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숭아(봉선화)
김형준 시/홍난파 곡
우리나라 최초의 가곡이자
우리 나라 최초의 저항 동요
일제하의 민족의 처지를 울밑의 봉선화에 빗대 노랫말을 만들고 곡을 붙여
일제 말기 전국민의 가슴을 어루만진 최고의 애창곡
우리 가곡을 잘 모르는 사람도 이 곡은 알고 있는 곡이다.
이 "봉선화"는 일제에 국권이 유린된 얼마 후부터 갑자기 불리기 시작했는데,
우리 겨레의 슬픈 얼의 화신으로 붕숭아가 망국한의 넋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제 말기에는 금지곡으로 묶이기도 하였다.
이 곡의 작곡은 1920년, 가사는 여류 피아니스트 원로 대가인 김원복의 딸 김형준의 시이며,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의 노래는 "학도가"정도 창가뿐이었는데 "봉숭아"의 출현으로 음악의 수준이
한 단계 상승하는 역할도 하게 된다.
바이올린 연주자 출신 작곡가의 서구적인 악곡이지만 부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민족적인 선율과
악상으로만 느껴지는 것도 우연한 것이 아닐 것이다. 또한 당시의 녹음으로 듣다보면
창법 또한 민요적인 특성이 다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래가 얼마나 민족의 예술성과 민족의 사상을 깊이 이끌고 표현하는 가를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이기도 하다. 더구나 홍난파의 처녀작이 바로 이 "봉선화"이고 보니 더욱 놀랍기도 하다.
참고로 봉선화의 순우리말은 봉숭아이다. 과거 한자로 표기하던 시기에는 "봉선화(鳳仙花)"로 쓰였다.
문일평의 "화하만필" 등에서도 봉선화가 사용됨을 볼수 있는데, 초기 "봉선화"로 발표되어 불리던 것이
대중들 사이에서 봉숭아와 혼용되어 불렸다. 해방 후 국어 표준화 운동으로 "봉숭아"로 불리어지지만
아직 봉선화와 봉숭아 둘 다 표준어로 허용하고 있다.
조수미 소프라노의 연주 영상에는 2절까지만 불렀자만 3절의 가사내용 특히 끝부분을 갖고 일본경찰에서
홍난파 선생을 감옥살이를 심히 시켜 홍난파 선생은 이 봉숭아 작곡으로 우리민족의 희생이 되었다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