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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리 한반도 둘레길 9구간
선구자길 : 용정시 ~ 대성 중학교 ~ 용두레 우물터 ~ 재래시장 ~ 일송정
거 리 : 72km
9일차 오늘은 용정시 선구자들을 따라서..
전일정중 시간이 가장 많은 날로 여유로운 조식을 마치고 9시가 넘어 호텔 로비에 모여 들어 용정으로 출발..
연길서 용정까지 19km의 가까운 거리 15분여 조금지나 윤동주 시인 모교 대성 중학교 도착
정문을 들어 서자 우측 정면에 윤동주 시비가 나온다.
윤동주 대표적인 시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 했다
별을 노래 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 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서시의 내용이다.
지금 시대서도 어떻게 살아 갈 것인가. 많은이들에게 교훈을 남기는 글귀로 윤동주는 당시 암울한 시대 민족의 양심을
지켜주던 대표적 항일 저항 시인으로 1917년 용정서 가까운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용정서 소학교를 마치고 평양의
숭실 중학교를 졸업 다시 서울 연희 전문학교(연세대학교)에 진학 한다.
이후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되고 교토 도시샤 대학 영문학과를 단니다.귀국도중 일본 순사들에 체포돼 독립운동 혐의로 2년형을
선고 받고 후쿠호카 형무소에 수감 되나 광복 6개월을 앞둔 1945년 2월 28살의 나이로 의문의 옥사를 당한다.
당시 시신을 거둔 윤동주의 부인의 증언에 따르면 온몸에 많은 주사 자국이 남아 있었고 일본군의 약물 실험 대상으로 희생
되었다는 주장이 제기 되었으나 지금것 아무것도 밝혀진것이 없다.
1층에 자리한 용정중학 역사 전람실을 먼저 들린다.
짚신이다.
짚신을 신고 더 넓은 북간도를 개척한 선조들의 개척 정신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아련하게 다가오는 노란 벤또
국민학교 시절만해도 일제 강점기 36년의 문화를 청산 하지 못한 채 소학교를 국민학교, 도시락을 벤또라 하던 시절이
우리 시대에도 있었다. 지금 연변에서 초등학교를 소 학교라 부르는 명칭은 우리글 그대로다. 그러나 제 1중 2중등으로 서열이
매겨져 있는 1중,1고중등 학교명은 고스란히 일제 강점기 36년 문화의 잔재들로 이제 연변 조선족 사회에서도 서서히 정리가
되어야할 싯점이다.
다시 2층 전시실
역사관 해설사의 설명이 이어진다.
용정 중학의 지나온 발자취와 용정 중학을 졸업한 윤동주를 비롯 많은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다.
1880년대 조선 백성들의 이주 초기 열악한 환경들
사극을 보는 듯 마음이 쨘하다.
조선민족을 대표해 침략자 이또 히로부미를 할빈역 광장에서 조선 민족의 이름으로 공개 처형한 안중근 의사에 대한 설명도
이어진다. 민족의 자긍심을 더 높힌 큰 사건이었지만 지금 우리 사회서는 민족의 이름으로 총살형을 집행한 안중근 의사가
테러리스트이고 김구 선생을 테러리스트 지도자라고 비하하는 반민족 사기극우 친일 단체들도 있다.
이들은 과연 무엇을 숨기고 두려워 할까??
조선의 마지막 총독 아베 노부유키가 2차대전에서 패하고 조선을 떠나며서 우리는 패했지만 조선은 승리 한것이 아니다.장담
하건데 조선 백성들이 제정신을 차리고 찬란한 옛 영광을 되찻을려면 10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도 힘들것이다.우리 일본은 총칼보다
더 무서운 식민사관을 조선에 심어 놓았다 결국은 서로 이간질 하며 노예적 삶을 살것이다.보라 조선은 위대했고 찬란 했지만
조선은 식민 사관의 노예로 전략 할것이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온다 1945년 9 15일 일제 패망후 조선을 떠나며서
남긴 연설문이다. 아베 노부유키의 예언은 지금 우리 사회 곳곳에서 정확히 맞아 떨어지고 있다.. 지금것 친일파 정권 이승만.박정희.
전두환.이명박.박근혜로 이어지며 70여년넘게 보수를 위장한 이들 친일 사기보수 부패 정권에 부화뇌동이나 세뇌화된 어리석은
백성들 또 꼴박들 아베노부유키는 당시에 벌서 정확히 예언 했다.
그 대표적 단체가 조,중,동 신문 방송 언론. 자유.새마을.노인.어버이. 엄마등등의 할매 단체 가스통 할배들. 박살모등
일부 눈먼 군.경 제복 단체와 탈북 단체등으로 이들은 친일 정권의 부역자들로 완장 하나 얻어차고 목청을 높이며
친일 사기보수 부패 정권의 홍위병 역할을 충실히 해내며 된장인지 배설물인지 구분 자체를 해내지 못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대성중학교 출신자들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듣고 마무리 한다..
수고 하셨습니다.
해설사의 너무 경직된 표정과 기계같은 설명이 조금은 아쉽다.
1시간정도 대성중학교 역사관 관람을 끝내고 정문으로 나선다.
대성 중학교 교문을 나서 좌측으로 300m여 지점에 위치한 용두레 우물터 방향으로
거리 투어..
도로변 한 켠에서 할아버지들 10여명 모여 앉아 지나는 사람들을 바라 보면서 하루를 소일 하는
우리 조선족 할아버지들..
할아버지 연세를 묻자 84살이다고 한다. 이주민 2세대에 해당하는 연세들이다.
