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황성동에 있는 청호서원은 1694년숙종20년에 유림들이 세운 서원으로 (격재.손조서),(모당.손처눌),(사월당.류시번),(양계.정호인),네분의 위페를 봉안하여 청호서원 사은사에 모셔놓고 유림에서 매년 향사를 지내고 있다,
서원은 모두 이때에 그랬듯이 고종황제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전국의 서원철페령을 내려 철페가되고 이후1969년에 다시 복원한 서원이다,
*孫肇瑞손조서=생졸은 ?본관은 일직, 자는 引甫인보,호가格梓격재,모당선생의6대조로 세종17년에 사마시에 올라 진사가 되고 검열을 거처 집현전에 있다가 외직으로 봉산군수로 재직시에 세조가 단종을 페위하고 사육신을 도육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세상의 일과 는 연을 끊고 선왕에 대한 절의를 지킨 선비로 그의 학행은 (일두.정여창)(한훤당.김굉필)이 스승으로 예 로써 공경하였고 문장은 (6신 박팽년)(점필재 짐종직)공과 막역한 사이가 될 정도로 휼륭했다,
*孫處訥손처눌=1553~1634년 자는 幾道기도,호가 慕堂모당으로 관향은 일직손씨,현감 孫致雲손치운의 손자,(호수 정세아)(정한강)의 문인으로 이황계통의 학문으로 많은 인물들을 배출했다,
*柳時藩류시번=1569~1642년 관향은 문화류씨,자는 衛仲위중,호가 沙月堂사월당으로 어릴때 부터 글재주가 뛰어나 7세에 경서와 사서를 읽고 9세에 郭槐軒곽괴헌에게 글을 배워 경서와 사서를 통달했고 18세에 정한강,서낙재,손모당,장여헌에 나아가 배우면서 학동으론 이석담.윤우와 채투함.몽연,鄭暘溪.정호인,과 같은 분들이니 모두가 명헌들이다,어버이 뜻에 따라 과거공부를 하여 향시에는 여러번 합격하나 과거에는 운이 없었으나 학문에는 뛰어나,손선생이 일찌기 사우로 하여 함께 후생들을 교육시키는 일을 했다,
*鄭好仁정호인=1597~1655년,관향은 영일또는 오천으로 자는 子見자견,호가暘溪양계로 5,6세에 조부 호수공에게 글을 배워 9세에 손모당 선생에게 나아가 배웠고 장여헌 문에서도 배웠다,
公의 문장은 당대에 최고라는 칭송을 받았고,公의 詩文章을 읽어보면 알듯이 표현법이 자연스러우면서 문장법이 맛깔이 난다,많은 재우들이 공을 따랏으며 후일에 공의 글을 평가하는 艮翁간옹.李獻慶이헌경公이 문집의 서문에"지금 유고를 읽어보니 단지 한 권 뿐이지만 公의 전모를 알 수 있나니 한 점의 살진 고기가 맛이 좋아 온 솥의 맛을 알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며,德淵雜詠덕연잠영은 청신하고 아름다우면서도 대범하여 唐당과 宋송의 명가 일지라도 이보다 더 나올수 없고 墓道文묘도문은 모두 법도가 있으며 神明舍記신명사기와 같은 排體文배체문은 문장과 조리가 원만하고 뛰어나니 이것이 어찌 글하는 것만 배워서 하는 글이겠나? 하고 또 公의 성정과 기개와 절개및 재간과 도량이 크고도 아름다워서 자연스럽게 드러난 때문이니 이야 말로 군자가 지향하고 승상하는 것이 아니 겠는가? 하면서 적은 분량이지만 매우 우수한 글들이라고 찬양 하였다,
*公의 차자 학암.시연의 기록중에 부공의 관직을 간약하게 살펴보면,,,
*부공께서 정유년 8월19일 해시에 입암리 외가에서 출생하시어 총명하고 영민하여 5,6세에 글을 알고 9세에 손모당 문하에 수학하면서 한결같이 스승의 가르침에 따르니 재주와 학문이 뛰어나 어린 학동의 학식에 선비들이 놀랐고 감히 동문의 학동들이 모두가 따라가지 못했다, 부공은 14세에 별과 향시에 합격하고 여러번 향시에 응하여 장원하니 과거보던 사람들이 외워서 입으로 전하며 예원의 뛰어난 글이라 칭송했다,
무오년1618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부공께서 광해군의 정치가 어지러움으로 벼슬에는 문을 닫고 성균관에도 들어가지 않으셨다, 이를 두고 여러 사람들이 권하면 말씀 하시기를 나라의 기강이 무너졌으니 벼슬에 어찌 마음에 있겠는가.? 하셨다,
기미년1619년 봄에 집지의 예를 행하고 경전의 뜻을 물으니 장선생(여헌 장현광)께서 심히 공경하고 중하게 여기었다,
1621년에 내금위장이신 숙부님의 喪을 당하여 불효자의 예를 다하고 상을 마치자 계해년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부공께서 비로소 과거에 응시하여 1627년 병과에 급제하니 鄭상국(鄭維城)公이 부공의 글을 보고 기뻐서 재상의 그릇이라고 칭송했다,바로 성균관 학유에 올랐으나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왔고,그해 12월에 다시 성균관 학유에 보임되고,1630년에 용양위부사公 부친상을 다음해에 모친상을 당하여 부모상의 예를 다 마치고 1634년에 학록 겸 춘추관 기사관,학정을 역임했고,을해년에 전직으로 승진하고 그 다음날에 사헌부 감찰로 임명되었고 얼마되지 