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라(고린도전서 11:23-26)
* 작년에 개봉한 애니메이션 ‘코코’는 '죽은 자의 날'이라는 멕시코 절기를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 미구엘의 가족은 대대로 음악을 싫어하는데 그 이유는 고조할아버지가 음악에 대한 열망을 식히지 못해 자신의 부인과 딸을 두고 집을 나가버렸기 때문이다. 음악이 정말 하고 싶었던 미구엘은 할머니의 말을 거역하고 연주회에 참여하기 위해 에르네스토의 기타에 손을 댔다가 '죽은 자들의 세상'에 들어가게 된다.
* ‘죽은 자의 날’이란 죽은 친지나 친구를 기억하면서 명복을 비는 멕시코의 절기다.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죽은 자의 날’에 대한 영화속 설정이었다. 영화에서 망자들은 주황색 꽃길을 넘어 자신을 기억하는 이승으로 오는데, 망자의 사진을 제상에 올려두는 사람이 없는 경우 이승으로 올 수 없고, 이승에서 아무도 기억해주는 사람이 없어진 망자는 영원히 소멸하고 만다. 아동용 영화지만 사후 세계에 대한 독특한 시각이 신선했다.
*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그 영화가 떠올랐던 것은 죽은 사람을 의미하는 망자에 대한 기억의 소중함 때문이다. 망자란 사망한 사람이란 의미이지 망각된 사람이란 의미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소중한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 사람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기억의 방법은 여러 가지이고 사람마다 집단마다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잊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의미를 부여하고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면 소중한 것이 된다. 요즘 젊은이들은 연인이 된지 100일이나 200일도 기념한다는데, 이런 날들은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지만 당사자들에게는 소중한 날이 된다. 그러나 아무리 소중한 것도 잊고 나면 아무 의미가 없어지고 만다. 부부에게 중요한 결혼기념일도 부부가 결혼의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하며 기념하면 소중한 날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아무 의미도 없는 날이다.
* 나는 기독교인에게 해마다 돌아오는 부활절이나 매주 돌아오는 주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이날을 소중하게 기억하고 그 날의 의미를 깊이 받아들인다면 다른 어느 날, 어느 요일들과 구별(성별)될 수 있지만, 그렇지 않고 그저 하루 쉬는 날로 여긴다면 그리 큰 의미를 발견할 수 없는 날이 되고 말 것이다. 3.1절이나 제헌절, 광복절은 물론 4.19나 5.18 그리고 4.16도 마찬가지다.
* 오늘은 4.16 세월호 참사 4주기를 기념하는 날이기 때문에 세월호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4년이 지난 지금까지 세월호 침몰의 진상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여러 가지 의혹과 추측이 제기되고 있을 뿐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수 있을 만큼 명백한 진상이 드러나지는 않은 상태다. 21세기 초첨단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 4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304명의 목숨이 수장당한 참사의 진정한 원인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는 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 그런 가운데 지난 11일 시사저널이 단독 보도한 기사 내용에 따르면 세월호에 대한 외력충돌 흔적이 구체적으로 발견됐다고 한다. 3월 14일 선체조사위원회(선조위)는 1월부터 인하대 조선해양공학과 이장현 교수 팀에 용역을 주어 세월호 선체 좌현 상태와 변형에 대한 조사를 진행한 결과 선체에 변형을 줄 정도의 충격이 선수 좌현 쪽에 가해진 것이 발견됐다고 발표했다.
* 이 교수 팀의 조사에 의하면, 세월호 좌현쪽에 미상의 물체와 부딪혀 생긴 것으로 보이는 스크래치와 페인트가 벗겨진 흔적이 존재하는데 정밀검사 결과 31.2m²의 면적이 46.3cm 가량 눌린 것으로 나타났다. 가로를 10m로 잡았을 경우 세로는 약 3.1m에 달하는 크기인 이 면적이 46cm 눌리도록 하기 위해서는 2810톤의 힘이 작용해야 한다. 31.2m² 면적에 세월호가 사고 당시 실었던 2200여 톤의 화물을 다 올려놔도 이런 변형이 오지 않는다.
* 이 부분은 선수 쪽에 위치할 뿐 아니라 배의 선수 중심부로 곡선을 이루며 들어가 있기 때문에 해저 바닥과 충돌할 수 없고, 인양 중에도 건들 이유가 없는 부위여서 사고 당시 엄청나게 강한 충격을 받는 것 외에는 이런 흔적이 남을 수 없다. 이처럼 선체 외판에 충격의 흔적들이 나오게 되면서 이제 세월호 참사의 진실이 드러날 전기를 맞이한 것으로 여겨진다. 외력이 가해졌다면 그 외력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밝혀내야 하기 때문이다.