올해가 광복 70주년응 맞이하는 해 14살에 8.15 광복을 맞이 하였으면 당시를 고스란히 기억 할 것이다.
할아버지 고향을 묻자 함경도라고 한다.
할아버지 한번 웃어 주세요.표정에는 70년이 넘는 망양의 한 이주기의 아픈 기억들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주머니에 있는 사탕 한움큼 전하면서.. 할아버지 건강 하게 오래 오래 사세요.
저분들의 피와 땀으로 일구어 낸 북간도다.
참 마음이 쨘하다..
.용두레 우물터 100m쯤 남겨 두고 지나는 자전거 택시를 잡고 개장사 동지를 만난 듯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승차를 한다.
요금이 5원이다. 택시는 2여년전이나 지금까지 5원이나 자전거는 20여년전 1원의 요금이 5섯배나 뛰어 올랐다.
자전거 넘버가 이 25로 관계 기관에 등록된 개인 자전거 택시다.
왼손 내리면 좌회전, 오른손 내리면 우회전 참 재미나는 수신호법이다
용두레 입구에 접어 들자 학생들로 보여지는 두 아가씨가 보인다.
조선족 대학생들로 연길에서 용두레 우물을 보러 왔다고 한다. 10여년전 우물터 주변은 조선족 할머니들이 모여 아리랑등을 부르며 망향의 한을 달래며 춤판이 벌어지던 용두레 주변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차지였고 조선족 여행객은 거의 없었다. 사회 생활이
윤택해지면 역사등 문화의 뿌리를 찾아 나서는 것이 어느 사회던 공통점일것이다. 연변 조선족 사회도 이제 서서히 경제적
여유를 찾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참 반가운 일이다.
선구자 가사에 등장 하는 용두레 우물터
용두레는 19세기 중반 함경도 백성들이 도둑 농사라고 일컬어지던 당시 황무지 벌판이던 이곳에 여진족 유목민들이 사용한것으로
추정되는 작은 샘터가 발견 되었고 이후 1881년 청나라의 봉금령 해제와 1885년 이주 금지령까지 해제 되면서 용두레 우물터를
중심으로 함경도 백성들이 더 많이 모여 들었으며 우물도 더깊이 파고 축을 쌓아 지금의 형태로 만들어 갔다
수년만에 주변 황무지가 옥토로 변해 갔고 조선 백성들이 보여준 결집력과 개척 정신이 합쳐 북간도 최초의 공동체 마을이
들어 서고 어느날밤 우물에서 용이 승천 하였다고 하여 용정이다는 지명도 이곳 우물에서 유래가 된 것이다
솟아 나는 샘물이 궁금해 우물터 내부를 볼려 하나
두껑으로 봉해져 있다.
다시 용두레 우물터 좌측으로 들어 서면 바로 용정 재래 시장이다.
참 재미나는 글..
개탕
소탕
콩장
꾸밈없는 조선글 순박함이 그대로 묻어 있다.
기념 찰영차 다가 가자.군고구마 장사 아주머니가 부끄러워 한다.
고구마 장사나 개장사나 부끄러워 마소 우리는 같은 동지다며 만주 개장사가 다가간다.
해산물이 많이 보인다.
용정은 북간도 내륙 도시며 바다와 거리가 멀다. 현재 북한과 교역이 활발히 열려 있어 북한 나진 선봉에서
수입이 되는 동해산 해산물로 추정이 된다.
북간도의 차가운 날씨속에 신선한 채소들이 많이 출하 되고 있다.
사람사는 세상이 이곳도 우리와 다를바가 없다.
용정의 마지막 일정 일송정을 남겨두고 청주의 이선생이 다가온다. 아버님이 생전에 남겨준 용정 인근 시골 주소를
하나 들고 70여년전 아버지와 헤여진 종고모님을 찻아 나선다며 잠시 팀을 이탈 다녀 오겠다고 한다.
조심히 다녀 오세요 택시를 불러타고 떠난다.
70년이 넘은 이산 가족사
청년의 고향은 함경도 회령서 가까운 산골 마을로 회령과 용정은 행정 구역상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맞닿아 있고
용정시까지 100여리길의 가까운 거리며 또 회령 용정간 철길이 두만강에 가장 먼저 놓여져 양지역은 더욱 가까워졌고
이후 용정은 빠른 인구 증가로 급속히 도시화가 진행 되면서 은진.광명.영신.대성.동흥 또 명신 여자 중학교까지 6개의 조선인
중학교가 한꺼번에 들어서 당시 신교육에 대한 조선인들의 높은 열망과 교육열을 짐작 할수 있다.
회령 인근 산골에서 독자로 태어난 청년은 회령서 소학교를 마치고 아버지의 권유로 용정 중,고등학교를 입학 하고 졸업을
하게 되며.이후 고향 회령으로 내려가 규수를 만나 혼인을 치루고 20대 어느새 2남 3녀의 아버지가 되었고 다복한 자식들을
생산한 청년은 독자로서 아버지에게 더한 효자 노릇을 다하며 지역 사회 엘리트 계층으로 장래가 축복 받는 청년이었다.
그러나 청년과 아버지의 운명은 여기까지다.
곧 바로 광복을 맞이 하나 기쁨도 잠시다.
