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는 다시 살아나셨다
누가복음 24:13-35
오늘은 부활 주일 입니다. 죽음의 세력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의 능력이 여러분 모두에게 있으시기 바랍니다.
서로 인사 나누십시다. 부활 예수님의 능력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조금 전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능력이 함께 있기를 바란다고 인사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아침 의심의 마음이 있습니다. 여러분 정말 예수님이 부활하심을 믿고 계신가요? 또 부활을 믿기는 하지만 부활 예수님의 능력이 여러분 삶에 나타나고 있는가요?
언젠가 교회에서 성경 공부를 하던 중 여 집사님 한 분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부활을 못 믿겠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만이지 어떻게 다시 살아난단 말입니까?” 그러면서 이런 말을 덧붙였습니다. “차라리 십자가는 이해가 됩니다. 오늘도 진실하고 착하게 살지만 억울한 일 당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니 예수님처럼 그렇게 철두철미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산다면 당연히 이 악한 세상에서 어려움 당할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십자가는 이해됩니다. 그러나 부활은 못 믿겠습니다.”
저는 이 집사님의 말씀이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이 분 말처럼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는 쉽지 않습니다. 왜 그런가?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첫째 부활은 우리의 상식과 경험을 넘어서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람이 태어나는 것은 보았습니다. 죽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은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1 학년 때 병아리를 키워본 적이 있습니다. 학교 앞 노점상에서 병아리를 세 마리 사서, 라면 박스에 넣어서 길렀습니다. 노란 병아리가 짹짹거리면서 부리를 내밀어 먹는 모습이 귀여워 학교도 가지 못하고 쳐다보고 또 방과 후에도 거기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 털이 부석부석해지고 눈꼽이 끼기 시작했습니다. 잘 움직이지 않고 모이도 먹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밤새 삐약삐약 거리면서 시끄럽게 울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라면 박스 한 구석에 노란 솜뭉치처럼 웅크리고 딱딱하게 굳어서 죽어 있었습니다. 그것으로 끝이었지요. 다시는 움직이지 않고, 삐약거리지 않고, 모이도 먹지 않았습니다. 그 때 처음으로 죽음에 대해 생각한 것 같습니다. 아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구나. 결코 다시 살아날 수 없구나. 깊은 안타까움과 슬픔이 그 때 있었습니다. 그 후로도 많은 죽음을 보았습니다. 친구가 죽기도 했고 가까운 친척이 세상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존경하는 목사님이 돌아가시기도 했고 그러다가 저희 아버지도 돌아가셨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다행히 아직 건강하게 88 세로 수를 누리고 계십니다. 하지만 밤늦게 전화가 오면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전화 받기가 겁이 납니다. 언젠가는 저희 어머니도 돌아가시겠지요. 그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죽는 것은 보았지만 다시 살아나는 것은 못 보았습니다. 우리의 상식과 경험은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셨음을 믿기 어렵습니다.
