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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4:6-10절) 더 큰 은혜를 위하여 2-81. 가끔 수련회에 가보면, 교인들이 서로 앞자리에 앉으려고 애 쓰는 것을 봅니다. 평소에는 열심 도 없고, 신앙에 무관심한 것 같은 사람들도 한번 불이 붙으면, 어느 누구보다도 더 은혜를 사모하고, 열심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믿는 사람들 중에서 은혜 받고 싶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깊은 은혜를 한번 체험하고 싶고, 자기 자신도 신앙이 좋은 사람으로 변화되기를 갈망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전에 어떤 분을 만났는데, 그분은 수련회 내내 금식(禁食)을 작정했다고 합니다. 만약 이번에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자기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집회에 참석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은혜받기를 원하지만, 받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세상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즉 세상적인 욕망이 하나님의 깊은 은혜를 체험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우리는 세상과 신앙 사이에서 갈등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세상은 현금(現金)과 같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얻는 것은 당장 여기서 쓸 수 있는 것들이고, 통하는 것들입니다. 거기에 반하여 신앙적인 것들은 약속(約束) 어음과 같아서 한반 부도가 나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합니다.
또 다른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을 기다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그 은혜를 주시고, 필요한 것을 채워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속으로 낙망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특히 하나님을 겸손히 기다릴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며, 그를 이 세상에서 높이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려움을 주실 때, 그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라고 말씀합니다.
Ⅰ.영적인 패배주의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길이, 믿지 않는 사람들의 길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믿음에서 온전히 설 수 없을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 세상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자기들의 욕심이 허용하는 한,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허용되어 있지 않습니다.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면, 성령이 우리를 거슬려 싸움을 시작하십니다.
자기 집안에서 싸우는 집이 잘될 리가 있습니까? 즉 남편은 아내를 깎아내리고, 부인은 남편을 흉보는 집이 잘될 리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믿는 사람이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에 욕심을 내면, 그때부터 되는 일이 없습니다. 남들에게는 다 되는 일도 자기는 안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떤 상태에 빠지게 됩니까? 우리 속에 있는 불신앙이 고개를 쳐들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결정한 것이 후회스럽고, 예수 믿은 것 자체도 후회가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완전히 패배주의에 빠집니다.
패배주의라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예수 믿어서 망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제 와서 예수를 부인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세상으로 나갈 수도 없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이런 패배주의는 아직 세상 욕심이 덜 죽어 있는 상태입니다.
내 속으로는 너무나도 세상에서 잘되고 싶지만, 길이 없어서 지금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신자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믿는 우리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믿기는 하지만, 기쁨이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4:6절)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더욱 큰 은혜를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더욱 큰 은혜’라는 것은 내가 신앙적인 결정을 내리느라고 이 세상에서 잃어버린 것을 훨씬 능가하는 은혜를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내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내가 세상을 사랑할 때, 성령께서 내 안에 주신 갈등 때문에 잃어버린 것들을 훨씬 능가하는 은혜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성경 본문이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나의 약(弱)한 신앙이 더 강건하여지는 것인지, 아니면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다른 방법으로 나를 더 유익하게 사용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는 하나님의 깊은 은혜를 체험하게 하는 것인지, 본문은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으로는 이 모든 것을 다 포함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신앙 때문에 무엇인가 잃어버렸을 때, 그것이 나의 부족한 부분을 분명히 온전케 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도 분명히 그가 할 놀라운 일이 준비되어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은 하나님의 희한한 은혜를 체험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얼마나 특별히 사랑하시는지, 수없이 많은 경우를 통하여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본문은‘더욱 큰 은혜’에 대하여는 말씀하지 않습니다. 단지 세상에서 바란 것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자기 자신에 대하여 화를 내고, 아무것도 없다는 패배의식(敗北意識)에 사로잡히지 말고, 이처럼 낮아진 기회를 더욱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라고 말씀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모든 일들이 나를 겸손하게 만들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수천 년에 걸쳐서 겸손한 자들을 찾으셨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겸손한 자를 찾기만 하면, 그에게 모든 축복을 다 부어주시려고 찾았는데, 어느 곳에서도 겸손한 자를 만날 수 없었습니다. 즉 어른은 어른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부자는 부자대로, 가난한 자는 가난한 자 나름대로, 다 교만하고, 자기 생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사시고, 그들을 더욱더 하나님의 뜻에 맞는 자가 되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 안에 시기(猜忌)하는 성령을 주셔서 더 좌절감을 겪게 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이 세상의 것에 취해 있지 않고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기만 한다면,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줄 수 없는 하나님의 큰 은혜를 체험할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실패하고, 신앙 때문에 되는 일이 없는 형제자매들이 생각 할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이런 일들을 통해서 내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할 수 있다면, 어느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가장 큰 은혜를 얻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10절)주 앞에서 낮추라 그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하나님께서 나를 낮추실 때, 자기 자신에게 화를 내고, 하나님의 무관심에 대하여 속으로 불평하면서 주저앉아 있을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그 사람에게 어느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특별한 은혜를 주시고, 그를 다시 들어서 사용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학벌이나, 재능이나, 열정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들어서 귀하게 사용한 인물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학벌이나, 인간적인 능력이나,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그들을 낮아지게 하셨을 때, 처음에는 견디기 어려웠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을 인정하고,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다 잃어버려도 하나님 한 분만을 안 것으로 만족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특별히 귀하게 대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낮추실 때, 더 큰 은혜를 주시려고,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거기서 좌절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을 원망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겸손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무엇인가 잘못 결정하여 기회를 놓친 것에 대하여 후회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모든 형편과 처지가 어떠하든지, 이것은 분명히 내 모습이고, 내가 하나님 안에 있는 한, 하나님께서 결정하실 것임을 인정하십시오. 그런 자에게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가 찾아옵니다.
