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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지역의 천주교 전래와 박해
이상원(공주대학교 문학유산대학원)
덕산 옥터 순교지 성지조성 후원계좌
덕산성지 후원계좌: 신협 131-021-736156 (재) 대전교구 천주교회 덕산성지
문의: 041-337-4708 (주임신부. 구본국.베난시오)
《목 차》
l. 들어가며
2. 덕산지역의 천주교의 전래와 박해
3. 덕산 출신 순교자의 순교지역별 분류(141명)
4. 나가며
부록 1: 박해 시기의 덕산 행정구역
I. 들어가며
덕산 출신의 순교자는 141명으로 집계된다. 조선 시대의 사형제도는 삼복제(드覆制)에 의하여 집행되고,박해 시기의 초기에는 예외(정산필 베드로)도 있으며, 병인박해시대에는 선참후계(先新後啓)에 따라 사형집행 후에 보고하는 경우가 나타난다. 이러한 사례는 해미 진영과 홍주 진영사형집행에서 보여주고 있다.
덕산의 관아(官衝)와 옥(獄)은 순교자들의 신앙 증거(證據)의 현장이었다. 성(聖) 손자선 토마스와 복자(福者) 정산필 베드로 내포 회장, 복자 원시보 야고보,복자 김사집 프란치스코 등은 덕산 포교에게 붙잡혀 덕산 관아로 압송되었다. 다양한 방법으로 행해진 모진 박해에도 불구하고 배교를 거부하고 천주 신앙을 고백하였다. 순교자 박 아가다, 송 안토니오와 그밖에 다른 순교자들도 옥에 갇히거나 관장 앞에서 신앙을 증언하였다. 특히 당시 내포의 회장인 정산필 베드로는 덕산 옥 터 부근에서 참수 및 장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덕산 관아와 옥 터는 박해 시기 순교자들이 신앙을 증거한 ‘증거 터’로서 탁월한 교회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에 본 연구는 3가지 방향으로 주제를 설정하고 연구의 목적으로 삼았다.
첫째 최초로 천주학(西學)을 연구한 성호학파(星湖學波) 제자들이 예산과 덕산현에 정착한 과정을 소개하고자 하였다. 성호(星湖)는 1751년경부터 제자들과 함께 서학서(西學西)인『천주실의(天主實義)』,『칠극(七充)』,『직방외기(職方外記)』등을 연구하였으며,성호는『천주실의』「발문」 에서 천주교의 ‘천주(天主)’와 유교의 ‘상제(上帝)’를 같은 개념으로 이해하고,『칠극』에서의〈칠(七)〉자는 유학의 극기복례(充근復禮)의〈기(己》자로 풀이하였다. 예산과 덕산에 정착한 성호학파의 제자들이 과정을 보면 2가지 갈래로 나타난다.
하나는 덕산 장천리 정착한 이병휴1) 계보2)이다. 이병휴계는 주자학,양명학3)과 함께 천주학(西學)을 연구하는데,천주학(西學)의 수용과 이해4) 정도는 서양의 역법(歷法)과 일월식(日月食)연구하는데 머무르고 있다.
다른 하나는 예산 호동5)(孤洞: 여사울) 정착한 홍유한 계보로서 이곳은 천주학(西學)의 실考 (實錢的) 수용지로서 역할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즉,농은 홍유한은 예산 호동에서 18년을 거주하며 수계생활을 하였고, 그의 제자가 홍낙민, 홍낙교 형제이고, 이존창도 포함된다. 이들 제자가 천주학을 받아들인 후에, 덕산지역에서 활동한 전교 사례를 소개하고자 하였다.
둘째 연구의 방향은 덕산 가야산에 있는 남연군 묘 굴총사건을 재조명하고자 하였다.
1868년 병인박해 시기에 일어난 전대미문의 사건에 대하여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이인 '문화(文化)의 복음화)’ 시각에서 재조명하고자 하였다.
셋째는 덕산지역의 박해를 박해 시기별(時期別)로 분류하고,덕산 출신 순교자 141명의 명부(名簿)를 작성하여,이를 순교 지역별(地域別)로 분류하고자 하였다. 더불어 순교신앙의 증거지 덕산 관아 터와 옥 터에 대한 교회사적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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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서종태,“이병휴의 外朱內조論”,『성호학파의 양명학과 서학』,서강대학교 박사학위 논문,1995, 6~25쪽.
2)차기진,『성호학파의 서학 인식과 척사론에 대한 연구』, 한국정신문화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 논문,1995, 18、조一1 •
3)* 이병휴의 ‘外朱內王’ 유교 사상의 소개 : 이병휴의 유교 사상에 대하여 양명학적 입장
① 이병휴는 주자학과 이단에 대하여, 주자학은 결함을 지닌 불완전한 학문이기에 당연히 후학들이 변론하고 공부하여,결함을 완성하여야 한다는 자주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즉 楊 • 墨 • 老 • 佛과 같은 학문도 이욕을 추구하지 않음으로 이단으로 배척해서는 안 된다고 하여 양명학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② 『大學』의 해석에 있어서도, 주자학의『大學章句』를 배격하고,高本『大學』의 체계가 타당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더불어 도덕적인 이치에 대해서는 누구나 선천적으로 양지(良知)를 가지고 태어났기어】, 격물치지(格物致知)와 같은 지(知)에 대한 공부는 필요가 없고, 행(行)에 대한 공부는 성의(誠意)를 제1 공부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 하였다.
③ 이병휴는 심즉성(心卽性)으로 기본 명제로 삼고,심(心)의 성(性)을 지선(至善)으로 해석하였다. 신민(新民)를 통한 명명덕(明明德)의 실현은 효제자(孝弟慈)의 덕목으로 나타난다고 양명학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④ 이병휴의 이기(理氣)의 개념은 사실 세계의 이기(理W와 가치 세계의 이기(理氣)로 구분하고,인심도심(人心道心 )대하여 이발기발(理發氣發)이라고 할 때의 이기(理氣)는 가치 세계의 이기(理氣)에 해당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더욱 가치 세계의 이치와 사실 세계의 이치에 대한 알을 선천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으로 구분한 것도 양명학의 입장에서 진일보 한 것이었다.
이러한 유교 사상이 양명학적인 입장을 취하면서도 표면적으로는 드러나지 않기에 이를 서종태 선생은 •외주내왕론(外朱內王論)’으로 설명하고 있다.
4)* 정산 이병휴의 서학(원學)의 이해 이병휴는 1741년에 스승인 성호 이익과 주고받은 문목에서 서양 역법과 일월식(B 月食)에 대하여 논하였다. 정산 이휴는 본인이 만든 고금역법(古今歷法)에서 시헌력(時憲歷)을 설명하면서, 서양 선교사들이 설명한 역법이 이치에 맞는다고 서학을 수용하고 있다. 1775년에는 안정복이 역법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해 오자 자신이 이해한 서양의 역법론에 의거 하여 이를 설명하였다.
이병휴악 서신을 교환한 안정복(安露福)은 1757년에 스승 이익과 서학(©學)에 관한 서신을 주고받았는데, 이 서한에 안정복은 마테오 리치의『천주실의』,『기인십편』, 등을 읽었음을 밝히고, 서학 중에서 천주교를 이단으로 밝히며 천주교 교리를 비판하고 있다
5) 박종악 원저, 한영규 외 역,“임자년(1792. 정조1이, 정월 3일”,『수기(隨記) : 정조의 물음에 답하는 박종악의 서신』,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2016, 101쪽.
6)하인(박기성,시몬), “제11장 문학의 복음학”,『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산다』, 가톨릭출판사, 1995, 351-3쪼구미8쪽、
7)사목 헌장 9-11항 참조. 교황 바오로 2세,『교회의 선교 사명(회칙)』,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2.
2. 덕산지역 천주교 전래와 박해
1. 내포의 사도 이존창과 홍낙민의 전교
정산(貞山) 이병휴(李樂休,1710〜1776)의 제자로는 이가환(李家換,1742~1801),이기양(李基讓,1744-1802). 권철신(權哲身, 1736-1801) 등이 배출되고,홍유한(洪儒漢,1736〜1785)의 관계로 인하여 이존창(李存昌,루도비코 곤자가,1752〜1801)은 홍낙민과 이기양,권철신과 교류하게 된다. 내포 지방은 홍유한의 조카인 홍낙민(洪樂敏,루가,1751~1801)과 그의 제자 이존창이 있어 천주학(西學)을 전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내포의 사도, 이존창은 예산 여사울에서8) 태어났다. 기록에 의하면 “이미 어려서부터 홍낙민, 홍낙교 형제 함께 공부하여 제법 과거 공부를 익혔는데,가장 먼저 사술(邪術)에 물들어…(이하 생략)”라고 적혀있다. 그는 내포 지역에서 전교했고,이에 내포 지역은 한국 천주교의 중심지가 된다.
예산 호동(孤洞: 여사울)에는 1757년에 이주한 홍유한이 거주9)하였는데,홍유한은 실학의 거두인 성호(星湖) 이익(李環,1681~1763)의 계열로서 이용휴,이병휴와 함께 실학과 천주학을 접목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홍유한이 호동에서 18년간 생활하는기간에 이존창은 이기양 문하에 들어가서 학문을 연마하고, 홍유한 의 조카인 홍낙민과 교류하면서 서학을 접하게된다. 1776년 4월 이기양이 경기도 남천으로 이주하자,그 의 집에 왕래하면서 과거 공부를 한다. 그해 5월경에는 이기양의 아들 이총억(李龍億,1764〜 1822)과 녹암 권철신의 문하에 들어가게 된다. 이때 녹암계가 형성되었다. 이후에 1785년 이존창은 여사울로 이주하고, 내포의 사도로 활동한다.
이존창과 홍낙민의 관계는 매우 특별한데, 이 사실은 1801년 경기 감사 이익운(李益運,1748-1817)이 올린 상소에서 “홍낙민이 서호(충청도)에 있을 때 이존창과 친숙하였다는 말은 원근 지방에 널리 퍼졌으니 당여(黨與)와 주벌(諫罰)을 어찌 면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렇게 내포 지방과 예산 호동 지역은 홍유한의 가게인 홍낙민과 홍낙교 형제에 의해 많은 노비가 면천되어 양민이 되었는데, 이 중에 이존창도 포함되었다.
