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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cafe.naver.com/godnjf12 황여일(黃 汝一)선생의 해월유록(海月遺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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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afe.daum.net/guriever. 해월(海月) 황여일(黃 汝一)선생의 해월유록(海月遺錄)
1599(선조32년, 己亥)년 1월 23(甲辰)일 비로소 북경에 도착하여 황성(皇城) 동문(東門)에 들어가서 옥하관(玉河館)에 유숙하게 되었다.
이 당시 변무진주사(辨誣陳奏使)로 가는 사신(使臣)들의 입장은, 이 문제(問題)를 깨끗하게 아무런 오해없이 해결(解決)하지 못하고는, 다시는 살아 돌아올 수 없는 절박(切迫)한 입장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때 사신(使臣)들이 명(明)나라 황제에게 올리는 조선(朝鮮) 국왕의 주문(奏文)에는, 주권(主權)을 가진 나라로서는 차마 밝히기가 거북한 내용(內容)들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 첫 문장(文章)에 조선(朝鮮) 국왕은 이와 같이 오명(惡名)을 입게 되었으니, 삼가 석고대명(席藁待命), 즉 거적을 깔고업드려 처분을 기다린다고 하며, 용서를 간걸(懇乞)한다고 하였다.
또한 사신(使臣) 일행(一行)은 명(明)나라 정부의 오부(五府), 육부(六部), 구경(九卿), 육과(六科), 십삼도(十三道)의 관청(官廳)을 두루 찾아다니며, 우리 나라의 억울한 사정을 기록한 주문(奏文)을 제출(提出)하고는 우리의 억울(抑鬱)함을 토로(吐露)하였다.
2월 5(乙卯)일 동궐(東闕)에서 어전회의가 있었는데, 동궐(東闕) 출문 밖에서 우리 나라 사신(使臣) 일행(一行)이 그 계단 앞에서 나아가 꿇어 업드려 절을 하며, 우리 나라의 원통(寃痛)한 일을 설명하였다.
이 때 소대형(蕭大亨) 형부상서(刑部尙書)가 업드려 있는 우리 사신일행(使臣一行)을 보고, 사람을 시켜서 일어나게 하였으며, 업드려서 절(拜禮)를 하지 말고, 다만 양읍(兩揖)만을 하라고 하자 다시 일어나 양읍(兩揖)을 하고는 다시 나아가 업드려 절을 하며 억울(抑鬱)함을 밝혔다고 한다.
또한 예부조방(禮部朝房: 朝臣들이 朝會 때를 기다리며 모여 있던 방, 대궐 문 밖에 있었음) 문밖에서 이부(吏部), 예부(禮部) 관리들과 소상서(蕭尙書) 일행등 여러 관리들이 나오자, 문밖에서 좌우(左右)로 나뉘어 서 있다가 계단 아래로 나아가, 두 번 절을 하고 또한 읍(揖)을 한 다음 무릎을 꿇고 나아가 글을 올리며 이른바 진정을 하였다(行兩拜作損因跪呈咨文).
이 때 예부좌시랑(禮部左侍郞) 여계등(余繼登)이 크게 불평을 말하며, 우리 사신(使臣) 일행(一行)에게 이르기를 퇴거(退去)하라고 지시(指示)하여, 감히 말도 못하고 물러났다고 하였다(不敢開說而退仍)
이 기록(記錄)을 통하여 약소국가(弱小國家)의 설움을, 해월(海月) 선생은 뼈저리게 느낀 것을알 수 있다.
당시 우리 나라 사신들의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2월 25일(乙亥)일 병부(兵部)에서 보내 온 공문서인 자문(咨文)에는, 우리 나라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와 같이 일이 이루어지지 않자 노심초사(勞心焦思)하고 있었으나 마침내는 일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당시에 우의정(右議政)으로 상사(上使)였던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선생이, 같이 갔던 사신(使臣) 일행(一行)들과 어려웠던 상황에 대하여 주고 받은 이야기를 백사(白沙) 선생의 문집(文集) 23권 22장에 밝혀 놓았는데, 그 글을 소개하겠다.
『二十八日 將往兵部 余出言曰 此大事 月沙以爲 必無不成 李譯以爲 必不成 必有害 吾以爲 必不成亦無害 獨書狀 無決語
行示皂白 且觀吾儕先見如何 海月曰吾意與上使同 仍詣兵部 見蕭尙書呈文 且陳其由則尙書曰 聖旨不於前議准下 而只於後議
准下 不敢以前議成咨 吾等退出外庭 余行且顧月沙 獻之曰 吾不云乎 今竟 如何 尙書笑言 一一與吾言 妙合 今日方知 公騷
陞之害也 恨不習吏事 月沙笑曰 上使不以不成爲念 而反以先見 爲行耶 海月公曰 我亦云如此 衆皆斥之曰 因人成事 海月曰
託以叩謝非吾策耶 余曰 此則當以公爲盟主』
2월 28(戊寅)일 병부(兵部)로 가면서 내(白沙)가 말하기를 ‘이는 큰일(大事)입니다.
월사(月沙, 李廷龜)는 이 일은 틀림없이 이루어지지 않을 리가 없다고 하였으며, 또한 이언화(李彦華) 역관(譯官)은 반드시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해(害)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으며, 내(白沙) 생각에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지만 해(害)는 없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오직 서장관(書狀官) 해월(海月)만이, 홀로 아무런 결연한 말이 없으니,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지의 상황(皂白: 옳고 그른 시비)을 밝혀 주고, 또한 우리 일행(一行)들의 선견(先見)이 어떠한지도 보아 주기를 바라오‘ 하니 해월공(海月公)은 내(海月) 뜻은 상사(上使)와 같으므로, 이에 병부(兵部)에 나아가서 형부상서(刑部尙書) 소대형(蕭大亨)을 만나 뵙고 글을 올리며 그 연유(緣由)를 진정한즉, 형부상서(刑部尙書) 소대형(蕭大亨)이 이르기를, 「천자(天子)의 뜻(聖旨)이 앞서의 논의(前議: 우리나라의 입장)는 비준(批准)하지 않고, 후의 논의(後議: 뇌물을 주어 왜(倭)를 끌어들였다는 주장)만을 비준(批准)하였는데, 어찌 감히 천자(天子)가 비준(批准)하지 않은 앞서의 논의(前議)를 공식(公式) 문서(文書)로 작성할 수 있겠느냐」 고 하였다고 했다.
우리 일행(一行)들은 바깥의 뜰로 나와서 가다가 내(白沙)가 월사(月沙)를 돌아보며 농담삼아 말하기를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지금의 경우는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
형부소상서(刑部蕭尙書)가 하는 말이 일일(一一)이 내 말과 묘하게 부합(符合)하지 않는가?
금일에 바야흐로 그대(月沙)의 관직이 갑자기 오른 것이 해(害)가 됨을 알겠으니, 그대가 관리의 일(吏事)을 익히지 못했음이 한(恨)스럽다.’ 했더니, 월사(月沙)가 웃으면서 ‘상사(上使)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괘념치 않고 오히려 선견(先見)이 맞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십니까?’ 라고 말했다.
