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장 12절-25절: 그 형들이 세겜에 가서 아비의 양떼를 칠 때에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 형들이 세겜에서 양을 치지 아니하느냐 너를 그들에게로 보내리라 요셉이 아비에게 대답하되 내가 그리하겠나이다 이스라엘이 그에게 이르되 가서 네 형들과 양떼가 다 잘 있는 여부를 보고 돌아와 내게 고하라 하고 그를 헤브론 골짜기에서 보내매 이에 세겜으로 가니라 어떤 사람이 그를 만난즉 그가 들에서 방황하는지라 그 사람이 그에게 물어 가로되 네가 무엇을 찾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나의 형들을 찾으오니 청컨대 그들의 양치는 곳을 내게 가르치소서 그 사람이 가로되 그들이 여기서 떠났느니라 내가 그들의 말을 들으니 도단으로 가자 하더라 요셉이 그 형들의 뒤를 따라 가서 도단에서 그들을 만나니라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서로 이르되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 꿈이 어떻게 되는 것을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르우벤이 듣고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려하여 가로되 우리가 그 생명은 상하지 말자 르우벤이 또 그들에게 이르되 피를 흘리지 말라 그를 광야 그 구덩이에 던지고 손을 그에게 대지 말라 하니 이는 그가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여 그 아비에게로 돌리려 함이었더라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매 그 형들이 요셉의 옷 곧 그 입은 채색 옷을 벗기고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지니 그 구덩이는 빈 것이라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 그들이 앉아 음식을 먹다가 눈을 들어 본즉 한 떼 이스마엘 족속이 길르앗에서 오는데 그 약대들에 향품과 유향과 몰약을 싣고 애굽으로 내려가는지라.
참고: 37장부터 42장까지.
우리가 이 본문의 성경은 단편성만이 아니고 복합성으로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단순히 얘기거리만이 아니고 그 속에 또 들어있는 뜻이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시대 그 지방에 따라서 각각 다르게 나타나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인간 자기가 합리화 시키면 안 됩니다. 정치적으로나 사역적으로나 자기의 일에다 합리화 시켜서 육적인 목적을 달성하여서 합리화 시키면 안 된다 그 말이요. 왜 이 말씀을 드리는가 하니 요셉에게 행하여진 모든 일들을 생각해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합리화 시키게 되면 성경에 있는 그 어떤 것뿐만이 아니고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도 합리화 시키게 돼버립니다. 이런 것은 철저히 삼가 해야 됩니다. 무슨 말인가 하니 합리화 시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서 자기를 고쳐나가야 한다 그 말이요.
성경에서 가만히 보면 무신론사상도 볼 수가 있고 이방사상도 볼 수가 있고, 그것뿐만 아니고 상선도 있고 군함도 있고. 이런 식으로 얼마든지 하나 하나 여러 군데서 성경구절을 뽑아가지고 조립식으로 만들 수도 있다 그 말이요. 위험하다 그 말이요. 합리화 시키는 것이 바로 그런 식이다 그 말이요.
요셉은 꿈을 잘 꾸었습니다. 누가 그 꿈을 주었지요? 하나님이 그 꿈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하나님께서 주신 옳은 꿈을 가진 인생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옳은 꿈을 가진 누구다? 요셉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옳은 꿈을 가진 누구다? 하나님께서 주신 옳은 꿈을 가진 요셉이지. 옳은 꿈을 가진 인생이다. 요셉은. 성경 구약의 이 요셉은 인간 조작배기 꿈이 아니다 그 말이요.
오늘날 세상 많은 사람들이 꿈을 꾸지요? 말하자면 희망을 가지지요? 그 희망은 꿈이라 그 말이요. 많은 희망을 가지고 있어요. 각자 자기가 만든 꿈이라. 그런 것은. 그건 인간 조작 꿈이라.
그리고 요셉은 또 이 많은 사람들이 잠잘 때에 간밤에 꾼 꿈 그런 꿈은 아니라 그 말이요. 물론 성경에 보면 요셉은 잠을 잘 때에 꿈을 꿨지만 그 요셉의 꿈은 꿈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를 보여주는 게 있다 그 말이요. 그 계시의 꿈이라 그 말이요.