오늘 야고보 사도는 우리에게 무조건 겸손하게 있으라고 말씀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지침(指針)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 하나하나는 상관이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깊이 생각해 볼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Ⅱ.마귀를 대적하라 7절)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복종한다는 것은 마귀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우리가 마귀를 어떻게 대적합니까? 마귀는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마귀는 우리의 혈기를 충동질하여 모든 것을 우리 뜻대로 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그래서 마귀가 통치하는 영역(靈域)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통하지 않는 영역이 사탄의 영역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내 생활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다스리지 못했던 부분이 도대체 어떤 부분이었습니까? 내 영역 가운데 하나님께서 다스리지 못한 부분은 어디인가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놀라울 정도로 너무나도 많은 부분을 내 멋대로 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부분이 겨우 예배 시간뿐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또 어떤 분은 예배 시간마저도 자기 생각에 빠져서 하나님의 말씀이 전혀 들어오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또 어떤 분은 자기 가정에서 가정 예배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 할 것입니다. 즉 서로 시간이 다 다르니까 함께 모여서 예배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가정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돈을 사용하는 부분에서, 어떤 분은 공부를 하는 부분에서, 어떤 분은 자녀를 양육하는 부분에서, 어떤 분은 이성과 교제하는 부분에서 전혀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제물을 바칠 때, 짐승의 각을 뜨고, 벌여서 불로 태우는 것처럼, 내가 그 부분을 하나님 앞에 인정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겠다고, 인정하는 것이 마귀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속삭입니까? 그런 부분까지 하나님께 맡기면 내 영역은 없어지게 된다고 속삭입니다. 만약 그런 부분까지 맡기면, 너무나 중요한 것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속삭입니다. 그것을 물리치고, 하나님께서 결정하실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겸손한 것입니다.
즉‘하나님 저는 이것을 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아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인정합니다.’이렇게 되어야지, 반대로‘하나님 꼭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만일 이렇게 되지 않는다면 저는 하나님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라고 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사실 내가 하나님께 맡기지 못한 부분이 늘 올무가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돈에 약(弱)한 사람은 돈 때문에 늘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심합니다. 또 공부에 약(弱)한 사람은 학벌 때문에 늘 하나님의 선한 인도를 믿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성에 약(弱)한 사람은 그 부분 때문에 늘 넘어집니다. 그래서 그 부분을 노골화시키고, 내 뜻대로 되지 않은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부분에 대한 하나님의 선한 계획을 인정할 때, 우리는 놀라운 자유를 얻게 되고, 더욱 깊은 은혜의 자리로 들어가게 됩니다.
또한 마귀를 대적하라고 할 때, 이것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무리 사람이 하는 일이 마귀 같아도 사람은 마귀가 아닙니다. 그의 약(弱)한 기질이나, 혈기 때문에 그처럼 잘못 사용되고 있을 뿐입니다.
마귀는 그 뒤에 숨어 있는 정신이나, 가치관을 조종하고 있습니다. 히틀러가 마귀일까? 김정일이 마귀일까?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분명히 마귀입니다. 그래서 마귀를 대적하라고 할 때, 이것이 사람과 다투거나, 싸우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사람으로 그렇게 하도록 하는 배후의 정신이나 가치관과 싸워야 합니다. 마귀를 대적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배후에 있는 정신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사람을 거부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그 사람에 대해서는 분명히 아니라고 해야 합니다.