해월공(海月公) 또한 이와 같다고 말하자,
사람들은 모두다(衆皆) 그렇지 않다고 말을 막으며(斥), 인인성사(因人成事: 즉 다른 사람의 힘에 의해서 일이 성사된 것)입니다.‘ 라고 말하자, 이에 해월공(海月公)이 말하기를 ‘공손히 머리를 조아려 사례하며 부탁한 것이지 달리 나의 비책(秘策)이 있었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이에 내(白沙)가 말하기를 ‘이와 같은 큰 일은 당연히 그대 해월공(海月公)이 맹주(盟主: 동맹의 주재자)인 것이다’ 라고 하였다.
백사(白沙) 선생이 해월(海月) 선생을 왜 맹주(盟主)라고 했는지를 알려면, 인인성사(因人成事)라는 말이 뜻하는 바를 알아야 한다.
이 말은 사기(史記)의 평원군우경열전(平原君虞卿列傳)에 나오는 것이다.
『춘추전국시대 때, 진(秦)나라가 한단(邯鄲)을 포위하였을 때, 조(趙)나라는 평원군(平原君)을 초(楚)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합종(合從: 굳게 맹세하여 서로 응함. 초(楚)와 조(趙)나라가 동맹하여 진(秦)나라에 대항하자는 의견)을 하고 구원을 요청하려 하였다.
이에 평원군(平原君)은 그의 문하(門下)에 식객으로 있는 이십인(二十人)과 함께 가기로 약속을 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였다.
‘문사와 말로써 승리를 얻을 수 없다면 궁궐 안에서 초(楚)나라 왕을 협박(脅迫)하여 피를 나누어 마셔서라도 반드시 합종(合從)을 정하고 돌아오겠다.
선비는 다른데서 구할 필요가 없다.
문하(門下)의 식객 중에 골라도 충분하다.’
그리고는 19명을 골랐는데 그 나머지 한 명은 알맞은 사람이 없어서 채울 수 없었다.
이 때 문하(門下)에 모수(毛遂)라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평원군(平原君)에게 자기 스스로를 칭찬하며 데려가 주기를 청했다.
평원군(平原君)이, 대저 현명한 선비가 세상에 처하는 것은, 주머니 속에 들어 있어서 그 끝이 즉시 밖으로 나타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며, 3년 동안 있었다는 데도 모수(毛遂)에 대한 칭찬을 한 번도 못 들었으니 그냥 머물러 있으라고 했다.
그러자 모수(毛遂)는 일찍부터 모수(毛遂) 자신을 주머니 속에 처할 수 있게 했다며 송곳의 머리까지 튀어 나왔을 것이요, 그 끝만 빠져 나오는 정도에 불과(不過)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평원군(平原君)은 모수(毛遂)와 함께 가기로 하였다.
다른 19명은 처음에는 모수(毛遂)를 비웃었으나, 초(楚)나라로 가면서 토론을 하고는 모수(毛遂)에게 설복 당하였다.
평원군(平原君)이 초(楚)나라 왕과 더불어 합종(合從)을 하는데, 평원군(平原君)의 끈덕진 설득에도 불구하고 그 이해(理解)를 따지느라, 해가 뜰 때 시작한 토론이 해가 중천에 뜨도록 결말이 나지 않았다.
이에 19명이 모수(毛遂)더러 나서 보라고 하자, 단 아래에 있던 모수(毛遂)는 검(劒)을 잡고 계단을 밟고 위로 올라가, 평원군(平原君)에게 합종(合從)의 결과는 두 마디면 결정(決定)이 날 것인데 어찌하여 결말(結末)을 짓지 못하는지 까닭을 물었다.
그러자 초(楚)왕이 주인(平原君)과 더불어 말하고 있는데 왜 나서냐면 꾸짖었다.
이에 모수(毛遂)는 검(劒)을 부여잡고 앞으로 다가서며,
왕께서 나를 꾸짖고 큰소리치는 것은 초(楚)나라의 막강한 군사의 힘을 믿고 하는 짓이외다.
그러나 지금 나(毛遂)와 왕과의 거리는 십보에 불과하여, 막강한 군사(軍士)의 힘을 믿을 수 없으니, 왕의 목숨은 모수(毛遂)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라며, 주인이 앞에 있는데 자기를 꾸짖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
또한 탕(湯)왕과 문(文)왕이 제후를 신하로 둔 것이 사졸(士卒)이 많아서가 아니며, 초(楚)나라 땅이 사방 천리이고 백만(百萬) 군사를 가진 초(楚)나라의 힘을 천하에 감히 대적(對敵)할 나라가 없다며 저 진(秦)나라의 백기(白起)란 놈은 작은 더벅머리에 불과하지만, 한 번 싸워서 언(鄢)과 영(郢)을 점령하고, 두 번 싸워서 이릉(夷陵)을 불태우고, 세 번 싸움에 왕의 부왕(父王)을 패배시켜 치욕을 안겨주지 않았소이까?
이것은 씻을 수 없는 백대의 맺힌 한(恨)이라.
조(趙)나라의 수치로 여기는 바이다.
그렇다면 합종(合從)과 동맹(同盟)은 사실상 초(楚)나라를 위한 것이지 조(趙)나라를 위한 것이 아니지 않느냐고 대들며 조리(條理)있게 따졌다.
『王曰 唯唯 誠若先生之言 謹奉社稷以從 遂曰 取鷄狗馬之血來 捧銅盤 詭進曰 當歃血以定從 次者吾君 次者遂 左手奉盤 右手招十
九人 歃血於堂下曰 公等 碌碌 所謂 因人城事者也 平原君 定從歸 曰毛先生 一至楚 使趙 重於九鼎大呂 以遂 爲上客』
초(楚)왕은 모수(毛遂)의 말을 듣더니, 과연 그렇도다. 듣고보니 선생의 말이 사리에 맞는도다. 삼가 사직(社稷)을 받들어 그대의 말에 따라 동맹(同盟)을 맺으리라고 말했다.
이에 모수(毛遂)는 닭과 개와 말의 피를 가져 오도록 하였고, 피를 담은 동반(銅盤)을 받들어 무릎을 꿇어 엎드리면서, 왕께서 맹약(盟約)의 주인공으로서 먼저 피를 마십시오. 다음은 우리 임금이요, 다음은 이 모수(毛遂)가 먹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이렇게 피를 마시고 나서, 왼손에 쟁반을 들고 오른손으로 19명의 동반자를 불러 전당 아래에서 피를 마시게 하면서, 그대들은 작은 돌모양으로 주관(主觀)이 없이 남을 추종(追從)하는 쓸모없는 존재(存在)로다. 이른바 다른 사람의 힘에 의지하여 일을 이루었으니 말이다 라고 말하였다.
평원군(平原君)은 동맹(同盟)을 약정(約定)하고 돌아와서 말하기를, 모(毛) 선생이 한 번 초(楚)나라에 가 주신 덕분에, 조(趙)나라를 구정(九鼎: 하, 은, 주의 3대 보물)과 대려(大呂: 周왕조의 큰 鍾으로 周왕조의 보물)보다도 더 존중(尊重)받도록 만들었다며, 모수(毛遂)를 상객(上客)으로 삼았다.
