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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동학 혁명기념탑(정읍 덕천면 하학리)(사295호)(除暴救民 保國安民)1
사적295호인 황토현 전적지에 세워진 이탑은 除暴救民 保國安民 斥倭洋을 주장하며
일어선 동학농민혁명정신을 기리고 후손에게 길이 전하기 위해서 1963년 8월에 결성
된 추진위원장(가람 이병기)이 동월10월3일에 세웠다.1894년 1월10일(양력2월15일)
고부봉기와 함께 시작된 혁명은 동년 3월 백산대회를 통해 농민군의 진용을 갖추었고
이곳 황토현에서 농민군과 전라감영군이 맞선 최초의 전투가 벌어졌다.1894년 5월10
일(음력4월6일)시작되어 5월11일(음4월7일)새벽에 종료된 전투는 동학농민군의 대승
으로 끝이났다.이탑을 세울당시는 동학란이라 불리던 시절로 농민의 존재와 역할보다
는 동학의 상징성이 강하던 시절이었다.그런 까닭에 농민이 빠졌으나 최초로 혁명이라
는 용어를 사용함으로 기념탑건립의 의의를 갖는다.전서체의 보국안민의 보는 輔가 맞
으나 안보를 강조하던 시대상황의 영향을 받아서 保로 새겨졌다.
갑오동학 혁명기념탑(새야 새야 파랑새야)2
황토현 전적지(濟世門)(사295호)(정읍 덕천 동학로 742)3
1894년 동학농민군과 전라도 관군이 싸워서,동학농민군이 대승을 거둔 장소이다.
濟世門4
황토현 전적지(輔國門.紀念館)5
황토현 전적지(사인보드)6
황토현 전적지(소나무)7
황토현 전적지(紀念館.輔國門)8
황토현 전적지(濟民堂.새정치국민회의 총재 김대중기념식수)9
전봉준의 영정과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사진이 전시되어 있으며 행사시에 강당으로도 사용되는 곳이다.
황토현 전적지(救民祠)10
전봉준.김개남.손화중.동학농민군참전제위 등 4위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나중에 농민지도자 김덕령의 위패가 추가로 봉안되어 있는 곳이다.
전봉준 선생상과 동학농민군의 부조11
동학농민혁명기념관(사295호)(정읍 덕천 동학로 742)12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사295호)(정읍 덕천 동학로 742)13
동학농민혁명기념관(후천개벽도)14
후천개벽도의 내용을 살펴보면
인명을 함부로 죽인자는 목을 벤다.
탐관오리는 뿌리를 뽑니다.
횡포한 부호배는 엄하게 징치한다.
유림과 양반배의 소굴을 토멸한다.
잔민등의 군안을 불지른다.
종문서는 불지른다.
백정의 머리에 패랭이를 벗기고 갓을 씌운다.
무명 잡세 등은 모두 없엔다.
공사채를 물론하고 과거의 것은 모두 따지지 않는다.
외적과 연락하는 자는 목을 벤다.
토지는 똑같이 나누어 경작한다.
농군의 두레를 장려한다.
이것이야말로 후천개벽이 아니고 무엇이 겠는가?
동학혁명 주요인물.말목장터 감나무15
동학혁명 주요인물도
전봉준(1855년-1895년)동학농민군 총지휘대장. 손화중(1861년-1895년)총관령
김개남(1853년-1894년)총관령. 최경선(1859년-1895년)영솔장
최시형(1827년-1898년)제2세동학교주.손병희(1861년-1922년)북접동학농민군대장
말목장터 감나무
말목장터(정읍 이평)는 고부.정읍.태인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 이다.
이곳은 조선이후로 배들평야의 농산물과 부안 줄포의 수산물이 거래되는 큰 장이었다.
고부봉기(1894년 1월10일 음)때 전봉준이 농민군을 정비시컸다.그는 감나무밑에서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학과 비행을 열거하고 고부관아를 점령했다.고부봉기의 첫 집결장소로
150여년을 견뎌내었으나 2003년 넘어지게 되었다.그래서 방부 경화처리를 해서 이곳으로
옮겨 전시하였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동학농민군상-1994년 제작)16
동학농민군상은 화승총을 겨누고 적진을 향해 진격하는 모습을 재현한 것으로 이륙신보
(1894년 8월11일)에 실려있는 동학당원 총졸(총을 든 동학당원)이라는 제하 그림의 복식
과 상당히 비슷함을 볼 수 있다.(좌측위.우측)
1860년 최제우 초상화(4.5동학창도)-1860년 경주에 사는 수운 최제우가 인간평등사상과
후천개벽사상을 바탕으로 동학을 창시하였다.동학은 유불선의 장점을 융합한 한국적 종교이다.