이미 천주학 안에서 양반과 천민 신분의 벽은 허물어지어 평등한 세계를 구현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내포의 전교 활동에 이존창과 더불어 홍낙민의 역할이 컸으며, 이후 홍낙민은 4대 순교자 I2) 집안으로 신앙이 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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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이존창은 본디 신창 성덕산(成德Lh) 집안의 사천(私賤)입니다. 이미 어려서부터 홍낙민,홍낙교 형제와 함께 공부하여 제법 과거 공부를 익혔는데,가장 먼저 사술레 물들어…(이하 생략)”,여사울의 현재 행정구역은 ‘예산군 신암면 신암리’이다. (박종악 원저,한영규 외 역,“임자년(1792. 정조16),정월 3일”,104〜105쪽.》
9)지금의 예산군 두촌면 호동리 8통 4호. 18년 간(1757〜1775년) 거주하였다.
10)'순조실록」2권, 순조 1년(1800년) 2월 21일 정묘 1번째 기사.
11) 호동(孤洞) 지명 지리적으로 호동(孤洞)이라는 곳은 백여 호나 되는 큰 마을인데, 두 고을의 땅으로 나눠진다. 20여 호는 예산(禮山)두촌면(豆村面) 호동리(孤洞里)이고,80여 호는 천안(天安) 신종면(新宗面) 호동리(孤洞里)입니다. 그중에 요사한 술법을 하지 않는 자는 20호 안팎에 불과합니다. (예산 호동에서 하지 않는 자는 6~7호,천안 호동에서 하지 않는 자는 10여호에 불과하다.) (박종악 원저,한영규 외 역, 위의 책)
12)홍낙민 4대 순교자 〜 자(子): 홍재영(프로타시오), 자부: 정소이, 손자(孫子): 홍봉주(토마스), 손부: 심소이(바르바라), 4대: 미상(기해박해), 베드로(병인박해) 순교. 홍낙민(루가) 4대 순교자 집안
1) 덕산지역 이존창의 전교 활동
이존창의 출신은 신창(新름) 성덕산(成德이) 집안의 사천(私賤)이었다. 이러한 사천 신분이 면천되어 홍낙민•홍낙교 형제와 함께 어려서부터 과거 공부를 하였다. 이존창의 사승(師포) 관계를 보면 농은 홍유한을 스승으로 홍낙민• 홍낙교 형제와 함께 학문적 스승으로 모셨으며, 이기양의 문하로 들어가 공부하였으며, 녹암 권철신과 직암(種康) 권일신(權日身, 1742~1791)과도 사승관계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학문적 사승 관계를 바탕으로 천주학을 받아들여 내포 지방에 전교하였다.
이존창이 덕산지역에 천주학을 전교한 내용은 1791년도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1791년에 덕산의 정산필(鄭山弼, ?~1799)에게 전교하였다. 1792년에는 덕산 창정(昌事)에 거주하는 이존창의 형님인 법희(法希)의 장인, 유가(兪哥)를 전교하였으며, 1795년에는 덕산 출신으로 교회의 밀사로 활동한 황심(黃心,1757~1801)에게도 전교하였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입국한 외국인 신부인 주문모(周文誤,1752〜 1801)데는 고산 이존창의 집과 전주 유항검의 집에 사목 방문하는 과정에서, 1795년에 덕산 정산필에게 ‘베드로’로 세례를 주면서, 내포의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또한,덕산의 인언민(印蔡敏,1737~1800)에게 세례를 주었다.
2) 덕산지역 홍낙민의 전교 활동
충청도 관찰사인 박종악의 보고에 의하면 “홍낙민(洪樂敏,루가)은 충청도 사학의 종장(宗匠)으로 활동하였으며,학자(邪學者) 무리들이 사학(邪學)을 하고 않고는 오로지 홍낙민에게 달려 있으며, 그의 말 한마디로 권할 수도 막을 수도 있다”라고 하였다.
홍낙민은 문의 현령이었던 이기양에게 수학하였고, 이기양은 양근(楊根)의 권일신에게 수학하였다. 홍낙민은 1768-69년경 예산 두촌면 호동에 낙향하여 터전을 잡았는데, 홍낙민은 자신을 본받는 노비들에게 노비 문서를 불태웠으며, 조건 없이 양인들을 풀어주었다. 또한, 서학을 배우는 이웃들에게 곤궁에서 도와주고 한없이 베풀어서 인근에 모든 이들에게 기쁨을 주었다. 1776년에 충주 가흥(哥興)으로 이주하였는데, 호동리에는 많은 전장(田庄)과 노비가 있어서 몇 달씩 머물기도 하였다.
1791년 12월 19일경에는 덕산 별라산(別羅山)에 사는 서족(麻族) 홍지영(洪芸榮)의 집에 방문하여 23일까지 4일간 머물렀는데, 당시 강완숙(姜完激, 1760~1801)과 홍필주(洪弼周, 1774-1801) 그리고 홍지영 사랑채에 거주하는 고오봉(高五峯), 김취재(金就才),김취재 처남에게 전교한 듯하다. 그리고 장성로(張聖魯)와 그의 생질 이가(李哥)에게도 전교한 듯하다. 덕산 별라산에 홍지영의 후처였던 강완숙과 본처의 아들 홍필주의 전교에 대해서는 홍필주는 1790년에 17세에 이존창베에게서 교리를 배웠고, 내포 지방에서 생장한 강완숙은 남편의 친척인 홍낙민 바오로 에게서 서학을 배웠다고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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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이존창의 신분의 변학과정을 살펴보면, 이존창의 부친(父) 시절에 풍산홍씨 홍낙민 집안에서 면천되어, 이존창이 양인(良人) 신분으로 세습된 것으로 보인다. (박종악 원저,한영규 외 역,위의 책,104니05쪽.)
14)대조지면(大鳥指面)은 상갈리(上葛里),하길리(下葛里),역상리(譯上里), 역중리(譯中里), 역하리(譯下里), 평리(邱里), 성상리(域上里) 상통두리(上弼頭里), 하용두리(下龍頭里) 가마금리(賀馬金里) 창정리(倉井里) 11리로 구성된다. 참고로 창정(昌井) 지역이 박종악 관찰사가 표기한 한자표기와 위 행정구역으로 나타난 창정리(倉井里)가 다르게 표기되고 있다. 이곳은 대조지면으로 상갈리 부근으로 여겨진다.
15)주문모 신부의 체포령으로 을묘박해(乙卵迫害)의 시작(1795.5.11.).
16)박종악 원저, 한영규 익 역,
17) 위의 책,98~104쪽.
강완숙 모자(母子)의 전교는 당시 이존창과 홍낙민 이 깊 은 교류 관계를 유지하였기에 홍낙민 루가가 천주학을 소개하고,홍필주의 교리는 이존창 에게 배운 것으로 여겨진다.
3) 스승, 호동의 홍유한
성호는 1751년경부터 제자들과 함께 서학서인『천주실의』,『칠극』,『직방외기』등을 연구하였으며,성호는『천주실의』「발문」에서 천주교의 ‘천주(天主)’와 유교의 ‘상제(上帝)’를 같은 개념으로 이해하고,『칠극』에서의〈칠(七)〉자는 유학의『극기복례(充己復禮)』의〈기(己)〉자로 풀이하였다.
농은 홍유한의 스승인 성호 이익은『성호사설(星湖德說)』에서『칠극』은 유학의 극기설과 한가지라고 전제하면서 7가지 죄의 뿌리로 탐욕(貪慾). 오만(像慢). 음탕(淫蕩). 나태(偏急). 질투(族苑). 분노(憤怒). 색(色)을 꼽았고, 이 7가지 죄를 극복할 수 있는 덕행(德行)으로 은혜(恩惠) - 겸손(嫌逐). 절제(節制). 정절(M節). 근면(勤趙). 관용(實容). 인내(忍耐)를 소개하고 있다.
① 농은 홍유한 수계생활 사례 :『극기복례』와『칠극(七充。과 비교
성호 이익의 제자 중에서 농은 홍유한은 예산에 정착하여 18년을 살았으며,젊었을 때 성호 이익에게서 글을 배웠다. 1770년경에 천주교 서적을 발견하고 탐독한 그는 다른 공부는 모두 버리고20) 그것만 기꺼이 읽었다. 이후 종교 생활의 실천에 전념하였다고 한다.21)
이에 농은의 수계실천 사례를 분류하여 유가에서의『극기복례』와 천주교의『칠극』의 실천 행위인지에 대하여 비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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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조광 저,『(역주)사학징의.1』,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2001, 114쪽,홍낙민의 서 팔촌 손자(瘡A寸孫)
19)사를르 달레 원저, 안응렬,최석우 역주,『한국천주교회사』, 상권, 한국교회사연구소,1987, 382~383쪽. 『황사영 백서』(41행)에는 “홍보록낙민 본계충청도 예산현인야”라고 적혀있다.
20) 다블뤼 저, 최석우 번역, “조선 선교사 역사 비망기”,F교회악 역사』,356, 한국교회사연구소,2005, 8쪽.
21) 사를르 달레 원저,안응렬, 최석우 역주,p한국천주교회사』,상권, 296〜297쪽.
<표 2> 농은(隨隱) 홍유한(洪儒漢)의 수계생활 사례
결론적으로,농은의 수계실천 사례를 7가지로 분류해본 결과,대부분 유가의 극기복례와 유사 하나,1번 사례와 6번, 7번 사례는 유가의 극기복례로는 설명이 불가하다.
특히 1번은 유가의 신독(愼獨) 사상으로는 설명이 불가하다. 6번과 7번의 실천 사례는 조선시대의 시대적인 상황에서는 남녀 간, 양반 계급 사회에서는 실행이 불가능하고,오로지『칠극』 의 정절(直節)과 천주교 교리의 평등사상으로 설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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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하인이 인사할 때에 반드시 일어나서 하였고,말을 쉽게 하지 않았으며, 몸을 함부로 행동하지 않았다.