초(楚)나라와의 동맹(同盟)이 체결되지 않으면, 조(趙)나라의 사직(社稷)이 위태로워지는 상황에서, 난항(難航)을 겪고 있던 초(楚)나라와의 동맹(同盟)을 이루어낸 것은, 결국 모수(毛遂)인 것이다.
평원군(平原君)을 따라간 20명의 식객 중 학문(學問)과 무예(武藝)를 겸비해서 먼저 뽑힌 19명은 동맹(同盟)을 맺는데 실질적(實質的)인 일을 하지 못하고, 모수(毛遂) 혼자 동맹(同盟)을 성사(成事)시켰으니 모수(毛遂)의 힘에 의지하여 일이 이루어진 것을 일러, 인인성사(因人成事) 즉 남을 의지하여 일을 성사시킨 것이라고 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해월(海月) 선생과 같이 갔던 일행들 모두가 인인성사(因人成事)라는 말을 인용(引用)하여, 그 당시의 대사(大事)는 해월(海月) 선생 혼자의 힘으로 해결(解決)한 것이라고 말하니, 백사(白沙) 선생도 당연(當然)히 이 일에 있어서는 해월공(海月公)이 맹주(盟主)가 되어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당시 해월(海月) 선생의 은사일록(銀槎日錄)을 보면, 당시 명(明)나라 조정(朝廷) 관리들이 우리 조선(朝鮮)을 보는 시각(視覺)과 관점(觀點)이 어떠했는지를, 각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의 의견(意見)을 하나하나 들어 기록(記錄)하고 있다.
당시에 명(明)나라 조정(朝廷) 안에서는, 우리 나라에 대하여 비판적(批判的)인 시각(視覺)을 가진 사람들이 상당히 있었던 것이다.
이 때 명(明) 조정에서 우리 나라에게 우호적(友好的)인 형부상서(刑部尙書) 소대형(蕭大亨)을 해월(海月) 선생이 찾으니, 소대형(蕭大亨)은 조선(朝鮮)이 올린 문서(文書)를 회의(會議)에서 통과시키려면 혼자의 힘으로는 되지 않으니, 이러이러한 사람에게 이 내용(內容)을 알려서 지지를 받아야 한다고 하니, 해월(海月) 선생은 이미 그들에게 전(傳)했다고 하였다.
해월공(海月公)이 뛰어난 문장력(文章力)과 선견지명(先見之明)으로, 사실상 거의 혼자의 힘으로 이 사건을 처리한 것을, 백사(白沙) 선생은 그의 문집(文集)에다 밝혔던 것이다.
당시 해월(海月) 선생이 직접 만나서 이야기했던 사람들 중, 우리 나라를 도왔던 우호적인 인사들을 든다면, 심 각로(沈 閣老: 재상), 조 각로(趙 閣老), 태학사(太學士) 조지고(趙志皐), 이부상서(吏部尙書) 이대(李戴), 호부상서(戶部尙書) 양준민(楊俊民), 형부우시랑(刑部右侍郞) 동유(董裕), 공부상서(工部尙書) 양일괴(楊一魁), 통정사사(通政司使) 범륜(范崙), 이부도급사중(吏部都給事中) 조완벽(趙完壁), 호부도급사(戶部都給事) 포현첩(包見捷), 예부좌급사(禮部左給事) 유여택(劉餘澤), 병과도급사(兵科都給事) 장보지(張輔之), 계유근(桂有根) 형과우급사중(刑科右給事中) 양응문(楊應文), 공부도급사(工部都給事) 한학신(韓學信), 형부상서(刑部尙書) 소대형(蕭大亨)...... 등등이었다.
그 당시 소대형(蕭大亨) 형부상서(刑部尙書)가 가장 앞장 서서 우리 나라 입장(立場)을 지지(支持)해 준 분으로, 명(明)나라 조정에서도 실세(實勢)로 아주 돋보이는 분이라고 해월(海月) 선생은 밝히고 있다.
또한 당시 우리 나라 역관(譯官)인 이언화(李彦華)가 해월(海月) 선생을 가장 많이 도왔던 것이다.
그 당시 해월(海月) 선생은 사신(使臣)으로 명(明)나라에 가서 많은 일화(逸話)를 남겼는데, 그 중에서 몇 가지만을 소개하겠다.
해월(海月) 선생은 우리 나라의 입장을 명(明)나라 조정에서 받아들여지게 하기 위하여, 혼자 수많은 조정(朝廷) 관리들과 접촉하고, 우리의 입장(立場)을 설명하였던 것이다.
그 때 만나서 그들이 우리 나라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의견과 인상을 자세히 기록(記錄)으로 남겨 두었는데, 해월선생문집(海月先生文集) 12권에 자세(仔細)하게 기록(記錄)되어 있다.
사실 해월(海月) 선생은 명(明)나라 조정(朝廷)의 여러 관청을 다니면서, 진정서(陳情書)를 전달하고 우리 나라의 무고(誣告)를 진설(陳設)하고, 통변(痛辯)하자, 각로(閣老: 재상)와 고위관리(高位官吏)들은, 그의 언변과 논술(辭語)이 분명하고 예절바른 태도에 모두들 감탄하고는 다투어 서로 차와 술을 대접하며 나라의 치욕(恥辱)을 벗겨 줄테니, 공(公)은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慰勞)하였다고 한다.
또한 사신(使臣) 일행(一行)은 곳곳에서 연회(宴會)의 초청(招請)을 받았지만, 우리 임금의 오명(惡名)을 씻기 위하여, 변무진주사(辨誣陳奏使)로 갔기 때문에, 명나라 조정의 예부(禮部)에다 연회(宴會)에 초청(招請)하지 말아 줄 것을 부탁하는 면안정문(免晏呈文)을 제출하였다.
멀리서 온 사람을 받들어 위로(慰勞)하며, 지극히 성대(盛大)하게 잔치를 베풀어 주니 그 은혜가 도탑지만, 고국(故國)을 떠나올 때 임금이 가슴을 치고 침식(寢食)을 제대로 들지 못하는 것을 보았으며, 군신상하(君臣上下)가 몹시 두려워 몸둘 바를 모르고 있는 이 때에, 어찌 신(臣)만이 홀로 고맙게 베풀어 주는 잔치를 즐길 수 있습니까?
이와 같은 간곡(懇曲)한 내용(內容)의 글로, 예부(禮部)에서 연회(宴會)의 초청을 금(禁)하게 하여 주기를 바라는 문서를 2월 5(乙卯)일에 제출하였던 것이다.
당시 명(明)나라의 관상가(觀相家)가 조선(朝鮮)의 사신(使臣) 일행 중 해월(海月) 선생을 가리키며,
『時相者來 使行 指先生曰 黃書狀生於東國 稟得萬里氣像 甚可異也 在座人曰 書狀生於東海 世居小國 何以稟得萬里氣也
相者曰 信不誣矣. 稟生東海之氣 書狀之量 河海弘量矣 嘖嘖稱歎』
‘황서장관(黃書狀官)은 동국(東國)에서 태어났지만, 만리기상(萬里氣像)을 타고 났으니 매우 이상합니다.」 라고 하자,
함께 같이 있던 사람들이 말하기를’‘ 황서장관(黃書狀官)은 동해(東海)에서 태어나 대대로 소국(小國)에서 살았는데, 어찌 만리기상(萬里氣像)을 타고 태어났겠습니까?’ 라고 말했다.