1892년(공주집회터)-10월21일 공주집회-공주에서 동학교조 최제우의 신원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11월2일-삼례집회-최시형의 명에 따라 전라도 삼례에 모여 교조 최제우의 신원과 동학 포교의
자유를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1893년(보은집회터)-보은 원평집회-3월 최시형의 지시에 따라 2만명 동학교도가 척외양의 기
치를 걸고 집회를 열다.전라도 금구 원평에서도 전봉준이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사발통문 봉기계획모의-1893년 11월 전봉준 등 20명은 송두호집에서 조병갑을 죽이자는 사발
통문봉기계획을 세웠다.
1894년 1월(고부관아터)-1월10일 고부농민봉기-전봉준이 이끄는 고부농민들은 조병갑의 수탈과
학정에서 벗어나고자 말목장터에서 봉기하고 고부관아 점령과 만석보를 혁파하였다.
1894년 3월(동학혁명 백산창의비)-3월20일-전봉준은 전라도 무장에서 손화중 도움받아 4000여명
이 모인 곳에서 포고문을 발표했다.
3월26일-백산대회-백산에서 전봉준 총대장.김개남.손화중 총관령으로 하는 지휘체계와 조직을 구성
하고 4대명의.12개조 기율을 발표했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사인보드)17
1894년 4월에서 5월-갑오동학혁명기념탑.동학농민군 진주입성비 등이 세워져 있다.
4월7일 황토현전적지-1894년 4월 황토현에서 전라감영군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4월23일 황룡전투-1894년 4월 장성 황룡에서 대관 이학승이 이끄는 경군과 싸워 크게
승리하였다.1894년 4월 27일 전주성 점령-1894년 전주성을 장악하였다.
1894년 5월 8일 전주화약체결-동학농민군은 전주성에서 철수하고 홍계훈은 신변을
보장
하고 패정개혁안을 임금에게 올린다는 조건으로 총대장 전봉준과 초토사 홍계훈 사이에
타협이 맺어졌다.이를 전주화약이라고 한다.
1894년 6월21일 일본군 경복궁점령-나라가 안정되자 일본군의 철병을 요구하지만
일본군은 경복궁을 점령하고 조선정부를 장악했다.
1894년 6월23일 일본군 청군공격-일본은 청나라와 전쟁을 위한 공작을 펴고 결국
6월23일 아산만 풍도에 주둔한 청군을 공격하여 청일전쟁(7월1일 선정포고)을
일으켰다.
1894년 7월6일 집강소 설치-총대장 전봉준과 전라감사 김학진은 치안질서를 바로
잡기로 하고 전라도내 53개 군현에 집강소를 설치 운영하기로 합의했다.
1894년 9월10일 삼례봉기-전봉준은 전라도 삼례에 대도소를 설치하고 재봉기에 착수
하였다.그후 논산에서 손병희가 이끄는 합류해 남북접 연합군이 형성되었다.
1894년 9월18일 청산기포-동학2세교주 최시형은 함께 기포하자는 전봉준의 의견을
받아들여 충청도 청산에서 접주들을 불러모아 기포령을 내렸다.
1894년 11월8일 우금치전투-공주 우금치에서 관군.일본군 연합군과 맞서 싸웠으나
패전하였다.
1894년 12월2일 전봉준 붙잡힘-전봉준이 순창 피노리에서 체포되었다.
1894년 12월5일 석대들전투-이방언이 이끄는 장흥지역 동학농민군 수만명이 장흥
석대들에서 일본군과 전투에서 패배했다.
1894년 12월18일 북실전투-손병희가 이끄는 북접농민군이 충북 보은 북실에서
패배했다.
1895년 1월24일 대둔산전투-대둔산에서 약3개월 웅거하고 있던 농민군이 습격을
받아 소년1명을 제외하고 모두 전사했다.
1895년 3월30일 전봉준 등 교수형당함-전봉준.손화중.김덕명.최경선 등 주요지도자
가 교수형을 당하였다.
2004년 3월5일(양) 동학농민혁명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공포하였다.