북쪽의 절대 권력자 김일성은 가장먼저 토지 개혁을 시작 하면서 선대로부터 일구어 놓은 문전옥답은 하루 아침에 다 몰수가 되고
엘리트 계층인 청년은 또 부르주아로 몰리며 신변의 위험까지 느낀다. 더이상 공산당 사회서 희망이 없다는것을 감지한 아버지는
월남을 결심 하고 위험이 좁혀오는 아들에게 먼저 남쪽으로 피신 하라는 당부를 한다.
처 자식을 남겨 두고 청년은 급히 회령을 떠나 어렵게 38선을 넘어 겨우 서울로 피신 한다.
이후 남쪽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서고 38선은 더욱 경계가 강화 되며 38선은 곧바로 철조망이 쳐져 철의 장벽이 되버리고
더이상 남북의 왕래가 힘들어진다.
한순간에 부모님과 5남매 처자식을 생이별 하고 곧 이어 남북 전쟁이 일어나자 청년은 사선을 넘나들며 가족의 생사를 찻으나
회령의 가족과 더이상 인연이 닿지 않는다. 전쟁이 끝나고 청년은 고향 산세가 빼닮은 강원도 태백을 찻아 들었고
밤이면 북녘 하늘을 바라 보며 이산의 한을 삭이며 지샌밤이 삼천육백날이 넘었다. 당시 독재자 박정희와 김일성의 남북 관계는
이산 가족들의 실낱같은 희망 마저 접게 만들었고 청년은 이곳에서 다시 재혼을 하게 되고 늦둥이 아들을 하나 얻는다.
아들이 크면서 반세기에 걸친 아버지의 굴곡진 회령의 가족사를 듣게 되고 이후 1992년 한중 수교가 열리기 직전 청년은 어느새
백발이 되어 남쪽의 늦둥이 아들에게 북녘에 두고온 회령의 형제들을 꼭 찻아보라는 당부와 이산의 한을 남겨두고 눈을 감는다.
늦둥이 아들이 지금 실낱 같은 희망을 갖고 아버지가 남긴 70여년전 주소로 용정 인근에 살았다는 종고모님을 찻아..
핏줄의 생사를 찻아 나서는 그 뒷모습이 3대에 걸친 아버지들의 애잔한 부정이 찡하게 다가온다.
뒷 이야기는 후일 이어진다.
용정에 처음 들어선 은진, 광명,영신,대성,동흥 중학교는 후일 용정 중학교로 통합이 되며 다시 대성 중학교로 개명이 된다.
당시 용정 중학교는 6년제로 중고등을 통합한 과정이었고 윤동주 시인과 문익환 목사는 은진 중학교 출신들로 후일 대성
중학교로 통합 되며서 지금까지 대성 중학교 출신으로 전해지며. 용정 중학교도 같은 맥락이다..
1984년 남쪽에 살고 있는 용정고등학교 출신들의 모임에서 당시 회령의 청년..
이선생과 잠시 헤여지고 다시 택시로 10여분
일송정 시비다.
일송정 푸른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곳에 거친꿈이 깊었나
용두레 우물가에 밤새소리 들릴때
뜻깊은 용문교에 달빛 고이 비친다.
이역하늘 바라보며 활을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곳에 거친꿈이 깊었나
용주사 저녁종이 비암산에 울릴때
사나이 굳은마음 깊이세겨 두었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곳에 거친꿈이 깊었다.
일송정에 서면 혜란강이 한눈에 들어 온다.
가곡 선구자는 당시 북간도 지역에서 나라를 되 찻겠다는 독립군들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청산리 봉오동 전투)를 지켜보다
너무 큰 감동을 받은 윤두영씨가 당시 작사하고 조두남씨가 목단강에서 작곡 한 곡이다.가사에 등장하는 일송정 푸른솔은
당시 500여년 가까운 아름드리 소나무였지만 이 소나무가 조선 민족의 기상을 상징 한다고 하여 당시 일본군 사격 연습용
과녘으로 사용 하였으나 나무가 죽지 않자 일본군은 다시 나무에 구멍을 뚫어 화약가루를 넣어 고사 시켯다는 잔악한 역사의
증언들이 지금도 용정에서 전해 내려 오고 있다.
지금 저 작은 소나무는 한국의 시민 단체에서 지원받아 1992년 복원 시킨 소나무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 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참 아리다.
이곳 북간도 문제를 우리는 언제까지 지켜 보고 감상에만 젖을 것인가??
일본이 조선의 국권을 참탈후 장물로 청나라와 체결한 간도 협약은 무효다. 누구 한 사람 나서는 이가 없다.
북간도 만주 문제라면 먼저 놀라는 우리 정치권과 일본 만주(장춘) 군관학교 출신들로 3공화국 박정희와 백선엽
육군 대장등 반민족 친일 행위자들의 후손들이 있다.
박정희 백선엽등은 북간도 근무 당시 일본 관동군 장교로 친일 조선인으로 구성된 간도 특설대나 독립군 토벌대 장교로서
독립군 토벌에 앞장서 일본 천왕에게 충성을 다한 악질 친일 반민족 행위자들이다.
우리는 광복이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 당시 이승만 정권은 이들을 처단하지 못한채.. 오히려 이들과 공모하여 친일 반민족 행위자
처단 특별 위원회가 이들의 친일 집단에 의해 강제 해체 되었고 이후 이승만은 이들과 부정한 방법으로 권력의 주체가 되면서
선량한 국민들의 눈을 가리고 국가 권력을 독점 하면서부터 우리 사회는 지금까지 많은 혼란이 잉태 되었던 것이다.