그러자 관상가(相者)는, ‘참으로 속일 수가 없습니다.
동해(東海)의 기(氣)를 받고 태어난 서장관(書狀官)의 도량(度量)은 하해(河海)와 같은 분입니다.’ 라며 큰 소리로 탄복(歎服)을 했다고 한다.
또한 이에 따른 해월(海月) 선생의 가문(家門)에는 전(傳)하는 일화(逸話)가 있다.
그 당시 이러한 소문이 널리 퍼졌는데, 명(明)의 신종(神宗) 황제도 해월(海月) 선생에게 ‘조선(朝鮮)은 삼천리(三千里) 강토(疆土)인데, 그대는 어찌하여 만리정기(萬里精氣)를 타고나서 명(明)을 치려 하느냐?’ 라고 물었다 한다.
만일 여기서 바로 대답을 제대로 못하거나, 머뭇거린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일은 허사(虛事)가 될 뿐만 아니라, 나라에 커다란 재앙(災殃)이 되는 위급(危急)한 상황(狀況)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조선(朝鮮)이 일본(日本)과 연합하여, 고구려(高句麗)의 옛 땅을 찾겠다는 오해(誤解)로 인(因)하여 명(明)의 황제 앞에 해명(解明)하기 위해 갔다는 말이다.
그러나 해월(海月) 선생은 그 자리에서 즉시 대답하였다.
‘예 신(臣)의 집 앞에는 만리창해(萬里滄海)가 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의 대답은 참으로 절묘(絶妙)하고 적절(適切)했던 것이다.
그러자 신종(神宗) 황제는 무릎을 치면서, ‘조선(朝鮮)에는 너 하나밖에 없구나.’ 라고 하면서, 그 자리에서 이름이 지어져 「너 하나밖에 없다」 는 뜻의 「여일(汝一)」 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그리고 무사히 일을 해결하고 귀국하자, 집으로 돌아와서는 즉시 동해(東海)가 바로 보이는 마악산(馬嶽山) 중턱에다, 거주(居住)하고 있는 집과 같은 집을 지어 놓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실제 해월(海月) 선생의 집은 정남향(正南向)이라, 바다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理由)는 명(明)의 조정에서 조선(朝鮮)을 못 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황제(皇帝)를 농락(籠絡)했다며 트집을 잡을까 하여, 바다가 바로 보이는 곳에 집을 지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집은 몇 십년 뒤에 화재(火災)로 소실(燒失)되었는데, 그 집터가 지금은 밭으로 사용되고, 그 잔해가 아직도 간혹 나오고 있다고 후손(後孫)들은 이야기하고 있다.
해월(海月) 선생이 명(明)나라에서 일을 마무리짓고 돌아올 준비를 하고 있을 때, 형부상서(刑部尙書) 소대형(蕭大亨)이 이르기를,명(明)나라의 군대가 조선(朝鮮)에 오랫동안 파견되어 있지만, 명(明)나라 조정 역시도 서쪽의 적(敵)과 북쪽의 오랑캐 때문에 근심이 많다고 하였다,
그러니 속히 조선(朝鮮)에 파견되어 있는 군대를 철수(撤收)하여야만 할 입장이니, 조선(朝鮮)은 명(明)에만 의지(依支)하지 말고, 스스로 강(强)해져서 자립하라고 하였다(自强自立). 1599(선조 32년, 己亥)년 3월 18(丁酉)일, 북경을 출발하여 귀국길에 올랐다.
4월 24(癸酉)일 압록강을 건너고, 4월 25(甲戌)일에 의주에 머물렀다. 윤 4월 기해(己亥)일에 복명(復命)을 했다.
이처럼 해월(海月) 선생은 국가에 큰 공을 세우고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는 한유(韓愈)의 여우양양서(與于襄陽書)에 나오는 다음 구절들을 보면, 그 이유(理由)를 잘 대변(代辯)해 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士之享大名顯當世者 莫不有先達之士負天下之望者爲之前焉. 士之能垂休光照後世者 亦莫不有後進之士負天下之望者爲之後焉.
莫爲之前 雖美而不彰 莫爲之後 雖盛而不傳』
선비(士)로서 명성(名聲)을 올려 그 시대(時代)에 유명하게 된 자는, 그 사람보다 선배(先輩)로서 천하(天下)의 인망(人望)을 갖고 있는 자가 앞서서 추천(推薦)하지 않는 일은 없고, 또 선비(士)로서 뛰어난 공적(功績)을 남겨 후세(後世)까지 명성(名聲)을 나타내는 자는, 그 사람의 후배(後輩)로서 천하(天下)의 인망(人望)을 얻고 있는 자가 뒤에서 이를 밀어 세우지 않는 자가 없다.
앞서서 추천(推薦)하지 않으면, 후배(後輩)는 아무리 아름다운 재주와 덕(德)을 지니고 있어도 세상에 나타날 수가 없고, 뒤에서 이를 밀어 세우지 않으면, 선배(先輩)의 사업이 아무리 성대(盛大)해도 후세(後世)에 전해지지 않는다(不傳).
대사헌(大司憲)이신 이세택(李世澤) 선생께서는, 그 당시의 세분에 대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기술(記述)하고 있다.
세 분이 서로 시가(詩歌)나 문장(文章)을 주고 받은 글들이 주옥(珠玉)같이 남아 있는데, 그 문장(文章)에는 그 덕(德)과 기상(氣像)이 가히 존경(尊敬)하고 숭배(崇拜)할만 하다고 하며, 또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兩沙遺稿 刊行已久 遍滿東國 殆家有人誦 而海月之文 尙湮晦無傳 豈非 吾党之所 可慨然者那』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선생과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선생의 유고(遺稿)는 이미 간행(刊行)되어 우리 나라에 널리 퍼져 있어,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데, 유독 해월(海月) 선생의 글만이 오히려 조용히 자취를 감추고 전(傳)해지지 않으니, 어찌 우리들이 이와 같이 편파(偏頗)적인 일을 개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면서 발문(跋文)을 쓰신 것이다.