그렇다면 요셉의 꿈을 꾼 그 꿈을 요셉이 우리에게 들려줄 때에, 성경을 통해서 들려줄 때에 요셉의 꿈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안다면 그 요셉이 꾼 꿈 그 속에 하나님의 뜻이 담긴 그 꿈을 우리도 꿀 수가 있지요. 이해가요? 우리도 그 희망을 가질 수 있다 그 말이요. 그게 꿈이라.
어젯밤에 꾼 꿈은, 세상사람들이 다 꾸는 꿈은 개꿈이에요. 맞더라도 그거는 영원 궁극적인 신령세계의 뜻이 담긴 건 아니라 그 말이요. 많은 사람들이 꿈을 꾸고 있잖아요. 간밤에 꾸는 꿈도 있지만 눈을 뜨고도 자기의 희망스런 꿈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 말이요. ‘나는 앞으로 커서 뭐가 될래’ 하는 그것도 꿈이라 그 말이요. 희망적인 꿈. 어젯밤에 꾼 꿈은 개꿈.
그러면 우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성경의 깨달음을 통해서 하늘나라에 대한 희망성을 가지고 있는 그건 희망적인 꿈이요, 요셉이 꾼 꿈 그 속에 들어있는 계시적인 꿈이라 그 말이요. 그러니 개꿈이요, 참 꿈이요? 참 꿈.
이 세상사람들은 다 꿈을 꿔요. 희망적인 꿈이던 간밤의 꿈이든 다 꿈을 꿔요. 그런데 죽음의 세계에 넘어가서 보니까 자기 것이 없다 그 말이요. 이 세상에서는 희망적으로 자기가 뭘 잔뜩 해먹었을는지 모르지만 높은 직을 다 해먹었을는지 모르지만 죽음 저 넘어가서도 자기가 왕 자리에 있는 줄 알았지만 죽음 저 넘어가서 보니까 자기는 왕이 아니다 그 말이요.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안 믿는 사람들처럼 그런 꿈을 가지고 있지는 않으나 우리는 현실생활 속에서 죽음 저 너머 세계 신령천국 천국에 관한 그 꿈을 갖고 있기 때문에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 눈을 턱 떠보니 내 것이 거기 다 있다 그 말이요. 그것이 무슨 꿈? 그건 참 꿈. 죽음 저 너머 가서 보니까 없어. 그거는 무슨 꿈? 개꿈
요셉은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꾸고,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주신 그 꿈을 잡고. 그러니까 요셉이 꾼 꿈이나 내가 꾼 꿈이나 내 대신 요셉이 꾼 꿈이나 같다 그 말이요. 말하자면. 그러니까 내가 요셉과 같은 꿈을 밤에 그렇게 다시 안 꿔도 나에게는 항상 누구의 꿈이 있지요? 요셉과 같은 그런 꿈이 하나님께서 주신 꿈이 있다 그 말이요.
이 요셉은 요셉이라고 하는 사람은 꿈을 잡고 어떻게 싸워나갔느냐? 지금 싸움이란 말이요. 이 요셉은 형네들 중에서 가장 신앙적으로 살려고 했지요. 그렇지요? 신앙적으로 살려고 한다고 하는 여기에는 대신관계가 바로 되어야 하고,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대신관계. 알겠어요?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대신관계. 자기와 인간과의 관계가 대인관계. 그러니까 대인관계나 대신관계나 그 양면성을 가져야 옳은 신앙이다 그 말이요. 뭣 뭣을 가져야 옳은 신앙이다? 대신관계 대인관계.
이 대신관계는 주종이야. 이렇게 직선이란 말이요. 하나님과 나의 관계는 직선. 그 다음에 대인관계는 나와 다른 사람과 횡적 관계. 대신관계는 종적 관계요 이거는 횡적 관계요. 이 대신관계 대인관계 이 양면성을 잘 가져야 옳은 신앙이다.
그런데 가만 보면 대인관계는 잘하는데 인인관계, 사람과 사람관계는 잘하는데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놓고 사는 사람이 많다. 그건 잘못됐다 그 말이요. 무시하면 안 되겠지요?
그래서 요셉이라고 하는 사람은 종과 횡으로. 종은 누구? 하나님과 나와. 횡은 나와 다른 사람. 인간. 이 종과 횡으로, 진리와 사랑으로. 이 사랑은 아가페입니다. 진리와 사랑으로 별 손색이 없는 인물입니다. 누가? 요셉이.
