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1. 마르크스는 1848년 프랑스의 2월 혁명이 어떻게 나폴레옹의 조카였던 루이 보나파르트의 권력으로 전락했는가를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를 통해 추적한다. 루이가 황제가 된 직후에 쓰여진 이 책의 서문에는 마르크스 저작의 의도가 기록되어 있다. “나는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이 어떻게 기괴하고 평범한 한 인간으로 하여금 영웅으로 행세할 수 있는 그러한 조건과 관계들을 만들어 내었는가를 보여주고자 하였다.” ‘브뤼에르 18일’은 1799년 나폴레옹이 통령 정부를 전복시키고 권력을 장악한 날이다. 마르크스는 루이의 권력 장악이 ‘브뤼에르 18일’의 재판으로 본 것이다.
2. 1848년 2월 혁명은 루이 필립의 7월 왕정이 ‘금융 부르주아지’들의 독점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에 불만을 품은 다른 계급들의 반항으로 이루어졌다. 프롤레타리아의 봉기에서 시작된 혁명은 다른 계급의 지지를 통해 확산되었고 루이 필립은 권력에서 내려온다. 하지만 또다른 계급 투쟁이 연이어 발생한다. 더 나은 삶의 조건을 내세운 프롤레타리아의 ‘6월 봉기’는 다른 계급들의 연합에 의해 붕괴되었다. 연합세력은 “재산, 가족, 종교, 질서”의 필요성을 구호로 외치면서 국가의 혼란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 ‘6월 봉기’의 처참한 패배 이후 권력을 장악한 세력은 순수 부르주아지 공화파였다. 이들은 ‘제헌의회’를 통해 헌법을 제정하고 새로운 권력관계를 구상했다. 이들의 주도 속에 1848년 12월 10일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그러나 공화파는 권력 장악에 실패했다.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트르가 대통령으로 선출된 것이다. 루이의 선출에 가장 영향을 준 집단은 ‘농민’들이었다. 확대된 선거권의 영향은 농민들에게 선거를 좌지우지하게 만들었다. 마르크스는 12월의 선거를 ‘농촌의 반동’이라고 규정짓는다.
3. 선거 이후 부르주아지 공화파는 몰락한다. 마르크스는 이들의 몰락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부르주아를 위해 공화정을 수립하고, 혁명적 프롤레타리아를 무대 밖으로 밀어내고, 민주파 쁘띠부르주아지들을 당분간 침묵하게 만든 후에 정작 부르주아 공화파는 당연하게도 국가를 자신의 재산으로 전수한 부르주아 대중(왕당파 세력)에 의해 한쪽으로 밀려났다.” 권력은 보나파르트와 왕당파(부르봉파와 오를레옹파)가 연합한 ‘질서당’의 협력 세력이 장악하게 되었다. 하지만 ‘질서당’은 단일한 부르주아 세력이 아니었다. 이들은 정통파 왕조(부르봉)와 7월 왕정(오를레앙)을 추종하는 집단의 결합이었으며, 그들의 근본적인 사회적, 경제적 물적조건이 토지와 자본에 있다는 점에서 상이한 집단이기도 하였다.
4. 쁘띠 부르주아 세력(산악당-민주당)은 의회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질서당에게 도전한다. 하지만 이들의 도전은 실패로 끝이 난다. 질서당은 헌법을 보호하기 위해 벌인 ‘쁘띠 부르주아’ 세력의 봉기를 무정부적 행위로 낙인찍으며 그들을 제거한 것이다. 이후 일시적으로 의회에서 ‘질서당’의 독재가 시작되었다. 마르크스는 쁘띠 부르주아 세력의 실패가 잘못된 판단과 전략의 결과라고 혹평하면서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그들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라 정작 자신의 위협을 실행에 옮기는 것이 필요하다고 스스로를 설득시켜야 할 때, 이같은 설득은 너무 모호한 형태로 이루어져 목표를 이룰 수 있는 수단을 회피하고 굴복에 대한 변명을 찾기에만 급급하다. (......) 민주파처럼 자신의 수단을 과장한 당파도 없으며 상황에 대해 그렇게 경박하게 망상한 경우도 없다.”