또한 발문(跋文) 속에 해월(海月) 선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故其發爲詞藻 文華者 潁拔特達 汗瀾不可以涯涘 詩尤精麗 爾雅駸駸 有唐宋人聲氣 諷詠遺什 於曠世之下 猶可象想 其襟靈爽朗
器量涵泓 直與滄海明月 輝映瀅澈 同流 其光影者 抑何奇也』
즉 그의 시문(詩文)을 짓는 재주를 말하자면, 그의 문장(文章)은 여러 많은 사람들 중에서 단연 뛰어나서, 한 번 물결이 일면, 그 끝간 데를 알 수 없으며, 그의 시(詩)는 더욱 정묘하고 고우니(精麗), 문장이나 언어가 아름다우며(爾雅), 말(馬)이 빨리 달리는 것과 같아서(駸駸), 당송(唐宋)인의 득의(得意)한 마음이나 기개(氣槪)를 볼 수가 있으며, 지금까지 전해진 문집(文集) 속에 있는, 그의 시(詩)를 읊조려 보면, 또한 다음과 같이 상상(象想)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의 마음 속에는 매우 신묘(神妙)하며 신령이 영험하고, 그의 기량(器量)은 깊고 깊어 잠겨서 밝은 모양인데, 말하자면 맑고 푸른 바다(滄海)에 밝은 달(明月)이 밝게 비추니 그 밝게 비추는 달빛과 그 맑은 바닷물이 하나가 되어(同流) 흐르는 모습. 그 물 속에 달그림자, 아! 얼마나 아름답고 기이한가? 라고 표현하고 있다.
『雖然此在公特餘事耳 其行治之懿 逈出倫類 孝悌通於神明 忠義根於性彛 才足以贊猷華國 識足以正誼明理』
비로 그러하나 이는 공(公)에게 다만 여사(餘事: 여가로 하는 일)일 뿐이다.
그 스스로를 다스리는 그 아름다움은 사람들 가운데 돋보이니, 부모(父母)에게 효도(孝道)하고 형제를 받들어 순종한 일은 신명(神明)과 통(通)하고, 그의 충성(忠誠)과 절의(節義)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떳떳한 성품에 기인하며, 그의 재주는 족히 임금을 도와 나라를 빛낼 만하고(華國), 식견(識)으로는 도리를 바르게(正誼) 하고, 이(理)를 흡족히 밝힐(明現) 만하다
고 하였다.
『自淬勵蔚 爲當世名儒 是不但淸文 奇氣之聳 服人觀聽而已也』
스스로 힘써 학문(學問)을 닦아 우뚝하게 당세(當世)의 이름난 선비(名儒)가 되니, 이는 그의 맑고 깨끗한 글(淸文)에는 기이(奇異)한 기운(氣運)이 높이 서려 있어(奇氣之聳), 그의 글을 보고 듣는 사람들을 삼가 두렵게 하며, 또한 감복(服人)케 하는 것을 더욱 더하여 준다고 하였다.
또한 해월(海月) 선생은, 외진 벽지(僻地)에서 늦게 태어나서,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하지 못한 것을 못내 크게 아쉬워하였다고 한다.
해월(海月) 선생은 1583년인 선조 16년 8월, 그가 성균관 진사(進士) 시절에 우리나라에 오현(五賢)이신, 이황(李滉),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등을 문묘(文廟: 공자를 모신 사당)에 제향할 수 있도록 청(請)하는 상소문을 올려, 공론화를 시켰는데, 조정(朝廷)에서는 의심(疑心)스러워하며, 두려워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당장에는 이루어지리라고는 믿지 않고 후일을 내다보고 하였다고 한다.
또한 1585년인 선조 18년(乙酉) 봄에 격암(格菴) 남사고(南師古)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옥계서당(玉溪書堂)을 찾아가서 배(拜)를 올렸다고 한다.
그 해 10월에 별시을과(別試乙科)에 1등으로 급제하여 예문관(藝文關) 검열이 되었으며, 1586년 선조 19년 1월에 휴가를 받아 부모님을 찾아 뵙고, 선성(宣城) 즉 지금의 안동의 예안으로 가서 퇴계(退溪) 선생 유고(遺稿)의 편집과 교정을 보았던 것이다.
1599년 선조 32년 5월에 선생께서는 중훈(中訓)대부로 올랐으며, 이 때 고향에 돌아가 부모님을 찾아 뵙고 가을에 도산간역소(陶山刊役所) 감독직을 맡고 있었는데, 이 때에 퇴계(退溪) 선생의 문집(文集)을 간행(刊行)할 때, 물자조달(物資調達)을 하며, 일을 도왔다고 한다.
해월선생문집(海月先生文集) 3권 9장 39편에,
숙모당연종애편(叔母當年鍾愛偏) 앙연수기자초년(昻然秀氣自齠年)
상비벽군무인걸(常悲僻郡無人傑) 만희쇠문득이현(晩喜衰門得爾賢)
무은일반방표울(霧隱一班方豹蔚) 풍박만리저붕건(風搏萬里竚鵬騫)
전춘척독재상문(前春尺牘纔相問) 가인금래견차천(可忍今來見此阡)
숙모(叔母: 말세의 어머니)가, 그 당시 매우 귀여워하였는데 이를 갈 어린 나이인데도 밝고 아름다움이 빼어나구나.
늘상 마음이 아픈 것은 후미진 고을에 인걸(人傑)이 없다는 것이다.
뒤늦게(말세의 끝) 기쁘게도 쇠락(衰落)한 가문에, 그대와 같은 현인(賢)을 가지게 되었는데 온통 안개가 가리우더니, 때가 이르러 표범의 무늬가 완연하게 드러는구나(豹蔚).
만리(萬里) 밖에서 바람을 일으키며 날개치며 다가오더니, 잠시 있던 붕(鵬)새가 들어올리는 것은 춘(春) 앞으로 보낸 편지이니, 비로소 춘(春)이 자세히 보게 되는구나.
가히 마음을 억누르고 지금에 와서 보니, 여기는 무덤길이구나.
이 시(詩)를 풀이하는 글에서 해월(海月) 선생이 조카의 죽음을 애도하며 묘지(墓地)를 잡기 위해, 울진읍(蔚珍邑) 인근의 정림사(井林寺)를 가면서 지은 시(詩)로 설명되어 있다.
이 시(詩)를 잘 보면 숙모(叔母)란 단순한 의미로 쓴 말이 아닌 것을 알 수가 있다.
말세(末世)의 어머니, 즉 하나님을 상징적(象徵的)으로 표현(表現)한 말이다.
한 아이를 매우 귀여워하였는데, 참으로 이를 갈 어린 나이지만은 착하고 빼어난 기운이 높이 오르는 아이라는 것이다.
이 시골 벽촌에 인재(人才)가 없어서 안타까웠는데, 아주 쇠락(衰落)한 가문(家門)에서 이와 같은 현인(賢人)을 가지게 된 것에 대해 기쁘다고 한 것이다.
안개가 그 표범(豹)의 아름다움을 모두 가려 놓았지만, 때가 이르니 그 표범의 아름다운 무늬가 완연하게 세상에 드러난다고 하였다.
만리(萬里) 밖에서 바람을 일으키며 날개를 치며 다가오더니, 그 붕(鵬)새가 들어올리는 것은,춘가(春家) 앞으로 보내온 편지인데, 그 춘(春)이 그 편지를 받아서 자세(仔細)히 읽어 보게 된다는 것이다.
가히 참지 못하고 지금 와서 보니, 이 길은 무덤길이구나 하였다.