그런데 우리가 또 성경을 보면 요셉에게는 별로 오점이 보이지를 않아요. 잘못한 것이 잘 보이지를 않아요. 성경에 기록된 대로 보니까 요셉은 잘못한 게 별로 없다. 안 보인다. 그리고 형들에게 나중에 말하기를, 애굽에서 요셉이 총리대신이 되었을 때에 형들에게 여러 번 말했습니다. 보복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말로만 아니라 깨달음이 그대로 하나님께서 형벌을 통해서 나를 애굽으로 보냈다는 말을 한 번만 한 게 아니라 여러 번 말을 했다 그 말이요.
우리가 성경에서 보면 아담과 하와가 거기 에덴동산에서 싸움이 있는 건데 선악과를 먹느냐, 안 먹느냐? 그 싸움을 잘 싸웠더라면 좋겠는데 그 싸움에서 졌기 때문에 선악과를 먹어버렸지요? 그런데 이 실수를 가인과 아벨 두 아들이 들었다 그 말이요. 그런데 이 부모의 실수를 원통히 여기고 ‘에덴동산의 회복을 마음을 갖느냐, 안 갖느냐’ 하는 그 싸움을 가인이 또 잘 싸웠더라면 좋겠는데 가인은 거짓말로 듣고 싸우지를 않았다 그 말이요. 세상적으로 취해버렸어. 그런데 아벨은 이겼지요.
우리는 다가오는 현실에서 싸우는 싸움.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이 무형적인 싸움, 그리고 외래적인 싸움. 이 무형적인 싸움은 먼저 자기 속에서 ‘이것이 옳은 거냐, 저것이 옳은 거냐?’ 그 판단을 빨리 해가지고 자기 속에서 싸우는 싸움이란 말이요. 그런데 진리지식의 마음이 싸워서 이긴다면 자기 몸 밖의 싸움을 이길 수가 있다. 다른 사람 속에 들어있는 악한 정신 악한 마음 그런 것을 다 이길 수가 있다.
자기 속에 우리 믿는 사람은 새사람 자기가 있고 옛사람 자기가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에게는 어떤 자기? 새사람 자기와 옛사람 자기. 하나님의 뜻을 찾는 자기, 그리고 세상 쪽으로 나가고자 하는 그런 마음. 그런 자기가 또 있다 그 말이요.
오늘 수요일이지? 오늘 주일이지? 그러니까 ‘하나님 말씀을 내가 깨달아야 되겠다. 듣고 빨리 깨달아야 되겠다’ 하는 이거는 새사람이요 옛사람이요? 새사람. 하나님의 뜻을 찾는 거는 새사람. 가기 싫어서 가재새끼 모양으로 자꾸 궁둥이가 이불속으로 들어가는 그 사람은 새사람이요 옛사람이요? 그건 옛사람. 그래, 그런 싸움. 자기 속에서 그런 싸움이 일어난다 그 말이요.
그런데 이 요셉은 그런 싸움을 잘 이겼어요. 아마 요셉이 잡혀갈 때에 열다섯 살이나 열여섯 살 됐을 거요. 하나님을 믿는 신앙심이 그렇게 강하더라 그 말이요. 그 마음을 하나님께서 다 아시지요?
요셉아, 요셉이라고 이름 지었느냐? 학교 앞에서 뿅뽕 하라고 지었나? 엄마 아빠가 요셉이라고 지은 것은 요셉의 신앙을 생각하면서 지었을 거라. 요한이도 마찬가지. 왜 요한이라고 지었지?
하나님 보시기에 이 요셉이 가장 신앙적인 사람이었다 그렇게 보여진다 그 말이요. 그러면 이 요셉이 살다가 보니까 걸어가다가 보니까 국무총리가 되었는가, 아니면 국무총리가 되려면 그런 사건이 필요했는가? 그 잘 알아야 됩니다.
만일 이 요셉이 애굽에 팔려가서도 그렇고, 팔려가는 장면도 그렇고 요셉이 자기 속에서 싸움이 일 때에, 말하자면 형들이 자기를 붙잡아서 우물 속에 빠쳐 죽이려고 했단 말이요.