* 세월호 침몰 원인과 관련해 검찰은 과적·복원성 불량, 고박 불량, 조타 실수 등 4가지를 주장했지만, 이 내용은 최근 선조위의 네덜란드 해양연구소 마린 실험과 2014년 선박해양플랜트연구소의 자유항주 조종실험이 공개되면서 오류로 판정됐다. 세월호의 급변침과 변침 초기에 일어난 50도 이상의 급격한 기울기는 선체 자체의 문제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이 실험들의 핵심 내용이고, 이제 뒤늦게나마 그에 대한 증거가 발견된 것이다.
* 정권이 바뀌었기 때문에 가능해진 이런 진상 파악 노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사건의 진실을 파악하기 힘들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고 절실한 일이다. 부활절과 지난 주일 설교에서 언급했듯이 예수의 부활과 4.3의 비극을 기억하려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예수의 부활 소식은 십자가의 죽음 이후 계속 기억되고 전승된 것이며, 4.3의 비극도 현기영 선생과 같이 용기 있는 이들의 기록과 증언으로 인해 잊혀지지 않고 기억될 수 있었던 것이다.
*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의 전해받은 성만찬의 의미를 언급한다. 바울은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빵을 드시기 전 감사를 드리신 후 빵을 떼시고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라고 말씀하셨다고 기록한다. 그리고 식후에 잔을 나눌 때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 너희가 마실 때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라고 말씀하셨다고 기록한다.
* 그런데 특이하게도 성만찬에 대한 최초의 기록인 바울의 설명과 다르게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의 저자들은 최후만찬에 예수가 한 말을 약간 다르게 기억한다. 마가복음은 “받아라. 이것은 내 몸이다”,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다”라고 기록하며, 마태복음은 “받아서 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 ”모두 이 잔을 마셔라. 이것은 많은 사람에게 죄를 사하여 주려고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다"라고 기록한다.
* 가장 큰 차이는 뭘까? 바로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라는 말씀이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서는 생략되었고,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라는 표현 대신 ‘언약의 피’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학자들마다 주장이 다르고 복잡하지만, 자주 말씀드린 대로 각 공동체의 상황과 저자의 신학적 성향, 관심사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유대인 출신 기독교인 공동체에서 기록된 두 복음서의 특징인 셈이다.
* 반면 이방인 출신 기독교인 공동체에서 기록된 누가복음은 '나를 기념하라'는 바울의 표현을 계승해 사용한다. 눅 22:19을 보면 “예수께서는 또 빵을 들어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떼어서 그들에게 주시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너희를 위해서 주는 내 몸이다. 너희는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억하라’는 단어이다. 이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아남네시스’는 생각보다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다.
* 개역성경에서는 '기념하라'로 번역되는 이 단어는 '상기시켜 기억하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지만,기념과 재현을 의미한다. 그래서 성만찬 때 사용되었기 때문에 성만찬을 기념하고 재현하라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성만찬으로 상징되는 예수의 삶과 고난, 희생을 기억하고 그와 같은 삶을 재현해서 살라는 더 본질적이고 심오한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단어는 단순히 죽은 사람을 추모하라는 것 이상이 의미를 갖는다.
* 그리고 이 기억은 부활로 연결된다. 진정한 기억은 과거의 회고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즉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되살아날 때 이뤄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행하는 성만찬은 단순한 의식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우리가 예수의 삶과 고난, 희생을 기억하고 그와 같은 삶을 재현해서 살겠다는 결단으로 이어질 때만이 성만찬은 진정한 의미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건 우리가 주일마다 드리는 예배도 마찬가지다.
* 2014년 4월 16일 이후 우리는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다짐해왔다. 그런 다짐은 예수의 부활을 잊지 않고 기억하려 노력했던 초대교회 교인들의 마음이었고, 4.3의 참상을 겪고 기록하려 했던 현기영의 마음이었으며, 광주항쟁의 진실을 전하려했던 위르겐 힌츠페터의 마음이었다. 그래서 세월호참사를 잊지 않고 기억하려는 사람들의 마음은 부활을 기억하고 전하려 했던 사람들의 마음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 오늘 오후 방문할 전남 목포 신항 북문 앞에는 ‘단원고생 반별 마지막 수련회 사진전’이 마련되어 있다. 깊은 바다에 가라앉기 전에 찍었던 마지막 단체 사진 앞에서 살아남은 아이들과 그렇지 못한 아이들을 구분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지만 언제나 눈물을 쏟아내게 만든다. 단원고 2학년 6반 남현철과 박영인, 권재근 혁규 부자, 단원고 양승진 선생님 등 바로 옆에 자리잡은 ‘미수습자 5명’의 사진을 볼 때도 마찬가지다.
