.
‘이런 상태로 콘서트를 가야 하나’ 눈물이 멈추지 않아 얼굴이 엉망이었지만 나는 남편과 집을 나셨다. 그런데 그날 저녁 힘든 마음으로 간 그 콘서트가 주님께서 내게 베푼 선물이었을 줄이야. 마치 날 위한 노래만 나오는 것 같았다.
‘꿈이 있는 자유’의 한웅재 목사는 노래에 얽힌 사연을 소개했는데 ‘나 어디 거할지라도’란 곡은 어머니가 쓰러지셨을 때 지었다고 했다. 나는 이 곡을 들으며 남편과 손을 잡고 많이 울었다.
‘나 어디 거할지라도 주 날개 나를 지키네. 그 그늘 아래서 나 주님을 노래하네. 외롭고 험한 길에 내 믿음 연약해져도 기다려주실 수 있는 주님…내가 살아 숨 쉬는 동안 주님 나 사랑하리.’
한 목사는 마지막으로 ‘너 결코 용기 잃지 말아라’를 불렀다. 이 곡 역시 가사가 내 마음 속에 들어왔다.
‘너 결코 용기 잃지 말아라. 주가 너와 함께 하시리니…너는 이제 약하지 않도다. 네 안에 계신 주님이 세상보다 크시니. 너의 삶이 조그맣고 너의 삶이 평범하게 보여도 네 삶을 주님께 맡겨라.’
그 후 3년이 지난 지금, 주님은 나의 모든 인지능력이 대부분 회복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다. 찬양 가사처럼 날 지켜주신 주님께 모든 영광을 돌린다.
***[역경의 열매] 한연희 (14 끝) 샘물처럼 솟는 열 아이 10色 웃음에 “행복합니다”
나는 밤낮 아이들로 북적대는 우리집 분위기가 좋다. 우리 애들은 서로 뭐가 그렇게 좋은지 뭉쳐 다니면서 깔깔거린다.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다보니 집안에 심각한 일이 생겨도 무거운 분위기가 오래 가지 않는 편이다. 이런 우리를 편하게 여기는지 동네 이웃도 스스럼없이 우리집에 드나든다. 그래서 일요일이면 집안이 ‘사람투성이’가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대충 끓인 김치찌개도 아이들은 꿀맛이라며 좋아한다. 하긴 경쟁이 치열한데 무슨 요리인들 맛이 없겠는가. 지난밤에는 명곤이가 감자전을 부쳤다. 살짝 언 감자를 빨리 먹기 위한 즉흥적인 발상에서 나온 요리였다. 명곤이 부부는 감자를 강판에 갈아 프라이팬에 부쳐 가족들에게 내왔다. 감자전이 부족해 계란 프라이도 만들었는데 이것도 접시에 담자마자 금세 없어진다. 아이들 중 누군가 계란말이가 더 먹고 싶다고 했나보다. 명곤이는 다시 부엌으로 가 계란말이를 뚝딱 만들어 식탁에 올린다.
사람 외에 우리집에 넘치는 게 있다면 바로 유머다. 우리 자녀들은 함께 놀며 지루할 틈 없이 지낸다. 찬바람이 심하게 불어도 우리집 남자아이들은 축구하러 야밤에 놀이터로 우르르 몰려간다. 코끝이 빨개져도 펄펄 뛰어다니는 걸 보면 정말 신이 나나보다. 용민이가 축구공을 잡기 위해 후다닥 뛰다 나뭇가지에 긁혀 얼굴에 커다란 상처가 났다. 신나게 한판 뛴 녀석들은 용민이를 서로 위로하며 약 발라주느라 분주하다.
이뿐인가. 누군가 좋은 영화를 추천하면 즉시 안방에 모두 모여 영화를 본다. 때론 스릴 만점인 전쟁영화를 봤다가 때론 순발력 넘치는 영화를 보면서 서로 공감대를 형성한다.
아이들은 우리집을 ‘갈라집’이라고 부른다. 가위바위보를 ‘갈라’로 부르는 우리집 아이들은 모든 집안일 당번을 무조건 이것으로 정한다. 음식물쓰레기 버리기, 설거지하기, 식탁 치우기, 빨래 널기, 방청소 등의 집안일을 공정하게 처리하기 위해서란다. 하루에도 몇 번씩 아이들은 집이 떠나가라 고함과 괴성을 지르며 가위바위보를 한다. 희비가 엇갈리는 아이들의 표정 때문에 우리 가족은 또 한번 왁자하게 웃는다.
우리 아이들은 내가 안아줄 때 내는 소리가 각기 다르다. 하선이는 ‘으흐음’하면서 편안하게 안긴다. 덩치가 큰 성일이는 내가 등을 토닥거리며 안아주는 걸 좋아한다. 녀석의 볼이라도 쓰다듬어주려면 키가 너무 커서 위로 팔을 뻗어야 할 정도지만 잘 자란 아이의 모습에 뿌듯하다.
맑은 눈을 가진 첫째딸 하나는 안아주면 눈을 깜빡거리며 ‘헤헤’하고 웃는다. 둘째딸 내리는 기다렸다는 듯 내게 안긴다.
애정표현이 어색한 아이들도 있다. 둘째아들 희곤이는 내가 안아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 그저 인심 쓰는 눈빛으로 잠시 안겨 있다가 몸을 뺀다. 용민이는 다가가면 몸부터 오그라들며 피한다. ‘하지 마요’하면서 몸부림을 친다. 결국 나는 용민이를 안아보겠다고 애쓰다 머리에 꿀밤을 한대 때리고 끝난다. 운비는 내가 안으려는 순간 ‘왜 그래요’하며 반항을 심하게 한다.
“왜 그러긴 뭘 왜 그래. 예쁘니까 그렇지. 엄마가 사랑하는 아들도 못 안아보니?”
일부 아이들에겐 아직도 내가 편안한 엄마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모양이다. 가끔은 속상하다. 형들에게는 껌처럼 붙어서 희희낙락하면서 내가 안으면 돌처럼 굳어지니 말이다. 하지만 이들도 나를 꼭 안아줄 날이 올 거라 믿는다.
갓 잡아올린 생선이 팔딱거리는 것처럼 늘 생동감이 넘쳐흐르는 우리집. 사회인부터 초등학생까지 다양하게 구성된 아이들을 바라보면 웃음이 절로 난다.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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