이들이 아직 살아 있고 그 후손들이 북간도 해결점을 찾기란 까마귀 백로되기 만큼이나 어렵고 이들이 다가서는 순간 이곳에서
행해진 지난 친일 반민족 행적들(훈춘사건 간도참사등)이 낱낱이 까발려지고 지금 까지 진실을 알지 못하는
많은 국민들에게 세세히 알려지는것이 이들은 지금 가장 두려워 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북간도(만주))는 일본군 2개 군관 학교가 있었다.신경(장춘) 군관 학교와 남경(봉천) 군관학교며 이곳은 일본 천왕께
충성을 다 바치는 일본군 고급 장교를 배출하는 곳이다. 당시 영혼을 잃어버린 소수의 조선 백성들이 당시 이곳에 앞다투어
입학 한다.
박정희는 문경 소학교 선생으로 당시 사회서 가장 존경받는 직업이었으나 아이들마저 팽개치고 자신의 삐툴어진 야망을 드러내며
장춘 신경 군관학교에 원서를 제출 한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첫해 낙방을 하고 다음해 손가락을 잘라 혈서로 일본 천왕께
충성을 맹세한 댓가로 다까기 마사오로 개명을 하고 입교를 하게 된다. 졸업후 일본 정규 육군 사관학교로 다시 편입 하게되고
이곳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하게 된다.
초급 장교들에게 일본 천황이 내리는 큰칼을 옆구리에 차고 이들은 악명높은 간도 특설대나 독립군 토벌대등에
배치 받아 민족을 상대로 갖은 악행을 저질렀고 광복후 이수선한 시국을 틈타 이승만의 비호를 받으며 대한민국 국군과
정부 각부처에서 중요한 요직을 다 차지 한다.
신경(장춘) 군관학교 출신으로 이주일 육군대장 (후일에는 감사원장), 이한림 육군 중장, 김동하 해병대 중장 등이 있다
광복후 남쪽은 미군정 치하서 좌,우 이념 대립으로 대혼란의 연속이었고 .당시 박정희 형 박상희는 남로당(공산당 깅일성 계열))
경북도당 위원장으로 경북 선산에서 비밀리 활동 하다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 한다. 이당시 대혼란기를 틈타 박정희는 대한민국
국군 장교로 들어가 근무중 형에 이어 비밀리 남로당 빨겡이당 가입을 하고 군내부 남로당 군핵심 간부로 활동 하며.
형제는 함게 대한민국 빨겡이 원조가 된다. .
1948년 10월 여수지역 남로당 지역 공작 책임원 이재복의 지시로 국방 경비대 14연대내 활동중인던 남로당 빨겡이당
군 공작책 김지회 중위 홍순석 중위등이 반란을 일으켜 14연대를 이끌고 여수와 순천지역을 한순간에 장악해 버린다.
군반란 사건에 놀란 이승만 정권은 육,해,공군을 동원 반란군을 진압후 대대적인 군내부에 침투해 활약중인 남로당 빨갱이들의
색출 작업에 들어 간다. 이때 14연대 패잔병들은 지리산과 덕유산으로 숨어 들었고, 이들이 한국 최초의 지리산 빨겡이
덕유산 빨겡이 백두대간 빨겡이 원조가 된다. 이때 군내부 남로당 지휘 챔임자 간부들이 걸려 들면서 박정희 소령도 체포 되고
군사 재판서 사형을 언도 받은 박정희는 군내부 남로당 비밀 조직원 간부들의 명단을 털어 놓기 시작 한다.
당시 육군본부 정보 국장이면서 자신의 재판관이던 백선엽과 따로 대면 하는 자리서 말이다. 백선엽은 만주 군관 학교
박정희 일본군 선배다. 선배님 나를 한번만 살려 주실수 없겠습니까.백선엽은 무심결에 '도와 드리지요.'라고 1989년 백선엽의
군과 나 회고록에서 밝히고 있다.
그리고 1개월후 남로당 간부급 군 동료들은 다 형 집행이 되지만 박정희는 남로당 빨겡이 동지들을 배신한 댓가로 사형에서
감형이 되고 곧바로 석방으로 이어진다. 민간인으로 돌아간 박정희는 얼마 후 만주군관 학교 출신들로 당시 육군참모총장등
군의 실세였던 백선엽, 정일권, 원용덕, 김백일 등의 구명 활동으로 다시 중령을 달고 군으로 원대 복귀 한다.
친일 반민족 행위자들의 선후배는 마지막까지 용감했다.박정희는 선생에서 일본군 다까기마사오 다시 대한민국 국군에서
공산당 남로당 빨겡이까지 변신을 거듭 하면서 이번에는 군사반란을 준비한다.
결국 박정희는 조카 사위 김종필과 차지철 김형욱등을 앞세워 군사 구테타를 일으킨다.
정권을 잡은 다까끼 마사오는
가장 먼저 한일이 일본의 국화 벚꽃나무(사쿠라)심기다.
전국토의 무궁화 나무를 뽑아내고
당시 자신의 하계휴양소 청남대가 자리한 진해시에 가로수 전체를 벚꽃나무로 교체하고 단 며칠 화려한 사쿠라를 앞세워
대한민국 민간축제 효시인 진해 군항제와 벚꽃 축제를 시작 하면서 어리석은 국민들의 시선을 가리고 서서히 사쿠라를
북진 시켜 70년대말 드디어 대한민국 심장부 경북궁까지 사쿠라가 춤을 추며 전국토가 사쿠라 축제를 벌이며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은 씨가 말라가며 한반도 남쪽은 어느새 사쿠라 삼천리 화려 강산으로 변해 버린다.