여기에는 무엇인가 중요한 내용(內容)이 들어 있는 것이다.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 벽촌에 이렇다 할 인걸(人傑)이 없었는데, 뒤늦게 말세(末世)에 쇠락(衰落)한 즉 영락(零落)한 가문(家門)에서 이러한 현인(賢人)이 나타나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라는 것과 그 비유로 안개 속에 숨겨져 있던 표범(豹)이 때가 되니 그 표범(豹)의 아름다운 모습이 세상에 드러난다는 것이다.
또 한가지는 만리(萬里) 밖의 붕(鵬)새가 편지를 전해 주는데, 그 편지는 춘가(春家)의 춘(春) 앞으로 보내는 편지인데, 그 춘(春)이 비로소 붕(鵬)새가 전해 준 그 편지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가히 마음을 억누르고 지금에 와서 보니 여기는 무덤길이라고 하였다.
즉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이미 화천(化天)하셔서, 그 아들인 춘(春)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이라고 해월(海月) 선생은 전하는 것이다.
여러분들은 이 시(詩)에서 해월(海月) 선생이 무엇을 전하고자 했는지, 그 의미를 찾아보길 바라네.“ 하자 한 사람이 질문을 하였다.
“그 표범(豹)을 안개가 가려 놓았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라고 하자
“주역(周易)의 택화혁(澤火革)을 보면 혁(革)이란 바로잡는 것으로, 혁신(革新), 혁명(革命), 변혁(變革)의 혁(革)자인 것이다.
낡은 것은 버리고, 새로운 것을 창조(創造)해 내는 과정을 의미한다.
혁괘(革卦)의 (九五)에, 『大人虎變 末占有孚 象曰 大人虎變其文炳也』
(上六)에, 『君子豹變小人革面......象曰君子豹變其文蔚也 小人革面 順以從君也』
이 말은 대인(大人)은 호랑이(虎)처럼 개혁한다.
점(占)을 치지 않아도 천하(天下) 만민(人)의 신뢰를 받는다
상전(象傳)에 이르기를 대인(大人)은 호랑이처럼 개혁(改革)한다 함은, 그 무늬가 뚜렷이 나타난다는 의미이다.
상육(上六)에 군자(君子)는 표범(豹)처럼 개혁하고, 소인(小人)은 면(面)을 바꾼다.
또한 상전(象傳)에 이르기를 군자(君子)는 표범(豹)처럼 개혁(改革)한다는 말은, 표범(豹)의 털 무늬가 아름답고 뚜렷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소인이 면(面)을 바꾼다는 말은, 뜻을 새롭게 해서 군주(君主)에게 기꺼이 복종한다는 의미라고 하였다.
대인(大人)이 호랑이(虎)처럼 개혁(改革)한다 함은, 대인(大人)이 난(亂)을 다스려 천하(天下)를 바른 데로 돌아가게 함이, 호랑이(虎)의 가죽무늬처럼 분명하다는 것이다.
위대한 도덕(道德)과 재능(才能)을 갖추고 있는 대인(大人)은, 혁명(革命)을 완수하여 구습(舊習), 구악(舊惡)을 제거하는데, 마치 가을이 되어 호랑이(虎) 털이 윤기 있고 색채가 선명한 털로 바뀌는 것처럼 국가(國家)의 법률제도(法律制度)나 인심(人心)의 면목을 새롭게 하여 아름다웁게 바꾼다는 것이다.
대인(大人)의 혁명(革命)은, 하늘에 따르고 사람에 응하는 것으로, 천하(天下) 사람들은 처음부터 이 대인(大人)의 지성(至誠)스러운 진실을 믿는다.
그것은 점(占)쳐 볼 것까지도 없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또한 군자(君子)는 표범(豹)처럼 개혁(改革)한다고 하였다.
또한 호랑이(虎)와 마찬가지로, 가을이 되면 역시 윤기 있는 아름다운 털로 바뀐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호변(虎變), 표변(豹變)이라는 말은, 호랑이(虎)와 표범(豹)이 가을이 되어 털갈이 하고 일변(一變)해서 아름다운 모양을 나타내는 것을, 대인군자(大人君子)가 혁신(革新)을 통하여, 상극(相剋)과 모순(矛盾)을 제거하여 천하(天下)를 정도(正道)로 돌아가게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해월(海月) 선생은 은연중에 이 후미진 시골 벽지(僻地)에 인걸(人傑)이 없었으나, 말세(末世)에 한 아이가 태어나서 이토록 영락(零落)한 즉 쇠락(衰落)한 가문(家門)을 이어받아 세우는데, 이를 현인(賢人)이라고 한 것이다.
또한 그 현인(賢人)을 안개 속에 숨겨져 있는 표범(豹)으로 비유한 것이다.
이 안개 속에 숨어 있는 표범(霧豹)이란 말은, 옛 시(詩) 속에 등장하는 말로, 남산(南山)에 사는 표범은 그 털의 무늬가 더렵혀질 것을 두려워하여 안개와 비가 내리면 굴 속에 숨는다는 데서, 숨어서 이름을 온전히 하거나 은거(隱居)하여 벼슬을 하지 않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인 것이다.
즉 해월(海月) 선생의 후손(後孫) 중에, 이 쇠락(衰落)한 가문을 이어나갈 한 현자(賢者)가 있는데, 즉 대인(大人)이고 군자(君子)인 이 현자(賢者)가, 안개 속에 숨어서 은거(隱居)하시다가 때라 이르면 세상에 드러나서 모든 것을 아름답게 개혁(改革)한다는 것을 전(傳)하는 것이다.
여러분들은 이 어질 현(賢)자를 잘 기억해두기 바란다.
특히 이 현(賢)자가 예언서(豫言書)에서는, 자주 눈에 뜨이는데 아주 큰 뜻이 들어있는 글자인 것이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밝혀 보겠다.
다음은 최치원(崔致遠) 선생이 후세(後世)에 어진 이(賢者)를 위하여 전(傳)하는 최고운결(崔孤雲訣)을 보도록 하자.
최치원(崔致遠 857~?, 신라 46대 문성왕 19~?) 선생은 신라(新羅) 말기의 학자(學者)이자 문장가(文章家)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字)는 고운(孤雲), 호(號)는 해운(海運), 경주 사량부(沙梁部) 출신인 견일(肩逸)의 아들이다.
신라 48대 경문왕(景文王) 8년인 868년에, 12세의 어린 나이로 중국 당(唐)나라에 유학(遊學)하여 7년만이 874년에 18세의 나이로 예부시랑(禮部侍朗), 배찬(裵瓚)이 주관한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였다.
신라 49대 헌강왕(憲康王) 2년인 876년에, 당(唐)나라 선주(宣州) 표수현위(漂水縣尉)가 되었으며, 그가 문명(文名)을 천하(天下)에 떨치게 된 것은, 879년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키자, 고변이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되어 이를 칠 때, 고변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서기의 책임을 맡으면서부터 였다.
그는 885년 귀국할 때까지 17년 동안 당(唐)나라에 머물러 있었는데, 29세 때 신라에 돌아오자, 헌강왕(憲康王)에 의하여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사(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事)에 임명되었다.