둘째. 이 세상의 악과 고통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 어렵게 만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죽음에서 다시 부활하셨을 뿐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죄와 악과 불의를 이겨내고 부활하셨음을 고백합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죄와 죽음이 최후의 말이 아니라 생명과 사랑이 최후의 말임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가 부활하셨다고 하지만 우리는 현실에서 여전히 수많은 악을 경험합니다. 실제로 세상을 보면 별로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요즘 국회의원 선거가 다가오면서 사람들이 공천을 받기 위해 난리입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정말 가관입니다. 말로는 국민, 국민 하지만 철저히 당리당략 따라, 자기 욕심 따라 움직입니다. 염치도 없고 창피한 것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부끄러움은 잠깐이고 금배지는 영원하다고 외치는 듯 행동합니다. 정치 뿐 아니라 다른 영역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사회는 이미 오래전에 신분 사회가 되었고 빈부 격차는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양반과 천민 같은 신분제도는 해체되었지만 이제는 그 이상으로 한 사람의 경제력에 따라 사회적 신분이 고착화되고 있습니다. 가난한 집에 태어나도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어야 사람들이 꿈을 꿀텐데 이게 결코 쉽지 않게 되었습니다. 금수저는 영원히 금수저로 살고 흙수저는 영원히 흙수저를 벗어나기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전 세계가 이렇게 되어 가고 있다는 점이 더 우울하게 만든다. 1980년대 중반 이후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는 신자유주의 경제 시스템이 세계를 지배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빈부 격차가 구조적으로 심화되고 있습니다. 실상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테러나 납치, 분쟁도 어떤 면에서는 가진 자와 못가진 자를 철저하게 나누는 이런 경제 시스템에 대한 분노의 표현일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부활을 믿을 수 있는가? 저는 저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너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있는가?’ 저는 물론 예수님의 부활을 마음 깊이 믿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저는 결코 지금 사는 것처럼 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세상의 악과 부조리를 보면서 힘이 빠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또한 제 자신 속에 부활의 능력이 충분히 나타나지 않음을 보고 또 이 땅의 교회들에서 이런 능력이 부족함을 보면서 죄송한 마음을 금할 길 없다. 그래서 믿지만 또한 믿지 못합니다. 그것이 현재 저의 믿음의 상태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이런 상황에서 오늘 그래도 위로가 되는 부분을 찾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첫 제자들 역시 처음에는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못 믿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십자가 죽음에 너무 충격을 받은 나머지 깊은 절망 속에 뿔뿔이 흩어져버립니다. 그런데 그들이 돌연 변화됩니다. 가장 겁 많고 비겁했던 사람들이 지극히 용감한 사람이 되어 담대하게 한 목소리로 외칩니다. ‘우리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직접 목격했고 이제는 이를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 부활을 도저히 부인할 수 없어서 차라리 박해와 죽음의 길을 택합니다.
그래서 위로를 받습니다. 희망을 봅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변화되는 삶을 살았다면 나 역시 변화되리라. 연약해있는 오늘의 한국 교회도 새롭게 될 수 있으리라. 희망이 별로 없어 보이는 이 세상도 변화될 수 있으리라.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길을 오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목도하고 깊은 절망에 빠져서 엠마오로 향하던 제자들의 변화에서 함께 찾고자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내려가던 길은 절망이었지만 예루살렘으로 다시 올라가는 길은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희망의 길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그 길 제대로 따라 간다면 역시 그렇게 바뀔 것입니다.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이런 변화를 가져왔을까요?
첫째. 그들은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동행과 들음이 그들의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오늘 말씀에 예수님의 제자 두 명이 슬픔과 비탄에 젖어 엠마오 길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들 곁에 한 사내가 같이 걷습니다. 그 낯선 남자가 말을 걸어옵니다. ‘당신들은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무척 슬퍼 보이는군요? 왜 그렇게 슬픈 표정을 하고 있습니까?’
그 두 사람 중 연장자인 글로바가 고개를 들고 대답합니다. “우리는 나사렛 사람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소이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예언자였소. 우리는 이 분처럼 놀라운 사람을 본 적이 없소. 이 분처럼 산 사람도 없고 이 분처럼 가르친 사람도 없소. 우리는 이 사람이 바로 우리 민족을 로마의 지배로부터 구해줄 분으로 믿었지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위대한 승리가 아니라 참혹한 배신이었습니다. 누가 누구를 배신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분은 무력하기 짝이 없이 거짓 재판정에 잠시 섰다가 십자가 꼭대기에 달리고 말았습니다. 그가 벌거벗은 몸으로 나무 꼭대기에 매달려 붉은 피를 쏟고 있을 때 우리는 무슨 환상을 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 것은 엄연한 현실이었어요. 더구나 말이지요. 더 실망스러운 것은 이제 그 분의 시체마저 찾을 길이 없다는 점입니다. 오늘 오전에 여자들 몇 명이 사색이 되어 와서 하는 말이 무덤에 가보니 그 분의 시체가 없어져 버렸다고 하더군요. 과연 가보니 정말 그 분의 시체가 없더군요. 우리를 맞아 준 것은 빈 무덤의 허전하고 어두웠던 공간뿐이었습니다. 그 분의 시체마저 없어져 버린 예루살렘! 하늘이 버렸고 땅조차 외면한 이 공허한 도시! 우리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루살렘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아마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지요. 하지만 우리의 이 아픈 마음은 어디에 가서 치료를 받는단 말입니까?