아베 노부유키의 예언은 정확히 맞아 떨어지며 그가 심어놓은 벚꽃과 함게 식민사관까지 눈먼 할배 할매등
그의 딸 자식에게까지 심어 놓고.그가 죽자 전두환 노태우가 고스란히 물려받고 이명박 박근혜로 넘겨지면서 우리 사회는
아직 곳곳에 이들의 그늘에 깔려 있다.
20여년 북간도 만주길에서 벚꼿(사쿠라)나무를 본적이 없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 시화는 진달래다.
박정희는 두번째 작업이 청기와 지붕밑에서 자신의 지난날
남로당 빨갱이 행적 숨기기에 급급한 박정희는..
때려잡자 빨겡이들!!
쳐부수자 빵겡이들!!
빨겡이 신고는 112
숨은 빨겡이 자수하여 광명 찾자!!
나는 빨겡이들이 싫어요
반공은 국시다며 철저히 대국민 안보 빨겡이 사기극을 벌이며
자신의 지난날 공산당 빨겡이 행적 지우기에 온갖 수식어를 동원 하면서 조,중,동 언론이 부역 하고 18년간 한편의
빨겡이당 개그를 연출 한다.
마지막 세번째 사업은 민주당 전임 장면 정부에서 기획해 둔 새마을 사업등을 들고 나와
새벽종이 울린다 새아침이 밝았다며
일하러 가세 일하러 가세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
노래를 전 국민들에게 퍼뜨려 놓고 밤이면 청기와 안가에 박혀 시바스리갈에 유명 연예인과 어린 여대생을 옆에 앉혀 놓고
남자 아랫도리 이야기는 누구도 논하지 말라며 각료들과 함게 망국의 파티를 벌이고 낯이면 또 밀집 모자를 쓰고 농민들과
어울려 막걸리잔을 기울이며 이들의 눈을 가리고 잘살아 보세 잘살아보세 또 공산당 빨겡이 때려잡자며 대국민 안보 사기극을
벌이며 독재 철권 통치의 기반을 쌓았고 빨겡이 석자를 18년간 고아먹고 우려먹으며 친일 정권을 유지 할수 있었으나
더이상 사기극을 지켜 볼수 없었던 심복 부하 김재규 장군의총에 박정희 정권은 망국의 술판에서 막을 내린다.
이후 친일 사기보수 부패 정권은 sns등 통신 매체가 발전이 되면서 빨겡이 개그는 약발이 떨어지고 이제 종북 좌빨이라는
신종 빨겡이를 들고 나오나 약발이 옛날 같지 않다.
어리석은 백성들이 이제 긴잠에서 께어나고 있다는 좋은 징후다.
만주 봉천 군관 학교 출신으로는 박정희 정권 당시 정일권 국무총리, 김백일 육군 대장 그리고 대한민국 최초의 4성 장군으로
빨겡이 박정희를 살려준 백선엽 등이 있다. 이들 친일 반민족 행위자들 입장에서는 안중근 의사나 윤봉길 의사등이 당연히
테러리스트가 되어 줘야지만 이땅에서 밥이라도 먹고
숨이라도 붙어 있다.
안중근 의사를 테러리스트다는 원조가 영친왕이다. 4개월후 친일의 대명사 영친왕을 먼저 뼈속까지 사무친 박정희는 영친왕을 환국 시킨다.
영친왕과 박정희는 둘다 함게 뼈속까지 일본에 물들은 골수 친일파의 대명사다.
영친왕(1897 ~ 1970. 5. 1.)은 고종의 일곱번째 아들로 1907년 이복형인 순종이 자식이 없는 상태서 왕위에 올랐을때 또다른 이복형
의친왕을 제치고 황태자가 된다. 이후 이토 히로부미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1915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을 하고 1917년
졸업을 하고 일본군 고급 장교로 근무를 하며 1920년 일본의 왕족 마사코(후일 한국명 이방자)와 결혼을 하고 1926년 순종이 죽자
일본국 장교의 자격으로 왕을 물려 받았으나 곧바로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군 장교로 일본군에 충성을 다한다
1940년 일본군 육군 중장으로 북간도(만주)에 파견되어 관동군을 지휘 하게 된다. 이때가 만주에서 다까끼 마사오(박정희)는
관동군 중위로 근무하며 독립군을 탄압 하던 시기로 영친왕은 다까끼 마사오(박정희) 최고 상관이었고 일본 육군 사관학교 선배였다.
이후 1945년 일본군 제1항공군 총사령관으로 당시 광복을 맞고 예편이 되었고 1947년 10월 왕의 지위도 상실 하고 일본 왕족의
명단에서도 제외되어 일본 국적도 잃었다.
반일 정신을 고취한 아버지 고종과 이복형 순종및 의친왕 이강과는 달리 일본 왕족과 결혼 하고 일본군 고위 장성을 지내는등
일본 천황에 충성을 다한 댓가로 광복을 맞이한 조국으로 귀환도 당시 국민들의 정서에 부디쳐 실현 되지 않았고 무국적으로 10여년 일본에서 지내다 1957년 다시 이승만 자유당 정권에 국적 회복을 신청 하나 이승만 정권에서 거부되고 일본에 귀화를 한다.