그런데 물론 요셉이 형들에게 붙어봐야 별 볼일 없겠지만, 실컷 얻어맞고 결국은 죽겠지. 그런데 요셉의 마음속에는 그 때 미웠을까요, 신앙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생각을 했을까요? 참 그거 생각을 해봐요. 누군가가 자기를 해롭게 한다거나 누군가 자기를 애를 먹인다면 금방 싸우지요? 감정이 폭발되고 일어나고.
그러나 요셉의 경우를 봤을 때에 ‘하나님의 뜻이 뭔가? 저 사람을 통해서 형제들을 통해서 나에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뭔가’ 그 마음이 아니고 형들에게 보복심이 있어가지고 형들을 죽이려고 달려든다면, 그 마음이 요셉의 마음속에서 이겼더라면, 그러니까 참 진짜 요셉의 마음 이 새사람이 지고 거짓된 혈기가 많은 이 가짜 요셉이 자기 마음속에서 이겼더라면 요셉이 애굽에 내려가서 국무총리가 되었을까 그 말이요. 요셉이 그냥 살다가보니 국무총리가 되었느냐, 하나님께서 국무총리가 되게 하려면 어떤 사건이 필요했느냐?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사건을 이기지를 못했더라면 요셉이 국무총리가 되었을까요? 안 되지요.
우리가 신학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가 있는데 보편적으로 신앙으로 잘 걸어갔기 때문에 국무총리가 되었나, 그저 무난하게 걸어갔기 때문에 국무총리가 되었나? 쉬운 예를 말한다면 부모를 불구로 만들어놓고 효자노릇을 잘하면 효자상을 타겠지요? 못 탈까요? 그런 거 많이 있는데? 평소 때는 부모에게 실컷 애를 먹이면서 나중에 뭐 제사나 잘 섬기고 그러면 그게 될 일이요?
‘보편적으로 신앙으로 걸어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었다’ 그런 생각들을 잘한다 그 말이요. 요셉을 국무총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과정을 통해야 만이 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까? 과정을 안 통해도 국무총리가 되는 겁니까, 과정을 통해야 국무총리가 되는 겁니까? 운동마당에서 달음박질 1등을 하려면 천천히 걸어가도 1등이 됩니까, 힘쓰고 애쓰고 죽을힘을 대해야 1등이 됩니까? 그러니까 그 과정이 필요하다 그 말이요. 과정이 없으면 안 되는 거요.
‘하나님의 예정이 국무총리로 시켜주게 되어 있다. 국무총리로 시켜주게 되어 있다’ 그게 먼저일까요, 사건이 먼저일까요? 사건을 안 거쳐도 국무총리를 줄까요? 하나님께서 요셉을 사건을 통과를 시키는데 국체적인 뜻은 순서를 통과. 순서를 한 순서 한 순서를 합법적으로 통과를 해야 한다. 그 순서를 통과하는데 낮잠 자면 되느냐? 안 된단 말이요. 그 통과해야 한다. 군대 가면 훈련하면서 그 순서통과가 있지요? 그 순서를 다 통과해야 된단 말이요. 옳은 군인이 되려면.
그리고 그 순서를 통과하는데 하나 하나 통과하는데 그 어떤 한 사건에서 사건마다의 죽도록 충성을 해야 한다. 이게 세밀적인 뜻이요. 죽도록 충성은 뭔가 하니 ‘일을 많이 하라’ 그런 의미가 아니고 하나님의 진리를 붙들어야 한다. 어떤 어려운 사건이 와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라. 한 사건 지났다고 하나님 말씀 내버리고, 또 온다고 해서 또 붙들고 그게 아니고 계속 붙들고 늘어져라 그 말이요.
하나님의 뜻은 결과적인데 그 목적. 구체적인 뜻은 방편 순서통과. 높은 자리로 올리려면 그 순서를 통과해야 돼. 그 다음에 세밀적인 뜻은 뭐라고요? 아까도 말씀드렸는데? 예? 세밀적인 뜻? 그 순서 하나 하나의 그 사건마다의 죽도록 충성하라. 그러니까 요셉이 힘써 싸우지 않았다면 그 진리 하나님 말씀 붙들고 안 넘어지려고, 꾀임에 안 빠지려고, 함정에 안 빠지려고 그 진리말씀 붙들고 싸웠다 그 말이요.
