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로족의 역사
머로족은 중국 남방의 광서장족자치구와 귀주성에 모여 살고 있는 소수민족이다.
2010년 제6차 전국인구보편조사에 따르면 머로족의 인구는 약 20만명에 달한다.
1956년에 국무원은 이들을 머로족으로 공식 확인했다. 머로족은 본 민족의 언어는 있으나 본 민족의 문자가 없으며 한자를 통용한다. 머로족의 민족 언어는 한어-티베트어계 장족뚱족어족의 뚱족 수이족 갈래에 속한다.
다수의 머로족 노인들은 본민족을 ‘링’(伶)이라고 자칭하며 소수지역에서는 진(謹) 또는 ‘본지인’으로 자칭한다. 한족은 머로족을 “머로’(仫佬)라고 지칭하고 장족들은 광서장족자치구에 거주하고 있는 이웃 민족 머로족을 ‘부진’(布謹)이라고 부른다.
머로족은 그역사가 유구하다.
머로족은 귀주고원 최초의 개척민족의 하나로 알려져있다. 머로족의 원고시대 선민들도 기타 민족의 선민들과 마찬가지로 찬란한 선사시대 문화를 창조했다.
1958년 류강(柳江)현 신흥 농장 통천(通天)암옆 동굴에서 하악골이 없는 완정한 두개골과가슴등 뼈, 요추, 늑골등이 출토됐다.
이는 5만년전 구석기시대 말기 고인류의 화석으로 판정되어 ‘류강인’으로 이름 지어졌다.또 부근에서 발견된 ‘류강인’ 동시기 문화 유물을 볼때 당시의 원시인들은 산을 등진 물가에 자리한 석굴에 거주했으며 식물채집과 동물수렵으로 생계를 유지했고 이미 음식을 불에 익혀 먹는 단계에 들어섰다.
그리고 함께 노동하고 평균 분배하며 모계씨족 중심 의원시 공사생활을 했다.1965년과1973년 고고학자들은 계림시 남부의 독산(獨山)증 피암(甑皮岩) 사방 60평방미터 범위내에서 18구의 인체골격을 발견했으며 이를 증피암인이라고 명명했다.
증피암의 출토물로부터 당시의 사람들이 신석기 시대에 처해있었음을 알수있다. 전문가들은 증피암인과 류강인이 밀접한 혈연관계가 있다고 본다. 바로 광서의 토착민족에 속하는머로족의 원고시대 선민이 증피암인이고 증피암인의 선조가 류강인인이라는것이다.
전국시기말기부터 령남(嶺南)서부일대에 거주한 머로족 선민들은 서구낙월(駱越)민족의한갈래에 속했다. 그후 진(秦)나라가 령남지역을 통일하면서 이곳의 머로족 선민들은 령남의 기타 민족과 함께 중화민족의 대가정에 합류했으며 ‘료’(僚)로 통칭되었다.
한나라때에는 많은 한족들이 령남지역에 선진적인 생산기술을 갖고와 령남지역의 정치와경제의 빠른 발전을 떠밀었다.
수나라와 당나라때 중앙왕조는 령남 소수민족지역에서 견제정책을 취해 수십개 주와 현을설치하고 현지의 소수민족 수령을 관리로 임명했다.
이런 관리들에 대해 중앙왕조는 그들이 중앙왕조의 정권을 승인하고 지시에 복종하며 의무를 이행하면 관리직을 세습시키고 우대해주었으며 현지의 사회제도와 경제구조를 보류할수 있도록 했다.
이시기 머로족 선민들인 령남‘료’의 사회경제는 한층 발전해 소를 부려 밭을 갈기 시작했고벼농사 기술도 한층 제고되었다.
그리고 수공업 제련과 도금, 도자기 제조 등 기술도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진(晉)나라때머로족의 선조들은 ‘푸료’(濮僚)로, 남북조시기에는 ‘무룽료’(木壟僚)라고 불렸다.
송나라와 원나라때 머로족은 료, 링등으로부터 단일민족으로 분화되었다.
원나라때부터는 머로족과 관련된 기재가 점점 많아지기 시작했다.
사서에 기재된 ‘무로’(木佬), ‘무뤄우’(木婁), ‘무요우’(木搖)등은 모두 머로족을 가리키는것이다.
사서의 기재와 전설로부터 머로족이 늦어도 원나라와 명나라초반에 이미 라성(羅城)일대에 거주했음을 추론할수 있다.
당시 명나라는 송나라와 원나라의 제도를 이어 라성과 천하(天河), 의산(宜山)등 머로족의집중거주지역에 유관(流官)을 계속 설립했다. 이때 머로족은 봉건사회에 들어섰으며 해마다 여름철과 가을철에 쌀을 조세로 조정에 바쳤다.
1933년이후 국민당 세력이 머로족지역에 심입하면서 봉건 종법제도가 한층 강화되고 빈부의 격차가 크게 나타났다. 하여 부농이 점유한 토지는 중농의 2배에서 4배, 빈농의 5배에서 6배 심지어 10배에달했다.
잔혹한 착취로 빈곤과 기아에 허덕이던 광범한 머로족 인민들은 기타 형제민족과 함께 반봉건 투쟁에 나섰으며 명나라와 청나라때 크고 작은 규모의 무장투쟁을 수차례 일으켰다.
중국공산당이 창당 된 후 머로족 지역의 투쟁은 점차 당의 영도하에 진행됐으며 이들은 류북인민해방부대에 참가해 각 족 인민들과 함께 국민당 군대의 진공에 항격했다.
이 유격 제1대대 제 3중대의 70%이상의 대원들이 머로족이었다.
이들은 1949년 11월 인민해방군을 도와 라성을 해방했다.
1984년 국무원의 비준을 거쳐 머로족은 라성 머로족 자치현을 설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