일본에서 머물었다. 이후 1961년 박정희가 5.16 군사 구테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뼈속까지 친일이 물들은 박정희는 4개월후
영친왕을 귀국 시키고 한국 국적을 취득게 하고 물심 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근대사 그 후 1963년 11월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주선으로 국적을 회복하면서 56년 만에 부인 이방자(마사코)와 함께 환국했다. 뇌혈전증에 인한 실어증을 겪으면서도 1966년 오랫동안 숙원하던 심신장애인 재활원인 '자행회', 1967년에는 신체장애인 훈련원으로 그의 아호를 빌린 '명휘원'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하지만 지병으로 1970년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은 후 부인 이방자는 영왕기념사업회, 자혜학교, 명혜학교 등을 설립하며 그의 유업을 계승하였다. 능은 경기도 미금시 금곡동 홍유릉 내에 있으며, 1989년 4월 30일 이방자 여사도 경기도 미금시 금곡동에 묻혔다.
근대사의 박정희란 인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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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지금 지하에서라도 이곳 일송정으로 달려가 혜란강에 코를 쳐박고 지난날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 하던 선구자들에게
사죄를 해야 할 것이다. 반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 이들의 공통점은 반민족 친일 행위자들로 대한민국 친일 인명 사전에
이제 겨우 기록으로 역사에 남겼으나 아직 청산되지 않은 현대사의 진행형으로 이제 시작이다.
역사의 관용은 다음 역사를 되풀이 한다.
우리는 잊지 않고 이들을 기억 해야 할 것이다.
역사를 잊으면 미래가 없다.
청나라 여진족은 지금 중국에 동화 되 버리고 역사도 글도 언어도 민족도 한순간에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없다.
끔찍스러운일이다.
용정 소녀들의 봄 나들이 소녀들만의 이쁜 추억을 만들고 있다.
아이들이 다 맑다
속일수 없는 조선의 놀이 문화..할매 할배 쌈지돈 다 내놓은것 같다.
아들 며느리 손자들과 함께한 가족 나들이.. 용정서 왔다며 먹어 보라면서 권한다.
연변 조선족 가정집 음식을 맛볼 기회다. 이거 저것 집어 들고 같이 먹는다.깁밥 찬등이 맛이 괜찬고 우리 음식 맛이다.
향차이도 없다.차디찬 북간도 어려운 살림살이서도 지금것 이어온 조선의 음식문화 그대로다.
맛있게 잘먹었습니다. 아이들과 함게 가정이 내내 행복 하세요
잠시간 스치는 인연에 아이들이 손을 흔들어 준다.
연길 가는길 도로 우측에 자리한 전원주택 단지로.주택 하나에 한국돈 10억이 넘게 가는 고급 주택들로서 연길
부자들이 선호하는 주택들이라 한다..기사의 거품이 아닌가?? 감이 오지 않는다.
뒷편으로 혜란강이 흘러가며 용정 시가지도 한눈에 들어 온다, .
풍수지리상 주택에서 물의 흐름이 보이면 재물이 금새 다 버리고 후손이 귀하다고 한다.
조선 500년 일반 민초들은 배산 임수형의 주택을 선호한다 배산임수형이란?? 산을 등지고 물의 흐름의 살필수 있는
주택을 말한다.
대구 팔공산 자락에 400여년 부를 이어온 옻골마을 경주최씨 종택이 있다. 이곳 종택에서 바라보면 금호강 본류가 훤히 보이나
400년전 당시 이곳에 터를 잡은 옷골 입항조 대암 최동집은 터를 잡을때 마을앞에 비보숲을 조성 하여 금호강 본류를 가려 놓고
팔공산氣를 고스란히 다 받아 400년넘게 한국의 대 명문가로 남아 지금도 500여명이 넘는 후손들이 골고루 부를
나누고 있다..
서울 국립박물관장 김광언 교수는 이곳 고택에서 3년여 기거 하면서 이들 가문과 고택을 연구 하고 한편의 논문을 발표 하는데
조선 사회 500년을 이해 하는데 최씨 종가를 이해 하지 않고 조선 500년을 논하지 말라는 구절이 있다.
조선 500여년 양반가들은 일반 민초들에게 배산임수형을 선호하게 만들어 두고 대표적 조선의 양반가 최씨 종택은
비보숲을 만들어 두고 물의 흐름을 살피지 않았던것이다.
지금 시대서 시사하는바 크다
.
중식 시간 많이 지나 연길시 도착 연길서 유명한 냉면 맛집 연변대 정문앞에 자리 한곳이다.
100여석 넘는 홀내 빈자리가 없고 10여분 기다려 겨우 자리를 차지 할수 있다.
연길 사람들이 가장 선호 하는 냉면 전문 맛집으로 사철내 손님이 많다.
특별한 맛도 아닌데 손님은 계속 밀리고 있다.
다시 한성 호텔
노동절 연휴를 맞아 결혼 잔치로. 하객들이 넘친다. 태블마다 음식이 가득 차려져 있다.호텔 관계자게 음식값을 묻는다
8인 한태이블에 500원에서 800원짜리까지 있다고 한다.
1인당 우리돈 20.000 원정도다 남쪽 일반 예식장 수준으로 연길의 물가도 만만치 않다.
부조도 한번 들여다 본다. 신랑 신부측이 나란히 앉아 하객들을 맞이 하는 방식은 우리식 그대로
부조액수는 작은게 아니다
보통 300원에서 500원식 봉투에서 나오고 있다.
신랑 신부가 손을 잡고 입장 한다.아바지가 손을 잡고 먼저 입장한 신랑에게 딸을 데려다 주는
남쪽의 격식과는 차이가 있다.
함게 입장 하는 신랑 신부의 뒤를 따라 부모들은 뒤따라 입장 하고 있다. 이주 한세기가 지나면서 한족 문화와 혼합된
격식으로 보여지고 우리의 고유의 풍습은 아니다.