그러자 그 사람이 조용히 입을 열어 말합니다. ‘당신들의 심정은 알겠소. 하지만 내가 보기에 당신들은 하지 않아도 될 낙심을 하고 있는 것 같구료. 생각해 보시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어떻게 거기서 새싹이 나올 수 있겠소. 마찬가지로 메시야가 고난을 받지 않고 어떻게 우리의 메시야가 되겠소? 죽지 않고는 살 수가 없는 법이요. 그래서 당신들의 선생님은 그렇게 죽었고 그렇게 살아나신거요. 그러면서 그는 구약의 처음부터 메시야를 통한 하나님의 계획을 조용조용 설명해 갑니다.
제자들이 그 말씀을 듣고 있는 가운데 그들의 마음은 점점 뜨거워졌습니다. 절망과 비탄에 빠진 마음에 무엇인가 불꽃이 일어나고 새로운 희망이 솟구치기 시작합니다. 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사방에 어둠만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모든 것 포기하려고 했는데 새로 시작해야 하겠다는 마음이 듭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우리가 길에서 그 분의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우리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어디에서 부활에 대한 믿음을 얻고 어떻게 부활의 능력을 다시 찾을 것인가? 그 길은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그 분 말씀을 들음에 있습니다. 천지를 창조한 능력 있는 말씀, 홍해를 가르고 이스라엘 백성을 건너가게 하신 말씀,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려내신 생명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십시오. 이 말씀을 소중히 하십시오. 이 말씀 따라 살려고 하십시오. 그 때 우리는 예수님을 부활시키신 능력의 하나님을 다시 새롭게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부활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지내는지 스스로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을 인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하여 부활 하신 예수가 생생하게 체험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이 사람들은 예수님과 함께 떡을 나누었다. 그리고 떡을 나누게 되면서 비로소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을 찾아온 그 낯선 사람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어느새 엠마오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그 낯선 사람은 길을 더 가려는 듯 인사를 하고 고개를 숙이고 돌아섰습니다. 그 때 글로바가 그의 뒤에서 외칩니다. ‘이것 보시오. 이미 해도 저물었고 곧 길은 깜깜해 질거요. 그러니 같이 들어가 저녁을 먹고 낮에 우리에게 해 준 말씀을 조금 더 해 주시오.” 그 날 저녁 그들은 작지만 오붓한 저녁상을 마련해서 함께 식탁에 앉았습니다. 그 때 그가 표정을 조금 엄숙하게 바꾸고 말합니다. “제가 이 음식에 대한 감사 기도를 올려도 될까요?” 그는 축복 기도를 드리고 그 앞에 놓여 있는 빵을 떼어서 사랑과 자애가 가득찬 눈동자로 두 사람에게 나누어 줍니다. 바로 그 순간 식탁 위에 타오르고 있던 등잔 불 빛에 그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며 방안이 갑자기 알 수 없는 기쁨으로 충만해 졌습니다. 그 순간 두 사람은 자기들의 눈을 의심했습니다. 그들 앞에 서서 환하게 빛나는 얼굴! 그 얼굴은 틀림없이 십자가에 달렸던 바로 그 분의 얼굴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들고 있던 빵을 식탁 위에 던지면서 무릎을 꿇으면서 외칩니다.
선생님!
예수는 그 두 사람을 내려다보며 빙그레 웃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눈을 들어 다시 보았을 때 그의 모습은 다시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만 어디엔가에서 들리는 음성만이 있었습니다. “형제들이여. 예루살렘으로 다시 올라가십시오. 형제들이 실망했던 바로 그 곳에서 다시 시작합시다. 이제 새로운 시작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희망과 환희에 차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올라가면서 아마 고레고레 소리쳤을 것입니다. ‘이놈들아 아무리 죽여봐라. 우리 주님은 안 죽으신다. 그리고 이제 우리도 안 죽는다.’