23) 다블뤼저,최석우몬시뇰번역“조선선교역사비망기” ,교회역사.356 한국교회사연구소 2005 8쪽
② 농은의 수계생활로 나타난 교회사적 결과
농은 홍유한의 수계 생활결과 때문에 내포에는 홍유한의 집안인 홍낙민과 그의 제자 이존창이 탄생하고,이들은 전교와 순교를 통하여 천주교를 전파하며, 특히 홍낙민은 4대에 걸쳐서 순교자를 배출하는 순교자 집안으로 성장하였다. 또한, 권철신의「제문」을 보면 “오호라,소자가 공에게 동문(同門) 관계만 좋을 뿐 아니라 •••(중략)… 그러한즉, 세상에서 공을 알고, 공에게 복종하는 사람으로는 마땅히 소자만 한 이가 없었습니다. •••(이하 생략)”라고 표현하면서 권철신 자신이 농은의 제자임을 스스로 밝히고 있다.
결과적으로 농은은 내포의 이존창 사도, 집안의 4대 순교자 집안의 홍낙민, 천주교 강학회를 이끈 녹암 권철신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는 단지 유가의 ‘극기복례’의 결과로 보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고, 왜냐하면 이들이 한국 천주교를 이끈 초기의 사도들로 성장 되었기 때문이다. 왜냐 하면 농은이 단지 유가의 ‘극기복례’ 사상으로 발전되었으면 이들은 모두 유학자로 성장 되었어야 한다.
위 홍유한의 수계생활에 대한 교회 내의 시각은 두 가지로 갈라진다. 하나는 반대 의견으로 홍유한은 오 로지 유가에서의 극기 복례를 실천한 선비에 불과 하다는 주장 이다. 또 다른 하나는 세례는 비록 받지는 않았지만 화세(火洗)와 같은 신앙의 수계생활을 하였다는 긍정적인 주장이다. 앞으로 이에 대한 논의는 계속될 것으로 보이나 ,본 연구를 통하여 본 결과는 부정보다는 긍정의 의견에 수긍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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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윤민구,“홍유한은 한국 최초의 신자인가?”,『한국천주교회의 기원』,국학자료원, 2002, 249~261쪽.; 한국교회사 연구소 편, F한국천주교회사』, 1, 한국교회사연구소, 2009, 132쪽. 이원순, 차기진, 서종태 등이 이 반대의견에 따른다、
25)마백락, “한국 천주교회의 첫 수덕자: 홍유한 선생의 천주교 수덕 생활과 사상”, <홍유한과 풍산홍씨 가문의 천주 신앙>,안동교회사연구소,2015, 9~33쪽; 방상근,“박해시대의 풍산홍씨와 천주교”,위의 책,35~52쪽; 신대원, “홍유한의 천주신앙에 대한 부정적 견해에 대한 유감”,위의 책, 53~87쪽.
2. 덕산지역의 5차례 박해
덕산지역은 5회에 걸쳐서 박해가 일어나는데,첫 번째 박해는 1897년 정사박해이고,곧이어 신유박해(1801년)가 일어나고,정축년(1817년)의 박해와 기해박해(1839년),병인박해(1866~1868년) 걸쳐서 다섯 번의 박해가 일어난다.
1) 정사박해(TB泊害,1797년)
덕산지역에서 최초로 박해가 시작한 것은 정사박해이다. 정사박해는 충청도 관찰사인 한용화(韓用和,1732~1799)가 1797년에 충청도 남부에서 일으킨 박해사건으로 이 박해 시기에는 ‘하느님의 종’ 정산필 베드로26), 인언민 마르티노27)가 순교한다.
* 정산필28) 베드로
덕산 옥에 관련된 대표적인 순교자는 정산필29) 베드로, 또는 바오로이다.
충청도 덕산의 양인 집안에서 태어난 정산필 베드로는 본디 성격이 괄괄하고 힘이 예사롭지 않아 모두 가 무서워하였다. 그러나 천주교신앙을 받아들인 뒤로는 아주 겸손하고 온순해졌으며 누구에게나 친절하였다. 1794년 말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정 베드로는 주 신부를 찾아가 직접 그에게 세례를 받는 행복을 누렸다. … (중략) …
정 베드로가 체포된 때에는 1798년이나 1799년이었다. 그는 덕산 관아로 끌려가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용감하게 천주의 가르침을 증언하였다. 또 옥(덕산 관아 옥)에서는 함께 갇힌 동료들을 격려하였으며, 자신의 사형 선고문에 서명을 하면서도 전혀 동요하는 빛이 없었다.
사형 집행일이 되자, 정 베드로는 사형수에게 주는 마지막 음식을 받게 되었다. 이때 동료들에게 같이 먹자고 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천주께서 사람을 위하여 창조하신 음식이니,마지막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먹읍시다. 이제 우리는 천국에 가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그런 다음 정 베드로는 형장으로 가서 장사형(또는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나,이때가 1799년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0~60세 사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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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3.
27)사를르 달레 원저, 안응렬, 최석우 역주,『한국천주교회사』, 중권,한국교회사연구소,1987, 425〜426쪽.
28)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위의 책.
29)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위의 책.
* 인언민 마르티노(1798.12.05.)30)
(인은민) 마르티노는 덕산 고을 주래 31)에 사는 젊은 양반이었는데, 성격이 온순하고 꿋꿋하였으며 꽤 많은 공부를 하였다. 그는 황사영(黃銅永) 알렉산델 진사(進士)와 친교가 있어 그에게서 천주교를 배웠다. 입교하자마자 그는 조상들의 신주(神主)를 단지에 넣어 강물에 던졌다.
그런다음 서울로 올라가서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는 요셉이라는 자기 맏아들을 신부 곁에 남겨 두고. 둘째 아들은 그때 교우 중에 명성이 높던 집안에 장가들였다. 그리고 나서는 집과 재산을 버리고 공주 고을로 이사 갔다. 외교인인 그의 친척들은 그가 왜 그렇게 괴상한 짓을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므로 (인언민) 마르티노는 그들에게 그 이유를 솔직히 말하여 주며 천주교를 설명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을 끌지는 못하였다. 공주영문(公主營門)의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자기가 천주교인 임과 천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기를 원한다는 것을 명백히 말하였다. 청주로 보내져서 어떻게나 심한 고문을 당하였던지 걸을 수가 없을 지경이 되었다. 그의 출생지 진영이 있는 해미로 송환 될때에는 역참(譯 姑)에서 역참으로 정부의 역마를 타고 가야만 하였다. 그의 끈기가 한순간도 변하지 않자 영장은 어쩔 수 없어(이보현)프란치스코 모양으로 때려죽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관례의 식사를 그에게 갖다 준 다음 포졸 20명가량이 그를 붙들고 사형선고 집행에 나섰다.
형을 받는 동안(인언민) 마르티노는 “그렇구 말구. 나는 기쁜 마음으로 내 목숨을 천주께 바치는 거야”하고 여러 번 뇌었다. 마침내 망나니 중의 하나가 엄청나게 큰 돌을 들어 그의 가슴을 여러 번 내리쳤다. 턱이 떨어져 나가고 가슴뼈가 부서졌다. 거룩한 증거자는 이런 형벌로 숨을거두니, 그의 나이는 63세였다.
2) 신유박해(辛西泊害, 1801년)
곧이어 신유박해(1801년) 시기에는 이보현 프란치스코(1798년 12월 25일)했) 김사집 프란치스코(1801년). 윤 바오로(1801년)가 순교하였다. 공주에서는 이름 미상의 여교우 골롬바가 순교하여 총 4명이 순교하였다.
* 김사집 프란치스코33) (1801. 10)
‘성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김사집 프란치스코는 충청도 덕산의 비방곶면(합덕읍 합덕리 창말)에 있는 양가(良家) 집안에서 태어나 과거 공부를 하던 중에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세속 학문을 버리고 교리를 실천하는 데에만 노력하였으며, 일상을 기도와 독서로 보냈다. 김 프란치스코의 타고난 슬기와 재능, 가난하고 외로운 이들에 대한 희사와 애긍은 복음전파의 훌륨한 수단이 되었다.
… (중략) …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김사집은 교우들에게 나누어준 책들이 하나둘씩 압수되었다.
이내 그의 이름이 관청에 보고되었고,관청에서는 배교자 2명에게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도록 하였다. 실제로 그들이 김 프란치스코의 집을 탐문 하고 돌아간 지 얼마 안 되어서 포졸들이 그의 집으로 들이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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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사를르 달레 원저, 안응렬, 최석우 역주,『한국천주교회사』,중권,425~426쪽.
31) 지금의 충청남도 예산군 삽교읍 용동리 1구이다.
32) 사를르 달레 원저,안응렬, 최석우 역주,『한국천주교회사』,중권,422〜425쪽.
33)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위의 책.
덕산 관아로 압송된 김 프란치스코는 관장(덕산 현감)에게 유혹과 형벌을 번갈아 받으면서도 신앙을 굳게 지켰다. 관장이 죄수들에게 천한 매질을 하는 천한 임무를 그에게 맡겼지만,이것마저도 그의 마음을 바꾸지는 못하였다. 김 프란치스코는 옥(獄:덕산 옥》중에서 자식들에게 편지를 보내 “천주님과 성모마리아의 도우심에 의지하여 교우답게 살아가는 데 힘쓰도록 하여라. 그리고다시는 나를 볼 생각을 하지 말아라.”하고 당부하였다.
같은 해(1801년) 10월 김 프란치스코는 해미로 이송되어 치도곤 90대를 맞아야만 하였다. 그런 다음 2개월 뒤 상처투성이의 몸을 이끌고 청주 병영으로 이송되었다.
표4 신유박해 순교자 명단
3) 정축박해(丁표迫害, 1817년)
덕산지역의 3번째 박해는 1817년(정축년)에 일어나고, 해미에서 덕산 출신 민(閉) 첨지 베드로와 손(孫) 첨지 요셉이 순교한다.
대구 감영에서는 덕산 별암리 출신 ‘하느님의 종’ 고성대 베드로와 고성운 요셉 형제가 순교하고, 덕산 몽곡리 출신 ‘하느님의 종’ 이시임 안나가 순교한다.
4) 기해박해(己安迫害, 1839년)
덕산지역의 기해박해 시기에 유(柳) 바오로가 홍주 옥에서 순교한다.