2010년 2월24일(양) 문화체육 관광부 특수법인 동학농민 기념재단이 출범하였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사인보드)18
이앙법은 벼농사를 지을 때 못자리에서 모를 먼저 키운 후 논에 옮겨 심는 경작법이다.
조선시대 전기는 직파법으로 농사를 지었다.
광작은 조선후기에 발전된 농업을 이용하여 보다 넓은 토지를 경작하는 농사방법이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사인보드)19
거문도농부-한국인의 전통적인 농부의 복장이다.
방갓쓴 여인-먼길을 떠날 때 방갓을 썼는데 개성 이북의 복장이다.
도롱이차림-몸에는 도롱이를 입고 머리에 삿갓을 써 비를 막았다(좌위)
절구질-곡식을 찧거나 빻는데 사용한 절구이다.
연자매-맷돌을 소가 끌어 돌리게 하는 정미시설이다(우위)
용마름 틀기-추수가 끝난후 새 볏집으로 용마름을 틀고 있다.
초가지붕의 용마루를 덮은 이엉을 용마름이라고 한다(좌아래)
양반과 농민의 밥상-10세기 후반의 조선 당시 소작농이 대부분이었던 농민
들은 양반지주에게 소작료를 바치고 어렵게 생활을 했던 실정이다(우아래)
조선후기 장시-조선후기 지방 상업은 주로 장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농민이나 수공업자가 서로 물물교환을 하던 장소였다.장날과 장터가
집회일 및 집회장소로 자주이용되는 등 정치적 기능도 겸하였다(중앙)
농민들의 의생활
우리민족을 백의민족으로 부르는 까닭은 백성들이 입었던 옷이 주로 흰색
이기 때문이었다.상류층은 원하는 소재로 옷을 만들어 입었지만
농민은 한겨울에도 베로만든 홑바지 하나로 지내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래서 겨울에 얼어죽은 사람도 많아서 국가는 곡식 뿐 아니라 옷감을 제공
하기도 했다.남자는 바지와 저고리.그위에 두루마기를 입었다.
여자는 치마와 저고리.그위에 두루마기를 입고 윗옷은 유(油).아래옷은
고(袴)(바지고).외투는 포(袍)(핫옷포)의 구조였다.
농민들의 식생활
조선시대 농민은 하루에 두끼를 먹는 것이 일반적이다. 즉 朝夕이라 불렀
다.點心이란 스님들이 새벽이나 저녁 공양전에 문자 그대로 뱃속에 점을
찍을 정도로 간단히 먹는 음식을 가리킨다.19세기 李圭景의 五州衍文長箋
散稿에는 2월-8월(3식).9월-1월(2식)했던 기록이 있다.모내기철에는 다섯
끼.양반집은 뚜껑있는 그릇에 반찬은 3첩.5첩.7첩 반면 농민은 밥.국.김치
가 기본이었다.
농민들의 주생활
농민들은 초가삼간으로 집터는 배산임수 남향집을 선호했다.대문 출입구는
동과 남으로 하고 낮은 담장으로 이웃집과 경계를 표시하고 과실나무를 심
었다.안방바닥은 장판지나 갈대자리를 깔았고 벽과 천장은 문종이를 발랐다.
겨울에는 화로를 놓고 인두를 꽂아 바느질도 했다.온돌은 방고래를 만들고
위에 납작한 돌을 놓아 구들장을 만들어 진흙을 발라 다듬은 다음 그위에 장
판을 놓았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조선시대 조세제도의 변천.조선시대 각종 세금명목)20
조선시대 세금을 내는 계층을 公民. 세금을 내지않는 계층을 私民으로 분류했다.
문제점은 경제기반을 갖춘 가호가 적은점.양반에게 면세혜택을 주는 兩賤制를
기본바탕으로 삼아서 다르게 적용한 점이다.
조선초기 조세체제는 토지세.가호세.인정세 등이었다.그러나 임진왜란.병자호란
이후 좀 느슨해졌다.세수가 줄자 방납의 폐해를 없애는 한편 大同法을 실시하여
토지 1결당 쌀4두로 세금을 고정했다.또 균역법을 실시해 군포를 년2필에서 1필
로 조정했다.그후 세수가 줄어들어 良丁의 수를 높이고 소작농 경작지까지 세금
을 부과했다.