그런데 첫째 시련이 있었어요. 요셉에게. 뭔가 하니 하나님이 요셉의 어머니 라헬을 데리고 가버렸어요. 그러니까 이 요셉이 고아 아닌 고아가 돼버렸어요. 하나님께서 이 요셉에게 왜 이런 불행적인 사건을 주었느냐? 불평이 나올 수 있거든요. ‘왜 어머니를 하나님이 데리고 갔습니까’ 그런 불평이 있지요.
자기에게 원치 않는 현실의 사건, 자기가 원치 않는 사건, 내 마음에 안 드는 사건. 이 현실이 불행적인 것은 마귀가 갖다 주고 안 좋은 것은 마귀가 갖다 주고, 좋은 것은 누가 준다고? 좋은 것은 하나님이 주고 축복은 하나님이 주고, 저주는 누가 준다고? 저주는 누가 줘요? 보통 그냥 딴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누가 준다고 그래요? 마귀가 준다고 그러지요. 그게 아닙니다. 좋은 현실이던 불행적인 현실이던 하나님의 주권섭리에 있어요.
오늘날 기독교를 가만 보면 무당종교에서 뿌리 깊은 그대로의 신앙사상을 말하자면 무당신앙을 갖고 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을 보면 뿌리는 무당신앙이고 나무 같으면 잎사귀는 기독교고 기독교식으로 갖고 있고, 활동하고 흔들거리는 것은 기독교식으로 갖고 있고, 그러나 그 활동하고 움직이는 그 정신바탕 그 신앙바탕은 무당신앙을 갖고 있고. 그런 것을 많이 볼 수가 있어요.
요셉의 어려운 환경은 하나님의 주권섭리에 의해서 된 겁니다. 지금 우리의 환경도 하나님의 주권섭리에 의해서 된 겁니다. 요셉의 어머니 라헬이 베냐민을 낳고 어머니는 죽었지요. 그렇지요? 그렇다면 그 동생을 누가 길렀을까? 어린 동생을 젖 먹는 이 어린 동생을 누가 길렀을까? 형 요셉이 길렀다. 자기 친 동생이니까. 위의 형들은 많이 있지만 전부 배다른 형이란 말이요. 그 배다른 형들이 길러줄 것 같아요?
디나가 또 강간을 당할 때 15, 6세 되었지요? 이 베냐민 출생할 때에 형 요셉이 15, 6세. 형들이 기르지도 않았을 것 같고 레아 빌하가 기르지도 않았을 것 같아요. 요셉이 길렀을 것 같아요.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고 애쓰는 요셉에게 왜 이런 환경을 주었을까?
오늘날 사우나탕에 가면 하루저녁 수백 만 원 씩 이렇게 왔다 갔다 하는데 시골교회 교역자가 하나님 앞에 바로 살려고 하는데 왜 그렇게 어려운 고통이 오는가?
잘 살아야 하나님께 영광입니까? 남이 볼 때에 어렵게 살고 저주처럼 보이게 살면 하나님께 영광이 안 됩니까? 잘 살아야 영광입니까? 어렵게 고통스럽게 살면 영광이 안 되지요? 그래요, 안 그래요? 못 산다고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어집니까? 요셉이 못 산다고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어졌습니까? 기생오라비처럼 하고 있으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까?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가난하던 부자든 믿음으로 살 때는 상관이 없습니다. 불도저처럼 밀고 나가는 것뿐이라 그 말이요. 신앙 믿음으로.
보통 보면 불행을 물리쳐 달라고 하는 그런 사람이 있고, 그것도 힘써서 애써서 극복을 하는 사람이 있고, 이빨을 막 긁으면서 극복하는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이 있는가 하니 ‘부족한 나에게 왜 이런 사건을 줍니까?’ 자기를 발견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는 사람이 있다 그 말이요. 첫째 사람은 어떤 사람? 불행을 물리쳐 달라는 사람. 두 번째 사람은? 극기 극복. 악을 쓰면서 나가는 사람. ‘참아야지’ 막 이러면서 가는 것. 세 번째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찾는 사람.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이렇게 있지만 자기 속에 어떤 성분이 들어있는데 어떤 사건이 오기 전에는 잘 모릅니다. 그렇지요? 그러면 사건을 왜 주느냐? 네 속에 들어있는 것을 알려주려고 하는 이게 하나 있단 말이요. 이해가시죠? 그 다음에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수준으로 올리기 위해서 사건을 준다 그 말이요.