* 유(柳) 바오로 34)
같은 해( 1 7 3 9 년) 7 월3 5 ) 에 천주께서는 홍주 고을에서 한 착하고 충실한 종의 여온을 또다시불러 가셨다. 덕산 고을 창정3 6 ) 에서 태어난 유 바오로는 집안에서 혼자 천주교에 입교했었다. 그는 오랜 세월을 홀아비로 자녀도 없이 대부분 외교인들 사이에서 살았으나 굳세게 신앙을 들어 내고 지키었다. 3 월에 체포되어 홍주 읍내로 압송되었는데,거기에는 인척이 되는 포교들이 있어 한마디만 배교한다는 말을하면 놓아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유) 바오로는 그럴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관장 앞에 불려가서 신앙을 고백하고 신문( M 問)의 여러 가지 형벌을 아무 불평 없이 참아가며 받은 다음 옥에 도로 갇혔다. … (중략) …
그러나 그들 자신도 어려운 처지에 있고 거기에다 모두 외교인인지라, 그를 넉넉히 도와주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도 (유) 바오로는 자기의 궁핍을,인종(忍從)으로 참아 견디며 같은 옥에 갇혀 있는 죄수 중에서도 민사사건으로 붙잡혀 있던 박춘오에게 천주교를 전도하였다. ( 유 ) 바오로의 인내와 다른 여러 가지 덕에 감동하여 이 사람은 꽤 기꺼이 그의 말을 들었고, 아직 어떤 결정은 내리지 않았으면서도 교우와 친밀하게 되어 그를 도와주려고 하였다.
허기와 목마름으로 기진한 (유) 바오로가 하루는 간수에게 찌꺼기 술을 얻어먹고 그로 인하여 속이몹시 거북하였다. 그는 자기 죽음이 임박한 줄 깨닫고 박춘오에게 입교하라고 점점 더 졸랐다. 그는 박춘오에게 자기가 임종을 당하는 것을 보거든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을 일러 달라고 간청하였다. 며칠후 그들만이 방에 있을 때 (유) 바오로는 벽을 향하여 무릎을 꿇고 기도문을 몇 가지 외었다. 그것이 끝나자, 박춘오가 (유) 바오로를 자리에 누이니 그는 또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이 옥에서 풀려나가면 천주교 신자가 되시오.” 그런 다음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세번 부르고 나서 평온하게 숨을 거두었다. 그가 죽은 뒤 곧 바싹 마른 그의 얼굴엔 다시 생기가 돌았고 그를 파묻은 외교인들은 장례식 동안 환한 빛이 그의 시체를 둘러싸고 있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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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사를르 달레 원저,안응렬,최석우 역주,『한국천주교회사』,중권,445〜446쪽.
35) 1839년 7월.
36)지금의 충청남도 예산군 삽교읍 창정리이다.
5) 병인박해(芮宣迫害, 1866〜1868년)
병인박해 시기에 덕산 출신 순교자는 해미에서 11명,홍주 진영에서 58명이 순교하고,공
춤청 감영에서 15명,총 84명이 순교한다. 이는 신리의 손자선 토마스의 집에서 거주한 다를:
주교의 21년(1845~1866년)의 전교 활동 영향으로 여겨진다. 신리는 덕산의 비방곶면으로 덕산 월경지 지역이다.
가. 해미 순교자 : 11명
나. 홍주 순교자 : 58명
덕산 출신으로 홍주에서 순교한 순교자 수는 58명이다. 이는 141명 중에서 41%에
최대의 순교자 수이다.
다. 공주 순교자 : 병인박해 시기(14명)와 1876년(1명)
병인박해 시기에 공주 감영에서 성 손자선 토마스를 포함하여 15명이 순교한다.
3. 덕산 남연군 묘 굴총사건(1868년)의 발생
1) 덕산 남연군 묘 굴총사건의 발생과 고종실록
덕산 남연군 묘 굴총사건(掘塚事件)은 독일의 상인 오페르트(Ernst Jacob Oppert, 1832-1903)가 1868년(고종 5년)에 덕산 가야산 37)에 있는 남연군의 묘를 파헤치다가 실패한 사건이다.
산에는 가야산이 있으며, 이곳에 대원군의 부친인 남연군(南延君) 이구(李球, 1788〜1836)의 묘가 있다.
독일인 오페르트는 미국 영사관에 근무했던 미국인 젠킨스(Frederick Henry Barry Jenkins)를 자본주로,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페롱(Feron,Stanislas, 1827-1903, 한국명 : 권(權)신부를 통역관 및 보좌관으로 임용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선원 100중에서 한국인 천주교인이 일부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이용한 기선은 680톤급 차이나호(The China)와 60톤급 레타호(The Greta)로 편성되었다. 오페르트가 남연군 묘를 도굴할 명분은 2가지였다.
첫 번째 이유는 1866년 2차례 걸쳐서 조선과 통상을 요구하다 실패하였기에 조선 왕국과 통상교섭 체결하기 위해서였고, 두 번째는 조선의 사신 1명을 세계 일주를 시키면서 은둔의 나라 조선을 세계에 소개하고자 하였다.
차이나호는 중국 상해에서 출발하면서 북독일 연방 국기를 게양하고,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1868년 4월 18일 충남 홍주 행담도(行淡島) 당진시 신평면 매산리에 딸린 섬)에 정박하였다. 선원 일행은 다시 60톤의 증기선 크레타호를 이용하여 덕산 구만포(九萬消,九薄滿 38)에 도착하여 덕산에 상륙하였다.
구만포에 도착한 후에 이들은 야음을 이용하여 스스로 ‘러시아’ 군병이라 거짓 칭(稱)하였고 덕산에 이르러서는 읍내를 통과하는 길을 피하고, 북문리에서 ‘심통골’을 지나 상가리(上加理)에 도달하였다. 당시 18세 새댁이었던 장건환(張建換)39)의 모친에 의하면,“그들은 모두 총을 메고있었고 일정한 검은 색 옷은 입고 있었으며, 마구 발포하는 바람에 아무도 접근을 못 하였다.”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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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사단법인,내포지방고대문화연구원 박태신 선생의 기록.
박성흥,박태신 공저,『진번목지국과 백제부흥전』, 서경문학사,2016에서 박태신 선생의 요약정리.
“내포지방의 가야산은 충청남도의 서북부지방(차령산맥의 서북쪽)에 위치하며,남에서 북으로 우뚝 솟은 홀산으로 자리하고 있다. 가야산의 동쪽으로는 덕산천이 흘러,삽교읍 이리에서 금마천과 합류하고 흘러,효교천과 합류하고 한내(大川)와 합류하여 광활한 삽교들(평야)을 껴안고 삽교천은 흘러 오서산에서 발원한 무한천과 합류하여 아산군 (삽교호)으로 유입된다. 이곳이 내포지방이자 마한이 자리한 곳이다. 내포지방은 산동 반도와 가까운 지리적 관계로 앞선 중국의 선진문학와 항해술을 수용할 수 있었다. 선진문학를 수용한 마한은 삼한 중 제일 발전할 수 있었다
이것이 마한의 문학이고,후일 공주 • 부여의 백제문학의 산실이며,신라와 일본에도 전파되었다.
가야(伽邪)라는 지명은 어디에서 유래되었을까? 내포지방의 가야산은 이 지방에 불교 문학가 전래 되기 전에는 은산 이었고, 검은산(柳側LU) 주변의 들(농경지)은 검은들 이었다. 당진군 합덕읍 옥금리의 검은들,당진군 순성면 봉소리의 검은들, 홍성군 은하면 금국리의 가야골(가라골,가야티) 홍성군 결성면 금곡리의 거성,서산시 운산면 거성리의 견성(개성), 예산군 봉산면 봉림리의 가야고성 등이 있다. 내포지방의 불교 유적으로는 태안의 마애불, 서산의 마애삼존불, 예산 학전리의 사면석불 등 백제 초기의 불교유적이 남아있다. 내포지방(마한)의 불교 문학는 북방 불교만이 아닌 A.D 280년 이전 산동 반도에서 바다를 건너 서해안의 태안반도와 아산만으로 상륙한 불교 문화가 전래 되었다고 보여진다. 그 시기는 고구려나 백제의 불교수용보다 앞선 마한 시대라고 생각된다. “가야라는 어원은 범어(楚語, Sanskrit)로 코끼리(象)를 말한다.”한다. 그러니 내포지방에 불교 문학가 들어오면서 검은산이 가야산으로 바뀌었고,상왕산(象王山)이란 지명도 생겨났다.”
내포지방에 자리하였던 마한은 산동 반도와 가까운 지리적 여건으로 앞선 중국의 문학와 항해술을 수용할 수 있었으며, 이와 함께 불교 문학도 고구려나 백제보다 앞선 시기에 전파되었다고 생각된다. 이는 내포지방에 남아있는 백제초기의 불교 유적이 말해준다.
38) 구만포는 홍주 지방에서 생산된 쌀이 1년이면 9만석 이상이 이 포구를 통하여 제물포와 삼개로 출하되기에 붙여진 이름의 포구이다.
39) 예산군수,『가야산록 마을 이야기』,아카데미인쇄사,1992, 214〜216쪽.
▲<그림 1> 오페르트 굴총사건의 길
(구만포 ᅳ구만포 구길덕산읍—북문리->심통골(범재)—상가리— 남연군 묘)
오페르트 일행은 가야산 남연군 묘에 도착하였고, 밤새 도굴을 시도하였으나, 묘의 내부가 회벽 으로 묘곽을 단단히 방비한 상태였다. 결국,일행은 시신을 수습하는 데 실패하였다. 날이 밝아오고 썰물 시간이 임박하자 그들은 구만포로 퇴각하였다. 이 당시 덕산 군수 이종신(李種信)과묘지기,그리고 주민들이 제지하였으나 무장한 수많은 중국인과 서양인을 당해 낼 수가 없었한다. 이어 하리후포(下里後浦 : 고덕면 상궁리 - 양촌 하리 - 시거리)에 도착하여 하루를 머물면서 약탈을 감행하였다. 이들은 20일에 삽교천을 빠져나가 차이나호로 옮기어 사라졌다.