조선시대에는 세금을 이동과정에서 운반비용까지 포함했기에 부과되는 세금이
몇갑절 많아지기도 했다는 것을 속대전 기록을 통해 알 수가 있다.
군정의 경우 16세이하.60세이상노인.이미죽은자(白骨徵布)까지 군포를 거두는가
하며 군역피해 도망간자.납부능력 없는사람.지방관리와 결탁해 빠진사람까지
농민이 부과했다.환곡의 경우도 지방관리가 조작해서 수탈하였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19세기 조세제도의 모순과 문란)21
18세기 중엽이후 조세제도는 田政.軍政.還政(還穀)으로 삼정체제가 기본이다.
전정 즉 토지세는 소작인(생산자)이 납부하고 군정은 16세-60세 良人 장정에게
부과하는데 양반은 면제해 주었다.환정은 보릿고개 때 관에서 값싸게 빌려주는
일종의 빈민구제책인데 나중 국가고리대의 형태로 변질되어 농민들을 수틸했다.
조선후기 세금을 거두는 일을 맡은 수령과 향리는 중앙 지배층과 결탁해서 농민
들을 수탈했다.전정의 경우 허위로 토지를 장부에 올려 몇배 더많은 세금을 징수
했고,군정의 경우 백골징포.黃口簽丁(생후3일의 갓난아기).族徵(가족).人徵(이
웃) 등도 농민들에게 수탈하였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개화사상과 활동)22
개화사상은 실학사상을 계승하면서 중국에서 들여온 서양의 과학서적을 바탕으로
1853년-1860년대 박규수.오경석.유대치 등에 의해 형성되었다.박규수는 청나라로
가서 서양문물을 접해 우수성을 느꼈고 오경석은 역관으로 청을 오가면서 개항의
필요성을 느꼈다.개화라는 용어는 1880년대부터이다.1870년대에 일본의 문명개화
라는 말이 1876년 조선으로 넘어온 것으로 보인다.이 시기의 개화는 문명화.서양
화.부국강병을 뜻하기도 한다.서울에 1899년 5월4일에 처음 전차가 개통되었다.
개화세력의 활동은
김옥균(1851년-1894년).서광범(1859년-1897년).박영효(1861년-1939년)는 박규수
문하에서 실력을 익히면서 차츰 개화사상을 형성해 나갔다.개화파는 일본을 방문할
기회를 얻었고 궁궐내 하급관리나 궁녀들의 지지를 받았다.나아가 상인.수공업자.평
민들의 호응을 얻었다.임오군란 이후 청나라는 내정간섭을 했다.개화파는 1884년
12월4일 수구파를 제거하기 위해서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을 기회로 삼아 일으킨
갑신정변이 그것이다.이 정변은 청의 개입과 일본의 배신으로 3일만에 끝이났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열강의 경제침탈.개항의 과정.이항로.최익현)23
대원군은 개화를 반대하는 쇄국주의를 고수했다.대원군정권이 무너지자 민씨세력이 등장해
일본의 문화개방 요구로 개항이 이루어졌다.일본은 메이지유신(명치유신)을 전후해서 조선에
국교재개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일본은 정한론이 일어났으나 수그러들었다.일본은 명치
유신과정에서 소외된 사무라이계층의 불만을 밖으로 돌리려고 오끼나와를 복속시키고 타이
완을 침공했다.이어서 운양호사건도 일어나 강화도조약체결을 강제하였다.
1876년 2월2일 조선의 신헌과 일본의 구로다 기요다카와 강화도조약을 체결했다.
이처럼 조선의 문호개방은 타율적으로 되었기에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항로(1792년-1868년)는 성리학을 주리철학으로 대성시킨 조선말기의 학자이다.그는 愛君
憂國사상을 衛正斥邪운동의 이론적 근거로 삼았다.위정은 지켜야할 바른것으로 성리학사상
과 그 질서였으며 척사는 물리쳐야할 그릇된 것으로 성리학외의 모든사상과 그 질서였다.
그는 병인양요 때 올린 상소에서 主戰斥和論을 주장하고 천주교를 이단 사설로 규정하였다.
최익현(1833년-1906년)은 위정척사운동을 강하게 주장하였다.최익현은 운양호사건 직후
도끼를 들고 궁궐앞에 엎드려 올리는 척화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최익현외에도 척사
를 주장하는 상소는 계속되었다.개화사상도 부분적으로는 포섭해 근대민족주의 한부분을
형성하는데 기여도 했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紙筒.筆架.筆筒.낫.벽채.함지박)24
紙筒은 글씨와 그림을 그릴 한지와 색지를 꽂기위한 것으로 나무나 백자로 만든 것이 있다.