신라(新羅)의 골품제도에 의한 진골 귀족 중심의 독점적인 신분체제(身分體制)의 한계(限界)와 국정(國政)이 문란(紊亂)함을 깨닫고, 외직을 원하여 890년에 대산군(大山郡: 지금의 전라북도 태인), 천령군(天嶺郡: 지금의 경남 함양), 부성군(富城郡: 지금의 충남 서산) 등지의 태수(太守)를 역임하였다.
그러나 신라(新羅) 왕실에 대한 실망(失望)과 좌절감(挫折感)을 느낀 나머지, 40세라는 장년의 나이로 관직(官職)을 버리고 소요자방(逍遙自放)하다가 마침내 은거(隱居)를 결심하였다.
그리고 찾은 곳은 경주의 남산(南山), 강주(剛州: 지금의 義城)의 빙산(氷山), 합천(陜川)의 청량사(淸涼寺), 지리산의 쌍계사(雙磎寺), 합포현(合浦縣: 지금의 昌原)의 별서(別墅), 동래의 해운대 등 여러 곳을 머물렀다고 하는데, 만년(晩年)에는 모형(母兄)인 현준(賢俊) 및 정현사(定玄師)와 도우(道友)를 맺고, 가야산 해인사로 들어가 머물렀다.
해인사(海印寺)에서 언제 세상(世上)을 떠났는지 알 길이 없으나, 신라52대 효공왕(孝恭王) 12년인 908년 말까지는 생존(生存)하였던 것이 확실하다 하였다.
그러나 그 뒤의 행적을 전혀 알 수가 없으며, 산수간(山水間)에 방랑하다가 죽었다고 하며, 신선(神仙)이 되었다는 속설(俗說)도 있는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최치원전(崔致遠傳)에 의하면, 고려왕건(高麗王建)에게 서한(書翰)을 보냈는데, 그 가운데, 계림(鷄林)은 시들어가는 누런 잎이고, 개경(開京)의 곡령(鵠嶺)은 푸른 솔(鷄林黃葉 鵠嶺靑松) 이라는 구절이 들어 있어, 신라(新羅)가 망(亡)하고 고려(高麗)가 새로 일어날 것을 미리 내다보고 있었다고 한다.
최치원 자신은 유학자(儒學者)라고 자처하면서도, 불교(佛敎)에 깊은 관심을 가져 승려(僧侶)들과 교유(交遊)하고 불교(佛敎)적인 글들을 많이 남기고 있다.
그는 또한 유교(儒敎), 불교(佛敎) 이외에도, 도교(道敎)의 노장사상(老莊思想)과 풍수지리(風水地理)에 상당한 이해(理解)를 가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남긴 도교(道敎)에 관한 글이, 특히 계원필경 제15권에 수록된 제사(齊詞)에서 그의 도교(道敎)에 대한 이해(理解)를 가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남긴 도교(道敎)에 관한 글이, 특히 계원필경 제15권에 수록된 제사(齊詞)에서 그의 도교(道敎)에 대한 이해(理解)를 보여 주고 있으며, 또한 그가 친숙(親熟)한 대숭복사비문에 의하면 예언(預言)적인 도참신앙과 결부되어 국토재계획안적인 성격이 담겨 있어, 풍수지리학(風水地理學)에도 상당한 이해(理解)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특히 그의 사회에 대한 인식(認識)이나 역사적(歷史的) 위치(位置)가 선승(禪僧)이나, 풍수지리학(風水地理學)의 대가(大家)였던 도선(道詵)과 비슷한 점이 주목(注目)할 만하다.
경고(警告)의 최치원(崔致遠) 선생의 최고운결(崔孤雲訣)을 보면,
『唐帝儼 光啓元年 今上 晸十一載 乙巳嘉晦 崔致遠 敎文人 各刊 吾師問 於金經鐵表 裡望來賢 恕余之 暗藏 於光山北 獲者
必有德』
이 말은 당(唐)나라 황제(皇帝) 이엄(李嚴), 광계원년(光啓元年: 서기 885년)인 지금 우리 임금(憲康王) 11년 을사(乙巳)년의 아름다운 그믐날 밤에, 최치원(崔致遠)은 문인(文人)을 가르치며 책을 펴냈는데, 나의 스승이 그 금경철표(金經鐵表)에 대하여 물었다.
그 책 속에는 미래(未來)의 현인(賢人)을 멀리 내다보며 기다리는 내용(內容)의 책이니 용서하십시오(스승님).
나는 그 책을 광산(光山: 지금의 광주)의 북쪽에 숨겨 두었는데, 그 책을 손에 넣는 자는, 틀림없이 덕이 있는 사람입니다(必有德) 라고 하였다.
이 최고운결(崔孤雲訣)은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이 을사(乙巳, 885, 憲康王11)년 여름 중국 장안(長安)에서 돌아와, 홍류동(紅流洞)에서 학성(鶴城) 선생을 만나서, 학성(鶴城) 선생이 묻고 최치원(崔致遠) 선생이 답하는 형식(形式)으로 되어있다.
우리 나라의 미래(未來)에 나타날 일들을 아주 자세히 밝힌 예언서(豫言書)인데, 그가 책으로 간행(刊行)하여서, 지금의 광주(光州) 북쪽에 그 책을 숨겨 두었다고 한 것이다.
그가 이 책을 만든 때는 당(唐)나라 황제 이엄(李嚴), 희종(僖宗, 887~900) 연호가 광계(光啓) 그 원년(元年) 즉 우리 나라 신라 제49대 임금 헌강왕(憲康王: 신라 49대 왕 姓은 金, 諱는 晸, 景文王의 아들. 재위 중에 處容舞가 크게 유행하였음) 11년(875~886)에 책을 간행(刊行)하여 숨겨 두었는데, 그의 스승이 책에 대하여 묻자, 용서하라고 하며 보여주지 않고 그 책의 내용(內容)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고 있다.
미래(未來)의 어진 한 사람(賢)을 멀리 사모(思慕)하여 기다리는 내용(內容)이다.
그 책을 손에 넣는 자는 틀림없이 덕(德)이 있는 사람이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시(詩)를 남겨 놓았다.
최치원(崔致遠) 선생의 최고운결(崔孤雲訣)을 보면,
『詩曰 刊得歸余墳 奉命惟我賢 時則光啓初 顯於道光元 傳於亟木國 開藏是一人 白骨千載後 移藏慷慨岸』
책을 펴냈으니, 틀림없이 나의 책이 뜻하는 대로 따르십시오. 천명(天命)을 받아 들이십시오.
아 - 오직 한 분인 나의 현(賢)자여. 지금의 때는 광계원년(光啓元年)이지만 나의 책은 도(道)이며 빛의 근원인 원(光元)에 의해서 밝혀지는구나. 전해지기는 목국(木國)이지만 그 숨겨진 글을, 열어 밝히는 자는 일(一: 太乙)인 사람(人)이다.
내가 죽어 백골(白骨)이 된 후, 천년(千年)이 지나면 이 숨겨 놓았던 책은 감개무량하게도, 바닷가 언덕(岸)에 있는 사람에게 전(傳)하여지게 되어 있노라.