2)「고종실록」에 수록된 천주교인 관련 내용
이 장에서는「고종실록」到 3~8권에 수록된 덕산 굴총사건에서 천주교인과 관련된 대표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① 고종실록 8권,8년(18기년) 4월 6일 : 이돈호(李敎法) 신문 제의
“착포도청과 우포도청의 보고를 받아보니 천주교도 세 놈을 붙잡았습니다. 이른바 이돈호(李墩告)와 이여강(李汝江)이란 자는 서양 도적놈들과 결탁해 덕산에서 변란을 일으켰던 자들입니다. 이 자들은 감히 접근할 수 없는 곳에 접근하여,하지 못 할 짓을 하였습니다. … (이하 생략)지시하시기를 “이제 내가 직접신문 하겠다. … (중략) … 덕산에서 변고를 일으켰으니 그 먹은 심보와 계책은 임금의 원수이고 나라의 역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끝없이 증오스러운 것이다.”라고 하였다.
② 고종실록 8권(18기년) 4월 6일 : 이돈호(李敎法) 친국
임금이 삼군부에서 죄인 김창실(金름實\ 이여강(李汝江),이돈호(李敦告) 등을 직접 신문하였디
③ 고종실록 8권(18기년) 4월 9일: 이돈호(李敎法) 등 결안.
죄인 이여강(李汝江)의 판결 문건은 이러하다.
이여강은 “본래 지독하고 패악한 종자로서 … (중략) … 나쁜 무리들과 패거리를 지어 감히 세례를 받고 참회하였으며, 군사를 세낼 음모를 왜놈들과 약속하고. 권(權: Feron)과 온갖 꿍꿍이를 다 하였으며, … (중략) … 천주교 교우들에게 해가 미칠 것을 걱정해서 패거리를 굳게 지어 서양 배가 정박하는곳과 내통 하였으며, 차마 덕산에 삽을 대어 묘를 파는 변고를 일으켰습니다. 포도청에서 한 공술이 확실하니 자신이 범한 죄의 법조문에서 어찌 벗어 날 수 있겠습니까? 나라를 배반한 큰 역적이 확실하다고 자복 한만큼 때들 기다리지 말고 사시를 찢어 죽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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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남연군 묘 도굴사건(「고종실록」3권 - 8권)
1. 「고종실록」3권 3년(1866년) 8월 3일(기축) :척사윤음 발표
2. 9월 8일(갑자) :이양선 출몰
3. 9월 9일(을축): 병인양요 윤음
4 9월 10일(병인): 프랑스 군함의 항의
5. 9월 11일(정묘) :침략 항의 격문
6. 5권 5년(1868년) 4월 21일 (기해): 덕산 남연군 묘지 사건
7. 4월 21일(기해):천주교인 체포 지시
8. 4월 23일(신축): 이양선 동향(구만포)
9. 4월 23일 (신축): 덕산 사건 관련 편지
10. 5월 29일(을사): 손경로 포상제의(구만포 사건)
12, 8권 8년(1871년) 4월 6일(을축) :이돈호 신문제의(덕산 변란)
13. 4월 9일(무진) : 이돈호 등 결안(덕산 사건 관련자)
14. 4월 9일(무진) :추국청 철폐 지시(덕산 사건 종료)
죄인 이돈호(李敎范)의 판결 문건은 이러하다.
이돈호는 “본래 추악한 무리로서 몰래 음모를 품고는 유학을 배반하고 사학(邪學)에 빠졌습니다. 서양 책을 외우면서 감히 김 도마에게 배웠다고 하였으며, 장경일(張敬一 :베르뇌 4대 주교), 최, 김창실(金昌實), 권 신부(權: feron)와 함께 흉악한 짓을 하며, 하늘과 땅의 신명도 속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평소의 음모는 그저 외부의 도적들을 꾀어 들이는 것이었으며, 한밤중에 따라가 결국 덕산에 이르러 변고를 일으켰습니다. 현장에서 한 흉악한 범죄행위에 대해 직접 눈으로 보았다고 하였으니, 도적 무리들과 함께 휩쓸렸다는 공술을 실토나 다름이 없습니다. … (중략) … 때를 기다리지 말고 사지를 찢어 죽어야 합니다.”
④ 고종실록 8권(18기년) 4월 9일: 추국청 철폐지시. 추국청 폐지를 지시하였다.
3)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40: ‘문화의 복음학’42)을 통한 재조명
「교회의 선교사명 52항의 복음과 민족문학의 융합」에는 다음의 내용이 있다.
“민족들 사이에 선교활동이 추진되면서 교회는 여러 가지 문학를 만나게 되고 토착학 과정에 관여하게 된다. … (중략) … 즉 “토착학(土着化)란 인간 문학가 그리스도교에 수용됨으로써 그 문학의 참된 가치의 내적인 변모가 이루어지는 것과 그리스도교와의 통합에 의한 진정한 문학 가치들의 심오한 변모로서, 다양한 인간 문화(文化)속에 그리스도교를 심는 것이다. 복음과 문학의 분리는 비극이다. 43) … (중략) … 올바른 의미의 토착화는 두 가지 원리에 의존한다. 즉 ‘복음에 합치(合致)되고, 보편교회에 일치(一致)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토착화 44)를 통하여 교회는 여러 가지 문학에 복음을 융화시키고 동시에 그들의 고유 문학를 함께 교회공동체 안에 받아들인다.
즉 복음과 문화와의 관계 45)에서 5가지 원칙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① 모든 문학에 대하여 자유롭기 때문에 동일시하지 않는다(현대의 복음 선교 20항 2번).
② 문화에의 비 예속(非線屬)(현대익 복음 선교 20항 2번)
③ 문화에 융화 침투(사목 헌장 58항 3번)
④ 복음과 문학의 부합(不舍) 관계의 극복(현대의 복음 선교 20항 3번)
⑤ 토착화(土着化)(교회의 선교 사명 52항)
즉,이는 문학의 복음학 방법으로 다음의 사항을 보장하고 있다.
첫째,문화의 자율성과 불가침성을 존중해야 한다.
둘째,복음은 문화에 예속되는 것이 아니므로, 복음을 문화에 융학' 침투시킴으로써 복음화 해야 한다.
셋째,문화의 주체성(主體性)을 유지하고, 문화와 복음이 공동으로 풍요로워 지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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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하인(박기성, 시몬),“제11장 문학의 복음학”,『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산다』,가톨릭출판사, 1995, : 35나368쪽.
42)사목 헌장 9-10항 참조.
43)자유의 자각 96항 2번
44)『교회의 선교 사명(회칙)』52항. (교황 바오로 2세,『교회의 선교 사명(회칙)』,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1992.)
45) 하인(박기성, 시몬), 위의 책,363〜565쪽.
’문학의 복음학’는 세계 곳곳의 다양한 문학에 대하여 그 민족의 자율성(自律性)과 주체성(主 體性)을 인정하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인 ‘문화의 복음학’ 차원에서 성찰해 보면, 대원군의 부친인 남연군 묘를 파헤친 “덕산 남연군 묘 굴총사건”은 선교란 명분 아래 일어난 문학 침탈행위라고 여겨진다. ‘반(反)문학적 복음화’였던 것이다.
즉 오페르트의 개인적 욕망과 페롱 신부의 사목적인 판단오류에 의하여 발생한 전대미문의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 덕산 굴총사건에 대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에 근거하여 2가지 문제 를 제기하여 본다.
① 성교회는 “합당한 목적(선교:宣敎)을 위하여 잘못된 수단(굴총사건)을 사용해도 되는가?” 하는 물음이다?
② 교회 지도자의 판단오류에 대하여 “성(聖) 교회는 앞으로 어떻게 보속과 성찰을 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이다?
교회의 구성원인 페롱 신부의 잘못된 판단과 오류에 의하여 발생한 당시의 상황에 고려하면, 성(聖)교회가 조선에서 발생한 반인륜적 - 반도덕적 행위(1868, 굴총사건)에 대하여 앞으로 어떻게 반성하고, 성찰해야 할 것인가? 라는 물음을 던져 본다.
이 전대미문의 굴총사건 결과로, 미국인 젠킨스는 불법 파럼치한 행동을 한 피고인으로 체포 기소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가 되었다. 배석 판사 헤이스(Hayes)는 이 사건을 ‘이는 해적 행위와 같다.’라고 논박하였다.
이 굴총사건에 천주학(西學)과 페롱 신부 46)을 신봉한 일부 신자들이 연루된 사실이 밝혀지면서, 대원군은 천주교를 더욱 박해하고 천주교인에 대하여 ‘선참후계(先新後啓)’를 명령하게 되었다.
3. 덕산 출신 순교자의 순교지역별 분류(141명)
덕산 출신 순교자는 총 141명으로 집계되었다. 그중에서 삼복제를 적용한 충청 감영에서의 사 형과 선참후계(先新後啓)에 의한 재심 기관인 해미 진영이나, 홍주 진영 사형의 사례이다. 초기 박해 시기에 정산필의 경우에는 초심에서 사형을 판결하여 집행하는 때에도 발생하였다. 덕산 출신 순교자는 성인 1명,복자 12명, 순교자 127명 모두 141명이 배출되었다. 이를 지역별로 분류하면 아래와 같다.
1. 덕산’해미 순교자(16명)
덕산 출신으로서 덕산과 해미에서 심문과 문초 후에 순교한 명단을 살펴보면,‘하느님의종. 정산필 베드로,인언민 마르티노,이보현 프란치스코 3명이고,유시로,유시로의 아내,방 마리아,민 첨지 베드로,민수산,손 청지,박 바르나바,방 마리아,방 안토니오,염사연,염치량 에벤시오,이군박,표 안드레아 등 16명이다.
1)덕산 옥의 의미
공주 충청감영에서 삼복제(三覆制)의 적용의 사례는 다음과 같다. 공주 충청감영에서는 34 해미 진영이나 홍주 진영에서는 재심을, 덕산 현감에게는 초심을 적용하는 경우이다. 덕산의 관아와 옥은 순교자들의 신앙 증거의 현장이었다. 옥은 배교와 순교와의 갈림길에서 삶과 죽음 그리고 하느님을 증거 할 선택의 장(場)이었다. 덕산 옥에서의 선택으로 하나는 순교자,또 하는 배교자의 길을 갔던 곳이다.