筆架는 붓을 보관하기 위한 기구로 필격이라고도 불렀다.
筆筒은 보통 문갑위에 놓고 사용했는데,학문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있어야할 문방도구이다.
(좌위)
낫은 벼.보리.콩 등을 수확할 때 사용하던 농기구로 대한제국 때 만들어진 것이다.
벽채는 나무 자루에 반달모양의 쇠날을 끼운 것으로 광산.약초.굳은땅을 일굴 때 사용했다
(좌아래)
함지박은 커다란 통나무를 반으로 쪼개어 그 안쪽을 파낸 것으로 음식물을 담을 때 사용했다.
지방에 따라 함박.함지.도고리.도구리(제주)라고 불렀다.부유한 집에서는 청동이나 놋쇠로
만들어 사용했다(우측)
동학농민혁명기념관(전봉준.손화중.김개남)25
全琫準(1855년-1895년)은 동학농민군 최고지도자로 사발통문거사계획을 주도했으
나 공주 우금치에서 패했으며 이후 순창 피노리로 피신했지만 부하 김경천의 밀고
로 체포되고 이듬해 3월30일 처형되었다.
孫華仲(1861년-1895년)은 동학농민군 3대 지도자 중의 한명으로 황토현.황룡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그러나 1894년 12월11일 체포되어 전봉준과 함께 35세 나리로 처형
되었다.
金開南(1853년-1893년)은 농민군 3대 지도자중의 한명으로 태인접주로 활약했다.
농민군 총관령으로 황룡전투와 황토현전투를 이끌었으나 태인에 은신하던 중 임
병찬의 밀고로 12월1일 체포되어 12월3일 전라감사 이도재로 임의로 처형 그 때
나이가 42세였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19세기 농민봉기.고부농민봉기)26
19세기 농민의 생존권은 다양하게 전개되었다.抗租투쟁(체납.거부).訛言(소문).擧火(밤횟불)
呈訴(청원서) 등의 방법으로 저항했다.1862년 철종(13년) 때 부터 삼남지방에서 빈번이 일어
났다.양상은 병부탈취.감옥사람 풀어주기.세금장부 불태우기.향리잡아들이기.수령을 죽이지
는 않았다.처음엔 수령을 처벌.수습이 안되자 삼정이정청설립.삼정이정절목을 반포했다.
그러나 3개월도 못가 중지했다.1864년(고종원년) 다시 봉기가 일어났다.1888년(고종25년) 전
국적으로 일어았다.드디어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게 되었다.
1894년 1월9일 조병갑이 다시 고부군수로 발령이 나자 고부의 농민은 다시 거사를 하게
되었다.1월10일 말목장터에서 전봉준.김도삼.정익서 등의 지휘로 고부관아를 점령했다.
양곡 나누어주고.억울한 옥살이는 풀어주고.보는 헐어버렸다.그후 조병갑을 유배형에
처하고 고부군수로 박원명.안핵사로 이용택을 파견했다.그후 3월초순에 해산했고 전봉
준과 동학교도들은 이웃인 무장현의 손화중 대접주와 합류했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사발통문-우측).송택렬기탁(유233호)27
임술농민봉기 발생지역의 지도이다(좌측위)
옛 고부군의 모습으로 갑오년 당시에는 전주 다음으로 큰 고을이었으나 일제 때
해체되어 일개 면으로 전락했다.그러나 여러 유적들이 남아있어 당시를 생각해볼
수가 있다(좌중간)
고부초등학교로 옛날 고부관아터만 남아있다(좌아래)
沙鉢通文은 동학농민군 지도부가 남긴 유일한 기록으로 1893년 11월 정읍 고부
신중리 주산마을에서작성되었다.조병갑의 폭정을 징치하고 전라감영을 점령하며
서울로 직결한다는 결의가 담겨있다.서명자는 전봉준.송두호.송대호 등 20명이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만석보수세.백산봉기.황토재전투)28
곡창지대인 호남중에도 고부는 물산이 풍부했던 곳이다.조병갑의 횡포는 대단했다.