아랫층에는 드레스레 와 양복 대신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신랑 신부 아름다운 모습들 보기도 좋다.
마지막층의 또 다른 결혼 잔치
재혼 잔치라고 한다.이곳에서도 신랑 신부가 함께 입장을 한다.
곧바로 신랑 신부 맞절이 있다.
또 양가 부모님께 큰절을 올린다.
절을 받은 장모는 사위를 안아 주고
사돈끼리도 즉석에서 인사를 나눈다.
조선의 고유 풍습과는 조금식 변형이 된것 같고 여기 까지는 비슷하나 다음이 중요하다 곧이어 음악이 나오고 바깓사돈 안사돈
할것없이 양가 하객들이 어울려 즉석에서 한바탕 춤판이 벌어진다
참 재미나는 장면으로 이것도 변형된 것으로 보여지지만 보기가 좋다.
다시 겨울 1차팀
용정 선구자길 투어길이 끝나면서 연길에서 3일간의 북간도 중심지 탐사 일정이 모두 끝이 난다.
내일이면 또 두만강 300리길을 떠나야 한다. 연길에서 마지막 밤 김교수와 송별 오찬이 이어진다.
다음을 기약 하면서 잔을 높이 들자.
건배가 이어지고 오찬이 무륵 익을 무렵..
평양 미녀들이 노래를 불러 주겠다고 들어 온다.
아리랑, 반갑습니다 등으로 남쪽의 노객들을 맞아 한바탕 흥을 돋아 준다.
밝은 표정들이 너무 보기가 좋다.
웃음만큼이나 함께 즐겁다.
평양의 딸들 신나는 율동들을 지켜 보면서 연길의 마지막밤이 저물어 간다.
북간도란??
엄격히 구분 하면 백두산 북쪽 지역을 북간도, 백두산 남서쪽 요녕성 지역을 서간도, 러시아 연해주 지역을 동간도라 한다.
일본이 만주사변(1931년)을 일으켜 부이를 앞세워 장춘(신경)에 만주국을 세운뒤 간도는 만주와 북만주로도 불려지게 된다.
간도는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사잇섬으로 본뜻은 압록강 두만강의 하중도(섬)를 가르키는 말이었다.17세기 당시 여진족은 요녕성
심양(봉천) 에서 청나라를 건국후 백두산과 북간도 전체를 여진족의 발상지라며 신성시 하면서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
시키는 봉금제를 실시 하면서 조선 조정과도 조약이 체결 된다.이후 조선 조정에서는 청나라 힘에 눌려 두만강이나
압록강 월강 행위자들에게 극형에 처하는 강력한 단속이 행해지면서 북간도는 200여년 사람이 살지 않는 황무지로 변해 갔다
19세기 중반 함경도에 2년여 흉년이 들어 기근에 시달리든 백성들이 목숨을 건 월강이 이뤄지면서 200여년만에
북간도에 조선 백성들이 처음 들어가 도둑 농사가 시작 된다.
농사가 끝나고 가을 수확후 다시 강을 건너 돌아올때 관원들에게 적발이 되면 대륙에 발을 들어 놓지 않았고
간도(하중도.섬)에서 농사를 지었다면서 억지를서 처벌을 피한다. 당시 압록강 하중도는 조선의 영토였다.
이말이 점차 확대되어 만주대륙 전체를 간도로 불려지게 된다.
북간도는 고대 부터 고조선.부여.북옥저, 고구려, 발해 순으로 한반도의 고토였다.
고려시대부터 조선 중기까지 동간도와 북간도 여러곳에서 여진족이 유목민으로 흩어져 살았고 조선과 명나라에서는
이들을 오랑캐족이라 부르며 하급민족으로 천대시 하였고.세종대왕때는 북간도에 살고 있는 오랑캐족 대부분을
쫓아 내거나 조선으로 귀화 시켰고 김종서로 하여 압록강에 4군 6진을 설치 하고 이들의 칩입을 막았다.
이후 1616년 여진족 부족장 누루하치는 동간도와 북간도에 흩어져 있는 여진족 부족들을 통합시켜 청나라의 기초를 만들었고
1625년 심양(봉천)에 첫도읍을 정한다.그의 아들 홍타이지는 2대 칸이 되어 중국 명나라와 일전의 전초전으로 후방의 적이
될수 있는 조선을 먼저 치기로 한다. 이때까지도 조선은 청나라를 오랑캐족이다며 하급 민족으로 천대시 하고 과소 평가 하면서
무너져 가는 명나라를 직시하지 못하고 조선의 관료들은 정신줄을 놓고 있었다.
대륙의 강국으로 등장한 청나라와 외교는 없었고 압록강 국경 문제등 분쟁만 만들어 가고 있었고 청나라 홍타이지는 후방의
조선을 두고 명나라를 먼저 칠수 없었다. 1627년 정유 호란과 병자호란(1636년)을 일으켜 조선을 먼저 굴육 시킨다.
남한산성에 피신해 있던 인조 임금은 삼전도에서 굴욕의 머리를 박고 피를 흘리면서 사대의 예를 취하고 청나라와 조공 관계에
이르게 되었고 청나라는 조선의 소헌 세자와 봉림대군을 인질로 데려가 조선의 불모정치가 시작 되었다.후방의 조선을 굴욕
시킨 청나라는 1644년에 그의 손자 도르곤이 대륙의 명나라까지 멸망 시키는 천지 개벽이 일어 났고 결국 누루하치는 3대에 걸쳐
다 민족 국가 중국 최후의 통일 왕조를 완성 시킨다. 이때부터 여진족들은 스스로 만주족이라 부르며 중원의 귀족 계급으로 편입
되면서 북간도 유목민들은 살기 좋은 대륙 본토로 이주 행렬이 이어진다.이때 북간도에 남은 여진족 유목민들 대부분 떠나면서
북간도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척박한 땅으로 변모 하면서 청나라는 이곳에 봉금제를 실시 한다.