성 손자선 토마스와 복자 원시보 야고보,복자 정산필 베드로,복자 김사집 프란치스코 등은 덕산 포교에게 붙잡혀 이곳으로 압송되었다. 특히 복자 정산필은 덕산 옥에서 순교한 것으로 려져 있다.
2) 덕산 옥 터 순교자 47)
다음은 덕산 옥에 관련된 대표적인 순교자는 정산필 48) 베드로,또는 바오로이다.
충청도 덕산의 양인 집안에서 태어난 정산필 베드로는 본디 성격이 괄괄하고 힘이 예사롭지 않아 모두가 무서워하였다. 그러나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뒤로는 아주 겸손하고 온순해졌으며 누구에게나 친절하였다. 1794년 말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정 베드로는 주 신부를 찾아가 직접 그에게 세례를 받는 행복을 누렸다.
… (중략) …
정 베드로가 체포된 때에는 1798년이나 1799년이었다. 그는 덕산 관아로 끌려가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용감하게 천주의 가르침을 증언하였다. 또 옥(덕산 관아 옥》에서는 함께 갇힌 동료들을 격려하였으며, 자신의 사형 선고문에 서명하면서도 전혀 동요하는 빛이 없었다.
사형 집행일이 되자, 정 베드로는 사형수에게 주는 마지막 음식을 받게 되었다. 이때 동료들에게 같이 먹자고 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천주께서 사람을 위하여 창조하신 음식이니, 마지막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먹읍시다. 이제 우리는 천국에 가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그런 다음 정 베드로는 형장으로 가서 장사형(또는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나,이때가 1799년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0〜60세 사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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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황사영 백서』41행에는 “홍보록낙민 본계충청도 예산현인야”라고 기록되어 있다.
48)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위의책
2、공주 순교자 : 16명
덕산 출신으로서 삼복제에 의하여 사형을 받아 처형된 사례는 손자선 토마스의 경우가 대대표적이다. 공주에서 삼복제에 의하여 사형당한 명부는 다음과 같다.
1801년 신유박해 시에 여 교우 골롬바를 비롯하여,병인박해(1866년)시에 성 손자선 49) 토마스와 16명이다. 즉 명부를 보면,윤학첨 요한,골롬바(여),김학진,김학진 아내,김 프란치스코,이 안드레아,손 카타리나,유 막달레나,유치로,박 바오로(5),손자선 토마스,손 토마스, 송 안토니오,이성삼 베드로,이 안드레아,조군서 등 16명이다.
손자선 토마스는 홍주 거더리 본디 중인(中人) 사람이요,그 조부 적부터 교우라. 이 사람의 부친과 형과 온 집안이 수계를 다 열심히 하고 손자선 토마스의 당숙도 기해년(1839)에 치명한 손 안드레아요.
이 사람이 본래 부모에게 효도로 남들이 말하고 처가살이로 2년을 하고 단거(單居: 처가에서 독립)하여 4년을 살며 수계를 착실히 하되 파공(羅工)이면 일정 전일파공(全日羅工)을 하고 삼종 기도 이라도 들에서 일을 하다가도 장궤(長趙)하고 일정(一定) 할 뿐 아니라 도무지 말하는 일이 없어 세월을 지내며 살더니, 병인년(1866) 정월 군난(營難)을 당하여 잘 피하였더니 도로 집으로 돌아와 있더니 제 삼촌이 군난 중에 전량(錢雨)이나 읍내 관아에 들였더니,(관)원(官員)의 말이 “도로 돈을 가져가라” 하니 삼촌이 와서 저(손자선)의 형더라 “가라” 하니 형이 꺼리는 모양인게 손자선이 “걱정마오,내가 다녀 오리다.”하고,덕산읍(德리邑)에로 들어가니, 관원의 말이 돈을 주 며 “너는 이 돈을 가지고 나가서 잘 살라” 하고 보내니 나오다 관속(音屬)이 함혐(舍嫌)으로 관가 (官家)에 아뢰고 잡아들여 문목(問目)하며, “너는 가서 다시 천주학을 하겠느냐?” (답왈) “어느 때라고 부모를 공경을 아니 하겠나이까? ”형벌 거조(擧指)를 차려 혹형(酷刑)을 하며,“네가 그래도 하겠느냐?” (답왈) “죽을지언정 어찌 대부모(大父母)를 버릴 것이 오니까?”
(관장 왈) “내려 가두라” 하니 관속이 끌고 나오다가 자빠뜨리고 얼굴에 오줌을 누니 손 토마스의 말이 “내가 여러 날 세수를 못 하였더니 이도 은혜로다” 하며 입으로 들어오는 오중을 먹으며 하는 말이 “오주(吾主) 예수, 세상에 계실 적에 초와 쓸개를 잡수시었는데 나는 이 오줌이 무엇이 어렵다 하리 ?” 감수 인내하여 먹고 며칠을 갇히었다가 또 올려 형벌을 하며 “네가 한 말만 하면 놓으리라”하니 “만 번 죽어도 배교는 못하나이다.” 하니 관원의 말이 “네가 배교 않는 징표로 네 손등을 물어 떼라”하니 손자선 토마스 말하되 “자기 살을 무는 것도 죄가 되오나 관가(관장)께서 시키시니 하오리다” 손 등을 물어 때니 (1차 심문), 관원이 그 것을 보고 죽이기로 결안(結安 : 사형 판결)하니 옥(덕산 옥)에 갇히어 며칠을 있으니 제 삼촌이 편지하여 “배교하고 나오라”하니 손자선 토마스 말하되 “이런 말씀을 하실 터이면 다시 편지도 마옵고 들어오지도 마옵소서” 토마스의 말이 “내 입은 옷이 새것이라” 관속더러 “너희 헌옷을 나를 주고 내 새옷을 너희 입으라” 하여도 여러 번 강잉(强仍)하되 아니 입으니 “너희는 들어라. 나는 죽기로 하였으니 새 옷을 하여 무엇을 하랴? 그러하면서 행전(行總)이나 가져라”하고 관속을 주니 받아 가지고 있다가 토마스의 형과 다른 교우를 보고 이 말을 하고 무슨 제 속 안의 말을 하여 서자(書字)로 적어서 가져다 인편이 업서 못 보내고,그저 영문(營門)으로 가서 또 두 번이나 형벌을 혹독히 하며 “한 말만 하면 이제라도 살리리라” 하되 (답왈) “만 번 죽사와도 못하나이다.” 감사(監司) 말하되 “네 그러면 배교 안 하는 징표로 네 손 등을 마져 떼라” 하니 또 순명으로 손등을 물어 떼니 (2차 심 문) 감사(監司)가 죽이기로 결안(結安)하여 병인년(1866) 2월 초 7일 (양력 3월 23일)에 잡히어, 치명하기는 2월 30일에 손자선 토마스와 김 수산나와 천안 해사동에 사는 여인 임 안나, 3인이 공주 감영(監營)에서 올가미(교수형) 치명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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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병인치명사적』, 7권 4-9
3, 홍주 순교자 : 58명
홍주 진영에서 순교한 덕산 출신자는 58명으로 나타나고,그 대표적인 순교자를 다음과 같이 기록을 찾아보고,도표(〈표 8^ 참조할 것)로 나타내었다.
*,홍주 진영 순교자 :《신 그리산도》
신 그리산도는 본디 충청 덕산 사람이라. 그 조부가 문교 하여 열심 수계 하므로 자손들을 잘 가르쳐 그 교훈을 받더라. 열심 수계하여 본디 동정을 지킬 마음이 간절하더니, 혼배 하지 아니하 고, 같은 뜻이 있는 동무 50)와 함께 수정(守貞)하기로 맹세하여 성교의 많은 경서를 통하여 우몽한 교우를 많이 강론하여 도리를 밝혀 주며 교우 있는 곳으로 다니면 강도권인(講道勸人》하기를 일 삼더라. 산곡을 찾아 수계 하기 편한 곳을 취하여 농사하여 생활하다가, 병인년 군난을 피하여 여러 곳에 다니다가 홍주 땅에서 살 적에 무진년 홍주 포교에게 잡히더라. 혹형하며 “책과 일당을 대라” 하니 “일당은 댈 수 없고, 책에 있는 말은 내 심중에 있으니, 말할 것 없고 내 배운 것을 강(講)하리라” 하고 천주 십계와 다른 경문 몇 조목을 외우더라. 잡아 본관으로 갈 때 좋은 낯으로 가며 길에서 도리를 강론하여 성교 참됨을 말하고 영장 앞에 가 문목에도 굴함이 없이 있더라. 그 함께 동정 지키는 동무와 함께 잡힌 고로 서로 위로하며 며칠 지낸 후 수영(水營)으로 보내어 교하여 죽이니, 나이 56세라. 증인은 공주 비신리서 사는 그 조카 신 루가니, 나이 36세라 (증언록,120번. 206~207쪽).
4, 서울 순교자 : 29명
덕산 출신자 중에서 서울에서 순교한 명부는 다음과 같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강완숙 골름바 와 29명이다.
가. 대표적 순교자 :《강완숙 골롬바 51)》
강완숙 골롬바는 1761년 충청도 내포지방에서 양반의 서녀(麻女)로 태어났다. 장성한 뒤 덕산 지방에 살고 있던 홍지영(洪芸榮)의 후처로 들어간 강 골롬바는 혼인한 지 얼마 안 있어 풍산 홍씨 집안 친척52)으로부터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게 되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지혜로움이 뛰어나고 정직하여 옳지 않은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1801년에 순교한 홍필주 필립보는 그녀의 아들이다.
이후 강 골롬바는 신앙에 대한 열정과 극기를 바탕으로 교리를 실천해 나갔으며,이러한 행동은 누구나 감탄 할 정도가 되었다. 1791년의 신유박해 때에는 위험을 무릅쓰고 옥에 갇힌 신자들을 보살펴 주다가 자신이 도리어 옥에 갇힌 적이 있었다. 또 그녀는 시어머니와 전처의 아들인 홍 필립보에게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온갖 노력을 다하였음에도 남편만은 입교시킬 수가 없었고, 오히려 신앙 때문에 남편에게 시달림을 받아야만 하였다. 이후 남편은 첩을 얻어 따로 생활하였다.