그는 태인현감을 지낸 아버지 조규순의 공적비를 세운다는 명목으로 20만량이나
거두었다고 한다.가장 실정은 만석보를 허물고 새로운 보를 만든 것이었다.
백산봉기는 무장현에서 출발한 전봉준.손화중이 이끄는 동학농민군과 김개남 등
많은 동학교도들이 움직였다.그들은 격문과 명의12개조의 기율을 선포하였다.백산
격문은 동학농민혁명의 출사표였다.4대명의는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말고 가축을
잡아먹지 말라.충효를 다하여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라.일본 오랑캐는
몰아내고 나라의 정치를 로 잡는다.군사를 몰아 서울로 쳐들어가 권귀를 모두 없
앤다.
12개조기율은 항복하는 자는 대접한다.곤궁한자는 구제한다.탐학한 자는 추방한다.
순종하는자는 정복한다.도주하는자는 쫒지 않는다.굶주린자는 먹인다.간사하고
교활한자는 그치게 한다.빈한한자는 진휼한다.불충한자는 제거한다.거역한자는
효유한다.병든자에게는 약을 준다.불효자는 죽인다.
황토재전투는 백산에서 전열을 정비한 동학농민군과 전라감영의 지방군이 벌인 첫
전투로 1894년 3월25일 백산을 출발해 부안을 경유.4월6일 고부 도교산에 진을 쳤다.
황토재전투는 정규군과 첫전투에서 큰 승리였고 이후 기세를 올리는 기반이 되었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전주성점령.무장기포.무장객사)29
전주성점령은 1894년 4월27일의 일로 동학농민군이 거둔 최대의 승리이다.
이로서 4월29일 어전회의에서 청나라 지원을 요청하게 되었다.
武將起包는 1894년 3월20일 무장현 당산에서 창의문(포고문)을 낭독하고
기포를 단행했다.起包는 동학의 조직인 포를 중심으로 일으킨 무력투쟁이다.
무장현은 1894년 3월20일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로 사진은 무장현객사(우측)
동학농민혁명기념관(선우사 미륵불과 무장농민군.양호초토등록.완산전투)30
선운사 미륵불과 무장농민군-선운사 이 석불은 3000년전 검단선사의 眞像으로
이 석불배꼽에 신기의 비결이 들어있으며 비결이 세상에 나오는 날은 한양의
몰락한다는 말이 자자했다.손화중 부대가 그 비결을 도끼로 부수고 끄집어 냈
다는 이야기가 있다.
양호초토등록은 1894년 4월부터 초토사 홍계훈이 주고 받은 여러 문서들을 등
록한 것이다.내용은 장계.이문.감결.전령.포고.방문.효유문 등이다.
완산전투는 전주성을 두고 1894년 4월28일-5월3일까지 벌린 전투를 말한다.
용장 김순명.아기장수 이복용 등이 활약했지만 사기가 껶여 전주성에서 퇴각
하고 전주화약을 맺었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장태.洪啓薰 諭書.兩湖招討謄錄)31
장태는 닭과 병아리를 넣고 기르던 도구로 첫승리를 거둔 장성 황룡전투에서는
무기로 사용했다.장태에 볏집을 가득넣고 그 뒤에서 총알을 피하거나 경군을 막
는데 사용했다.
홍계훈 유서(유234호)는 고종이 1894년 4월2일 고종이 홍계훈에게 양호초토사로
임명한다는 명령로 전주화약은 홍계훈과 전봉준 사이에 이루어졌다.
兩湖招討謄錄 복사본으로 1894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일기체로 기록한 것이다.
내용은 狀啓(의정부).甘結.傳令.傍文(전라군현).移文.曉諭文(전라감영.충청감영)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집강소)(지방자치.농민통치.운영형태.운영실태)32
執綱所는 동학농민군이 점령한 각읍의 통치를 담당하기 위하여 접을 설치하고
접주를 뽑아 일을 보았다.오늘날 시장.군수와 상통한다.집강.서기.성찰.동몽 등
을 선출했다.
집강소의 농민통치기간은 7개월에 불과했지만 역사적의의는 매우 크다.자치
단체의 효시라고 할 수가 있다.
집강소의 운영형태는 동학군이 막강한 세력을 행사한 지역으로 전주.금구.태인
남원.임실.웅포.함열.정읍.고부 등이다.
농민군이 우세하지만 지배권력과 협조한 지역은 순창이다.