우리는 믿는 자들이 얼마든지 잘못된 충동이나 잘못된 사상에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가로막는 베드로에게‘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인정(人情)을 사용해서 예수님을 약(弱)하게 만들려고 하는 사탄의 계책(計策)을 보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정신에 대해서는 분명히 아니라고 해야 하고, 그 이유를 설명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지만, 그런 충동은 수그러들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의미에서 마귀를 대적하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누군가가 분명히 죄에 빠져 있고, 또 그 죄의 영향력이 나를 덮치려고 할 때, 분명히 거부해야 합니다. 나의 태도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상담할 때에도,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형제나 자매가 분명히 죄에 빠져 있다면, 사정없이 그 부분을 대적하고 싸워야 결국 둘 다 살게 됩니다. 우정(友情)을 잃어버려도 좋습니다. 그때는 싸워야 나중에라도 그 형제를 은혜 중에 다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상담을‘대결 상담’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우리가 죄와 싸우는 것은 하나님께 더 복종되기 위해서입니다. 죄를 그냥 그대로 두고,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스스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죄인 줄 모르면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일단 죄가 죄인 줄 알면, 그때부터는 공동책임이 생깁니다. 즉 자식이 죄를 향하여 나가는 것을 보고서도 가만히 두는 부모는 무책임한 것입니다. 나중에 아주 비싼 대가를 지불하게 됩니다.
우리가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하고, 태도를 분명히 할 때, 나중에 은혜 가운데서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서로 다른 사람의 사생활에 간섭하지 말라고 하니, 참으로 불행한 시대입니다. 아마 은혜 가운데, 만나기가 힘들 것입니다.
Ⅲ.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이번에는 겸손에 대하여 또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8절)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이 말씀은‘마귀를 대적하는 것’과 대구(對句)가 되는 말씀입니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하나님은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가까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격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가까이 한다고 할 때, 어떻게 하는 것이 가까이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서로 자주 교제(交際)하는 것입니다. 즉 중요한 일이 있으면, 그 사람과는 다 털어놓고 이야기합니다. 특히 그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할 때,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께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즉‘이 일에 대하여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렇게 행동하고 있는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실까?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한 결과 엄청난 은혜를 경험한 자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 중에 화란에서 수상을 지낸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목사요, 신학자요, 대학 총장이요, 나중에 화란의 수상까지 지낸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저술한 책만 해도 100권이 넘고, 잡지나 논문은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카이퍼가 죽었을 때, 어떤 사람은 19세기는 아브라함 카이퍼를 위하여 준비된 시대였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가 젊었을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이 세상의 지식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는 자유주의자였습니다. 그가 아주 젊은 나이에 목사가 되어 어느 집을 심방했을 때, 한 부인이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올 것을 간곡하게 부탁했습니다.
그때부터 아브라함 카이퍼는 하나님의 말씀의 맛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때 쓴 수상록(隨想錄)이름이‘하나님을 가까이’입니다.
그가 하나님께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아갔을 때, 거기에 모든 축복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흥미를 느낍니다.
이 세상에서 그가 가장 알고 싶은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에게 해석되어지는 것입니다.
에티오피아로 돌아가던 한 내시(內侍)를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싶어서 에티오피아에서 성전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입니다. 그는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었지만, 도저히 깨달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빌립이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그를 만나 성경을 이야기해 주었을 때, 그의 눈이 밝아져서 진리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행8:26-). 성경의 대부분은 우리 눈앞에 처녀림(處女林)으로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 깊은 세계 안의 사상과 교훈은 한평생 찾고, 또 찾아도 끝이 없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은 뒷전이고,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하는 일에 정신이 팔려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만족이 없습니다. 참된 배부름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모두 들어있습니다. 그것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갈 때의 희열(喜悅)은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서 죄를 가까이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죄인들에게 손을 씻으라고 합니다. 두 마음을 품은 죄인이 손을 씻는다는 것이 어떤 것일까? 다시 그런 짓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쁜 사람들끼리 그런 말을 합니다.‘나는 이제 손을 씻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두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마음이 단순하지 않고 복잡한 것을 말합니다. 늘 세상 욕심이 남아 있어서 선뜻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고, 자기가 편한 대 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즉‘모든 것이 다 주님의 뜻이야...’라고 변명 합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단지 자기 스스로 위안(慰安)을 받기 위해여 주님의 뜻을 들먹일 뿐입니다. 그러나 속마음은 세상의 기회가 있기만 하면, 쏜살같이 달려갈 생각입니다. 이제 그 마음을 불 태워버리라는 것입니다. 즉 세상에 대해서 끝냈다고 선언하라는 것입니다. 왜냐면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시켜주셔야 합니다. 내 마음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동안에 시간만 자꾸 갑니다. 그럴 바에야 마음이라도 편하게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되도록 욕심을 죽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그의 길을 보여주시고, 그의 분깃이 이 땅에서도 분명히 남아 있음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아무리 취직이 힘들어도 그 사람이 할 일은 남아 있습니다. 경쟁이 100대 일이면 어떻고, 1,000대 일이면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길을 열어주십니다. 하나님께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교회에 관심을 가집니다. 교회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교회에 오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처지나 형편을 알려고 한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거기에 관심을 가집니다.