어느날 강 골롬바는 한양의 신자들이 교리에 밝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이에 그녀는 시어머니와 아들 홍 필립보와 의논한 뒤에 함께 상경하였고. 성직자 영입운동이 시작되자 이를 위해 노력하는 교우들 에게 경제적인 뒷받침이 되어 주었다.
1794년 말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그녀는 주 야고보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그를 도와 활동하였다. 이때 주 신부는 강 골롬바의 인품을 알고 여회장으로 임명하여 신자들을 돌보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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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치명일기』667번에 있는 간 고레고리오.
51)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위의 책.
52) 홍낙민이 지난달 10일 예산에 도착하여 … (중략) … 18일,예산 호동으로 돌아왔습니다. 서족(麻族)인 덕산 별라산(別羅山)에 사는 홍지영(洪芸榮)의 집을 방문하였습니다. (박종악 원저, 한영규 외 역, 위의 책,99〜100쪽.)
…(중략)…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강 골롬바는 그동안의 활동 때문에 곧바로 관청에 고발되었고 4월6일(음력 2월 24일) 집안에 함께 있던 사람들과 같이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끌려갔다. 그 와중에서도 그녀는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잊지 않았다.
박해자들은 강 골롬바에게 주 야고보 신부의 행방을 알아내려고 여섯 차례나 혹독한 형벌을 가하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녀의 굳은 신앙심은 형리들조차 “이 여인은 사람이 아니라 신이다”라고 감탄 할 정도였다. 3개월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강 골롬바는 신심 교육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함께 갇혀있던 동료들을 권면하면서 순교의 길로 나아갔다. 그런 다음에 사형 판결을 받고 1801년 7월2일(음력 5월22일).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녀의 나이는 40세였다.
〈그림 2〉풍산홍씨 천주교 순교자 세계도(풍산홍씨 천주교 순교자현양회(2009) 인용)
나. 강완숙의 남편 홍지영(덕산 별라산 거주) 문헌 기록 53)
강완숙의 남편인 홍지영(洪芸榮)에 대한 기록을 박종악의『수기』에서 발췌하였다.
① 신해년(1791년) 12월 2일
이에 따로 믿을 만한 사람을 보내어 …(중략)… 천안의 이존창이 바로 그 피수인데,일단 감? 에서 잡아들인 뒤로 원근이 징계 되어 자못 두려워 그만둘 줄 압니다. 다만,홍주와 덕산의 두 고을에서 호법하는 무리들이 여전히 그대로인데,별라산(別羅山)에 사는 홍지영(洪호榮),홍주 응정리에 사는 원백돌, 현내에 사는 양재와 김만득 등이 그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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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박종악 원저, 한영규 외 역,위의 책, 98〜109쪽.
홍가는 원래 양반의 명색이 있는데,함께 배우는 사람은 상천(常賤)과 친소(親疏)를 다지지 않고 번번이 내외가 상통하여 안방으로 맞아들입니다.
② 신해년 12월 13일
홍주 덕산의 홍지영(洪포을) 등의 일은 삼가 성상의 하교대로 조속히 결말을 지을 생각입니다.
이밖의 여러 고을의 사람들 역시 이 전례를 따르겠습니다.
③ 신해년 12월 20일(어찰은 18일에 나왔다)
그리고 덕산 홍지영(洪芸榮)의 일은 삼가 전날 하교대로 잡아 와 조사하였더니 그의 공초에서 “저의 어미와 처는 과연 서양학 언문 책자에 종사하였으나 저는 문자를 알지 못하는 까닭에 애당초 뜻을두지 않았습니다.” 하였습니다.
말을 들어 보고 모습을 보아하니 헛말이 아닌 듯하였습니다. 우선 보방(保故)하여 거듭 타이르고,이어서 다짐을 받고 풀어주었습니다. 그를 잡아 와서야 비로소 이 사람 홍지영(洪芸榮)이 양돈냥 홍낙성(洪樂性)의 5촌 서(麻) 조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④ 임자년(1792년) 정월 3일 : 덕산 홍지영 집안의 일을 소개
충청도에서 요사한 술법이 일어난 것은 예산 호동(孤洞)에서 시작된 일입니다.
“대저 이 술법을 하는 자는 서로 교중(交中)이라고 부르며,노비와 주인이 존비가 없고 멀고 가까운 사람이 친소의 구별이 없습니다. 남자만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양반가의 규수는 언문으로 풀이하여 읽고,상천(常賤)의 어리석은 입으로 외웁니다. 늙고 젊고를 가리지 않고 어른과 아이를 가리지 않고 일단 이 술법에 빠지면 미혹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시험 삼아 양반가의 구수로 말하자면,가령 길 가는 사람이 제 입으로 그 학문을 하는 자라고 말하면 그의 성명과 거주지를 묻지 않고 그가 양반인지 상한인지 따지지 않고 모두 안방에에서 만나기를 허락하며 중요한 손님처럼 공경하고 가까운 친척처럼 아입니다. 거처와 음식도 달건 쓰건 함께하는데, 떠날 때는 반드시 노자를 줍니다. 비록 부자지간이라 해도 아비가 하지 않으면 아비를 아비로 여기지 않고 다른 무리라고 지목합니다. 비록 남에게 구타와 모욕을 당하더라도 가만히 보기만 하고 구하지 않습니다. 사학이 사람을 깊이 빠뜨리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⑤ 홍지영의 집 사학 무리들.
“덕산(德…) 별라산의 홍지영(洪芝榮) 집의 행랑채에 사는 고오봉(高죠寒), 김취재(金就才) 및 김취재의 처남으로 다리를 저는 자, 대천 장터 부근에 사는 안갑동, 이름은 모르지만,안충의(安忠義)라고 불리는는 사학에 미혹되었습니다. …(중략)… 숨겨 두고 있을 것입니다.”
⑥ 홍지영(洪芸榮) 인물평.
“홍지영은 예전에 이미 다짐을 바쳤는데 방서를 바쳤습니다. 그리고 그의 사람됨을 보니,전혀 문자를 몰라 어리석기 그지없습니다. 이러한 무리는 걱정할 것이 못 됩니다. …(중략)… 덕산 별라산(別羅山)에 사는 장성로(張聖魯)와 그의 생질 이가(李퐘) 역시 사학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의술로 유명하기 때문에 이웃 수령, 아잔, 백성과 모두 친숙합니다.”
5, 수원과 기타지역 순교자 : 18명
가. 수원지역 : 4명
수원지역에서 순교한 순교자는 김 토마스,김선행 필립보,김양범,임 프란치스코 4명이다.
나. 기타지역 : 18명
청주 병영에서는 김사집 프란치스코가 순교하고,대구 감영에서 고성대 베드로와 고성운 요셉
형제 그리고 이시임 안나가 순교한다. 정태봉 바오로는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하고,5 0 세 김조이는 전주 감영 옥에서 순교한다. 이렇게 6명의 '하느님의 종’이 탄생한다.
결론 적으로 덕산 출신 순교자는 141 명으로 집계되었다. 그중에서 삼복제를 적용한 충청 감영에서의 사형과 선참후계에 의한 재심 기관인 해미 진영이나,홍주 진영에서 사형 된 사례이다. 초기 박해 시기에 정산필의 경우에는 초심에서 사형을 판결하여 집행하는 때에도 발생한다. 덕산 출신 순교자는 성인 1명, 복자 12명,순교자 128명 모두 141명이 배출되었다.
이를 순교지역별로 정리하면 덕산‘해미지역은 16명,충청감영 공주는 16명, 홍주는 58명 서울지역은 29명,수원은 4명 기타지역은 18명으로 분류되고 총 141명의 순교자가 배출되었다.
6,나가며
본 연구를 하게 된 동기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덕산지역에는 이벽과 논쟁을 벌였던 이가환의 묘가 덕산 장천리에 있었고, 후에 여주이씨의 묘가 원주로 이장되었으며, 이가환의 숙부이고 성호학파 이익의 제자였던 정산 이병휴가 덕산 장천리에 거주하였다는 사실 때문이다.
두 번째는 덕산 옥(獄) 터와 관아(官衝) 터의 위치가 고증 중이었고,덕산현 성읍 터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한국 박해사의 전환점이었던 덕산굴총사건의 현장인 남연군 묘가 덕산 가야산에 위치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동기에서 본 연구의 방향과 목적을 다음과 같이 설정하였다.
첫 번째는 1751년경부터 천주학(전學)을 연구한 성호학파의 제자들이 예산과 덕산현에 정착하는 과정을 소개하고자 하였다.
두 번째는 덕산 가야산에 있는 남연군 묘 굴총사건의 재조명 하고자 하였다. 1868년 병인박해 시기에 일어난 사건에 대하여 성찰하고자 하였다.
세 번째는 덕산지역의 박해를 시기별로 분류하고,덕산 출신 순교자 명부를 작성하여, 이를순교 지역별로 분류하고자 하였다. 더불어 순교신앙의 증거지인 덕산 관아와 옥 터에 대하여 순교사적 의미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이를 연구의 방법으로 덕산 옥터의 위치는 현지 토박이 향토학자의 구술과 문헌을 통하여 고증하고자 하였고, 순교자는 순교자료를 통하여 순교 시기별, 순교지역별로 분류하고자 하였다. 전제적으로 구술 및 현장 조사와 문헌조사를 병행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본 연구의 성과를 3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다.
첫 째, 예산 ‘덕산현 지역은 초기 천주교 전래에 대한 교회사적인 의미를 고찰하였다. 이는 경기 안산에 거주하던 성호의 제자들이 이곳으로 이주하였기 때문으로 예산. 덕산현은 천주학(西學)전래의 태동지로서 의미이다. 예산‘덕산지역에서 천주학(西學) 전래 계보는 2개 지역과 인물들로 나뉘는데, 하나는 덕산현 장천리 지역의 이병휴계이고,또 하나는 예산 호동 지역의 홍유한계이다. 즉 이병휴 계보는 이가환을 중심으로 이기양,권철신,이벽으로 이어지며,호동의 홍유한 계보는 홍유한, 홍낙민(4대 순교자 배출),이존창,이기양,권철신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2갈래의 계보는 다시 경기 양근의 녹암 권철신 계보로 통합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병휴계는 당시 주자학 일변도 사고에서 탈피하여 양명학적인 사고인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을 수용하면서, 제자들이 천주학(3學)을 받아들이는데 필요한 사상적 기반을 형성하였다. 다만 이병휴의 서학에 대한 이해와 수용은 서양 역법과 일월식 등 서양 과학의 학문적인 수용에 머물고 있다.