동학농민군의 세력이 약했던지역은 나주.장흥.운봉.강진 등이 대표적이다.
집강소 운영실태는 설치는 했지만 곧 폐지되고 보수지배층이 장악한 지역이다.
장수.용담지역이 이곳에 속한다.
보수지배층이 처음부터 집강소 설치를 반대한 지역으로는 운봉이 있다.
동학농민군을 탄압하기 위한 보수집강소도 있었는데,영남의 예천.상주지역이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집강소)(설치.조직.활동.남원대회)33
집강소설치는
1894년 7월6일 전봉준과 김학진이 만나 전라도 53개 군현에 집강소설치를 합의했다.
집강소조직은 집강(집강소 총책임자).서기(각종문서 장부정리.비서).성찰(치안감찰)
집사(행정담당).동몽(전령.간부호위)으로 이루어졌다.
집강소활동은 탐관오리처벌.신분제도폐지 등 폐정개혁이었다.집강소는 탐관오리를
잡아내고 농민을 착취한 부호들을 응징했다.전정.군정.환정 등 삼정개혁을 시도했다.
남원대회는 폐정개혁을 추진하던 1894년 7월 전봉준.김개남이 농민집회를 개최했는
데,이를 남원대회라고 한다.전봉준이 남원대회를 연 이유는 김개남의 강경노선을 무마
하기 위해서였다.김개남도 나중에 지지했다.김학진의 행정체제와 전주대도소를 중심
으로 하는 집강소체제가 양분되었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남원집회)34
동학농민혁명기념관(별기군복.관군구군복.관군나졸병)35
별기군복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별기군의 군복차림이다.
별기군은 1882년(고종19년)에 설치된 조선의 신식군대로
일본의 육군 공병을 교관으로 삼고 100명이 훈련을 받았다.
관군구군복은 포도대장.훈련대장 등이 입었던 전복으로 붉은
색 동달이 위에 이를 입고 남색 전대를 띠며 병부 주머니를 늘
어 뜨리고 등채를 든다.
관군 나졸병 즉 나졸은 포도청의 하급병졸을 지칭하는 말로
이들은 관할구역의 순찰과 죄인을 체포하는 일을 맡았다.
흰 무명저고리 위에 흑색 무명 전복을 입고 허리에는 전대를
매고 벙거지를 썼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농민군복.일본장교복)36
농민군복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동학농민군이 입었던 옷이다.
일본장교복은 동학농민전쟁 당시 일본군이 착용했던 복장으로 1886년 개정된 제복이다.
상하 흑색으로 모자는 타원형이고 상의 세운 깃의 근골형이다.하의에는 홀태바지에 검정
색 각반 또는 흑색 가죽장화를 착용했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소포.무라타소총)37
소포(고종11년)는 청동제 전장식 화포로
병인양요.신미양요 때 서해안에 고정 배치하였던 포로서 동학혁명 당시 관군의 최신무기였다.
무라타 소총은 일본 메이지정부가 직접 개발한 것으로 1871년(고종8년) 각 번이 소유하고 있던
병기류를 이관토록 하였다. 1878년(고종17년)총포류의 통일을 기하기 위해 무라타 츠네요시가
소총개발을 했고 그의 이름을 따서 무라타 소총으로 불렀다.1882년(고종19년) 일본군에 배치
되어 청일전쟁 때 본격적으로 사용했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일본군의 경복궁 침입.청일전쟁)38
일본군의 경복궁 침입은 동학군 진압을 위해 청국군대를 끓여 들였다.이에 일본도 이것을 기회로
1894년 5월.6월 4500여명이 서울로 진격했다.일본군이 경복궁에 들이닥쳤다.고종은 포로가 되었고
민씨일파는 추방되었다.일본군은 고종을 강요하여 대원군에게 모든 정치를 위임한다는 명령을 내
리고 김홍집을 수반으로 하는 친일정권을 수립했다.
청일전쟁은 1876년 강화도조약을 체결했으며 1882년 임오군란 때 일본은 제물포조약을 체결하여
병권을 장악했다.1884년 개화파를 앞세워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그러나 정변은 실패했다.