저는 이 말씀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과 동행했고 그 말씀을 들었지만 정작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것은 식사 자리에 함께 앉아 떡을 떼고 기도할 때 였음에 주목합니다. 이 떡을 나누는 것은 사랑을 나누는 식탁의 교제입니다. 그러나 그것 이상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잡히시기 전날 제자들에게 떡과 잔을 떼어주시면서 ‘이 떡은 너희를 위하여 떼는 내 몸,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 라는 성찬의 상황을 연상시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찬은 예수님이 자기 몸을 찢고 피 흘려 우리를 살려 주셨듯이 우리 역시 우리 몸을 드리고 몸으로 사랑하고 섬기라는 부르심입니다. 삶으로 복음 말씀을 살라는 지엄하신 명령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예수 부활을 체험 못하는 중요한 이유가 여기 있다. 예수가 주님이고 하나님 아들임을 알 수 있는 길은 그 분 걸어가신 길을 따라가 볼 때 알게 됩니다. 따라간 만큼 안다. 따라가면서 나누고 섬기고 희생한 만큼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제대로 안다.
어제 부활절을 맞아 교회 청소가 있었습니다. 약 30 명의 교인들이 함께 청소를 했고 저도 오랜만에 참여 하여 조금 거들었습니다. 그런데 밀대 걸레로 식당 바닥을 닦고 그 걸레를 화장실 가서 빨면서 그런 생각 했습니다. 우리는 걸레를 깨끗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것 아니라고 봅니다. 만일 사람에게 걸레 같은 사람 이렇게 말하면 그것은 큰 모독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걸레가 있기 때문에 세상이 깨끗해집니다. 걸레가 더러워질수록 세상은 맑아집니다. 그리고 이것이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입니다. 예수님 이 땅에 계실 때 그는 친히 무릎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온 이스라엘 땅 돌아다니시면서 모든 고통과 아픔을 자기 한 몸으로 감당하셨습니다. 마침내 십자가에서 온 세상 죄를 한 몸에 받아 가장 추하고 더러워진 죄인으로 돌아가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따라간다는 것은 친히 낮아지는 것. 세상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스스로를 더럽히는 길이다. 그 길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사람들은 걸레를 들기보다 이미 깨끗하게 정돈 되어 있는 곳에서 예쁜 옷 입고 파티 누리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진정 경험하려면 기꺼이 그런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 믿기에 어려움도 당하고, 예수 믿기에 손해도 보고, 예수 믿기에 고난도 당할 때 바로 거기에서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깊이깊이 체험하게 됩니다. 아니 그 고난 때문에 부활 예수님은 더 가깝게 다가옵니다.
영국의 정치가 였던 윌리엄 윌버포스라는 분이 있습니다. 영국 역사에서 별과 같이 빛나는 정치가로 지금도 영국 어린이들이 2차 대전의 영웅 윈스턴 처칠 보다 더 존경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1780년 21 살의 어린 나이로 영국 의회 역사상 최연소 하원 의원이 되었습니다. 그 후 41 년 간 국회의원으로 일하면서 영국 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그의 공헌은 당시 공공연히 행해지던 노예제도를 폐지시킨 것. 영국은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노예로 잡아와서 팔았습니다. 당시 영국의 귀족들과 부자들 대부분이 노예무역을 통해 돈을 벌고 있었습니다. 그 것이 영국의 국가 수입의 1/3이나 되었습니다. 실상 노예 제도는 5천년 이상 내려온 뿌리 깊은 관습이었고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이러니 영국 사회는 말할 것도 없고 교회까지도 노예 제도를 인정하는 분위기였습니다.