최치원(崔致遠) 선생의 글과 시(詩) 속에는, 어느 한 사람을 사모(思慕)하며 기다리는 내용(內容)을 되어 있는 것이다.
최치원(崔致遠) 선생은 자신이 지은 책의 내용(內容)을 깨달아 파악하고 그대로 따라 달라고 하는 것이다.
즉 그 현자(賢)에게, 천명(天命)을 받아들이라고(奉命)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책을 숨겨 둔 시기가 광계(光啓) 초인 원년(元年)이지만,
그 책의 내용(內容)을 세상(世上)에 밝히는 사람은 도(道)이며, 빛의 근원(根源)이라고 하였다.
그가 바로 빛의 근원이 되는 분이라고, 그 숨겨진 것을 풀어 세상에 밝히는 사람은 오직 일(一)인 사람 즉 태을(太乙)이라고 못박아 말을 하는 것이다.
최치원(崔致遠) 선생의 사후(死後) 천년(千年)이 지난 뒤에, 감격스럽게도 틀림없이 바닷가 언덕에 사는 사람에게 전하여 질 것이라고 한 것이다.
정말로 대단한 예언(預言)인 것이다.
최치원(崔致遠) 선생 자신이 책을 숨겨두었지만, 그것이 언제 누구에게 전(傳)해지고, 누가 그것을 깨달아서 세상에 밝혀내며, 그러한 일을 할 사람이 일(一)인 사람 즉 태을(太乙)이며, 어디에 있는 누구라고 정확(正確)하게 집어서 말하는 것이다.
조금도 빈틈없이 전(傳)하는 말이나, 혹시라도 마음이 흔들릴까 염려(念慮)하여, 그대로 천명(天命)을 받아들이고 따라야만 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 때 뒤쪽에 있던 사람이 질문하였다.
“그 어진 사람이 도(道)이고, 광원(光元)이라고 하였는데, 좀더 자세히 설명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자
명산 선생은 다시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최치원(崔致遠) 선생의 최고운결(崔孤雲訣) 속에
『必符受 日月之瑞 有受命 土之符 紫氣霱華 像 月出 淸精 必生於寒門』
말세(末世)에 하늘이 내리는 부(符)인 천명(天命)을 받는 증표로, 일월(日月)의 서기(瑞氣)가 있는데, 그 천명(天命)을 받는 자가 바로 토(土)인데, 그 부명(符命)으로 그에게 자색 기운(自己)의 상서(祥瑞)로운 기운이 빛나고, 그의 모습을 보면 마치 떠오르는 달(月出)과 같고, 또한 맑고 깨끗한 정(精: 정도령)인 그는, 틀림없이 가난하고 영락(零落)한 가문(家門)에서 태어나게 된다고 하였다.
『天下之基 無王之際 建一統則 土行方 事類 劉邦』
그러나 그는 천하(天下)의 기틀을 잡는데, 어느 왕(王)과 교제(交際)함이 없이 천하(天下)를 통일하게 되는 토(土)인데, 그 토(土)의 행방(行方)은 마치 예전의 한(漢)나라의 기틀을 세운 유방(劉邦)의 선례(先例)와 비슷하다고 하였다.
즉 미래(未來)에 태어나는 정도령은, 일월(日月)의 상서(祥瑞)로움을 띠게 되고, 그것이 천명을 받는 부명(符命)으로 자색 기운(紫氣)이 빛나게 되고, 또한 그 모습이 달이 떠오르는 모습(月出)으로 맑고 깨끗한 정(精: 정도령)이라고 하였으며, 그 정(精: 정도령)에 대해서는 뒤에 자세히 설명하겠다.
그는 틀림없이 가난하고 영락(零落)한 가문(家門)에서 태어나서 천하(天下)의 기틀을 잡고, 어느 왕(王)의 도움도 없이 천하(天下)를 통일(統一)하는데, 한(漢)나라 유방(劉邦)의 선례(先例)와 비슷하다고 한 것이다.
그를 또한 토(土)라고 최치원(崔致遠) 선생은 말하는 것이다." 라고 하자 한 사람이 다시 질문하였다.
"그 최치원 선생이 토(土)라고 하신 말씀을 좀 더 정확히 밝힐 수가 없을까요?" 라고 하자
명산 선생은 다시 설명을 시작하였다.
최치원(崔致遠) 선생의 최고운결(崔孤雲訣) Ⓟ1을 보면,
『大唐 昇平久云云 自此天運 必符 中衰 有百年 陸沈之歎 丁未方色之姓出 後復見 天日 火分六百 木分七百 金分西百 以下大運
否塞 應至 兩白 受命之帝出 我東綿祚』
당(唐)나라가 태평(太平)한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 필히 앞을 내다보니 점점 쇠하여져서 100년이 지나면 몹시 어지러워지며 나라가 적에게 멸망당하는 탄식(陸沈之歎)이 있게 된다.
미방(未方) 즉 곤(坤)방 색(色)의 성(姓)을 가진 사람이 나타나면, 다시 하늘의 태양(天日) 즉 천자(天子)를 보게 되는데, 화(火)를 나누면 6백이고, 목(木)을 나누면 7백이고, 금(金)을 나누면 4백인데, 이후 대운(大運)이 비색(否塞)운이 될 때, 즉 꽉 막힐 때 이 때에 양백(兩白)이 천명을 받드는데, 이 때 천일(天日)인 하나님의 아들이 동방(東方)인 우리나라에 나타나서, 그 천자의 자리를 잇게 되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또한 미(未) 방위를 팔괘로 보면, 곤(坤)방인데 이 곤(坤)방의 색(色)에 해당하는 성(姓)을 가진 사람이 나타나면, 그가 바로 천자(天子) 즉 하늘의 태양(天日)이며, 그가 바로 양백성인(兩白聖人)이라고 하였다.
그가 우리나라에 태어나서 천자(天子)의 자리를 이어받게 된다고 밝히는 것이다.
미(未) 방위란, 팔괘(八卦)로는 곤(坤) 방위고, 오행(五行)으로는 토(土)이고, 색(色)으로는 노란색(黃)이다.
이 노란색을 의미하는 성(姓)을 가진 사람이 우리 나라에 태어나는 양백성인(兩白聖人)이며, 하늘의 태양(天日)이라 하였는데, 이 노란색을 의미하는 사람의 성(姓)이 무엇인가?" 라고 묻자
사람들 사이사이에서 황(黃)씨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이미 다들 알고들 있었던 것 같았다.
"바로 그 토(土)가 황(黃)씨를 의미하는 은어(隱語) 또는 매명(埋名)인 것이나, 밝히기 곤란하여 그냥 토(土)라고 최치원 (崔致遠)선생이 전했던 것이다.
그 황(黃)이란 말이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人間)으로 태어나면서 가지게 될 성(姓)인 것이다.
이것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즉 정미방색지성(丁未方色之姓)이란, 바로 인간(人間)의 성(姓)인 황(黃)씨를 말하는 것이다. (해월유록p493~519말씀)
만사이황발(萬事已黃髮) 잔생수백구(殘生隨白鷗)
증산 상제 친필 후사자(後嗣子) 병풍유서(屛風遺書) 부분