범사에 감사는 부정적인 감사가 아니고 생산적인 감사입니다. 요셉에게 만일 원망적인 마음이 올라온다면 그 마음을 때려잡아야지요. 그렇지요? 그 다음에 요셉의 마음속에 자기에게 좋은 사건 환경이 오도록 바꾸어 달라고 되어있다면 이것은 소극적이고, 그러나 어떤 어려운 사건이 오더라도 ‘감사합니다’ 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은 이거는 적극적인 마음이고. 그래서 감사는 무슨 마음인가 하니 공격적이다. 그러니까 제 눈에 제 성질에 맞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줄 알고 감사하는 그 자가 행복이다 그 말이요.
17세 소년으로 애굽으로 팔려가지요? 그렇지요? 두 번째 시련이. 어린 동생이 걸음마하는데 그것도 동생은 모르고 형이 애굽으로 팔려갑니다. 요셉이 걸음마하는 어린 동생을 두고 팔려갈 때에 그 마음이 어떻게 되었을까? 그 마음을 가만 생각해 봐요. 하나님을 원망했을까?
그리고 하나님은 아무 계획도 없이 요셉에게 그냥 그렇게 일을 저질러 놓은 건가? 요셉을 시험키 위해서 그랬나? 왜 그렇게 했을까? 요셉은 거기서 인간을 배우더라 그 말이요. 요셉은 거기서 인간을 배우더라. 부모에게 효도하는 거, 형제에게 이렇게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거. 인간사랑을 배운다 그 말이요.
국무총리가 되려면 인간을 대함과 통솔을 배워야지요. 이해갑니까? 그걸 알아야 돼요. 일반적으로 국회 나오는 사람들 통솔을 하려면 인간의 마음을 알아야 되고 인간대함을 바로 해야 된다. 그 통솔한단 말이요. 그럼 높은 사람이 되지요.
그래서 7년 대 흉년 가운데서 정치를 무난히 하지요. 요셉이. 그렇지요? 국무총리의 실력을 배웠고. 또 어디서 배웠느냐? 아버지는 세겜에 가라고 그랬는데 없단 말이요. 그래서 도단까지 가서 형들을 찾아갑니다. 거기서 인간대함, 형들을 대함, 거기서 국무총리의 실력이 입혀진단 말이요.
그리고 또 인간을 배우는데 어디서 배우느냐? 종살이 하면서 인간을 배우고, 감옥 속에서 또 인간을 배운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척척 주시는 모든 과목에서 요셉은 수업을 잘한다 그 말이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과정에서 공부를 잘한다 그 말이요. 그 보면 또 총무노릇을 하게 되고. 그 감옥에서 장관을 만나보지요? 통과하고, 진리 잡고 승리의 승리를 한다 그 말이요.
이렇게 되니 성경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후에 뭘 준다? 면류관을 주더라. 그렇지요? 우리에게도 시험이 다 있습니다. 또 어떤 상황을 주던 그 때마다 사람이던 물질이던 어떤 환경이던지 간에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잘 대해가야 된다 그 말이요. 통솔자가 된다.
기도 올립시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세상사람들은 자기 이익만을 위해서 남은 죽든지 살든지 이기주의로 사는 것을 볼 수가
아버지 하나님, 저희들은 오늘 저녁에 애굽으로 종으로 팔려간 이 요셉에게서 인간을 배웁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 것 같습니다. 요셉이 당한 사건 우리들에게도 사건은 종별은 다르지만 여러 가지 사건을 만납니다. 그럴 적마다 인간대함을 잘 대하고 어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옳은 진리 붙잡고 그 시험에서 합격으로 통과, 또 합격으로 통과한 이 요셉처럼 걸어갈 수 있는 복된 저희들이 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미련하고 둔탁합니다. 늘 명철한 지혜와 총명주시고 우리 마음 가운데서 싸움이 일어날 때에 신앙 믿음 진리 붙잡고 나가는 이 마음이 이길 수 있도록 저희들을 강력하게 붙잡아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