피상적으로 보면, 교회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공동체를 통하여 일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눈에 보입니다. 그리고 그 귀중한 일에 자기가 꼭 포함되고 싶어 합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시는 일은 나에게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담임 목회자는 독선주의(獨善主義)권위를 버리고, 동역 자가 관심을 갖고 은사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사랑의 반대는 무관심입니다.
Ⅳ.자만심은 금물 다시 한 번 야고보 사도가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항상 애통하는 마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9절)슬퍼하며 애통하며 울 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왜 이 말씀을 하실까? 야고보 사도는 교인들이 지금 거짓된 만족에 빠져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그들은 웃어야 할 때가 결코 아닙니다. 지금 그들은 자기만족에 빠져 있어야 할 때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세상적인 기준에서 스스로 만족하고, 배부른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지금 그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더욱더 갈망하고, 하나님을 사모해야 할 때인데도 불구하고, 전혀 그렇게 하지 않고 있습니다. 즉 그들은 자신을 이미 다 된 그릇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무엇 때문에 웃고 즐거워하고 있습니까?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단지 핍박이 좀 약(弱)해졌기 때문인지, 아니면 경제적인 형편이 좀 나아졌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들을 어렵게 하는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지금 자만(自慢)에 빠져 있습니다.
집이 없다가 집이 생기면, 어떻습니까? 신기할 정도로 만족스럽습니다. 또 차가 없다가 차가 생기면, 어떻습니까? 마치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렇게 들어가고 싶었던 대학이나, 직장에 들어가면, 어떻습니까? 일단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스스로 긴장을 풀고, 만족해 버립니다. 야보고 사도는 그런 이들을 '바보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정말 그들은 바보들입니다.
왜냐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그런 것으로 만족해 버린다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더 큰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것을 얻기까지 다른 것을 돌아보아서는 안 됩니다.
작은 것들, 물론 감사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 때문에 스스로 만족해서 주저앉는다면, 그는 너무나도 큰 것을 잃어버린 자입니다.
전에 어떤 분이 어렵게 살다가 이제는 어느 정도 살게 되었습니다. 비싼 아파트도 샀습니다. 그때 그분은 이제 좀 쉬어야겠다고 말했습니다. 즉 돈도 벌고, 집도 사느라고 너무나도 피곤하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좀 쉬고, 세상 재미를 좀 누려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너무나도 큰 것을 포기한 셈입니다. 더 큰 은혜를 얻기까지 결코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늘 하나님 앞에서 다윗이 소년 때, 양(羊)치던 목동의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부르짖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어려울 때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합니다. 왜냐면 바라볼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잘 살게 되면, 예전의 간절함이 없어집니다. 지푸라기라도 잡을 심정으로 하나님을 사모하고, 엘리야가 혹시 하늘에서 비가 올까? 하여 하늘을 뚫어지도록 바라보던, 그 간절함이 없어집니다. 그러면 결국 바보가 됩니다.
그는‘더욱 큰 은혜’의 문턱에서 주저앉는 바보입니다. 칼빈 선생도 배가 부르니까 기도보다는 하품이 나오더라고 말했습니다. 배가 부른 상태에서 하나님께 가난하려면, 위대한 신앙의 거인들을 비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런 자만심(自慢心)은 완전히 들어가고 말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자신이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의 전기(傳記)를 좋아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즉 설교를 유달리 잘한 것 같아서 기분이 너무 좋아서 자만(自慢)에 빠지려고 할 때, 위대한 설교자들의 생애를 잃으면, 역시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다시 마음이 가난해 진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나는 이 정도면 되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가장 큰 바보입니다. 우리 신앙에 이 정도가 어디 있을까? 아직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주제에 자기만족에 빠진 이 어리석음을 깨우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 얼굴에 거울을 갖다 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토록 놀랍게 사용되고서도 하나님 앞에서 울고 애통하면서 스스로를 쓸모없는 종으로 생각했던 거대한 신앙의 인물들을 생각한다면, 얼굴의 웃음이 싹 가실 것이며, 즐거움이 근심으로 바꾸고 말 것입니다. 더 큰 은혜를 받는 비결은 끝없는 겸손입니다. 낮아진 만큼 그 사람은 떠오를 것이며, 어느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신기한 하나님의 은혜로 다른 사람들을 섬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자만(自慢)은 금물입니다. 그것은 겸손을 위장된 교만(驕慢)입니다. 찬송가 441장 *은혜 구한 내게 은혜의 주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