그리고 50여년 후 청나라 강희제 집권기인 1667년 이들은 유목민 시절 삶의 터전이었던 백두산과 압록강,두만강 이북 지역을
청나라 발상지다며 신성시 하며 봉금령을 선포하고 북간도 전역에 사람들의 거주와 개간 산림 벌채 등을 일체 금지 시킨다.
이때 조선은 정유재란과 병자호란을 겪었고 명나라를 무너뜨린 청나라 파워에 눌려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청나라 봉금 정책에
따르게 되고. 이후 조선 조정에서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는 백성들의 월강 행위를 일체 금지 시켰고 어기는 자는
월강죄로 처형 시키면서까지 강력하게 다스리며 조선의 사대부 위정자들은 청나라 눈치 보기에 정신줄을 놓는다..
이후 19세기초 조선은 세도정치의 부패와 평안도 홍경래의 난(1811년) 등으로 혼란에 빠지게 되고 청나라 역시 신하들의 부패로
국정이 문란해지면서 아편전쟁(1839년~1842년/1856년~1860년)과 거듭되는 반란(태평 천국의 난 1851년~1864년)이 일어 나면서
양국이 함께 국운이 기울기 시작한다. 압록강과 두만강에 대한 단속도 느슨해졌다. 이틈을 타 조선의 함경도와 평안도 서북
백성들이 먼저 월강을 시작 하면서 봄이면 북간도로 가 농사를 짓고 가을이면 수확을 하여 다시 돌아오는 농사가 시작 된것이다.
당시 이런 형태의 농사를 도둑 농사라고 했다.
1881년에는 청나라가 봉금령을 철폐 하면서 2년 후 조선도 도강 금지령을 폐지 한다.또한 1885년에는 청나라가
간도 이주 금지령 마저 철폐 하면서 많은 조선인들이 기회의 땅 조선의 고토 북간도를 찾는 이주 행렬이 절정을 이루었고
북간도내 조선인의 인구가 이때 벌서 60만이 넘었다
이후 조선은 북간도에 지서를 파견 하고 치안을 담당 하게 하고 세금을 징수 하면서 실효적 지배에 들어 갔다.
이때 일본은 대륙 침략을 위한 남만주 철도 부설권을 청나라로부터 얻어내는 조건으로 당사국인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청,일 양국간 장물을 갖고 간도 협약(1909년 9월 4일)을 체결 하였고 북간도를 청나라에 넘겨 준 것이다
광복후 또 이 협약을 근거로 북간도는 모택동의 공산당 통치하에 들어 갔고(1949년) 이때부터 모택동 공산당은 간도(만주)의
지난 역사 지우기 일환으로 간도(만주) 지역을 동북 3성 내지 동북아 지역이라 부르기 시작 한것이다.
청나라는 누루하치로부터 300 여년 통일된 중국을 다스리고 1912년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청나라가 망하고 한세기도 가기전 여진족은 한족에 동화 되버리고 지금 민족도 언어도 글도 다 사라지고 없다.
누르하치가 지하에서 통곡 할일이다.
중국은 공산당의 원조 소비에트 연방(소련) 공화국이 2차대전 승리 후 반세기도 가기 전에 붕괴되고 소수민족들이
분리 독립 하는 상황들을 바로 이웃에서 지켜 보면서 중국 공산당은 이게 두려웠고 이때 중국이 들고 나온 것이 동북공정과
서북공정의 프로젝트다. 동북 공정은 남북 통일 이후 불거져 나올 통일 한국과 영토 분쟁에 대비한 것으로 백두산과 국내성
고구려 역사 왜곡도 같은 맥락이다.서북 공정 역시 티벳트 분리 독립을 저지 할려는 일환으로 진행 되고 있으나 간단치만 않다.
이미 티벳트는 중국에서 떨어져 나가기 위한 분리 독립 운동이 달리야마로 부터 오래전에 시작이 되었고 지금은 테러 등으로
국제 사회 존재감을 알리면서 여론화를 거세게 만들어 가고 있다.
중국은 5.000년 역사내내 전쟁과 분열의 역사를 갖고 있다.현재도 진행형이다.
역사를 잊으면 미래가 없다.
우리는 기억 해야 하고 지난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
역사는 흘러간다.
다음 역사는 준비된자를 또 기다리고 있다.
간도협약 100주년이 2009년이었다. 영토분쟁은 국제 사법 재판소에 소를 재기할 시효 기간이 100년이다. 2009년이 지나면 북간도는
영구히 중국 영토로 귀착이 되고 우리 정부는 국제 사법 재판소에 소를 재기할 자격마저 상실한다. 친일 잔재 이명박 정권과
왕조 정권 김정일 정권은 마지막 타임 2009년을 넘겨 버린다.
그러나 우리사회 께어있는 민주 시민 단체가 있었다. 가칭 통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만들어 시효기간 몇일을 앞두고
국제 사법 재판소에 소를 재기해놓은 상태다. 북간도 선조들의 수많은 희생과 피와 땀이 베여 있다.
긴 싸움이 될것이다.
북간도
이정우
2016. 9월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