홍유한계는 홍유한이 18년 동안 예산 호동에 머물며 수양한 수계생활(修誠生活)을 통하여 홍낙민, 이존창 등의 제자를 양성하였고, 녹암 권철신 학맥을 형성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한편 내포 지역 천주교(西學) 전교 활동은 이존창 중심으로 전교한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호동 홍유한 계보를 살펴보면 홍낙민의 역할5 4 )도 매우 지대하였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 홍낙민과 이존창의 활동으로 인하여 내포의 천주교는 신앙의 못자리로 변하였다. 중요한 점은 홍유한이 가진 전주 신앙의 수용과 실천과 그리고 수계생활에 대한 교회 내의 시각은 크게 두 가지로 갈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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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강완숙 골롬바 등의 전교와 이존창의 신분 상승,함께 학문에 수학한 것 등이다.
하나는 부정적 의견으로 홍유한은 오로지 유가에서의 극기복례를 실천한 선비에 불과하고,“ 홍유한 자신이 천주학에 대한 본인의 신앙을 말한 기록이 없다.”라는 이유에서 단순히 유학자로 보는 부정적 견해이다.
또 다른 하나는 비록 세례는 받지 않았지만 학세와 같은 신앙의 실천적 수계생활을 하였다는 긍정적인 견해다. 이러한 결과로 홍유한 제자 가운데 이존창은 내포의 사도로 성장하고, 홍낙민은 자신을 포함하여 4대에 걸쳐서 순교자 집안으로 태어난다.
앞으로 이에 대한 논의는 계속될 것으로 보이나, 본 연구를 통하여 본 결과, 본인은 부정적 의견보다는『칠극』을 통한 수계생활을 실천하였다는 긍정적인 의견에 수긍이 간다.
둘째, 1868년 병인박해 시기에 박해의 정점을 찍는 사건이 발생 하는데, 그것이 ‘덕산 남연군묘 굴총사건’(이하 덕산굴총사건)이다. 가야산 대원군의 부친 남연군 묘가 교회의 일부 구성원에 의하여 파 헤쳐진 사건이다. 위의 사건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인 ‘문학의 복음화’ 차원에서 보면 다음의 결론에 다다른다.
‘ 문학의 복음화’는 세계 곳곳의 다양한 문화에 대하여 그 민족의 자율성과 주체성을 인정하고 있다. ‘덕 산굴 총사건’ 사건을 ‘문화의 복음화’ 시각으로 보면, 이는 자율성과 주체성을 가진 이민족 문화에 대한 성교회가 저지른 문화적 침탈 행위이며, ‘반문화적 복음화’이다. 즉, 페통 신부의 사목적 오류에 의하여 발생한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이에 성교회가 저지른 반도덕적 행위(1868 : 덕산굴총사건)에 대하여 앞으로 성교회는 어떻게 반성하고, 성찰해야 할 것이냐는 물음을 던져 본다. 본 연구로 덕산굴총사건을 새롭게 성찰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셋째, 덕산지역의 박해는 5차례(정사박해(1797년),신유박해(1801년), 정축박해(1817년), 기해 박해(1839년), 병인박해(1866년))가 일어났으며,병인박해 시기 1868년에는 덕산굴총사건이 일어 난다.
위 박해의 결과로 덕산출신 순교자 총141명으로 나타난다. 이를 순교지역별로 분류하면, 공주 감영 순교자가 16명,덕산. 해미 순교자가 16명, 홍주 진영 순교자 58명 등 순교자가 나타난다. 서울지역은 29명, 수원 4명, 기타지역은 18명이다.
또한, 덕산 출신 순교자 141명 중에 덕산과 해미와 홍주와 공주 순교자는 이곳 옥 터와 관아에서 문초와 고문을 받은 것으로 나타나고, 성 손자선 토마스는 덕산 옥에서 첫 신문과 문초를 당했으며,복자원시보 야고보, 복자 정산필 베드로, 복자 김사집 프란치스코 등은 덕산 포교에게 붙잡혀 이곳으로 압송되어 고문을 당하였다. 이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행해진 모진 박해에도 불구하고 배교를 거부하고 천주 신앙을 고백하였으며,특히 복자 내포 회장인 정산필은 덕산 옥이나 이웃 형장에서 참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박해시대 덕산 비방곳면 신리 지역에 파견된 파리외방전교회 사제들의 전교 활동으로 인하여,병인박해 시기에는 덕산지역에 8 4 명의 순교자가 배출되었다. 결론적으로 덕산지역은 5차례 박해를 통하여 순교자 총 141명을 배출하였고,그중에서 덕산 옥 터와 관아 터는 순교신앙을 증거한 중요한 장소로 주목받는다. 이렇게 덕산지역은 천주 순교신앙의 못자리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되었던 골고타 언덕으로 죽음을 향한 길을 스스로 선택하여 가셨다. 예수 께서는 십자가 처형되었던 전날밤에 올리브산,겟 세마네 언덕에 오르시어 고뇌 찬 모습으로 피땀을 흘리며 기도했던 장소가 겟세마네이다. 예수께서 몸소 머물렀던 겟세마네처럼 덕산 옥 터는 이곳 순교자에게는 죽음을 선택하기 위한,고뇌의 피눈물을 흘린 곗세마네와 같은 장소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덕산 옥 터를 ‘한국의 겟세마네’라고 부를 수 있겠다.
이러한 순교신앙의 결단의 장소였던 덕산 옥은 현세를 사는 우리에게 배교의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속세의 유혹을 벗어나 순교의 길로 갈 것인가를 고뇌하고 성찰하는 묵상 장소로 거듭나것이다. 이렇게 덕산 옥 터는 순교와 배교라는 갈림길에서 최후의 선택 장소였다. 이곳 덕산에서 처형지인 해미로 가는 죽음의 길은 예루살렘의 골고타의 길처럼 희망의 길이며 부활의 길이기도 하다.
이번에 부족하지만 새롭게 순교신앙의 증거지인 덕산 옥 터의 위치와 덕산 출신 순교자 141명의 명부가 발굴되었다. 이에 앞으로 덕산지역의 천주교 전래와 함께 많은 연구가 계속해서 이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부록 1 : 박해 시기의 덕산 행정구역
1. 덕산현의 지도와 행정구역 (김정호『청구도』, 1834년)
그 지역편제는 군(郡), 현(弼) 밑에 면(面),리(里)가 있었는데,면(面)은 지금 같은 행정기구가아니었다. 면장은 명예직으로 향리의 일을 돌보아 주었고, 리(里)에는 리정(里또)이 있었으나 행정 실무보다는 향리의 양속(良俗)을 권장하는 일을 맡았다.
『덕산현읍지(德이弼邑誌)』에 기록된 덕산현의 소속 행정구역은 다음과 같이 12개 면(面)으로이루어져 있다. 즉,장촌면(場村面,6),대조지면(大鳥指面,12),대덕산면(大德山面,5),나박소면 (羅朴所面,6),현내면(離內面,8),내야면(內世面,12),도용면(道用面,7),외야면(外世面,6),고현 내면(古顯內面, 6),고산면(高山面,11),거등면(居登面,4),비방곶면(非方率面,7)이다.
① 장촌면(場村面) - 가좌동(佳左洞),석곡리(石谷里),두리(頭里),현학리(玄化里),목리(木里),하촌(下村)
② 대조지면(大鳥指面) - 상갈리(上葛里),하길리(下葛里),역상리(釋上里),역중리(譯中里\ 역하리(釋 下里),평리(파里), 성상리(域上里),상통두리(上弼頭里),하용두리(下龍頭里),가마금리(薦馬金里),창정리(倉井里)
③ 대덕산면(大德⑴面) - 일리(一里\ 이리(그里),삼리(크里),목욕리(休浴里),수촌리(水村里)
④ 나박소면(羅朴所面) - 광돌리(廣통里),사천리(斜川里),외나리(外羅里),가야동(佳世洞),송염리 (松獻里),낙천동(樂天洞)
⑤ 현내면(弼內面) - 읍내리(邑內里),원리(院里),향교동(鄕校洞),금운동리(冷툐洞里),둔지산리 (范芸山里\ 노곡리(廣谷里),가야동(偏偏洞),사기거리(沙器居里)
⑥ 내야면(內世面) -봉명동(鳳鳴洞),식암도(息岩洞),외곡리(外谷里),당동리(唐洞里) 옥전리(玉田里),우교리(牛橋里),칠전리(七田里),내동리(內洞里)상안리(上安里),후종리(後宗里),석야리(5邢里),사기점리(沙器占里)
⑦ 도용면(道奪面) - 일리(一里),이리(그里),삼리(드里),사리(四里),중리(中里) 용리(用里),구만리(九萬里)
⑧ 외야면(外世面) - 마산리(馬…里),금치리(金時里),고산동(高⑴洞),학전리(花田里) 고도곡리 (古道谷里),금치리(琴時里)
⑨ 고현내면(古弼內面) - 학리(米里),대기동(大技洞),대곡리(代谷里),해상동(海詳洞) 나산리(羅 미里),방축리(防프里)
⑩ 고산면(高미面) -양금리(良속里),호음동(好音洞),상몽리(上樣里),중몽리(中夢里)
하몽리(下夢里),장천리(長川里),하천리(下川里),지곡리(紙谷里) 추동리(微洞里), 황모리(黃 毛里)
⑪ 거등면(居等面) - 상리(上里),하리(下里),궁리(宮里),포리(消里) 신리(新里),신촌(新村), 범천리(犯川里)
⑫ (비방곶면(非方率面)- 창리(倉里),조리(鳥里),다사리(多士里),돈곳리(頓率里), 신리(新里), 신촌(新村), 범천리(犯川里)이다. 이곳에 해창(海會)이 있었다,
2.덕산현의 『1872년 지방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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