5. 질서당의 권력 장악은 “공화국과 헌법에 대한 악의에 찬 독설과 그들의 지도자들이 이룩한 것을 포함한 미래·현재·과거의 모든 혁명에 대한 저주, 그리고 언론의 입을 틀어막고 결사의 자유를 파괴하고 계엄령을 관계법으로 제도화하는 등의 수단을 통해 쟁취된 것”이었다. 질서당의 의회독재가 시작되면서 권력 투쟁은 이제 협력자였던 보나파르트와 이어지게 된다. 보나파르트는 1849년 11월 자신의 이름이 질서당 치하와 독립해 있음을 천명하면서 내각을 해산하고 행정부의 권력 장악을 시도한다. 이런 과정에서 의회는 마르크스의 표현대로 '자기 계급에 활력을 불어넣는 조건, 즉 의회권력의 활력적 조건‘을 오히려 폐기했으며 행정부 권력에 무력해졌다. 마르크스는 의회나 시민단체가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했을 때, 행정부의 독재가 확장될 수 있음을 경고하였다. “의회가 국가행정을 간소화하고 가능한 한, 관리집단을 축소시키지 못한다면, 그리고 무엇보다 시민사회와 여론이 행정부와 독립된 그들 스스로의 조직체를 형성하지 못한다면 의회가 내각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상실할 때 의회는 모든 실질적 영향력을 상실한다는 사실이다.”
6. 의회의 질서당은 권력 투쟁 속에서 자신들의 세력을 공고히하기 위해 1850년 5월 선거법 개정을 실시한다. 이 개정은 확대된 ‘보통선거권’을 폐지하고 프롤레타리아의 정치 참여를 봉쇄하려는 시도였다. 또한 보나파르트의 재선을 허용하는 개정에는 반대함으로써 보나파르트와의 갈등을 고조시켰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보나파르트는 은밀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는 의회를 압박하여 대통령의 급여를 인상시켰고 그 돈을 이용하여 ‘룸펜 프롤레아’ 세력을 자신의 정치적 동원단체로 끌어들였다. 이러한 갈등과 충돌은 심각한 폭력으로는 전개되지 않았다. “프랑스는 무엇보다도 평온을 유지한다.”라는 생각이 프랑스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결국 이러한 안이한 대처가 보나파르트의 음모가 성공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준 것이다.
7. 1851년의 상황은 보나파르트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상공업에 종사하는 일반 부르주아 세력이 보나파르트를 지지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1851년의 일시적인 공황을 잘못 이해했다. 공황은 유럽 전체를 휩쓴 ‘과잉생산, 과잉투기’의 결과였지만, 그것을 정치적 혼란때문이라고 인식하여 국가 특히 정부의 안정을 요구하며 정부 주도의 정책을 지지하였던 것이다. 일반 부르주아들의 태도는 그들이 간행하는 잡지 <이코노미스트> 1851년 11월 기사에서 찾을 수 있다. “대통령은 질서의 수호자이며 지금은 유럽의 모든 증권시장에서 그렇게 인식되고 있다.” 부르주아지 무리는 “대통령에게 굴복하여 의회를 비방하고 그리고 자신의 언론을 가차없이 탄합함으로써 자신의 정치가들과 문필가들, 즉 자신의 연단과 언론을 탄압하고 페지하도록 보나파르트를 유도”한 것이다. 이들이 가졌던 “종말이 없는 공포보다는 공포가 있는 종말의 편이 오히려 낫다.”는 생각은 결국 1851년 12월 2일 보나파르트의 쿠테타를 통해 전권을 장악했을 때 환호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8. 마르크스의 저작은 차분하게 정리된 작품이라기 보다는 당시의 확보된 자료를 통해 생생하게 현장을 복원한 ‘르포’에 가까운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는 각 계급 투쟁이 어떤 성격과 한계를 가졌는가를 면밀하게 검토하고 그 결과를 기록함으로써 혁명의 과정을 심층적으로 안내하고 분석할 수 있는 시각을 우리에게 제시해주고 있다. 마지막 장에서 마르크스는 보나파르트 정부가 갖고 있던 한계가 모든 계급에게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어하지만 그의 공약대로 정책을 실시한다면 ‘한 계급을 착취하여 다른 계급에게 시혜를 베풀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결국 그러한 한계 때문에 권력은 불안해질 수밖에 없으며 보나파르트 정부는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는 점을 예측한다. 이러한 예측이 실제로 맞았는가에 대한 평가는 차치하고 혁명의 진행에 관한 여러 가지 자료를 통해 역사의 변화를 추적하는 작업은 시대와 인간을 이해하는 중요한 훈련일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기록은 여전히 현재에도 의미있는 기록이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마르크스의 보나파르트 정부에 대한 평가를 옮겨본다. “나폴레옹의 대리자로서 끊임없이 놀라운 일을 연출하며 자신에게 대중의 눈길을 고정시켜야 하는 필연성, 즉 날마다 소규모 쿠테타를 실행에 옮겨야 할 필연성 때문에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의 모순된 요구에 의해 내몰린 채, 일종의 마술사처럼 행새해야 하는 그러한 존재로서의 보나파르트는 (......) 질서의 이름으로 실질적인 무정부 상태를 만들어낸다.”
첫댓글 - “종말이 없는 공포보다는 공포가 있는 종말의 편이 오히려 낫다.” ??? 스스로를 공포 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