않아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오고, 또 다시 종사관으로 임명되고 부원수 종사관, 그달에 전직을 내리고 5월에 형조좌랑,6월에 다시 형조좌랑,7월에 예조좌량 겸 춘추관 기사관,9월에 그만두고 낙향하고,무인년 3월에 형조좌량에 불렸으나 나가지않고,5월에 예조에서 병조좌량으로 옮기었다가 6월에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왔고 그해 9월에 병조정량으로 승진하였으나 겨울에 그만두고,을묘년 11월에 양산군수에 부임하고,계미년 겨울에 李晳이석이 경차관으로 고을에 와서 트집을 부리며 위세를 부리므로 관직을 그만두고 귀가 하였으나 관찰사(방백)이 선정을 하였다하며 권고 했으나 끝내 허락치 않고 있다가 연이어 또 다시 왜관 접위관에 임명하니 어쩔수 없이 부임했고,갑신년 가을에 林覃임담이 부공을 칭찬하여 장계를 올려 인조임금께서 교지를 내려 경은 본국의 가야진 신묘를 나라를 위해 중건하여 짐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니 아주 아름답도다 하며 특별히 겉옷과 속옷을 하사하니 경은 받을 지어다,라고 하였다
3월에 임기가 만료되어 귀가하니 임담이 또 칭찬하여 장계를 올려 계속맡게 하였으나 물리치고 부임치 않았다,
그리고 부군께서 인끈을 풀고 귀가해 있었는데 11월에 어사任善伯임선백이 죄로 꾸며 무고하기를 건어물과 생선등으로 착치하여 녹봉으로 사취했다하고 헤아릴수 없는 중죄에 처하여야 한다 라는 장계를 올려 갑짜기 체포령이 떨어져 집안 사람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했으나 부군께서는 조용히 나아가 실상을 추호도 어긋남이 없자 곧 사면되어 돌아옴에 담담한 모습이었고 양산 사람들이 거사비를 세웠다,
정해년 7월에 형조정량을 12월에 예조정량으로,무자년 3월에 그만두고 귀향했다가,5월에 예조정량을,그달에 다시 호조정랑을,6월에 춘추관 기주관을 겸직 하고 7월에 진주목사 겸 춘추관 편수관을 재수받아 8월에 부임하여 임란에 불탄 관아를 중건하고 관민들이 활쏘기와 말타기로 일삼는 것을 부군께서 탄식하고 학풍을 일으키고저 노소할것 없이 두건과 예복을 입히고 훈장을 두고 공부하게 엄히 다스리니 유풍이 크게 변화하였다,
경인년1650년 2월에 동생 호문의 초상을 당하여 부군께서 슬픔을 억제하지 못하여 여러번 사임할 뜻을 밝히고 귀향할 것을 청했으나 허락치 않아 5월에야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는 짐이 서책 몇 짐뿐이었다,
이때 부터 벼슬길에 뜻이 없고 근사록,을 들고 마음을 조용히 하고 사색하며 글의 뜻을 철처히 연구하며 간간이 문인들을 이끌고 양계에 올라 詩를 읆으시며 유유자적 하시고 시내를 의지하여 몇 칸의 집을 짓고 한가히 물러나 강학 할 장소를 삼고저 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임진년 2월에 공산현감에 배수하였으나 병으로 부임치 않았으며 6월에 합천군수에 배하고 은혜로운 왕명이 여러차례 내려오므로 애서 부임했고,또 남원부사로 옮겨가니 남원은 본래 다스리기가 어렵다고 불린 곳이나 부군께서 진주관아 처럼 학풍을 크게 일으키고 문풍이 크게 진작하여 선저을 배푸시니 민참판 응협(閔應協)이 서신을 보내와 경하 하며 말하기를 이조에서 公이 재능과 식견이 있음을 알고 왕에게 아뢰었고 멀지않아 크게 등용할 것이라 하니 이것은 조야의 다행한 일이라고 하거늘 부군께서 눈을 치푸리며 말씀하시기를 돌아가서 내 초당에 누워 맑은 바람을 쏘이는 것만 못하다고 하시었다,
을미년1655년 봄에 약간의 병세가 있었고 그때 조정에서 도망친 사노비를 거두어 들이라는 명령이 지극히 엄하여 이 일을 끝내기 전에는 비록 임기가 끝난 수령이라도 교체하거나 돌아가기를 허락치 않았다,
부군께서 병을 무릅쓰고 사무를 보시다가 7월에 병세가 위독하여 11월에 남원관아에서 돌아 가셨다, 임종시에 모든 아들을 경계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죽은 뒤에 초상을 치르고 운구하는 절차를 검소하고 간략하게 하여 고을의 백성들에게 페를 끼치지 않도록 하라고 당부 하시었다,
喪을 당하니 경내의 사람들이 달려와 통곡하지 않는 자가 없었고 운구할 때 호남의 사대부가 운봉까지 호송하며 글을 지어 슬픈 정을 표한 사람이 많았고 또 겨우 영남의 경계에 이르자 원근에서 맞이하여 호송하려 나온 사람은 모두 헤아릴 수가 없었다,
10월29일에 울산 정족산에 장례하니 향년이 59세 이다,
부군께서 돌아가시고 11년 만에 배위 숙인 월성손씨가 세상을 떠나시니 永川서파 간룡 축좌에 장례하였고 계축년에 부군의 묘를 옮겨 합장하였다,(불초자 시연
*양계정자,영천시 대전동에 있다,
*양계공 3자 취성당 휘 시간의 처소인 (취성당) 영천 자양 신방에 있음,
첫댓글 훌륭하신 분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