* ‘4·16 기억·다짐 대회’의 주제인 ‘기억하라 행동하라’는 앞서 언급한 ‘아남네시스’의 뜻과 상통한다. 우리가 예수의 삶과 고난, 희생을 기억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같은 삶을 재현해서 살겠다는 결단으로 이어질 때 진정한 ‘아남네시스’인 것처럼, 세월호의 참사를 기억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런 참사가 다시는 이 땅에서 반복되지 않도록 행동하는 것이 세월호를 올바르게 기억하는 방식이라고 믿는다.
*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는 “과거를 기억 못하는 사람은 과거를 반복하기 마련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우리가 과거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 잘못된 과거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부활 이전과 이후가 극명하게 달라졌듯, 5월 광주항쟁 이전과 이후가 극명하게 달라졌듯, 세월호참사 이전과 이후가 극명하게 달라져야 우리는 잘못된 과거를 반복하지 않고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 대다수 한국교회는 세월호참사 이후 세상에 대해 무기력, 무능력의 극치를 드러냈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나 갈 텐데, 목사라는 자들의 입에서 인간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이 튀어나왔다. 많은 교회들은 유가족들의 정당한 요구와 행동을 폄훼하였고 좀 잠잠하라고 윽박지르기도 했다. 아이들이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따르다가 죽었는데 유가족에게도 잠잠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 그래서 희생자 304명 중 기독교인이었던 80여명의 가족들 대부분은 다니던 교회를 그만 다니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 교회는 유가족들의 눈물을 닦아 주는데 실패했다. 지극히 작은 자들을 환대해야할 교회는 유가족을 보상금에 환장한 파렴치한 자로 매도함으로 그 가슴에 피멍이 들게 만들었다.많은 한국 교회가 세월호 희생자들과 유가족들, 미수습자 가족들이 당한 고통을 외면한 이유는 무엇일까?
* 김종엽 한신대 교수는 ‘공감’과 ‘책임’은 ‘방관’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지우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공감은 자세를 견지하는 긴장에 찬 능동적 과정이며, 책임은 그보다 더 긴장 어린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관찰자 입장에서는 참여자보다 방관자가 되는 편(아마도 잠재적으로 가해자 편이 되는 것일 텐데)이 더 편안한 선택이다”라는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피해자와의 공감을 유지하는 것보다 가해자를 편드는 것이 편하고, 경제적이었을 것이다.
* 그런데 예수의 제자들은 그런 경제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다. 4.3을 기록한 현기영 선생이나 5.18을 기록한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도 마찬가지였다. 세월호를 기억하기 위해 노력했던 수많은 시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방관하기보다 ‘공감’과 ‘책임’이라는 더 무거운 짐을 기꺼이 감당했다. 더디지만 역사가 조금이나마 발전한 것은 바로 그렇게 소수이지만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희생하고 헌신했기 때문이다.
* 그들의 희생은 박노해가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라는 시에서 노래했던 것처럼 “이렇게 어둠이 크고 깊은 설산의 밤일지라도 / 빛은 저 작고 희미한 등불 하나로 충분했다.” 그들은 “지금 세계가 칠흑처럼 어둡고 / 길 잃은 희망들이 숨이 죽어가도 / 단지 언뜻 비추는 불빛 하나만 살아 있다면 / 우리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라는 믿음을 간직하며 ‘공감’과 ‘책임’의 길을 걸었던 사람들이다.
* 한국교회는 세월호참사 이후에 보여준 무기력, 무능력, 그리고 파렴치함을 사죄하고 극복해야 한다. 그러지 못하고 변하지 않는다면 한국교회의 앞날은 절망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세월호 희생자들과 유가족들에게 미안해하고 감사해야 한다. 로마제국의 서슬 퍼런 지배 아래서 황제가 아닌 나사렛 촌놈 예수를 주님이라 부르며 목숨 걸고 예수의 삶과 고난, 죽음과 부활을 전했던 초대교회 선배들에게 감사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 내일은 세월호 참사 4주기를 맞아 희생자 영결식이 정부 주관으로 처음 열릴 예정이다. 정부 차원에서 세월호참사 희생자를 위한 영결식을 갖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우리가 들었던 촛불로 인해 만들어진 작은 변화라고 믿는다. 오늘 우리는 목포신항을 방문해 추모와 위로, 그리고 다짐의 시간을 가질 것이다.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는 다짐, 그리고 기억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고 행동하고 실천하겠다는 다짐이 되길 바란다.
* 그렇게 함으로써 다시는 그런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않겠다는 다짐은 예수의 삶과 고난, 희생을 기억하고 그와 같은 삶을 재현해서 살겠다는 결단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제 세월호참사 4주기를 맞아 세월호 침몰의 진상이 하루 속히 밝혀지기를 원하며, 예수의 죽음이 끝이 아니었던 것처럼 304명의 무고한 생명들의 죽음 역시 ‘끝’이 아니라고 말하며 그 이후를 새롭게 생각하며 기억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