하지만 윌버포스는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었고 그 믿음에 헌신하였습니다. 부활 하신 예수의 빛에 헌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인기 없는 노예 폐지 운동을 하지 않았다면 영국 수상이 될 수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관심은 세상적인 출세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의 관심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어떻게 하면 잘 따를 수 있을까 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는 부활 예수에 대한 깊은 신뢰가 있었기에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줄 알지만 국회에서 150회 이상 사람들의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기독교 국가를 자처하는 영국이 돈에 눈이 멀어 노예 제도를 자행하고 있습니다. 영국이 진정으로 위대한 나라가 되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 합니다. 노예무역은 분명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일입니다.” 그런 가운데 그는 많은 어려움을 당했다. 사람들의 비난을 받고 가장 친한 친구들 조차도 그에게 등을 돌렸다. 정치적인 박해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 부활절 아침 윌버포스는 자기의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예수 부활 찬양. 예수를 다시 살게 하신 이 위대하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게 되니 다른 모든 것은 내 눈에 아주 작아 보인다. 나를 부르신 당신의 뜻을 이 땅에 이루기까지 부활 예수여 저에게 능력을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능력을 주시기를...”
나이가 많이 들어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노예 폐지 운동을 하면서 나는 많은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 어려움을 당할수록 부활하신 예수님은 더 생생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그 어려움 때문에 이제 나는 예수님의 부활을 그 어느 때보다 깊이 이해하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나는 부활이 어떤 것인지 확실히 압니다.”
마침내 1807년 노예 폐지 법안이 영국의 상원과 하원을 통과했습니다. 이 승리를 두고 아일랜드의 역사가인 윌리엄 랙키는 세계사에서 가장 고결한 사건의 하나라고 평가했습니다. 완전한 노예 해방은 1833년 윌버포스가 죽기 사흘 전날 이루어졌습니다. 윌버포스는 이 소식을 임종의 자리에서 들었고 그를 그렇게 하도록 만드신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믿음은 그가 노예제 폐지라는 거의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는 가운데 더 깊어졌습니다. 현장에서 직접 몸으로 섬김으로서 그는 모든 어둠 속에서도 하나님은 영원한 빛이시며 하나님은 영원한 부활의 능력으로 찾아오심을 체험했습니다. 이 체험이 그를 계속 이 운동으로 나아가게 했습니다.
우리는 윌버포스 만큼 대단한 일을 하기 힘들 수 있다. 그러나 작은 일은 할 수 있다. 어제 걸레를 빨면서, 부활 예수님이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내가 세상을 씻는 큰 걸레가 되었으니 네가 나의 제자라면 너 역시 걸레가 되기를 바란다. 세상의 악함과 추함에 가슴 아픈 만큼 너 몸으로 세상을 닦아내기를 바란다. 그 때 너는 진정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며 부활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세상의 그 누구도 이런 확신을 너에게서 뺏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축복이 부활절을 맞이한 성도님들에게 있으시기를 바란다. 세상의 때를 힘닿는 데 까지 씻어가는 사람들.
그래서 한 가지 제언을 하고자 한다. 어제 예수님의 부활을 기다리면서 교회 청소 했다. 그런데 실상 부활의 소식은 교회 밖으로 전해져야 한다. 그래서 오늘 쓰레기봉투를 10 장을 샀다. 점심 식사 이후 열 분 정도만 봉투 한 장씩 들고 이 지역 쓰레기 수거하러 가자. 이번에는 그냥 소박하게 하고 다음에는 좀 더 체계적으로 교회 이름 적힌 띠도 두르고 나가서 이 지역을 섬기자. 아주 작은 봉사이지만 우리가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살고 있음을 스스로 확인하는 사건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힘들이 모여서 우리를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세상을 새롭게 할 것이다. 이런 축복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이런 일을 계속 하자. 오늘 말씀에 보면 제자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 거기에서 다시 시작한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죽음을 목도한 가슴 아픈 고통의 자리. 예수님을 버려두고 도망친 수치와 실패의 자리.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곧 우리의 불신과, 우리의 실패가 있었던 바로 그 곳에서 다시 시작...
이것은 우리에게 주는 말씀이다. 우리 중에 예수를 오래 믿었던 분들, 그래서 한 때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고 하나님 위해 살려고 했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그것을 잊어버렸던 이들, -잊었던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로 시작하자. 첫 제자들이 예수님을 처음 만났던 바로 그 예루살렘에서, 하나님 나라 운동이 크게 일어났던 바로 그것에서 새로 시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