다시 동학농민군이 1894년 전주를 점령하자 청국의 원병을 청했다.그후 일본은 북양함대를 격멸
함과 동시에 대만점령을 위해 팽호도 작전을 별렸다.일본에게 패한 청국은 1895년 3월 강화도
조약을 조인하였다.일본은 4개조항의 특권을 인정하는 통상조약체결 등을 얻었다.이후 일본이
중국에 본격적인 침략이 시작되었고 동아시아 지역에서도 제국주의시대의 서막이 올랐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일본군 내정간섭.갑오개혁.삼남각지 척왜봉기)39
조선은 교정청의정혁폐12개조항은 동학농민군과 대부분 일치했다.그러나
1894년 6월21일 일본군 경복궁 침입사건 이후 개혁안은 시도조차 못하였다.
1894년 6월25일 군국기무처가 설치되고 김홍집 친일내각이 출범했다.
갑오개혁은 청일전쟁후 1894년(고종31년)7월31일 내정개혁방안요령5개조항
으로 청의 원세개는 본국으로 돌아가고 친일개화당이 집권했다.동년12월 군국
기무처는 의정부와 궁내부 2부를 두고 의정부에는 8아문을 두었다.그후 군국
기무처는 폐지되고 홍범14조를 만들어 내정개혁을 했다.갑오개혁은
조선의 제도.경제.사회의 대개혁으로 근대화 과정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삼남각지의 척왜봉기는 일본군 경복궁침입 이후 동학군의 해산하지 않고 여러
곳에서 척왜봉기를 했다.7월.8월에 이르러 일본이 사람.물자를 심하게 징벌함
으로 삼남지역 전체로 확대되었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농민군북상.삼례봉기.재봉기배경과 대원군밀지)40
농민군북상에서 전봉준은 자신을 양호창의영수 즉 호남과 호서의 창의군대장이라
칭하고 손병희가 이끄는 동학농민군과 합해 하나의 조직으로 만들었다.전봉준.손병
희는 북상하고 김개남은 전주에 남고 손화중.최경선은 후방을 수비하게 되었다.
삼례봉기는 1892년 교조신원운동을 위한 취회가 열렸던 동학농민군의 중요거점 중
하나였다.
대원군은 동학농민군에게 밀지를 보냈다.삼남각처의 양반과 보부상 뿐 아니라 동학
농민군까지 다같이 일어나 국가의 운명을 위태롭게하는 간신과 국가를 위협하는 일본
군을 치고 나라를 구하라 는 내용이다.대원군은 동학농민군을 이용해서 일본을 몰아낼
려고 힘을 다했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금성정의록.대원군 효유문.동학농민군2차진격로)41
錦城正義錄은 나주 수성군과 동학군의 전투상황을 기록한 대표적인 문건으로
나주 유생 겸산 이병수의 문집이다.
대원군 효유문은 나는 그대들의 연민의 정을 느낀다.그대들은 도당을 짓는 것은
불가피했다.그대들을 난민으로 부르는 것을 참을 수 없다.왕화로 돌아와 생업에
종사하길 바란다라는 내용이다.
동학농민군의 2차 진격로가 나와있는 우리나라지도로 해주에는 동학접주 김구
논산.노성은 전봉준.손병희 남북접연합 농민군.손화중.최경선 농민군.홍천.강릉
차기석 농민군.옥천 김복용.이희인 농민군.금산.진잠 김계남 농민군 등이 활약했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細城山 戰鬪.利仁 戰鬪.孝浦 戰鬪.熊峙 戰鬪)42
동학농민혁명기념관(牛金峙 戰鬪)43
동학농민혁명기념관(우금치전투이후.농민군지도자처형.최후의항쟁)44
동학농민혁명기념관(녹두장군 전봉준 심문장면)45
동학농민혁명기념관(장흥 동학농민혁명기념탑.각세력별 이후흐름.조선을 둘러싼 국외상황)46
동학농민혁명기념관(농민군이 바라던 세상.동학농민혁명의 현대적의미.평등사회를 이루고자)47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을 나오면서48
(2018.05.05)
첫댓글 정읍의 동학농민혁관련 제 기념물을 만들어 그 당시의 상활을 기린 모습이 참 잘 되어 있구나. 그 때 나라 정치를 맡아 한 사람들이 올바르게 하였다면 동학혁명이 없었을 거고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의 아까운 목숨이 힘없이 사라지지도 않았을 터인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구나. 지금도 우리 국민들 중 나라 보다 사욕에 빠져 잘못된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이 있지 않아 개탄해 본다네.
당시 위정자들의 핍박으로 백성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요즈음도 정치하는 사람들이 잘해야 될텐데...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